월야환담/글

[건+린+현] 완결 이후

NO. 2015. 9. 14. 19:52

신광월 완결 이후



그리고 달이 떨어지고, 모든 것은 어둠에 휩싸였다.


모두가 사라진 공간을 남겨진 서린은 조용히 걸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지나치는 모든 것들이 녹거나 바스라 졌으나 서린은 멈추지 않았다. 아인 소프 오울이 발동하고 모두가 떠난 세계. 여기 남은 것들은 어차피 껍데기에 불과했다.
화려한 대리석 바닥이 무너지고 아름다운 고급테이블이 녹아내린다. 팔은 아쉽지만 다리가 남아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큼 비참한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못할 것을 서린은 알고 있다. 이제 새로운 세계가 완성되고 인과율이 조정되고 나면 서린이 남아있는 이 세계는 마치 봄 햇살에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져버릴 것이다.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세계의 끄트머리에서 서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뒤로 돌려쓰고 있던 야구모자가 떨어졌지만 서린은 그것을 주울 수가 없었다. 어쩐다. 받은 건데. 그가 가벼운 낭패감을 느끼며 고민하고 있는 사이 하얀 손이 다가와 떨어진 모자를 서린에게 씌웠다.

“아 고맙.. 형?”

서린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새로운 세계로 이동했을 터인 그의 친형이 눈앞에 있다. 그 뿐인가. 뒤에는 세건이 삐딱하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이동이 시작되지 않은 건가? 아니다. 테트라 아낙스의 영지는 금세 진실을 찾아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어째서…”
“…서린”
“어?”
“일단 좀 맞자.”
“어어?”

서린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빠르게 지면을 박찬 서현이 서린에게 달려들었다. 서현은 팔뚝과 흉근 사이에 서린의 목을 끼운 헤드락 자세로 팔을 조였다. 단단한 근육에 눌려 목이 조이고 숨이 막힌다. 서린은 하릴없이 몸을 버둥거렸다. 그가 충분히 괴로울 지경이 되자 뒤에 서 있던 세건이 서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고 서현은 순순히 팔을 풀었다.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서린이 소리쳤다.

“왜 여기 온 거야? 새로운 세계는? 설마 아인 소프 오울이 어긋난 거야?”

수천 년의 지식과 거대한 정보능력을 가진 서린에게도 이미 발동되고 있는 아인 소프 오울을 새로 짜 넣는 것은 막대한 부담이었다. 실제로 그와 함께 했던 세 마리의 뱀과 오라클 시스템은 진즉에 녹아서 사라지지 않았던가? 서린 자신도 소멸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앞으로 절대자의 의지가 가해지지 않은 세계에서 모든 존재들이 오직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리라고!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이곳으로 되돌아왔단 말인가?

“아니. 아인 소프 오울은 성공했다.”
“아주 끝장나더라. 쟤가 대낮에 헬멧을 벗고 나다녀도 아무도 안 잡더라니까.”
“저놈은 웬 미친 스토커 놈이 전쟁 내는 걸 막으러 다녔어.”
“야 그거는.. 거기다 앙리 유이가 징징거리면서 깽판을 치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놈 족쳐서 여기 왔다.”
“아…….”

서린은 엄습하는 두통에 머리를 짚..으려다 그만뒀다. 아참 팔이 없지. 허전한 몸통을 휘적거리자 두 형이 이쪽을 보는 눈빛이 묘해졌다. 이건 좀 잘못했군. 서린은 허리를 도로 똑바로 세웠다. 다시 말하지만 다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형들 과거는 아낙스와 릴리쓰의 존재를 지우는 과정에서 겸사겸사 조정된 거고.. 앙리 유이랑 한니발은 나름 괜찮지 않았어? 그쪽은 꽤 신경 쓴 건데.”

안타고니스트는 대적하는 자. 프로타고니스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세건과 서현은 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물론 앙리 유이와 한니발의 소망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나.. 나름 계속 살아갈 형들을 위해서 신경 쓴 세팅(?)인데 이런 취급을 받으니 어쩐지 억울하다. 마치 애써 끓인 차를 눈앞에서 하수구에 버리는 걸 본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서린의 열성적인 태도에도 형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뭐.. 쓸데는 있었지 나름.”
“그래. 앙리 유이라던가.”
“마법의 힘이 강해져서 그런지 스스로 아인 소프 오울까지 발동할 수 있는 수준이더라고. 덕분에 잘 타고 왔다.”

사람, 아니 흡혈귀를 무슨 대중교통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불한 비용은 결코 버스비처럼 싸지 않았으리라. 서린은 순식간에 둘의 몸 상태를 파악했다. 그들이 받은 세계는 서린과 테트라 아낙스가 없는 세계. 과거 고든으로부터 서린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받은 부담이 지금의 서현에게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서현의 몸에는 바뀌기 전과 거의 동일한 육적, 심적 고갈이 존재했다. 평화로운 세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탐랑 또한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져서 세건의 뒤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바보들. 서린은 속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뭘 위해 이렇게까지..”
“그게 네가 할 말이냐?”
“맞아.”

세건의 말에 서현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아까부터 묘하게 죽이 잘 맞는다. 그동안 같이 다니는 사이에 서로 많이 익숙해진 거 같은데 2대 1로 당하는 입장에선 지금 이 상황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살라며? 그래서 그렇게 한 건데?”
“이게 내 믿음이고 소망이라니까.”
“...윽.”

무심한 세건의 말투에 서린의 얼굴이 벌게졌다. 세건이 한 말은 일찍이 서린이 아인 소프 오울을 재설정하면서 그들에게 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남겨질 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낄지언정 그 말만은 진심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써먹다니 반칙 아닌가? 자기가 했던 말까지 꺼내면서 저렇게 나오는데 서린이라고 뭐라고 받아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입을 다문 서린을 본 세건이 피식 웃었다. 어째 평소와는 입장이 정반대다. 가만히 뒤에서 둘을 보고 있던 서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네게 미안하다거나.. 부채감 때문에 온 건 아니야.”
“복수나 증오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

세건이 말을 받았다.

“물론 앙리 유이가 짜증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지만.”
“동감이다.”

둘은 씩 웃으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린은 어쩐지 가슴이 술렁임을 느꼈다. 아득한 예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예지 속의 그들과 눈앞에 있는 그들이 동시에 이야기한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로 있기 위해서.”
“널 데리러 온 거다 서린.”

온전한 자신으로써 선택하며 살아가기 위해 몸도 마음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이들이 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적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것. 그것은 그 누구보다 서린이 바라던 것이었다. 해서 서린은 선택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소망하며.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해낸 것이다.
따뜻한 눈물이 뺨을 적셨다. 순수한 사랑의 증거. 기적이 일어난다. 눈물을 흘리는 서린을 세건은 이번에는 똑바로 쳐다보며 손을 뻗었다. 서린은 웃으면서 그 손을 받았고 그런 둘을 함께 끌어안은 서현이 다시 마법을 발동했다. 어두웠던 사위가 마치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환해지고, 이제 남겨진 폐허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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