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린현]건+현이 어린 서린이 키우는 거 보고 싶다
썰체 주의
광월 완결 이후
서현은 마치 그런 장면을 처음 보았다는 듯 눈을 부릅 떴음 악다문 잇새도 부질없이 낮은 흐느낌이 목울대를 타고 흘러나왔고 서현은 혹시 누가 자기를 주목하고 있지 않았나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1. 방에는 '그'를 제외하고 자신과 세건 둘 밖에 없었을 뿐더러 2. 세건도 그와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았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뜬 세건은 마치 방에서 도망가고 싶거나 아예 반대로 내쫓겨나고 싶지 않다는 듯 얇은 이불을 꽉 잡고 있었는데 이미 인간의 악력을 뛰어넘은 그의 손아귀에서 불길한 찌직 소리가 났음 서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음 누워있던 아이가 서현의 시선에 반응해 방긋 웃었음 그리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서현과 세건에게 작고 통통한 손을 내밀었음 서현은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조심스레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고 아이는 그 손가락을 잡았음 닿은 살은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음 서현은 아이가 잡지 않은 손으로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훔쳐냈음
혹시 서린이 남은 사람들을 위해 이 세계에 자신을 남겨두지 않았을까. 처음 세건이 그런 의문을 제기했을 때 서현은 고개를 저었음. 서린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명백했음. 서현이 알기로 그의 동생은 상냥하고 선량했지만 그와 동시에 강했음. 상처입을까 두려워 넘어지기 전에 안아올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정도로. 서린은 그들이 상처입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고통조차도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길 바랬음. 그런 서린이 이 세계에 자신을 남겨두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뭐란 말인가. 눈 앞의 생명체는 서현의 왼쪽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서린과 닮아있었음 어릴 적 함께 러시아에 살던 그 짧은 시절에 보았던 동생 모습과는 완전 똑같았고. 신안으로 본 결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음. 이 아이는 서린임. 비록 그 때의 서린과 연속성은 없으나.. 서현은 동생이 죽어가면서 했던 '살고 싶다'는 말을 떠올림. 그 아이는 착하고 강했지만. 그래도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 작고 필사적인 마음이 이 세상에 이런 조각을 남기게 하지 않았을까. 서현은 울면서 아이를 끌어안았음. 그리고 그 등을 세건이 조심스럽고 필사적으로 감쌌음.
아이는 순한 천사였음. 뭐든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음. 무엇을 주어도 방긋방긋 웃는 서린에게 서현과 세건은 무엇이든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려고 애를 썼음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달콤한 과일과 과자들을 많이 주고 싶어하는 것은 의외로 세건이었음 겨우 난 이가 썩는다며 핀잔을 줘도 금방 과자를 입에 넣어주곤 했으니까. 서현은 그런 세건을 대놓고 비웃었지만(자꾸 좋아하는 거만 주지 말라니까 도련님새끼 어떻게 자랐는지 알만하네/ㅡㅡ) 아이가 금방 웃으며 손을 내밀면 새 과자봉지를 찢기 시작했으니 무르기 면에서 비교하면 둘은 하등 나은 점이 없었음 그나마 다행한 점은 서린이 단 과자나 과일만큼이나 고기와 채소도 좋아했다는 점이어서 나름 균형잡힌 식단을 유지하며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음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처음 발음한 단어는 엉아였음. 엄마도 아빠도 아니고 엉아. 그 말을 처음 들은 날 서현은 찔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고 세건은 부엌으로 도망을 갔음 그 이후 서린이 말한 엉아가 누굴 뜻하는 것인지(서현:내가 친형이니까 당연히 나지/세건:이제 너 쟤 형 아니다 거기다 따지고 보면 넌 쌍둥이니까 형도 아니지 않냐) 말다툼을 했고 누구를 엉아라고 부르는지 알아보기 위해 차례로 서린을 안고 둥기둥기해봤음 서린은 까르륵 웃을 뿐 좀처럼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음.
서린이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서현은 솜이불을 작게 찢어 근처에 뾰족한 식탁과 각종 모서리에 붙여놓았고 다음날 세건은 가구 모서리에 붙이는 충격완화 스펀지를 잔뜩 사와서 서현이 붙인 이불을 죄다 뜯어내고 그 자리에 붙였음 알록달록 예쁜 스펀지는 보기에도 좋았음 그들이 거실에 앉아있을 때나 부엌에서 일을 할 때 근처에 뉘여둔 서린이 엉아엉아 옹알이를 하며 근처로 기어오는 걸 세건은 어쩐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마침내 서린이 제가 있는 곳까지 기어오면 눈물을 꾹 참고 아이를 안아올렸음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서질 듯 작고 연약한 아이는 이제나 저제나 세건을 보며 사랑스럽게 웃어서..
서린은 장난감이 아주 많았음. 원래대로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 비싼 장난감이나 거들떠도 보지 않을 싸구려 장식품은 저녁마다 서현과 세건의 품에서 나와서 서린의 장난감 상자로 들어갔음. 비슷한 딸랑이가 10개가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둘은 아기용품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음. 형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서린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형들이었음. 세건이나 서현이 딸랑이를 흔들 때 서린은 제 눈과 귀를 잡아끄는 알록달록한 구체 대신 자기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형들에게 손을 뻗었음. 여전히 욕심이 없구나. 서현이 씁쓸하게 혀를 찼지만 사실 그 어떤 장난감과 장식품도 형들이 그에게 퍼부어주는 애정보다 따뜻하고 알록달록하지 않았으니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서린은 걸음마를 배우는 게 늦었음. 아이가 첫 걸음을 떼기 위해 잡고 있던 탁자에서 손을 떼고 나서 휘청거리는 그 찰라의 순간을 그의 보호자들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임. 이미 온 집안에 푹신한 이불을 깔아놓았음에도 서린이 넘어질 것 같으면 서현은 서린의 몸을 잡았고 세건은 서린을 안아올렸음. 그들 머리로는 이것이 과보호이며 아이가 넘어져서 다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막상 눈 앞에서 아이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휘청거리면 불에 덴 것처럼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갔음. 휘청거리는 아이의 뒤로 검은 머리카락이 겹치고 환청처럼 달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이 '과보호'의 이유는 충분히 차고 넘쳤음. 평생 걷지 못해도 괜찮아. 서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서린이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는 너무 기쁜 나머지 캠코더의 녹음 버튼을 누르는 걸 잊어버렸음.
서린이 어눌하게나마 걷고 물건을 무작정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을 때 세건은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음. 서린의 손 크기에 꼭 맞는 크기에 서린이 좋아하는 소꿉장난놀이 세트였음. 세건이 공구를 다루는 모습을 봐서 그런가 서린은 공구 종류를 좋아했음. 흙이라곤 한톨도 없는 방바닥에서 포크삽과 미니망치를 들고 콩콩 두들기며 옹알거리는 서린을 위해 서현은 그날 오후 내내 마당의 땅을 골랐음. 혹여나 아이의 연한 손가락이 다칠까봐 라이칸스로프의 힘으로 다져내고 걸러낸 모래판은 바다에서 왔는지 연한 소금냄새가 났음. 아직 태양이 따가운 한낮 대신 오전이나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마치 자잘한 파도소리 같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현은 가장 깊고 따스한 물에 휩싸인 느낌을 받곤 했음.
요즘 들어 세건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음. 서린에게 좀 더 다양한 장난감 공구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너무 정교하게 만들면 서린이 가지고 놀다가 다칠 수도 있고 그렇다고 너무 허술하게 만들면 자신의 마음에도 들지 않을 뿐더러 서린이 세건의 공구와 자신의 것을 잘 매칭시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음. 서린은 저녁 내내 세건이 공구를 가지고 하는 일을 열심히 보며 세건이 드라이버를 들 땐 저도 장난감 드라이버를 골라내고 망치를 들 땐 상자를 뒤져서 스펀지로 된 망치를 꺼내 두들기곤 했음. 그러다 세건이 손을 씻고 저녁을 먹을 준비를 시작하면 자기도 식탁으로 쪼르르 달려왔음. 이제는 저녁에 햄버거 타령 하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서현이 어설프게 만든 이유식을 먹으면서도 서린은 열심히 서현과 세건이 숟가락 젓가락질 하는 모습을 흉내내어 플라스틱 포크를 기울였음. 그것은 조금 더 오래 전, 서현의 쌍둥이이자 몇 천년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동생이 그들에게 삶의 길을 가르쳐 준 것과 아주 조금 비슷한 일이었음.
서린이 커가면서 서현은 이따금 지금의 서린과 본래의 서린 사이의 연속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음. 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롯시니는 너그러운 아이였음. 그다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또 그들의 어머니가 아이를 제대로 돌볼 만큼 좋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이며 물건들은 극단에서 한발자국 앞으로 나와있는 것들에 불과했지만 서린은 그것들에 대해 불평한 적이 별로 없었음. 그는 아마 이 세상에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많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거임. 그런 동생에게도 호불호가 있었을 테지만- 당시 자신의 눈앞에 쉴새없이 들이닥치는 미래에 잠식되지 않는 것으로 필사적이었던 서현은 그걸 잘 몰랐음. 어렸을 적 롯시니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또 좋아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 그리고 이 상태가 그들이 다시 만나서 영원히 헤어지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서현은 낮게 신음했음. 심장을 칼로 난도질하면 이런 기분일까.
서현과 다르게 세건은 순수한 육아의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음. 세건은 두 형제 중 막내였고 자기보다 어린 친척 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자기보다 어린 가족 구성원을 돌봐주는 기쁨을 깨닫게 되었음. 과거 서린과 살 때에는 애써 부정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음. 자기가 뭘 할 때마다 따라하는 아이가 사랑스럽고 외출하고 돌아올 때 기다리던 서린이 그동안 받은 간식의 반을 모아서 내미는 순간에는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삶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느꼈음. 삶의 윤택함. 활기. 그런 것을 과거의 서린과 지금의 서린이 바톤 터치하듯 세건에게 내밀었음.
서현은 틈만 나면 동생의 사진을 찍었음. 핸드폰, 디카, 캠코더, 사진, 동영상, 웃는 모습, 자는 모습, 하품하는 모습, 이쪽으로 기어오는 모습.. 가리지 않고 줄기차게 사진을 찍어댔음. 현상 맡기는 시간도 길어서 폴라로이드를 사고 즉석출력기도 달았음. 그냥 찍기도 하고 잠든 동생 옆에 발라당 누워서 투샷을 찍기도 하고 아예 아이에게 핸드폰을 맡겨놓고 촬영버튼을 눌러서 나오는 장면 조각을 모으기도 하고. 레파토리는 넘쳐났음. 일하면서도 이번에는 어떻게 찍을까 뭘 가지고 올까 고민하는 일도 있었음. 방 안은 금방 서현이 찍은 사진으로 도배되었음. 공간이 없으면 오래된 사진들은 상자에 잘 넣어두고 새로 찍어둔 사진을 걸었음. 서현은 '그날' 동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핸드폰 사진첩을 뒤질 때 스크롤을 한없이 내려도 자신과 서린이 함께 한 한 장면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절망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음.
세건은 서현이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오면 일일히 저장했다가 가끔 당이 떨어지면 핸드폰 갤러리를 들여다보곤 했음. 답장은 ㅇ 한마디도 없었으나 늦어도 몇 분 내에 카톡 메세지 옆의 1은 사라졌음. 가끔 벽에 걸어둔 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떼어가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세건의 오토바이 연료창 옆이나 오토바이 재킷 안 주머니 등에서 발견되곤 했음. 서린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기다렸다는 듯 방긋방긋 웃었고 사진은 항상 사랑스러웠음. 영원을 쪼개넣은 것 같은 장면들.
저녁이 되면 서현이나 세건은 가장 넓은 방에 이불을 깔았고 서린을 가운데 둔 배치로 셋이 모여서 잤음. 가끔 자다가 서린이 칭얼거리면 서현이 그런 서린을 꼭 끌어안고 세건이 그런 둘 위에 팔을 얹었음 혹은 그 반대로. 푹신한 이불에 누워 어린 숨소리가 새근새근 평화롭게 울리는 걸 들으면서 서현은 가족이란 이런 것이겠지 생각하고 세건은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를 떠올림. 가족들이 살아있을 때도 이렇듯 모여잔 기억이 세건에게는 없었음.
세건과 서현은 원래부터도 비슷한 인종이라 사이는 나빠도 죽은 잘 맞았지만 서린을 키우면서 사이가 더 가까워짐. 그건 마치 같은 의무를 진 사람들이나 같은 기쁨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간의 동질감 같은 것이었음. 말도 잘 통하고 생각도 잘통해서 서현이 딸랑이를 사오는 날이면 세건도 색깔이 다른 딸랑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많았음. 세건이 서린의 밥을 먹이고 싶을 때면 서현도 그러고 싶었고 서현이 서린과 함께 자고 싶을 때면 세건도 그러했음. 결국 셋이 같이 자고 셋이 같이 식사하고 셋이 같이 목욕하는 그런 관계가 되었음. 서현과 세건은 어쩌다가 이런 놈이랑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지만 이건 재활치료 같은 거라 당사자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음.
서린이 라이칸스로프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부터 서현은 서린에게 인간 아이일 뿐 아니라 어린 라이칸스로프로써 배워야할 것들, 그러니까 수화하는 법이나 만월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음.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단 한번 뿐이었지만. 서린은 서현이 가르치는 것을 곧잘 따라했고 아주 뛰어나지는 않아도 한 번 배우면 금방금방 익혔음. 만월의 밤에 집 뒷산에서 수화한 서현과 서린이 밤새 뛰어다니다가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세건은 진흙투성이가 된 작은 털뭉치를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충분히 쓰다듬은 후 수화한 그대로 목욕을 시키고 재웠음. 이건 수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서현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음. 따뜻하고 촉촉한 코가 손바닥에 닿는 느낌은 세건에게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켰음.
서린을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 집 안에는 육아 관련 책이며 홈페이지 웹사이트 주소 등이 충분히 굴러다녔고 세건은 이따금씩 책들을 꺼내서 뭐 쓸만한 것이 없나 훑어보곤 했음. 그럴 때마다 세건이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의외로 육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책을 읽다보면 이거 아는 내용인데, 이거 이런 거였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현에게 여기 말고 다른 살림집이 있다면 미리 말해라는 식의 눈총을 받곤 했음. 그럴 때마다 세건은 짜증을 내거나 아예 무시해버렸지만 서현의 말도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닌게 세건은 서현보다 육아 관련 경험이 많았음. 어느 쪽이냐면 받아본 쪽으로. 자신이 사랑없는 가족의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아이였다고 생각하고 있던 세건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조금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됨.
서현은 아이를 등에 태우고 숲을 달렸음. 환한 달빛에 젖은 숲은 은으로 빚은 듯 화려했고 눈 앞으로, 이어서 옆과 뒤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신난 서린이 꺄르르 비명을 질렀음. 그렇게 잠시동안 달리다가 공터에 도착한 서현은 땀에 젖은 등에서 동생을 내리고 솜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서린을 혀로 핥았음. 그러면 서린도 형을 흉내내어 작은 혀를 내밀어서 형의 코며 뺨을 할짝였는데 서현이 평화롭게 바닥에 웅크려 뒷다리를 들어 배를 긁으면 서린도 그대로 따라했고 서현이 입에 대는 나무열매 등을 먹어보며 고개를 팩 돌리기도 했음. 이 순간이 서현이 밤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음. 제 아무리 한세건이어도 서린에게 꼬리 사용법 등을 알려주진 못할 터였음. 이츠부르크에 있던 숲처럼 이 곳도 송진의 냄새가 진하게 났음.
세건과 서현 둘 중 몸으로 하는 애정표현을 자주 하는 것은 서현이었음. 다소 무뚝뚝하지만 서린이 좋아하는 걸 귀신같이 챙겨주는 건 세건. 서린은 두 형을 모두 잘 따랐지만 서현과 있을 때는 좀 더 새끼늑대처럼 굴었고 세건과 있을 때는 인간 아이처럼 굴었고 둘 다에게 어리광쟁이였음. 자잘한 것(과자를 많이 먹었다던지, 위험한 물건을 만졌다던지)에 혼나도 전전긍긍하는 것은 형들이었고 서린은 잠시 시무룩해졌다가 금세 또 다가와서 방긋거렸음. 그걸 보면서 서현과 세건은 서린의 성격이 참 좋다고 생각하지만 서린의 이런 면은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에게 나타나는 좋은 특성이었음.
아이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밖에 나갈 수 있게 되면서 서현과 세건은 집 근처에 설치해놓은 부비트랩이며 함정 지뢰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음. 방어수단은 필요함. 이 세계에서 둘은 더이상 비스트나 라이칸스로프의 왕자는 아니었지만 인외 존재 상대로 상당히 전적을 올린 상태였고 특히 서현을 주시하고 있는 한니발은 언제나 무시하지 못할 존재였음. 서현이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한니발은 이번에야말로 서현이 복수심과 절망이라는 불길로 세계를 휩쓸어버릴 것을 기대하고 서린을 해칠 게 분명함. 거기다 그의 우방인 앙리 유이는 아낙스의 단서를 찾겠다고 서린을 데려갈지도 모름. 둘은 언제나 집안 입출입에 주의를 기울였고 집안 곳곳의 부비트랩과 함정 위치를 서린에게 몇 번이고 주입시켰음. 집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 하는 게임 같은 거야. 서현은 나직하게 속삭였고 게임이라는 말에 신난 서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음. 세건은 서린에게 약자가 더 강한 자를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침. 내뻗는 작은 주먹의 각도를 수정해주면서 세건은 아이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길 바랐던 소망이 얼마나 덧없고 무서운 일이었는지 생각함.
서린은 라이칸스로프. 인간의 능력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존재였지만 아직 어렸음. 무엇보다도 형들에게 사랑받고 자라서 온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느끼는 아이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성이나, 다치지 않기 위해 남을 다치게 할 생각을 잘 해내지 못했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서현은 자신의 죽음보다, 운명에 메인 인생보다 더 두렵고 끔찍한 것이 있음을 생각함.
형들과는 달리 서린은 그런 놀이들이 마냥 좋았음. 세건과 하는 숨바꼭질도 좋았고 잡기놀이도 진짜 재미있었고 서현과 하는 수화 연습도 신났고 바람 냄새로 물건 알아맞추기나 기척 눈치채기 놀이도 즐거웠음. 정말정말 재미있는 형들과의 놀이시간이 끝나면 형들은 서린을 꽉 안아주고 잘했다며 칭찬했음. 그때면 언제나 웃고 있던 서현 형도, 인상을 쓰며 쑥쓰러워하던 세건 형도 똑같은 표정이어서 좀 이상했지만. 그래도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맛있는 밥을 먹고 깨끗이 씻은 다음 보송보송한 이불 위에 누우면 평소랑 똑같았기 때문에 서린은 금방 의문을 잊어버렸음. 이때쯤에 암호도 정했음. 현관에 들어왔을 때 거기 우산이 떨어져 있으면 집에 들어오지 말고 나가. 누군가에게 잡혀 움직이거나 말할 수 없게 되면 '발톱'을 꺼내서 근처 건물에 표시해. 형들이 너를 보지 않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 조용히 형들 쪽으로 와.. 아이는 영특했고 대부분을 잘 기억했지만 가끔은 몇 개씩 까먹기도 했음. 그 때마다 세건은 따끔하게 혼을 냈음. 언제나 장난스럽게 말려주던 서현도 이때는 아무 말 하지 않았음. 아니면 아예 자기가 더 나서서 코를 깨물거나 이를 드러냈음. 그럴 때마다 서린은 시무룩해졌지만 형들은 슬퍼졌음. 그래서 서린은 형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먼저 다가가서 다리에 매달리고 팔을 끌어안고 방긋방긋 웃었음.
세상에는 병아리 성별 감별사가 있지만 이들 집에는 서린 그림 감별사가 있었음. 그것도 둘이나. 서린이 아직 손목에 힘을 주지 못해 간신히 그리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등을 가지고 형들은 이건 이러한 의미가 있네, 저런 면이 그림에 나타나는 거네 하며 심각을 떨었음. 특히 그 안에 눈코입 비슷한 작대가 네개라도 그려져 있는 날이면 논의는 더 격해졌음. 세건은 그림이 초록색 크레파스로 그려져있다는 걸 근거로 들며 그 그림의 대상이 자신임을 주장했고 서현은 그림 속 동그라미의 길이가 긴 걸로 봐서 키가 더 큰 자신일거라며 우겼음. 덧붙여 네 머리는 그렇다 쳐도 눈코입까지 초록색인건 아니지 않냐는 것을 보조근거로 삼았음. 그러다 서린이 또 다음 그림을 가지고 오면 이것이 뭔지를 또 한참동안 감별하고..
서린은 애정이 많은 아이였고 표현을 아끼지 않는 아이였음. 놀이터에 놀러나가도 형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꼭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서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사람에게 안겨 뽀뽀하곤 했음. 그리곤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대면서 말하고. 서현은 이것저것 먼저 물어보는 편이었고 세건은 그냥 듣기만 하는 쪽이었지만 서린은 두 형 다 자기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것을 알았음.
서린이 놀이터에 나간지 한달 가까이 되었을 때 형들은 서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자아이들의 비율이 남자아이들보다 훨씬 많다는 걸 깨닫게 되었음. 아니 그보다 매일 등장하는 여자아이 이름이 다 달라.. 서현과 세건은 심란한 기분이 되었고 그날 밤 서린을 재운 침대 옆에서 상의함. 그냥 애들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그래도 너무 많잖아./내 동생 여자 취향은?/전엔.. 갈보 계집애랑 만났었는데./갈... 당신 애 앞에서 언어 사용 좀(잠든 서린이 귀를 가림) 결국 둘은 다음날 낮 놀이터에 놀러가는 서린을 뒤따라가기로 함. 그리고 그날 하루 두 형이 관찰한 결과.. 서린은 애정표현이 풍부한 아이였음. 누구한테나 공평하게(심지어 남자애한테까지!) 끌어안고 뽀뽀해주는 서린에 세건은 미간을 잡았고 서현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음. 오후 간식 시간에 돌아온 서린을 식탁에 앉혀두고 형들은 아무한테나 그렇게 껴안고 뽀뽀하면 안된다고 말해줌. 그럼 형들한테는? 형들한테도 안돼? 아이의 물음에 뒤통수 얻어맞은 표정이 된 서현과 세건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음. 아냐 돼! 형들은 괜찮아!
만약 이 시기의 서린이 가족그림을 그렸다면 가장 작은 자기를 가운데에 그려넣고 그 양 옆에는 초록색 머리를 한 남자와 회색머리를 한 남자를 그렸을 거임. 그리고 그 발치에는 하얀색 커다란 늑대를 그렸을 거고. 각각 위에 세건 형 서현 형 이사카라고 적어넣었을 거임. 누군가 그림을 보고 이사카는 집에서 기르는 개니? 라고 물으면 서린은 그게 아니라 형이라고 말을 했을 테니 물어본 사람은 좀 나이가 많은 개인가 보구나 그치만 형이라니.. 하는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졌을 거임. 그러나 이맘 때 서린은 유치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가족구성에 대해 물어줄 사람은 없었음.
다만 가끔 서린은 놀이터에 모이는 아이들과 가족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는데, 주로 나는 형이 있네 없네 누나가 몇 있네 하는 이야기였음. 엄마 아빠가 없다는 서린의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했고 형들 둘과 살고 있다는 말에는 눈을 동그랗게 떴음. 둘 중엔 누가 형이야?/세건형이 더 높은데 형(서현)은 반말해./왜? 형 아니야? /아니래../근데 왜 같이 살아?/우응..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남자끼리나 여자끼리도 엄마아빠처럼 사랑하면 같이 살 수 있대./헤... 서린은 그날 저녁 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서현과 세건에게 했고 순간 서현/세건은 서린의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닐까 생각함. 이런 드립은 (과거) 서린만 치는 드립인데.. 먹다 뱉을 뻔한 물을 간신히 삼키면서 세건은 저런거랑 형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고 서현은 자신의 취향의 고급스러움에 대해 주장함. 그 후 가끔 서현은 기회가 되면 세건에게 게이 드립을 치며 놀리는데 세건이 진짜 극혐해서 자꾸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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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추가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