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호선재] 기억 잃은 광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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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잃은 광호 보고 싶당
그날도 범인 쫓다가 제일 먼저 뛰어들어간 광호가 머리 맞고 다친 거. 어찌어찌해서 범인도 잡고 사건도 마무리 지었는데 병원에 실어보낸 광호가 한나절 정도 뒤에 깨어남. 충격에 비해 외상도 그리 크지 않고 검사 결과도 이상없어서 환자 깨어나면 집에 가도 된대서 별 걱정 안했는데 광호 깨어나니까 눈치가 좀 이상함. 평소 같으면 연숙이 이름 부르면서 벌떡 일어나거나 같이 있던 누구 안다쳤냐 범인은 잡았냐 물어봤을 텐데 어쩐지 멍함.
옆에서 광호 깨길 기다리던 선재는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걱정스럽게 야 박광호 괜찮냐? 정신 들어? 일케 물어보는데 광호가 그런 선재 가만히 보더니 너 누구냐고 하는거. 선재는 얘가 뭔 소릴 하나 싶어서 장난치지 말고 나 김선재잖아 했는데 광호는 김선재? 하면서 고개를 갸웃함.
그제서야 뭐가 잘못 됐다고 생각한 선재가 의사랑 반장님 부르고 의사는 광호 후두부에 가해진 충격으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진단해줌. 그날 밤은 병원에서 하루 경과 지켜본다고 놔뒀는데 하루 지나도 기억상실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나 징후 없어서 일단은 걍 퇴원함
다음 날 아침 선재가 퇴원해서 병원 앞에 멀뚱하니 서 있는 광호 태우고 화양서로 옴. 아무도 없는 광호 집에 둬봤자 누가 돌봐주는 것도 아니고 또 의사가 익숙한 장소 익숙한 일 이런데 많이 노출되면 기억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데리고 온건데 광호 사정 들은 화양1팀이 자기 소개하고 광호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음 전 팀장이 광호랑 선재만 불러서 따로 이야기함.
화양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88년생 박광호에 대한 정보 말고 진짜 광호 58년생 박광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려고 부른 건데 광호는 지금 기억이 불안정한 상태라 사실을 말해도 될까 선재랑 성식은 처음엔 좀 고민함. 근데 성식이 자꾸 자기한테 존댓말 하니까 광호가 왜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자꾸 존댓말 하시죠..? 해서. 거기다가 광호 과거 이야기는 58박광호의 핵심적인 정보라서 이거 안말해주면 광호 기억 찾는데도 지장 올 거 같아서 걍 말하기로 함.
자기가 사실은 30년 전 과거에서 왔고 과거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있다는 성식의 말에 광호는 좀 의아해하긴 했지만 어쨌든 받아들이긴 하는 눈치였음. 그 모습이 기억을 잃기 전 연숙씨 죽고 연호 행방불명 되었다는 소식 들었을 때 난리치고 충격받던 광호의 모습과 완전 달라서 성식은 좀 서운하기도 하고 그런 괴로운 상처를 아예 잊어버린 거니까 좀 잘된 건가 싶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음.
여튼 광호가 다쳤다고 해도 사건은 계속 터지고 잡아야 할 범인은 계속 생기니까 광호는 평소처럼 선재가 데리고 다니기로 하고 대신 너무 위험한 곳은 안데려가는 걸로 합의를 봤는데 같이 탐문 수사할 때 광호는 선재가 하는 거 멀뚱하니 보다가 가끔 날카로운 질문 던져서 선재는 그래도 광호가 기억을 잃긴 했지만 하던 가락을 몸이 기억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뜬금없는 이상한 질문 던져서 아 얘가 기억을 잃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음.
광호가 가는 곳마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고 뭐 건드리고 해서 선재가 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데 거기다 광호가 나 지금 신기한거 완전 많다고 나 기억 잃기 전엔 이런 거 다 알았냐고 물어봄. 선재는 아니라고 너 30년 전에서 와서 모르는 거 진짜 많았다고 말함. 네비게이션 소리에 막 소리지르기도 하고.
그 말 하면서 피식 웃는 선재 보고 광호가 나 진짜 과거에서 온 거 맞냐고 그게 말이 되나? 물어봄. 선재는 시간도 남았겠다 광호가 건너왔던 터널까지 데려다주면서 너 여기서 나온거라고 우리도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넌 30년전 과거에서 왔고 거기를 엄청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말해줌. 그 말을 듣고 광호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서 선재는 걍 놔두고 운전해서 광호 집에다 데려다 줌.
그렇게 자잘한 사건 해결하면서 계속 정호영 사건 쫓는데 단서는 없지 광호 기억은 잃었지 여러가지로 수사가 진행이 잘 안되서 선재가 초조해하니까 옆에 있던 광호가 선재보고 괜찮냐고 좀 진정하라고 말함. 선재는 한숨 팍 쉬면서 또 놓치면 안되는데 너 과거로 돌아가서 연숙씨랑 니딸 연호 만나야지 했는데 광호 반응이 어쩐지 좀.. 미묘해서 선재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광호는 걍 아니라고 얼른 범인 잡아야지 하고 맘. 그래 니가 얼마나 가족 끔찍하게 생각했는데. 피해자들도 잘 챙겼고. 옛날 광호 떠올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선재 보는 광호 표정이 또 미묘해졌지만 선재는 그땐 걍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음.
이 후에 대치 상황 길어지고 단서 계속 못찾고 추적될 듯 하다 안되는 날이 길어지니까 화양서 사람들 다 지침. 하루종일 핸드폰 울리는데 신경 곤두세우고 자료 뒤적거리고 했던 선재가 너무 피곤하고 골 땡겨서 관자놀이 주무르는 거 본 광호가 너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좀 쉬라고 아님 같이 가겠냐고 함. 선재는 이 때 좀 충격을 받음.
평소 기억 잃기 전 광호라면 사건 해결도 안됐는데 뭔 퇴근이야 범인 잡을 때까지 당연히 야근이지! 했을 꺼고 정호영 사건이라면 진짜 자기가 제일 몸 안사리고 건강 안챙기고 뛰어들었을 텐데 지금 광호는 안그러니까 결국 지금 광호는 자기랑 같이 사건 해결하고 싶어하고 범인 못잡으면 미안해하고 열정적으로 일했던 광호랑 다르다는 게 느껴져서. 왜 이렇게 힘든 시기에 제일 믿을만한 동료이자 친구인 광호가 없는 건데 싶어서 좀 화가 났던 선재가 너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원래 박광호라면 그렇게 안했을 꺼라고 누구보다도 사건 해결하려고 애쓰고 뛰어다녔을 꺼라고 자기 가족들 위해서 그랬을 꺼라고 한숨과 짜증 섞어서 말함.
그런 선재를 광호가 가만히 보더니 근데 내 가족 다 죽고 행방불명 되었는데 이 사건 해결한다고 뭐가 달라지긴 하는거 맞냐고 말함. 확실한 거 맞냐고. 물론 나도 사건 해결하고 싶고 이런 나쁜 놈 잡아서 콩밥 먹이고 싶은 건 맞는데 난 기억이 없어져서 그런가 아직도 확신을 못하겠다고 함. 거기다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던 선재는 광호의 다음 말에 입을 다뭄. 넌 내가 과거 가는 거 싫잖아./ 뭐..? 예상 외의 광호 말에 놀란 선재가 벙찌자 광호가 다시 말함. 너 나 좋아하잖아. 나 과거로 가면 넌 어떡할껀데.
물론 선재가 기억 잃기 전 광호를 좋아했던 건 맞음. 자기 사정을 제일 먼저 알고 도와주겠다 했던 것도 광호고 선재한테 이것저것 챙겨주고 폭발 사건 때 선재 대신 뛰어들어 다쳤던 것도 광호니까. 선재가 자기 감정을 깨달았을 땐 이미 선재 마음 속에 광호가 깊이 들어오고 난 다음이었음. 하지만 광호는 자기 상황이 급박해 그런 선재 마음을 깨닫지 못했고 선재 또한 과거에 돌아갈 자리도 아내도 자식도 있는 광호에게 그런 짐을 더 주고 싶지 않아서 고백할 생각은 없었음. 그냥 힘들 때 누구보다도 날 챙겨주던 그런 사람이 있었지.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하지만 기억을 잃은 광호는 아내나 딸보다 선재에 대해 생각하고 관찰할 시간이 많았고 기억 잃기 전 광호 이야기하는 선재 표정이나 말투 등등으로 선재 마음을 알게 된 거임. 그러면서 광호는 말함. 내가 기억을 잃어서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얼굴도 제대로 기억 안나는 아내나 딸보단 니가 더 신경 쓰인다고. 난 니가 힘들면 기분 나쁘고 니가 나 보면 기분 좋고 그렇다고. 과거 얘기 들어보니까 나 거기로 돌아가면 너 못만날 껀데 난 안괜찮을 거 같다고. 너는 어떻냐고. 너는 진짜 그래도 괜찮은 거냐고 물어봄.
익숙하게 이마를 찌푸린 얼굴로 물어오는 광호를 보면서 선재는 머리가 어찔하다고 느낌. 선재가 보기에 이건 진짜.. 말도 안되는 상황임. 이건 박광호가 아님. 이미 죽은 아내도 딸도 광호가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던 거였음. 당장 박광호가 원래의 기억을 되찾으면 이런 말을 아니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자체가 부끄럽고 화난다고 생각할 거임.
하지만.. 선재는 입술을 깨물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광호가 선재에게 한 말은 항상 선재가 바라던 것이었음. 너무 비겁하고 불경해서 차마 생각조차 못한 것이지만. 사실은 꿈에서라도 광호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곁에 남을 거라고 말해주길 바랬었음. 광호 말대로 광호가 과거로 돌아가면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할 거고 다시 만난다고 해도 지금의 기억이나 관계는 모두 잊혀질거임.
물론 광호가 범인을 잡으면 선재의 인생도 지금까지와 다른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겠지만 선재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음. 그저 지금자기가 가지고 있는 광호의 기억, 광호와 보냈던 날들이 하나라도 잊혀지지 않길 바랬음. 그만큼 광호가 좋았음. 하지만. 선재가 이렇게 생각했던 건 광호가 만일의 경우에도 자기 가족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임. 어떤 일이 있어도 광호는 과거로 돌아갈꺼고 자기 옆자리 대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곁을 선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 끔찍하고 간절한 바램을 어떻게든 접어넣을 수 있었음.
근데 지금은 아님. 지금 광호는 아님. 지금 광호는 아내와 딸에 대한 기억을 잃었고 자기 잃어버린 가족보다 선재 자신이 더 신경쓰인다고 말하고 있었음. 그동안 그렇게 바라고, 바라왔던 끔찍한 꿈같은 현실 앞에서 선재는 지독한 현기증을 느낌.
그러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선재는 바닥에 반쯤 쓰러진 채로 광호에게 안겨있었음. 김선재! 선재야! 자길 지탱해주는 팔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광호 넌데. 자길 바라보는 광호 눈빛에 기억을 잃기 전과는 다른 뜨거운 감정이 섞여있다는 걸 안 순간 선재는 눈물이 날 것 같았음.
그날 광호와 선재의 대화는 곧 이어 다른 팀원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더 이어지지 못했음. 다음날 선재는 드물게 연차를 냄. 화양서 사람들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며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광호는 입을 다물었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겠지. 그렇게 몰아붙이는 게 아닌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이쪽을 올려다보던 선재의 얼굴을 떠올리면 죄책감이 울컥 가슴을 치고 올라왔음.
선재가 그동안 저한테 보여준 표정과 행동들로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둘의 관계는 그 뿐이었을 거임. 정말 뭐가 있었다면 선재나 성식이 이야기했을 테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기억을 잃기 전 광호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선재가 보여준 표정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음. 기억을 잃고 난 광호가 단번에 느꼈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둘이 더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한 건 성식이 지난 번에 말한 광호의 과거 때문일 거임. 그걸 그렇게 휘젓는게 아닌데. 간신히 옷깃을 잡고 밀어내려던 차가운 손. 광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음. 김선재 이대로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면 마음이 좀 나아질 텐데.
광호의 걱정과는 다르게 선재는 그 다음날 멀쩡..하다고 하긴 좀 힘든 얼굴이지만 출근함. 하루 사이에 얼굴이 눈에 띄게 까칠해진 선재를 두고 팀원들이 김경위 무슨 병 얻은 거 아니냐고 쑥덕거렸지만 선재는 그에 대해선 별 말을 하지 않았음. 입을 다문 선재를 두고 전 팀장도 더이상 캐묻지 않았고. 선재는 광호를 완전히 무시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음.
광호는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 선재에게 말 걸기 껄끄러웠지만 그렇다고 관심까지 끊을 순 없었음. 선재가 가는 곳마다 집요하게 시선을 쫓는 광호를 보고 화양서 사람들의 쑥덕거림은 더 커졌지만 광호는 그런 걸 눈치채지도 못함. 얼굴이 안좋은데 아팠던 건 아닌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얼굴을 제대로 맞대거나 말을 나눌 수 있다면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뒷모습이나 옆모습만 봐선 선재의 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음. 기억을 잃기 전 박광호라면 가능했을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둘이 수사를 위해 선재 차에 같이 탔을 때 선재가 먼저 입을 열었음. 그만해. 광호는 처음에 선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서 반문했음. 뭐? 선재는 다시 말했음. 그렇게 쳐다보는 거 그만하라고.
광호의 시선이 요 며칠 간 선재를 따라다닌 걸 선재도 알고 있었음. 선재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걸 모를 순 없었을 거임. 선재의 말에 잠시 끙..하고 뜸을 들인 광호는 시선을 돌리는 대신 저를 쳐다보고 있는 선재를 마주봤음. 그날 밤과 똑같은 눈빛으로. 하여간 남의 말 안듣는 건 기억을 잃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선재는 깊이 한숨을 쉬었음.
너야말로 대답해. 무슨 대답? 묻기도 전에 선재는 광호가 그날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음. 대답은 무슨 대답이야. 선재가 생각하기에 이건 대답을 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님. 지금 광호는 기억을 잃은 상태고, 그래서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자기 가족이랑 의무를 잊었기 때문에 선재한테 이렇게 굴고 있는 거임. 다시 기억을 되찾으면 지금 일을 후회하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겠지. 지금 너는 박광호 아니라고, 너한테 대답할 문제 아니라고 차갑게 잘라내는 선재에게 광호는 더 몇마디 붙여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차에서 쫓겨남.
내가 뭘 모른다니. 광호는 무섭게 쏘아붙이던 선재 앞에서 차마 못했던 말을 입 속에서 굴림. 기억을 잃고 나서 선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광호에게 느껴지던 감정이 있었음. 처음엔 머리 다친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선재를 보면서 광호는 어떤 확신을 하게 됨. 지금 광호가 느끼는 감정은 기억을 잃기 전 광호가 선재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고 이건 선재가 광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어쩌면 광호도 가족과 과거 때문에 숨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뭘 모르는게 대체 누군데. 광호는 불퉁한 얼굴로 길가에 돌맹이를 발로 걷어참.
사람 일이라는 게 얄궂어서 둘이 감정다툼하고 얼굴 보기 좀 불편해졌다고 해서 사건이 안 나는 것도 아니고 둘이 파트너를 바꿔서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님. 남에게 이야기할만한 일도 아니어서 파트너 바꿔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대신 선재는 자기의 이런 불만과 불편함을 입을 다무는 걸로 표현했음.
하루종일 같은 차를 타고 둘이 다녀도 선재는 꼭 필요한 말 - 팀장님한테 전화해, 민하한테 연락해 기타 등등 - 을 제하고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음.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광호가 몇 마디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대꾸도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고. 참다못한 광호가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말 한마디를, 그 말을 듣자 선재는 달리던 차를 급하게 세우고 광호를 쳐다봤음.
뭐, 왜 뭐야. 대단하다고 말하면 안돼? 어리둥절해서 묻는 광호를 무시하고 선재는 달려들듯 외쳤음. 기억 돌아왔어? / 뭐? / 기억 돌아왔냐고! / 뭔 소리야? / 그거 너 전에 나한테 했던 말이잖아.. 거친 숨처럼 말을 쏟아내던 선재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을 때 광호는 선재의 눈에서 한순간 피어났던 애정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봤음. 그래 그렇게 쉽게 돌아올리가 없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리는 선재의 옆얼굴을 보면서 광호는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게 질투를 느꼈음. 대체 그 때랑 지금의 내가 뭐가 다르길래. 왜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되는데.
그날 광호 선재는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음. 집주인이 평소보다 집에 일찍 들어왔는데 온 집안을 뒤진 흔적이 있고 귀중품들이 없어져서 신고한거였음.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 현장이랑 가까웠던 광호랑 선재가 제일 먼저 도착했는데 집주인이랑 이야기하고 어질러진 장소 살펴보던 중에 집 위층에서 인기척이 들림. 집주인 내보내고 둘이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광호가 저도 모르게 자기가 앞장 선다고 선재 팔뚝 잡음. 선재는 광호 행동에 움찔해서 얼굴 들여다보더니 얼굴 찌푸리면서 그 팔을 확 뿌리침. 뭐야? 어이없어하는 광호 두고 방에 뛰어든 선재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범인을 검거했음.
애초에 좀도둑이었고 집주인이 예상한 시각보다 일찍 도착하자 도망가지도 달려들지도 못하고 방안에 갇혀있던 놈이었으니까 그렇게 어려운 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절차가 있어서 뒤늦게 팀원들 도착하고 사건 청취하고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림.
현장 검거된데다 범인 가방엔 도둑맞은 물건들이 다 있어서 취조 자체는 싱겁게 끝났는데 취조실에서 형사들 우루루 나갈 때 같이 나가려고 했던 선재를 광호가 붙잡음. 뭔데. 까칠하게 대꾸하는 선재에게 광호는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아까 그거 뭐냐고 따짐. 선재는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더니 박광호 넌 지금 형사로써 온전한 상태 아니라고 그런 놈을 범인 잡으러 맨 앞에 보낼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함.
그러곤 할말 끝났다는 듯 돌아서는 선재를 광호는 다시 잡음. 그 얘기가 아니잖아. 광호 생각으론 자기 상태가 어쨌든 간단하게 팔 잡거나 앞장서거나 하는 건 동료끼리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재 반응이 이러니까 좀 짜증이 났던 거. 선재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 돌리자 광호는 냉큼 말함. 나 기억 잃기 전에도 이랬었냐? 너 뒤로 보내고 앞장 서고. 맞냐? 그 말에 고개 돌린 채로 입술 무는 선재를 보고 광호는 대답을 확신했음.
그래서 이러는 거구만. 나 기억 잃어서. 내가기억도 못하는 주제에 자꾸 박광호 같은 행동 해서. 선재는 지금 광호의 행동을 싫어하는 게 아님. 아니 오히려. 광호는 선재 팔뚝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줌. 야 김선재. 선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음. 걱정해도 안되고 쳐다봐도 안되고 너 잡아도 안되고. 난 뭐 할 수 있냐? 그 말에 선재는 흠칫 어깨를 긴장시켰지만 이쪽을 보진 않았음.
광호는 선재 가까이로 성큼 걸어왔음. 김선재. 그리곤 쥐고 있던 팔뚝을 잡아당겨 조금 더 가까이. 숨이 닿을 것 같은 거리까지 다가와서 눈 앞의 선재를 내려다보며 광호는 물었음. 키스는 해도 되냐? 그제야 선재는 놀란 눈으로 광호를 올려다보았음. 아. 울 것 같은 표정. 광호는 선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맞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걸 광호는 제 입술 끝으로 느꼈음. 아주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고 감았던 눈을 뜬 광호는 선재의 열에 달뜬 눈빛을 마주했음. 자기 표정도 저렇겠지 생각한 순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입을 맞췄음. 이번에는 더 깊게. 더 오랫동안.
서에 들어오자마자 좋은 아침입니다 크게 인사한 광호는 슬쩍 선재 쪽을 쳐다봤음. 선재는 큼, 헛기침을 하며 모른 척 했고 광호는 실실 웃으면서 자기 자리에 앉았음.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잡자 선재는 뭐라 투덜거렸고 광호는 그 손을 꼭 잡아서 책상 아래로 끌고 들어가 깍지를 꼈음. 선재의 길쭉한 손가락 끝이 손등에 닿았음. 왜 먼저 갔어? 옆 자리에만 들리게 소근거리자 선재는 티나잖아, 하고 입 모양을 만들었음. 티나면 어때. 파트넌데.
투덜거리는 양으로 입을 쭉 내밀자 선재는 뭐가 또 재밌는지 피식 웃었음. 손 잡은 채로 옆자리로 의자를 굴려 닿은 어깨를 기댄 광호는 오늘은 어디 외근 나갈 데 없냐고 물어봤고 선재는 장소 몇군데를 이야기했음. 멀었으면 좋겠네. 아주 오~래 걸리게. 말하자 선재는 다시 피식 웃었고 앞자리의 태희민하는 저것들 또 왜저러냐며 질색을 했음.
선재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선재의 뺨에 광호의 손가락이 닿았음. 뭐하는 거야. 고개를 뒤로 빼자 광호는 눈을 접으며 웃었음. 선재야, 김선재~ 그 얼굴이 좋아서. 선재는 또 다시 부르는 목소리에 못이기는 척 다시 뺨을 갖다댔음.
이따금 광호는 주머니나 외투 앞섶이 불룩한 채로 선재 차에 탔음. 그리고 선재가 운전에 열중할 때쯤엔 부스럭거리는 소릴 내면서 뭔가를 꺼내고 선재를 불러서 입에다 넣어줬음. 그건 땅콩초코볼이나 사탕, 젤리같은 자잘한 군것질거리였는데 선재가 그걸 입안에 넣고 씹으면 광호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음. 난 너 뭐 먹고 있는거 좋더라.
단걸 좋아하지도 군것질을 즐기지도 않지만. 선재는 광호가 부르면 가만히 입을 벌렸음. 설탕으로 달콤하게 젖은 손가락 끝이 입술에 닿았다가 아쉬운 듯 떨어지면 선재는 차를 세웠고 광호는 선재 입술에 묻은 설탕 부스러기를 핥았음.
오랜 만의 주말, 선재는 집 정리를 하다가 자기 것이 아닌 양말을 발견했음. 박광호 꺼구나. 선재는 칫솔도 발견했음. 이것도 박광호 꺼네. 그리곤 차례로 자기 것이 아닌 티셔츠, 볼펜, 영수증 쪼가리, 심지어 속옷까지 발견했음. 선재는 그걸 사진을 찍어서 메세지를 보냈음. 박광호 니 물건 찾으러 와. 그럼 광호는 곧바로 물건을 찾으러 와서 또 다른 물건을 두고 돌아갔음. 그리고 또 그 물건들을 찾으러 오고, 다른 물건을 또 두고 가고..
광호네 집에도 선재의 물건이 많았는데 광호는 그걸 돌려주거나 찾으러 오라고 연락하지 않고 아침에 출근할 때 보거나 밤에 잠들 때 보면서 잠들었음. 선재의 물건에서는 오랫동안 선재 냄새가 났음.
광호는 신중하게 자판을 눌렀음. 광호의 손가락에 비해 약간 작은 자판은 조금만 미끄러져도 오타를 만들어냈음. 밥 먹 었 냐? 최근에 배운 띄어쓰기와 특수문자까지 완벽하게 타이핑된 문자가 선재의 휴대폰으로 전송되자 광호는 만족스러웠음. 아니 아직. 몇 분 지나지 않아 선재에게서 답장이 도착하자 광호는 답장의 답장을 치려다가-나 지ㅡㄱㅁ 가ㄴ다-핸드폰을 접어두고 집에서 뛰쳐나왔음. 가만히 자판을 누르는 시간도 아까웠으니까. 그래서 광호 선재의 메세지함에는 밥 먹었냐 / 아직 / 자냐? / 아직 / 지금 뭐해? / 서류 봐 따위의 이상한 문답만 가득 쌓였음.
어느 따뜻한 봄날,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깜빡이던 광호는 저쪽에서 익숙한 것을 봤음. 그건 요즈음에는 시장통이나 축제 등에서나 볼 수 있는, 옥수수나 쌀 따위를 튀겨서 뻥튀기로 만들어주는 기계였는데 광호는 지금 저걸 사가서 현장에 가는 내내 운전하는 선재한테 몇 개씩 넣어주면 참 재미좋겠다는 생각을 했음. 차 좀 세워. 저거 사가자. 어린애처럼 웃으며 뻥튀기 장수를 가리키는 광호를 보고 선재는 순순히 차를 세웠고 주머니에 천원짜리 몇장을 만지작거리며 차에서 내린 광호는 선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음. 여기서 기다려. 금방 사올게.
몇 천원인가를 장수에게 건넨 광호는 오늘 날씨 참 좋다는 생각을 했음. 해도 쨍쨍하니 맑고 중국에서 건너온다는 무슨 먼지도 없는 화창한 날. 이런 날 돌아다니면서 과자 까먹으면 좋겠다.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선재 생각에 싱글거리던 광호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음. 뭔가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 그래. 이 소리. 둘이서 걷던 골목길에서 항상 나던 거. 뻥튀기 튀기는 익숙한 소리지만 연숙이는 항상 깜짝 놀라면서 팔짱낀 팔을 꼭 잡았지. 그게 좋아서 둘이 있을 땐 항상 뻥튀기 장수 있는 먼 길로 돌아가곤 했는데. 광호는 눈을 꿈뻑였음. 내 아내. 내 아내 연숙이. 나한텐 아내가 있었는데. 어떻게 여태껏 그걸 잊고 있었지?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던 광호가 저쪽에서 천천히 걸어오자 선재는 의아했음. 뻥튀기를 사러간다고 나갔는데 돌아온 광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음. 차 세운 위치도 옮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두리번거리는 광호에게 손짓하며 선재는 말을 건넸음. 뭐야 뻥튀기 사러 간다며. 다 떨어졌대? 없으면 뭐 다른거나 사면 되지, 덧붙일 생각이었던 선재의 말은 어쩐지 낯선 광호의 목소리에 끊겼음. 야 김선재. 여기 어디냐? 나 왜 여기 있는 거냐?
광호 선재가 서에 돌아오자 성식은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광호에게 달려들었음. 선배님!! 괜찮냐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냐고 보채는 후배를 대충 다독이면서 광호는 실없이 웃었음. 막 기억을 찾아 혼란스러웠던 광호는 오는 길에 선재한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음. 범인한테 맞아서 기억을 잃었던 일, 기억 찾을 때까지 계속 일하고 돌아다닌 일.. 이러저러한 사건을 해결했고 처리는 이랬다, 선재의 설명은 계속 이런 식이었고 가끔씩 그때 네가, 우리가, 비번일 때, 등등을 이야기하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음.
평소라면 말을 하다마냐며 뭐라고 했겠지만 원래 기억이 돌아오자 거짓말같이 증발해버린 그 사이의 기억을 더듬어보느라 정신이 팔린 광호는 눈치채지 못했음. 그렇게 광호와 성식이 회포를 푸는 걸 보던 선재는 다시 사건 조사하러 가겠다며 회의실을 나감. 평소보다 쎄한 선재 모습에 광호는 쟨 또 왜저러냐 내가 기억잃은 동안 뭐 잘못한 거 있냐며 물어봤고 성식은 모르겠다고, 아닌데 선배님이랑 선재 요 근래 엄청 친하게 붙어다녔어요 말함.
그날 집으로 돌아간 광호는 자기 집에서 자기 물건이 아닌 남의 물건들을 발견함. 낯선 메이커의 화장품, 깔끔한 타이, 시계 등을. 늘 봐왔던 88박광호의 물건도 아니고 자기한테 어울릴만한 물건도 아님. 심지어 시계는 체인이 하나 적어서 광호 손목엔 작았음. 이건 누구꺼지? 광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모든 물건들을 88박광호의 물건이 담긴 상자에 몽땅 쓸어넣고 한쪽에 치워둠.
다음날 광호 기억 되찾은 사실 알게된 1팀도 광호를 아는 척 해줌. 그때가 좋았는데. 막내야~ 불러도 대답하고. 민하가 낄낄거리자 태희는 진저리를 치면서 뭘 그때가 좋아 그때 아주 그냥 눈을 뜨기가 싫었어 하도 눈꼴셔서. 광호가 뭔 소리하냐고 하자 태희는 고개를 흔들며 광호와 선재를 가리킴. 기억 잃고 베프된거야 뭐야. 맨날 둘이 붙어가지고 히히덕거리고. 이제 기억 찾았으니 조만간 날짜 잡겠네 잡겠어.
그러고 있을 때 선재 출근하는데 전 팀장한테만 목례하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감. 신나게 대화에 열중하던 태희민하는 왜 또 저래? 기억 돌아오면 다시 남남되는 거야? 니네 대체 뭐야? 너스레를 떠는 와중에 광호는 진짜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뭔 일이 있었던거지? 생각함.
이상한 건 또 있었음. 퇴근길에 잠깐 들린 편의점 알바생이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한거. 뻘쭘해진 광호가 대충 음료수 한개를 고르자 오늘은 땅콩초코볼 안사가세요? 하도 사가시길래 주문 넣었는데 하고 말함. 음식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군것질할 정도는 아닌데. 생각하던 광호가 음료수만을 계산하자 알바생은 좀 실망한 눈치였음.
또 다른 거. 김선재와의 이상한 문자 내용. 자냐/ 안자 / 밥 먹었냐? / 아직 / 집이야? / 가는 중 / 이상한 내기라도 한건가? 선재가 가끔 보낸 사진들은 익숙했음. 이거.. 내 티셔츠 아닌가? 안그래도 자주 입던 건데 어딜 갔는지 상자를 다 뒤져도 없던데. 광호는 끙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엎어짐. 대체 기억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음날 출동을 위해 선재 차에 탄 광호는 문자 내역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음. 기억을 잃기 전 선재는 이 정도로 쌀쌀맞게 굴진 않았던 거 같은데 기억을 되찾고 난 광호에게 선재의 태도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음. 지금도 사건에 대해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입을 다무는 선재의 시선은 단 한번도 광호쪽으로 향하지 않았음.
내 티셔츠 혹시 니네 집에 있냐? 광호가 물어보자 선재는 잠깐 멈칫하다 핸들을 꾹 잡았음. 내일 서로 가져올게. / 어 그래. 근데 그게 왜 거기있냐? / ...... 선재는 대답하지 않았음. 왜 여기서 또 입을 다물어. 답답해진 광호는 등받이 조절 손잡이를 움켜쥐다가 그 옆에 떨어진 과자 조각을 발견함. 이건 뭐야? 누가 여기서 과자 먹다가 흘렸나? 그 말을 듣고 선재는 차를 급하게 끽 세웠음. 뭐야? 다온거 아니잖아. / 내려. / 뭔 소리야 현장 가야지.. / 이번엔 나 혼자 갈테니까 내리라고.
한소절 한소절 말을 잇는 선재의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났음. 어이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광호는 영문을 모르니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었음. 어어? 어? 하는 사이에 과자 조각 들고 차에서 쫓겨난 광호는 자기가 내리자 마자 바로 출발해버리는 선재 차의 뒷모습을 보고 대체 뭔가 싶었음. 내가 기억 없는 동안 뭘 많이 잘못했냐? 그래도 이러면 안되는 거지 나 여기서 내려서 뭐하라고! 소리쳐도 선재도 차도 돌아오지 않았음. 으으. 광호는 머리를 싸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