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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프렌]머나먼 옛날의 용사님

NO. 2015. 9. 15. 20:53




“어이, 일어나.”

그리 높지 않은 위쪽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기억에 있는, 그러나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기억 속의 그것은 보다 더 묵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끄응 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움직여 푹신한 베개에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목소리에 한층 짜증이 섞였다. <일어나라니까.>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오고, 뒤통수에 찌릿한 충격이 닥쳤다. 이번에는 유리도 짜증이 나서,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주위를 살피면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녘이었다. 잠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이다.


“나가서 놀다 오라고 했잖아.”

“이미 하루를 꼬박 샜거든?”


<으….>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면 온 몸의 관절이라는 관절에서 뚜둑, 뚜둑 하고 꺾이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깨워진 탓인지 아니면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뒷목이 뻣뻣하게 아파왔다. 온전히 일어나 앉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상체만 움직여 옆으로 돌아누운 후 턱을 괴고 올려다보면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진짜 25살의 나 맞아?”


얼굴 가득 한심해 죽겠어, 라는 표정을 하고서.



***



이야기는 만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다. 급한 의뢰들은 어느 정도 끝을 냈고 간만에 한가해진 오후 유리는 제도로 돌아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런 유리의 눈에도 제도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 곳곳에서 마핵을 대체하기 위한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선정되어 이곳 자피어스에서 시범 운행되었고 아직까지도 불편한 점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마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꽤 적응한 듯 했다. 황제의 배려인지 프렌의 출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랫마을에서도 이곳저곳 무너지고 허술한 곳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거리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며 기분 좋은 활기가 넘쳐났다.

유리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한참 느긋한 기분으로 보수되기 시작한 아랫마을의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좁은 골목 틈에서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로 막 쌓아놓은 참인 벽돌더미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던 ‘그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유리는 한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

‘그것’은 어릴 적의 유리, 적어도 유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던 유리는 곧 자각은 없었지만 실은 지금의 자신은 헛것을 볼 정도로 매우 피곤한 상태이며 재빨리 여관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 헛것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 또한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이! 거기 너!!”


뒤따라오는 목소리도 발소리도 모두 환청이다. 유리는 발걸음을 재게 했다. 걷는 모습은 산보지만 속도는 거의 전력질주인 꼴이다. 그런 유리의 반응에 약이 올랐는지 따라오는 발소리가 좀 더 빨라졌다. 아무리 체격 차가 있다고 해도 속도를 무시한다면 어디까지나 ‘걷고 있는’ 유리와 아예 전력으로 따라붙고 있는 ‘그것’의 거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칫,> 흘끗 뒤를 돌아 차이를 확인한 유리는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힐 것이라 예상하고 가까운 골목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한 숨 돌리려는 찰라,


“너 왜 도망쳐?!”

“?!”


어릴 적부터 아랫마을에서 숨바꼭질하며 자라난 몸이다. 특히 말썽을 저지르고 쏙 숨어버리기 일쑤였던 유리는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증축들로 꼬여버린 길과 골목들, 공간배분이 잘 못 되어 생긴 좁고 몸을 숨기기 쉬운 틈새들, 그 틈새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마을의 이곳저곳으로 빠르게 가로지르기 쉬운 샛길들에 대해서라면 아랫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프렌조차도 유리가 마음먹고 숨겠다고 작정하면 허탕을 치기 일 수였던 것이다. 진짜로 당황해서 말도 잇지 못하는 유리의 얼굴을 한순간 빤히 보던 ‘그것’은 곧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나.....?”




“그래서, 너‘도‘ 유리 로웰이란 말이지?”

“그래.”

“14살이고?”

“15살. ....이틀 뒤면.”

“아, 그러세요….”


<내가 지금 25살이니까, 10년 정도 전인가….> 유리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어릴 적의 자신이며, 어떤 이유인지 갑자기 ‘이 시간’으로 와버린 것 같다. 처음에는 영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이를 보던 유리도 녀석이 행크스 영감의 담뱃대를 숨겨 놓았던 일이며 프렌이 고양이 때문에 질질 짠 일 등을 줄줄 읊어대자 마지못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만 알고 있던 거리의 샛길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녀석이 어릴 적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설명이 된다. 그렇다 해도, 과거의 자신이라니. 유리는 묘한 기분이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난 모험으로 이미 자신이 전보다 훨씬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어설픈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 어린 ‘자신’의 말로는, 갑자기 눈앞에 빛이 확 하고 펼쳐지더니 여기에 와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는 것과 조금 다른 거리의 모습에 두리번거리고 있자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고. 어쩔 수 없이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어른’ 유리와 마주친 것이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치다니, 왠지 기분이 나쁘잖아.”

“네이, 네이.”


볼이 불퉁해져서 대꾸하는 아이의 모습은 단순한 투덜거림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 말 속에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으로, 필사적이었던 감정의 찌끄러기가 남아있는 것을 왠지 느낌으로 알았다. 어렸을 적의 자신은 이런 식으로 곧잘 감정을 감추곤 했던 것이다. 이런 걸 자각(自覺)이라고 하던가, 미묘하게 틀린 생각을 하며 대충 대답하면 아이는 그런 유리를 묘한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어른인 나, 기분 나쁜데.”




***




결국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유리가 두 명이 모여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서 일단 유리는 이런 일에 있어 제일 믿을 구석인 리타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다. 누구냐고 묻는 유리(작은 쪽)의 말에 유리는 대충 읊었다. <아스피오의 마도사야. 이름은 리타 몰디오.> 그 뒤로 뭔가 말이 더 이어질 거라 기대했던 모양인지 아이는 한참동안을 유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물론 유리(큰 쪽)는 그걸로 대화를 끝낼 참이었고 몇 걸음을 더 걸어간 후에야 아이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왜 그래?”

“…별로.”


겉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뚱한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유리에게는 아이의 머릿속에 온통 채워진 물음표들이 보이는 듯 했다. 모르는 척 정면을 보고 걷고 있으면 자신의 옆을 따라 걷는 어린 유리가 자신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인다. 그 행동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 씩 웃으면 아이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렸다.


“…뭐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 한마디에도 발끈한 아이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목까지 올라온 불만을 입 속으로 삼킨다. 유리는 다시 픽 웃었다. 다 자란 후에는 어릴 적의 자신에 대해 떠올려본 적도 별로 없고 더군다나 자기 자신과 대화 비슷한 것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실제로 눈앞에 어린 자신이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어린 외양 따위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르시스트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으면 무심결에 자꾸 놀리게 된다. 그런 유리가 영 못마땅한지 따라붙는 유리(작은 쪽)의 시선에 불만이 가득 섞여들었다.

우편국에 가서 대강의 사정을 담아 아스피오로 전서구를 띄우고 난 후 유리는 아직까지도 조금 뚱해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향후 거처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전에 묵고 있었던 하숙집에서는 이미 방을 비운다는 통보와 함께 남아있던 짐 몇 가지를 보내온 지 오래, 별의 포식 이후에는 길드 일이다 뭐다 해서 제도에 오래 머문 적도 없고 또 들른다 해도 프렌의 방이나 가까운 여관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훌쩍 떠나곤 했던 터다. 그렇다고 여관에 남겨 두자니 오늘 밤 외박 계획이 있는 유리는 그것이 영 껄끄러웠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눈치 챘는지 유리(작은 쪽)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난 마을을 둘러보고 올게.”

“엉?”

“어차피 그 리타라는 사람한테서 연락 오려면 좀 걸리잖아? 10년 동안 아랫마을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니까 그동안 좀 보고 오겠어.”

“뭐… 그래라.”


말을 마치자마자 별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자신의 감정은 죽어라 숨기는 주제에 눈치는 빨라 남의 기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도움이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어렸던 자신 그대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문득 유리는 막상 자신이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새삼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속을 긁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착잡해졌다. 그리고 상념의 끝에 문득 언제나 그 비슷한 이유로 화를 내던, 그리고 마침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던 애인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으나 곧 그 녀석도 그 비슷한 정도로 자신의 속을 긁어댔으니 따지자면 또이또이지, 하고 남은 자존심의 마지노선을 사수한 유리는 그대로 자신도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그랬던 것이 몇 시간 전, 어리긴 하나 쭉 아랫마을에서 자란 자신이니 별 문제 없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니 행여 해코지당할 염려도 없겠다 싶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신경을 끈 유리는 제도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함께 지낸 시간은 길다 하나 정식으로 마음 통한 기간을 생각하면 아직 깨가 쏟아지는 애인 사이여서 사랑스러운 얼굴은 봐도 봐도 늘 모자랐기 때문에 밤새 물고 빨고 엎치락뒤치락하고 나니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저도 모르게 까무룩 빠져들었던 단잠에서 깨워져 영 못마땅했던 유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이 녀석에게 프렌의 방을 알려줬던가, 하고 고민했다. 그것을 묻자 <왠지 네가 있는 곳은 알 수 있었어.>라는 어딘가 멍뎅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그나저나 왠 성? 귀족의 정부라도 된 거야?”


<설마 몸으로 벌어먹거나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쓱 훑고서 이어지는 말이 빈정거림치곤 묘하게 진짜로 걱정하고 있는 듯 한 말투라 유리는 그런 어린 자신을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15살 무렵부터는 유혹도 꽤 들어와서 생전 그런 쪽의 욕구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이 나이 먹고 꽃놀이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그랬던 일이 왜 이렇게 되었던가, 고민해봤자 온전한 제 사람과 따먹는 별은 어찌 단지 밤을 꼬박 새워 녹여먹어도 부족한 것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유리는 한숨만을 대신 내쉬었다.


“응… 유리?”

“내가 깨웠냐?”

“아니... 일어나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잔뜩 졸음에 취한 눈을 부비며 일어나 옷장 속의 새 옷가지를 꺼내 입는 애인의 뼈가 도드라지는 하얀 등을 잠시 만족스런 심정이 되어 응시하던 유리는 아까부터 아이가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마치 뭔가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저항이라도 하듯 벽에 딱 붙어 뒤로 벌린 양 팔로 창틀을 꽉 쥐고 있는 어린 자신을 발견하고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왜 저래??>


“유리? 거기 뭔가 있어?”

“…아니, 별로.”

“?”


아무래도 프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아쉬움인지 안심인지 입맛을 쩝쩝 다신 유리는 자신을 따라 시선을 둔 프렌을 향해 웃어주고는 누운 자세에서 손을 흔들며 애인을 배웅했다. 뭔가 이상한 유리의 태도에 프렌은 아직도 조금 의아한 눈치였으나 저런 태도라면 물어도 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곧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잠시 침묵이 맴돌다가 소란하게 깨졌다.


“너 미쳤어??!”

“뭐야, 갑자기.”

“저, 저건 프렌이잖아!!”


<역시, 몇 살이 되어도 알아보는구만.> 나름 건실한 자신의 감식안에 자부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큰 쪽)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는지 유리(작은 쪽)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너 그, 저 녀석이랑….>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걸려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문장을 완성한 아이의 반응에 유리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아직 하기 전인가.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하… 하다니.. 어, 어떻게 저 뭣도 모르는 녀석이랑…!”

“일일이 시끄럽네. 이쪽은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나니 그 뭣도 모르는 놈 계략으로 여장하고 무대에 올랐던 일이며, 죽은 줄 알았던 녀석 원수 갚는다고 새빠지게 고생한 일 등 여러모로 험난했던 여정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 유리(큰 쪽)는 <어차피 얼마 안가서 할 테니까 그렇게 요란 떨지 마>라는 중대한 사실을 누설해 자꾸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유리(작은 쪽)의 입을 틀어막았다. 혼란으로 질리다 못해 벌겋게 달아올라 입을 다문 어린 자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때 골머리 엄청 썩었었지, 나….“


일생을 걸쳐 등 줄기처럼 자라난 감정의 싹이 가슴께를 간질이던 시기였다. 언제 묻어두었는지 알 수 없어 모른척하던 연정이 하루가 다르게 뭉텅뭉텅 자라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 몇 번이고 벼락이 쳤다. 들킬 새라 덮고, 덮어도 덮은 그 아래를 뚫고 올라오는 눈 시리도록 찬란하고 원망스러운 그 끄트머리를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프렌과 몸을 섞었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단지 마음 한 구석에 감추고 묻고 살아야 하리라 여겼던 감정이, 간신히 이때까지 오는 데 오래도 걸렸다 싶어 아련한 기분이 든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금 웃었다. 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프렌의 공이다. 항상 도망칠 궁리만 했던 자신에도, 날선 말들과 냉담했던 태도에도 질리지 않고 온 몸으로 부딪쳐 왔던 것이다. 새삼 그런 애인이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영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아직도 망연자실해 있는 어린 자신에게 유리는 나직하게 덧 붙였다.


“...그 놈 조심해 임마. 만만한 놈 아냐….”



***



“바보라고 하지 마!”

“흥! 바보가 바보스럽게 바보바보하면서 바보짓하고 있는 바보 같은 광경을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해!! 몇 번이고 말해준다 이 바-보!”

“이이익...!”


<...뭐야, 이 바보 싸움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마물과 거기에 매달린 배에 감탄한 것도 잠시, 선실로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여러 가지로 굉장한 광경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껏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뒤로 유일하게 유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챈 라피드가 이쪽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앉은 자세에서 뒷다리로 귀 뒤쪽을 탈탈 긁었다. 리타가 까탈스럽게 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그래도 꽤 반격할 수 있게 된 카롤이 의외로 저 폭언을 받아치지 못하고 그대로 들어주고 있다. 물론 반격하지 않는 상대는 좀 봐준다, 따위는 먼 얘기인 리타는 그 성격의 괴팍함과 함께 자랑거리인 입담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이런> 피식 웃으며 거의 울상이 된 길드의 수령을 돕기 위해 걸음을 떼면 어린 자신은 또 묘한 시선을 유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보모야? 바쁘게 사네.”

“...뭐 그렇지.”

“대체 뭘 하고 사는 거야, 미래의 나는.. 저런 어린애들이랑.”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지만?”

“무슨 소리야,”


적당히 대답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리(큰 쪽)는 이어진 유리(작은 쪽)의 말에 덜컥 멈춰 섰다. <안제 누나가 그 때 아일 가졌다면 저 정도 나이일거라고.> 그 이름의 익숙함에 설마, 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아이는 어이없게도 조금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

“안젤라, 아랫마을 술집에서 서빙 하던 14살 연상! 뭐야, 너 설마 잊어버린 거야?”


<첫사랑이잖아!> 이번에야말로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 가득 의심을 채운-미래의 나고 나발이고 실은 이거 다 공갈 아냐?―아이를 보며 유리는, 잠시 자신의 첫사랑은 벌써 예전에 안젤라가 아님이 밝혀졌다는 사실과 어린 자신이 상당한 산술적 비약을 하고 있다는(혹은 리타, 카롤의 나이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 중 어느 것을 지적해줘야 할 지 고민했다. 덧붙이자면 안젤라가 처음 잔 날 임신했다손 치더라도 지금 시점에서 아이는 끽해야 10살 정도일 것이며, 그녀가 자신의 진짜 첫사랑과 닮은 것은 파란 눈동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 태풍이 불어치는 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자신의 첫사랑이 실은 상냥했던 D컵의 웨이트리스가 아니라 같은 남자, 그것도 현 시점 기준 20년 지기 불알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또 어떨까 싶어 유리(큰 쪽)는 잠시 망설였다. 이건 나르시시즘이나 자기방어적인 의미 이전에 남자로서의 재기 가능성이라고 할까, 여튼 좀 예민한 문제였다. 어쨌든 이런 유리(큰 쪽)의 갈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끝났다.


“유리, 그 꼬맹인 또 뭐야?”

“유리, 혼자서 뭘 그렇게 말하고 있어?”


눈앞의 광경에 싸움도 잊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 <뭐야, 넌 저 꼬마가 안보여?> <저긴 유리밖에 없잖아!> 다시 동시에 말을 꺼낸 두 사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고 시선을 받은 유리는 어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작은 쪽)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라.“

“뭐, 뭐야... 혹시 유령?!”


그 말에 반응이 가장 빨랐던 리타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걸음 물러섰다. 그런 리타를 보고, 다시 유리와 유리가 보고 있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번갈아 본 카롤이 어리둥절해서 중얼거렸다.

“뭐지 이 상황... 잘 모르겠어.”


***



“그러니까, 지금 유리 옆에 어린 유리가 있단 말이지?”

“엉.”

“유리와 리타는 걜 볼 수 있고?”

“나한텐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데.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뭔가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네….> 둘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유리는 아직까지도 탁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붙듯이 앉아있는 리타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작은 쪽의 유리가 자신에게는 보이고 카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이쪽으로 눈을 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리타에게 설명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카롤이 말을 이었다.


“그치만 어린 유리라면 유령은 아니잖아? 유리는 살아있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쪽의 해석도 있단 말이야![각주:1]


그 말에 소리를 빽 지른 리타가 반사적으로 이쪽을 쳐다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 대고 있던 어린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아이가, 실은 조금 상처받았다는 것을 눈치 챈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 대로라면 리타, 지금 이 상황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긴 하다는 거야?”

“…어느 정도는.. 원인 같은 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럼 부탁해, 리타. 지금 믿을 만한 건 너 뿐이다.”

“에...”


그 에누리 없는 부탁의 말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의 유리는 이런 식으로 남에게 의지하거나 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가슴을 울려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카롤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고 과연 리타도 이 말만은 외면하지 못했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리타는 발갛게 붉어진 얼굴로 <그, 그럼 일단 저 녀석이 맨 처음 온 장소를 조사하게 해줘. 거기 가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등을 중얼중얼 말했고, 그런 리타의 시선이 이번에는 똑바로 어린 유리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큰 쪽의 유리가 조금 웃었다.


***



중간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러 갔던 쥬디스와 레이븐, 성을 들렀던 에스텔이 합류해서 또 한바탕 소요를 치르고 나니 결국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얻은 소득이란 어린 유리의 호칭뿐이었다. 어쨌든 둘 다 유리인 셈이니 부르기 불편할 것 같다는 에스텔의 역시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제안으로 벌어진 토론은 사실 그날의 시간을 낭비한 가장 큰 범인이었고 덤으로 몇몇 인물에게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을 남겼다. 그 인물 중 하나인 유리(작은 쪽)는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느낌을 곱씹으며 뚱해 있었다.

그런 유리(작은 쪽)를 영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서 유리(큰 쪽)는 머리 뒤로 팔짱을 껴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꼬맹이, 유-쨩, 고스트(유령) 유리까지는 그럭저럭 얌전히 듣고 있었던 유리(작은 쪽)도 유리 Jr.에 이르러서는 무심결에 표정을 바꿨다. 마침 쥬디스가 <어머, 시기적으로 보면 저 쪽(어린 유리)이 먼저일 텐데?> 라며 살짝 말려주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물론 큰 쪽의 유리로써도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입장에서 저렇게 큰 주니어가 생기는 것은 사양하고 싶긴 했다. 결국 어린 유리의 호칭은 유-쨩으로 대강 통일되었지만 두 유리에게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유리의 경우에는 특히 연하의 동료들에게서- 듣는 그 호칭은 유리 Jr.보다 훨씬 더 낯간지러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쥬디스가 준 것이 도움이었는지 어땠는지는 애매해져버렸다. 이러저러한 대화의 흐름에 말려 ‘유-쨩’을 막지 못했던 유리는 앞으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동료들에게 유-쨩을 데려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호칭 말고도, 동료들이 그들에게 준 것은 또 있었다. 여러 가지로 지친 몸과 마음과 또 하나의 자신을 동반해서 성 근처의 여관으로 돌아가면, 방 안에는 영광스럽게도 현 제국 기사단장이 친히 왕림해 있었다.


“소식 들었어, 유리. 어린 유리가 보이게 됐다면서?”


이 아저씨가 한창 얘기 중에 급히 올려야 할 보고가 생각났느니 어쩌니 하더니 이런 거였나, 아까 느꼈던 사소한 궁금증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프렌은 유-쨩과 구면이었다.


“아침에도 있었어. 넌 못 본 것 같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구나. 몇 살 정도야?”

“14살이라고 하더라.”


<14살의 유리라, 보고 싶네~> 따위를 말하며 방글방글 웃는 애인은 뭐든지 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유리의 입장에서 유-쨩이 프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행스러웠다. 얼핏 생각하면 어릴 적부터 다 보고 자랐으니 지금에 와서 저런 모습을 본대도 별 문제 없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지금도 프렌을 앞에 두고 안절부절 못하는-그래봤자 겉은 뚱한 무표정이지만-저 어설프고 풋풋한 자신을 지금의 저 프렌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은 유리에게 하기도 버거운 상상이다. 어렸을 때야 프렌이 워낙 둔해서 쉽게 숨길 수 있었다지만 이미 볼장 못볼장 다 봐서 유리 한정으로 어느 정도 눈치가 깨이기 시작한 프렌에게 저 녀석을 보였다간 저 때부터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를 들켜버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유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프렌은 여관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제 저녁에 체크인 한 이후로 들어온 적이 없는데다 유리가 갖고 있는 짐이란 것도 단출해서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 안의 모습에 약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과 유리 외에 다른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의 일로 이미 자신에게는 어린 유리가 완전히 안 보인다는 것을 이해한 프렌이었지만 그래도 남들은 다 볼 수 있는(그렇지는 않다) 연인의 어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꽤 서운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유리, 지금 작은 유리 이곳에 있어?”

“엉? 그래.”

“어디쯤이야?”

“저-쪽.”


유리는 태연하게 방 안 침대 모서리를 가리켰고 사실 그 방향은 지금 유-쨩이 서있는 책상 옆과는 거의 반대방향이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표정을 구겼던 유-쨩은 곧 프렌이 유리가 말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인사하기 시작하자 멍뎅한 얼굴이 되었다. <안녕, 유리. 나 프렌이야. 지금은 유리랑 동갑인 25살. 물론 나한텐 네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처음 물어올 때부터 이미 그 의도를 알았는지 큰 쪽의 유리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제국 기사단장이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말을 걸고 있었다. <으와... 진짜 미래의 나 성격 나빠….> 물론 자신도 종종 프렌에게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는-다분히 편파적인 기억을 더듬은 후 유-쨩은 지금도 ‘나는 제국과 길드의 하늘에 우러러 거짓 하나 말한 적 없어요~’라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고약한 거짓말에 속아 한 점 의심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전혀 엉뚱한 곳에다 녹을 듯 미소 짓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프렌이라니. 10년의 세월에도 변함없이 순진하고, 착하고, 귀여운(것 같이 느껴지는) 친우의 모습에 왠지 모를 조바심을 느끼면서-윽, 왜 저 녀석은 변한 게 없는 거야!― 덤으로는 저 달콤한 미소가 받는 사람 없이 허공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유-쨩은 저도 모르게 프렌이 향하고 있는 쪽, 침대 모서리로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얼굴까지 발개진 유-쨩이 프렌의 미소를 정면으로 받는 바로 앞까지 오기 전 유리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아, 프렌. 그 녀석 방금 문 앞으로 옮겨갔어.”

“?!”

“그래?”


프렌이 즉시 몸의 방향을 틀어 다시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등 갑주와 마주하게 된 유-쨩의 눈에 그렁거리는 것들 중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어이없음과 분노로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유-쨩을 흥흥 웃으며 모른 척 하는 유리의 뒤로 받는 사람 하나 없는 대화를 늘어놓는 제국 기사단장의 목소리만 방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



연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유-쨩에 대한 몇 가지 신체검사와 아이가 발견된 장소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유리는 라피드와 함께 원래 리타의 몫인 길드의 의뢰를 처리하러 수도 근처를 돌아다녔다. 검사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을 소비했고 그날의 검사가 끝나면 아이는 유리의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검사 후에는 으레 리타가 반사 신경이 어떠네, 에알의 폭주가 어떠네 떠들어댔지만 귀에는 잘 남지 않는 말들이었다. 키가 큰 수풀 밑에서 자라는 약초를 모아야 하는 의뢰는 어렵진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리는 아예 텐트와 취사도구를 챙겨 돌아다녔고 거의 매일 밤을 혼자 여관방에 남아 있을 유-쨩을 걱정한 길드원들은 아이에게 연구실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익숙하지만 낯설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어둑한 거리를 걸어 여관방으로 돌아가면 닫힌 문에서는 작게 불빛이 새어나왔다.

톡, 톡 문을 건드리면 곧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막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연 프렌이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방 안쪽에서 쏟아지는 등잔빛 같이 노랗고, 따스하게 반짝이는 웃음이 그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공간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서 와, 유리. 검사 힘들었지?”




유-쨩에 대한 연구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자 리타는 맡고 있던 의뢰를 유리에게 부탁했고 유리는 당연히 수락했다. 의뢰품인 약초는 전문가 외에는 감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라피드의 후각은 이미 약초 찾기에 그 효능을 검증받은 바 있었다. <저 개 진짜 잘 찾던걸? 그래봤자 찾았던 약초는 어느 바보가 다 잃어버렸지만.>―처음에 둘이 싸우고 있었던 이유는 이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유리가 꽤 자주 방을 비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때부터 프렌은 유리의 여관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 순찰 가기 전에, 점심 이후 짧은 휴식시간에, 또는 업무를 모두 끝낸 늦은 저녁에. 귀족의 삶엔 별 관심이 없었던 어린 자신의 눈에도 기사단장의 업무는 그리 한가한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이곳에 와봤자 프렌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프렌은 틈날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과 이 세계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 거 혼잣말이랑 다를 거 없지 않냐구….> 한숨을 폭 내쉰 유-쨩은 빈 침대에 엎드리듯 누워 조근조근 이어지는,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여기 없더라도 프렌은 알지 못하고 이곳에 찾아와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자신을 위해.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 어느 곳에, 어느 시간에 있어도 결국 자신은 다시 저 녀석 곁으로 돌아가리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쨩이 나타난 지 이레 째 되는 맑은 오후에도 프렌은 어김없이 유리의 방을 찾았다. <유리, 있어?> 검사도 거의 막바지여서 일찍 방에 돌아와 있던 유-쨩이 침대 기둥을 똑똑 두드리자 프렌이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프렌이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한번 출렁하고 움직였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기둥을 두어 번 더 두드리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던 프렌이 빙그레 웃었다.


“미안, 유리.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어떤 일??>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낸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 말보다 조금 늦게 반응하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프렌의 이마 위로 조금 길게 자란 앞머리가 얇게 흐드러졌다. 조용한 방안에 자신과 사락거리는 옷감 스치는 소리 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싸늘함에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프렌이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 유리….”


<귀여운 모습의 유리를 보면 기운이 날지도.> 말에 덧붙인 웃음이 외려 부서질 것 같아 깜짝 놀란 유-쨩이 몸을 기울여 프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로 조금 그늘이 진 얼굴은 어쩐지 어릴 적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고민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 만들어내는 듯한, 조금 쓰게 웃는 표정. 유-쨩이 알아온 프렌은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아니었다. 외려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웃고, 울고 혹은 화를 냈다. 그 솔직함이 부럽고, 때론 화가 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소중한, 그 웃음을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었던 친우는 어느새 훌쩍 커버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때에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 녀석은…> 어느 샌가 자신이 부쩍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리에 없는 또 하나의 자신을 탓하며 조금 더 다가서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혀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깨닫지 못한 듯 뺨으로 드리워진 채인 길쭉한 속눈썹의 그림자가 물속을 휘젓듯 어린 유리의 마음에도 선연하게 파문을 그었다. 시선을 내리면 어릴 적보다 조금 색을 잃은 것 같은 창백한 입술이 애처로웠다. 닿을 수 있다면, 축 쳐진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고,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네게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네가 다시 웃는다면.

천천히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멈추고, 또 다시 흔들린다. 숨조차 잊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단지 닿기 위해서 다가가는 순간은 시간도 멎은 듯 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


“…유리?”


막 닿을 참이었던 입술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방금 나 무슨...?!>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당황한 유-쨩이 프렌 쪽을 쳐다보았지만 프렌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서 프렌이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면 큰 쪽의 자신이 막 문을 연 채인 자세로 멈춰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유리.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아니... 좀 심란한 장면을 봐서.”

“심란한 장면?”


고개를 갸웃한 프렌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척척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 유리가 침대 앞에 서서 당황했는지 아까 뒤로 물러난 자세 그대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리타가 검사 결과 나왔다고, 들으러 오라고 하더라.> 겨우 정신을 차린 유-쨩이 꼼지락거리며 침대에 내려올 때까지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듯 한 애인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본 유리는 곧 프렌에게로 고개를 숙여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

“에, 유리?”

“그런 표정 하고 있으면 누가 잡아먹어도 모른다.”

“…이런 짓 하는 거 유리밖에 없다구.“


<네, 정답.> 애인의 투덜거림을 대충 넘기며 모르는 척 유-쨩의 얼굴을 내려다본 후 픽 웃는 얄미운 얼굴은 분명 확신범이었다.



***



“‘뭣도 모르는 녀석’하곤 안하는 거 아니었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진 그 말에 그때까지도 복잡한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던 유-쨩이 고개를 들어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앞서 가고 있는 자신의 등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길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낀 유리는 뒤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게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본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낯 뜨겁지만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유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자신에게 질투라니 뭐가 뭔지 자신도 잘 알 수 없게 되어서 그저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옮기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으면 뒤에 따라와야 할 작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꽤 멀어진 뒤에야 깨닫고 돌아보면 어린 자신은 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래?”

“엉?”

“항상 이런 식이냐고. 너는 길드일인지 뭔지로 바쁘고, 프렌은 혼자 힘들어 하고 있어.”

“......”

“저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어. 미래의 나인 ‘너’라도, 지금 프렌이 떠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지.”

“.......”

“너는 무엇을 위해 프렌 곁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아니 오히려 그 앞날에 짐이 될 뿐이라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 녀석이 걸어갈 길이 빛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자신의 입장이며 아무데도 고할 수 없는 이 하잘 것 없는 마음일랑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도 좋았다. 이미 수백, 수천의 밤을 반복했던 생각들이 어린 자신의 눈 속에서 곧게 반짝이며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각들은, 실은 지금도 마치 어딘가에 걸린 등불이 켜지듯 떠올라 머릿속에서 깜빡거리곤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안쪽의 불꽃이 속삭인다. 실력도, 인품도, 교우관계도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할 제국의 기사단장. 세상 어디서나 바람결을 타고 들려올 그 이름을 단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귓가에 담는 것만으로, 그 아련한 울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렇게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 와서 그 녀석을, 모든 것을 놓을 순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멈춰선 채인 아이에게로 다가가며, 유리는 마치 작은 등불을 불어 끄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잖냐.”



***



“…그러니까, 두 시공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저 꼬맹이가 여기 와 있는 거야.”

“....어?”

“....하?”


두 유리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내자 리타의 눈초리가 더욱 치켜 올라갔다. 아까의 미묘한 잔재로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다소 멀어져있던 두 유리는 지맥과 에알의 응축, 그에 따른 급격한 중력증가 현상과 시간왜곡, 인간 정신의 분류에 대한 리타의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설명에 사이좋게 패배했다. 거의 탁자에 엎어지다시피 한 두 사람을 소리 없이 노려보던 리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작은 동작에 며칠 밤샘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유리는 새삼 선실 책상이며 바닥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들과 복잡한 술식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종이들, 실험도구들을 둘러보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탁자로 다가간 리타는 그 위에 놓여있는 종이들을 한참동안 뒤적여 어느 한 장을 빼내고 의자 위로 굴러가있던 펜을 주워 종이 위 어떤 구절에 크게 동그라미를 몇 번 친 후 그것을 유리들에게 내밀었다. <자.> 종이 위에는 당최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긴 계산식과 방금 동그라미가 쳐진 12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통로들의 역할이 바뀌는 주기는 약 120시간. 즉, 120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골목으로 가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과연, 천재마도사소녀.> 자신의 눈에는 그저 잉크 흔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하려고 노력하며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 유리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흘끗 들여다본 후 이미 이해는 포기한 듯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선실 안에 한순간 침묵이 오간 후 아까부터 책 더미 속에 반쯤 묻혀있던 카롤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120시간 뒤라면, 오늘 저녁 쯤 아니야?”



***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말도 안 돼!”

“그도 그럴 게 밤낮없이 조사했는걸, 리타.”

“에스텔이 돌아갈 때 알려달라고 했는데!”

“일단 지금은 뛰어!”


네 사람은 정신없이 좁은 골목길을 달려 내려갔다. 제도 내에는 피에르티아 호를 수용할 만한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둔 곳에서 유-쨩이 처음 발견된 아랫마을의 골목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아늑한 저녁 분위기에 잠겨있던 마을에 작은 소란이 일고, 유리 일행이 지나가는 뒤마다 쌓여있던 먼지며 막 걷고 있는 빨랫감들, 마주친 사람들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아랫마을의 지리를 잘 아는 두 유리들이 선두를 달리자 카롤과 리타가 따라 붙었다. 길이 익숙하다 해도 어린 몸에 이 속도는 버거웠는지 숨을 꽤 할딱거리면서 유-쨩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왜, 그 골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애초에 통로가, 연결된 곳이니까! 다른 장소보다, 돌아가기가...!”

“그거, 그 얘기 아냐? 이미 구멍이 나 있으니까, 으, 벌레 구멍같이….”


뭔가 싫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말하면서도 진저리를 치는 카롤을 본 리타의 표정이 구겨졌다. <벌레 구멍... 넌 꼭 말을 해도...!> 그 말에 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머리 위를 사수한 카롤이었으나 그가 기대했던 대로의 응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움찔해서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앞을 올려다보자 눈앞에 아직 보수를 덜 했는지 벽돌로 반쯤 막힌 벽이 펼쳐졌다. 그 벽 너머로 뭐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게 ‘보였’는데, 그 묘하게 단절된 것 같은 공간의 영향인지 마땅한 통로도 없는 골목에 바람이 몰아쳐 쌓여있던 벽돌이 덜걱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리타, 저거냐?> 골목에 쌓여있는 입자가 작은 부유물들이 주위를 떠도는 것을 눈에 들어가지 않게 들어 올린 팔로 가린 유리가 휘청거리며 묻자 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옆으로 시선을 향하자 다른 세 사람과는 다르게 무섭도록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유-쨩이 보였다. 거의 혼자서 태풍의 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쨩이 바람의 기세에 넘어지지 않도록 유리는 반사적으로 아이의 어깨를 받쳤다. 앞 쪽의 빨아들이는 힘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선 유-쨩이 어깨를 받치는 유리의 손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머리채가 바람에 날려 정신없이 흔들렸다. <.....해...!>


“.....뭐?”

“그 녀석 잘 부탁한다고! 혼자 내버려두지 말란 말이야!”

“너 말야,”


<누구한테 그런 말 하는지 알고 있냐?> 말을 꺼내는 찰라 정면에서 몰아친 바람에 숨이 턱 막혀 반쯤 소리를 꺼내다 만 유리가 컥컥거리자 유-쨩이 상황도 잊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또 다시 바람이 불어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잔뜩 먹은 유-쨩이 퉤퉷 입맛을 다신 후 성가신 머리를 붕붕 흔들었고 그 직후 눈이 마주치자 두 유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뒤를 받치는 든든한 팔에 의지해 기운을 낸 유-쨩이 벽 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안가서, 따라 잡을 테니까!”


어린 유리가 유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것과 동시에 눈앞의 빛이 증발해버리는 것처럼 그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뭐야? 돌아간 거야?> 바람 때문에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있던 카롤과 리타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탁탁 매무새를 정리하며 골목 안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공중에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저녁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가라앉는 골목 안에서 유리는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어린 유리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린 자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유리는 입 꼬리를 끌어 당겼다.




톡톡, 두들기는 소리에 버릇처럼 문을 열었던 프렌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발견하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약간 삐딱한 자세로 문 앞에 서 있었던 유리가 인사를 건네자 금세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그래... 작은 유리, 돌아갔구나.”

“방금 전에. 너도 부를 껄 그랬나?”

“아니야. 꽤 아슬아슬했었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아무리 봐도 조금 서운한 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아 유리는 잠시 어린 유리가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얼마 안가서, 라고 했겠다, 그 버릇없는 녀석.> 그 작은 중얼거림에 또 다시 의문을 표시하는 프렌을 잠시 바라본 유리는 그 곁으로 다가와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후 손바닥으로 혈색 좋은 뺨을 어루만졌다.


“커다란 나로는, 불만이야?”


투정인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유혹인 것도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 프렌은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술을 겹치며 프렌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 이 유리가 좋아.> 그 말의 달콤한 울림에 아찔할 정도로 만족감을 느끼며 유리는 눈을 감았다.


‘아직 백 년은 빠르다, 꼬맹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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