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욕망에 휘둘려 설정같은 것을 잘 짜지 않았던 것이다 설정구멍이 있을 수 있음 매우 많이
아 뭐라 그래야되지.. 일단 시점은 지금임 롸잇나우 지금 이순간 마법처럼 여튼 다이무스는 칼같이 은행에 출근하여 월급을 잘 받고 따슨 밥 먹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음 가끔 임무도 감 임무는 당연히 성공한다 왜냐하면 다이무스는 짱쎄니까.. 원래는 직장 근처 자기네 작은 저택 하나 잡아서 집사랑 이그리랑 셋이서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글이가 연합간다고 가출함 그래서 다이무스는 집사랑 둘이서 살고 있음 히카르도는 카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친구가 무서웠으며 행방을 감춰서 묘연함. 조용히 카뮤 스토킹 중이지만 여튼 눈에는 잘 띄지 않음. 회사도 연합도 히카르도에게 관심 없어 왜냐하면 얘가 능력은 좀 쩔어주긴 하지만 oh oh 복수의☆히카르도 oh oh 여서 갖기도 모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모하고 상대가 가지면 아쉬워서 쩝 입맛은 한번 다셔보겠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스카웃할 생각은 음씀 가끔 어디서 출몰했다더라 하는 정보는 모으지만 찾아나서진 않음 뭐 그런 상태 히카르도는 매우 자유로움 자유의 영혼임
여튼 요러저러하게 잘 살고 있는 회사 앞에 어느날 히카르도가 나타남. 그 어디냐 포트레너드? 여튼 회사 본사로 찾아오면 좀 좋은데 히카르도가 찾아간 건 회사의 여러 계열사 중에서도 어째 사이퍼랑은 영 관련이 없는 그런 지부였음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본사의 수장 앤지 헌트를 보고 싶다고 큰 소리 쳐대는 히카르도 일을 잘 처리하느라 지부에서 엄청 혼란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었음 그리고 히카르도는 제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는 것도.
여튼 어떠케 어떠케 해서 히카르도는 무사히 회사 본사로 인도됨. 물론 히카르도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으니 사장은 일이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대고 이사랑 대면함. 얘가 대체 뭐라나 들어봤더니 대뜸 테이블 위에 다리를 턱 올리더니 한다는 소리가 회사에 들어가고 싶으니 입사시켜달라는 거임. 아 테이블 비싼건데 이게 뭐지? 윌라드는 존나 혼란스럽지만 연합이라는 적도 있고 공격력이 검증된 사이퍼 하나가 아쉬운 시점이라 얘 꿍꿍이가 뭔지 몰라도 걍 훠이 쫓아버릴 순 없음 거기다 상대가 나 회사 들어갈꺼임ㅋ 하면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으니까 더더욱 그러함 그래서 앤지랑 이사랑 부뤼노랑 대충 회사의 높으신 분들끼리 의논했는데 일단 히카르도는 회사에서 받아들인다는 걸로 했음. 단, 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결정에 딸린 또 이러저러한 회의 끝에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은행에 배속됨. 물론 은행원으론 아닌 거시다 히카르도는 머리가 ㅃㅏ... 아니 정식 은행원으로 고용하려면 이러저러한 교육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니까 은행원 그것은 인텔리.. 그래서 경비원으로 배속함 물론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신성한 은행에 대체 경비원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수가 없지만 그런 있으나 마나한 직책이었다는 거고 실제적인 목적인 히카르도 바레타가 무슨 쓸데없는 일을 꾸미지 않나 회사의 믿음직한 에이스인 다이무스에게 감시감독의 임무를 맡긴 것임. 히카르도한텐 다이무스가 니 사수라고 말해둠 대체 은행에 어떤 개족.. 어떠한 위계가 있으면 은행원 다이무스가 경비원 히카르도의 사수가 될 수 있는지 알수가 없지만 회사는 은행 뿐 아니라 '회사'의 사수인 거라고 어거지를 씀 히카르도는 의외로 이렇다할 불만을 보이지 않음 얘가 회사를 안다녀봐서 눈치를 못챈건지 어쩐건지 모르겠음 사실 다이무스는 자기네 은행에 히카르도 주는 거까지는 걍 쏘쏘했는데 경비원인게 조금 못마땅함 가뜩이나 수상한 애한테 조금이나마 업무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있는 자격을 주다니 그치만 은행에 꽂을라면 별 수 없었음 그렇다고 자동입출금기 이런걸 시킬 순 없잖아
물론 히카르도에겐 뻔하게도 뭔가 카뮤라던가 카미유라던가 데샹에 연관된,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선 일단 접어둠. 여느 때처럼 은행 오픈시간 한참 전에 출근해서 간밤에 정리하고 퇴근했던 서류를 세밀하게 살피던 다이무스는 회사에서 제시한 출근시간보다 훨씬 느즈막히 출근한 히카르도를 처음으로 대면함. 경비원이라고 경비원 복장에 인상 사나운 걸 감추기 위한 것일게 분명한 모자에 썬글라스까지 끼운 히카르도는 은행 경비원보다는 은행 털러온 마피아로 보임 실제로도 마피아가 맞지 않나.. 다이무스는 들어와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히카르도한테 흘끗 시선을 던지고 다시 서류업무를 봄 히카르도는 처음엔 자기가 배정된 자리에 잘 서있나 싶더니 여기서 할일이 별로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챘는지 은행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째려보기 시작함. 썬팅 수준의 썬글라스를 뚫고 쏟아지는 폭발적인 히카르도의 시선에 은행을 찾은 손님들은 좀 불편함을 느낌.
서류를 들여다보는 듯 하면서 다이무스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음. 히카르도 생각ㅇㅇㅇ 사실 처음에 윌라드한테서 히카르도 좀 맡으라고 얘기 들었을 때 아니다 히카르도가 일부러(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회사 본사가 아니라 지부로 찾아왔다고 입사를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다이무스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음 회사 본사가 어디 꽁꽁 감춰져있는 것도 아니고 사이퍼 관련 얘기를 하기엔 본사가 훨씬 더 편하고 일이 빨랐을 텐데 그 먼 지부까지 찾아간건.. 사람들을 당황시키거나 압력을 가하거나 뭐 그런거에 능하고 좋아한다는 거임. 실제로 당황하는 지부 사람들을 보고 흐뭇한 기색을 보였다고 했지. 마피아가 되기 전 그의 본래 성격이야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면에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가학성이 짙고 잔인하며 폭력적임. 이런 인물에 말려들지 않고 다룰 수 있는 건 헬리오스에선 아마 다이무스가 유일할 거임. 물론 제일 좋은 건 실력자들이 주둔하는 본사에 넣어놓는 거지만 그건 아마 본진에 적의 폭탄을 박아두는 거랑 비슷함. 다이무스는 제 임무를 완전히 이해했음. 이해하지 못했어도 따랐을 테지만 역시 이해하는 게 더 좋음
사실 '처음으로'라는 건 은행에서 얘기고 다이무스랑 히카르도는 헬리오스에서 한번 미리 만났긴 함. 히카르도 직장 배정해주면서 윌라드가 앞으로 모르는 건 니 사수한테 물어보게 하면서 둘을 인사시킨 적이 있음. 다이무스는 간단하게 목례하고 히카르도는 대충 고개숙여서 잘부탁한다고 악수 한번 했음. 고개를 숙이면서도 히카르도가 별 숨길 생각도 없이 이쪽의 성격이며 실력 같은 걸 대충 가늠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다이무스는 그냥 넘겼음. 애초부터 얘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회사에 들어온 건 당연한 일이고 중요한 건 그 딴 생각이 뭐냐는 거임. 윌라드는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히카르도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회사의 존속에 크게 위배되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줘도 된다는 인상을 뿌렸음. 이제 회사의 같은 동료니 어쩌니 하는 겉치례를 들으면서도 다이무스는 제 연한 안쪽 살 안으로 따끔한 바늘 같은 것을 심어놓은 것 같은 불쾌감을 느낌. 날카로운 것은 분명하되 언제 찔러서 피가 배어나올 지 알 수 없는 그런 바늘. 크게 찔리기 전에 골라내야 함. 그런 임무를 맡았음. 히카르도는 은행에 출근하자마자 제 선임인 다이무스한테 고개를 끄덕거려 인사함. 히카르도는 의외로 조직에 익숙함. 그가 자란 곳이 그런 식의 질서가 철저한 마피아 조직이기도 했고 그도 막 들어온 회사나 은행에서 눈에 띄는 분탕질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보임. 다만 어깨를 한껏 부풀리고 고개를 옆으로 틀어 까딱하고 간지인사하는 건 마피아식 인사법이지 직장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시다.. 은행에 전직 조폭 경비원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서 은행 근처는 왠지 치안이 전에 없이 좋아짐 문제는 너무 치안이 좋아져서 시민들도 음씀 은행에 손님이 음씀
히카르도를 은행에 꽂은 거까진 좋은데 여기엔 엄청난 맹점이 있음 그것은 바로 은행은 일찍 문닫는다는 거다 1920년대에 요즘처럼 4시 정각에 퇴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늦은밤까지 얘를 붙들어놓을 수가 없음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업무시간에야 다이무스가 본다고 쳐도 퇴근시간인 오후 약 6시부터 다음날 출근시간까지 얘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수가 없다는 거임 이 중대한 사실에 대해 회사는 좀 고민하더니 은행 근처(=홀든 저택 근처)에 하숙집을 하나 잡아줌 말로는 직원에 대한 배려 어쩌구 주알거리면서. 평소엔 감시원을 세우거나 여유있을 땐 다이무스가 감시하고 있거나 함애 하나 영입한 거 가지고 손이 무지하게 가는 느낌이라 회사에선 쫌 후회했지만 이미 취직한거 뭐 어쩌겠음 회사의 이런 우려와는 달리 히카르도는 은행에서 나름 조용하게 잘 지냄 물론 다이무스네 은행에서는 같은 사이퍼라 해도 이제껏 다이무스와 단란한 은행을 꾸려왔다면 히카르도는 마치 라스ㅂ.. 아니 인상도 날카롭고 행동거지에 마피아 티가 풀풀 묻어나는 히카르도가 부담스러움 경비원복 입고 입구에 서있으면 아무도 히카르도에게 말을 걸지 않음.. ㄴ..날 혼자 두지마...ㅠㅠㅠㅠ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히카르도는 할일도 없고 무지하게 심심함 그러니까 히카르도가 어느 평온한 오후에 따슨 햇살을 마시며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는 다이무스의 집무실에 양손 가득 서류를 잔뜩 들고 난입한 건 그밖에 너무나도 할일이 없었기 때문임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슬쩍 든다음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리려 했던 다이무스는 기대했던 은행 동료가 아니라 덩치 커다란 경비원이 서류를 한아름 들고 오자 (티는 안났지만) 아연해졌음. 그 시선을 뭐라고 착각했는지 히카르도는 일단 야릴라다가 -> 상사=윗사람 -> 쭈그러듬. "...뭐지?" 니 서류요... 다이무스는 곰곰히 생각해봄. 아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긴 이런 일을 얘한테 시킨 적이 없음 히카르도는 좀 뻘쭘해하면서 저기 은행원한테 부탁받았다고 함 그날이 주말 앞둔 월말이라 진짜 바빴거든 은행 전체가 발 동동 구르면서 뛰어다니는데 하릴없이 멀뚱히 서있는 히카르도는 좋은 심부름꾼감이었을 거임 그렇다고 해도 서류셔틀을 진짜 시킬 줄이야.. 직원들은 히카르도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는데 한 일주일 보는 사이에 좀 익숙해졌나봄 아님 너무 정신이 없었거나.. 다이무스는 둘 다 일거라고 생각함 계속 히카르도가 서류나 들고 서있자 일단 다이무스는 일어나서 책상 한쪽을 가리키면서 여기다 놓으라고 함 히카르도는 쌓아올린 서류 안넘어지게 천천히 다가와서 책상에 쌓음 쏟지 않으려고 꼭 쥐고 온건지 서류 귀퉁이에 꾸깃꾸깃 되어있음 그래도 사이퍼라 그런지 일반인보다 한꺼번에 많이 가져왔음 실력자 사이퍼가 서류셔틀이나 하고 있다니.. 사정이야 어쨌든 순수한 히카르도의 효율만 보면 이 평화로운 은행의 경비원직은 너무 작은 일임
서류를 다 전해주고 난 다음에도 히카르도는 금방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잠깐 그대로 서 있었음. 문 너머로 월말 은행의 소란스러움과 정신없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반면 다이무스의 집무실은 햇볕도 짱짱하게 들고 차분하고 조용함. 다이무스는 방금 받은 서류의 맨 윗장을 들어 읽어보고 잉크를 찍어 서명한 후 펜을 잉크병에 꽂아 담가둠. 일의 전개야 어떻게 됐든 히카르도는 이제 제 아랫사람이고 회사 동료인데 대화가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임. 살갑게 챙겨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는 귀족 가문의 장남인 다이무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 도량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음. 헬리오스 생활은 어떠냐는 질문에 히카르도는 별 일은 없지만 뭘 시켜줘야 할 거 아니냐는 뉘앙스로 약간 투덜거림. 순간 다이무스는 자주 투덜거리며 치근대던 막내동생을 생각해내고 조금 입꼬리가 누그러짐. 그날 오후 퇴근한 후 저택에서 보낸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다이무스는 이제 슬슬 회사에 히카르도가 맡을 임무를 건의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함. 여기 둬봤자 눈에 띄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회사 관련 업무를 조금 주면 히카르도의 행동목표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날 수도 있음 이제껏 제 배속이나 처지에 별 불만을 품고 있지 않은 눈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름 물론 임무 때에는 다이무스도 동행해야겠지만.
다이무스의 건의가 먹혔던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 때가 적기라고 생각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히카르도에게 사이퍼 관련 임무가 내려옴. 다이무스가 은행원이면서 회사의 에이스인것처럼 히카르도도 은행 경비원이랑 헬리오스 병행임. 맡은 임무는 글림듀 근처에서 사이퍼의 힘으로 일반인을 착취하는 깡패 무리를 소탕하는 거임. 히카르도의 능력이나 다이무스의 경력을 고려하면 다소 어이없을 정도로 시시한 임무이지만 아직 히카르도의 의중을 확신할 수 없으니 좀 더 회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임무는 맡기기 어려웠을 거임. 히카르도 감시를 맡기면서 다이무스에게 맡길 수 있는 임무의 폭도 굉장히 좁아졌으니 오히려 회사로서는 그나마 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임무를 줬다고 봐도 좋음.
경비원 복장을 벗고 제 사복을 걸친 히카르도는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음. 실제로 의욕도 넘쳐나서 안그래도 간단한 임무에 히카르도가 앞장서서 처리해버리자 다이무스는 별로 할 일이 없었음. 깡패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으로 다이무스는 그런 히카르도의 태도를 주의깊게 살폈음. 벌레를 조종하는 능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잘한 공격은 아예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적을 붙잡는다던가, 제 피와 살을 깎아 공격력을 올린다던가 하는 그런 것. 능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모적인 감이 없잖아 있음. 지금도 히카르도가 공간이동능력자가 뒤쪽으로 날린 총알을 피하는 대신 그대로 손을 뻗어서 능력자를 제 쪽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걸 본 다이무스는 칼로 가볍게 총알을 쳐내고 능력자를 날려보내버림. 내민 손끝이 표적을 놓치고 허공을 스치자 히카르도는 다이무스 쪽을 뒤돌아봄. 그 표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아마 놀람에 가까웠음. 따라서 히카르도 쪽을 돌아본 다이무스가 별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다른 능력자들을 처리하러 가지만 히카르도는 잠시동안 그대로 멈춰 다이무스 쪽을 바라봤음.
임무는 예상대로 간단하게 끝났음. 히카르도와 다이무스의 실력에 질려 항복한 무리들은 체포하고 개중 심하게 다친 애들은 회사와 연이 닿아있는 병원으로 보내고 나니 깔끔해졌음. 연락을 받은 경관이 깡패들을 줄줄이 인수해가면서 그 향후 처리나 피해 보상 등에 대한 얘기를 다이무스와 나누는 사이 히카르도는 널찍히 떨어져 그쪽을 바라봄 대화를 마친 후 히카르도 쪽으로 다가온 다이무스는 아까 전과 다르게 그의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챔. 오히려 기분이 확 가라앉은 것처럼도 보임 다이무스 생각으론 간단하긴 하지만 임무도 잘 마쳤겠다 별 불만이 있을까 싶지만 능력자들이야 워낙 개성있는 존재들이고 임무 시에는 방방 날아다니다가 평소엔 소극적인 그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 흠.. 하고 맘. 때 맞춰 회사에서 마중보낸 차가 도착하자 히카르도랑 다이무스는 나란히 뒷자석에 타는데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히카르도가 옆에서 뭔가 할말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눈치를 자꾸 보여서 다이무스의 신경을 건드림. 좀 두고보다 못한 다이무스가 눈썹 한쪽을 올리며 "?" 눈치를 주는데 히카르도는 뜸 좀 들이다가 아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버림. 그러는 걸 보고 말해라 어쩌라 설득할 정도로 다이무스 말재간이 좋지가 않음 그래서 둘은 걍 침묵을 지키며 회사까지 감 어우 덩치있으신 두놈이 타서 그런가 차 안 공기가 좀 무겁네 운전기사는 희생된 것이다 거기다 둘다 팔짱을 끼고 있어서 더 좁음가는 길에 히카르도 집 앞에서 내려주고 다이무스는 남은 업무며 보고차 회사로 향함 물론 보고서 형식 딱딱 맞춰 작성해서 제출할 거지만 대충의 경과보고는 올려야 할 거 같아서 서류 결재맡는 김에 겸사겸사 들름 임무보고라고는 하지만 사실 임무에 대한 얘기는 지나가듯 언급한 게 다였고 히카르도의 평소 태도, 능력이랑 전투 스타일에 대한 것이 주된 화제였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제가 보고 느낀대로 보고하는 다이무스의 대답을 듣고 윌라드는 가타부타 첨언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도 죽 부탁한다고 말함 다이무스는 짧게 목례하고 나옴
다이무스는 회사에 들렀으니까 그동안 히카르도의 감시는 회사의 감시원에게 맡겨둬서 다이무스에게 틈틈히 보고함. 그날 저녁 히카르도가 집을 나와 술집으로 가더라 하는 보고를 받아서 누구랑 만나나 했지만 혼자 테이블 하나 잡고 술병하나 술잔하나 놓고 자작질이나 한다고 들었음 그래도 혹시나 무슨 변동이 있나 싶어 누굴 만나는 낌새나 이상한 기색을 보이면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그날 저녁은 연락을 받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칼을 가까운데 뒀지만 그날 밤이 깊도록 감시원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음 아마 별일이 없었던 모양임.
첫 임무를 마친 이후 다이무스는 서류를 처리하거나 은행업무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면 왠지 자꾸만 히카르도랑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을 알게됨. 히카르도는 (이쪽이 보기엔) 존나 침통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가 다이무스가 고개를 들면 다른데로 시선을 돌려버림. 다이무스는 이게 대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첫임무 끝내고 돌아오던 길처럼 뭔가 할말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른 용건인거 같기도 함. 검사의 감인지 어떤지 상대의 시선에 담긴 뜻을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한 다이무스가 보기에 이건 증오도 아니고 분노도 아님 그렇다고 호의라고 하기도 좀 그럼 어떤 때는 그냥 시선만 이쪽으로 둘 뿐이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임 사실 귀족가문 장남이자 대를 이을 적장자인 다이무스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냥 쳐다보는 것 뿐이니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음 그치만 제가 맡은 손아랫사람이자 감시대상이라는 위치가 다이무스로 하여금 히카르도에게 완전히 무심할 수 없게 만듦. 그래서 히카르도가 다이무스를 보고 있지 않은 때에는 다이무스가 히카르도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기도 하고 뭐 그러게 됨.
그렇게 히카르도를 지켜보는 동안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의외로 요령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 말이 부족하다지 사실상 없다에 가까움 언제는 히카르도가 지나가다가 깨진 컵을 발견한 적이 있었음 어지럽혀져 흩어진 유리조각을 뭔가 싶어서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 같음 지나가다가 컵의 주인인 은행원이 그걸 보고 "헉 내 컵이... 아니 괘.. 괜찮아요..." 하면서 도망가버림 히카르도는 그 모든 과정을 그냥 멀뚱하니 보고 있다가 컵을 발로 슥슥거리더니 걍 지 갈길 감 분명히 오해가 발생한 상황인데 히카르도는 그걸 해명할 생각도 안하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거 같음. 이런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남 음.. 다이무스는 생각함. 자기가 저거랑 완전히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컵을 깼다는 오해를 받진 않을꺼임 그의 두 동생들은.. 벨져는 저가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것에 빡쳐서 불같이 승질을 떨것이고 누명을 벗을 거임 그리고 이글은 야 이거 내가 안했다? 원래 깨져있었어~ 같은 밉지 않은 태도로 상대의 화를 풀어버리겠지 딱히 홀든 형제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해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부정을 덮어쓰는 건 피하고 싶어함 그게 당연한 거임 그런면에서 보면 히카르도는 어찌보면 대범한 것 같기도 함 다만 이런게 쌓이면 일상 생활이 힘들어짐 마피아 조직 생활도 마찬가지였을 듯 하고. 다이무스는 문득 히카르도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완전히 성자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면 제가 저지른 일보다 훨씬 나쁜 쪽으로 과대평가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히카르도의 입사와 첫 임무 사이의 텀이 꽤 길었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임무는 첫 번째를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려옴. 첫 임무를 무사히 마친 것이 헬리오스에 긍정적인 느낌을 준 것 같음 고작 임무 하나 성공시킨 것 가지고 아무 일 없으리라고 생각했을리도 없으니까 지금 회사가 그만큼 일손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됨 그렇게 대단한 임무도 아니었지만 히카르도는 은행에서 일하(기보단 방치당하)는 것보다 훨씬 맘에 들어함 첫 임무처럼 앞서가는 건 똑같지만 가끔 히카르도는 잘 가다말고 한번씩 뒤를 돌아봄 마치 저를 지켜보느라 한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다이무스를 확인하는 것처럼. 감시당하는 것을 눈치챈 거겠지. 지금도 적에게 힐킥을 먹인다음 버릇처럼 뒤쪽으로 더듬듯 시선을 던지는 히카르도를 보며 다이무스는 그를 곁눈질함.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적을 보름달베기로 썰어버림.
그 후로 둘은 실력에 비해 낮은 수준의 임무를 몇 가지 더 함께 함. 임무를 달성하는 동안 회사도 어느 정도 안심했는지 이제는 좀 덜 간단한 임무도 가끔 내줌 그래 봤자 엄청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가 보기에 회사는 이제 히카르도에 대해서 걱정을 한시름 놓은 거 같음 정작 다이무스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음. 임무 시 둘의 대화라고 하면 결착을 지을 때라던가(=공격) 트루퍼를 피로 물들인다던가(=트루퍼 공격) 그런게 다임 가끔 f3나 f4도 누름 물론 집에 가는 차 안은 침묵의 시간!! 사일런트 나잇!!!
이번에 받은 임무는 성격이 좀 달랐음 얘기를 듣자마자 다이무스는 '이제 이런 것까지 주나.'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주요 지역이 아니라지만 연합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역에 둘을 배치한 거임 심지어 내용도 신경쓰임 이번 임무는 최근 도는 이상한 소문에 대한 진상 규명임 최근 글림듀 동쪽에서 안개가 피어난다는데 이게 그 '안개'인지 조사하는 거임 뜬금없긴 하지만 애초에 글림듀는 숲과 호수가 많아 그냥 단순한 자연현상으로서의 안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음 말은 글림듀라곤 하지만 디시카랑 가까워서 연합애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름소문 규명은 걍 쉬웠음 가지고 온 채집장치에 안개 담아서 본사로 갖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물론 적이 있다면 보이느냐 안보이느냐로 '안개'인지 판단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적이 음씀 작업을 끝낸 다이무스가 차로 돌아가려다 이상한 낌새를 챔 연합의 능력자들이 둘이 여기 온다는 얘기를 듣고 온거임 우리 영역에 대한 침범이니 어쩌니 하면서. 눈에 띄는 거물들은 오지 않았지만 몰려온 숫자가 워낙 많음. 아마 쟤들도 둘을 죽일 생각은 없을 거임 연합과 회사는 사실상 휴전상태나 다름 없으니까 그치만 영역을 침범당한 이상 경고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러니 등장한 능력자들도 연합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는 영웅이나 눈에 띄는 거물 대신 중하급들임 여기선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껀데 하필 돌아갈 차와 반대방향임 다이무스와 히카르도는 잠깐동안 안개 속에 모습을 숨긴채 인기척을 죽이고 있었음
그나마 이 상황에서 좀 낫다 싶은 건 지금 저들의 기척이 그대로 느껴지는 걸로 봐서 이 안개는 그냥 평범한 자연현상이라는 걸 알게 된 거임 회사가 이미 디미스트를 점유하고 있는 이상 다른 데서 안개가 나왔다고 해도 관리가 성가실 뿐임 그래도 보고할 때 필요하니까 채집장치는 잘 챙겨둠 이 쪽이 숨어있으니 적당히 포기하고 가주면 좋으련만 연합은 전혀 그럴 낌새가 없음 "상황이 좋지 않군.." 길을 뚫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죽일 순 없으니 어느 정도 손속을 둬야 함 안그래도 다이무스는 한번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음 두 번은 당할꺼같냐 어쩌면 이러다가 3차 능력자전쟁 일어나게 생김 이러한 상황을 짧게 설명한 다이무스가 어떤 형태로 이 난관을 해칠 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가만히 보고 있던 히카르도가 움직임.
미쳐 말릴 틈도 없이 안개를 빠져나간 히카르도는 부당거래랑 불멸자를 차례로 발동함 갑작스러운 히카르도의 등장에 능력자들이 여기다 싶어 공격을 퍼붓는데 히카르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력자들을 공격함 마침내 화력에 부쳐 히카르도가 쓰러지자 능력자들은 환호성을 울리지만 곧바로 그 소리는 경악으로 바뀜 트와일나잇도 아닌데 대기 시간도 없이 부활한 히카르도는 지옥에서 돌아온 것 같은 형상으로 벌레들을 휘몰아침 "이, 괴물...!" 몇 번이고 죽여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그에게 질린 능력자들이 몇 명씩 뒷걸음쳐 달아나기 시작함 뒤따라 나온 다이무스도 베여도 죽지 않을 발치나 팔다리를 겨냥해서 기술을 발동하자 능력자들이 점차 밀리게 됨 결국 둘에게 밀려 후퇴하는 연합의 능력자 하나를 도망가는 동료들 쪽으로 날린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돌아봄 어느새 숲은 조용해져 있음히카르도의 형상을 보면 과연 끔찍한 모습임 누구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옷이 아예 검붉은데다 얼굴에까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음 온 몸으로 벌레가 피어나다가 점차 사그라짐 그렇지만 남아있는 장소엔 시체는 한 개도 없음 그냥 뛰쳐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나가기 전 다이무스의 설명을 듣긴 했나 봄 지친 듯한 모양으로 숨을 몰아쉬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다가오자 조용히 그를 눈으로 쫓다가 고개를 돌려 숙임 히카르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왠지 그 순간 이게 무엇인지 알 거 같다고 느낌
홀든 가는 걸음마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제 몫의 칼을 받게 됨 처음에는 목검이지만 그 후 받는 것은 날이 세워진 진검임 연습 상대도 처음에는 밧줄을 감은 목각인형이었다가 점차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로 옮겨가게 됨. 강함은 옳음. 홀든에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가 이제껏 잘 가꿔왔던 꽃이나 나무나 사랑스러운 개 등을 베어야 함. 여느 때처럼 먹이나 쓰다듬을 기대하며 달라붙는 까만 눈동자. 강해지고 싶다는 소망만으로 베어내기엔 너무나도 벅찼을.
동생은 개를 한번에 죽이지 못했음. 그건 치명상인게 분명했지만 그 죽어가는 꼴을 찬찬히 보고만 있을 정도로 동생의 자존심은 낮지 않았음 아직도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그 상한 몸에 칼자국을 두세번 더 내고 나서야 겨우 숨이 멎은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동생에게 다이무스는 그날 처음으로 동생의 실력에 대해 칭찬했음 잘 했노라고, 너도 이제 어엿한 홀든의 검사라고. 그제서야 아이는 기쁜 듯이 웃으며 제가 저지른 일에서 시선을 떼어냈음.
왜 그때 생각이 지금 나는 것일까. 이 사내는 자기 동생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 다가가 "방해는 되지 않았다"고 말함. "...뭐야?" 히카르도는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임. 다이무스도 그 외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음. 등이며 어깨에서 흙먼지나 죽은 벌레 시체를 털어내며 잠깐 대기하다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중나온 차를 타고 돌아갔음.
자전거 벨소리가 들림.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나서 목을 두어번 꺾은 다음 계단을 내려가서 배달된 이클립스 최신호를 주워옴.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잡지를 테이블에 놓고 펼쳐보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 잠깐 멈칫했지만 히카르도는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염. 하숙집 주인인 늙은 부인이 아침식사라며 트레이를 건네줌. 사실 계약조건엔 아침식사 제공은 없었지만 혼자 살면서 출근하는 히카르도를 보고 아들이나 뭐 그런 게 생각났는지 부인은 거의 매일마다 방으로 식사를 날라줌. 베이컨에 양상추를 넣은 샌드위치에 홍차 한잔, 작은 사과 한 알. 전후 영국 사정을 생각하면 퍽 사치스러운 식사임. 테이블 한 쪽에 놓고 손도 대지 않은채로 히카르도는 다시 앉아서 잡지를 넘기기 시작함. 요 근래에는 별 다른 일이 없어 잡지에는 어느 유명 모델이 F/W 화보를 찍는다는 시덥잖은 가십이 특종기사로 나와있을 뿐임. 히카르도는 계속 페이지를 넘김. 커다랗고 화려한 꽃이 달린 모자를 쓴 아름다운 모델사진 옆에 하얀 종이가 끼워져있음. 오전 10시 - 시내병원에 위문차 방문, 오후 1시 -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 오후 6시 - 후원자와 면담 .... 히카르도는 조그만 종이조각을 읽고 또 읽음. 그다음 잡지에 끼워넣은 후 라이터 꺼내서 잡지 채로 불살라버림. 아름다운 사진들이 금세 타고 그을려 이그러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두 입에 털어넣고 홍차까지 원샷한다음 가는 길에 먹을 생각으로 사과 한 알을 옷에 문지르며 집을 나섬. 남은 트레이는 아래층 문앞에 아무렇게나 갖다놓음.'직장'에 가는 길도 익숙해졌음 히카르도는 사과를 크게 베어먹으면서 느긋하게 걸음 사람들은 이제 경비원옷 입은 자기를 봐도 피하거나 빤히 쳐다보지 않음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분. 히카르도에겐 아직 생소함. 애초에 근처로 집을 잡은 것이니 그리 오래 걷지 않아도 됨. 먹다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버리고 손을 탁탁 턴 히카르도는 은행 안으로 걸어 들어감.
히카르도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하고 목례함 히카르도도 따라서 고개를 숙임 인사 끝내자 다이무스는 곧바로 들여다보던 서류로 돌아감 오늘은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 바빠보임 히카르도도 제 위치로 감 최근들어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은행에 서 있자면 자기도 모르게 다이무스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음.
첫 임무 때 사실 다이무스가 총알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도 히카르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 체력도 충분했고 그깟 잔챙이 데미지 입어봤자 간지럽지도 않음. 여차하면 불멸자 켜서 상처를 아예 없던 일로 해버려도 됨. 오히려 제 평소 성격을 보면 한참 흥 올라있을 때 먹잇감을 채가는 다이무스에게 불만을 느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히카르도가 느낀 건 향수와 비슷했음. 카모라에서 행동대장을 맡고 있을 때 막무가내로 진입하는 자신을 조금 힘겹게 따라오면서도 든든히 받쳐주던 동료. 친구. 그는 공격을 막아주기보단 맞은 공격을 치료해주는 쪽이었지만.
히카르도는 이런 자기 상태가 당황스러움. 아무리 회사에서 쉬쉬한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이무스의 역할이 단순히 자기 사수가 아니라는 건 히카르도도 암. 회사의 실력자를 질낮은 임무로 돌리는 것도 그 임무에 자신에 대한 대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암. 모르긴 몰라도 회사가 얻어준 하숙집도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것도, 임무 때마다 끈질기게 뒤에 따라오는 시선도. 그치만 어리석게도, 정말 어리석게도 히카르도는 그날 감사를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음 마치 다이무스와 진짜 동료나 뭐라도 된 것처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히카르도는 실은 정말 많이 외로웠고 유대에 굶주려 있었음. 틀에 박힌 은행 생활도 마피아 때와 방향은 좀 다르지만 지나치게 심심하다는거 빼면 의외로 그렇게 나쁘진 않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제 목적이 끝나면 회사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음.
모처럼 둘 다 회사 임무 없이 은행 정시퇴근해서 날 밝을 때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음 히카르도가 하숙집에 갔는데 하숙집이 없어짐 "...??!..?" 집은 없고 왠 잿더미만 있어 히카르도는 존나 당황함 이..이게 뭐지... 이미 불 꺼진지 한참 됐는지 바람에 날리는 까만 재만 보고 멍때리고 있는데 집(이었던 곳) 앞에 차가 한대 섬 뭔가 해서 다가가니 뒷자석에 다이무스가 타 있음 "타라." 히카르도 타니까 바로 차 출발함.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감시원을 통해 이미 하숙집이 불탄 걸 알고 있었음 주전자 올려놓은 난로를 계속 켜놓은 것이 원인이었고 주인 마담은 무사히 친척집으로 피신해 며칠 신세를 진다는 모양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히카르도는 "..그런가" 함. 사실 귀중한 물건도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도 그 집엔 없었으니 괜찮음. 얘기를 다 듣고 나니 히카르도는 문득 지금 이 차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함. 다이무스는 지 할말만 다 전달하고 또 입을 다뭄. 좀 기다리다가 히카르도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건지 물어봄. 마침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모양인지 차가 속도를 천천히 줄이기 시작함. 정면을 보고 있던 다이무스가 히카르도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대꾸함. "홀든 저택이다."?! 하 ♡♡ 난 어따 내려줄라고 너만 집에 가냐? 히카르도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봐도 다이무스는 별다른 설명 이딴거 없이 '오늘부터 하숙집이 구해지는 때까지 묵으라'고까지밖에 말 안함. 사실 여기에는 은행 근처에 감시에 적절한 위치의 하숙집이 없고 홀든 저택은 가뜩이나 넓은 데다 같이 살던 이글마저 나가 빈 방이 널널하게 놀고 있으며 홀든가의 모든 재산은 아직 다이무스의 부친이자 현 가주인 홀든 경의 소유이나 헬리오스와 상의한 다이무스가 차기 가주의 권한으로 영예롭고 유서깊은 홀든 저택이 감히 길거리 하숙집 신세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지만 다이무스는 말 안함 걍 말 안함. 다이무스가 말 안하니까 히카르도도 별 도리없이 걍 따라서 홀든 가 들어감. 그렇게 당분간 둘은 같은 저택에 기거하게 됨.
히카르도에게 주어진 방은 이층 동쪽 방임. 원래는 이글 방이었으나 주인이 없어도 집사가 잘 관리해서 깨끗함 이글이 쓰던 때보다 훨씬 깨끗함. 딴 방도 많은데 이 방 준 이유는 다이무스 바로 옆방이기 때문임. 이 방에서 뭔 짓을 꾸미면 옆방에 있는 다이무스가 모를 리 없음 저택 주변에 높은 건물(이라기보단 아예 건물이 없음 홀든가 부지임)이 없어서 감시가 어렵기 때문에 아예 방을 이렇게 잡음 참고로 이글 방이 다이무스 바로 옆방이었던 이유도 이거랑 비슷함 이글이 맨날 도망가고 이상한 짓해서
저택이니 당연히 원래 히카르도가 묵던 하숙집보다 훨씬 방이 좋음 히카르도는 좀 돌아다니며 방이며 창 밖 풍경이며 좀 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임. 아 일이 뭐 이렇게 되지.. 히카르도가 다이무스를 처음보다 가깝게 느끼는 건 맞는데 솔직히 이렇게 가깝진 않음 아직 뭘 한건 아니지만 일 꾸밀라면 하다 못해 잡지라도 배달시킬려면 이런 저택에 살면 안됨 하숙집에 살던 때도 알게 모르게 감시원은 붙였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가까이있는거 진짜 불편하고 이 저택 차 없으면 빠져나가지도 못하니 외출할래도 존나 눈치보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회사 입장에서 진짜 좋은 감시환경임 너네 일부러 불 질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치만 적어도 다이무스가 곁에 있으니 다른 감시원이 붙는 건 없어질 거 같음 그나마 나음 정보원한테 주소 옮겼다고 메일이나 칠까.
방에서 좀 대기하고 있을려니까 집사가 오더니 저녁식사 하시라고 함. 아무리 차기 가주 명령이라도 역사깊은 귀족 저택에 왠 이상한 놈 들이기 못마땅했을 텐데 집사는 그런 태 없이 공손한 태도임. 식당 가니까 다이무스가 상석에 있고 그 옆자리에 식사 준비 되어 있어서 먹는데 히카르도는 자기 온다고 식탁이 화려한가 했지만 안그럼 홀든 가는 원래 맨날 잘차려먹음
가뜩이나 같은 은행 + 같은 사이퍼 임무였는데 거기에 같은 집까지 더해지니 둘은 거의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셈이 됨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자기 직전까지 보는게 서로의 얼굴임 그러나 둘이 주고 받는 말은 임무 관련된거 빼면 같이 살기 전이나 후나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은 되지 않음 지금도 나란히 앉아 식사하는 식탁은 식기 소리나 옷깃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외엔 별 다른 소리가 나지 않음 다이무스야 워낙 귀한집 자제라 식사태도 좋은 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외로 히카르도의 태도도 그렇게 나쁘지 않음 뭐 포크와 나이프를 마치 달고 태어난 제 수족인양 유연하게 놀렸다건가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귀족인 다이무스가 보기에도 히카르도의 식사예절은 썩 괜찮은 수준임. 다이무스야 몰랐지만 히카르도는 이런 '귀족적인 식사'에 어느 정도 익숙함 왜냐하면 마피아 시절 성과가 잘 나오면 가끔 보스가 상이랍시고 이런저런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곤 했거든 사실 히카르도는 고아시절부터 거리에서 막 구르며 자라서 배만 부를 수 있으면 거의 뭐든 상관없이 잘 먹고 그런 식당은 옷차림부터 구두에 머리까지 넘겨야해서 불편해했지만 보스는 사내녀석이 크게 될려면 이런데도 드나들고 그래야하는 거라고 어거지로 식사예절 가르치고 했으니까 그거치곤 먹는 속도가 빠른게 좀 흠이다만 걍 봐줄만함 히카르도는 홀든 가에서 밥 먹을 때마다 보스가 상 주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묘함 상 받는 거도 아닌데 칼질 하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남 근데 보스는 말 하는데 다이무스는 안말함
9시 딱 되서 은행 여니까 아침부터 손님이 옴 르 블랑 가의 영애 마를렌 양과 그 일행임 둘은 은행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마들렌만) 다이무스를 발견하자 반색을 하고 다가옴 그러나 사뿐사뿐하게 걷지 뛰지는 않음 마들렌은 매달 헬리오스에서 나오는 약간의 용돈을 저축하고 있음 르 블랑의 재산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푼돈이긴 하지만 자기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다이무스는 그럴꺼면 아예 회사에다 일정 금액을 계좌로 넣어달라고 하면 좋지 않나 싶음 그러나 마들렌은 자기가 번 돈은 자기 손으로 저금하고 싶다고 고집함 의외로 다이무스는 이게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고 있음 좀만 생각해봐도 마들렌의 거처와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은행은 거리가 꽤 있고 그 사이에 더 가까운 은행도 있음 아무리 다이무스 앞에 늘어선 줄이 길어도 마를렌은 다른 창구로 가지 않고 꼭 그 줄에 섬 혹시나 일이 바빠서 다이무스가 자기 일을 맡아주지 못할 때면 시무룩해짐 이렇게 티를 팍팍 내는데 다이무스가 모를꺼라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함 그러나 다이무스는 마를렌의 감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음 어렸을 적 성숙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거처럼 보이는 어른을 동경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함 게다가 마를렌은 아직 어릴 적에 아빠를 잃었음 물론 다이무스가 아빠 대신이 되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있지만 마를렌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자기를 따르는 것도 그런 영향이 있을거라고 여김 유명한 가문의 장녀(이자 외동딸)이라는 위치에서 오는 부담과 책임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님
마를렌이 가지고 온 돈을 계좌에 넣어준 후 다이무스는 잠시 마를렌과 새로운 계좌 개설에 대해 얘기를 나눔 마를렌은 샬럿에게도 계좌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다고 함 다이무스 앞에서도 수줍음을 타는 샬럿을 위해 마를렌이 대신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얘기가 길어지자 샬럿은 언니와 다이무스의 눈치를 조금 보며 은행을 둘러보다가 히카르도를 발견함. 아마 히카르도가 새롭게 회사에 합류했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를 하고 싶어졌던 거 같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겉모습이 매우 싸나움 되게 마피아같음 샬럿은 용기를 내서 히카르도 앞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까지 다가감 그러나 쉽게 입을 떼지 못함 히카르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인상이 나쁜 걸 고려하는 건지 샬럿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다른 데만 봄 샬럿은 히카르도가 자기 쳐다보면 인사하려고 했는데(그치만 진짜 보면 도망감) 히카르도가 자기를 안보니 마음이 조급해짐 그래봤자 모기만한 소리로 "저... 저...저기.." 이렇게밖에 못냄 더군다나 자기 가림막이 되줄 언니도 아무도 옆에 없음 샬럿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간신히 "안녕하세요!"라고 새된 소리를 지름 히카르도는 얼떨떨해하면서 내려다보더니 어 그래 안녕 이렇게 함 돌아보니 은행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둘을 보고 있음 샬럿은 얼굴이 발개짐 다이무스는 그 쪽을 좀 본다음 다시 마를렌과 얘기함 마를렌은 왠지 다이무스가 자기 보기전에 웃은 거 같애서 가슴이 설렘얘기 끝내고 회사로 가려니까 어느새 히카르도랑 샬럿이 서로 익숙해져서 히카르도는 쭈그리고 앉아서 샬럿은 서서 조금씩 얘기하고 있음 샬럿이 놀랄때마다 비구름 그리는데 히카르도는 이상하게 계속 자기 소매 한쪽 끝이 젖는 거 같다고 생각함 마를렌이 숙녀답게 다이무스랑 히카르도한테도 치맛단 기울여서 인사하고 나가는데 샬럿은 자꾸 뒤를 돌아봄 히카르도는 가만히 보고있다가 다시 자기 업무로 돌아감 그러고보니 카모라 조직에도 애들이 참 많았음 능력자는 물론이고 비능력자 아이들도 여러가지로 쓸 수 있었으니까 히카르도를 따르는 아이는 잘 없었지만
애들 가고 난다음 히카르도는 다이무스한테 넌지시 가서 물어봄 회사에서도 어린애들을 키우나보지?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질문에서 회사'에서도'라는 말에 충분히 신경쓰며 저 둘은 명왕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며 너무 치열한 전장에는 투입하지 않는다고 알려줌 "하긴 능력 발현하려면 아직 이른 나이겠군." 그 말에 다이무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앉은 자리에서 히카르도를 올려다봄 "사이퍼의 능력발현은 나이와 상관없다. 알고 있지 않나?" 실제로 능력자들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강한 능력을 갖는 경우도 많음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이 어떤 계기를 통해 씨앗이 발아하듯 드러나거나 훈련을 통해 점차 증진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튼 능력이 발현되는 나이는 정해진 게 아니니 이를 것도 늦을 것도 없음 히카르도는 잠시 인상을 팍 쓰더니 뭐 그랬지 이런 식으로 대꾸함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감 다이무스는 방금 대화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서류업무함
이제 헬리오스에서 히카르도에게 주는 임무 수준도 많이 올라갔음 처음 받았던 불량배 퇴치에 비하면 거의 골드와 브론즈의 차이라고 봐도 좋음 회사에서 조만간 다이무스 없이 히카르도에게 단독으로 임무를 주는 것도 고려해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음 그렇게 되면 적어도 다이무스는 지금보다 훨씬 운신이 자유롭게 되니 헬리오스에서는 더 이상 회사의 에이스를 하릴없이 놀리지 않아도 됨 히카르도랑 임무하면 얘가 앞서 가면서 왠 쓸데없는 철거반이랑 립까지 다 쓸어가니 다이무스는 거의 할 일이 없어서 진짜 심심함 처음에는 히카르도가 안따라오게 다른 라인으로 가서 쓸어보곤 했는데 그럼 감시의 의미도 없고 히카르도가 어느새 자기 라인 쓸다말고 이쪽으로 와서 걍 그만뒀음 애초에 시간에 그렇게 구애받는 임무도 아닌데 작은 일에 신중하고 싶은 다이무스는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다이무스가 붙어있으면 그 진중함에 눌리는 건지 정신없이 구는건 좀 덜함 지금도 저쪽의 적 탑을 위에서 굽어보며 "저기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부수러 가지"하는 걸 다이무스는 안개지역이라 안보이는 거고 매복 가능성이 있다고 사무적으로 대꾸해줌 그래도 불멸자 키고 뛰쳐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히카르도는 거 드럽게 신중하다며 투덜거려도 일단 얌전히 옆에 붙어있음 다이무스 이놈이 불필요한 말은 물론이고 필요한 말조차도 안하는 대신 한 마디 하면 그게 다 쓸데가 있거든 대신 안개 속으로 거미지옥 넣어서 적 한마리 끌고 와서 패대기쳐 팬다음 의기양양하게 웃음
결국 타워 끝까지 밀고 다 이긴 판에 이곳저곳 누비며 적들을 써는 히카르도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다이무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일을 처리함 사실 다이무스는 누가 말걸어도 필요하지 않은 이상 대꾸 잘 안해주긴 하지만 히카르도는 그거에 별로 신경 안쓰는 거 같음 그리고 처음 회사 찾아왔을 때 눈구멍에서 안광이나 불태우며 나.. 복수의 히까르도... 반.드.시.복.수.한.다 이딴 분위기 두르고 있어서 과묵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농담도 던지고 가끔이면 실없는 말도 함 근데 입을 꾹 다무는 시점이 있음 옛날 마피아질하던 얘기할 때 곧잘 말하다가 급 말이 없어짐 다이무스가 보기에 히카르도는 아직 심리적으로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임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시뇨리아 사건 이후 자기 스스로 조직을 나왔다는데 마피아에서 탈퇴 의례도 없이 제 발로 걸어나왔다는 건 실상 거의 내쫓긴거나 다름없음 직접적으로 말은 안해도 히카르도 자신도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없는게 확실함 그러면서 마음은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는 거 같음 다이무스는 이게 왠지 거슬린다고 생각함 물론 얘가 평생 은행 경비원 해먹고 살진 않겠지 자기 목적 끝나면 회사 말고 다른 데로 갈거고 이건 확실함 다 상관없는데 그 주변은 아님 다이무스 자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여튼 그러함
여느 때처럼 임무 끝내고 다이무스는 히카르도한테 저택 차 타고 먼저 집에 가있으라고 함 방금 임무에 대한 건 아니고 헬리오스에서 급하게 호출이 들어왔기 때문임 처음엔 히카르도 감시해야 되니까 같이 데려가려고 했는데(아예 히카르도도 "나도 가야 하나?"고 물어봤음) 그런거 아니고 오히려 회사 내에서도 비밀스러운 얘기인 거 같은 눈치라 일단 혼자 회사로 감 히카르도는 순순히 집에 돌아간다함 물론 돌아가는 차 지붕 위에는 감시원이 딸려감
혼자 저택으로 돌아간 히카르도는 할일이 없음 오늘치 회사 일은 다 끝냈고 고용한 첩자한테 연락 오려면 멀었으며 여가시간 보낼 별다른 취미생활이 있는 거도 아님 옛날엔 일 끝나고 펍에서 술먹으면서 친구랑 시덥지 않은 농담따먹기 하는게 취미 비스무리한 거였는데 그나마도 없어짐 사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혼자 술집가서 자작할만큼 술을 좋아한 것도 아님 다만 조금 알딸딸한 기분으로 마음에 있는 말 없는 말 정신없이 꺼내며 웃는 그 분위기가 좋았던 것 뿐임. 히카르도는 회사에 뭔 일이 있길래 자기 떼어놓고 다이무스만 가나 궁금해하면서 방 안에 놓인 푹신한 카우치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림 방안에 들여놓은 값비싸보이는 책장에는 마찬가지로 비쌀 거 같은 책들이 가득 들어있음 히카르도는 책을 꺼내서 조금 넘겨보다가 다시 집어넣음 이걸 읽으라고 놓은거야 보고 자라고 놓은거야.. 이 방 전주인도 책엔 손도 안댔는지 책은 죄다 표지가 빳빳한 새것임 저녁시간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고 다이무스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음 = 심심함. 주먹을 까딱까딱하면서 벌레나 가지고 놀던 히카르도는 문득 집 안에 이상한 기척을 느낌 하인이나 다이무스는 아님 이건 히카르도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기척임 아무래도 침입자인 거 같음 "홀든 저택에도 도둑이 드는군?"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던 히카르도는 가지고 놀던 벌레를 꾸깃하며 일어남
집안 사람들 모두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저택 안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 히카르도는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침입자를 쫓음 집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인지 침입자는 제 기척을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저택 주변을 서성임 입구에서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집을 빙 돌아서 저택 동쪽으로 옴 마침 히카르도가 쓰고 있는 방 쪽임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건지 벽을 타고 올라오는 듯함 히카르도는 창문 바로 옆에 숨 죽이고 서 있다가 침입자가 막 창틀을 밟고 올라오려는 순간 거미지옥으로 끌어당김 "우왁?!?" "뭣?!" 순간 던진 거미줄이 다시 튕겨나와 히카르도 쪽으로 돌아옴 무슨 기술을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제 공격을 튕겨낸 듯함 튕겨낸 본인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히카르도를 보고 놀란 눈치임 '이 녀석.. 검사다.' 침입자가 등 뒤에 지고 있는 커다란 칼을 보며 히카르도는 손 안에 벌레를 짓이기며 부당거래 발동할 준비를 함 "집안에 왠 쥐새끼가 있어?" 아직 상황 파악은 덜 된 듯 하지만 침입자는 적어도 히카르도가 자기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함 그리고 그 사실에 불쾌해하는 것처럼 보임 침입자가 팔을 길게 뻗어서 칼을 뽑는 것을 보고 히카르도는 가볍게 뒤로 물러나 최대한 거리를 벌림 저 길어보이는 칼의 범위는 얼마나 될까 눈여겨 보면서 그러고보면 저 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임 히카르도가 거리를 재는 걸 보고 상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염 "사영-"
상대가 칼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히카르도는 힐킥을 날렸지만 빨랐던 것은 히카르도도 침입자도 아닌 다이무스였음 침입자가 휘두른 칼은 칼집으로 내려찍으려던 히카르도의 발은 팔등으로 막은 다이무스는 칼집을 잡은 손에 가볍게 반동을 줘서 밀어냄 침입자는 갑작스러운 다이무스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그대로 밀려가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나더니 새된 소리를 지름 "형!" 뭐야 형..? 마찬가지로 난입한 다이무스에 놀랐던 히카르도는 침입자의 외침에 다시 다이무스를 쳐다봄 다이무스는 한숨 비슷한 걸 쉬며 히카르도의 다리도 밀어냄 집에 오자마자 보이는 게 지 동생이랑 회사 동료랑 한타 뜨고 있는 꼴임 "..뭣들 하는거냐." 이글 넌 여긴 어쩐 일인 거고. 무뚝뚝한 형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넘긴 이글은 가볍게 말을 던짐. "나야 형이랑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으려고 들렀지. 근데 저건 뭐야?" "저거?!" 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호칭에 히카르도가 눈을 부라리거나 말거나 이글은 그 쪽을 힐끗 훑더니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제 형에게만 계속 말을 걸음 "저게 그 MERCILESS인가 본데 집에까지 데리고 오는 ㄱ ...잠만 쟤한테 내 방 줬어?!" "다이무스 저건 니 동생이냐? 잰 왜 멀쩡히 있는 문 놔두고 창문으로 들어와?" "아 형 진짜 내가 아무리 집 나갔다 그래도 어떻게 남의 방을 막 줘!" ")@(%(_@))!!!" 둘이 닥달하는 양을 가만히 보던 다이무스는 다시 한숨을 쉬며 칼 손잡이에 손을 얹음 그리고 기술을 발동함 "이제야 조용해졌군..." 뭐래 ♡♡ 그거 니 기술 아니잖아
이글은 안 부어오른 뺨으로 조용히 음식을 씹음 한쪽으로 씹는거 불편하고 안씹고 가만히 있어도 아픔 아 형새1끼 공탔나 딜 ♡♡ 아퍼.. 히카르도는 나이프로 고기 찢으려다 삐끗함 솔까 진짜 거짓말 안보태고 어깨 나간거 같음 사수고 나발이고 적당히 봐가면서 개겨야지 안되겠음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이무스는 우아한 태도로 칼질이나 함 둘이 밥 먹으면서 계속 궁시렁거리니까 천천히 식사를 마친 다이무스는 냅킨으로 닦고 식기까지 한 군데에 치워놓은다음 입을 염 다이무스는 귀족이라 밥 먹을 땐 진짜 말 안함 일단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와 이글에게 서로를 소개함 쟤 내 동생ㅇㅇㅇ 쟤 내 회사 동료ㅇㅇㅇ 이렇게. 그러고 보니 히카르도는 홀든네 막내가 연합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음 업무상(?) 매달 사는 이클립스에 특집이 되어 다뤄지던 걸 대충 읽은 기억이 남 천천히 보면 둘이 얼굴 생김은 좀 다르지만 머리색 만큼은 형제 아니랄까봐 꼭 닮았음 성격도 지 형과는 많이 다른 거 같음 시끄럽기도 함 이글은 계속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임 그게 히카르도가 자기 들어올 때 다짜고짜 공격했기 때문인지 아님 지금 자기 방을 쓰고 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음
물론 히카르도도 할말 많음 애초에 멀쩡하게 문 두드리고 내가 이 집 막내임 하고 걸어 들어왔으면 히카르도도 그렇게 다짜고짜 거미줄 날리진 않았을꺼임 진짜 도둑이었으면 다이무스한테 빚 하나 지우는 건데 도둑도 아닌 주제에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게 아주 짜증남 거기다 오해 풀렸음 됐지 계속 지 형한테 궁시렁거리면서 쟤가 어쨌네 저쨌네 하는 것도 신경 거슬림 지만 형있나 물론 히카르도는 형이 없지만 여튼 이 세상에 형 있는 놈이 쟤 하나는 아니잖음 히카르도는 밥을 팍팍 먹은 다음 잘먹었다고 하고 홀든 둘 남겨놓고 그냥 일어남 히카르도가 등 돌려 자리 뜨는 걸 가만히 보던 이글은 고개를 돌려서 제 형을 빤히 쳐다봄 "? 뭐냐 이글" "형 쟤 안따라가?" 사수라는 건 눈가림이고 실은 감시 대상이라며. 연합에도 소문 다 났어. "괜찮다." 다이무스가 태연히 대꾸하자 이글의 표정이 미묘해짐. 그러나 이글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최근에 자기 지낸 얘기를 대충 함 물론 연합에 해가 될만한 내용은 빼고 그 정도 분별력은 있음 다이무스도 이글이 감추려는 얘기는 캐내지 않음 세력이 다른 형제가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때문임
자기 방으로 돌아온 히카르도는 어쩐지 울적해짐 오늘 잠깐 봤지만 이글이랑 다이무스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보였음 물론 그렇다고 다이무스가 말을 더 많이 하고 살갑게 하고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둘 사이에 있는 분위기가 그럼 특히 다이무스는 한숨이다 어쩌다 해도 평소보다 상당히 무르게 굴고 있는 거 같아 보임 형제니까 어렸을 때부터 계속 같이 지냈을테니 서로 가까울 만도 함 히카르도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었음 지금은 틀어져버렸지만. 이글과 다이무스를 보면 히카르도는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자꾸 생각남 그게 히카르도 기분을 가라앉게 함
밥 다 먹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림 누군가 했더니 하인임 작은 주인님이 히카르도를 찾는다고 서재로 와주십사 하는 얘기임 히카르도는 알았다고 함 서재로 가니 다이무스가 책상에 앉아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고 있음 그리 오랜시간 봐온 건 아니지만 히카르도가 보기에 다이무스는 맨날 두 가지 중 하나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임 하나는 서류 다른 하나는 칼. 듣자하니 저 동생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거라던데 이런 날도 서류 업무는 예외가 없나 봄 히카르도가 들어온 걸 본 다이무스는 천천히 용건을 말함 요 며칠 뒤 임무가 하나 주어질껀데 그건 자기랑 가는게 아니고 히카르도 단독임무라고 함 "단독임무라고?" 놀란 히카르도가 눈을 치켜뜸 그동안 주어진 임무는 그 내용이야 어땠든 간에 불만없이 성공적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이렇게 빠르게 단독임무가 내려올 줄은 몰랐음 다이무스는 다시 임무 내용을 간결하게 설명함
들어보니 흔한 공성전이고 단독임무라고 해도 아예 혼자하는 건 아니고 헬리오스의 사이퍼들이 같이 따라감 다만 다이무스가 없을 뿐임 그 말은 헬리오스의 직접적인 감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예 다이무스와 사수-후배 관계를 벗어나는 건 아니고 그 날 임무만 특별히라는 것 같음 음 이 얘기는.. 히카르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어봄 "그럼 다이무스 넌 그날 뭘 하지?" ".. 내게도 맡겨진 임무가 있다." 다이무스가 말하기 전 티나지 않을 정도로 약간 뜸을 들였다는 것을 히카르도는 눈치채지 못했음 여튼 다이무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번 단독임무는 히카르도를 인정했다기보단 다이무스를 잠시 쓸데가 있어서 떨어뜨려놨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함 "뭐야, 날 위한 단독임무는 아닌거군?" 히카르도가 생각하기에 헬리오스는 아직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음 그동안 해결한 임무가 얼만데 매번 맡기는 임무도 시시한 것들 뿐이고 물론 그럴 만도 하다만.. 이번 임무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눈치의 히카르도를 가만히 보던 다이무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혼잣말처럼 입을 염 "너만한 능력자를 이렇게 돌리는 건 회사로써는 손실이다만." 히카르도는 잠시 벙벙함 지금 이거 뭐지? 이건 마치 다이무스가 자기를 인정하고 위로라도 해주고 있는 거 같은 말투라 별 기대 안했던 히카르도로써는 상당히 의외였음 "뭐... 그, 그렇긴 하지."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가만히 올려다봄
히카르도는 다소 격앙된 태도로 서재 문을 닫고 나옴 가는 길에 놓여진 소파 위에 다이무스 동생 이글이 뒹굴거리며 누워있음 어디 앉을 때나 허리를 쭉 펴고 정좌하는 형과는 대조적인 모습임 히카르도는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다가 누워있던 이글과 눈이 마주침 히카르도는 이제 이글을 봐도 별로 화가 치밀지 않음 이쪽은 무려 '너만한 능력자'임ㅋ 저를 보고 흥, 하고 웃으며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히카르도의 뒷모습을 본 이글의 표정이 또 미묘해짐 누워있던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이글은 다리를 훅 내려 반동으로 일어나 앉은 다음 다이무스의 서재로 들어감
다이무스는 이글이 어렸을 적부터 늘상 봐온 모습 그대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음 지하연합으로 소속을 옮겨 집 나와 생활한 것도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홀든 저택은 놀라울 정도로 변함이 없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오히려 그렇기에 제 형이 오늘 보인 태도에서 이글은 더욱 강하게 위화감을 느꼈음 제가 알기로 제 큰형은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음 일부러 숨기고 있다기보단 원체 표현이 서툰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튼 그 표현이라는 게 엄청 극단적이어서 이글은 다이무스의 입에서 좋다, 싫다는 표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음 그런 티를 내는 것도 본 적 없고. 이글이 다이무스를 답답해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 여튼 그래도 다이무스도 인간인 이상 호불호는 있음 이글도 원래는 몰랐는데 오랜 시간 함께 자라고 봐오면서 겨우 깨달을 수 있었음 다이무스는 홀든을 좋아함 가문 자체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물론 그런 티는 안낸다) 가만히 보면 가족들 특히 자기랑 둘째 형 벨져를 엄청 아끼는 게 보임 실상 가문의 여러가지 일을 책임지고 도맡고 있는 것도 동생들한테 짐 안가게 하려고 그러는 감도 좀 있음 말은 안그렇게 하지만 이글도 눈치가 있으니 이건 암 근데 오늘 본 히카르도는 다름 얘는 홀든이 아닌데 다이무스는 마치 얘가 홀든 가 숨겨진 막내동생이라도 되는 양 대하고 있음 처음에 제 형이 헬리오스에서 왠 신입 사수를 맡았다는 얘기 특히 그 신입이 언제 일칠지 모르는 속셈 검은 녀석이라는 걸 들었을 때만 해도 이글은 형이 또 골치아픈 임무를 맡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들었음 그도 그럴 것이 회사는 다이무스를 신뢰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까다로운 임무는 제 형에게 죄다 몰아주곤 했으니까 그거까진 괜찮음 솔까 집에서도 그러거든 형이 워낙 능력있는 남자라ㅇㅇ 근데 오늘 집에 오니까 그 골치아픈 신입이 여기 저택에 같이 살고 있음 아무리 형이 워커홀릭이라도 공과 사는 구분함 사정이 어쨌든 저택에까지 회사 일을 끌어들이는 게 조금 이상함 이 때부터 살짝 미심쩍었는데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이건 확실함 확실하게 이상함 얘기 들은 바로 형은 히카르도한테서 하루종일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해야하는데 이건 뭐 능력자 아무도 없는 저택에 혼자 두질 않나 밥 먹고 방으로 가는 걸 그냥 내버려두질 않나 마치 신뢰라도 하는 사이인 양 굴고 있음 지금도 형과 얘기하고 나온 히카르도 태도를 보면 얘기 내용이 어쨌던 간에 완전히 공적이지 않았다는 게 확실함 물론 같이 지내다보면 어느 정도 마음 맞고 친해지는 거야 당연함 그러나 상대는 저 다이무스 홀든임 공과 사가 분명한 자기 형 이글은 옛날엔 그 단호한 구분이 참 싫었는데 지금 형이 보이는 모호한 태도도 마냥 반갑지 않고 이상함
이글이 서재에 들어와서도 영 우물쭈물대며 말을 하지 않자 다이무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여 이글을 돌아봄 "왜 그러느냐 이글?" 내 형이 이렇게 잘났고 쩔어주는데 왠 이상한 놈팽이가 끼어들어서 일이 꼬이고 있음 이글은 퍼뜩 생각함 설마.. 이거 그런건가? 이글은 언제나 다이무스가 앨리셔같은 이쁘고 참하고 사랑스럽고 강한 여자랑 결혼해서 토깽이같은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 꺼라고 생각했음 미래예상도 : 형이랑 이쁜 형수 벨져 그리고 나랑 앨리셔 by 이글 물론 저 목석같은 형이 결혼하려면 연애는 힘들고 선 봐야겠지만 그래도 홀든가의 장남 정도면 들어오는 선자리도 빠방할꺼임 이쁘고 강하고 참하고 거기다 가문까지 좋겠지 그치만 사실 이글은 다이무스가 가문에서 정해주는 이쁘고 착하고 가문까지 좋은 여자가 아니라 왠 시골 말괄량이랑 결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함 아니 그랬으면 좋겠음 그동안 가문이 정해주는 일 직업 세력에 착실하게 따라온 형이니 사랑만큼은 자유롭게 했으면 싶었던 거임 이왕이면 파격선언을 뙇! 해서 가문의 나이든 꼰대들을 기함하게 했으면 좋겠음 그거 진짜 재밌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히카르도는 굉장히 이상적인... 형숫감임 지금은 회사 소속이지만 뭔가 숨은 정체가 있어 수상한데다 좋은 가문 출신도 아니고 고아에 마피아 출신이니 따지자면 연합에 가까움 게다가 남자 이거슨 The 파격 of 파격.. 아까 좀 울컥하긴 했지만 사실 이글은 형이 남자를 좋아하던 말던 상관은 없음 걍 형이 잘 살면 됨 다이무스가 좋아한다면 시라노나 피가로 역할이라도 기꺼이 해줄 수 있음 글은 형이 더 잘쓰겠지만 근데.. 형이 저러고 있는 저게 진짜 연애감정 같은 거 맞나 이글은 신경쓰임 본 적이 없어서 다이무스가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전혀 모르겠음 여자들 대하는 태도는 신사적이긴 한데 사무적임 저 미묘하게 살가운 태도는 연애대상이라고 하기엔 또 조금 미심쩍인 면이 있음 아 대체 이게 뭔데 형님아 답답해 말 좀 해봐... 쉽사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이글을 보고 다이무스는 "할 말 없으면 나가라." 딱 한마디만 함
저러는 걸 보면 막상 다이무스는 자기 태도에 대해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음 이글은 잠시 생각해봄 사실 연애감정이면 어떻고 다른 감정이면 또 어때 다 큰 형제한테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봄 궁금이야 하다만 벨져만 같았으면 애저녁에 그냥 넘겼을거임 그러니까 이건 맨날 큰 형이 저를 더러 가볍다느니 제발 생각 좀 하고 살라느니 지겹게 충고해댔던 보답이라고 해두자 "형,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형이 쟤 대하는 태도가 좀 이상한 거. 그 말을 듣고 다이무스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눈동자가 짙은 색을 띄며 가라앉음 본인도 어느 정도 자각이 있었다는 얘기임 그렇다면 이글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음 이글은 어깨를 으쓱함 "....." "뭐,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이글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손을 팔랑대며 나감 아참 나 그리고 오늘 회식 있어서 자고 갈꺼 아니야 내 방 없어진 건 속 좀 쓰리긴 하지만 짐 안빼도 돼~ 무슨 일이든 길게 고민하지 않는 그답게 서재 바깥으로 나가는 이글의 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함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힘 동생이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다이무스는 혼자 방 안에 남게 되자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임 이글 말대로임 자신은 히카르도를 단지 회사 동료 혹은 감시해야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 그리고 그 자신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음 다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임 다이무스가 보기에 히카르도는 겉모습은 멀쩡할지 몰라도 속은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잃어버린 것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그것을 놓치 못하는 것으로 보임 가엾고 또 안쓰러움 그 모습은 다이무스로 하여금 누군가를 자꾸만 생각나게 함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켜봐왔던, 등 뒤를 따라오며 형님에게 도움이 되겠노라고 자랑스럽게 웃던
벨져. 사랑하는 내 동생.
다이무스는 다시 목울대를 낮게 울리며 차마 눈을 감음 그러면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남
처음 히카르도에게 "방해 되지 않았다"고 격려한 날 그 불안해보이는 모습을 보고 어린 동생을 떠올린 날부터 다이무스는 줄곧 히카르도에게서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었음 동생은 훌륭한 검사였음 그날 건냈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에는 일말의 꾸밈도 과장도 없었음 저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나 시간과 경험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홀든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음 세간에는 그를 오만하고 자존심만 드높은 얼치기로 취급하나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연합의 영웅 루이스와의 대결 이후임 애초에 검사란 제 검 끝과 드높은 긍지로 먹고 사는 직업인 만큼 자존심이 높은 건 당연함 그조차도 제 실력에 걸맞게 당당하고 호기롭다고 일컬어졌을 터였음 루이스와의 대결 이전에는.
동생이 당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연합의 신입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이무스가 느낀 것은 가벼운 낭패감이었음 늘 방자한 막내동생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아직 젋은 나이이니 치기를 부렸던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음 그 대결로 인해 헬리오스는 지하연합을 완전히 흡수합병하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명왕이 나섬으로 인해 2차 능력자 전쟁은 연합이나 회사나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로 마무리지어졌으니 벨져는 사실 그리 대단한 오점을 남긴 것은 아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던가, 저 먼 동양쪽에서는 그런 말도 있는 모양임 그 말 그대로 전장에서 한 순간 이기고 지는 것은 그닥 의미가 없음 오늘은 이겨도 내일은 질 수 있음 크게는 연합과 회사의 관계가 그러하고 검사의 삶이 그러함 이글이나 벨져는 물론이고 다이무스도 질 때가 있고 임무를 실패할 때도 있음 애초에 홀든의 이름은 불패로 유명한 것은 아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느냐. 졌다해도 최대한 피해가 없는 방향으로 혹은 그 패배에서 뭔가 배워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함 그러나 벨져의 의견은 제 형과는 달랐던 모양임
다이무스가 벨져의 병실을 찾은 것은 2차 능력자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전쟁의 뒤처리가 끝난 시점임 그보다 더 일찍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회사의 실력자인 다이무스는 그 동안 눈코 뜰새 없이 바빠서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었음 생각보다 상처도 그리 깊지 않고 회복도 순조롭다 했음 동생은 오랜만에 보는 형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음 다이무스는 동생의 실책을 가볍게 질책했음 아무리 네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나 아직 제대로 능력 발현조차 하지 않은 능력자를 상대로 방심했다는 것은 아직 수련이 부족한 증거라고, 부러 냉정하게 말하는 자신을 보는 벨져의 눈밑이 처음부터 까맣게 죽어있어서 다이무스는 순간 옅은 동정심을 느꼈지만 가열차게 잘라냈음 이 충고가 지금은 쓸지언정 나중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제 동생으로 하여금 좀 더 높은 수준의 마음가짐과 검실력을 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음 오산이었음
지금도 다이무스는 가끔씩 떠올림 만약 이때 자신이 벨져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아님.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음 결국 패배한 것도 그 패배의 쓴 댓가를 치러야하는 것도 벨져 자신임 절망과 비참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느냐 혹은 그대로 주저앉느냐는 본인에게 달린 문제임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받아서 일으켜지는 것은 결국 얄팍한 응급처지에 지나지 않을 터 결국 싸우는 이의 강함이란 절대로 지지 않는 실력이 아니라 패배 후에도 여전히 전장에 남아 서 있을 수 있는 마음의 강함을 포함하고 있음 그런 의미에서 벨져는 완벽히 강하지 못했음 상처가 다 나은 후에도 루이스와 같은 하늘 아래에선 살 수 없다며 미치광이처럼 소리지르며 날뛰는 벨져를 보고 다이무스를 포함한 홀든 가는 적잖이 실망했음 그 말대로 루이스와 다시 대결을 시킬 수도 없었음 회사와 연합은 이제 막 동맹을 결성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런 벨져와 루이스가 붙게 된다면 이제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결판이 날 것이었기 때문에. "잠시 지방에 다녀와주었으면 한다." 말이 지방파견이지 실상은 유배나 다름없는 통지를 받은 동생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다이무스는 다시 눈길조차 주지 않았음 그러면서도 생각했음 극복해라, 극복해내라. 그리고 다시 돌아오너라. 네가 홀든의 아들 벨져라면 이 정도는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결국 벨져는 임무에서 도망치고 홀든에서도 도망쳐버렸음 지금은 그 행방조차 묘연함. 어째서. 왜. 견뎌내지 못한게냐. 다이무스는 서류를 꾸깃 움켜쥠 서류 밑 책상이 그극하는 소리를 내며 밀림 작은 형이 그렇게 된 거 큰 형에게도 책임은 있어, 라고 이글은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다이무스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음 그러나 다이무스는 충분히 괴로웠음 패배를 견뎌내는 마음이 강한 것은 맞고 그런 의미에서 벨져가 강하지 못했던 것도 맞음 그러나 꼭 자신이 그렇게 대해야 했을까 그렇게도 증오하던 가문의 방식으로 동생을 질책한 것이 옳았던 걸까. 강하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위로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면 다만 그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말할 순 없었던 건가. 그래서 결국 이꼴임. 상처입은 동생은 떠나서 행방도 알 수 없음. 자신은 여기 남아서 그저 벨져가 스스로 극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나 하는 입장임. 돌아온다면 또 어쩔 것인가. 동생을 위해 회사를 배신하고 루이스를 동생 앞에 갖다바칠 수도 회사를 위해서 동생을 처단할 수도 없음. 동생도 아닌, 단지 처지가 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맡은 제 감시대상에게 동생에게 주지 못했던 갖은 위로니 격려니 하는 것을 쏟아붓고 있을 뿐임. 너도 그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제 목적을 위해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따로 된 곳에서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하고 다만 목적을 위해, 치욕감을 씻기 위해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내가 이 이를 미더워하면 너도 그리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다지도 얄팍한 생각이란 말인가.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도 옅은 죄책감을 느낌.
다이무스가 히카르도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또 있음 헬리오스가 단지 히카르도의 단독임무에 대해 상의하려고 다이무스를 급히 부른 건 아님 히카르도가 간단한 공성전을 치를동안 다이무스는 어떤 인물의 호위 임무를 맡았음 코드네임 HYPOCRISY 통칭 닥터. 카미유 데샹. 카미유 데샹은 능력을 가진 사이퍼로써는 이례적일 정도로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음 치유 능력을 가진 그는 능력자 일반인 구분하지 않고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무료로 의술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함 닥터 카미유는 능력자에 대한 인식을 공포와 차별의 대상에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어울릴 수 있는 이웃으로 바꾸어 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음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 뿐 아니라 그와 하등 접점이 없는 능력자들까지도 그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임 데샹은 공식적으로 회사와 연합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그런 그가 막 외국으로 장기적인 의료봉사를 떠난다고 함 닥터의 외국파견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으니 헬리오스로써는 늦기 전에 일반 민중들에게 회사와 닥터의 연결고리를 강조해두는 편이 여러가지 의미로 편리할 거임 데샹은 바쁜 스케줄 중에도 회사 수뇌부와의 회담 제안에 대해 기꺼이 승낙함 다만 한가지 '부탁'을 함 자신이 요즘 감시를 당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회사에 있을 동안 호위를 붙여달라고 또 호위를 맡을 인물은 이 쪽에서 지명하겠다고. 닥터는 다이무스를 지명했음.
회사의 입장은 퍽 난감했을 꺼임 히카르도가 하고 있는 감시에 대해서 회사에서는 이미 파악이 끝났음 그동안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았던 히카르도가 거처 바뀌자마자 바뀐 거주지로 잡지 배달을 신청한다고? 매달 비싼 구독료를 물어가면서? 회사는 히카르도에게 잡지를 배달하는 배달원의 뒤를 밟았고 히카르도가 매달 배달받는 것이 단순한 가십잡지만이 아님을 알았음 아마 카미유가 말한 '신변의 위협'은 히카르도였을 거임 둘은 과거에 접점도 있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히카르도는 몰라도 데샹은 시종일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이나 의외로 본인들만 알고 있는 원한관계가 있었을 수 있음 히카르도는 카미유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가 행동한다면 마찬가지로 카미유가 회사로 찾아오는 회담날일 확률이 상당함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증명할 방법이 없음 지금 히카르도 잡아봤자 혐의는 닥터한테 미행 붙인게 다임 그정도면 좀 쎈 극성팬 수준임 선무당 짚고 히카르도를 갖다바쳤다가 자칫하면 회사는 닥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 일원도 갖다바친다는 오해를 사게 됨 그러나 그 위협이 진짜 히카르도였을 경우에는 아예 회사가 닥터의 암살을 꾀했다는 끔찍한 혐의를 쓰게 됨 그것만은 무조건 피해야 함 결국 회사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처럼 다이무스가 회담날까지 히카르도 잘 감시하고 다른 능력자들은 혹시나 있을 위협에 대비해 닥터를 지키는 거임 만약 히카르도가 진짜 암살자였더도 다이무스가 잘 끊어줄 것이며 다른 암살자가 있는 경우엔 회사에서 대비하면 됨 근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 카미유가 제 호위로 다이무스를 지명한거임 그가 히카르도 감시를 맡고 있다는 걸 닥터는 알지 못했을 거임 나중에 히카르도가 진짜 사고 쳤을 때를 대비해 회사에서는 히카르도와 카미유의 관계도 히카르도의 정체도 몰랐다고 할 예정이거든 당연히 우리가 니 옛친구 데리고 있다고 얘기 안하지 다만 닥터는 회사의 실력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이무스를 선택했던 거 같음 여기서 안된다고 애매하게 뺐다간 암살 공모 의심도 받을 수 있음 회사는 거의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카미유의 '부탁'을 수락함
회사에서 이 모든 얘기를 들은 다이무스는 그치고는 드물게도 뭐라 말을 덧붙이려고 했었음 보통때의 그는 어떤 임무를 주든지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터라 월라드는 흥미로운 눈치로 다이무스를 바라봤음 "....." 다이무스는 회사의 염려가 지나치다고 생각함 히카르도의 본성은 분명 착하다고 말하기 어렵고 거칠고 잔혹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이무스도 동의함 같이 지내거나 전투하면서 다 자기 눈으로 확인한 사실임 그러나 요근래 한동안 같이 지내면서 다이무스는 알려진 히카르도의 모습이 그가 가지고 있는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됨 히카르도는 분명 카미유 데샹을 쫓고 있음 그러나 그 건 회사에서 생각한 것처럼 그를 살해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라는 게 다이무스의 솔직한 생각임 히카르도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진 않음 그러나... 지금의 자신도 히카르도의 목적을 정확히는 모름 마피아 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히카르도는 분명 뭔가를 감추고 있음 회사에 마땅히 내놓을 '히카르도 바레타의 목적'이 제 손에 없는 이상 임무에 대해 뭐라 토 달기도 애매함 "뭡니까, BLADE?" 이사가 재촉함 다이무스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뜨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임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함 회사를 돌아나오며 다이무스는 생각에 잠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사이에서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 설령 저울질 당하고 있는 것이 히카르도가 아닌 진짜 제 동생이었어도 다이무스는 그 결백을 확언하지는 않았을꺼임 그는 신중한 성격이니까 약간의 의혹도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내내 다이무스는 마치 제 동생이나 가솔을 배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짐 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가. 올려다본 하늘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음.
가을로 접어들어 날씨가 제법 쌀쌀함 가만히 있으면 춥다고 느낄 정도지만 임무를 마치고 땀흘린 몸에 맞는 차가운 바람은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해줌 "이봐." 다이무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봄 히카르도가 삐딱하게 서서 자기를 보고 있음 "뭐냐." 히카르도는 잠시 분통이 터진다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금방 말하지 않음 다이무스가 말없이 그쪽을 쳐다보고 있자 히카르도는 이런 말을 하기 무안하다는 듯 뒷목을 벅벅 긁으면서 말을 검 "너 요새 날 피하고 있지 않나?" 그 말 그대로 다이무스는 저택에서 히카르도에게 단독임무에 대해 말한 그 때부터 즉 자신이 히카르도를 벨져와 겹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히카르도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있음 거리를 둔대봤자 둘은 은행이니 임무니 해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고 이전에도 살가운 말이나 대화는 일절 주고 받은 적이 없으니 태도에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님 다만 심적으로 한발짝 뒤로 물러나 생각할 뿐임 내가 이 남자와 동생을 겹쳐보고 있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온전히 이 남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다이무스는 대답함 "피한 적 없다." "헛소리!" 히카르도는 참았던 분통을 터트림 히카르도로써는 다이무스의 태도 변화가 의아할 수밖에 없음 회사에서 단독임무도 내려왔겠다 그날 다이무스는 흡사 자신을 인정한다는 듯 살갑게 굴었으니까 히카르도가 생각하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다이무스가 180도 태도를 바꿔 멀어지는 것이 이상함 원래 히카르도는 자기가 워낙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 서툴러서 이것도 무슨 착각이겠거니 했지만 아님 오히려 눈치없는 자신이 느낄 정도로 다이무스의 태도 변화가 극명하다고 봐야 함 다이무스와 유대 관계를 어느정도 바라고 있던 히카르도 입장에선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빡치는 일임 어차피 진짜 동료도 아닌 마당에 걍 넘어갈까 했지만 위로나 칭찬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유라도 알아야지 안되겠음 제가 이렇게 열을 내든 말든 저 칼잡이놈은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만들어 닫을 뿐임 저러면 말 안함 진짜 안함 으극... "돌아간다." 그 말을 남기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휙 돌려 걷기 시작함 이러면 말 다시 붙이기도 어려움 상대가 감추는 거 없다고 말하는 데 구차하게 우기는 형국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히카르도는 널찍히 거리를 벌려 따라가면서 다시 눈을 부라림 여기서 그냥 넘어갈 줄 알고.
그날 저녁 살 것이 있다며 잠시 상점에 들른 히카르도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고 저택에 돌아왔음 물론 히카르도가 가게 들를 때 그 앞에서 차에 탄 채로 수상한 놈이랑 접선하지 않나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든 게 식료품이라는 건 암 그래도 뭐가 있는지는 관찰해둬야 해서 제 쪽으로 다가오는 다이무스를 슬쩍 피한 히카르도는 봉투 대신 영수증을 안겨주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함 영수증에 적힌 품목은 다이무스가 생각하기에 영 뜬금없는 것들 뿐임 첼시콜라 보드카 맥주 소세지 땅콩 오징어 초콜릿 기타 등등.. ".....?" 다이무스는 눈쌀을 찌푸림 다이무스가 금방은 제 행동을 제지하려 하지 않자 히카르도는 어쩐지 들뜬 듯한 움직임으로 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모두 끄집어 내어 거실 테이블 위로 올려놓음 "잠깐. 식료품이라면 식당에 둬라." 히카르도는 어깨를 으쓱함 그 의자도 불편하고 밥 먹는 상대방이 저 멀리에서 보이는 식탁에서 술까자고? 그러면 재미없음 술은 낮은 테이블에서 뒹굴면서 먹어야 제 맛임 다이무스가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조금 당황하고 있는 사이 히카르도는 주방을 뒤져서 그럴싸한 커다란 잔 두개를 가지고 옴 이걸 크리스탈.. 뭐라고 하더라 어쨌든 엄청 비싼거겠지 그치만 오늘은 그냥 술잔일 뿐임 세팅이 다 되자 히카르도는 소파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손을 두곤 "앉아라." 함 "...."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두고 보기로 생각한 건지 별 이야기 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음 다이무스가 앉는 것을 본 히카르도는 곧바로 제조를 시작함
제조.. 다이무스는 이걸 다른 어떤 단어로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함 일단 콜라캔을 칙 소리나게 딴 히카르도는 그걸 그대로 잔에 부어 1/5정도 채움 그리고 이번에는 맥주를 깜 방금 딴 시원한 맥주가 꼴꼴꼴 소리를 내며 섞여들어감 보드카와 다른 술 종류로 보이는 음료도 뒤이어 잔에 투하되어 이제 잔 속은 갈색도 아니고 보라색도 아닌 이상한 색깔을 띄고 있음 제가 만들어낸 것을 보며 히카르도는 잠시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주방으로 가서 뭔가를 찾아옴 장식장에 둔 와인임 홀든 가에 있는 것치고 별로 비싼 건 아님 "이거 써도 되냐?" 다이무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와인을 딴 히카르도는 병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와인도 잔에 부음 여기까지 하니 잔은 거의 넘칠 거 같이 넘실댐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든 히카르도는 두 개 잔을 제 쪽에 하나 다이무스 앞에 하나를 둠 안줏거리도 잘 뜯어서 둠 다이무스가 계속 멀뚱하니 앉아있자 히카르도는 눈짓으로 다시 잔을 가리킴 그러고도 다이무스가 움직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한 히카르도는 더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셔보임
눈대중으로 대충 만든 거치곤 그렇게 나쁘지 않은 거 같음 사실 이거보다 좀 더 맛있게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됐음 이제야 생각하는 건데 카미유가 술을 참 잘 말았음 약만드는 직업이라 그런지(※주:의사) 비율이 아주 기가 막혔음 그 까다로운 부보스도 카미유가 만든 술 몇 잔 마시면 둘 어렸을 때 주워온 얘기를 하며 눈시울이나 붉히곤 했으니까 카미유 이놈은 저는 일정량 넘으면 잘 먹지도 않는 주제에 한번 술병 잡으면 끝간데를 모르고 테이블 이쪽부터 끝까지 잔이나 돌림 계속 돌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쭉쭉쭉쭉 히카르도는 아직도 기억남 마치 난투극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테이블 위에 소파에 바닥에 옷걸이에 정신없이 널려있던 조직의 가족들과 그 가운데에서 홀로 고고하게 술을 말던 카미유의 희미하게 빛나던 얼굴이..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카미유는 술은 마셔도 꼭지까지 취한 모습은 절대 보여준 적 없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부터 그는 내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건가. 히카르도는 잠시 들고 있던 잔을 꾹 쥠
기분이 우중충해지자 히카르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냄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임 처음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향해 이쪽을 보고 있는 다이무스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음 아마 히카르도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함 그 얼굴을 보자 히카르도는 왠지 기분이 좋아짐 인간관계에 서툰 히카르도는 사람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름 아까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치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음 다만 조직에서는 조직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일부러 독한 술로 자주 술자리를 가지곤 했으니까 이러는게 어떨까 생각해본 거임 그나마도 다이무스의 심중을 캐기 위해선 그에게 술을 먹여야 하건만 옛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누가 술 주는대로 다 받아먹던 생각만 한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는 거기 두면 알아서 마시겠거니 하고 잔이나 앞에 갖다뒀을 뿐임 물론 다이무스는 그 잔에 전혀 손도 대지 않음 적어도 제 의지로는 그걸 마시지 않을꺼임 임무나 그 비스무리한 거면 또 모를까 그 제조과정이.. 음... 게다가 원래 다이무스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 와인 많이 마셔봐서 자기가 술에 약하지 않다는 건 아는 정도고 실은 와인도 그렇게 즐기지 않음 다이무스가 생각하기에 술은 검사의 몸과 마음을 깎아내려 닳게 할 뿐임 몇 잔 마시는 걸로 정신이 흐릿해지고 중독되면 제 검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됨 예전에 이글이 저택에 살면서 밖으로 쏘다닐 때 줄창 잔소리한 것도 이거였음 여튼 다이무스는 아직 히카르도가 왜 갑자기 술 사와서 판을 벌이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음 그래서 일단 히카르도가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기로 함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히카르도는 금방 기분이 좋아짐 원래부터도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랑 술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더 좋아짐 잠시 테이블에 있는 파인 자국을 들여다보던 히카르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함 히카르도가 평소에 그렇게 감춰왔던 카모라에 대한 이야기임 그리고 카미유 데샹에 대한. 술기운을 빌어 꺼내긴 했지만 히카르도는 언젠가 이런 얘기를 다이무스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사실 다이무스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좋음 이야기하고 싶었음 이제는 거진 확정되어버리다시피 해서 지금와서 말해봤자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줄곧 꺼내놓고 싶었음 이녀석이라면 사실과 다르다며 저를 다그치지도 제 말을 무시하지도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음.
"..그와 처음 만난 건 아주 어렸을 적이다." "그.. 카미유 데샹을 말하나?" 히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임 이야기를 시작하자 제 앞에 놓인 잔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다이무스가 다시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짐 그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히카르도는 계속 말을 이음 카미유 데샹과 히카르도 바레타. 둘은 길거리를 떠돌던 고아였음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에 와선 잘 기억이 나지 않음 부모는 아마 그를 버렸거나 전쟁 중에 살해당했거나 했을 터임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히카르도는 이미 거리를 떠돌고 있었음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온통 황폐했고 도시 곳곳에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음 갈 데 없는 고아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모여들었고 히카르도와 카미유가 만난 것은 그 때였음 겁먹고 주눅들어있는 어린 아이들 속에서 홀로 외따로 된 양 무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미유를 발견한 것이 히카르도의 최초의 기억임.
카미유는 남달랐음. 먹을 음식을 어떻게 구할까 어딜 가면 두둑하게 동냥을 챙길 수 있을까가 그날 하루의 고민이었던 고아들과는 달리 카미유는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음 머리가 좋았고 비록 더럽고 찌들어있긴 했으나 외모도 괜찮았음 그런 카미유가 왜 자기를 선택했는지 히카르도는 아직도 알지 못함 카미유와 어울려 히카르도는 어느덧 고아들 사이에서 대장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카모라 마피아 눈에 띄어 조직에 들어가게 됨 힘밖에 쓸 줄 모르던 자신과 달리 카미유는 능력이 있었고 특히 의술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음 조직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카미유의 연구를 도왔음 그 또한 조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마침내 연구는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둠 카미유는 히카르도에게 '힘'을 나누어 주었고 그 힘으로 인해 히카르도는 단숨에 카모라의 행동대장으로 급부상함 히카르도의 기억 속 카미유는 언제나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 가끔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 싸늘해지기도 하고 조금 놀리면 곤란하다는 듯 찡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카미유는 항상 다정했음 모든 것이 달라져버린 그 사건 전에도, 카미유는 언제나와 같이 다정한 얼굴로 말을 걸었음 '히카르도, 부탁한다. 저들을 막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 그래서 히카르도는 처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음 카미유는 항상 다정했고 그가 하는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비능력자들이 죽어나가고 자신의 이름을 건 수배령이 내려져 마침내 굳은 얼굴을 한 경관들이 조직에 찾아왔을 때까지도 히카르도는 마치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음 혐의를 부인할 생각은 없음 그건 확실히 자신이 한 짓이니까 그러나 다만 히카르도는 물어보고 싶었음. 네가 나에게 부탁한 일은 이와 다른 것이었지? 그 모든 일은 내가 너의 말을 오해해서 벌어진 일이 분명하다.. 그렇지? 더 이상 조직에 피해를 줄 수 없기에 나왔고 그 직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국제의료봉사단체에서는 완곡하게 면회를 거부당했음 연락도 닿지 않고 직접 찾아가기엔 카미유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음 "난 다만.. 내 친구를 만날 기회가 필요한 것 뿐이다." 그를 만나 확인하지 않으면 안돼. 히카르도는 씁쓸하게 중얼거림
그 말을 끝으로 히카르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임 취해서 그대로 잠든 것 같음 아닌게 아니라 아까까지의 말도 끊길듯 간신히 이어지다가 끝에 가선 거의 말이 아니라 웅얼거림에 가까웠음 테이블 위를 보니 제가 사온 술과 음료 안주는 물론이고 다이무스 먹으라고 앞에 둔 술잔까지 어느새 집어서 자기가 다 마셔버린 후임 다이무스는 거기에 손댈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먹어버린 듯함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쉼 판을 벌린 장본인이 취해 넘어졌으니 뒤처리는 온전히 다이무스의 몫임 어째 회사 회식 때도 이런 일이 잦았던 것 같은데.. 다이무스는 어쩐지 기시감을 느낌 넘어져 돌아다니고 있는 술병들은 차곡차곡 테이블에 쌓아놓고 나온 쓰레기는 마찬가지로 잘 접어 한쪽으로 정리함 어차피 내일 하인들이 출근하면 알아서 치울거임 다이무스는 그냥 걸리적거리지 않도록만 정돈해둠 히카르도를 보면 소파에 앉아 머리 끝이 팔걸이에 닿을 정도로 꾸벅꾸벅 졸고 있음 자고 있는 얼굴은 평소와 달리 사나운 인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예 앳되어보이기까지 함 다이무스는 문득 제 감시대상이 자기 막내동생보다도 어린 나이였다는 것을 떠올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위태로운 태도도 이해가 감 다이무스는 잠시 히카르도의 얼굴을 들여다 봄 자신은 그를 닮은 동생을 안되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무스는 아직 혼란스러움 제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복잡하게 만듬 "....." 쓸데없는 생각이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판단력이 흔들리는 기분임. 다이무스는 잡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돌린 후 한쪽 어깨에 히카르도를 걸머 메고 이글 방으로 가서 침대에 던져놓고 나와 문을 닫음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남 자기 전 술을 마신 탓인지 드물게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잤음 아는 술 다 섞은 폭탄주를 저 혼자 물 마시듯 마셨으니 당연히 찾아온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니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림 히카르도는 눈을 찌르는 듯한 햇살을 피해 눈가를 찌푸리며 밖으로 나와 봄 거실로 가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의 다이무스가 무뚝뚝하게 말을 검 "일어났나? 출근 시간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자기와 달리 옷차림도 몸단장도 모두 끝난 상태임 그러고 보니 술자리라 해도 다이무스는 술에 손도 안대고 자기만 마신 거 같은 기억이 남 뭔가 저 놈한테 술을 이케이케해서 뭘 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거 같은데 계획이 주겄습니다.. 잠시 멍때리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고갯짓으로 눈치를 주자 허둥지둥 옷 차려 입고 대충 아침 챙겨먹고 차에 올라탐
술이 아직 덜 깬 건가 히카르도는 그날 하루종일 뿌연 빛 속을 살짝 떠서 돌아다니는 거 같다고 느낌 온 세상이 뿌옇게 눈부셔서 어째 현실감이 없음 은행 이곳저곳에 무르익은 가을 햇빛이 빼곡히 들어차 히카르도의 눈을 공격함 히카르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눈을 가늘게 뜸 다이무스는 자기 방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고 가끔 은행으로 상황을 살피러 오기도 함 그 모습은 어제나 다른 날들과 별다를 바가 없음비록 어제 다이무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은 실패했지만 히카르도는 자기 얘기를 한 것으로 절반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긴 함 그러나 히카르도는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음 그저 자기가 카미유를 만나야하는 이유 목적 같은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을 뿐임 헬리오스가 안그런척 자기 목적을 궁금해하고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다이무스 또한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보다 그냥 이야기하고 싶었음 이제껏 아무도 그에게 목적을 물어보지도 공유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아무라도 좋았던 걸까? 술기운에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아닌 거 같음 다이무스 뿐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저녀석이라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음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점점 술에 취해 자기가 뭐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떠들어대는 상태가 되기까지 다이무스는 대꾸는 없어도 표정 태도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앞에 줄곳 앉아있었음 그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책망도 추궁도 아닌 다른 것을 담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그건 무심도 아니었음. 히카르도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럽다고 느낌.
전후관계 따지는 데에 소질도 관심도 없는 히카르도라도 어제 자기가 제멋대로 꺼냈던 이야기가 그에게 썩 듣기 편하지 않았다는 걸 암 회사 내에서 그의 위치나 맡은 임무를 보건데 더욱 그러함 이야기는 세간에 알려진 여론과도 대외적인 이미지와도 전혀 다름 오히려 그것들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임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 진심이 어쩌고 목적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에게나 나눌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임 그 외의 사람에게는 들어봤자 불편하고 의아할 뿐임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듣는 쪽은 어거지로 저쪽으로 끌어당겨진 같은 느낌을 받음 그러나 히카르도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다이무스가 저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함 변함이 없음 들은 이야기로 인해 저를 더 살가워한다거나 멀어지고 싶어한다거나 하는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음 그런 모습을 보면 히카르도는 어쩌면 어제 술을 먹으면서 이야기한 그 모든 일이 어젯밤 꿈이 아닐까 함 식탁 위에 놓여져있던 영수증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믿었을 수도 있음
딱히 어떤 반응을 바라고 꺼낸 것은 아니지만 제 깊은 속내를 듣고도 변함 없는 다이무스의 태도가 히카르도는 조금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녀석답다고 느낌 다이무스는 제 말을 단지 그 때만 듣고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지어낸 말이라며 아예 믿지 않았을 수도 있음 아니면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잘 조합해서 회사에 일러다바칠 계획일 수도 있으나 히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근거는.. 없음 그냥 자기가 다이무스를 믿고 싶은 것 같기도 함 당최 자신은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우니까. 그러나 그걸로 됐음 이것저것 계산하고 재는 것은 히카르도 성미에 안맞음 다이무스가 새삼 자기에게 거리를 둔 이유에 대해서도 일단 접어두기로 함 중요한 건 자질구레한 샛길이 아니라 커다란 줄기니까. 다만 지금 이 상태 시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조용하게 흘러가는 이 나날들이 히카르도는 상당히 마음에 듬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오는 눈빛이나 가만히 주위를 감싸는 자연스러운 침묵.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나니 히카르도는 더 이상 그게 불편하지 않음. 편안함. 눈부시다. 히카르도는 눈을 몇번 깜빡임.
그러는 동안 히카르도의 안에서 좀 다른 생각이 틔여남 저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함. 제가 가지고 있는 목적같이, 다이무스에게도 바라고 있는 것이 있을까? 마음을 터놓고 깊은 속내를 이야기할 상대는 있을까. 그걸 알아서 뭘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보고 싶음. 그냥 그럼.
나가기 전 히카르도는 은행 한 쪽을 채운 유리벽에 제 모습을 지나가듯 비춰보며 매무새를 정돈함 늦은 오후 아직 바깥이 환하기 때문에 유리에는 희미한 남자의 실루엣만 비칠 뿐임 마침 회사에서 보낸 차가 도착하자 히카르도는 뒤를 돌아봄 마찬가지로 임무 복장으로 갈아입은 다이무스가 막 제 방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은행 앞에 세워진 차를 발견하고 히카르도에게 눈짓함 히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임 "나 먼저 간다." 드디어 단독임무임 일단은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다이무스와 히카르도의 임무지는 정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둘은 은행에서 헤어져 따로 차를 탐 히카르도는 떠나기 전 가볍게 목례함 다이무스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임
히카르도를 태우러 온 차는 썬팅을 진하게 한 중형 세단임 어찌나 유리를 까맣게 칠했는지 안에선 바깥이 잘 보이지 않음 히카르도가 뒷자석에 몸을 싣자 금방 출발함 혼자만의 공성임무라...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지만. 들은 내용을 생각하면 별 다를 것 없는 공성이다만 늘 있던 옆자리가 비어있으니 가는 길이 영 허전함 다이무스는 무슨 호위임무라고 했는데 자세한 건 듣지도 묻지도 않았음 히카르도에게 그건 자기랑 별 상관없는 이야기임 필요한 이야기라면 다이무스가 했을꺼임. 그쪽도 짐덩어리인 자기를 떼 놓은 단독임무이니 쉽지야 않겠지만 그 '태도'에게 어려운 임무란 게 있을런지 모르겠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히카르도를 태운 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서행함
다이무스는 천천히 차에서 내림 곧 있을 회담으로 헬리오스는 전에 없이 어수선함 여러가지 사정으로 회담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음 닥터가 영국을 떠나면 밝힐 예정임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정이니 회사 내는 평소와 눈에 띌 정도로 다른 점은 없음 보이는 인원도 많지 않고 오히려 한산함 그러나 겉보기일 뿐이고 기척에 밝은 다이무스에게는 숨어서 대기하고 있는 능력자들이나 감춰진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짐 헬리오스의 앞날과도 관계 있는 일이라 전체적으로 경계가 삼엄함 회담으로 정해진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음 근처에 나와 있던 이사 월라드와 인사한 다이무스는 호위 책임자로써 어딘가 빈틈이 있지 않나 수상한 점은 없나 회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점검함 다행히 아직까지 눈에 띄는 점은 없음 마음에 걸리는 것 한가지만 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함
정문을 호위하고 있는 능력자들과 보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다이무스는 저 멀리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음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회담시간 5분 전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위병들 때문에 잠시 정차한 차창 너머로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옴. 허가를 얻었는지 다시 출발한 후 더 이상 차가 들어올 수 없는 회사 건물 앞까지 들어와 천천히 멈춘 고급스러운 차량의 문이 열리며 훤칠한 청년이 이쪽으로 걸어나옴
히카르도는 임무지에서 샬럿과 마를렌을 만났음 마를렌은 발랄하게 인사했고 샬럿은 수줍음을 타지만 반갑게 다가옴 임무는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음 히카르도가 일선에 나와 어그로를 끄는 사이 물꼬맹이들이 건물을 부수니 금방이었음 예정보다 훨씬 이른 종료시간에 샬럿과 마를렌은 서로 얼굴을 마주봤음 임무는 끝났건만 둘은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임 히카르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홀든 저택으로 돌아갈지 회사로 가서 다이무스나 보러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를렌이 다가오더니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함 진짜 이른 저녁이군.. 히카르도는 조금 생각해보고 그러마고 함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도착한 식당은 사람이 별로 없었음 자리에 앉자마자 마를렌은 메뉴판을 들고 이것저것 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면 샬럿은 쭈뼛대며 제 옆에 언니에게나 먹고 싶은 것을 작은 소리로 말할 뿐임 히카르도는 간단히 파스타랑 리조또 이런 거나 시킬 생각이었는데 마를렌이 직원에게 불러주는 리스트는 한참 김 이건 아예 정찬 코스요리 느낌임 히카르도가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를렌은 씩 웃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함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그보다 이거 내가 사는 건가 다 먹을 수는 있나? 아예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밥만 먹겠군 홀든 저택에 가면 이거 같은 맛있는 밥 그냥 먹을 수 있는데.. 이러저러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조금 투덜거리면 소녀는 우아한 귀부인처럼 미소를 지음
셋은 전채요리로 나온 스프랑 생선을 금방 먹어치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임무 때문에 배가 많이 고팠었음 두 번째 요리가 살짝 지체되는 동안 히카르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옴 제 한달 월급을 고스란히 한끼 식사에 붓게 된 것은 아까우나 저런 어린 꼬맹이들이 자기한테 밥을 사달라고 조른 것은 처음이라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음 어린아이들은 귀여움 아이들은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비싼 곳이라 그런가 밥도 맛있음 맛있는 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럭저럭 괜찮음.
천천히 식당 쪽으로 나가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림. "언니, 괜찮을까..?" "응? 괜찮아. 돈 모자르면 내가 살짝 보태면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느긋하게 걸으며 대화를 듣고 있던 히카르도의 걸음이 빨라짐. "그게 무슨 소리야." 뚜벅뚜벅 날카로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히카르도를 보고 두 아이 모두 하얗게 질림. "방금 그 얘기..." '의사선생님이 회사에 오니까 아저씨를 붙잡아둬야 한다'는 얘기를 막 꺼냈던 마를렌은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숙임 "날 잡아둬? 누가 온다고?" 이제 두 아이는 확연히 겁에 질린 눈치지만 히카르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침 테이블의 소란을 알아챈 매니저가 sir.. 하면서 다가옴 히카르도의 날카로운 인상과 감정이 격해져 저도 모르게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벌레들을 본 매니저가 경비에게 눈짓함 그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히카르도는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함 닥터.. 카미유로군. 그래서 홀든과 날 떼어놓은 건가. 깨닫자 히카르도는 금방 식당을 뛰쳐나감 "아저씨 안돼요! 다이무스 아저씨가...!" 마를렌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때림
그와 자신은 초면이건만 카미유 데샹은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똑바로 다이무스에게 다가왔음 "카미유 데샹이라고 합니다." 키가 큰 편이고 호리호리한 체형 탓인지 원래 키보다도 훨씬 커 보임 온화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의사의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음 "다이무스 홀든이다." 가볍게 나누는 인사였지만 맞잡은 손은 장갑 너머로 느끼기에도 섬세하고 적당히 미지근했음 카미유가 살짝 힘을 더하자 부드러운 손가락의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인사치곤 악수가 조금 길었음 다이무스가 제 말에 별 대꾸를 하지 않자 카미유는 살짝 당황한 듯 했지만 곧바로 다정하게 웃었음 보는 이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단정한 각도로 끌어올려진 입매에 반해 이쪽을 들여다보듯 고개를 숙인 눈동자는 진한 선글라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음 다이무스는 순간적으로 눈 앞에 선 의사에게 약한 거부감을 느낌 다이무스의 마음에 드는 인종은 아님 "....." 그러나 다이무스는 티를 내는 대신 무뚝뚝하게 몸을 돌려 데샹을 회사로 안내함 마침 시간 맞춰서 마중나온 명왕과 브뤼노와도 악수한 의사는 그들과 함께 건물 내로 들어감
아직까지는 헬리오스의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음 막 건물로 들어가는 수장과 의사의 뒷모습을 보며 다이무스는 생각을 정리함 예정된 회담은 약 1시간임 딱히 결정해야 할 의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 주제는 이미 계획되어 있는 국제의료봉사단체에 대한 원조의 범위를 재확인하는 정도임 실제론 1시간의 대화도 상당히 느긋한 템포로 진행될 것임 이 시간 즈음이면 히카르도의 임무도 거의 막바지겠군. 아이들에게는 임무 때 히카르도가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끌라고 (브뤼노가) 말해둔 상태임 임무가 회사의 예상보다 일찍 끝난 경우에도 마를렌이 잘 알아서 할 것임 그녀는 어리지만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만큼 조숙한 편이기도 함
'단지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지. 다이무스는 일단 그 얘기는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음 이야기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임 한마디 한마디를 말할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말하던 히카르도는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진실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대화만 한다고? 구랭ㅋ하면서 카미유와 히카르도의 만남을 주선해줄 수야 없는 노릇임 카미유를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꾸며낸 말일 수도 있고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노릇임 또 회사의 이런 입장을 카미유가 이해해줄지도 의문임 위험한 변수가 너무 많음 그 외에 히카르도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다이무스는 좀 더 정리하고 난 다음 보고할 생각임 살아가고 배신당하고 좌절한 이야기. 지금은 그 이야기를 전달할 때 제 감정에 전혀 관계없이 냉정하고 중립적일 자신이 없음.
회담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 다이무스는 문득 귀에 거슬리는 실랑이 같은 것을 들음 벌써 회담이 끝났나 했는데 그 소란은 회사 입구에서 나고 있음 '설마..' 아직 굳게 닫혀있는 건물의 문을 한번 응시한 다이무스는 검 손잡이를 쥔 채로 입구로 달려나감막 다이무스가 내딛은 발치에 헬리오스의 능력자가 날아와 나동그라짐 "무슨 일인가." 만신창이가 된 능력자는 떨리는 손 끝으로 제 앞쪽을 가리킴. '히카르도..' "홀든..!" 사나운 기세로 온 몸에서 벌레를 방출하던 히카르도가 이쪽을 돌아보며 씹어뱉듯 중얼거림 돌아보는 시선이 일순 시퍼런 안광마저 비쳐질 정도로 거칠게 날뜀 왔군. 오지 않길 바랬는데. 다이무스는 침착하게 물어봄. "아이들은 어떻게 했지?" "...아이들?" 히카르도가 피식 웃음. "그런 어린 아이들까지도 이런 일에 동원하나? 참 대단하군."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아이들을 다치게 한 것 같진 않음 다이무스는 일단 티나지 않게 안도한다음 곧바로 검손잡이를 쥐고 발도할 준비를 함 히카르도는 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물어봄 "날 막을꺼냐?" 내가 한 그 모든 말을 듣고도? 다이무스의 모습은 검을 쥔 모습 그대로 미동도 없음 히카르도의 얼굴에 천천히 자조섞인 웃음이 번져감 "그래.. 그러시겠지."
다이무스는 낮춘 자세에서 벌레를 구기며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는 히카르도의 앞 공간을 크게 베어냄 아무 것도 베지 않은 사실상 경고에 가까움 히카르도는 다시 입꼬리를 올림 "날 죽여야 할꺼다." 날 멈추려면. 네가 보여주는 이 태도랑 뭐가 다르지? 히카르도는 혀를 가볍게 차며 앞으로 뛰어듬 그와 동시에 다이무스의 검에 거미줄이 엉김 다이무스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거미줄을 잘라내고 다시 한발짝 내딛어 검을 흩뿌림 그를 피하기 위해 히카르도도 한발짝 뒤로 물러남
"무슨 소란입니까?" 등 뒤에서 낯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다이무스는 당혹감을 느꼈음. 카미유 데샹. 여길 왜 오지? 다이무스가 상대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히카르도의 목적은 카미유임 위험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든 어쨌든 간에 괴한이 쳐들어온 이상 그 목적이 여기 이렇게 어슬렁거리면 안됨 그건 다이무스에게도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임 다이무스는 드물게 신경질적이 되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뒤를 흘끗 돌아봄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의사의 뒤로 명왕과 회사의 능력자들이 부랴부랴 따라오고 있음 저 인원이 카미유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고 문제는... 다이무스는 다시 히카르도 쪽으로 시선을 돌림 히카르도는 경직된 얼굴로 카미유를 쳐다보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소리를 지름 "....카미유!"
뭐라 말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카미유를 명왕이 가볍게 제지해 물러서게 함 다행히 의사는 명왕의 말을 이해한 듯 순순히 물러나 다시 건물 쪽으로 돌아감 저쪽은 맡겨두면 되겠지.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림 카미유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히카르도는 그가 회사의 능력자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려 하자 조바심을 느낀 듯 달려듬 "카미유!" 이미 막는 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방에 벌레를 거칠게 흩뿌린 히카르도는 능력자들을 밀어내고 카미유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옮김 다이무스는 일부러 소리를 카랑거리며 검을 크게 뽑음 막 달려가려고 하던 히카르도가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몸을 날림
"너...!" 핏발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히카르도는 이를 뿌득 소리내며 갈더니 노성을 지르며 몸을 꺾음 다이무스는 이 모션을 임무 때 몇 번 본 적이 있음 "큭..!" 히카르도의 몸을 뚫고 나와 사방으로 빗발치는 벌레들를 피하려 다이무스는 한 팔로 제 얼굴을 막음 소용돌이의 가운데에서 피와 벌레의 체액을 잔뜩 뒤집어쓴 지옥같은 인상의 히카르도가 주먹을 꺼떡임. 불멸자 발동.
다이무스는 날아오는 힐킥을 가까스로 피함 불멸자를 발동하고 난 히카르도의 공격은 이전보다 훨씬 매섭고 날카로움 이쪽을 후벼파려는 듯 덤벼드는 주먹을 막은 칼날에서 캉, 하는 맑은 소리가 남 저쪽은 분명 맨손일텐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듯 히카르도는 정신없이 다이무스에게 달려들기 바쁨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며 다이무스는 재빠르게 뒤쪽을 살핌 전투에 참여했던 능력자들은 거의 다 근처에 널부러져 있고 수장을 포함한 헬리오스의 중역들은 건물로 몸을 피한 뒤임 적당한 시기임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다시 다가오길 기다려 검 대신 한 손으로 히카르도의 어깨를 잡음 순간 잡은 손바닥 전체로 퍼져가는 비정상적인 열기에 다이무스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손을 떼지는 않음 "...뭐하는 거냐" 히카르도는 성가시다는 듯 다른 손으로 잡힌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려 함 다이무스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함 "물러나라." "하.. 너 무슨...!" "어차피 이런다고 지금 그를 만날 수 있는게 아님을 알고 있지 않나." "......"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는 다이무스 상대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음 다이무스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둘이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멀쩡하게 합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거임 거기다 다이무스만 해치워서 되는 것도 아님 회사에는 명왕을 비롯한 실력자들이 카미유를 지키기 위해 모여있음 운이 좋으면 카미유에게 가서 죽을 거고 운이 나쁘다면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음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옛 친구가 바로 저기에 있음 거기다가 자기가 이제껏 가까워졌다 믿었던 상대에게서도 배신당한 직후임 히카르도는 지금 자기 몸이든 목숨이든 마구 집어던져서 아무거나 부수고 싶은 심정임 다이무스는 다시 히카르도를 다그침 "가라." "웃기는 군. 네가 지금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 "가라."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천천히 쳐다봄 언제나 표정이 없던 얼굴에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음 젠장. 그의 말대로임. 자신에게 승산은 없음. 이미 카미유의 모습은 한참 전에 사라졌음. 히카르도는 뿌득 소리를 내며 다이무스의 손을 쳐냄 다이무스는 순순히 물러남 몸을 휙 돌린 히카르도는 떠나기 전 뒤를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벗어남
건물로 돌아간 닥터는 회사의 중역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당연하게도 회담은 중지되었음 그 후 헬리오스는 부상입은 능력자들과 피해상황을 정리함 급작스러웠다 뿐이지 피해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음 히카르도가 암만 날고 기어봤자 제 몸뚱이 하나임 그리고 헬리오스는(아마 연합도) 그 간의 전쟁으로 대사이퍼 전투에 익숙함 다만 이 소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카르도가 표면적이나마 회사 소속이었다는 점임 거기다.. 히카르도와 마지막에 대치하다가 놓친 인물이 다름아닌 그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점도 논란거리가 됨 회사의 실력자. 그를 실질적인 헬리오스의 에이스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있는 실정임 심지어 다이무스는 겉으로는 히카르도의 담당 사수이며 실질적인 감시역이기까지 함. 헬리오스에서도 이 점을 꺼림칙하게 봤음 물론 이번 일은 그동안 임무로 또 은행일로 회사에 보탬이 된 홀든 가를 내쳐버릴 정도의 사건은 아님 다이무스의 원래 성정을 봐도 그랬을 거 같진 않음
그러나 다이무스가 히카르도와 대치했을 때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이가 한 명도 없는 점 그리고 히카르도의 능력이 출중하다하나 다이무스 정도의 실력자를 큰 상처없이 따돌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몇 가지 의문점이 대두됨 그게 뜻하는 것은 한가지임.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일부러 놓아준 것이 아닌가.' 물론 감히 다이무스 면전에서 그 말을 똑바로 읊을 수 있을만큼 경우없는 인물은 회사에는 없음 그러나 의혹이 있는 것도 사실임 사소하다곤 하나 자칫하면 회사의 안위와 관계있었을 소동이었음 헬리오스는 사정청취라는 이름으로 다이무스를 밤늦게까지 붙들어둠 회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함 무슨 일이 있었나. 다이무스도 같은 보고를 반복했을 뿐임 히카르도가 쳐들어왔고 그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도망쳤다. 쫓아가 포획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고. 회사 입장에선 그게 일부러 놓아준 거랑 뭐가 다르나 싶었을 테지만 다이무스는 그 외에 변명이나 자기를 변호하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 아니 뭐 이런.. 그래서 뭐라는 건데 지금 이쯤 되니 회사는 다이무스가 놓아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봄 집요했지만 결국 질문의 수위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의 수위를 넘지 못함 다이무스는 계속 똑같이 대답함 결국 의혹이 있다하나 실체도 확실치 않고 소동에 대한 증언도 증인도 없는 시점에서 이 이상 에이스를 추궁하는 것도 득될 것 없다고 생각했는지 상층부는 히카르도를 놓친 것에 대해 가볍게 질책하고 그날 밤 다이무스를 저택으로 돌려보냄
조용한 건물 바깥은 공기가 싸늘함 다이무스는 길게 숨을 내쉼 하얗게 퍼진 입김이 찬바람에 산란히 부서짐 팔목 끝에 다리에 차가운 코트자락이 감겨듬 회사엔 담담하게 보고했으나 사실 다이무스의 마음은 그만큼 담담하지 못했음 오히려 혼란에 가까움 어쩌자고 히카르도를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음 당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에서 히카르도를 생포해 카미유를 습격한 의도에 대해 알아내는 거였음 밝혀진 이유가 회사에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라면 더할 나위 없음 그게 안됐더라면 차선책은 히카르도를 죽여서 그 시체를 회사에 제출하는 거임 이 경우 습격한 이유는 듣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번 소동은 만회하고 닥터에게 체면은 차릴 수 있음 이도 저도 안되서 히카르도도 놓치고 그 이유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 <----- 지금 여기 다이무스는 어떤 방법이 회사에 가장 좋은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암 근데 잘 안됐음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그냥 보낸 것은 단지 다이무스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님 다이무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음 자신이 히카르도의 감시를 맡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저를 떼어서 히카르도의 목적일 것이 분명한 닥터 데샹의 호위로 붙인다고? 카미유가 회사의 사정을 몰랐다고는 하나 우연이 지나친 느낌임 거기다 다이무스 자존심이 상한 것과 별개로 헬리오스가 습격당하자마자 그 습격의 표적인 카미유가 뛰쳐나오는 것도 영 이상함 마치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슨 일 있습니까, 라니. 카미유는 사전에 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을 터임 그래서 다이무스 자신을 보안 책임자로 청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애초에 히카르도가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적인 카미유와 헬리오스의 회담이 잡힌 것도 너무 타이밍이 좋음 여러가지로 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이 전개되고 있는 느낌이라 다이무스는 영 기분이 편치 않음 단순한 습격이 아닌 장차 회사의 앞날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무언가가 물 밑에서 수면을 살살 긁으며 다이무스의 신경을 자극함 히카르도를 섣불리 처리해버릴 순 없다, 고 검사로써 갈고 닦아왔던 감이 제게 속삭임
그러나. 다이무스는 가만히 고개를 흔듬. 회사의 사정과 별개로 다이무스 개인적으로 히카르도를 없애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임. 그때 회사에 남아있으면 히카르도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생포해 그 목적을 실토할 때까지 고문을 받거나 아예 시체가 되어 카미유에게 건네질 수도 있었겠지. 다이무스는 정말 그걸 원치 않았음. 그 순간 느낀 싫다, 는 감정이 정말로 강렬해서 다이무스는 어쩔 줄 몰랐음. 거의 막무가내로 히카르도를 그 자리에서 밀어냈음. 아마 그렇진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예 히카르도에 대한 제 감정 때문에 회사나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과장하고 왜곡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름. 혼란스러움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있을 수 없음 다이무스는 주먹을 꼭 쥠 한순간 정신이 훅 들 정도로 강한 통증이 느껴짐 아까 무리하게 히카르도의 어깨를 쥐었을 때 열과 벌레들에게 입은 상처임 다이무스는 저를 망연히 쳐다보던 히카르도의 얼굴을 떠올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다이무스는 잠깐 멈춰선 후 다시 똑바로 걸음을 옮김.
히카르도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임 헬리오스를 도망치듯 벗어난 이후 그는 은행에도 홀든 저택으로도 돌아오지 않았음 당연함 그런 습격 사건을 벌여놓고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음 그럼 그는 어디로 갔을까
술집이 있었음 다이무스가 퇴근 후 히카르도를 감시했을 적에 들르던 시내의 큰 펍이 아니라, 좀더 작은 곳. 히카르도가 저와 술자리를 가지려고 식료품을 바리바리 사왔던 그 날 밤 식료품 가게 옆 작은 술집에서 장보러 나온 여종업원과 옛날부터 잘 아는 눈치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던 것을 다이무스는 기억하고 있었음 뭐든 확실치 않음 친하게 보였다 뿐이지 히카르도가 그 술집에 자주 들렀다는 혹은 지금도 거기 있다는 확증도 없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자 아예 포트레너드 밖으로 몸을 피했을지도 모름 다만 그 곳은 히카르도의 과거와 가늘게나마 이어져 있었음 이것저것 고민하는 대신 다이무스는 직접 술집으로 향하는 방법을 택함
술집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시간이 늦었기 때문인지 빈자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음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낄낄댈 뿐 정신없는 분위기는 아님 다이무스는 펍 안을 한번 슥 둘러봄 입구에 앉아 마시고 있던 몇몇 치들이 딱 봐도 이곳과 분위기가 다른 다이무스가 들어오자 힐끗거리며 곁눈질했지만 다이무스가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가만히 잡자 조용히 고개를 돌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함 안을 훑던 다이무스는 카운터 저쪽 끝에서 허리를 잔뜩 구부정하게 하고 술을 마시고 있는 뒷모습을 발견함 얼마나 봤다고 벌써 저 뒷모습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다이무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몇 걸음만에 히카르도 뒤에 섬.
얼마나 취했는지 히카르도는 자기 뒤에 누가 서있는지도 모름 다이무스는 기척을 막 뿌리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살금살금 감추는 타입도 아님 마침 히카르도 앞에서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던 여주인이 다이무스가 찾아온 걸 보자 반색을 함 "이이는 못보던 인데, 새로 사귄 친구야?" 그 말에 꾸벅꾸벅 졸던 히카르도가 멈칫 고개로만 뒤를 돌아보더니 다이무스를 확인하고 웅얼거리며 다시 탁자 위에 얼굴을 묻음 "....친구는 무슨..."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 히카르도가 도로 잠들려고 하는 걸 여주인이 다시 흔들어 깨움. "어여 친구따라 집에 가. 여기서 자면 안되지." 히카르도는 진짜 잠들었는지 아무 반응도 없음 대화를 하러 온 건데 이렇게 되면 여기다 버리고 갈 수도 없음. 다이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히카르도 한팔을 어깨에 걸친다음 그를 거의 들다시피 부축해서 술집을 나옴
늦은 밤거리는 지나는 사람이 없어 서늘하고 조용했음 이 상황에서 자기가 히카르도랑 같이 있는 것을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서 받을 수 있는 오해를 생각해보면 인적이 드문게 차라리 다행임 아까 잠깐 비가 왔는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싸하니 축축함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도저히 들지 못할 만큼 무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거리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가볍지도 않았음 팔다리가 쓰잘데없이 길쭉한데다가 술 취해서 축 늘어져 걸을 때마다 무진장 걸리적거렸음 다이무스는 그냥 자기가 회사에 꼭 필요한 짐짝을 나르는 업무라도 수행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함 생각해보면 영 틀린 생각도 아니지 않은가. 복보단 화가 될 확률이 높긴 하지만. 뚜벅뚜벅 걷던 다이무스는 골목 바로 앞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벽으로 붙어 섬 여기 올때까지 자기한테 미행 붙은 것 없나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별 다른 느낌은 없음 아마 자기한테 붙일 만한 미행특화 능력자가 회사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함.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음 다이무스는 기척을 죽이고 앞에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림 별 수상한 움직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게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봄 다이무스는 길게 입김을 내쉼 홀든가 장남이 어쩌다 이렇게 스파이 쥐새끼 같은 짓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음 고개를 빙글 돌린 다이무스는 벽에 기대 세워뒀던 히카르도를 다시 이려고 손을 뻗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저 쪽에서 손이 뻗어져왔음
마치 물 속을 허우적거리듯 비틀거리는 손길을 다이무스는 처음엔 단단히 받쳐주려했음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제대로 서있을 수 없는가 싶었음 그러나 다이무스 앞 허공을 더듬던 손은 그 가슴께에 닿자 강한 악력으로 옷깃을 잡아챘음 술주정이라고 하기엔 꽤 격하고 분명함 "....뭐...." 벽으로 밀어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멱살을 쥐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김 "...윽," 잡아당겨진 목깃에 숨이 턱턱 걸림 술에 취해 거리감이 무뎌진 것인지 어떤지 히카르도는 평소에 그가 다른 사람과 두는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다이무스를 끌어당기고 있음 거의 제 뺨을 스치는 상대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임 히카르도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독한 술냄새가 허공에 퍼짐 평소에 끼고 다니던 장갑은 어쨌는지 옷깃위로 느껴지는 히카르도의 손은 매우 차갑고 까칠했음 마치 그 자체로 냉기라도 발산하는 것처럼. 다이무스는 문득 제 손을 잡던 의사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떠올림. 타는 듯 뜨겁던 히카르도의 벌레들도. 그냥 그 대조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음.
생각은 한 순간이고 다이무스는 일단 이 마음에 들지도 좋아보이지도 않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함. 맨 처음 다이무스는 저를 붙든 히카르도의 손을 쳐 내고 뒤로 물러나려고 함. 그러나 히카르도는 꿈쩍도 하지 않음 다이무스가 저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걸 알자 오히려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함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주먹에 분명하게 핏줄이 섬 잡아당겨진 셔츠 깃이 한층 더 숨을 죄임 다이무스는 그제야 히카르도의 태도가 제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느낌 '칼을 써야겠군..'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허리춤에 맨 제 검 손잡이로 손을 미끄러트림 뒷목이라도 쳐서 기절시킬 생각임 막 검집 채로 검을 뽑아내려는 순간 손에서 느껴진 통증에 다이무스는 한순간 멈칫함 그 순간 다이무스의 움직임을 눈치챈 히카르도가 잇새로 낮은 노성을 흘리며 잡고 있던 그를 그대로 벽에 내동댕이치듯 내던짐 "큭...!" 검집을 잡던 손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러감 아까까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희미했던 살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분명해져 제 몸 위를 짓쳐누르는 것이 느껴짐 "날 죽이러 왔나, BLADE?" 질식이라도 시킬 작정인지 단단한 팔뚝이 목울대를 부러트릴 듯 압박해 들어옴 히카르도가 입을 열 때마다 휘발성 강한 알콜향이 훅 끼침 카미유에게 사주라도 받았나? 나를 죽이라고? 밤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엔 더이상 취기도 느껴지지 않음 대신 서슬퍼런 분노만 느껴질 뿐임 그간 느끼던 친밀감이 증오로 변한 걸지도 모름 목께를 파고드는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능력을 발동했는지 다른 손에 움켜쥐어진 어깨는 타는 듯 뜨거움 무엇보다 숨이 막힘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침 버릇처럼 허리춤을 더듬어도 제 검은 아까 떨어트려 저 만치로 굴러간 참임 다이무스는 거리를 벌리는 전투에 익숙하지 붙어서 싸우는 레슬링이나 체술에 익숙한 편은 아님 지금 저를 누르고 있는 히카르도의 힘은 전에 없이 강력함 아예 자기를 여기서 죽이려는 생각인지도 모름 게다가 다이무스는 자세도 너무 불리함 목을 졸리고 있는 상태에선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음 산소부족으로 다이무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니 하얗게 질림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음 벽에 틀어막힌 상태라 잘 되진 않았지만. "....ㅇ...아니...다...."
다이무스는 제 목과 히카르도의 팔 사이로 한 팔을 밀어넣어 간신히 숨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천천히 숨을 내쉬려고 노력함 자기가 입을 열자 기분 탓인지 좀 느슨해진 것 같이 느껴지는 팔뚝에 비해 어깨를 파고드는 손길은 한층 더 강해짐 뜨겁고,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움 뭐가 아니라는 건지, 히카르도의 질문에 대한 이렇다할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다이무스는 그대로 입을 다뭄 그대로 잠시 뭔가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양새로 숨을 죽였던 히카르도가 한순간 짧게 숨을 내쉼 "하..."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짧은 어절을 다이무스는 판단할 수 없었음 히카르도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숨을 삼킴 "죽이려는 것도, 도우려는 것도 아니라고..? 날 어쩌려는 거냐, 말해봐!" 다그치는 목소리는 거칠게 끝이 갈라져 좁은 골목을 울렸음 그에 따르는 것처럼 다이무스의 목과 어깨를 틀어쥔 힘도 강해짐 "...." 다이무스는 계속 침묵을 지킴 해줄 말이 없었음 히카르도가 요구하고 있는 대답은 다이무스 자신도 모르고,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이니까. 다만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는 자신을 히카르도라고 달갑게 여길리 없음 당장 다이무스 자신만 해도 다른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을 거임 이대로 갈라지게 되는 건가. 또 자신은 정해진대로, 회사의 뜻대로 이 녀석을 잡아 회사에 바치는 그런 수 밖에 없나. 이제 거의 감각도 둔해져 둔탁한 통증만이 느껴지는 어깨를 돌아보며 좀채 잡히지 않는 생각을 더듬고 있자면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음."차라리..." 이제껏 극명하게 드러냈던 살기나 아직까지 취하고 있는 위협적인 자세에 걸맞지 않게도 이어지는 음성은 가라앉고 바람에 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기까지 했음. "차라리 날 확실히 밀쳐내란 말이다.."
아직 틀어쥐곤 있지만 다이무스의 셔츠깃과 어깨를 잡은 히카르도의 손은 이제 확연히 힘이 실려있지 않음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서 저를 방어하듯 세우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림 그 움직임에 히카르도는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함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고개를 든 히카르도 얼굴에 드리운 것 중에 눈물은 없었음 히카르도는 마치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다이무스의 얼굴을 들여다 봄 순간 골목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이 거의 깜빡이지 않는 눈동자 위로 가늘게 그늘을 만들어냄 다시 고개를 숙인 히카르도는 입을 염 "...난 모른다." 다른 이들이 제게 주는, 제게서 느낄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들. 이해하려고 했으나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 과거엔 카미유가 그러했고 이제는 다이무스가 그러함. "나만.. 모르는 것 같더군." 어째서 사랑스럽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저를 버리고 등을 돌아서는지, 히카르도는 알 수가 없었음. 분명 저가 모르고 지나가는 어떤 복잡한 흐름이 있어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을 놓아버릴 수 없는 것일까. 그 흐름을 알게 되면 자신도 그들을 버리고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래서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는 걸까. "너도 그러하냐, 홀든..?" 다른 사람들이 제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얻으면 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얻지 못해서 버리는지. 알지 못하면서 다만 유대만을 바랬음. 끌면 끄는 대로, 또 밀면 미는 대로 허겁지겁 따라가기 바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했음. 끊임없이 내가 있을 장소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관계를 더듬고, 혼란에 괴로워하고..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했음 자신은 언제까지 혼자인 것인가. 다만 홀로, 이대로 영원히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인가.
유대를 원함. 목적이 달라도,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하는 무언가를 줄곳 바래왔음. 옛 친구 때문이 아니라 실은 아마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신은 그것에 굶주려 있었다고 생각함. 다만 카미유에게서 그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차가운 손 끝으로도 더듬어지는 눈부시도록 뜨거운 것. 남에게만 받을 수 있는 것. 아무도.. 자신에게 주지 않은 것. 주지 않을 것이라면, 끝내 등 돌릴 거라면 처음부터 다가오지 말길. 종국에는 이해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하고 지쳐 주저앉은 채로 자신은 계속 제게 보이지 않는 그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음. 혹시 남아있을까 싶어서. 그러니 밀어내라. 내게 칼을 똑바로 겨누고 목숨을 노려서, 자신이 다신 헛된 기대 따위는 품지도 않게. 눈 앞에 있는 것은 적이라고 확실히 알게끔. 그게, 그게 아니라면.
발작같던 분노는 고통으로 변해서 벌레조각들과 함께 히카르도의 어깨로 내려앉음 대답을 바라면서도 고개를 떨구고 이쪽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는 넓지만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어깨만큼이나 불안하게 보였음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함 처음 히카르도를 은행으로 배정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히카르도는 태도는 방자했지만 단 한번도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음 오히려 지나치게 성실하다면 성실했을까. 언제나 주어진 임무에 집중했고 동료에 소홀히 하지도 않았음. 조직에서는 좋아라 할 조건은 죄다 갖춘 이 사내가 이토록 동료들의 인정과 유대에 굶주려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임. 누군가가 응당 그가 받아야 할 인정과 신뢰를 거절하고 가로막았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듯함.
사실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와 카미유 사이에 일어난 일 중 세간에 알려진 것들은 거의 모름 가십을 쫓아다니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말들에 가로막혀 명백한 진실을 못 보게 될까 해서 회사 정보원을 통해 알려진 사실밖엔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음 그러나 히카르도의 태도를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함 특히 히카르도에게 많은 타격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이건 명백함. 다이무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음. 열심히 노력하고 애쓴 사람이 많은 보상을 얻게 되는 그런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그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임 남부러울 것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히카르도가 가여움. 벨저가 아님. 다이무스는 눈을 가늘게 뜸. 인정받기 위해, 가문의 도움이 되기 위해 애썼던 모습은 동생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자신을 닮아있음. 그러나 또 다름. 결국 자신은 회사와 가문 모두에게서 인정받았지만 히카르도는 그렇지 못했음. 안타까운 심정을 알고 있음. 조국도 가문의 미래도 알 수 없었던 시절 간신히 회사에 투신해 아무 것 하나 뚜렷히 보이는 것 없이 눈과 귀를 막고 다만 임무에 매진하던 나날 자신도 느꼈던 익숙한 것이니까. 지금 히카르도가 갈구하고 있는 것은 그 시절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과 같음.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 그걸 줄 수 있음. 모른 척할 이유가 있을까? 없음. 모른 척하고 싶지도 않음. 다이무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어깨를 쥐고 있는 히카르도의 손으로 가져감.
다이무스보다 살짝 높은 위치지만 히카르도는 마치 그에게 매달려 있는 것같은 모양새로 서 있었음 그러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이쪽은 보지 않은 구부정한 자세임 처음 차가운 손등에 다이무스의 손끝이 닿자 히카르도는 멈칫하며 다이무스를 붙잡은 손을 강하게 함 뭔가를 거부하는 것처럼. 강한 악력에 다시 숨통이 죄이는 것을 느꼈지만 다이무스는 이제 그를 밀어내거나 강하게 손을 쳐내는 대신 조용히 히카르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침 이제 괜찮다. 겹친 손 아래로 싸늘한 밤바람보다도 찬 커다란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짐. "..내가 주겠다." 다이무스는 목소리를 분명히 내며 다시 입을 염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면 기꺼이 주마." 눈마저 질끈 감고 있던 히카르도는 들려온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듬. 겨우 뜬 눈 앞에 흔들림 없는 다이무스의 얼굴이 보이자 동요한 히카르도는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손을 다시 꾹 조임 그런 다음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고 의식적으로 손의 힘을 천천히 풀려고 노력함 추위에 굳은 것인지 어쩐 것인지 손이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음 붙잡힌 상태가 불편하고 괴로울 텐데도 다이무스는 아무런 내색이나 저를 거부하려는 뜻을 내비치지 않음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혹시 이건 날이 밝으면 사라져버리는 환상이 아닐까. 히카르도는 더듬더듬 반문함 "진.. 진심이냐?" 다이무스는 대답대신 히카르도 손에 얹은 손에 강하게 힘을 줌 따뜻함. 따뜻하다 못해 차가운 제 손에는 뜨겁게까지 느껴짐.
그렇다, 는 대답보다도 훨씬 단단한 반응에 히카르도는 왠지 엄청 초조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하는데 놓을 수가 없음 술기운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모름 어떡.. 어떡하면 좋은 거지. 손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눈만 껌뻑이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나무라거나 채근하지 않고 참을 성 있게 기다림 히카르도는 간신히 입을 염 "그...렇군." 이라니. 이렇게 한심한 대답이 또 따로 없음 결국 제가 가장 바라던 것을 기꺼이 주겠다는 사람한테 하는 대답이 이런 거임. 추위에 술기운에 알 수 없는 이러저러한 붕 뜬 감정이 빙글빙글 섞여서 히카르도를 혼란스럽게 만듬. 제 뜻을 전달했음에도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망설이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걸음마라도 시작하는 아이를 보듯 바라봤음 얼떨떨할테지. 이렇게 익숙치않아 보이는 태도까지도 오히려 그가 지금껏 받아왔던 대접을 반증하는 것이라 오히려 다이무스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듬 거절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받아들이길 잘했군. 다이무스는 그렇게 생각했음. 그래서 히카르도가 제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다가올 때도 아무런 제재도 거부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음
찬바람에 얼어붙은 코 끝으로 따뜻한 입김이 스쳤음 다이무스는 눈을 느리게 꿈뻑임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그림자 옆으로 골목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빈 깡통과 과자 쓰레기 등이 눈에 들어옴 히카르도는 잠시 그 근처에서 머물더니 좀 더 고개룰 숙여 입술을 맞대왔음 얇은 피부 위로 내려앉은 입술은 자잘한 상처에 거스러미가 일어 까칠했음 와닿는 숨결은 차디찼으나 입술 위로 느껴진 감각은 의외로 제법 따뜻했음 '.......?' 다이무스가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해 이렇다 할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사이 히카르도는 제 입을 열어 꾹 닫힌 다이무스의 입술을 조금 핥음 건조한 입술 위로 아직 알콜향이 느껴지는 뜨겁고 말캉한 혀가 스치는 감각은 낯설고 생경했음 물론 다이무스도 이 나이 먹도록 키스 한 번 못해본 건 아님 그보다 더한 것도 해보긴 했음 그러나.. 지금 상황이 왜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지 다이무스는 이해할 수 없음
히카르도가 바란 것이나 다이무스가 주겠다는 것 어디에도 이런 건 없었을 터임 어쩌면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도 모름 그래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아예 이탈리아 마피아의 감사 인사법이라는 걸지도 모름.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가 지금 하고 있는 키스는 욕정이라기보단 제게 의지하거나 기대는 것에 가깝게 느껴짐. 다이무스는 뭔가 말하려고 반사적으로 입술을 쫑긋함 그에 반응한 히카르도가 이번에는 다이무스의 아랫쪽 입술을 살짝 깨뭄 어두운 골목길에 촉,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림 으음.. 다이무스가 하려던 말도 잊고 입을 다시 다물자 히카르도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춤 그러고.. 조금 더 있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짐쓰러지면서도 아직 다이무스의 옷깃을 쥐고 있어 하마터면 같이 넘어질 뻔했지만 다이무스는 간신히 히카르도가 넘어지기 전에 그 등을 잡아챘음 이제 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주먹에서 침착하게 옷을 풀어내고 어깨를 빼내는 다이무스의 머릿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가 한데 섞여 더스트 토네이도(E)를 이루고 있었음 "....." "......." ".........." 고민해봐야 결론나지 않는 일은 일단 행동하는 것이 최선임. 다이무스는 일단 히카르도를 골목길에 기대놓고 저 쪽으로 굴러간 제 검을 집으러 다녀옴 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검을 탁탁 털고 히카르도를 다시 등에 인 그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나감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렸음 윌라드는 푹신한 소파에서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음 그가 움직이자 옆에 서 있던 가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짐 곁에 있던 수하가 그 시선에 움찔해서 살피는 걸 윌라드는 손짓으로 제지함.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음 수하, 라곤 하나 최소한의 무장만 갖추고 경계 만연한 남의 아지트에 초대받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음 평소같으면 이런 불리한 조건따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련만 윌라드, 그러니까 헬리오스는 저쪽에 빚이 있음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닥터 데샹이 여상스러운 걸음으로 걸어들어옴 윌라드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는 대신 가볍게 몸을 일으켜 목례함 그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여자가 불편한 하이힐을 신은 듯한 걸음으로 테이블에 차며 윌라드의 주문인 진한 커피 다과 등을 놓고 나감 카미유는 나가기 전 그녀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냈고 여자는 인상을 팍 구기며 손 대지 않고 찻숟가락을 빙글 돌렸음 '능력자...' 한갓 차 나르는 비서까지도 능력자임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걸로 카미유는 말 한마디 않고 지금 이 곳은 단단히 무장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름아닌 회사가 습격의 범인을 잡지 못하고 놓쳤기 때문이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음. 제법임. 의사라곤 하지만 윌라드에게 이런 카미유의 모습은 오히려 외교관이나 정치인과 비슷하게 비침. 껄끄러운 상대임.
카미유는 자리에 앉아 잠시 얼마 뒤에 있을 해외봉사활동과 그가 향할 제 3세계가 의약품과 일손의 부족으로 지금 이순간에도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함. 제 3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윌라드에게도 관심있는 분야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목적을 따로 두고 핵심만 요리조리 피하는 것 같은 대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음. 카미유 말에 대강 맞장구친 윌라드는 이미 마시기 알맞게 식어있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 마치 뜨겁다는 듯 뜸을 들이며 천천히 들이킴. 이쪽을 보고 있는 카미유의 웃음이 짙어짐. 평소 빙빙 꼬는 듯한 대화나 품위있는 언어 유희를 기꺼이 즐기는 그지만 이렇게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말리는 상황은 윌라드의 프라이드에 거스르는 것임. 마침내 카미유가 졌다는 듯이 눈꼬리를 내리며 웃음. 마치 눈웃음을 치는 듯함. "회담은 재개되어야 합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중단되었으니까요. 덧붙이는 의사의 목소리엔 어떠한 사심도 음모도 없는 듯했음 윌라드는 티나지 않게 고소함 애초에 그 회담을 중단시킨 것은 누구던가. 침입자 하나를 막고자 헬리오스의 거의 모든 능력자들과 대표적인 실력자까지 동원했음 다소 소동이 일긴 했지만 카미유가 얌전히 건물에 머물러 있었다면 회담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터임. 실제로 회담 내내 태연히 대화를 주고 받던 그가 무슨 소리가 들린다며 뛰쳐나가기 전까지 명왕과 브뤼노는 아무런 위협요소도 느끼지 못했다 했음. 히카르도에게 뭔가 말하려 했었다는 주변의 진술과 달리 명왕의 말 한두마디에 금방 물러난 것도 마음에 걸림. 이건 쇼임. 제 세력과 헬리오스까지 총동원한 거대한 쇼. 마찬가지로 이런 보여주기에 능숙한 윌라드 눈엔 의사가 끄는 꼭두각시의 실 끝이 분명하게 보임.
그것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윌라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던짐. "침입자의 정체에 대해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만들어보임. "히카르도 바레타. 옛... 친구입니다. 지금은 틀어져버렸지만.." 그가 제 목숨을 노릴 줄이야. 데샹은 자못 침통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음. "본사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가 저를 해칠 리 없다는 생각에 그만 경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흐르는 듯 이어지는 인형연극. 윌라드는 비죽 웃음이 새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감춤. 윌라드의 생각이 맞다면 데샹에게 지금 이 상황은 상당히 유감일 거임. 히카르도가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을 압축하기 위해 의사의 대외적인 활동을 거진 줄이고 해외파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음 당연히 데샹이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회담날 히카르도도 움직일 것이 뻔함 이 일을 위해 히카르도의 감시자인 다이무스도 빼놓았고 헬리오스에는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떡밥을 미리 뿌려두었음 저와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회사가 암살자를 잡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의사는 손 하나 대지 않고 히카르도를 처리할 수 있었음.그러나 일이 틀어져 헬리오스는 히카르도를 죽이지 못하고 풀어줬음 다이무스를 책망하긴 했으나 오히려 이 편이 헬리오스에게 도움이 되는 수가 아니었을까 함 의사의 지금 태도를 보면 히카르도의 시체를 가져다 주었다 한들 데샹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 오히려 제 친구를 죽였다며 비난의 화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자신은 고결한 피해자로 남겠지.
과거 데샹과 바레타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음 그것은 지금 데샹의 위치를 송두리채 흔들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라 그는 바레타를 처리하고 싶어함. 그러나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바레타의 옛 친구라는 위치 때문에 제 손으로 그를 없애긴 힘들고 남의 손을 빌린다 마침내 눈에 거슬리던 옛 친구는 사라지고 그를 살해한 비정한 조직과 친구를 잃은 가여운 의사만 남음 완벽한 시나리오임. 흠 잡을 데없이 완벽함. 윌라드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느긋하게 웃음. 기왕 손을 잡을 상대라면 벽창호보단 야망가 타입이 좋음. 그 가소로운 욕망마저 손아귀에 쥐고 삼켜버릴 수 있을 테니. 의사는 이 시나리오를 포기할 수 없음. 그와 친분 관계를 놓을 수 없는 헬리오스와 마찬가지로. 회담은 다시 시작될 필요가 있음. 둘의 이해가 일치하니 이 후의 대화는 그저 구색 맞추기와 시간 끌기의 다른 말이었음. "회담 날짜는 차후에 다시 잡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침내. 목적에 도달했음. 의사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음. 배웅하려는 데샹을 정중하게 거절한 윌라드는 건물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며 생각함. 일단은 히카르도 바레타의 확보가 우선임. 그를 잡는다면 데샹의 약점을 틀어쥘 수 있을 거임. 이왕이면 저 의사가 바라마지 않는, 살아있는 그대로의 친구를.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났음 머리가 깨질 거 같음 여긴 어디고 난 또 누구야..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자기가 누워있는 곳이 차가운 길바닥이나 술집의 딱딱한 탁자가 아니라 푹신한 이불 위라는 것을 깨달음 그러고보니 지난밤 이런저러한 것들이 다 빡쳐서 술을 진탕 마신 기억이 남 그러다가 그녀석이 찾아왔고.. 히카르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듬음. 자신은 화를 냈음 대체 저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알 수 없는 행동들을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소리를 질렀음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놓아두든지. 어떻게든 하라고 악을 내질렀음 입으로는 밀어내라고 하면서도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던 건 술기운 탓이었을까. 히카르도는 괴고 있던 손에 얼굴을 더 깊게 묻음 그렇게 되는대로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보고 그 녀석은 어떻게 했던가. 히카르도는 잠시 행동을 뚝 멈춤. 그래, 그 녀석은
준다고 했음
아. 아아. 머리꼭지까지 퍼붓듯 들이부은 술 때문에 그 날 기억은 전체적으로 흐릿하나 딱 하나 또렷히 기억남. 차가운 밤바람에 얼어있던 귓전을 때리던 단호한 목소리. 준다고 했음. 나에게. 내가 원하던 단 하나. 춥지도 않은데 얼굴을 묻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옴. 이거 뭐지?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거의 동년배나 다름없는 그 녀석에게 달라고 조르고 마치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 마냥-, 그렇지만 준다고 했어. 분명히. 술기운에 잊혀지지도 않고 그렇게.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음. 히카르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가 누워있던 방을 두리번거림 홀든 가 저택. 자신이 요 근래 계속 지내왔던 이글의 방. 가구 배치도 놓여진 물건도 변한 데 없이 그대로임. 아직 이른 시간인지 새벽이 파랗게 창을 물들이는 것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던 히카르도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몸을 일으킴. 술집에서 쓰러졌던 자신이 이 방에 들어와있다는 것 자체가 어젯밤 일이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부족함. 이 것보다 더 현실적인, 손에 잡히는 증거가 필요함. 그걸 보고 싶음. 히카르도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바로 옆 방 문 앞에 섬.
이미 히카르도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듬 자기 방문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짐 '일찍 일어났군.' 히카르도가 지난 밤 마신 술의 양이나 평소 기상시간에 비해서도 이른 시간임. 익숙한 손길로 한 손만으로 붕대에 단단히 매듭을 지으면서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노크를 하거나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길 기다림 그러나 히카르도는 둘 중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방 밖에 있을 뿐임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은 걸로 보아 다른데 가지 않고 거기 계속 서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있는 내색을 하지 않는 히카르도를 잠시 그대로 뒀던 다이무스는 한숨 비슷한 것을 쉬며 몸을 일으켜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염 바로 그 앞에 서 있던 히카르도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임
어떻게 말붙여야 하나 고민하던 상대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자 히카르도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함 다이무스는 한마디함. "비켜라. 걸리적거린다."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가 방 앞을 꽉 막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음. 그렇다쳐도 평소같으면 발끈해서 한 마디 했을 히카르도가 왠일로 군말 하나없이 순순히 뒷걸음쳐 물러남. 아직 술이 덜 깼나보군. 그러니 그런 짓도 했지. 다이무스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림 히카르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끙 소리를 내며 그대로 서 있음 "너 그... 아니다." 그러고선 입을 꾹 다물고 다이무스 검 손잡이 끝만 노려보는게 오늘 내로 말 못할 거 같음 뭐라 채근하는 대신 다이무스는 그대로 히카르도를 가만히 쳐다봄 "...젠장..." 히카르도는 작게 욕지꺼리함. 에라 모르겠다. 거의 내던지듯 할말을 내지름.
"너 어젯밤 일..." 다이무스는 히카르도를 계속 보고 있음 히카르도는 마른침을 삼킴 "그거 진심이냐..?" 다이무스의 기억이 맞다면 히카르도는 어젯밤에도 저 얘길 물어봤음 그때 자신은 분명히 대답했음 다른 이는 어떨지 몰라도 저 다이무스 홀든은 그런 얘기 하나 허투루 뱉는 인물이 아님 대체 무슨 다른 뜻이 있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다이무스는 딱 한번만 더 말해주겠다고 생각함 다음에도 물어본다면 답할 가치 없는 질문이라 일축하고 무시해버려야겠군. 그 점을 분명히 하면서 다이무스는 담담하게 말함 "너를 돕겠다고 했다."
히카르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잘게 흔들림. 입술을 단단히 문 그는 바람처럼 희미한 목소리를 냈음 "...어째서지?" "너는 그걸 원하고 있고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 도울 수 있다,라.. 히카르도는 조금 침착해진 태도로 다이무스의 말을 반복함. "도울 수 있어 도울 뿐이다, 그럼 이 행동에 너의 의지는 없나?" 이놈은 지금 지가 뭔 말 하는지는 알고 말하나? 어처구니가 없어진 다이무스는 반쯤 짜증을 내며 대답함 "당연한 소릴 하는군." 아니 그럼 하기 싫은데 할 수 있으니까 걍 돕겠냐 싶음 더군다나 이런 일을. "내 행동은 모두 내 의지다. 너는 감히 홀든에게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뭐?" 첫마디에 차갑게 표정을 굳혔던 히카르도는 이어지는 다이무스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지음. "그..러시겠지." 히카르도는 다시 말을 반복함. "네 의지다 이거지?" 이 모든 행동, 나에게 주는 모든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멍청해보이는 대화에 다이무스가 대놓고 인상을 구기든 말든 히카르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보임. "너 아직 술이 덜 깼나?" "아니다." ".... 흠..." 다이무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히카르도의 위 아래를 쭉 훑음
멀뚱하니 서 있는 히카르도는 오늘따라 어딘가 한쪽이 풀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이무스는 아직 남은 취기 탓이려니 대충 넘김 혹은 진짜 믿기지 않아서 어린아이들처럼 치대는지도 모름 어느 쪽이든 다이무스에겐 상관없음 그보다 둘이 신경써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음 다이무스는 가던 길을 마저 가며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히카르도를 재촉함 "나갈 준비해라." "...어디를?" "헬리오스다." "?!" 그 말을 들은 히카르도는 마치 다짜고짜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음 "너 분명 날 돕겠다고...!" 물론 다이무스에겐 아까 대화의 연장선상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음 다만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하긴 함 그리 생각한 다이무스는 화를 내거나 무시해버리는 대신 무덤덤하게 설명함 "일단 회사로 가서 보고해야 한다." 뒷맛이 안좋았던 히카르도와 달리 데샹은 전 소속인 카모라와 관계가 좋음 거기다 이번 회담에서도 보였듯 헬리오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지금은 어둠의 능력자 소속이고. 그 말은 데샹은 자기가 원한다면 저 세 조직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거임 다이무스나 히카르도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가장 큰 능력자 조직 셋을 적으로 돌리고 도망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 장남인 제가 달아나면 남은 가문사람들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고.여기서는 일단 회사의 일원이라는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중요함 거기다 닥터 데샹에게는 분명 수상한 점도 있음 그 부분을 잘 파고들면 회사를 배신하지 않고도 히카르도를 돕는 것이 가능함 이런 일은 빨리 행동하는게 좋음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큭..." 정황을 파악하고도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계속 쳐다봄 다이무스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자신을 회사로 끌고가기 위한 사탕발림인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 같음 할 말은 충분히 했음 그렇게 생각한 다이무스는 다른 말 덧붙이지 않고 히카르도가 결정하길 기다림 고민하던 히카르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임
자동차는 금방 준비되었음 차 뒷자석에 나란히 앉아있던 히카르도는 그제서야 붕대를 발견한 것인지 제 옆에 놓인 다이무스의 손을 얼른 잡아챔 "다쳤나? ...그때?" 정신없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도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나 봄 다이무스는 제 손을 잡은 히카르도를 가볍게 떨쳐냄 그다지 힘이 실려있지 않았던 손길은 금세 떨어짐 "별 것 아니다." 말 그대로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검 손잡이에 쓸려 회복이 더뎌지는 것이 거슬려 붕대로 감아뒀을 뿐 이제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음 애초에 신체강화 능력자인 다이무스는 이 정도 상처가 엄청 대수롭고 그러지 않음 이보다 더 한 경우도 많이 겪어봤음 당사자인 다이무스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지만 사실상 저 때문에 입은 상처라 못내 신경쓰이는 듯 히카르도가 드문드문 제 옆에 도로 놓인 손을 흘끗거림 아까는 배신이냐고 화냈다가 지금은 걱정이나 하고 있고 감정 변화가 엄청 다양한 놈임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기보단 성격인 거 같음 흔히 지껄이던 "피가 뜨거워지는군"은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임 묘하게 신체접촉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했고. 어제 일의 연장선상인가... 문득 생각났던 다이무스는 창 밖을 보고 있는 히카르도에게 "어제 일 기억나느냐"고 물어봄 히카르도는 고개를 기웃함 어제 일? 뭐냐 너가 나 돕겠다고 말한 거? 기억 못하는군.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음 "아니다. 기억 안난다면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헬리오스는 한산했음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서있던 사이퍼 몇명이 헛숨을 들이킴 히카르도를 알아본 것이겠지. 당장 회사로 쳐들어와 의사를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린 인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회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는 것에 경악한 그들은 히카르도 바로 옆을 걷고 있는 인물에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뜸 "BLADE, 그는..!" 건물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둘이 들어오는 것을 본 사이퍼 한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다이무스는 덤덤하게 자기가 모두 책임질테니 길이나 열라고 명령함 문 열기를 주저하면서도 막상 다이무스나 히카르도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음 다이무스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고 오히려 옆을 걸으면서도 공격받는 것이 아닌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히카르도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음 회사 입장에서 자기는 다짜고짜 헬리오스에 공격을 퍼부운 테러리스트일텐데 이렇게 길이 쉽게 뚫리는 것을 보니 다이무스가 회사에서 얻고 있는 신뢰가 대단한 것처럼 보임 하기사 애초에 배신할 것이 분명한 자신의 감시 역할을 맡을 정도니 어지간하겠어. 둘은 빠르게 걸어서 마침내 명왕의 집무실 앞에 도착함 막 노크를 하려는 찰라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림. "명왕은 출타중이십니다, BLADE." 윌라드의 냉정한 눈동자가 다이무스와 히카르도를 차례로 훑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제 집무실로 가지요."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이사는 제 뒤를 흘끗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말을 더함.
윌라드의 책상 앞에 서서 다이무스는 그간의 자기가 겪었던 일이나 생각했던 것을 보고함. 윌라드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의문나는 것들에 대해 추가로 질문을 던졌음 다이무스는 침착하게 대꾸함 상사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의 다이무스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낮고 억양이 없어 단조로웠음 가끔 말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침묵을 지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말투는 그닥 빠르지 않아 차분하고 망설임이 없었음 바로 곁에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대화에서 열외된 히카르도는 침묵을 지키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음 대화 중간중간에 윌라드가 감추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짐 마치 뭔가를 재는 것처럼.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그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할 수도 없음.
"그렇습니까." 마침내 윌라드가 말함. "어떻습니까, MERCILESS?" 히카르도는 굳은 얼굴로 대꾸함. "모든 것은 BLADE 말 대로다. 카미유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그를 제지하기 위해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협력, 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음 윌라드는 깍지를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띄움. "좋습니다."
그 후 대화할 것이 좀 더 남았다며 히카르도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낸 둘은 대화를 계속함 히카르도는 밖으로 나와 방 옆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음. 협력이라. 윌라드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히카르도는 카미유를 제지하는 일에 협력하고 싶은 마음은 없음. 협력이 아님. 이건 줄곧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임.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카미유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전부터 자신은 이미 제 친구가 예전에 생각하던 자랑스럽고 미쁘던 친구가 아님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름.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얽혀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다시 한번 카미유를 만나고 싶음. 새삼 그가 주던 유대가 그러워서가 아님. 막을 내린다면 그에 단단히 개입되어 있는 자신이어야 할 거라고 생각함. 그리 생각하면서 히카르도는 자기 마음 속이 생각보다 훨씬 담담하고 고요해서 놀람.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발판을 얻었기 때문일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이무스는 짧게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옴 나름대로 쓸만한 패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윌라드의 태도는 의외로 순순했음 사실 다이무스는 최악의 경우 패가 먹히지 않아 히카르도는 붙잡히고 자신의 지위가 강등될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 실현가능성은 낮았지만. 히카르도와 그의 옛 친구가 각각 어떤 소문에 휩싸여 있는지를 고려하면 영 가능성 낮은 이야기는 아님. 그러나 윌라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 히카르도의 안전과 카미유를 지원할 원조금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것까지 약속했음. 일이 지나치게 잘 되어감. 실상 다이무스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좋게 돌아가고 있음. 윌라드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그와 의사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임 어쩌면.. 회사 내에 수상한 인물은 윌라드를 말하는지도 모름. 늘 괄목할만한 활약을 보여주면서도 회사의 2인자에 머무르는 인물. 가지고 있는 야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텐데도. 평소 같은 회사의 일원으로서 윌라드를 존경하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로 다이무스는 마음을 놓지 말자고 생각함. 그렇다 해도 지금은 윌라드의 뜻모를 호의에 기대어 일을 진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임
문 밖으로 걸어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히카르도가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옴 "대화는... 잘 끝났나?" "그래." 히카르도가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함 그 얼굴을 보고 다이무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음
얼마 지나서 히카르도와 다이무스는 비밀리에 명왕과 브뤼노를 포함한 회사의 중역들을 만나게 됨 물론 윌라드의 주선이었음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짧막하게 둘을 소개한 이후로 윌라드는 철저히 방관자의 자세를 취함 마치 둘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시험하기라도 하는 양으로. 그가 명왕에게 이 사태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번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윌라드는 책임질 생각이 없어보임 애초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지. 히카르도는 조금 긴장한 걸음걸이로 걸어가 저를 살피듯 주목하고 있는 군상들 앞에 섬. 등 뒤에서 익숙한 묵직한 발소리가 멈추는 것이 들림. 그것만이, 다만 그것만이 자신을 이 자리에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누름돌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 말문이 막힌 건 이번이 세번째였음. 질문을 던진 이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빙글 흔드는 걸 보면서 히카르도는 제 입술을 깨뭄. 그래서 닥터 카미유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뭐고 이 일을 통해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행보는? 여름날 장대비 쏟아지듯 제게 떨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을 히카르도는 거의 제대로 답하지 못했음. 사람들이 작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림. 아직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사내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을 모두 근거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아니라고 히카르도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음. 차라리 속셈이 있어 감추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음. 정말 한심하게도 자신은 정말... 카미유 데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음. 그가 가진 목적, 속셈, 음모... 누구보다도 서로 잘 안다고 자부했던 친구인데도,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가 저에게 보여준 모든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았음. 이 손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 그 모든 목적과 음모는 기실 히카르도 자신의 인생을 쥐고 흔들고 있었음에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자신만 홀로 어리석었음. 눈 앞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납득시키고 믿게 할만한 머리터럭만큼의 진실도 쥐고 있지 않는 자신.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를 잘 알고 있으며 자기가 돌아갈 곳은 거기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음. 모래로 지은 성. 분명 그것을 만든건 친구지만 그 위를 그럴싸하게 장식한 것은 자신의 무신경함과 어리석음이었음. 이제 미루고 못본 체 해두었던 밀물이 그 세월만큼이나 거세게 돌아와 제가 지은 모래성을 후려치는 것을 히카르도는 망연한 얼굴로 응시했음 더없이 안전한 건물 안에 들어와 있지만 히카르도는 마치 발 밑이 금방 꺼져버리는 늪과 같다는 생각을 함. 히카르도는 버릇처럼 주먹을 꾹 쥐었다 폄. 그의 표정을 쓱 살핀 명왕은 잠시 휴식시간을 갖자고 말함. 히카르도는 도망치듯 회의장을 뛰쳐나와 화장실로 향함.
사방이 막힌 공간으로 들어오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음. 털썩 소리를 내며 뚜껑 위에 걸터앉은 히카르도는 차가운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함. 뭐가 그를 제지하는데 협력이고 뭐가 내 손으로 막을 내린다였나. 결국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시간만 버리고 있을 뿐임. 저를 바라보는 불신과 의혹의 눈길들. 그들 탓이 아님. 윌라드나 명왕은 자신에게 이미 충분한 기회를 주었음. 아무도 없이 혼자서 카미유의 행적을 쫓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임. 그리고 자신은 그걸 끔찍하게 망치고 있음.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결국 난 이런 인간이고, 영원히 카미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히카르도는 주먹으로 옆의 벽을 후려침. 조용한 화장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감.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림. 누군가 들어왔음. 날카로운 구둣발소리가 매끈한 타일바닥을 부지런히 밟는 소리가 들림. 다이무스의 것보다 산만하고 둔함. 귀에 조금 거슬릴 지경이였지만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히카르도는 금세 발소리에 신경을 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저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생각하던 히카르도는 갑자기 세면대 물소리에 섞여 대화가 분명하게 들려오자 숙였던 고개를 듬. 익숙한 목소리. 아까 저에게 질문했던 인물들 중 하나인것 같음. 그들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
그 치는 영 수상하던걸.. 나 같으면 그런 제안은 거절하겠어. 아예 닥터 데샹에게 그를 데려가는 것도 좋겠지... 저들에게 화는 나지 않았음. 다만 저런 인식밖에 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했을 뿐. 계속해서 그들은 세계 정세와 헬리오스의 입지에 대해 이야기했음. 하지만 그 BLADE의 제안이라.. '...뭐?' 히카르도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뻔한 것을 간신히 다스림.
맨처음 저를 이곳까지 데려와 소개한 것은 윌라드임. 주로 질문을 던지고 상황을 정리한 건 브뤼노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것은 명왕과 다른 중역들.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회의장 안에 들어온 이후로 히카르도는 한번도 다이무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음. 들었던 것은 그저 뒤를 따르는 발소리 뿐. 등 뒤를 지키던, 묵직한 구두소리. 아. 그는 계속 뒤에 서 있었음. 윌라드나 다른 사람처럼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제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거기 서 있었음.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뒤에서 변명도 첨언도 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있었음. 그 모습을 모두들 다 보고 있었는데. 제 이름도 가문도 회사에서의 위치도 뭐 하나 감추거나 꾸미지 않은 채로 이번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제가 받을 리스크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이 깊은 그이니 제 행동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닐텐데도 그는 거기 서 있었음. 여기 제 뒤에.
회의는 끝났음. 어딘지 모르게 미덥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잠깐 휴식시간을 가지고 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온 히카르도의 태도는 전에 없이 분명하고 단단했으나 그조차도 세력간 정치와 계산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을 완전히 납득시키기는 어려웠음 거기다 히카르도가 카미유의 계획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건 사실임 히카르도가 쥐고 있는 실낱같은 정보로 그들을 완벽하게 우방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했음 결국 회의 결과 윌라드가 사전에 약속했던 히카르도의 안전은 보장하기로 했지만 지원금 보류나 계획 저지 등은 앞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애매한 말만 들었을 뿐임. 이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발을 탕탕 구르고 저를 믿어달라 소리를 지르고 제 감정을 못이겨 씩씩거리기까지 했던 히카르도는 완전히 지친 걸음걸이로 회의장을 빠져나왔음 가뜩이나 하루종일 질문에 시달리고 답지 않은 열변까지 토해내 힘들어 죽겠는데 앞에 가는 놈은 매정하게도 저의 그런 사정은 살피지 않고 원래 걸음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림. 거기다 대고 기다리라느니 힘들어죽겠다느니 하는 말은 자존심에 죽어도 꺼내지 못할 말이고 거기다 오늘의 성과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투덜거리는 대신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다이무스의 뒤를 따라감.
앞서 걷던 다이무스는 조용히 멈춰서서 뒤를 돌아봄. 입다물고 따라오던 히카르도는 뭔가 싶어서 같이 멈춰섬. 저를 빤히 보는 어두운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아보이기도 하고 그저 평소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 눈빛이 저를 책망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 자신의 심정 때문이겠지. 결국 이것밖에 안되나. 히카르도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되뇌임.
"날 책망해도 달게 받겠다. 이건.. 나의 실수다." 결국 아무것도 몰랐던 것. 제 생각에만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다시금 이를 꾹 악문 히카르도를 보는 다이무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음. 차라리 뭐라도 한소리 거하게 얻어맞고 싶었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침묵만 지키자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임. 근데 자기가 잘못한거라 뭐라 말도 못하겠음. 자기가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한심함. 또 다시 제 속으로 꺼멓게 가라앉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불쑥 한마디 던지자 멍청한 표정이 됨.
"그날 밤 일 정말 생각이 안나나?"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래 너가 나한테 내편 되겠다고 얘기한 일? 그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혹시 그 얘기 무르기라도 할 생각이면... 아연한 얼굴로 머릿속에 빙빙 떠다니는 말 중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히카르도를 가만히 쳐다보던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멱살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김 어...어? 정신 못차린 히카르도는 질질 끌려옴 다이무스는 그대로 히카르도에게 키스함 "....?...!!" 놀라서 벌어진 입안을 혀로 쓴다음 떨어지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도 잊지 않음. 당한 날의 당황이며 행동의 뜻이야 어찌됐든 다이무스는 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 남자니까ㅇㅇ 아마 그날 밤부터 벼르고 있었을 거임 그날... 밤? 히카르도는 갑자기 입맞추는 다이무스에 당황하고 순간적으로 제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또 당황함 "오늘 일은 이 정도라고 해두지." 아 그날 밤의 나는 뭘 한 것인가 그걸 저녀석은 또 갚은 거고 저 말은 또 무슨 뜻...????...??!!!! 완전히 혼란에 빠진 히카르도가 멍때리는 사이 다이무스는 방금 도착한 자동차에 몸을 싣고 잠시 후에 허둥지둥 저를 따라오는 히카르도를 보며 피식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