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체 주의
잔인한 표현, 식인 소재 주의
일단 세계관은 베페 세계관에 마물의 한 종류로 요괴를 끼얹은 설정으로.
일단 이 세계에는 마물의 한 종류인 요괴가 있어. 걔들은 마물과는 다르게 지능.. 같은 게 있달까 어튼 그래. 개중에는 변신능력 가진 애도 있어서 작정하면 인간과 외견상 별 차이도 없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예쁜 애들도 많고.. 얘들 주식은 인간. 마을에야 결계가 있지만 결계 밖으로 나가면 금세 잡혀서 아드득카드득☆ 물론 결계 밖에는 요괴 외에 다른 마물들도 많습니다...이 요괴들 사이에는 전설 비슷하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까말 요괴 입장에서 인간은 먹이니까 육질이나 맛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 인간이나 그냥저냥 먹을 수 있거든. 근데 인간 중에서는 엄청 맛없는 인간이 존재한대. 어느 정도냐하면 조금 베어물어도 목구멍이 타들어갈 거 같이 아프고 따갑고 죽을 거 같고 토할 거 같은? 그런 느낌. 그런 인간은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 근데 이 맛없는 인간이 글쎄! 요괴랑 100년 정도 같이 지내면 그렇게 맛있는 별미가 만들어진다지! oh oh oh oh 그 맛이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인간이 된대. 요괴들은 이 '일단' 맛없는 인간을 찾고 싶어해. 근데 이 맛없는 인간은 엄청 희귀해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유리는 요괴. 근데 그냥 요괴는 아니고 존나 이쁜 요괴야. 요 얼굴로 먹이도 엄청 많이 꼬셨지ㅋ 어쨌든 유리는 언제나처럼 먹이를 찾아서 마을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어. 요새들어 수도 근처엔 결계가 강해지고 길드 근처엔 방비가 강화되서 먹이 구하는 것도 영 시원찮아. 그래도 유리는 사냥 잘하니까 한번 발견한 먹이는 절대 놓지지 않지만. 그치만 요새는 워낙 사람들이 밖으로 안나오려고 해서 귀찮아.. 결계엔 들어갈 수도 없고. 인간들 식사처럼 하루 세 끼 안먹으면 죽는 건 아니지만 이제 슬슬 뭔가를 먹어야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라에 대삼림 근처에서 인간 한무리를 발견했어.
인간이 많은 마을 근처도 아니고 숲 속 한참 깊은 곳에서 헤메고 있는 게 어째 영 이상하지만 유리는 그렇게 인간의 생태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야. 평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곧잘 하는 종족이니 이번에도 그런 이유겠지.
실제로 성인남자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나름 목표하는 게 있는 듯 뭘 찾거나 가지고 온 장치를 설치하거나 하고 있어. 유리는 눈을 깜빡여. 유리가 배를 채우기엔 저렇게 많은 먹이는 필요없어. ..한 마리만. 성인남자면 덩치도 꽤 있으니 한마리만 있으면 다음번 식사 때까지 넉넉할꺼야. 인간들이 넓다란 공터에 다다랐을 때 유리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해서 집단의 주목을 끌어. "뭐냐? 여자...?" 아닌데. 유리는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면서 자기 날카로운 송곳니랑 손톱을 보여줘. "요, 요괴...!" 상황을 파악한 인간들이 허둥지둥하며 도망가는 꼴을 보며 유리는 빙긋 웃어. 자아, 도망가. 많이는 필요없으니까. 가장 빠른 걸 먹거나, 혹은 동료를 밀치고 도망가는 녀석을 고르자. 그렇게 순식간에 텅 빈 공터를 둘러보며 슬슬 달려가려고 하던 유리는 공터 한 가운데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인간 하나를 발견해.
네, 요거 레이븐. 인마전쟁 이후 심장마도기로 되살려져서 아무 의지도 없이 알렉세이의 지시대로 살고 있던 그는 방금도 임무 수행중에 있었어. 알렉세이가 배정해준 부하들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와서 자우데의 밑작업중이었지. 되살아난 이후로 별다른 감흥도 감정의 기복도 겪지 못하고 있던 레이븐은 눈 앞에 들이밀어진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았어. 그래 요괴라는 것이 있다고 했었지.. 수많은 전장을 떠돌아다녔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정도? 그렇다쳐도 인간을 잡아먹는 이런 생물이 인간의 눈에 이다지도 아름답게 생겼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처음본 순간 여자라고 착각한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거야 마치 마물같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보다 높은, 그런 곳에서 내려온 사자같지 않나.
레이븐이 자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자 유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해. 유리에게 이런 인간의 반응은 신선해. 저를 본 인간은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거나 이를 악다물고 덤벼들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쓰러져 덜덜 떨거나, 울거나.. 뭐 그런 식이었거든. 도망가지 않은 걸로 봐서 세번 째 반응과 그나마 제일 비슷하지만 유리 제가 보기에 이 인간이 무서워서 다리가 풀린 거 같진 않아보여. 눈물도 안나고, 땀도 안흘리고 덜덜 떨지도 않고. 오히려 저 표정은 뭐랄까, 음... 유리는 고개를 다시 갸웃하고 레이븐에게 천천히 다가와. 가만히 있는 사냥감을 두고 일부러 멀리까지 뛰어갈 이유는 없지 뭐. 어찌됐든 배만 채우면 되는 거니까. 유리는 의미없이 흥흥? 웃고는 인간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잡기 쉬운 손가락을 꼭 잡아 쥐어 올려. 인간은 두 손 벌려 환영하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의 의사도 없어서 유리는 그대로 손을 잡아 입속으로 넣고 콱 깨물어. 깨무는 순간 인간의 어깨가 움찔한 것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어.
입 안에 기대했던 뜨뜻하고 들척지근한 피맛이 아니라 쓴맛매운맛신맛떫은맛을 다 합친 것 같은 끔찍한 식감이 느껴지자 유리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됬다는 걸 깨달았어. 다행히 삼키는 것만은 피해서 입속에 가득 퍼진 레이븐의 피를 켁켁 뱉어낸 유리는 목을 잡고 몇번이나 헛구역질해. 이거 뭐야?! 뭐야?! 여태껏 상태가 안좋은 인간을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야. 목이 타는 거 같아. 이건 먹을 수 없어! 이녀석 혹시 이걸 알고 일부러...?!
자신에게서 널찍히 떨어져서 컥컥대는 유리를 보며 레이븐은 쓰게 웃어. "뭐야, 난 먹히지도 못하는 건가..?" 제 앞에 나타난 예쁜 청년이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는 걸 알았지만 레이븐은 살려고 애쓰는 대신 얌전히 유리에게 먹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살려고'? 그 단어는 이상해.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죽은 목숨은 제 상사의 손아귀에 붙들려있지. 죽었는데도 살아있는 그 이질감에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어. 성공한다음 다시 실패로 되돌려지는 게 실패라고 할 수 있다면ㅇㅇㅇㅇ. 몇번이고 되살아나는 그 감각은 끔찍해. 그렇게 레이븐은 포기해버렸고 별 반항도 없이 알렉세이가 주는 임무를 수행해왔어. 근데 여기서 요괴를 만났어. 이 요괴는 인간을 먹을 생각이야. 그럼 어떻게 되지? 제 아무리 알렉세이라도 요괴 뱃속에 있는 제 시체를 이어서 되살리진 못하겠지! 유리는 레이븐이 두려움이나 긴장 같은 걸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반대야. 레이븐은 기뻤어. 으아아 근데 왜 못먹어요
근처의 나뭇잎과 풀들로 몇 번이나 입을 헹구어내는 유리를 보면서 레이븐은 어이없음 + 조금 화 + 허탈감 같은 걸 느껴. 그래 요괴는 '인간'을 먹는다고 했지. 난 인간도 아니라는 건가. 되살아난 괴물. 죽을 수도 없지. 요괴한텐 미안하게 됐어. 쉽게 먹이를 먹는다고 좋아했을 텐데. 기껏해서 모여있던 인간들 중에서 골라낸 것이 이런 괴물이라니. 대충 입맛을 떨쳐내고 고개를 드는 요괴의 안광이 파랗게 빛나. 먹이를 먹지 못한 보복을 하려는 걸까. 그것도 좋을 테지.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미치지만 제 상사가 겪을 이 산골짝까지 와서 저를 되살리는 수고와 낭비를 생각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레이븐의 기대와는 다르게 요괴는 레이븐을 멀뚱하니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했어. 대충 진짜 있을지 몰랐다더니,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중얼거림. 저도 모르게 궁금한 얼굴을 했던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요괴는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해. "음.. 맛없는 인간이라는 게 있대." 그런 인간이 있다고 아는 애한테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사실 그 녀석 잔소리는 별 쓸데없는 게 많아가지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든.. 별로 기억나는 게 없긴 한데. 엄청 맛있어 진다고 하더라. 그 뭐냐.. 100년 이랬던가? 함께 그 정도 지내면 된대. 백년이라.. 요괴 사이의 전설인가? 인간으로 평생 접할 일 없는 얘기긴 하네. 레이븐이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요괴는 주섬주섬 몸을 추스리고 숲을 벗어날 준비를 해. "여튼 난 먹을 걸 100년이나 기다릴만큼 미식가는 아니니까, 살았다치고 사셔 아저씨." 왜 도망치지 않고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밥은 한끼 잘 먹으면 그만이고. 금세 등을 보이는 요괴를 보며 레이븐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프렌은 요괴 한 무리의 우두머리야. 개인주의 쩌는 요괴들이 무슨 무리고 우두머리고가 있을까 싶지만 프렌의 성격 탓인지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무리가 만들어져 있었어. 프렌은 요괴 중에도 좀 강한 축에 속하지만 프렌의 무리는 약한 요괴가 대부분이야. 실력이 약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먹고 살만큼 인간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요괴들을 거두어 돌봐주다보니 이렇게나 세력이 많아졌어. 근데 요즘 들어 문제가 생겼어. 요괴의 습격이 늘어 마을의 결계와 방비가 빡빡해지자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졌거든. 고민하던 프렌은 작은 마을을 습격하자고 생각해. 마침 좀 가까운 거리에 알맞은 곳이 있어. 거기라면 성인남자도 적고 이 무리로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 같애. 프렌은 그렇게 정하고 모두에게 말해. 무리 중에 프렌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그맇게 프렌의 무리들은 그날 밤 마을을 공격해.
겉에선 방비가 허술하고 인원이 적은 것처럼 보였던 마을은 함정이었어. 요즘 들어 습격이 많아지자 프렌의 무리를 끌어들여 한번에 소탕하려는 제국의 계획이었지. 막 먹이 하나의 목을 그어 일행 중 하나에게 던진 프렌은 마을 곳곳에 불이 오르자 놀라서 일행에게 소리질러. "함정이야, 모두들 도망쳐!" 워낙 만만하게 본 마을이라 약한 요괴들 포함한 무리의 모두를 데리고 왔어. 이렇게 단체로 올 필요는 없었지만 무리의 요괴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보호하고 먹이를 구해다주는 프렌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했거든. 그런 동족들이 기사단의 마법과 무기에 맥없이 쓰러지는 걸 보고 프렌은 이를 악물고 덤벼들어. 붙잡힌 하나를 구해내고, 창에 꿰인 시쳬를 뺏고, 화가 솟구치지만 그래도 이대로 전멸할 순 없어서 일단 남은 요괴들이라도 피하게 하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프렌은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에서 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갑주를 입은 기사와 대치해.
"각하, 피하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주변에서 인간들이 뭐라고 외치는 걸 봐서 중요한 위치인 거 같아. 이 인간만 없애면 그 혼란을 틈타 일행이 무사피 빠져나갈 수 있어. 온몸을 누구 것인지 모를 피로 뒤집어써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톱을 하고 저를 노려보는 프렌을 보고 알렉세이는 "허어.." 해. 사실, 프렌이 보기에도 저 인간은 엄청 강해보여. 근데도 물러날 순 없어.
저도 많이 지쳐있었지만 알렉세이는 프렌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 몇 번 덤벼들어 큰 상처를 입고 칼에 꿰어져 바닥에 주저앉혀진 프렌은 악에 받친 눈을 하고 알렉세이를 올려다 봐. "이 정도 소란이라면 남은 요괴들은 모두 빠져나갔겠군." 그 눈을 들여다보며 알렉세이는 짧게 혀를 차. 이 놈은 이걸 노리고 난동을 부린 거겠지. 사실 프렌이 애쓴 것에 비해 이 정도면 제국의 소탕작전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도 있어. 예상외로 피해가 크긴 했지만. 어쨌든 우두머리가 잡혔으니 저런 조무라기 요괴들은 이제 섣불리 인간을 습격하지 못할꺼야. 곧바로 찾아올 죽음을 각오하고 몸에 힘을 빼는 프렌을 기사단장은 별 감흥없다는 눈으로 훑어내린 후 부하에게 명렁해. "이 요괴를 끌어다가 철창 안에 가두도록." 사살하라는 명령이 아닌 것에 부하들이 의문을 표시했지만 알렉세이로썬 인간도 아닌 요괴가 무리를 이루고 전략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 잘 연구하면 요괴의 습성 같은 걸 알아볼 수도 있을 거고 그럼 요괴 소탕도 좀 더 손쉬워지겠지. 더 알아볼 가치는 있을 거 같아. 딱히 부하들한테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별 다른 첨언을 붙이진 않았어.
도망간 인원 대신 대충 숲에서의 임무를 끝낸 레이븐은 묵고 있는 은신처로 돌아왔어. 한 때는 요괴가 먹지 못하는 자신을 놓고 그냥 가버릴 꺼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잘 그의 뒤를 따라왔어. 아저씨의 넘치는 매력 때문이지, 암. 옷상 백 년만 지나면 엄청엄청엄청 맛있어질텐데 후회하지 않겠냐,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은 요괴의 표정은 그야말로 볼 만했지. 어이없음과 경악에, 어쩐지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도 같은 얼굴. 예쁜 여자에게 그런 표정 짓게 하면 좋았겠지만 예쁜 남자도 뭐.. 나쁠 건 없네. 여튼 그랬다는 얘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요괴는 원래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레이븐이 가는 길을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어. 그러고보니 '백 년'이 어쩌고 하던데. 사실 여기서 그런 건 별 중요한 게 아닌 거라서 레이븐은 꼬치꼬치 묻진 않았지만 실은 유리도 그렇게 자세히 아는 건 아닌 것 같아. 애초에 제 입으로도 관심없는 내용이라고 얘기했었고.
레이븐의 은신처는 당그레스트 근처 숲 초입에 있어. 초입이라고 해도 숲이 우거진데다 마물이 사는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여길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지금 맡고 있는 임무가 길드에 관련된 임무라 임시로 지은 숙소야. 사실 레이븐은 당그레스트 내의 여관 같은 데에 묵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이븐의 상관은 그런 그의 생각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 켕기는 게 많은 거겠지. 그가 자신에게 준 임무는 길드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모르는 척하고 지내면 밤에 칼침 몇 대 맞는 걸로 쉽게 끝나는데 말이야. 그 대신 식사도 준비해주겠다 시트도 갈아주겠다 이런 곳에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메리트가 아닌가 레이븐은 생각해. 물론 그의 상관은 그를 걱정한다기보단 길드까지 와서 자길 되살리는 수고와 시간을 낭비하는 걸 원치 않는 거겠지만.
눈에 띄지 않게 지어진 은신처에는 흔한 결계도 없어.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가 등잔을 켜고 오늘 임무의 결과를 정리하는 레이븐을 졸졸 따라들어온 유리는 인간의 방 안을 처음 본 듯 주변을 두리번거려. "집 처음 봐 청년?" "아니." 다만 밖에 살던 요괴에겐 벽이랑 천장이 편안하지 않은 거 같아. 부하들 도망친거 뭐라고 변명하지... ´_`레이븐이 벽에 걸린 지도를 대충 들여다보며 멍때리는 동안 집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가재도구 등을 뒤적거리던 유리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흐응, 하며 목울대를 울려. 먹을만한 것을 찾는 건가? 배고픈 요괴에겐 안된 일이지만 당연히, 여긴 보통의 가정집처럼 살려고 만든 곳이 아니라 임시로 만든 숙소니까 식료품 같은게 잔뜩 늘어져 있을 리는 없어. 게다가 레이븐이 '죽은' 이후로 식욕 같은 걸 느끼지 못했던 탓도 있고. 그에 대해 불평이라도 하려나 싶어 올려다봤지만 요괴는 눈을 가늘게 뜰 뿐 별 말을 덧붙이진 않았어.
소재가 궁했던, 그리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침묵을 견딜 수 없는 인종인 레이븐은 대충 아까 들었던 '백 년'에 대해 물어봐. "백 년?"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이 쪽을 보는 요괴의 눈이 살짝 가늘어져. "흐응..." 잠시 뭔가 생각하던 요괴는 요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맛없는 인간'과 '백 년'에 대해 알려줘. 알려준다고 할까, 유리도 잘은 몰라서 결국 설명을 요약하면 '맛없는 인간과 요괴가 백년을 같이 살면 맛있어진다' 정도였지만. "백 년이라..." 인간은 100년이나 살진 못하지만 말이야. 이 요괴는 알고 있을까? 더군다나 저번 전쟁으로 인해 인간 평균수명은 훨씬 내려갔을 터야. 레이븐은 그에 대해 슬쩍 언급하려다가 그만둬. 사실 중요한 건 맛있어지는 게 아닌 걸. 정말 중요한 건 그 다음 단계인 거야. 백 년도 못산다고 해봤자 이 요괴쨩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고.. 레이븐은 어른답게 굴자고 생각해. 그리고 100년이나 걸리지 않을지 또 누가 알겠어.
"그 밖에 해야 할 일은 없는 거야? 같이 사는 거 외에?" 음... 없...진 않을 수도. 이럴 때-요괴가 요괴의 전설에 대해 말할 때-조차 딱부러지게 조목조목 알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 소꿉친구녀석은 엄청 타박하겠지. 하긴 이럴 줄 알았음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라도 자세히 들어둘 걸 그랬어. 이렇게 맛없는 인간을 딱 발견할 줄 알았나. 유리는 나중에 자세히 아는 녀석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결론을 지어. 저번에 백년 성공한 녀석이 있다는 얘기 분명히 들었었고 말이야. 100년이나 있으니 물어볼 수 있는 기간은 충분할 거야.
그때부터 요괴와 인간의 동거가 시작돼. 인간도 요괴를 쫓지 않았고 요괴도 인간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동거라고 불러도 좋겠지. 어쨌든 그대로 요괴, 인간 이렇게 부르긴 불편했으니까 둘은 대충 통성명을 했어. 먹이와 포식자 사이의 평화로운 이름 교환이라니 어쩐지 싸구려 동화같은 이야기지. "난 유리. 유리 로웰이야." 눈을 깜빡이며 말한 요괴에게 레이븐과 슈반 중 어느 쪽을 알려줄까 잠깐 고민했던 그는 대충 전자를 골랐어. 별 이유는 없고, 이 근처가 당그레스트이기 때문에 거기서 쓰는 이름을 알려준 거지. 쓰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쪽도 이게 내 이름이다, 하고 와닿진 않아. 아직 '인간'일 적에, 그러니까 이름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 적에 가졌던 것은 빼앗겨서 이제는 없어.
동거라고는 하지만 유리는 은신처에 붙어있지 않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어. 다만 묘했던 것은 같이 있는 동안 요괴인 유리가 레이븐의 건강을 신경쓰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야. 잠을 자다가 가끔 눈을 뜨면 조용히 옆에 앉아 제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도 있고. 제가 먹기도 전에 죽어버리는게 아닌가 생각하는 걸까. 레이븐은 짧게 실소해. 아저씨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 데. 그래도 백년이나 살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지만. 뭐 중요한 건 기간이 아니니까. 그보다 레이븐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단 한 명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사람(혹은 요괴)이 자신을 먹으려고 하는 요괴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야.
며칠 함께 지내면서 유리는 자연스럽게 레이븐이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잔다는 걸 알게 됐어. 밥 때 되도 모른 척하고 잘 때 되도 딴청 피우는 레이븐을 내려다보는 어두운 색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건 어쩐지 책망처럼 보여. 단지 이쪽이 켕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유리는 레이븐에게 직접적으로 뭐라 하진 않아.
그 때부터 유리는 은신처로 쌀이나 고기 과일 같은 걸 부지런히 날라오기 시작해.여 옷상 나 왔어, 레이븐 문 좀 열어봐 이런 식의 인사에 문을 열면 어김없이 뭔가 식재료 같은 걸 든 유리가 있어. 왠 거냐고 물어도 유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야. 잠시 그대로 두면 유리는 제가 가져온 식재료로 꽤 제대로 된 인간의 음식을 만들어와. 쌀밥에, 된장국에 돼지고기 장조림 같은 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감시하는 것처럼 옆에서 빤히 쳐다보다가 레이븐이 식사를 마치면 크레페나 아이스크림같은 꽤 그럴싸한 디저트도 만들어 내놔. 이런 걸 만들 줄 아는 얼굴 잘난 남자란 뭔가의 번데기가 아닐까? 디저트를 삼키던 레이븐은 지나가는 말로 물어봐. "청년은 안먹어?" "나? 먹고 왔는데."
뭘... 말하던 레이븐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포크을 꽉 쥐어. 다치지 않게 가공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식기가 손 안에서 부들부들 떨려. 유리가 가져온 건 인간의 식재료, 인간의 음식. 어디서 가져온걸까. 유리는 눈가를 흐리며 웃어. 더없이 사랑스럽게. 등 뒤에 소름이 달려. 죽음이 두렵고 아니고 이전에 '먹이'로써, 포식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자에 앉은 채 레이븐은 뒤로 주춤 물러났어."옷상, 거기 바닥에 아이스크림 떨어지잖아." 천천히 다가온 섬세한 손가락이 포크를 꾹 쥐고 있던 손등을 가볍게 덧그려. 아무리 뭉툭하다해도 철인데, 다쳤어? 발개진 손가락을 자못 걱정스러운 듯 들여다보기도 해. 아아. 죽기 위해 죽이는 삶이라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꾹 감았다 뜬 레이븐은 실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 그러곤 밥 잘 먹었다고 말해. 유리는 조금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려.
비슷한 내용의 보고를 받은지 벌써 여섯 번째야. 부하의 말을 들으면서 알렉세이는 잠깐 멈칫했던 손을 계속 움직여 서명란에 r을 마저 써넣었어. "이번엔 어디인가?" "그게.. 오른쪽 다리라고 합니다. 의사 말로는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꺼라고..." "그래.." 급격히 심기가 나빠진 듯한 기사단장의 태도에 부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어.
요괴를 생포한 건 며칠 전이야. 그 정도 크기의 마수를 위한 크고 단단한 우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잡아온 프렌을 성 최하층 죄수들이 머무는 감옥으로 보냈어. 임시로 감옥 문에 실드 블라스티아에 쓰는 술식을 박아넣자 그럭저럭 탈출 방지용은 됐지. 그 팔다리를 쇠사슬로 구속해놓았을 뿐 더 엄격한 술식을 채워놓지 않은 건 요괴의 순수한 회복력이나 근력 같은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실제로 하루나 이틀에 한 번 기사단장은 최하층 감옥으로 내려가 부하들이 그에게 불에 달군 검이나 속성 마법 같은 걸 시험하는 걸 보고 오곤 했지. 그 놀라운 회복력은 물론이고 제 몸에 어떤 짓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비명을 참는 정신력은 경이로울 정도야.
이 모든 행위에 딱히 알렉세이 개인적인 흥미는 없어. 피와 날붙이가 섞인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기사단장은 어떡하면 저 요괴들의 약점을 찾을 수 있을까 같은 걸 생각해왔어.여기까지 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을, 사실 지금의 사태는 전적으로 기사단의 잘못이야.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렌 탓이냐 / 기사단의 탓이냐 를 따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솔직히 말한다면 알렉세이는 기사들이 프렌에게 품은 불만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감옥의 방비를 맡긴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그 자신의 형체를 잃은 악마처럼 보였던 전과는 달리 감옥에 가두기 위해 대충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요괴는 마치 '인간'같았어. 그것도 꽤 순정하고 사랑스러운. 부드러워뵈는 어린아이같은 뺨에 고개를 숙일 때면 가느다랗게 속눈썹 그림자가 물들었지. 그 일견 유약해뵈는 모습에 착각을 한 것도 있을 거야. 제 동료를 죽이고 저를 상처입힌 괴물이 연약한 모습으로 사지를 결박당해 얌전히 갇혀있는 것을 보고 잔인한 복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보초병들은 대부분 직급도 낮고 혈기가 들끓는 젊은 기사들이야. 분노에 겁도 임무도 이성도 잊은 그들은 보복을 위해 제 스스로 문을 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물론, 그 안에 든 요괴는 이성도 잃지 않은 말짱한 제정신이었지만 본래 제 먹이일 터인 인간이 사정거리 안에서 무기를 들고 알짱거리는 걸 봐줄 정도로 너그럽진 못했지.
처음에 들어간 기사는 검을 든 손목채 잘렸고 그런 동료를 끌어내려 황급히 뛰어든 기사는 옆구리 살점을 반 근이나 뜯겼어. 기사단 복귀가 아니라 목숨부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지. 실제로 두번째 기사는 오늘내일 한다는 보고를 들었어. 사실을 알게된 알렉세이는 기사단장 직권으로 명령을 내려 그런 행위를 엄격히 금했지만 이미 죽은 동료들과 감옥에서 습격받은 기사들의 보복을 위해 기사들은 끊임없이 감옥으로 잠입했고 그 때마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어. 어리석은 자들. 겉모습이 어떻던 간에 그건 요괴야. 단순히 묶어 가둬놓았다 해서 인간 한 둘이 검 한자루로 어찌 해볼 만한 게 아니야. 바로 며칠 전에 그 요괴와 검 한자루 들고 일 대 일로 대작한 경험이 있는 기사단장은 손을 깍지껴 턱 부근에 가볍게 가져다대. 어차피 자기 명령을 어기고 잠입한 것이니 그냥 둘까 생각도 했지만 계속 이런 일이 있다면 손실은 더욱 더 커질꺼야. 기껏해야 요괴밥으로 하려고 나랏돈으로 먹이고 입히고 무예 가르쳐놓은 건 아니지. 게다가 프렌을 잡아온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말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들의 불만이 높아져있어. 이대로라면 사기도 떨어져가겠지. 알렉세이는 결단을 내려..
기사단장 집무실 안에 들여놓을 만한 커다란 우리를 주문하라고 이르자 부하의 눈이 휘둥그래져. "각하...!" "그렇게 들어가지 말래도 명령을 듣지 않으니 이곳에 놓는 수밖에 없질 않나." "..심기가 언짢으시군요." "단장 명령도 들어먹지 않는 머저리들을 키운 기억은 없네만." 부관 말대로 지금의 처사는 반쯤은 경고와 화풀이 비슷한 것이지만 남은 반은 이성적 판단에 근거해. 성에 따로 놓을 데도 없고, 설령 놓을 데가 있다해도 기사들에게 방비를 맡기는 한 악순환은 그대로일꺼야. 차라리 탈출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는 제 곁에 두는 게 낫지. 부관의 경악을 무감동하게 받은 알렉세이는 기사단장이 일하다 요괴에게 암살당하지 않게 튼튼한 소재로 지으라고 덧붙여. 그런다고 쉽게 당하기나 할 분입니까... 저번에는 검 한자루로 그 요괴와 다이다이 뜨셨습니다만... 몇 번 더 상관을 설득해보려다 포기하고 거의 푸념에 가까운 불만을 중얼거린 부관이 분부대로 합죠 하고 집무실을 나가자 알렉세이는 생각에 잠겨. 이 집무실에 지하감옥만한 방음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육체의 실험은 이 쪽으로 옮겨오기 전에 마쳐야겠군. 그렇다쳐도 별로 비명도 지르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그 날도 유리는 제 먹을 것 먹고 남은 인간의 음식과 재료를 대충 챙겨 레이븐의 숙소로 돌아왔어.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문은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열리지만 안에 인기척은 없어. 또 임무갔나봐. 임시숙소라는 말 그대로 레이븐은 이 곳에 자주 묵지 않아. 일정한 한 도시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말 그대로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최근엔 특별히 따라다니는 일행이 생겼다는 것 같던데 잘은 몰라. 레이븐은 이것저것 말하긴 해도 제가 말하고 싶지 않은 화제는 이리저리 잘 피해가는 성격이고 또 유리는 그런 걸 캐묻지 않으니까.
그대로 집 안까지 들어와 식료품들을 적당한 위치에 늘어놓은 유리는 찬장이며 선반을 살펴 봐. 떠나기 전 그릇으로 잘 덮어두었던 음식은 처음 만들었던 양이 거의 줄지 않아 그대로야. 이 아저씨 또 식사 걸렀네. 한 번 먹으면 포만감이 오래가는 요괴와 달리 인간은 하루에 세 끼는 먹어야 한다고 하던데. 하루에 세 번이라고 하면 몇 끼를 거른 셈이 되는 거지.. 유리는 머리를 갸웃해 봐. 혹시나 해서 조리도구를 흘끗 봤지만 뭘 따로 해먹은 흔적도 없어. 도시락이라도 싸야 하나. 그리고 들어오면 맨 먼저 도시락통이 비었는지 확인하는 거야. 먹지 않았으면 조금 괴롭히고.. 유리는 생각하고 조금 웃다가 머리를 벅벅 긁어. 할 리가 없지, 그런 짓.
자신과 레이븐. 둘의 관계는 뭘까? 유리는 잠깐 생각해. 레이븐이 '맛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 흥미없다고 했던 건 진심이야. 밥은 맛있는 걸 먹으나 맛없는 걸 먹으나 배가 차고 좀 있으면 또 배고파지는 건 똑같아. 먹을 수 있는 한 조금 맛없는 걸 골라낼 필요도, 맛있는 걸 먹기 위해 100년이나 기다릴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유리가 레이븐을 따라 온 건 조금 있으면 맛있어진다는 레이븐의 말에 혹해서가 아니야. 유리는 처음 봤던 거야. 먹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먹히기를.... 바라는 인간.
'이, 괴물...!'
아. 유리는 고개를 붕붕 돌리면서 뒤따라온 환청을 지워버려. 가만히 있으면 왠지 쓸데없는 것까지 떠오를 거 같아. 식료품 정리를 끝낸 유리는 서쪽으로 가자고 생각해. 거기에 백년을 성공한 요괴와 인간이 있어. 그들을 보러 가자.
유리는 근처 요괴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백년을 성공한 요괴의 행방을 알아내. 요괴들은 별 관심없는 듯하다가 갑자기 백년 요괴의 행방을 묻는 유리의 태도에 궁금증을 표하긴 했지만 순순히 얘기해줘. 조언에 따라 데즈웰 대륙으로 건너가 사막을 지난 유리는 템자 산의 버려진 마을에 도착해. 마을은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아서 무너진 벽과 자라났다가 도로 말라죽은 잡초 등으로 가득해. 여기에 뭐가 살긴 할까? 유리는 군데군데 부서지고 무너진 길 위에 굴러다니고 있던 돌을 대충 걷어차. 돌은 데굴데굴 구르다가 마을 가운데 꽤 넓직한 공터에서 멈춰.
"...어머."
요염한 목소리. 돌이 굴러가는 소리에 뒤돌아본 그것은 유리를 발견하자 마치 반갑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어. 찰랑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뾰족해. "그치만 더는 필요 없는데." 발 밑에 굴러다니는 시체의 수를 세고 있었던 모양인지 들고 있는 창 끝이 바닥을 향해 있어. 동족이구나. 이 곳에 있다던 백년을 성공했다는 녀석이겠지.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한 유리는 네가 다 먹을 수 없을 거 같으니 좀 도와도 되겠냐고 물어봐. 그 말에 유리의 정체를 파악한 그것이 요염하게 눈꼬리를 휘어.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왔지만 유리는 숙소에 없었어. 떠돌아다니는 인상에 비해 숙소에 은근 잘 붙어있었는데. 어딜 간걸까? 레이븐은 잘 쑤셔넣어져있는 식료품과 재료들로 가득한 찬장, 그리고 만든지 얼마 안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음식을 발견해. "이야, 크림스튜네." 한눈에 봐도 조리가 잘 된 것 같아. 떠난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 유리는 숙소에 올 때마다 잔뜩 만들어두곤 하거든. 유리가 먹는 것이 아니니 이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레이븐이 다 먹기도 전에 상해 버리는 것이 태반이야. 아저씨도 이제 늙었는 걸. 아무리 그래도 20대 장정처럼은 못 먹지 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남은 음식도 몽땅 쓰레기통으로 직행. 무언가 먹고 싶다는 식욕을 느낀 건 언제 일이더라.. 사실 잊어버렸어.
유리는 식사를 하러 간 걸지도 몰라. 청년은 배고픔을 느끼겠지? 여타 살아있는 것들처럼. 잔뜩 먹고 활기차게 뛰고 달리고 웃고 하겠지.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이 몸도 움직이기 위해서 연료를 필요로 해. 몸을 흐르는 전류는 멈춘지 오래인데도. 이미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허기에도 정당성이라는게 있다면.. 깨끗이 빈 그릇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레이븐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어. 유리.. 는 아니야 요괴는 문을 두드리지 않거든. 들어오기 전에 문을 두드려 표시하는 건 인간의 매너겠지.
문을 열자 가끔 이 곳까지 찾아오는 떠돌이 상인이 서 있어. 깊은 산 속에 살아 물건 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배려지. 레이븐은 음식이 가득찬 찬장을 떠올리고 괜찮다고 말해. 상인은 기쁜 듯이 댁에 음식이 있다니 별일이네요, 하고 말해. 그 말 그대로 레이븐의 숙소는 항상 식료품이 텅텅 비어있어 상인이 어거지로 팔거나 했던 적도 많거든. 하나도 팔지 못한 상인이 웃으며 돌아가자 레이븐은 에구, 하면서 웃어. 끝을 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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