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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세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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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하니 큰 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혹은 시간적 지축을 늘여 젖먹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평생 호화니 사치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제도의 기사단장에게도 딱 한 가지 낭비벽이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큼지막한 편지지 양 면을 잇달아 구구절절하게 써내려 간 편지를 달마다 부지런히 길드의 소굴로 부치는 것이었는데, 전보의 목적이 안부 교환과 의사전달에 있다 치면 이것은 전혀 그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분명 커다란 낭비가 분명했다. 편지 내용은 때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제국 정세며 제도 분위기 등을 꼼꼼하게 적어 넣고 그 밑에다간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조금 갈작거리다가― 어찌됐든 결국은 반드시 말썽 좀 그만 피우라는 둥, 이번에는 제도로 얼굴 좀 내비치라는 둥 잔소리로 끝나는 그 편지를 유리는 답장은커녕 심드렁한 얼굴로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머리를 슬슬 긁으며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버려지는 편지가 벌써 수십 통이니 다른 것들은 몰라도 제도 근처의 나무들은 분명 기사단장의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이제는 아예 버릇이 돼놔서 편지를 쓰긴 했지만 실은 이번에도 얄 짤 없이 쓰레기통행인 줄만 알았던 전보를 팔랑거리며 유리가 아랫마을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프렌이 놀란 이유가 여기 있었다. 분명 이번 성절은 요델 전하께서 성인이 되시니 반드시 들르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그 뿐으로, 내키지 않는 일은 죽어라 지지고 볶아도 도통 들어먹지 않는 친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이미 황제에게 <유리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넌지시 언질을 올린 후였다. 이건 또 무슨 바람인가 해서 궁금해지긴 했지만 행사 준비로 감히 자리를 비우지 못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따로 찾아가진 못한 채로 성절을 맞았다.
황제가 첫 성년을 맞는 생일답게 행사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성대하고 호화롭게 치러졌다. 또한 이 날의 행사는, 재앙 이후 줄곧 국정 회복에 힘써온 국민들을 위로하고 제국이 이만큼이나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축제이기도 해서 그 화려함은 더했다. 하얀 비단을 금색과 붉은색 술로 장식한 정복을 입은 황제가 마찬가지로 하얀 도료로 채색해 리본과 보석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마다 길옆으로 죽 늘어선 백성들이 환호하며 여름장미로 엮은 꽃다발과 화관 등을 마차 위로 던졌다. 미처 장미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정성스럽게 물들인 종이와 천으로 만든 꽃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퍼레이드가 아직 반이나 남았음에도 황제의 하얀 마차는 금세 빨갛고 노란 꽃들로 흠뻑 물들었다.
<모두 기뻐해주고 있네요.> 다행이에요, 하고 막 성년이 된 황제가 몸을 기울여 속삭이자 호위를 위해 곁에 서 있던 기사단장이 빙긋 웃었다. <네, 정말로.> 실은 프렌 자신도 좀 전에 가슴에 단 장미를 하나 받은 터다. 축하합니다. 제국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해요. 어딜 가든 축하와 감사의 말들이 축복처럼 터져 나와 꽃과 함께 쏟아졌다. 정말이지 모두에게 사랑받고 계시는 황제 폐하시구나. 주위를 둘러싼, 황제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들이 하나같이 밝고 환해서 프렌은 마치 눈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지나치는 인파 사이로 설핏 검은 머리칼을 본 것도 같았다. 멈칫 했던 프렌은 잠시 후 고개를 돌렸다.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애초에 행사에 참여하라고 전보까지 친 참이니 유리가 오늘 축제를 보러 나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외려 제국의 일이라면 언제나 다소 심드렁한 태도였던 친우가 제가 없는 사이에도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 프렌은 다시 자세를 다잡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랬던 것이 약 반나절 전, 정신없이 빡빡했던 그날 하루를 간신히 마무리한 기사단장이 성으로 전해온 쪽지를 받고 아랫마을의 술집에 도착했을 때 탁자 옆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던 용맹한 금성의 수령이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프렌!>
그러고 보니 카롤은 현 제국 황제와 비슷한 연배로, 황제가 성년을 맞았으니 카롤도 비슷한 시기에 성인이 되었을 터였다. 슬슬 길드 내 술자리에 끼어도 좋을 나이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새삼 기특하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다짜고짜 사과부터 받았다.
“저기, 미안!”
“응? 무슨 일… 아.”
탁자 위로도 이미 한차례 축제가 휩쓸고 간 모양새였다. 안 그래도 이미 축제 끝에 거리에 남은 종잇조각들이며 꽃 등을 잔뜩 치우고 온 뒤다. 익숙한 얼굴을 찾아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온 프렌이 텅 빈 채 그 주변을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술병들과, 식탁 위에서 마치 위대한 왕관인 양 위스키 잔‘들’을 거꾸로 덮어 쓰고 있는 맥주잔을 보며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탁자에 머리를 대고 반쯤 졸고 있던 레이븐이 간신히 한 팔을 쳐들며 소리를 냈다.
“여, 프~렌쨩...”
“레이븐 씨,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여성 조는 벌써 숙소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웅얼거리며 술과 과자 부스러기로 엉망인 탁자 끝에 열심히 제 얼굴을 부비고 있는 수석 대장 옆에서 흡사 마시다가 그대로 죽어 넘어진 모양새로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한 프렌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유리……!> 어지간히도 마셨는지 어깨를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유리가 이렇게까지 마시는 일은 드문데. 카롤은 아예 고개를 떨궜다. 본인을 깨우는 건 포기하고 그나마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연장자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레이븐이 어울리지도 않게 배시시 웃었다.
“오늘 좋은 날이니까, 아저씨랑 청년 기분 좋아져서 말이야~.”
“그...! 슈반 대장 폐하도 찾아뵙지 않으시고…!
“그게에~ 청년이 하도 알현이니, 성이니 그런 거 답답하다 해서~ 아저씨, 지금은 길드원이니까 윗사람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걸랑~”
거기다 대고 차마 <단장인 제 말은 듣지도 않지 않습니까….>하는 말을 주억거릴 정도로 무례한 성격이 못 되어서, 혹은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것저것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렌은 애교와 웅얼거림을 반쯤 섞어서 말하고 있는 레이븐을 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이 주정뱅이들을 어쩔 것인가. <미안해, 말릴 수가 없어서….> 카롤이 다시 쭈뼛쭈뼛 사과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쪽은 얼마 마시지도 않은 모양이다. 보나마나 이제 나이 운운하며 유리 네한테 끌려왔을 테고, 이 지경이 되도록 말리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성으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다. 어이구. 존경하는 수석 대장이 더러워진 볼로 꾸준히 탁자 청소를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일단 주변을 좀 정돈하는 것이 좋을 듯싶어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는 술병 하나를 주워들던 프렌은 카롤이 <저기!> 따위를 외치며 달려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프렌은 유리를 신경써줘.”
“그래도 이거 다 치워야 하잖아.”
“혼자 할 수 있어. 레이븐도 내가 데려갈게.”
“지금은 여관에 남는 방도 없을 텐데…”
“괜찮아!”
<레이븐 같은 거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탁자에도 자니까!> 겉보기론 별로 안 마신 것 같아 보였는데 카롤도 은근히 취해있었던 걸까.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에 프렌이 고개를 갸웃하자 탁자에 기대있던 레이븐이 수령님 너무하다며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돕겠다고 말하는 건 한 길드 수령에게의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더욱이 이런 소란이 나도록 깨지 않는 친우의 상태도 걱정되었기 때문에 프렌은 대충 제안을 수락했다. 아예 유리 뒤에 서서 어서 데려가라는 듯 그 등을 톡톡 두들기고 있던 카롤의 도움을 받아 프렌은 유리를 마치 짐짝처럼 한 어깨에 걸머멨다.
“그렇게 들면 속이 나빠지지 않으려나..”
“토할 것 같으면 던져버리면 되니까.”
“엇….”
<정말 혼자 치울 수 있겠어?> <응? 으응.> 미묘하게 이상한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던지 술집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재차 질문하던 프렌이 저쪽으로 멀어져가자 카롤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간다니까.
기사라는 직업 상 무거운 군장을 지고 돌아다니는 일에는 이골이 날 정도였지만 역시 같은 체격의, 거기다가 취해서 축 늘어지기까지 한 남자 몸을 한 어깨에 메고 다니는 건 힘이 부쳤다. 하루 종일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마차에 서 있었던 데다 행사 이후론 뒤처리를 위해 뛰어다닌 참이다. 성으로 돌아가면 봐야 할 남은 서류 업무도 있다. 게다가 그 멘 것이 제 친구는 행사 준비로 이리저리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제도에 들른 것이 벌써 며칠 전인데 축제 당일까지 성으론 코빼기도 안 비친 고약한 친우 놈임에야. 카롤의 걱정과는 달리 단단한 어깨에 배가 걸린 불편한 자세임에도 뒤척임도 없이 곯아떨어진 유리를 지고 성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프렌은 간신히 지금 자기가 메고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고 갈 수 있는 괘씸한 친우 놈이 아니라, 반드시 성까지 운반해야 하는 마수 안장이나 군수품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성에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프렌을 발견하고 <엇.> 소리를 냈다. 부하가 저희 단장이 어깨에 멘 것을 보고 잠시 넋을 놓다가, 급하게 사람을 부를까요 어쩌고 하는 것을 거기서 더 서 있기도 짜증났던 프렌은 눈빛으로 저지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많은 기사와 귀족들이 성 안에 거처를 두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은 황제의 소유로, 사용되지 않는 빈방이 얼마나 있건 간에 배정받은 방외에 다른 시설을 사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면 당연히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시간에 감히 사적인 용무로 피곤할 황제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단장은 그대로 유리를 제 사실로 데려갔다.
잘 정돈해둔 침대 위로 거의 굴리다시피 내려놓자 그때까지 별 소리 없던 유리가 처음으로 뭐라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으으…> 내려놓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난 것이 어딘가 잘못 부딪친 듯 했지만 만취로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에게는 별 필요 없는 배려라고 생각한 프렌은 뻐근한 어깨를 몇 번 주무르고 그대로 책상에 가서 앉아 남겨놓은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잠든 친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책상 위 등잔의 밝기를 서류 위 글씨가 간신히 보일 정도로 낮추긴 했다.
잠시 프렌의 방 안은 들릴 듯 말 듯 한 유리의 고른 숨소리와, 잘 다듬어진 펜 끝이 끊임없이 종이 위를 달려 나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열어둔 창문으로 다사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작은 등잔만으로도 책상이 환한 것에 감사하며 막 몇 장 남지 않은 서류에 사인을 마친 프렌이 갑자기 들리던 소리가 가시고 시야가 갑자기 훅 가려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우왁?!>
반사적으로 잉크와 펜을 서류가 더럽혀지지 않게 밀어내고, 책상에 풀어놓았던 검을 쥐려던 손이 간발의 차로 닿지 않은 채로 프렌은 갑자기 위에서 덮쳐온 유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제 위로 늘어져 엎어진 몸이 무거웠고, 넘어져 의자 등받이에 세게 받힌 등이 아팠다. 이 주정뱅이가 진짜!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도통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거의 저쪽으로 집어 던지듯 밀어내도 유리는 답지 않게 계속 뭐라 말하며 제 쪽으로 매달렸다. (물론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 진짜 적당히...!”
“%*(@#)(...”
“알았으니까 일단 떨어져!”
<무겁고, 술 냄새나!> 깔린 다리를 몇 번 움직여 떨쳐내려고 했지만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한 유리를 보고 곧 포기했다. 술김에 통각도 사라졌는지 팔 다리를 퍽퍽 패도 별 반응이 없다. 잠시 후 지친 프렌이 얌전히 움직임을 멈춘 것에 만족했는지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꼴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이놈이 제법 자세를 가다듬고 앉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남의 다리 위에서.
“...그 뭐냐아~...”
“......?”
“...단장이잖아, 단장. 아니 프렌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어졌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그대로 짜증으로 바뀐다. 이래서 주정뱅이의 말은 듣는 게 아니랬다고, 다리를 옆쪽으로 미끄러트려 간신히 몸을 빼낸 프렌이 끊임없이 술 깨면 보자 되새김질하며 바닥에 대충 주저앉아 있는 유리의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일으켰다. 거의 다 됐다. 뒤 이어 들려온 말만 없었어도 기사단장은 오늘 하루 답지 않게 구는 주정꾼을 재우고 남은 업무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수고했다, 프렌.”
“...뭐?”
“대단해. 엄청.”
<축제? 응, 그랬지.> 물론 분명 성황이긴 했다. 다들 좋아했고. 그런 화려함도 때에 따라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대충 동의해주며 다시금 잡은 팔에 힘을 주자 이상하리만큼 강한 힘으로 맞잡아 당겨졌다. 그 바람에 거의 넘어질 뻔 했던 프렌이 다시 뭐라 잔소리하려고 했지만 유리는 꾹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꾸벅꾸벅 말을 이어갔다.
축제 이야기가 아니었다. 프렌은 어느새 빼내려고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소 꼬이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유리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계, 마을 사람들, 평화, 기사단, 꿈, 자랑스러움... 술을 마시지 않았더면 낯 뜨겁다며 절대 입에 내지 않았을 것들.
듣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적어도 이건 진짜였다. 비록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았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또는 그 쪽에서 말 해오지 않아도 당연스레 서로의 느낌이며 감정을 알았으니까. 서로 엇갈렸을 적에도 결국은 알아주겠거니 했을 정도다. 새삼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주쳐 웃어오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생각은 거짓말이었던 걸까 생각될 정도로, 지금 실제로 형태로 구축되어 눈앞으로 펼쳐지는 감정의 나열은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하고 찬란했다. 근처를 싸돌아 마법처럼 빛나는 어절들이 달빛과 함께 바스라져 온 방안을 하얗게 물들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프렌은 간신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다 네 덕분이야, 유리.> 그렇지만 취하지 않은 채로 말해줬어도 좋았을걸. 너는 쑥스럽다며 거절했겠지만.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잠시 어릴 적처럼 환하게 미소 지은 유리가 다시 눈앞으로 쑥 다가올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프렌은 제 입술에 와 닿는 느낌에 화들짝 어깨를 굳혔다
“?!?!!!”
“장한 기사님한테, 선물.”
“으...”
정말이지, 술주정뱅이의 키스 따위가 무슨 포상이 된다는 거야.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하기 힘들어 술이나 진탕 퍼마시는 주제에. 제가 준 포상에 만족했는지 술김에 휘청거리면서도 싱글거리며 웃어오는 괘씸한 친우가 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 프렌은 <줄 거면 제대로 줘.> 같은 투덜거림을 삼키며 다시 그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환한, 환한 밤이었다.
***
이 뒤에 술 깬 유리가 뭐야 프렌%(#_)%(_)#! 했다던가 그 다음날 바로 당그레스트로 날아가서 석달을 두문불출했다던가 하는 얘기는 생략..ㅇ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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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자라난 앞머리가 눈 안쪽을 쿡쿡 찔렀다. 촌장집의 시중을 드는 내내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가 영 거추장스러워 눈을 비벼댔더니 그러는 것을 언제 또 봤는지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유리가 주머니칼을 들고 손짓했다. <머리, 잘라줄게.>
자른 머리카락을 버리기 쉽게 바닥에 방안을 뒤져 찾아낸 거적을 깔고 그 위에 올린 상자에 프렌이 얌전히 앉자 본격적인 이발이 시작됐다. 분주함이 채 가시지 않은 저녁, 얼마 남지 않은 햇빛에 의지해 고개를 기울이고 눈썹을 찡그려가며 신중하게 머리를 잘라가는 유리의 뒤로 자른 머리카락과 삭삭 하는 칼날 대는 소리가 바닥으로 소복이 쌓여갔다.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시야 밖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프렌은 가리는 앞머리를 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르는 것은 오랜만이다. 뒤쪽을 지나 옆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프렌은 귀 가까운 곳을 챠캉챠캉 스치던 가위소리를 기억해냈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용 가위였지만 부인은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위로 할 수 있는 일을 열두 가지나 더 알고 있었다. 남은 붕대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옷감을 재단해 옷을 만들고 색실을 잘라 두건 위에 들꽃모양으로 수를 놓기도 했다. 오늘처럼 머리가 길게 자라난 날이면, 햇볕 잘 드는 창 옆에 자신과 유리를 앉히곤 어딘지 익숙한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머리도 잘라주었다. 언제까지나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나지막한 멜로디.
오래전의 일이었다.
잘그랑, 주머니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프렌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떨어트린 칼 위로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다른 손 손가락을 붙잡고 있는 유리가 보인다. <유리, 다쳤어?> 아무런 대꾸가 없는 친구를 걱정해 머리칼을 걷어내고 살짜기 고개를 들게 하면 뜻밖에도 잔뜩 일그러져 있는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유리….”
유리는 울고 있었다. 손등으로 훔쳐도 미쳐 다 닦지 못한 눈물이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들과 함께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진한 얼룩을 그었다. 거칠게 비벼낸 얼굴이 눈물과, 자르다 만 머리카락 조각들과 다친 손가락에서 배어나온 피로 온통 얼룩졌다. 소리 없이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긴 프렌이 깨끗한 손으로 유리의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이며 피와 눈물을 닦아냈다. 닦아내도, 닦아낸 그 자리로 다시 눈물이 떨어져 프렌의 양 손이 금세 미지근하게 젖었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며 프렌은 부인을 실은 관을 내릴 때까지도 주먹을 꾹 쥐고 버티던,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떠올렸다.
“헹크스 부인도, 아프기 전엔 이렇게 머리 잘라주셨지.”
흠뻑 젖어든 유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시울 아래로 구르듯이 뭉쳐들던 눈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하얀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물궤적을 따라가듯, 마치 어린 소녀 같은 모양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프렌은 다시 친구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못 고치는 병은 아니라 했다. 약만 있다면 분명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나 결계 밖 깊은 숲에서나 구할 수 있는 약재는 너무나도 비쌌고, 시내의 의원은 제 값을 모두 치르지 않으면 약을 줄 수 없다 했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할 말을 잃은 노인을 대신해, 후에 반드시 갚겠다고 간청하는 고아아이들의 부탁을 의사는 들은 체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 가난과 무력함이 비참하고 분해서, 결국 싸늘하게 식은 침상을 앞에 두고도 유리는 끝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유리가 프렌은 못내 안타까웠다. 헹크스 부인의 죽음은 분명 슬프고 분한 일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자신들에게 친어머니같이 대해주었다. 웃을 때마다 환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제 더는 남은 눈물이 없을 텐데도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죽음을 두고 유리의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터였다. 터무니없던 약값도, 구할 수 없던 약초도 모두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그 모든 것이 마치 제 탓인 양 굴었다. 피나게 입술을 깨물고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꼭 쥐어 가며 눈물을 참았다.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듯 한 그 얼굴이 외려 더욱 애잔하고 서러워서, 옆에서 대신 엉엉 울면서도 프렌은 차라리 유리도 울어주었으면, 떼라도 써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렇게 참았던 눈물이 간신히 터진 지금에도, 유리는 단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칠 뿐이다. 이따금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오열을 참으려고 잔뜩 죄어든 여린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앙다문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울음 대신 뜨겁도록 떨리는 빈 숨소리. 망설이는 것처럼, 프렌의 어깨에 닿으려던 손이 멈췄다가, 뿌리치듯 거두어졌다.
다시 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덜어내려 손가락을 뻗으면 그것마저도 우는 얼굴을 감추는 듯 돌린 고개에 거부당했다. 저쪽을 향한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듯해서 견딜 수 없어진 프렌이 오히려 자신이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를 내밀어 유리의 고개를 꼭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놀란 듯 물러나려 하는 몸을 꼭 붙잡으면, 이미 감정적으로 한계였던 유리가 약한 저항을 그만 두고 프렌의 어깨 죽지에 고개를 묻었다. 닿은 어깨로 흘러내리는 친구의 감정들이 놀라우리만큼 뜨겁고 또 뜨거워서 서러웠다. 목 놓아 울 곳조차 없어 가슴 안을 몇 번이고 헤집던 뜨거운 감정의 결정들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터져 나와 번뜩이며 환하게 빛을 발했다가, 곧 별이 지듯 사그라진다.
그 잔재와도 같이, 떨리는 어깨를 다시금 끌어안으면서 프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했다. 누우면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창고 방, 그 안에서도 유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추위를 피하는 새들처럼 서로 옹송그려 안은 등 위로 천천히 어두운 밤이 내리는 방 안에서, 친구를 안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프렌은 기원처럼 속삭였다. 그렇다면, 네가 울 수 있도록 내가 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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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용의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털레털레 수도 마도기로 향하던 유리는 친구인 프렌이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침의 기억대로라면 프렌은 오늘 탁아소의 일손을 돕기로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마침 장작을 나르던 중이었는지 그가 누워있는 옆쪽에 듬직한 나무토막 몇 개가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는 프렌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해? 배라도 고파?”
“쉬잇!”
길바닥이 제 집 안방인양 누워있었던 주제에, 말을 거니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며 기겁을 하는 꼴을 보고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별 설명도 없이 다시 바닥에 귀를 대고 누워버리는 것을 궁금해진 유리가 프렌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가서 둘은 거의 동시에 발딱 일어나 앉았다.
“…뚱보?”
“맞지? 뚱보 울음소리 들렸지?”
들은 것이 정확하다면 지금 땅 속에서 들리는 목멘 것 같은 특이한 야옹소리는 아랫마을 술집의 ‘뚱보’가 틀림없었다. 이름 그대로 상당히 뚱뚱한 고양이인 뚱보(원래 이름은 따로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영악한 놈으로, 먹을 것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살랑살랑 잘도 애교를 부리지만 가난뱅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고양이라도 열 살짜리 고아에게는 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아는지 보통 때에는 근처로 다가오지도 않는 뚱보를 유리는 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프렌은 항상 그 노란 털을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근데 이 녀석 왜 땅 속에 들어가 있어?”
“…뒷골목 구멍에 빠진 거 아닐까?”
<골목 구멍? 어느 거?> 고개를 갸웃하는 유리의 머릿속에 무책임한 설계와 부실한 공사로 약한 지진이나 폭우가 내리면 으레 벽돌이 몇 무더기씩 아래로 가라앉는 구멍투성이의 골목길이 떠올랐다. 유리의 말에 같이 고개를 기울인 프렌이 말없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그 고약한 고양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빤해서 유리는 프렌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못을 박았다. <안 돼. 여관 아주머니가 물 길어오라고 하셨어.>
“그치만, 수도 마도기 있는 곳 그 근처이고, 잠깐만…”
“너도 장작 나르고 있잖아.”
“이것만 나르면 오늘 일은 끝이니까, 응?”
“........”
“유-리.”
우와, 비겁한 놈. 안될 것 같으니 금방 풀이 죽어 올려다보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이 제 저런 표정엔 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것이 틀림없다. 하기야 저 녀석이 그렇게 약은 녀석일 것 같으면 저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술집 고양이가 실은 평소에 쓰다듬게 해줄 듯 말 듯 아이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가오면 쑥 도망쳐버리면서 저를 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애진작에 눈치 챘으리라. 한참 친구가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던 유리는 눈꼬리를 내리며 한숨을 폭 쉬었고 프렌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샐샐 웃는 그 얼굴을 보니 왠지 심통이 터져서 유리는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고만 오기다, 보고만.>
수도 마도기에 가지고 온 양동이를 밀어 넣은 유리는 양동이 안으로 물이 퐁퐁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뒷골목 쪽을 내다보았다. 구멍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이쪽을 향한 프렌의 동그란 등이 보인다. <뭐가 보여?> 혹시나 해서 말을 걸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구멍 속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프렌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으응... 안보여.> ‘아랫’마을 밑에 또 다른 ‘아래’가 있다는 건 어쩐지 시시한 농담 같은 이야기였지만 사실 그 밑은 꽤 깊었는데, 빛도 제대로 닿지 않아 당최 그 밑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구멍들은 자칫하면 빠질 위험이 있어 어른들은 늘 골목 근처를 지나다닐 때는 조심하라고 충고하곤 했다. 어느 새 다 채운 양동이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유리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뭔가 저 녀석, 몸 너무 숙이고 있지 않나?
프렌이 손을 짚고 있던 바닥이 미끄러져 내린 건 그 때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내린 비로 구멍 가장자리 벽돌의 연결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으아, 저 바보!> 허겁지겁 달려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친구를 향해 손을 뻗어 간신히 그 허리를 잡았을 때, 유리는 그와 동시에 자신의 발밑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벨이 울린다. 기억에 있는, 손님방과 카운터를 연결해놓은 여관의 점원 호출용 종소리였다. 어떤 손님인가 식사를 방으로 올려달라거나, 베개 밑에 머리카락을 좀 치워달라거나 하는 주문일 것이다. 유리, 유리 하고 시끄럽게 우는 종소리가 짜증났다. 유리는 객실이 있는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언제나 오르는 계단일 터인데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가고 있다니까!> 유리, 유리, 유리! 제 몸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한 싸구려 도금 종이 온 사방을 쳐대는 통에 쾅쾅 울리는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리, 유리!”
“으....”
“유리! 정신이 들어?”
<다행이다….> 정신을 차린 유리는 여관 계단이며 시끄럽던 종소리는 어느 새인가 사라지고 딱딱한 바닥에 자신이 내팽개쳐진 것처럼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올려다 본 천장에 어룽어룽 물그림자가 비쳤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누워있는 자신을 흔들며 눈물콧물을 질질 짜고 있던 프렌이 반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누가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처럼 뒤통수가 쿡쿡 쑤셨다. <아얏..> 욱신거리는 뒷머리를 문질러보고 바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자 프렌의 눈에 다시 눈물이 함박 차올랐다.
“많이, 많이 아파 유리? 미안.. 미안해, 내가 이런데, 오자고.. 나 때문에….”
“뭐어...”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 주먹만 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또 아니라서 한숨을 쉰 유리는 대충 프렌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뭔가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유리는 문득 바닥에 대고 있는 프렌의 무릎에 뭔가가 묻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너 무릎...! 피나잖아!”
“…응?”
흐른 피가 프렌의 온 무릎이며 그 근처 바닥에 얼룩덜룩 번져있다. 보아하니 제 무릎에 상처가 난지도 모르고 컴컴한 바닥을 기어 다닌 꼴이라 기가 막힌 유리가 얼른 프렌을 일으켰다. 의외로 상처가 꽤 깊은 것에 놀라면서, 살갗이 홀랑 까져 피가 진득하니 배어나온 그 위로 바닥의 먼지며 작은 모래들이 잔뜩 붙어있는 상처를 어떻게 털어낼까 고민하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빤히 보고 있던 프렌이 발갛게 부은 눈을 깜빡였다.
“안 아프냐?”
“...? 당연히 아파.”
<아, 그래….> 오히려 그런 것을 물어보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프렌의 얼굴에서 다시 상처로 시선을 내리며 유리는 머리를 긁적이려다, 아까의 통증이 생각나 그만 두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고 견문도 좁지만 그래도 제도의 아랫마을에서 이제껏 나고 자란 유리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 ‘이상한 녀석’을 꼽는다면 프렌은 꽤 상위권에 위치할 것이다. 평소에 방긋방긋 웃는 표정인 것만큼이나 우는 일도 잦은 프렌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음약한 꼬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실은 그 우는 것에도 규칙이랄지, 특징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남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는 세상 다 떠내려가라 할 정도로 눈물을 짜대지만 제 상처나 일엔 그치곤 다소 무심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인 것이다. 하긴 아랫마을에 무르팍 좀 까졌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는 없고 생각해보면 평소에 남의 일로 그렇게 걱정하고 울어대는 게 비정상인 것도 같지만 제가 보기에도 심하게 까진 저 무릎은 굉장히 아플 것 같아서, 멀뚱한 친구의 얼굴과 어둠 속에서 까끌하니 번들거리는 상처를 보며 유리는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을 떠올렸고 자신이 느끼기에도 좀 애매했던 그 감정은 어느 쪽이냐면 서운함과 조금 닮아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탁탁 턴 유리는 뒤로 물러 앉아 다친 다리를 내밀고 있는 프렌의 상처를 후후 불고는 손으로 큰 먼지 등을 살살 털어냈다. 이미 굳기 시작한 피에 엉겨 붙은 알갱이들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뭔가 묶을 것을 찾던 유리는 자기 머리에 쓰고 있는 머릿수건을 떠올렸고 금방 삼각형 모양의 천을 풀어 프렌의 다리에 묶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팠는지 프렌이 이마를 찌푸리며 소리를 냈다. <아..>
“아파? 좀 살살 묶을까?”
“으응.. 괜찮아. 근데 유리, 그거 여관에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빨아서 돌려주면 되지 뭐.”
“응.”
그 말에 왜 눈물콧물로 얼룩진 얼굴을 해놓고 방그레 웃는 프렌의 오목한 머리꼭지를 죽자 사자 쓰다듬었는지, 이번에는 유리도 잘 모른다.
***
물, 불, 바람까지도 마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 속에 살고 있긴 하지만 마도기가 그 뒤처리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사용 후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후자들과는 달리 물은 사용하는 도시 크기에 따라 대규모의 처리시설이 필요했다. 지상에 설치하는 수로교는 인력이 너무 많이 들었고 붕괴의 위험이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결계의 설치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도시의 하수처리시설은 마을 밑 지하에 자리 잡았다. 둘이 떨어진 곳은 바로 그 하수통로의 옆 쪽, 기다랗게 제방이 놓인 위였다.
어둠에 시야가 익은 후, 자신들이 떨어진 바로 옆에 시커먼 물결이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비교적 언제나 태연한 생각이었던 유리도 발 딛은 곳의 땅이 흔들리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모르긴 몰라도 떨어진 위치가 조금이라도 더 오른쪽이었다면 지금의 머리나 무릎 상처쯤은 별 소용이 없어졌을 것이다. 괜찮다는 유리를 꼭 봐야한다고 귀찮을 정도로 우긴 끝에, 통증이 가라앉자 유리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프렌이 고개를 저었다. 머리 뒤쪽으로 동그랗게 혹이 만져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부근이 좀 얼얼한 것 빼고는 유리가 느끼기에도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유리는 프렌의 무릎이 더 신경 쓰였다. 아까 이후로 프렌 자신은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지만 제방 벽을 더듬어 가며 걷고 있는 지금도 약하게 절뚝거리고 있는 다리 위를 묶은 천이 벌써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에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돌아다니고 있긴 하나 이런 곳을 상처 소독도 못한 채로 계속 걷다가는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될 가능성도 있다. 떠올리는 머릿속조차 얼어버릴 것 같은 싸늘한 상상에 어깨를 부르르 떤 유리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친구를 끌어당겼고 기대와는 다르게 프렌이 별 반응이 없자 더욱 불안해졌다. <야, 프렌..?> 뒤 쪽에 시선을 둔 채로 프렌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려, 유리.>
그 말 그대로, 실은 아까부터 통로 저 끝에서 뭔가에 긁히는 듯 한 소리가 나고 있다. 제 생각에 빠져 소리를 듣지 못했던 유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런 곳에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에게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프렌을 뒤로 감추듯 앞으로 나서며 유리는 그 무릎을 곁눈질했다. 저 다리라면 뭐가 나오던 간에 빠르게 뛸 수 없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할 거였다. 뭐야, 뭐가 있는 거야?! 유리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깜빡이며 소리 나는 쪽만 보고 있던 프렌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어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야-옹.”
“엥...?”
“뚱보!”
귀를 긁는 듯한, 목쉰 울음소리에 긴장이 탁 풀려 반쯤 주저앉은 유리를 두고 기쁜 목소리를 울린 프렌이 절뚝거리며 고양이에게로 다가갔지만 이번에도 역시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금방 풀이 죽어 이쪽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프렌의 모습이 꼬시긴 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설렁설렁 걸어오는 뚱보도 화나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유리는 프렌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양이 쪽을 향해 두어 번 발길질했다.
걱정하던 고양이도 찾았겠다, 한결 가뿐해진 프렌의 표정이 어두운 와중에도 눈에 보일 정도여서 유리는 한순간 이 녀석이 상황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하고 의심스러워졌다. 처음 떨어진 골목길의 위치를 가늠해서 걷고 있긴 하지만 떨어진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다가, 걸어도 걸어도 눈앞에 있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둡고 시커먼 통로뿐이다. 출구는 어디쯤인지, 아니 아예 출구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매달고 걷고 있자면 무거워진 다리가 절로 질질 끌렸다. 이런 곳에서 멀쩡하니 뛰어다닐 수 있는 녀석은 바보 아니면 득도한 도인뿐일 터인데, 생각해보면 저 녀석은 평소에도 툭하면 눈치 없는 말이나 해대고 이상한 타이밍에 방글거리는 등 부정적인 쪽의 증거뿐이라서 유리는 지금도 고양이를 쫓느라 여념이 없는 친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 건지 뭐라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비단 자신의 부족한 어휘력 때문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에 한참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눈치 챘는지 금세 곁으로 다가온 프렌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머리가 아파? 유리.”
“글쎄... 너는?”
“무릎? 응, 괜찮아.”
“머리는?”
“? 머리도 괜찮아.”
<그치만 내가 다친 곳은 다리인 걸-.>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프렌은 같은 또래가 보기에도 무척 귀여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리 마음속에 피어난 아련함만 더욱 증가시키고 말았다. 다가온 프렌의 머리꼭지를 다시 문질거리면서, 유리는 반드시 이 녀석(과 괜찮다면 한 마리 더)을 데리고 밖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런 유리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쓰다듬는 손길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얌전히 머리를 맡긴 프렌의 뒤로 짜증나는 소리로 야옹거리는 뚱보의 소리가, 어두운 아치형의 통로를 타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새로운 각오를 다진 유리 일행이 몇 걸음 더 옮기자 걷고 있는 방향 저쪽의 통로를 기점으로 천천히 수로가 넓어졌다. 걷는 사이에 어느새 하수의 처리량이 많은 번화가 쪽으로 들어선 듯하다. 실제 마을 안을 걷는 것과는 거리감이 달랐기 때문에 그간의 공간개념에 어렴풋하게 인지적 갈등이 이는 것을 느끼면서 둘은 잠시 앞쪽 구멍에서 흘러나와 거대한 벽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웅장한 하수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통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쪽과 저쪽의 제방을 갈라놓고 있는 틈새를 뛰어넘어야 했다. 먼저 천천히 달려가 틈새를 폴짝 뛰어넘은 유리가 프렌에게 손을 내밀었고, 다치지 않은 다리로 도움닫기한 프렌이 잠깐 휘청거리다 그 즉시 유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그 반동으로 둘 다 제방 끄트머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아찔한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아연한 얼굴을 한 자신을 본 프렌이 눈치도 없이 당싯 웃자 아까 다쳤던 뒷머리가 다시 지끈지끈해진 유리가 어깨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남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 녀석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눈앞의 온갖 문제들이 사고 저편으로 훌훌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산ㅅ새처럼 날려 보낸 문제들 중에는 실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섞여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유리를 몇 번 토닥인 프렌이 다른 일행 쪽을 돌아보았을 때 그 불쌍한 고양이는 제 밑의 바닥을 박박 긁으면서 한껏 썽을 부리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 또 왜 저래?”
“못 건너는 거 아닐까?”
“헹, 안 다친 다리가 네 개나 있으면서?”
“유리...”
그 빈정거리는 말투가 어지간히 웃겼는지 저쪽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눌러 참은 프렌이 더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유리의 귀가 어떤 소리를 잡아냈다. 마치 아까와 비슷하게, 날카롭고 가느다란 뭔가에 바닥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저편에서 울렸다. 혹시나 해서 뚱보를 돌아봤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뚱보조차도 그 소리에 뭔가를 느꼈는지 벽 끄트머리에 바싹 가서 붙었다. 저 꼴을 보니 아무래도 제 발로 이쪽으로 건너오기는 힘들 것 같다.
긁는 소리가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프렌도 놀라서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주변에 퍼진 희미한 빛을 반사해 천장에 일렁이는 물그림자 사이로 몸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쥐를 닮은 한 무리의 마수들이었다.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프렌을 붙잡으려던 유리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비틀거릴 땐 언제고, 상처 따윈 잊었다는 듯 달음박질쳐 통로의 틈새를 뛰어넘은 프렌이 잽싸게 뚱보를 안아 올렸다. 잔뜩 흥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고양이를 붙잡느라 시간이 어물어물 지체되는 사이 몸이 단 유리가 그를 따라 틈새를 건넜다. <유리!> <너 진짜!!> 급하게 달려와 마물과 이쪽을 막아서는 것처럼 몸을 돌린 유리는 일단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하여간, 이 녀석은!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단순한 바보고, 상황파악을 했으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구제불능의 대 바보가 틀림없다. 이 와중에도 이제 완전히 아이들을 눈치 챘는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마물들의 무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프렌, 빨리!”
“응!”
버둥거리는 고양이를 안심시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다짜고짜 번쩍 들어 올린 프렌이 유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거의 동시에 통로 저쪽을 향해 뛰었다. 자신과 서로의 숨소리와, 바닥을 긁는 마물의 발톱소리와 찍찍 하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뚱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수로 벽에 반사되고 울려 퍼져 정신없이 사방을 맴돌았다. 틈새가 바로 눈앞이었다. 막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도약하려는 순간 유리의 눈에 막 다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끄러지는 프렌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넘어지는 그 순간에 뚱보를 힘껏 앞쪽 제방으로 던진 친구의 위로 마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뻗어지는 것과 동시에 유리의 목 안쪽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
오늘만으로 벌써 보는 천장인지, 눈앞에 뿌옇게 다가오는 익숙한 공간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유리가 낮게 신음했다. 딱히 어디라고 짚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 몸이 쑤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푹신한 베개에서 간신히 고개를 움직이면 마을 촌장인 헹크스 영감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대체 지하수로엔 왜 간 게냐?”
“그거야 프렌 녀석이...”
점차 아득하게 윤곽이 드러나는 기억 속에서, 덮쳐오는 마수의 그림자 밑으로 하얗게 질리던 프렌의 얼굴이 생생했다. 그리고 미처 피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린 녀석을 밀쳐 낸 순간 가슴으로 확 번지던, 차갑고 뜨거웠던 통증. <유리!>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눈동자가 반들반들 빛나서, 쓰러져 넘어지는 순간에도 유리는 이 녀석이 또 울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프렌은?>
그 말에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한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면 침대 위 자신이 누운 바로 아래쪽에 엎어져 잠들어 있는 프렌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인다. 어쩐지 몸이 무겁다 했더니 이 녀석 때문이었나. 두꺼운 이불을 헤치며 꿈지럭거려 몸을 일으키면 단단하게 붕대가 감긴 가슴의 상처가 찌릿하게 아팠다. 욱신거리는 상처 부근을 찬찬히 더듬어 살피는 유리를 본 헹크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곰방대의 물부리를 깨물어 딱 소리를 냈다. <피만 났다 뿐이지, 가슴 상처는 별 거 아니라 그러더라.>
이 영감이 남 일이라고. 대뜸 고개를 쳐들어 불만을 종알거리려 했던 유리가 갑자기 느껴진 머리의 통증에 다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으으….> 이마께를 더듬어보니 이쪽에도 붕대가 감겨있어 놀란 유리가 고개를 들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심각했던 건 뇌진탕 쪽이란다. 정말이지 유리 네 녀석은….”
“…뇌진탕?”
수로를 걷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던 것이 비단 상황파악 못하고 너갱이를 빼놓고 다녔던 친구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는 유리를 보고 다시 혀를 찬 헹크스는 아직도 떨리는 손을 얼버무리기 위해 괜히 불도 붙이지 않은 대통을 뒤적거렸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조사하기 위해 수로로 내려갔던 기사들이, 온통 피투성이로 축 늘어진 유리와 울다 울다 지쳐서 잔뜩 열이 오른 프렌을 들쳐 업고 들어왔을 때는 노쇠한 가슴이 다 어찔하도록 내려앉았다. 있는 것, 없는 것 삭삭 긁어모은 돈으로 시내의 의사를 부르고 한바탕 난리를 피운 다음에 그래도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대로 심장이 천장에 닿도록 널을 뛰었다. 내 자식 놈들도 뭐하고 사는지 모르고 지내는 마당에, 늙은이 심장을 이토록 쥐었다 폈다 하다니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고약한 꼬마들 같으니라고. 헹크스는 다시 혀를 찼고 그 시선을 눈치 챈 유리가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내참, 구멍 가까이 가지 말라면 어른 말을 들어야지. 떨어졌을 때 바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지금쯤 예가 아니라 결계 밖 묘지에 묻혔을 게다.”
이만하면 매번 사고를 쳐대는 녀석이라도 겁을 집어먹겠지 싶어 놓은 으름장 비슷한 것이었지만(게다가 반쯤은 사실이었지만) 유리의 반응은 노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잠시 놀란 눈을 크게 뜬 유리는 곧 생각났다는 듯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리가 들렸거든.”
“소리라니?”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내린 유리가 잠든 프렌 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정확한 모양인지, 잠투정인가로 이불에 볼을 부비는 옆얼굴에 감긴 눈이 하도 울어 퉁퉁 부운 것이 보였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처음에 머리를 다쳐 기절했을 때에도, 그 소리 덕분에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곤하게 잠들어 침대에 얹힌 자그마한 손에 금방 딱지가 앉은 할퀸 상처가 보였다. 아마 마물을 피해 뚱보를 억지로 안아 올렸을 때 생긴 상처이리라.
이상한 녀석이었다. 뭐하나 풍족하게 받은 것도 없는 주제에 그깟 고양이를 위해서 마물에게도 달려든다. 자기 상처는 깨닫지도 못하면서, 남이 아플 때는 제가 다칠 적보다 서럽게 울어 주었다. 겁을 내는 것과도, 소심한 것과도 다르다. 남의 나쁜 마음이나 속셈에 아랑곳하지 않고 뻗어지는 손은 오히려 절대적인 강함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미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다.
너는 그 마음으로, 다치고 상처 입으면서도 나를, 우리를 구해주고 있는 거야. 유리는 조용히 손을 뻗어 프렌 손등의 상처를 살살 매만졌다. 잠결에도 그 손가락 끝을 꼭 잡아오는 따끈한 손에 천천히 볼을 가져다 대면서, 유리는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지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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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일어나.”
그리 높지 않은 위쪽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기억에 있는, 그러나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기억 속의 그것은 보다 더 묵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끄응 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움직여 푹신한 베개에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목소리에 한층 짜증이 섞였다. <일어나라니까.>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오고, 뒤통수에 찌릿한 충격이 닥쳤다. 이번에는 유리도 짜증이 나서,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주위를 살피면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녘이었다. 잠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이다.
“나가서 놀다 오라고 했잖아.”
“이미 하루를 꼬박 샜거든?”
<으….>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면 온 몸의 관절이라는 관절에서 뚜둑, 뚜둑 하고 꺾이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깨워진 탓인지 아니면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뒷목이 뻣뻣하게 아파왔다. 온전히 일어나 앉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상체만 움직여 옆으로 돌아누운 후 턱을 괴고 올려다보면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진짜 25살의 나 맞아?”
얼굴 가득 한심해 죽겠어, 라는 표정을 하고서.
***
이야기는 만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다. 급한 의뢰들은 어느 정도 끝을 냈고 간만에 한가해진 오후 유리는 제도로 돌아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런 유리의 눈에도 제도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 곳곳에서 마핵을 대체하기 위한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선정되어 이곳 자피어스에서 시범 운행되었고 아직까지도 불편한 점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마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꽤 적응한 듯 했다. 황제의 배려인지 프렌의 출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랫마을에서도 이곳저곳 무너지고 허술한 곳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거리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며 기분 좋은 활기가 넘쳐났다.
유리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한참 느긋한 기분으로 보수되기 시작한 아랫마을의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좁은 골목 틈에서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로 막 쌓아놓은 참인 벽돌더미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던 ‘그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유리는 한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
‘그것’은 어릴 적의 유리, 적어도 유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던 유리는 곧 자각은 없었지만 실은 지금의 자신은 헛것을 볼 정도로 매우 피곤한 상태이며 재빨리 여관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 헛것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 또한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이! 거기 너!!”
뒤따라오는 목소리도 발소리도 모두 환청이다. 유리는 발걸음을 재게 했다. 걷는 모습은 산보지만 속도는 거의 전력질주인 꼴이다. 그런 유리의 반응에 약이 올랐는지 따라오는 발소리가 좀 더 빨라졌다. 아무리 체격 차가 있다고 해도 속도를 무시한다면 어디까지나 ‘걷고 있는’ 유리와 아예 전력으로 따라붙고 있는 ‘그것’의 거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칫,> 흘끗 뒤를 돌아 차이를 확인한 유리는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힐 것이라 예상하고 가까운 골목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한 숨 돌리려는 찰라,
“너 왜 도망쳐?!”
“?!”
어릴 적부터 아랫마을에서 숨바꼭질하며 자라난 몸이다. 특히 말썽을 저지르고 쏙 숨어버리기 일쑤였던 유리는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증축들로 꼬여버린 길과 골목들, 공간배분이 잘 못 되어 생긴 좁고 몸을 숨기기 쉬운 틈새들, 그 틈새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마을의 이곳저곳으로 빠르게 가로지르기 쉬운 샛길들에 대해서라면 아랫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프렌조차도 유리가 마음먹고 숨겠다고 작정하면 허탕을 치기 일 수였던 것이다. 진짜로 당황해서 말도 잇지 못하는 유리의 얼굴을 한순간 빤히 보던 ‘그것’은 곧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나.....?”
“그래서, 너‘도‘ 유리 로웰이란 말이지?”
“그래.”
“14살이고?”
“15살. ....이틀 뒤면.”
“아, 그러세요….”
<내가 지금 25살이니까, 10년 정도 전인가….> 유리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어릴 적의 자신이며, 어떤 이유인지 갑자기 ‘이 시간’으로 와버린 것 같다. 처음에는 영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이를 보던 유리도 녀석이 행크스 영감의 담뱃대를 숨겨 놓았던 일이며 프렌이 고양이 때문에 질질 짠 일 등을 줄줄 읊어대자 마지못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만 알고 있던 거리의 샛길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녀석이 어릴 적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설명이 된다. 그렇다 해도, 과거의 자신이라니. 유리는 묘한 기분이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난 모험으로 이미 자신이 전보다 훨씬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어설픈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 어린 ‘자신’의 말로는, 갑자기 눈앞에 빛이 확 하고 펼쳐지더니 여기에 와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는 것과 조금 다른 거리의 모습에 두리번거리고 있자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고. 어쩔 수 없이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어른’ 유리와 마주친 것이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치다니, 왠지 기분이 나쁘잖아.”
“네이, 네이.”
볼이 불퉁해져서 대꾸하는 아이의 모습은 단순한 투덜거림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 말 속에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으로, 필사적이었던 감정의 찌끄러기가 남아있는 것을 왠지 느낌으로 알았다. 어렸을 적의 자신은 이런 식으로 곧잘 감정을 감추곤 했던 것이다. 이런 걸 자각(自覺)이라고 하던가, 미묘하게 틀린 생각을 하며 대충 대답하면 아이는 그런 유리를 묘한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어른인 나, 기분 나쁜데.”
***
결국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유리가 두 명이 모여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서 일단 유리는 이런 일에 있어 제일 믿을 구석인 리타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다. 누구냐고 묻는 유리(작은 쪽)의 말에 유리는 대충 읊었다. <아스피오의 마도사야. 이름은 리타 몰디오.> 그 뒤로 뭔가 말이 더 이어질 거라 기대했던 모양인지 아이는 한참동안을 유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물론 유리(큰 쪽)는 그걸로 대화를 끝낼 참이었고 몇 걸음을 더 걸어간 후에야 아이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왜 그래?”
“…별로.”
겉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뚱한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유리에게는 아이의 머릿속에 온통 채워진 물음표들이 보이는 듯 했다. 모르는 척 정면을 보고 걷고 있으면 자신의 옆을 따라 걷는 어린 유리가 자신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인다. 그 행동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 씩 웃으면 아이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렸다.
“…뭐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 한마디에도 발끈한 아이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목까지 올라온 불만을 입 속으로 삼킨다. 유리는 다시 픽 웃었다. 다 자란 후에는 어릴 적의 자신에 대해 떠올려본 적도 별로 없고 더군다나 자기 자신과 대화 비슷한 것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실제로 눈앞에 어린 자신이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어린 외양 따위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르시스트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으면 무심결에 자꾸 놀리게 된다. 그런 유리가 영 못마땅한지 따라붙는 유리(작은 쪽)의 시선에 불만이 가득 섞여들었다.
우편국에 가서 대강의 사정을 담아 아스피오로 전서구를 띄우고 난 후 유리는 아직까지도 조금 뚱해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향후 거처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전에 묵고 있었던 하숙집에서는 이미 방을 비운다는 통보와 함께 남아있던 짐 몇 가지를 보내온 지 오래, 별의 포식 이후에는 길드 일이다 뭐다 해서 제도에 오래 머문 적도 없고 또 들른다 해도 프렌의 방이나 가까운 여관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훌쩍 떠나곤 했던 터다. 그렇다고 여관에 남겨 두자니 오늘 밤 외박 계획이 있는 유리는 그것이 영 껄끄러웠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눈치 챘는지 유리(작은 쪽)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난 마을을 둘러보고 올게.”
“엉?”
“어차피 그 리타라는 사람한테서 연락 오려면 좀 걸리잖아? 10년 동안 아랫마을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니까 그동안 좀 보고 오겠어.”
“뭐… 그래라.”
말을 마치자마자 별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자신의 감정은 죽어라 숨기는 주제에 눈치는 빨라 남의 기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도움이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어렸던 자신 그대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문득 유리는 막상 자신이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새삼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속을 긁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착잡해졌다. 그리고 상념의 끝에 문득 언제나 그 비슷한 이유로 화를 내던, 그리고 마침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던 애인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으나 곧 그 녀석도 그 비슷한 정도로 자신의 속을 긁어댔으니 따지자면 또이또이지, 하고 남은 자존심의 마지노선을 사수한 유리는 그대로 자신도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그랬던 것이 몇 시간 전, 어리긴 하나 쭉 아랫마을에서 자란 자신이니 별 문제 없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니 행여 해코지당할 염려도 없겠다 싶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신경을 끈 유리는 제도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함께 지낸 시간은 길다 하나 정식으로 마음 통한 기간을 생각하면 아직 깨가 쏟아지는 애인 사이여서 사랑스러운 얼굴은 봐도 봐도 늘 모자랐기 때문에 밤새 물고 빨고 엎치락뒤치락하고 나니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저도 모르게 까무룩 빠져들었던 단잠에서 깨워져 영 못마땅했던 유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이 녀석에게 프렌의 방을 알려줬던가, 하고 고민했다. 그것을 묻자 <왠지 네가 있는 곳은 알 수 있었어.>라는 어딘가 멍뎅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그나저나 왠 성? 귀족의 정부라도 된 거야?”
<설마 몸으로 벌어먹거나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쓱 훑고서 이어지는 말이 빈정거림치곤 묘하게 진짜로 걱정하고 있는 듯 한 말투라 유리는 그런 어린 자신을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15살 무렵부터는 유혹도 꽤 들어와서 생전 그런 쪽의 욕구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이 나이 먹고 꽃놀이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그랬던 일이 왜 이렇게 되었던가, 고민해봤자 온전한 제 사람과 따먹는 별은 어찌 단지 밤을 꼬박 새워 녹여먹어도 부족한 것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유리는 한숨만을 대신 내쉬었다.
“응… 유리?”
“내가 깨웠냐?”
“아니... 일어나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잔뜩 졸음에 취한 눈을 부비며 일어나 옷장 속의 새 옷가지를 꺼내 입는 애인의 뼈가 도드라지는 하얀 등을 잠시 만족스런 심정이 되어 응시하던 유리는 아까부터 아이가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마치 뭔가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저항이라도 하듯 벽에 딱 붙어 뒤로 벌린 양 팔로 창틀을 꽉 쥐고 있는 어린 자신을 발견하고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왜 저래??>
“유리? 거기 뭔가 있어?”
“…아니, 별로.”
“?”
아무래도 프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아쉬움인지 안심인지 입맛을 쩝쩝 다신 유리는 자신을 따라 시선을 둔 프렌을 향해 웃어주고는 누운 자세에서 손을 흔들며 애인을 배웅했다. 뭔가 이상한 유리의 태도에 프렌은 아직도 조금 의아한 눈치였으나 저런 태도라면 물어도 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곧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잠시 침묵이 맴돌다가 소란하게 깨졌다.
“너 미쳤어??!”
“뭐야, 갑자기.”
“저, 저건 프렌이잖아!!”
<역시, 몇 살이 되어도 알아보는구만.> 나름 건실한 자신의 감식안에 자부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큰 쪽)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는지 유리(작은 쪽)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너 그, 저 녀석이랑….>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걸려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문장을 완성한 아이의 반응에 유리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아직 하기 전인가.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하… 하다니.. 어, 어떻게 저 뭣도 모르는 녀석이랑…!”
“일일이 시끄럽네. 이쪽은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나니 그 뭣도 모르는 놈 계략으로 여장하고 무대에 올랐던 일이며, 죽은 줄 알았던 녀석 원수 갚는다고 새빠지게 고생한 일 등 여러모로 험난했던 여정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 유리(큰 쪽)는 <어차피 얼마 안가서 할 테니까 그렇게 요란 떨지 마>라는 중대한 사실을 누설해 자꾸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유리(작은 쪽)의 입을 틀어막았다. 혼란으로 질리다 못해 벌겋게 달아올라 입을 다문 어린 자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때 골머리 엄청 썩었었지, 나….“
일생을 걸쳐 등 줄기처럼 자라난 감정의 싹이 가슴께를 간질이던 시기였다. 언제 묻어두었는지 알 수 없어 모른척하던 연정이 하루가 다르게 뭉텅뭉텅 자라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 몇 번이고 벼락이 쳤다. 들킬 새라 덮고, 덮어도 덮은 그 아래를 뚫고 올라오는 눈 시리도록 찬란하고 원망스러운 그 끄트머리를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프렌과 몸을 섞었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단지 마음 한 구석에 감추고 묻고 살아야 하리라 여겼던 감정이, 간신히 이때까지 오는 데 오래도 걸렸다 싶어 아련한 기분이 든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금 웃었다. 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프렌의 공이다. 항상 도망칠 궁리만 했던 자신에도, 날선 말들과 냉담했던 태도에도 질리지 않고 온 몸으로 부딪쳐 왔던 것이다. 새삼 그런 애인이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영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아직도 망연자실해 있는 어린 자신에게 유리는 나직하게 덧 붙였다.
“...그 놈 조심해 임마. 만만한 놈 아냐….”
***
“바보라고 하지 마!”
“흥! 바보가 바보스럽게 바보바보하면서 바보짓하고 있는 바보 같은 광경을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해!! 몇 번이고 말해준다 이 바-보!”
“이이익...!”
<...뭐야, 이 바보 싸움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마물과 거기에 매달린 배에 감탄한 것도 잠시, 선실로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여러 가지로 굉장한 광경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껏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뒤로 유일하게 유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챈 라피드가 이쪽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앉은 자세에서 뒷다리로 귀 뒤쪽을 탈탈 긁었다. 리타가 까탈스럽게 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그래도 꽤 반격할 수 있게 된 카롤이 의외로 저 폭언을 받아치지 못하고 그대로 들어주고 있다. 물론 반격하지 않는 상대는 좀 봐준다, 따위는 먼 얘기인 리타는 그 성격의 괴팍함과 함께 자랑거리인 입담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이런> 피식 웃으며 거의 울상이 된 길드의 수령을 돕기 위해 걸음을 떼면 어린 자신은 또 묘한 시선을 유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보모야? 바쁘게 사네.”
“...뭐 그렇지.”
“대체 뭘 하고 사는 거야, 미래의 나는.. 저런 어린애들이랑.”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지만?”
“무슨 소리야,”
적당히 대답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리(큰 쪽)는 이어진 유리(작은 쪽)의 말에 덜컥 멈춰 섰다. <안제 누나가 그 때 아일 가졌다면 저 정도 나이일거라고.> 그 이름의 익숙함에 설마, 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아이는 어이없게도 조금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
“안젤라, 아랫마을 술집에서 서빙 하던 14살 연상! 뭐야, 너 설마 잊어버린 거야?”
<첫사랑이잖아!> 이번에야말로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 가득 의심을 채운-미래의 나고 나발이고 실은 이거 다 공갈 아냐?―아이를 보며 유리는, 잠시 자신의 첫사랑은 벌써 예전에 안젤라가 아님이 밝혀졌다는 사실과 어린 자신이 상당한 산술적 비약을 하고 있다는(혹은 리타, 카롤의 나이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 중 어느 것을 지적해줘야 할 지 고민했다. 덧붙이자면 안젤라가 처음 잔 날 임신했다손 치더라도 지금 시점에서 아이는 끽해야 10살 정도일 것이며, 그녀가 자신의 진짜 첫사랑과 닮은 것은 파란 눈동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 태풍이 불어치는 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자신의 첫사랑이 실은 상냥했던 D컵의 웨이트리스가 아니라 같은 남자, 그것도 현 시점 기준 20년 지기 불알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또 어떨까 싶어 유리(큰 쪽)는 잠시 망설였다. 이건 나르시시즘이나 자기방어적인 의미 이전에 남자로서의 재기 가능성이라고 할까, 여튼 좀 예민한 문제였다. 어쨌든 이런 유리(큰 쪽)의 갈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끝났다.
“유리, 그 꼬맹인 또 뭐야?”
“유리, 혼자서 뭘 그렇게 말하고 있어?”
눈앞의 광경에 싸움도 잊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 <뭐야, 넌 저 꼬마가 안보여?> <저긴 유리밖에 없잖아!> 다시 동시에 말을 꺼낸 두 사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고 시선을 받은 유리는 어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작은 쪽)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라.“
“뭐, 뭐야... 혹시 유령?!”
그 말에 반응이 가장 빨랐던 리타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걸음 물러섰다. 그런 리타를 보고, 다시 유리와 유리가 보고 있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번갈아 본 카롤이 어리둥절해서 중얼거렸다.
“뭐지 이 상황... 잘 모르겠어.”
***
“그러니까, 지금 유리 옆에 어린 유리가 있단 말이지?”
“엉.”
“유리와 리타는 걜 볼 수 있고?”
“나한텐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데.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뭔가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네….> 둘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유리는 아직까지도 탁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붙듯이 앉아있는 리타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작은 쪽의 유리가 자신에게는 보이고 카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이쪽으로 눈을 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리타에게 설명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카롤이 말을 이었다.
“그치만 어린 유리라면 유령은 아니잖아? 유리는 살아있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쪽의 해석도 있단 말이야!” 1
그 말에 소리를 빽 지른 리타가 반사적으로 이쪽을 쳐다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 대고 있던 어린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아이가, 실은 조금 상처받았다는 것을 눈치 챈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 대로라면 리타, 지금 이 상황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긴 하다는 거야?”
“…어느 정도는.. 원인 같은 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럼 부탁해, 리타. 지금 믿을 만한 건 너 뿐이다.”
“에...”
그 에누리 없는 부탁의 말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의 유리는 이런 식으로 남에게 의지하거나 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가슴을 울려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카롤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고 과연 리타도 이 말만은 외면하지 못했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리타는 발갛게 붉어진 얼굴로 <그, 그럼 일단 저 녀석이 맨 처음 온 장소를 조사하게 해줘. 거기 가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등을 중얼중얼 말했고, 그런 리타의 시선이 이번에는 똑바로 어린 유리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큰 쪽의 유리가 조금 웃었다.
***
중간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러 갔던 쥬디스와 레이븐, 성을 들렀던 에스텔이 합류해서 또 한바탕 소요를 치르고 나니 결국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얻은 소득이란 어린 유리의 호칭뿐이었다. 어쨌든 둘 다 유리인 셈이니 부르기 불편할 것 같다는 에스텔의 역시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제안으로 벌어진 토론은 사실 그날의 시간을 낭비한 가장 큰 범인이었고 덤으로 몇몇 인물에게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을 남겼다. 그 인물 중 하나인 유리(작은 쪽)는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느낌을 곱씹으며 뚱해 있었다.
그런 유리(작은 쪽)를 영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서 유리(큰 쪽)는 머리 뒤로 팔짱을 껴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꼬맹이, 유-쨩, 고스트(유령) 유리까지는 그럭저럭 얌전히 듣고 있었던 유리(작은 쪽)도 유리 Jr.에 이르러서는 무심결에 표정을 바꿨다. 마침 쥬디스가 <어머, 시기적으로 보면 저 쪽(어린 유리)이 먼저일 텐데?> 라며 살짝 말려주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물론 큰 쪽의 유리로써도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입장에서 저렇게 큰 주니어가 생기는 것은 사양하고 싶긴 했다. 결국 어린 유리의 호칭은 유-쨩으로 대강 통일되었지만 두 유리에게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유리의 경우에는 특히 연하의 동료들에게서- 듣는 그 호칭은 유리 Jr.보다 훨씬 더 낯간지러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쥬디스가 준 것이 도움이었는지 어땠는지는 애매해져버렸다. 이러저러한 대화의 흐름에 말려 ‘유-쨩’을 막지 못했던 유리는 앞으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동료들에게 유-쨩을 데려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호칭 말고도, 동료들이 그들에게 준 것은 또 있었다. 여러 가지로 지친 몸과 마음과 또 하나의 자신을 동반해서 성 근처의 여관으로 돌아가면, 방 안에는 영광스럽게도 현 제국 기사단장이 친히 왕림해 있었다.
“소식 들었어, 유리. 어린 유리가 보이게 됐다면서?”
이 아저씨가 한창 얘기 중에 급히 올려야 할 보고가 생각났느니 어쩌니 하더니 이런 거였나, 아까 느꼈던 사소한 궁금증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프렌은 유-쨩과 구면이었다.
“아침에도 있었어. 넌 못 본 것 같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구나. 몇 살 정도야?”
“14살이라고 하더라.”
<14살의 유리라, 보고 싶네~> 따위를 말하며 방글방글 웃는 애인은 뭐든지 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유리의 입장에서 유-쨩이 프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행스러웠다. 얼핏 생각하면 어릴 적부터 다 보고 자랐으니 지금에 와서 저런 모습을 본대도 별 문제 없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지금도 프렌을 앞에 두고 안절부절 못하는-그래봤자 겉은 뚱한 무표정이지만-저 어설프고 풋풋한 자신을 지금의 저 프렌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은 유리에게 하기도 버거운 상상이다. 어렸을 때야 프렌이 워낙 둔해서 쉽게 숨길 수 있었다지만 이미 볼장 못볼장 다 봐서 유리 한정으로 어느 정도 눈치가 깨이기 시작한 프렌에게 저 녀석을 보였다간 저 때부터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를 들켜버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유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프렌은 여관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제 저녁에 체크인 한 이후로 들어온 적이 없는데다 유리가 갖고 있는 짐이란 것도 단출해서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 안의 모습에 약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과 유리 외에 다른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의 일로 이미 자신에게는 어린 유리가 완전히 안 보인다는 것을 이해한 프렌이었지만 그래도 남들은 다 볼 수 있는(그렇지는 않다) 연인의 어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꽤 서운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유리, 지금 작은 유리 이곳에 있어?”
“엉? 그래.”
“어디쯤이야?”
“저-쪽.”
유리는 태연하게 방 안 침대 모서리를 가리켰고 사실 그 방향은 지금 유-쨩이 서있는 책상 옆과는 거의 반대방향이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표정을 구겼던 유-쨩은 곧 프렌이 유리가 말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인사하기 시작하자 멍뎅한 얼굴이 되었다. <안녕, 유리. 나 프렌이야. 지금은 유리랑 동갑인 25살. 물론 나한텐 네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처음 물어올 때부터 이미 그 의도를 알았는지 큰 쪽의 유리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제국 기사단장이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말을 걸고 있었다. <으와... 진짜 미래의 나 성격 나빠….> 물론 자신도 종종 프렌에게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는-다분히 편파적인 기억을 더듬은 후 유-쨩은 지금도 ‘나는 제국과 길드의 하늘에 우러러 거짓 하나 말한 적 없어요~’라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고약한 거짓말에 속아 한 점 의심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전혀 엉뚱한 곳에다 녹을 듯 미소 짓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프렌이라니. 10년의 세월에도 변함없이 순진하고, 착하고, 귀여운(것 같이 느껴지는) 친우의 모습에 왠지 모를 조바심을 느끼면서-윽, 왜 저 녀석은 변한 게 없는 거야!― 덤으로는 저 달콤한 미소가 받는 사람 없이 허공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유-쨩은 저도 모르게 프렌이 향하고 있는 쪽, 침대 모서리로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얼굴까지 발개진 유-쨩이 프렌의 미소를 정면으로 받는 바로 앞까지 오기 전 유리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아, 프렌. 그 녀석 방금 문 앞으로 옮겨갔어.”
“?!”
“그래?”
프렌이 즉시 몸의 방향을 틀어 다시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등 갑주와 마주하게 된 유-쨩의 눈에 그렁거리는 것들 중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어이없음과 분노로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유-쨩을 흥흥 웃으며 모른 척 하는 유리의 뒤로 받는 사람 하나 없는 대화를 늘어놓는 제국 기사단장의 목소리만 방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
연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유-쨩에 대한 몇 가지 신체검사와 아이가 발견된 장소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유리는 라피드와 함께 원래 리타의 몫인 길드의 의뢰를 처리하러 수도 근처를 돌아다녔다. 검사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을 소비했고 그날의 검사가 끝나면 아이는 유리의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검사 후에는 으레 리타가 반사 신경이 어떠네, 에알의 폭주가 어떠네 떠들어댔지만 귀에는 잘 남지 않는 말들이었다. 키가 큰 수풀 밑에서 자라는 약초를 모아야 하는 의뢰는 어렵진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리는 아예 텐트와 취사도구를 챙겨 돌아다녔고 거의 매일 밤을 혼자 여관방에 남아 있을 유-쨩을 걱정한 길드원들은 아이에게 연구실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익숙하지만 낯설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어둑한 거리를 걸어 여관방으로 돌아가면 닫힌 문에서는 작게 불빛이 새어나왔다.
톡, 톡 문을 건드리면 곧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막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연 프렌이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방 안쪽에서 쏟아지는 등잔빛 같이 노랗고, 따스하게 반짝이는 웃음이 그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공간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서 와, 유리. 검사 힘들었지?”
유-쨩에 대한 연구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자 리타는 맡고 있던 의뢰를 유리에게 부탁했고 유리는 당연히 수락했다. 의뢰품인 약초는 전문가 외에는 감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라피드의 후각은 이미 약초 찾기에 그 효능을 검증받은 바 있었다. <저 개 진짜 잘 찾던걸? 그래봤자 찾았던 약초는 어느 바보가 다 잃어버렸지만.>―처음에 둘이 싸우고 있었던 이유는 이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유리가 꽤 자주 방을 비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때부터 프렌은 유리의 여관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 순찰 가기 전에, 점심 이후 짧은 휴식시간에, 또는 업무를 모두 끝낸 늦은 저녁에. 귀족의 삶엔 별 관심이 없었던 어린 자신의 눈에도 기사단장의 업무는 그리 한가한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이곳에 와봤자 프렌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프렌은 틈날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과 이 세계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 거 혼잣말이랑 다를 거 없지 않냐구….> 한숨을 폭 내쉰 유-쨩은 빈 침대에 엎드리듯 누워 조근조근 이어지는,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여기 없더라도 프렌은 알지 못하고 이곳에 찾아와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자신을 위해.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 어느 곳에, 어느 시간에 있어도 결국 자신은 다시 저 녀석 곁으로 돌아가리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쨩이 나타난 지 이레 째 되는 맑은 오후에도 프렌은 어김없이 유리의 방을 찾았다. <유리, 있어?> 검사도 거의 막바지여서 일찍 방에 돌아와 있던 유-쨩이 침대 기둥을 똑똑 두드리자 프렌이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프렌이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한번 출렁하고 움직였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기둥을 두어 번 더 두드리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던 프렌이 빙그레 웃었다.
“미안, 유리.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어떤 일??>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낸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 말보다 조금 늦게 반응하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프렌의 이마 위로 조금 길게 자란 앞머리가 얇게 흐드러졌다. 조용한 방안에 자신과 사락거리는 옷감 스치는 소리 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싸늘함에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프렌이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 유리….”
<귀여운 모습의 유리를 보면 기운이 날지도.> 말에 덧붙인 웃음이 외려 부서질 것 같아 깜짝 놀란 유-쨩이 몸을 기울여 프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로 조금 그늘이 진 얼굴은 어쩐지 어릴 적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고민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 만들어내는 듯한, 조금 쓰게 웃는 표정. 유-쨩이 알아온 프렌은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아니었다. 외려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웃고, 울고 혹은 화를 냈다. 그 솔직함이 부럽고, 때론 화가 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소중한, 그 웃음을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었던 친우는 어느새 훌쩍 커버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때에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 녀석은…> 어느 샌가 자신이 부쩍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리에 없는 또 하나의 자신을 탓하며 조금 더 다가서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혀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깨닫지 못한 듯 뺨으로 드리워진 채인 길쭉한 속눈썹의 그림자가 물속을 휘젓듯 어린 유리의 마음에도 선연하게 파문을 그었다. 시선을 내리면 어릴 적보다 조금 색을 잃은 것 같은 창백한 입술이 애처로웠다. 닿을 수 있다면, 축 쳐진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고,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네게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네가 다시 웃는다면.
천천히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멈추고, 또 다시 흔들린다. 숨조차 잊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단지 닿기 위해서 다가가는 순간은 시간도 멎은 듯 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
“…유리?”
막 닿을 참이었던 입술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방금 나 무슨...?!>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당황한 유-쨩이 프렌 쪽을 쳐다보았지만 프렌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서 프렌이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면 큰 쪽의 자신이 막 문을 연 채인 자세로 멈춰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유리.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아니... 좀 심란한 장면을 봐서.”
“심란한 장면?”
고개를 갸웃한 프렌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척척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 유리가 침대 앞에 서서 당황했는지 아까 뒤로 물러난 자세 그대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리타가 검사 결과 나왔다고, 들으러 오라고 하더라.> 겨우 정신을 차린 유-쨩이 꼼지락거리며 침대에 내려올 때까지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듯 한 애인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본 유리는 곧 프렌에게로 고개를 숙여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
“에, 유리?”
“그런 표정 하고 있으면 누가 잡아먹어도 모른다.”
“…이런 짓 하는 거 유리밖에 없다구.“
<네, 정답.> 애인의 투덜거림을 대충 넘기며 모르는 척 유-쨩의 얼굴을 내려다본 후 픽 웃는 얄미운 얼굴은 분명 확신범이었다.
***
“‘뭣도 모르는 녀석’하곤 안하는 거 아니었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진 그 말에 그때까지도 복잡한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던 유-쨩이 고개를 들어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앞서 가고 있는 자신의 등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길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낀 유리는 뒤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게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본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낯 뜨겁지만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유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자신에게 질투라니 뭐가 뭔지 자신도 잘 알 수 없게 되어서 그저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옮기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으면 뒤에 따라와야 할 작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꽤 멀어진 뒤에야 깨닫고 돌아보면 어린 자신은 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래?”
“엉?”
“항상 이런 식이냐고. 너는 길드일인지 뭔지로 바쁘고, 프렌은 혼자 힘들어 하고 있어.”
“......”
“저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어. 미래의 나인 ‘너’라도, 지금 프렌이 떠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지.”
“.......”
“너는 무엇을 위해 프렌 곁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아니 오히려 그 앞날에 짐이 될 뿐이라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 녀석이 걸어갈 길이 빛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자신의 입장이며 아무데도 고할 수 없는 이 하잘 것 없는 마음일랑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도 좋았다. 이미 수백, 수천의 밤을 반복했던 생각들이 어린 자신의 눈 속에서 곧게 반짝이며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각들은, 실은 지금도 마치 어딘가에 걸린 등불이 켜지듯 떠올라 머릿속에서 깜빡거리곤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안쪽의 불꽃이 속삭인다. 실력도, 인품도, 교우관계도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할 제국의 기사단장. 세상 어디서나 바람결을 타고 들려올 그 이름을 단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귓가에 담는 것만으로, 그 아련한 울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렇게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 와서 그 녀석을, 모든 것을 놓을 순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멈춰선 채인 아이에게로 다가가며, 유리는 마치 작은 등불을 불어 끄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잖냐.”
***
“…그러니까, 두 시공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저 꼬맹이가 여기 와 있는 거야.”
“....어?”
“....하?”
두 유리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내자 리타의 눈초리가 더욱 치켜 올라갔다. 아까의 미묘한 잔재로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다소 멀어져있던 두 유리는 지맥과 에알의 응축, 그에 따른 급격한 중력증가 현상과 시간왜곡, 인간 정신의 분류에 대한 리타의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설명에 사이좋게 패배했다. 거의 탁자에 엎어지다시피 한 두 사람을 소리 없이 노려보던 리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작은 동작에 며칠 밤샘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유리는 새삼 선실 책상이며 바닥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들과 복잡한 술식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종이들, 실험도구들을 둘러보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탁자로 다가간 리타는 그 위에 놓여있는 종이들을 한참동안 뒤적여 어느 한 장을 빼내고 의자 위로 굴러가있던 펜을 주워 종이 위 어떤 구절에 크게 동그라미를 몇 번 친 후 그것을 유리들에게 내밀었다. <자.> 종이 위에는 당최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긴 계산식과 방금 동그라미가 쳐진 12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통로들의 역할이 바뀌는 주기는 약 120시간. 즉, 120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골목으로 가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과연, 천재마도사소녀.> 자신의 눈에는 그저 잉크 흔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하려고 노력하며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 유리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흘끗 들여다본 후 이미 이해는 포기한 듯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선실 안에 한순간 침묵이 오간 후 아까부터 책 더미 속에 반쯤 묻혀있던 카롤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120시간 뒤라면, 오늘 저녁 쯤 아니야?”
***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말도 안 돼!”
“그도 그럴 게 밤낮없이 조사했는걸, 리타.”
“에스텔이 돌아갈 때 알려달라고 했는데!”
“일단 지금은 뛰어!”
네 사람은 정신없이 좁은 골목길을 달려 내려갔다. 제도 내에는 피에르티아 호를 수용할 만한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둔 곳에서 유-쨩이 처음 발견된 아랫마을의 골목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아늑한 저녁 분위기에 잠겨있던 마을에 작은 소란이 일고, 유리 일행이 지나가는 뒤마다 쌓여있던 먼지며 막 걷고 있는 빨랫감들, 마주친 사람들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아랫마을의 지리를 잘 아는 두 유리들이 선두를 달리자 카롤과 리타가 따라 붙었다. 길이 익숙하다 해도 어린 몸에 이 속도는 버거웠는지 숨을 꽤 할딱거리면서 유-쨩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왜, 그 골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애초에 통로가, 연결된 곳이니까! 다른 장소보다, 돌아가기가...!”
“그거, 그 얘기 아냐? 이미 구멍이 나 있으니까, 으, 벌레 구멍같이….”
뭔가 싫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말하면서도 진저리를 치는 카롤을 본 리타의 표정이 구겨졌다. <벌레 구멍... 넌 꼭 말을 해도...!> 그 말에 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머리 위를 사수한 카롤이었으나 그가 기대했던 대로의 응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움찔해서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앞을 올려다보자 눈앞에 아직 보수를 덜 했는지 벽돌로 반쯤 막힌 벽이 펼쳐졌다. 그 벽 너머로 뭐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게 ‘보였’는데, 그 묘하게 단절된 것 같은 공간의 영향인지 마땅한 통로도 없는 골목에 바람이 몰아쳐 쌓여있던 벽돌이 덜걱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리타, 저거냐?> 골목에 쌓여있는 입자가 작은 부유물들이 주위를 떠도는 것을 눈에 들어가지 않게 들어 올린 팔로 가린 유리가 휘청거리며 묻자 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옆으로 시선을 향하자 다른 세 사람과는 다르게 무섭도록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유-쨩이 보였다. 거의 혼자서 태풍의 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쨩이 바람의 기세에 넘어지지 않도록 유리는 반사적으로 아이의 어깨를 받쳤다. 앞 쪽의 빨아들이는 힘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선 유-쨩이 어깨를 받치는 유리의 손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머리채가 바람에 날려 정신없이 흔들렸다. <.....해...!>
“.....뭐?”
“그 녀석 잘 부탁한다고! 혼자 내버려두지 말란 말이야!”
“너 말야,”
<누구한테 그런 말 하는지 알고 있냐?> 말을 꺼내는 찰라 정면에서 몰아친 바람에 숨이 턱 막혀 반쯤 소리를 꺼내다 만 유리가 컥컥거리자 유-쨩이 상황도 잊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또 다시 바람이 불어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잔뜩 먹은 유-쨩이 퉤퉷 입맛을 다신 후 성가신 머리를 붕붕 흔들었고 그 직후 눈이 마주치자 두 유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뒤를 받치는 든든한 팔에 의지해 기운을 낸 유-쨩이 벽 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안가서, 따라 잡을 테니까!”
어린 유리가 유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것과 동시에 눈앞의 빛이 증발해버리는 것처럼 그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뭐야? 돌아간 거야?> 바람 때문에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있던 카롤과 리타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탁탁 매무새를 정리하며 골목 안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공중에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저녁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가라앉는 골목 안에서 유리는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어린 유리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린 자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유리는 입 꼬리를 끌어 당겼다.
톡톡, 두들기는 소리에 버릇처럼 문을 열었던 프렌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발견하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약간 삐딱한 자세로 문 앞에 서 있었던 유리가 인사를 건네자 금세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그래... 작은 유리, 돌아갔구나.”
“방금 전에. 너도 부를 껄 그랬나?”
“아니야. 꽤 아슬아슬했었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아무리 봐도 조금 서운한 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아 유리는 잠시 어린 유리가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얼마 안가서, 라고 했겠다, 그 버릇없는 녀석.> 그 작은 중얼거림에 또 다시 의문을 표시하는 프렌을 잠시 바라본 유리는 그 곁으로 다가와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후 손바닥으로 혈색 좋은 뺨을 어루만졌다.
“커다란 나로는, 불만이야?”
투정인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유혹인 것도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 프렌은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술을 겹치며 프렌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 이 유리가 좋아.> 그 말의 달콤한 울림에 아찔할 정도로 만족감을 느끼며 유리는 눈을 감았다.
‘아직 백 년은 빠르다,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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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주의
창문은 잠겨있었다. 기사단장 집무실의 창틀에 올라앉아 유리는 다시 창살을 흔들어보았다. 빈틈없이 잠긴 창문은 덜걱덜걱 소리를 냈다. 따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전에 힐끔 들여다 본 안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로써는 드물게 허탕 질이었다.
<거 희한하네. 요 계집애가 어딜 갔담.> 얼마 전 제국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프레나 시포- 통칭 프렌이라고 한다―는 최연소, 그리고 최초의 여성 기사단장이라는 파격적인 수식어에 걸맞게 그 군공 또한 엄청났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업적들이 거의 다 그렇듯 가만히 앉아서 얻어진 것들은 아니었다. 소대장 시절부터 전 기사단장의 심복으로 온갖 국가의 실질적인 대소사들을 도맡았고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후부터는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은 줄었지만 대신 집무실에 앉아 행정적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제국 곳곳에서 날아온 결재 서류들은 그 끝을 몰랐고 따라서 언제 찾아가든 유리는 책상에 반듯이 앉아 서류에 날인하는 프렌의 작은 등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도시 방위 등을 이유로 출동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병영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보니 오늘은 그런 이유도 아닌 듯 했다. 슬슬 궁금해진 유리는 그 근처를 서성이다가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오, 사과머리.”
“위칠입니다!”
유리는 안경을 치켜 올린 작은 마도사가 눈을 흘기는 것을 못 본 척 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미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유리는 위칠의 이름을 기억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동안 그 얄미운 얼굴을 바라보던 위칠은 한숨을 폭 쉬었다.
“단장님 뵈러 오셨나 보네요.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엥? 무슨 얘기?”
“단장님 오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몸이 안 좋아지셔서.”
“뭐?”
<아파? 그 녀석이?> 그 얼빠진 얼굴에 위칠은 한순간 좀 꼬시다는 생각을 했고 황급히 고개를 붕붕 돌려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자세한 건 자기도 잘 모른다, 오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긴 했다, 물어 봐도 별 일 아니라고 하시긴 했지만 따위를 주워섬기던 위칠은 유리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걱정되시면 찾아가 보시는 게 어때요?”
“....엉?”
“아마 방에 계실 텐데. 한 번 가보세요.”
“어 그래.”
아무리 좋게 들어도 건성인 게 분명한 대답을 한 후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는 유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위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만보가 점점 잰걸음이 되고, 종국에는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유리가 아는 한 프렌은 그 외모야 어떻든 한 겨울에 팔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녀도 감기 한 번 앓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뵈도 요령이 꽤 좋기 때문에 운신이 곤란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적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얌전히 침대에나 누워있을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랬던 프렌이 이런 대낮부터 조퇴라니. 유리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프렌, 있냐...?”
밖은 화창하니 아직 밝은데도 불도 켜지 않고 커튼까지 내려 어둑한 방 안에 문이 열리자 기다랗게 빛의 공간이 생겼다. 연 문을 다시 소리 나지 않게 닫은 유리는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동안에 심장이 마치 튀어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렸다.
커다란 침대 위에 프렌이 힘없이 누워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뱉는 숨결의 뜨거움이 침대 곁에 몸을 낮춰 앉은 유리의 뺨에 와 닿았다. 힘겹게 숨을 쉴 때마다 이불에 감싸인 얇은 몸이 약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프렌?”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며 유리가 속삭이자 프렌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길쭉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유리의 손가락에 스쳤다.
“유...리...?”
“그래... 나야.”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유리는 프렌의 이마와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뭐라 말할 기력도 없는지 다시 눈을 감고 유리의 손길을 느끼는 프렌에게서 기사단을 당당하게 호령했던 제국 기사단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서 유리는 순간 울컥했다. 뺨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더운 숨을 내배앝는 입술을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얇게 거스러미가 인 입술은 작고, 매우 뜨거웠다.
“무슨 일이야.. 너 왜 이렇게 됐어?”
“....별 일 아니야….” “이게 별 일 아닌 녀석의 얼굴이냐?”
대답하는 프렌의 목소리가 꺼질 것 같이 가냘파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유리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멍한 눈으로 그런 유리를 올려다보던 프렌은 갑자기 아픔이 느껴지는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 프렌의 약해진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리는 어쩔 줄을 몰라 이불 밖에 나와 있는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없이 손 안에 들어찼다. 그 느낌마저도 영 신통치 않아 유리는 더럭 겁이 났다.
“많이 아파? 에스텔... 에스텔을 부를까?”
“아냐, 괜찮아...”“너...!”
“이건 치유술이 듣지 않는 걸….”
“뭐?”
놀라 고개를 든 유리의 눈에 천천히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가리는 프렌이 보였다. 그 상태로 눈만 쏙 내놓은 채 이불을 덮어쓴 프렌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려 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그.... 생리통이야….>
순간 유리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생리통? ...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 거?> 프렌이 창백한 얼굴에 발갛게 홍조를 떠올리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는 제국 제일의 얼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훨씬 나중 일이었다. <뭐야... 죽을병이 아니었잖아..> 급하게 찾아온 안도감과 탈력에 내뱉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프렌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유리는 모르겠지만 이건 이거대로 죽을 정도로 아프단 말이야.”
“그러냐... 그래도 너 옛날엔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잖아.”
“요새 들어 심해진 것 같아... 근데 그걸 유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
자라난 환경 상 그리고 이것저것 부차적인 이유로 유리는 꽤 이른 나이에 동정 딱지를 뗐다. 그 상대는 대개 연상의 여인들이었고 그녀들은 어린 유리에게 직접적인 관계 말고도 여러 가지 성에 대한 지식을 꽤 자세하게 가르쳐주곤 했다. 그 중에는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해준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는 언젠가 사귀게 될 여자 친구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며 유리에게 한 달에 한 번 여성이 느껴야하는 아픔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아픔을 조금 덜기 위한 여러 가지 처방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후 프렌을 볼 때마다 유리는 가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때가 되어도 프렌은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프렌이 아프지 않다면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유리는 그 지식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프렌이 이렇게 다 죽어가는 병자 꼴을 하고 누워있으니 유리로써는 다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있다가 없다가 그러는 게 어딨냐.>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 프렌이 다시 배를 잡고 얼굴을 찌푸리자 유리는 다시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려봐, 내가...”
희미한 기억을 뒤져 여자가 했던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려 애쓰며 유리는 다시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아픔을 덜어주는 게 뭐라고 했더라. 이것저것 들은 것은 많았으나 너무 오래되서 지금 생각나는 것은 생강차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물과 생강이 들어간다는 것 빼곤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일단 생강이라도 가져올까 싶어-유리도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몸을 일으키면 프렌이 열이 올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갈 거야?”
그 모습이 너무도 작고, 약해진 초식동물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든 유리는 다시 몸을 숙여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기억도 확실치 않은 그깟 생강 하나로 뭐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파서 절절매는 프렌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불 위로 프렌의 배 부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힘들어하는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니, 안타까움이 흘러넘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쓰다듬고 있으면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프렌이 아이처럼 웃었다.
“유리.. 오늘 이상하게 상냥하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언제나 상냥해.”
“응... 상냥한 유리.”
사랑스럽게 속삭이며 눈을 감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후 하루 종일 아픔에 시달려 지친 프렌이 조용히 잠에 빠져들 때까지 유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비교적 상관의 사정과 생강차 레시피를 잘 알고 있던 충실한 부관 소디아노가 자신이 끓인 생강차와 함께 사이좋게 식어가고 있었다는 것은 안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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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얘기가 나온 것은 약 두어 달 전 어느 날, 하루 종일 화창하니 밝았던 하늘에 빨갛고 노란 노을이 고운 염료처럼 풀리기 시작하던 오후였다. 마침 오랜 여행 끝에 제도에 막 돌아온 유리는 문득 기사단장님 집무실 창가에서 보는 노을도 이같이 곱겠거니 했고 내친 김에 오랜 친구이자 새로운 애인의 얼굴이나 볼까 싶어 성벽을 타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서류업무를 막 마무리 지은 터인 프렌은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반겼다.
처리할 서류가 얼마 안 남았으니 잠깐만 기다리라느니, 오랜만에 둘이서 한 잔 마시러 가자느니 하는 대화가 오간 끝에 유리는 언제나 그렇듯 기사단장 집무실의 커다란 창문에 한 다리 걸치고 그 위에 팔 한 짝을 떡하니 얹고는, 소디아가 우리 단장님 업무로 피로하실 테니 모쪼록 이거 드시고 옥체보존하소서 하고 진상한 허브 프레시 어쩌고 캔디를 까작까작 씹으며 프렌을 기다렸다. 유려한 노을빛에 젖어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애인의 모습은 오랜 만에 본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퍽 사치스럽고 아련한 것이라 나른한 기분에 젖어있던 유리는, 그래서 프렌의 질문을 알아듣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온 길드 자금, 고아원에 보내고 있다면서? 카롤한테 들었어.”
“....어? 뭐어.”
“일전의 그 곳이지? 고아원이라는 곳.”
“아아.”
유리가 자금을 보태고 있는 고아원은, 본래는 길드 해흉의 발톱의 수령이었던 예거가 후원하고 있었던 곳이다. 얼마 전 후원자를 잃게 되어 사정이 상당히 곤란해졌으나 금세 또 다른 후원자를 얻어 지금은 꽤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원자가 유리였구나, 하고 미소 짓는 프렌을 흘끗 보고 유리는 대충 말을 내뱉었다.
“뭐,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여기까지만 말해도 될 것을, 거기까지 안다면 보스에게 다 들었으려니 하는 생각에 한 마디를 더 보탠 게 화근이었다. 처음에 지나치듯 들른 이후 고아원에 다시 간 적도 없으며 자금은 사람을 시켜 익명으로 전달하게 한다는 유리의 말을 들은 프렌은 한순간 조용히 침묵했고 그 다음에는 <그렇구나> 정도로 대답했다. 이후 마시러 간 술집에서도 프렌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고아원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전까지 유리는 그에 대한 화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다시 얘기가 나온 게 일주일 전, 축일을 얼마 앞두고 불쑥 프렌이 고아원에 찾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꺼낸 것이다. 그간 질리도록 들은 말도 있고 이번에는 특히 출처도 모르는 돈을 쓰는 입장을 생각해봐라,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지 않겠느냐, 이번 축일에 일손이 필요하다하니 자연스러운 기회가 될 거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 대기에 그만 <오냐, 간다, 간다고!>하고 말을 해버렸다. 그 다음에도 연극이 어쩌고, 배역이 어쩌고 귀찮게 주워섬기는 것을 아무리 마음이 복잡해진 유리가 건성건성 넘겼다기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프렌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고아원에는 축일을 맞아 연극 준비가 한창인데다 급하게 배역이 부족하다고 해서 부탁을 받았고 그렇다면 아무리 사면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상금 벽보까지 나붙었으니 외모에 조금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끌려간 곳이 무대 옆 조그마한 탈의실이었다. 변장, 이라고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지나치게 싱글벙글해 뭔가 수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프렌 주제에, 하고 다소 방심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연극이라면 전에 한번 한 경험도 있겠다, 기껏해야 부직포로 만든 원통을 쓰고 나무1이나 맡을 줄 알았던 배역이 사실은 주연인 ‘만월의 아이’ 역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금 현상수배범 신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즉 저 얄미운 웃는 얼굴에 창파인을 먹여줬으리라.
일은 그렇게 됐다 쳐도-,
‘...세상에 180cm짜리 여자애가 있을까 보냐…….’
아차, 하는 사이에 무대로 떠밀려 올라간 유리는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 자락을 뒤적이며 엉거주춤 무대에 섰다. 반사적으로 무대 앞을 봐, 그 주위에 빙 둘러진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들과 꼼짝없이 마주친 유리는 감전된 것 마냥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고아원의 아이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몇몇도 구경하러 온 것인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유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을 느꼈다.
생각할수록 흉악하고 악랄한 계획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 비해 그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평소라면 벗은 옷 제대로 개어놓으라며 쨍알쨍알 잔소리하기 바쁠 그 손모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며 <유리 체격은 나랑 비슷하지? 응?>이라며 실실 웃을 적에도 그랬고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에스테리제 님의 동화책이 새로 나왔어, 내가 읽어줄게.>라며 자신을 무릎에 누이고 애들 동화치곤 묘하게 매번 인물의 대화 밖에 없는 책을 달달 읊을 때도 그랬다. 이건 뭐 동화책을 읽어봤어야 이상한 것을 알지, 들을 적에야 저가 어릴 적에 동화책 읽어준 사람도 없어 나이 스물이 넘어가도록 제대로 아는 동화 한 편 없는 것이 가엾고 애잔해서 그러는가 보다 싶어 얌전히 앉아 책 읽어주는 애인 무릎에 괜히 볼 한 번 더 부비고 했지만 그 책이 실상은 이 연극의 대본이었던가. 그 증거로 고아원 원장님이 혹시 애들 대사 잊어먹었을 때를 대비해서 흔들고 있는 하얀 판때기에 쓰인 대사는 지나치게 눈에 익숙했다.
게다가 이 꼴이 다 뭐냐. 배역 맡은 아이가 급하게 못 오기는 무슨, 그 아이가 키 180이 넘는 우량아일 리는 없으니 장신의 남자 몸에 맞게 수선된 보라색 모슬린 드레스에 성인의 어깨까지 덮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베일은 처음부터 자신의 몫으로 정해져있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는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게 베일을 기울여 얼굴을 가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두고 보자, 이 사기꾼 기사단장 놈아. 내가 이거 끝나고 네 놈 고 손모가지며 가증한 입술을 씹어 먹지 않으면 유리 로웰이 아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기사단장 추궁, 구타, 능욕(!)계획을 세우고 있던 유리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묘하게 프렌을 닮은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에 긴장한 모양인지 긴장과 공황으로 하얗게 질린 아이는 유리가 정해진 대사를 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반복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그 목소리가 거의 반 울음이라 유리는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주인공 이름이 유리아나냐고…….’
이 정도 되면 분노고 뭐고 허탈감이 들어 막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 유리는 자포자기 한 눈으로 자신의 상대역을 응시했다. 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그에게 말을 건네(려고 노력하)고 있는 아이는 극 중 주인공의 한 사람인 리리의 샛별이다. 그리고 유리 자신은 그 여동생인 만월의 아이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세계를 구한다는 전설이 이 연극의 줄거리였다. 방금 전까지의 전개에도 바로 앞의 두 줄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한 가득이었지만, 거의 울 듯 한 얼굴의 아이를 보며 일단 지금은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연극 중이며 이 연극을 엉망으로 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에 초점을 모은다. 유리는 기합을 넣었다.
“오... 오라버니.”
“사람들이 걱정되어 울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네에. 이대로라면 모두 죽어버리고 말 거에요.”
“울지 말거라, 유리아나. 우리가 힘을 합쳐 모두를 지키자!”
“네 오라버니. 저 힘낼게요.”
다소 심한 국어책 읽기 어투에 관객들은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유리로써는 그것이 한계였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묘하게 짧은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숭숭 들어 다리가 추웠고 잔뜩 부풀린 소매 부분은 움직이기도 버거워 서러웠다. 조금만 방심할라 치면 베일이 엉키고 대사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한데다 성대를 아무리 밀어 올려도 여자애다운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아서 유리는 만월의 아이는 아니지만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따라서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가련한 여신 만월의 아이(※주: 180cm)가 세계를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흘리는 눈물로 착각한 아이 몇이 울망울망 눈물을 글썽이든 말든 연극은 의외로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나무1로 슬쩍 출연한 기사단장님이 만월의 아이를 향해 가지를 흔들다가 나무2에게 <나무는 움직이는 거 아니야>라며 꾸중을 받았다던가, 나무를 발견한 만월의 아이가 갑자기 그것을 뽑으려고 날뛰었다던가하는 사소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세상을 구한 후 하늘로 올라가는 리리의 샛별에게 만월의 아이가 손을 흔들며 안녕과 눈물과 사랑을 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른들 몇 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암, 좋은 연극이야> 따위를 중얼거렸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따뜻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거기 기사단장 양반, 나한테 뭐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아, 유리! 연극 정말 훌륭했어. 모두들 좋아해준 것 같아, 잘 됐지?”
“그렇다면 도망치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지?”
“하하, 그러면 때릴 거잖아?”
“당연히 때릴 꺼다!!!!!”
“아, 저기 있다!”
근처에 대충 놓여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21년 째 소꿉친구이자 현재는 애인을 상대로 세계의 재앙을 막을 때 쓰였던 비오의를 막 발동하려던 유리는 갑자기 뒤 쪽에서 안겨드는 아이들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왓!> 리리의 샛별 역을 맡았던 아이는 물론이고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까지 모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유리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유리아나, 오라버니보다 훨씬 멋있어!”
“만월의 아이 완전 쎄!”
“누나 뭐 먹고 키 컸어?”
“......”
한동안 팔이며 다리에 매달려오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빗자루를 내리찍으려고 시도하던 유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팔을 내렸다. 그 바람에 매달리기 편해진 아이들이 와아, 하며 유리의 품으로 달겨들었다. 애인이란 놈은 이미 멀찍이 물러나 좋은 구경거리라도 된 양 싱글거리면서 이쪽을 보고나 있고 이미 화낼 타이밍도 놓쳐버리고 피곤해진 유리가 그래, 그래 하면서 대충 안겨오는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유리아나가 세상을 구해 준거지?”
“나쁜 재앙을 물리쳤어!”
“지켜 줘서 고마워, 유리아나!”
“고마워, 고마워!”
갑작스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감사의 말, 신뢰, 칭찬과 격려.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들 중 보이지 않는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실은 그 일말의 여지마저 사람을 죽이고 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버린 셈이다. 유리 자신은, 적어도 이 곳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저토록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렁이며 반짝이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고 있자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고 서늘해진 몸과 반대로 얼굴에는 발갛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한 숨처럼 웃었다.
“...그래도 그 이름은 그만 둬 주라…….”
기어코 배웅하겠다는 아이들을 이제 잘 시간이라며 겨우 침대에 몰아넣고 나서야 한 숨을 돌리며 고아원을 빠져나온 유리 일행은 문 앞에 고아원 원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희미하게 본 기억이 나는 그 얼굴이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을 본 유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아마 예거님은 다신 이 곳에 오지 못하시겠죠.”
“........미안.”
슬픔을 억누르는 듯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리의 가슴 속에 역시 이런 곳,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자갈처럼 차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이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이 또한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고, 마치 포기하듯 받아들이며 고개를 돌리면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또, 와주세요.”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요, 이어지는 말에 깃든 건 분노나 미움이 아니었다.
고아원을 나와 달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나비 떼처럼 나돌아 당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멍한 표정의 유리를 보고 프렌은 빙그레 웃었다.
“야, 프렌.”
“응?”
“어디까지 생각한 거냐?”
“시시한 역을 맡기면 유리는 또 금방 도망 가버릴 테니까.”
<진짜 만월의 아이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유리 정말 예뻤어―.>라며 순진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웃는 프렌의 얼굴은 전혀 사심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유리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한동안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던 유리는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렌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계획을 실행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지만.
“전에 말했던 것처럼, 벌을 면제받는다고 해서 내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유리…….”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잘 알았어.”
“.......”
“........”
“....그걸로 됐어.”
<지금은.> 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덧붙이는, 그러나 안심한 듯 사랑스럽게 웃는 프렌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잠시 잊었던, 이 눈치 없이 사랑스럽고 툭 하면 정신을 쏙 빼놓는 괘씸한 애인의 처분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지금 웃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천연에 바보인데다, 이런저런 꼴을 당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 때문에 그랬다고 하니 지금은 처음의 생각대로 요런조런 곳을 씹어 먹는 걸로 용서해줄까- 하는 나름 관대한 결론을 내리며 유리는 프렌과 나란히 하얀 달빛이 흘러넘치는 거리를 걸었다.
***
이 때의 드레스는 기사단장님 숙소에 잘 걸려있다던가 나중에 이런저런 플레이할 때 쓰인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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