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은 그대로 두지만 지명은 한자 음독 ex) 니시우라 -> 서포(국)왜냐면 둘 다 일본식이면 왠지 안패러렐같아서 + 이름까지 바꿔봤더니 내가 못외우겠어서... 중용은 좋은 거시여따
1.
간밤에 폭설이 내렸음. 아닌게 아니라 이 겨울에 어렵사리 구해다 엮어놓은 수숫대 울타리가 반이 넘게 흠뻑 젖어버릴 정도의 눈이었다. 이 나라는 이렇게까지 눈이 오는구나, 하고 어머니의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들으며 아베는 아침 일찍 싸리비를 들고 눈을 치우러 나갔음. 밤새 수북히 쌓여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눈들은 북쪽의 물기가 많고 묵직한 함박눈이 아니라 약간의 바람에도 하얗게 눈가루가 되어 날리는 포슬한 가루눈임. 눈에선 아무 맛도, 냄새도 나지 않는다. 낯설다. 아베는 숨을 길게 내쉼. 입김이 금방 하얗게 바스라짐. 새삼 환경의 변화를 몸소 느끼면서 아베는 잘 바스러지는 눈을 척척 쓸어내며 제 마당을 청소해냈음.
아베는 평소에도 청소를 잘(그리고 자주)한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일을 계획적으로 해내는 방법을 잘 알았음. 그닥 넓다고 할 것도 없는 동그란 마당의 반을 갈라 눈을 쓸어내고 나머지 반의 반을 또 갈라 눈을 쓸어내려는데 마당 한 구석에 눈도 아니고 마당흙도 아닌 묘한 게 보였음. 노란 지푸라기 같은 것. 집중하던 눈을 들어 주변을 둘려보니 과연 그 주변에만 쌓인 눈이 불룩 튀어나온 게 보였음. 뭔가 묻혀있다는 거지. 벌써 창고에 들어가있을 겨우내 양식자루는 아닐테고. 아베는 대충 '그것'의 형태를 어림해서 위의 눈을 비로 쓸어내본다. 사람임. 지푸라기같이 노랗고, 까칠한 머리카락을 한 사람이 자기 앞마당에 쓰러져있었음. 게다가 잔뜩 언. 나막신을 신은 발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손을 대본 아베는 그 사람이 추위에 언 제 손으로도 알만큼 싸늘하게 식어있다는 걸 알아차렸음. 죽었나? 얼핏봐도 겨울용은 아닌 얇은 비단옷 안쪽에 손을 넣어보니 아직 따뜻함. 미약하게나마 맥도 있음. 아베는 큰 소리로 집 안으로 사람을 부름. "아버지, 슌!"
뭔가 싶어 반쯤 신이 나서, 혹은 귀찮은 일이 생겼나 싶어 느긋하게 걸어나온 남동생과 아버지의 놀라는 얼굴을 보면서 아베는 아직도 쌓인 눈 때문에 눈 부신 눈가를 찌푸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마당에 사람이 쓰러져있어요."넹 요거 미하시ㅇㅇㅇㅇㅋㅋㅋㅋ 아베가 그 이름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뒤의 이야기지만 여튼. 남동생의 부축을 받아 업은 몸이 몸서리가 일 정도로 차가웠지만 또 그만큼 가벼워서 아베는 조금 묘한 느낌을 받는다. 후에 이 때를 떠올릴 때마다 아베는 이것이 어떤 예감과도 비슷했다고 생각하게 되지. 마당 쓸러 나갔던 아들이 반쯤 동사한 시체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람을 업고 들어오자 밥 짓고 있던 어머니가 에그머니나 소리를 질러. "아직 안죽었어요!" 이내 진정한 어머니와 따라 들어온 동생의 도움을 받아 소년의 언 옷을 벗기고 뜨끈한 아랫목에 누여 놓고 나서야 아베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어.
소리가 들렸어. 어둠속에서. 까칠한 싸리비가 눈 덮인 흙마당을 삭삭거리며 쓰는 소리와 또박또박한 나막신 소리. 아득한 곳에서 점차 이곳으로 다가왔어. 여기는 멀고, 깜깜하고 추웠는데. 이제 따뜻해. "....?" 미하시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땐 아베 가족이 조금 이른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다시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아늑한 집안 공기에 섞여서 구수한 밥 냄새가 나. 목수일을 하는 가장은 밥 먹고 일찌감찌 새로 구한 일 마저 하러 집을 나섰고 장남은 제 나름대로 주변을 둘러보겠다고 나가서 집엔 어린 슌과 어머니 밖에 없었지. "와, 일어났어요?" 언 몸은 가끔 따슨 물로 닦아줘야 한다는 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막 물든 대야와 마른 수건을 들고 들어오던 슌이 미하시가 눈 뜬 걸 보고 신이 나서 밖에 대고 어머니, 하고 불렀다.
여긴 어딜,까. 낯선 천장과 낯선 벽, 낯선 물건들이야. 내가 있던 곳은, 달랐어. 그 곳은 달랐는데, 나는 그 곳에서 나오려고... 미하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어. 다시 돌아온 슌이 들고 온 대야를 밀어내고 침상 쪽으로 바싹 다가 앉아 이것저것 물어본다. "저기, 어디서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이름은 뭐라고 해요?/ 왜 우리 마당에 쓰러져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머리가 울려서 잘 알아듣기 힘들지만 소년의 깎아논 밤처럼 동그란 머리통이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비슷한 또래의 사촌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거라서 미하시는 천천히 진정했어. "나...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미하시가 말을 멈추자 슌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어. "말 못해요?" 마침 따라 들어온 젊은 부인이 아이를 타일러 보냈어 - "슌, 가서 따뜻한 물이랑 쑤어둔 죽 좀 들고 오렴." -. 미하시는 아이의 이름이 슌이였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지.
"나는 미사에란다." 아베 부인은 침착한 태도로 목소리가 안나오는 건 일시적일 수도 있다고, 일단은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 그녀의 친정은 의사 집안이었고 으레 한 집의 안주인이 그렇듯 아베부인은 남편이나 아이들이 당하기 쉬운 여러가지 사고(찰과상이나 동상 등의)의 대처법 + 민간요법을 잘 알고 있었어. 더해서 한창 나이의 아들 둘을 키우면서 절로 길러진 담력도 있고. 온후함과 침착성이 두드러지는 부인의 태도에 안심한 미하시는 다시 천천히 잠들어. "어머, 이건 나중에 필요하겠구나." 문을 닫고 나간 방문 밖에서 부인이 밥상을 들고 온 터인 아이에게 건네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오후 내내 눈을 맞으며 돌아다닌 수고가 무색하게 탐문은 별 수확없이 끝났어. '서쪽'은 시골이라 아베가 있던 북쪽보다는 사람들이 훨씬 순박하고 숨기는 것 없었지만 그만큼 워낙 아무 것도 없는 동네라 아예 캘래야 캘 건덕지가 없었던 거지. 그래도 영주나, 하다못해 자경단 정도의 세력이라도 좋았는데. 오후 내내 내린 눈 때문에 무거워진 판초를 탁탁 털면서 타카야는 생각해. 그나마 촌장에 대해선 얻은 정보가 있긴 했지. 하나같이 대단한 여걸이네, 어쩌네 하던데 이런 온후한 시골에서 용맹이라야 보통보다 조금 더 대가 센 여자라는 이야기겠지. 오늘 탐문의 수확은 이정도일까.
"다녀왔어요!" 외치자 집 안에서 어머니와 슌이 반갑게 답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방 가운데에 지금 아베가(家)의 형편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비단옷이 활짝 펼쳐져 널려있어. 이건 '그녀석' 거구나. 아베는 거의 반쯤 잊고 있던, 아침에 그가 구해냈던 소년을 생각해내. 당시야 당장 사람 숨이 끊어질랑 말랑 하는 판국이니 신경쓰지 못했지만 이런 비단이라니 의외로 좋은 집의 자제일지도 몰라. 무늬는...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걸린 옷을 눈으로 쓱 훑자 가는 솔로 비단을 쓸고 있던 어머니가 한숨을 폭 내쉬어."이렇게 좋은 비단인데, 망가져버렸단다. 아까워라." 그 말 그대로, 온전한 것은 등판 부분 뿐 옷의 자락이며 소매 부분은 이미 끌리고 쓸리고 반쯤 그슬러서 흉하게 얼룩져있어. 부분을 잘라서 쓴다면 모를까 이건 더 이상 이 상태로 입을 수 없을 거야. 원래 이런 종류의 옷은 옷 자체나 옷을 입은 사람이나 가만히 두고 보기 위한 것이라 조금만 밖에 나가 돌아다녀도 금세 닳거나 헤지기 쉬워. 그렇다 해도 옷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이 녀석은 뭘 한걸까.. 아니 애초에 뭐하는 녀석이길래 이 계절에 이런 옷을 입고 남의 마당에 쓰러져있던 걸까? 타카야는 문득 아까도 느꼈던, 어떤 예감이 슬몃 고개를 드는 것을 느껴.
"타카, 그러고 보니 네가 데려온 그 아이..."어머니의 말을 대충 흘리며 방으로 들어오던 타카야는 저도 모르게 "으헉!" 하고 비명을 질렀어. "히익!" 식탁에 앉아 볼이 미어 터져라 밥을 밀어넣고 있던 미하시가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간 건 말할 것도 없고. 갑자기 자기 집에서 맞닥뜨린 낯선(+거기다가 괴상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던 타카야는 겨우 진정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깨어났다고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집 안에서 소리를 지르지 말렴, 하고 어머니가 마저 말을 이어. 타카야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슌과 대화 - 거의 슌이 이야기하고 미하시는 밥 먹기 바빴지만 - 하고 있던 미하시는 타카야가 진정하고 나서도 식탁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보다 못한 슌이 "??" 하면서 반대편에서 식탁 밑으로 고개를 집어 넣자 ")@#()!" 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이상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들다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웅크려. 대단한 쿵 소리가 나던데 과연 머리가 아픈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대체 이 녀석 뭐하는 녀석이야? 타카야는 좀 짜게 식은 표정으로 미하시를 보고, 미하시는 그런 타카야를 눈치채자 웅크린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이건, 뭔지 모르겠지만.. 타카야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껴. 답답해! 이 녀석 행동은 왠지 뭔가 화 나! 점점 못마땅해지는 장남의 표정을 본 슌이 "형..?" 하고 고개를 갸웃해. "형, 이 사람 미하시 씨야." 간신히 이름(만)을 들었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동생을 보니 타카야가 느낀 저 녀석에 대한 느낌은 거의 사실인 것 같아. '미하시' 쪽을 한참 봤다가 기다려도 그 쪽이 직접 자신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할 낌새가 아닌 걸 눈치채자 타카야는 아예 그 쪽에서 고개를 돌리고 동생과 대화하기 시작해. "나이는?" "말 안했어." "어디서 왔대?" "음... 모르겠어." "뭐하러 왔는데?" "그것도 몰라.." 타카야가 질문할 때마다 움찔대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미하시는 타카야가 자기 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어깨를 축 늘어뜨려. "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동생에게 핀잔을 주자 어머니가 "타카, 얘는. 손님을 앞에 두고 무슨 말 버릇이니?" 하고 지적을 줘. 슌과 함께 풀죽었던 미하시는 푹 숙였던 얼굴을 슬쩍 들어 타카야의 얼굴을 올려다 봐. 그 과정에서 타카야와 눈이 마주치자 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지. 아- 이녀석 진짜 왠지 열받네.. 타카야는 미묘한 얼굴로 미하시를 쳐다봐. 따지자면 자기가 구해준 녀석이긴 한데.. 이런 녀석이었나.. 그나저나 '미하시'라는 이름은 어딘가 귀에 익어.
미하시와 타카야가 대화 비스무리한 걸 해본 건 미하시가 깨어나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야. 그동안은 미하시가 웃고 있지 않은 얼굴 + 큰 목소리에 벌벌 떠는 통에 아직 온전히 낫지 않은 미하시의 건강을 염려한 모친이 부친과 타카야는 거의 격리시키다시피 했어. 미하시가 묵고 있는 건넌방에 출입을 금지당한 타카야는 제가 구해준 놈 때문에 제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뭐.. 아베 가에서 어머니의 위력은 무시무시했으니 아무 말 못하고 따랐지. 그나마 건넌방 출입이 잦을 정도로 집에 붙어있지도 않았던 게, 이사온 지 얼마 안된 서쪽 지방을 알아보는 일도 바빴고. 몇 번 마을의 촌장을 보러 간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외출 중이라는 얘기였어. 이런 시기에 여자가 이렇게 자주 나다니지 않을 테니 필시 외부에서 온 아베를 경계하는 게 분명해. 역시 일이 잘 안풀리려나. 각오했지만.
집 근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타카야는 간신히 이쪽 지방 끝, 즉 옆 나라에 미하시라는 이름의 가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내. 이웃나라라 해도 이런 시골과 그리 가깝진 않지만. 삼성三星국의 미하시라면 강력한 무력은 없지만 그 내력이 건국 직전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고,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부유한 가문이야. 그 부족한 무력이라는 것도, 이번에 대를 잇게 될 장남이 상당한 무예가라는 소문으로 보아 곧 뚜렷한 약점이 되지 못할 확률이 높지. 이런 시골에 어울리지 않던 그 녀석의 화려한 차림새도, 그 미하시 가家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 타카야가 '미하시'를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건 애초에 미하시는 무장 가문이 아니어서 조금은 타카야의 관심 밖이었던 데다가 미하시의 화려하고 중후한 인상과 제 집에서 검소하다 못해 소박한 음식들을 정신없이 입 속으로 밀어넣고 있던 그 녀석의 얼굴을 도저히 연결지어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하시'라 해도 말단이려나. 실제로 그런 가문의 혈통은 귀하기 때문에 밖으로 함부로 내돌려지지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 녀석은 간신히 미하시라는 이름만을 받고 있거나, 혹은 그조차도 아니어서 어디서 흘려들었던 이름을 사칭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이런 시기이고. 당장은 그 체격이며 얼굴을 봐서 힘으로 남을 해치지 못하리라 여겨 별 경계없이 어머니와 어린 동생만을 둔 집에 머무르게 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가 목숨을 구한 사람이고, 이 계절에 어디가서 얼어죽게 내둘 수도 없지. 타카야의, 미하시에 대한 생각은 그 정도였어.
타카야의, 미하시에 대한 이런 생각이 바뀐 건 그 '대화 비스무리'의 후야. 타카야로 치자면 그건 혼잣말도 아니었고 어찌됬든 두 사람이 말의 교환을 했으니까 어느 쪽이냐면 대화에 가깝다고 생각했어. 물론 평소(그리고 보통)라면 아무리 사교성 없다는 소리를 듣는 타카야라도 이런 걸 대화로 치지 않지만.오늘도 마을 주변을 탐색하고, 내친 김에 촌장 집에도 들러 '주인님은 오늘 농지 증축에 나가셨답니다~'하는 여느 때와 같은 여종의 말을 대충 전해듣고 난 뒤 좀 빨리 귀가한 타카야는 꽁꽁 닫혀있던 건넌방 커다란 창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눈치채. 창이 작았던 북쪽 집과는 다르게 서쪽은 문도 창문도 큼지막하지. 지금의 집은 빨리 서쪽의 건축 방식과 익숙해지려고 목수인 아버지가 일부러 서쪽식으로 지은 거야. 처음에 창이 열려져 있어서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지만 집에 가까워져 옴에 따라 그 창 안에 누가 들어있는 게 보여. 미하시야. 타카야가 며칠 전 구해 온 녀석. "뭐야, 너구나." 오늘은 겨울치곤 바람도 불지 않고 날도 포근하니 창을 열어본 것이겠지만 아무리 따스하다 해도 이런 계절에 창문을 열어두면 애써 지펴 둔 불이 열기가 창을 통해 나가버려 저녁 때는 꽤 싸늘해질 걸. 타카야는 성큼성큼 다가가 "창문, 닫아." 하고 말해. 처음 이 쪽으로 걸어오는 타카야를 발견했을 때부터 안절부절한 기색이었던 미하시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문을 쾅 닫아. 방 안에서 제가 낸 문소리에 놀라 히익, 하는 소리도 들리고.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은데 왠지 이 녀석과는 잘 통하지 않는 느낌. 타카야는 궁시렁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그러고보면 오늘 어머니는 바느질거리 같은 걸 얻는다며 외출한 상태고, 동생 슌도 어디로 놀러나갔는지 집 안에선 보이지 않아. 아무리 병자라도 낯선 사람 혼자 집에 두다니. 대체 어떻게 된 집안인 거야. 타카야는 못마땅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이게 미하시와 대화하기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해. 어머니와 슌이 있으면 미하시는 형을 무서워하네 어쩌네 해서 자기를 밀어댈 뿐이고. 마침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어. 너는 누구인지, 어째서 이 곳에 오게 된 건지, 그 '미하시'가家 와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
"미하시, 실례할게." 자기 집을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웃기지만 일단 작은 기색에도 벌벌 떨던 미하시가 생각나 들어간다는 기별을 했어. 안에서 답이 없길래(반쯤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미하시가 보여. "...? 무슨 일이야? 뭐가 있어?" 영 상태가 안좋아보여서 묻자 온 몸을 힘껏 껴안은 두 팔에 고개를 묻은 불편한 자세인데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어. 그러곤 미하시는 눈치를 보는 것처럼 힐끗거리는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타카야와 눈이 마주치고 다시 뭔가에 놀란 것처럼 고개를 팔에 묻어.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려고 애쓰기를 반복. 타카야는 이 녀석이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했어. 눈이 마주친 순간 울고 있었는지 벌건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엉망인 얼굴.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고 생각했는데. 아베가에선 훨씬 어린 슌도 남들 앞에서 이렇게 울지 않아. 이 녀석, 사실은 계집애라던가.. 잘먹고 자란 사내애치곤 골격도 작고 잔뜩 야위었고. 어머니나 슌이 아무 말도 안한 걸로 봐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타카야는 지금 상태의 미하시와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만 방을 나가려고 했어. 마악 방문을 열려던 참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나.. 괜,찮...! 아, 무일...도." 울먹임 탓인지 중간중간 끊기는 말이었지만 확실히 '말'이었지. 타카야는 나가려던 몸을 돌려서 미하시와 조금 떨어진 방 가운데에 앉아. 이제 고개를 든 미하시는 목을 조금 움츠린 자세에서 타카야를 올려다 보고 있어. 타카야는 먼저 간단하게 말을 던져보기로 해."나, 알아?" "...우, 응. 나... 해, 줬... 처, 여기, 지ㅂ...!" 미안한데,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꽤 오래 묵었으면서 어머니와 동생이 녀석의 이름밖에 알 수 없었던 게 이해가 가. 여튼 타카야는 자기 물음 - 나 알아? - 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는 것만을 알아차렸어. 그래, 일단 긍정/부정으로 답할 수 있는 걸 물어보자. "네 이름이 미하시야?"/"..잘, 해줘!" 아까의 대답 외에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 듯 타카야와 말이 엇갈린 미하시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재빨리 제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아. 잘해줘? 뭘? ...그보다 뭐하는 거야? 두 손으로 입을 꽁꽁 싸맨 채인 미하시를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보자 미하시가 재빨리 고개를 붕붕 소리날 정도로 끄덕여. 뭐지? 이건. 한참을 고민하던 타카야는 이게 종전의 물음 - 너 이름 미하시? - 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닫고 아, 했어. 으아.. 타카야는 제 인내의 끈이 갈작갈작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 사이에 주름을 모아. 당장 이런 답답한 대화 따위 그만두고 싶지만 아직 물을 게 남았어. 이 녀석이 그 '미하시'라면 왜 이런 시골에 그런 차림으로 쓰러져있었는지 하는 의문이 남아. 이걸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깝깝해진 타카야는 일단 직구로 승부를 보자고 해. 그러니까 직구, 오른쪽으로 낮게.
"이 곳엔 무슨 일이야?" "...ㅂ 있을, 수... 문, 려었.. 추워, 배... 카ㄴ...." ??...?!?.... ..... 역시 긍정/부정으로 답할 수 없는 물음은 무리였나... 타카야는 저 말 중 하나도 제대로 건지지 못했어. 더군다나 미하시는 이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끄트머리에 가선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가고, 그나마 침착해졌던 표정을 다시 울상으로 하고 고개를 푹 숙여. 이래서 안되겠다. 일단 저 녀석의 신분을 알아내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기가 알아서 조사하는 게 더 빠를 거 같애."글은 쓸 줄 알아?" 서랍을 뒤져 간단한 지필묵을 꺼낸 타카야가 묻자 미하시는 다시 고개를 들어 희미하게 끄덕였어.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써줄래?" 신분을 명확히 아는 수단은 선조를 아는 것. 집안에서의 위치도 짐작할 수 있지. 타카야의 물음에 미하시는 조금 망설이는 듯 하다가 붓을 들어 종이에 획을 그었어.
처음 타카야가 놀랬던 건 미하시의 더듬거리는 말투나 불안해뵈는 인상과 다르게 글씨가 굉장히 반듯하다는 거였어. 획의 강약이며 점의 위치 하나하나까지가 마치 방안지에라도 적고 있는 듯한 완벽함. 지금은 자세도 웅크린데다 긴장한 탓인지 손목이 조금 흔들리고 있지만. 당시 타카야는 미처 몰랐지만 이건 태어나 걷기도 전부터 시서예악을 익히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교양이야. 실제로 미하시는 이 글씨를 천 번, 만 번도 넘게 써봤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필치를 거의 넋을 놓고 보고 있던 타카야는 글이 다 완성되자 간신히 입을 열었어. "이건... 너의?" 타카야의 반응이 무슨 일인가 싶어 뜨끔한 미하시가 쓰던 붓을 두 손으로 쥐고 제 눈치를 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타카야는 미하시가 쓴 글씨를 다시 한 번 읽어 봐. '미하시 나오에, 미하시 레이이치.' 三橋 ?江, 三橋 玲一. 다시 한번 읽어봐도 똑같아.사실 타카야는 미하시의 신분을 대충 짐작해보긴 했어. 명문이란 으레 행적이 잘 알려져 있고 더군다나 미하시는 유독 손이 귀한 집안이야. 남자아이에 대략적인 연배까지 알고 있으면 자세한 건 몰라도 대충 누군지 짐작할 수 있어. 지금 미하시 가에 적을 둔 또래의 아이는 3명. 현 가주의 장녀와 데릴사위에게서 둔 장손 한 명에, 시집 갔던 차녀가 남편과 사별하자 본가로 데리고 들어온 아들 하나. 그리고 먼 분가 쪽이지만 가주가 아낀다는 손녀가 하나 있어. 타카야는 미하시가 잘해 봐야 차녀의 아들 쯤이 아닐까 생각했어. 그도 아니라면 아예 세간에 알려지지조차 않은 분가 쪽의 사생아든가. 그러나 미하시가 종이에 적은 이름은 장녀와 그 데릴사위 남편의 이름이야.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건 그 대단한 미하시 가의 후계자 장손인 셈이야. 장녀 부부는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직계적통으로는 유일무이하다고 봐야겠지. 그런 후계자가 이런 곳에서 최소한의 삶의 보장도 받지 못한 채로 버려져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야. 타카야는 그러리라는 짐작도 해보지 못했어. 하나 뿐인 후계자가 없어졌다면 가문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이제껏 그 비스무리한 소문 하나 들은 적 없는 건 물론이야.타카야는 얼마 전 들은 장손에 대한 풍문을 떠올려. 활달하고, 어리지만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에 상당한 무예가. 눈 앞에 있는 녀석과는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그렇다면 사칭인가? 그렇다면 고관대작에게나 가서 할 일이지, 타카야 자신이 봐도 지금 이 집안에서 미하시를 사칭해봤자 얻는 건 좀 나은 인사치레 정도 밖엔 없어보여. 그야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도망치듯 나왔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사칭이라고 하기엔 여기에 적은 필체나 글자가 너무 정확해. 타카야의 경우는 조금 특출난 경우지만 일반적으로 서민들은 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의 이름 자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밑의 식솔들의 이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타카야는 종이를 쥔 채로 생각에 빠져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