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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프렌]눈부신 사랑의 노래

NO. 2015. 9. 15. 21:07



어느 새 자라난 앞머리가 눈 안쪽을 쿡쿡 찔렀다. 촌장집의 시중을 드는 내내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가 영 거추장스러워 눈을 비벼댔더니 그러는 것을 언제 또 봤는지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유리가 주머니칼을 들고 손짓했다. <머리, 잘라줄게.>

자른 머리카락을 버리기 쉽게 바닥에 방안을 뒤져 찾아낸 거적을 깔고 그 위에 올린 상자에 프렌이 얌전히 앉자 본격적인 이발이 시작됐다. 분주함이 채 가시지 않은 저녁, 얼마 남지 않은 햇빛에 의지해 고개를 기울이고 눈썹을 찡그려가며 신중하게 머리를 잘라가는 유리의 뒤로 자른 머리카락과 삭삭 하는 칼날 대는 소리가 바닥으로 소복이 쌓여갔다.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시야 밖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프렌은 가리는 앞머리를 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르는 것은 오랜만이다. 뒤쪽을 지나 옆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프렌은 귀 가까운 곳을 챠캉챠캉 스치던 가위소리를 기억해냈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용 가위였지만 부인은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위로 할 수 있는 일을 열두 가지나 더 알고 있었다. 남은 붕대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옷감을 재단해 옷을 만들고 색실을 잘라 두건 위에 들꽃모양으로 수를 놓기도 했다. 오늘처럼 머리가 길게 자라난 날이면, 햇볕 잘 드는 창 옆에 자신과 유리를 앉히곤 어딘지 익숙한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머리도 잘라주었다. 언제까지나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나지막한 멜로디.

오래전의 일이었다.

잘그랑, 주머니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프렌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떨어트린 칼 위로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다른 손 손가락을 붙잡고 있는 유리가 보인다. <유리, 다쳤어?> 아무런 대꾸가 없는 친구를 걱정해 머리칼을 걷어내고 살짜기 고개를 들게 하면 뜻밖에도 잔뜩 일그러져 있는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유리….”


유리는 울고 있었다. 손등으로 훔쳐도 미쳐 다 닦지 못한 눈물이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들과 함께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진한 얼룩을 그었다. 거칠게 비벼낸 얼굴이 눈물과, 자르다 만 머리카락 조각들과 다친 손가락에서 배어나온 피로 온통 얼룩졌다. 소리 없이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긴 프렌이 깨끗한 손으로 유리의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이며 피와 눈물을 닦아냈다. 닦아내도, 닦아낸 그 자리로 다시 눈물이 떨어져 프렌의 양 손이 금세 미지근하게 젖었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며 프렌은 부인을 실은 관을 내릴 때까지도 주먹을 꾹 쥐고 버티던,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떠올렸다.


“헹크스 부인도, 아프기 전엔 이렇게 머리 잘라주셨지.”


흠뻑 젖어든 유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시울 아래로 구르듯이 뭉쳐들던 눈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하얀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물궤적을 따라가듯, 마치 어린 소녀 같은 모양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프렌은 다시 친구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못 고치는 병은 아니라 했다. 약만 있다면 분명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나 결계 밖 깊은 숲에서나 구할 수 있는 약재는 너무나도 비쌌고, 시내의 의원은 제 값을 모두 치르지 않으면 약을 줄 수 없다 했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할 말을 잃은 노인을 대신해, 후에 반드시 갚겠다고 간청하는 고아아이들의 부탁을 의사는 들은 체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 가난과 무력함이 비참하고 분해서, 결국 싸늘하게 식은 침상을 앞에 두고도 유리는 끝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유리가 프렌은 못내 안타까웠다. 헹크스 부인의 죽음은 분명 슬프고 분한 일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자신들에게 친어머니같이 대해주었다. 웃을 때마다 환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제 더는 남은 눈물이 없을 텐데도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죽음을 두고 유리의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터였다. 터무니없던 약값도, 구할 수 없던 약초도 모두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그 모든 것이 마치 제 탓인 양 굴었다. 피나게 입술을 깨물고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꼭 쥐어 가며 눈물을 참았다.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듯 한 그 얼굴이 외려 더욱 애잔하고 서러워서, 옆에서 대신 엉엉 울면서도 프렌은 차라리 유리도 울어주었으면, 떼라도 써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렇게 참았던 눈물이 간신히 터진 지금에도, 유리는 단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칠 뿐이다. 이따금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오열을 참으려고 잔뜩 죄어든 여린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앙다문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울음 대신 뜨겁도록 떨리는 빈 숨소리. 망설이는 것처럼, 프렌의 어깨에 닿으려던 손이 멈췄다가, 뿌리치듯 거두어졌다.

다시 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덜어내려 손가락을 뻗으면 그것마저도 우는 얼굴을 감추는 듯 돌린 고개에 거부당했다. 저쪽을 향한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듯해서 견딜 수 없어진 프렌이 오히려 자신이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를 내밀어 유리의 고개를 꼭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놀란 듯 물러나려 하는 몸을 꼭 붙잡으면, 이미 감정적으로 한계였던 유리가 약한 저항을 그만 두고 프렌의 어깨 죽지에 고개를 묻었다. 닿은 어깨로 흘러내리는 친구의 감정들이 놀라우리만큼 뜨겁고 또 뜨거워서 서러웠다. 목 놓아 울 곳조차 없어 가슴 안을 몇 번이고 헤집던 뜨거운 감정의 결정들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터져 나와 번뜩이며 환하게 빛을 발했다가, 곧 별이 지듯 사그라진다.

그 잔재와도 같이, 떨리는 어깨를 다시금 끌어안으면서 프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했다. 누우면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창고 방, 그 안에서도 유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추위를 피하는 새들처럼 서로 옹송그려 안은 등 위로 천천히 어두운 밤이 내리는 방 안에서, 친구를 안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프렌은 기원처럼 속삭였다. 그렇다면, 네가 울 수 있도록 내가 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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