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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큐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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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언제부터 끝을 예감했던 걸까

 뉴트 떠나고 둘이 남은 토민호 보고 싶다... 헤븐에서 바다를 보면서 뉴트가 남긴 편지가 든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토마스가 이제는 답할 이 없는 질문 두 가지를 떠올리면 좋겠다. 하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고 나머지 하나는 대체 왜 내게, 다.

 물론 낌새는 꽤 있었음. 민호를 구하러 갈 때 마치 그게 남은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달려들던 모습이라던가. 항상 어른스럽다 못해 가끔은 시니컬하게까지 느껴지는 뉴트답지 않은 태도였음.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멱살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던 차가운 손의 감촉이 아직도 목 언저리에서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토마스에겐 가끔 있었음. 그래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로의 아이들에게 크랭크의 존재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보다 선명했으니. 항상 거리에서 무너진 건물 틈에서 어두운 터널 속에서 도사리고 있다 뛰쳐나와 산 사람을 물어뜯는 모습들로 자신의 미래를 짐작했을 친구를 생각하면 토마스는 견딜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해졌음. 

 그리고. 다른 질문은 민호에 대한 것이었음. 토마스는 뉴트가 민호에게 느끼는 감정을 알고 있었음. 민호는 몰랐겠지만. 토마스도 그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으니까. 뉴트도 아마 그걸 알았을 것이라 생각함.

 토마스가 미로에 들어오기 전부터 뉴트와 민호는 함께 있었음. 거의 마지막에 합류한 토마스의 눈에도 둘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게 보였음. 그건 온전한 우정도, 가족애도 사랑도 아니었고 사실은 그 모든 걸 합한 형태에 가까웠음. 부모, 형제와 친구, 애인. 이 모든 걸 잃어버린 미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고 뉴트는 편리하게도 이 모든 존재를 압축해서 하나로 정했음. 민호.

처음 둘의 관계를 눈치챘을 때 토마스는 질투를 느꼈음. 결국 민호가 받아들인 것은 토마스 자신이지만, 그래도 둘이 오랜 시간을 공유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음. 심지어 그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제외하면 거의 평생이라고 할만함. 민호가 능숙한 눈짓으로 뉴트에게 할 말을 대신할 때나, 뉴트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민호와 거의 동일한 타이밍으로 숨을 죽이고 내쉴 때마다 토마스는 앞이 캄캄해졌음. 정작 민호는 그럴 때마다 토마스더러 뭘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냐며 핀잔을 놓긴 했지만. 그랬으면서. 서로에게 가족이고, 형제이고 친구였으면서. 모든 것이었으면서. 뉴트 넌 왜 민호가 아니라 내게 이 편지를 맡긴 걸까.

 먼 동이 터오르기 시작함. 토마스는 모래사장에 앉아 펜던트를 만지작거렸음. 저멀리서 뛰어오는 까만 점같은 게 보임. 아직은 까만 점일 뿐인데도 토마스는 그게 누구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음. 민호. 토마스의 짐작대로 모래장 저 끝에서 가볍게 뛰어온 민호는 토마스 앞에 서서 숨을 골랐음. 이제는 러너 치프도 아니고, 더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민호는 미로 때와 동일하게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음. 마치 그 때로 돌아간 것처럼. 누구도 잃기 전처럼. 할 말을 잃고 올려다보는 토마스를, 민호는 잠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곧 흥미를 잃고 바다 쪽으로 걸어갔음.

뉴트는 자기 감정을 민호에게 이야기한 적 있을까. 토마스는 처음 고백했을 때 민호의 반응을 떠올렸음. 무뚝뚝한 표정이 녹은 듯 사라지고 말이 되지 않는 말 조각만 반복해서 내뱉던 순간. 민호의 반응을 보건데 뉴트는 단 한 번도, 민호에게 자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을 거임. 말했다면 민호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말 한 마디에도, 눈길 하나에도 금이 갈까 깨어질까 두려워 말을 아꼈던 소중하고 소중한 관계. 그 마지막 순간에, 뉴트는 민호에게 고맙다고 말했음. 고마워 민호, 기다릴게. 하고.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뉴트는 말하지 않았음. 사실상 유언장에 가까운 몇 장의 편지에도 민호에 대한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았음. 둘을 잘 알던 이들은 이제 다 사라지고,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마음은 토마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함. 말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다른 사람은 아니라도 민호만은, 민호에게만은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망설이는 것은-

 해변 근처,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세운 비석 곁을 걷고 있던 민호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건 그 순간이었음. 토마스는 테이저건이라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음. 민호??!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 위로 토마스의 목소리가 부스러졌음. 민호!!! 끔찍한 파도소리. 설마. 앉아있던 모래 언덕에서 비석 근처로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를 구르다시피 달려가면서 토마스는 제 말의 뜻도 모르고 되뇌었음. 설마 그럴리가.

그때 목소리가 들렸음. 뭐하냐? 이따금 토마스가 한심한 짓을 할 때면 듣곤 하는 그 목소리였음.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토마스를 쳐다보고 있었음. 이제 완전히 맥이 풀려버린 토마스가 비틀거리며 가라앉자 천천히 물 밖으로 걸어나온 민호는 바닷물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인상을 썼음. 어디 아프냐?

아니.. 토마스 자신이 듣기에도 대답이 썩 똑똑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다행인지 민호는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음.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나온 민호는 천천히 토마스 주위를 돌다가 토마스 뒤에 있는 비석으로 향했음. 민호의 시선이 돌에 새겨진 '뉴트'라는 글자를 훑었음. 토마스가 쳐다보자, 민호는 고개를 돌렸음.

 좀만 더 빨리 달릴걸. / ? / 백신만 제 때 가져갔더라면.. 토마스는 민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음.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음. 위키드에서 민호를 구해 나올 때부터 이미 뉴트의 상태는 심각했음. 편지를 쓴 건 민호를 구하러 들어가기도 전이었을 거고. 그 때부터 이미 뉴트는 끝을 생각하고 있었을 터임. 부탁한다고 했었는데. 덧붙이는 말은 바닷바람에 부서지는 포말처럼 가늘었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토마스는 펜던트를 꽉 쥐었음. 만약 그런 자격이라는 게 있다면, 누구보다도 뉴트의 감정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건 민호일 것이다. 지금도 망설이며 입을 떼지 못하는 토마스 자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모든 존재. 서로가 서로로 유일했던 소중한 관계. 마지막에도 부서질까 두려워 안녕 대신에,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감정 대신에 이제는 오지 않을 다음을 말하던...

이제는 아예 눈물이 터지기 시작하는 것을 민호는 퍽 당황한 얼굴로 바라본다. 배의 상처가 도지기라도 한 것 아니냐며 냉큼 옆구리로 달려가 부축을 시작하는 민호를, 토마스는 흐려지는 시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눈을 뜨고 쳐다본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이 대신 민호를 보아도, 말할 수 없던 것을 대신 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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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신이 하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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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줄게. 방법이 있어. 그때 당신이 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

신을 믿고 그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사제라면서. 항상 왜 넌 길을 잃은 미아처럼 보일까.

 아근데 재밌는 건 화평은 진짜 뭘 믿거나 하는게 아니라 그냥 박일도 잡아서 원수 갚고 싶어서 걍 뭐든지 해본다 <--- 는 느낌이 든다는 거임 세습무 집안 출신에 박수무당이랑 형동생하고 지내면서 유사시엔 성당에도 전화해서 구마사제도 부르고 칼 들고 국회의원 찾아간다는 점이.. 최윤이 갈 길을 모르고 어찌 할 길이 없어 헤맨다면 화평은 할 일 너무 많고 갈 길 너무 많아서 정신없는 느낌이... 막상 화평도 뭘 어떻게 하면 해결된다! 는 확신은 없지만 길 잃은 얼굴로 자기 보는 윤 앞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고, 해결방법 있다고 자기가 안다고 말해버리는 모먼트 좋아하는 것

 

최윤 별명 종이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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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진짜 최윤 코피 쏟는거 피 토하는거 넘 좋은 거 같아

 최윤 별명이 종이인형이라던데ㅋㅋㅋㅋㅋㅋㅋ 툭하면 코피 쏟고 툭하면 어지러워지는 최윤 보고 싶다. 맨 처음 최윤 코피 쏟는 거 봤을 때 화평 길영이 뭐야 무슨 일이야 구마자 있어?? 하고 호들갑 떨다가 최윤이 넘 자주 그러니까 이제 익숙해져서 휴지 대주고 목 뒤 주물러주고 그러는 거.

 저번에 보니까 최윤 코피나니까 고개 뒤로 젖히던데 당황해서 그랬는지.. 여튼 최윤이 코에 손 대고 고개 뒤로 하려고 하면 길영이 윤 등짝 찰싹 치면서 고개 젖히지 말라고 그러고 화평이 얼른 휴지 가져와서 코에 대주고 콧등 주물러주면 좋겠다. 윤은 그 모든 과정을 눈 꿈뻑꿈뻑거리면서 받고 있고 그러다 계속 코피 안 멈추면 이제 어지러워질 껀데 그거에도 익숙해져서 현기증 찾아오기 전에 윤이 팔 끌어다 자리에 앉히는 길영 화평... 코피 대충 멈춘 다음엔 어지러워서 눈 꿈뻑하고 있는 윤 보면서 안되겠다 몸보신 좀 시켜야겠다구 셋이 소고기나 먹으러 가면 좋겠다..

 귓가에 어허, 하고 찰싹 등짝을 때리던 길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최윤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잡아주던 길영도 휴지를 대주던 화평도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쓰러진 친구들을 등진 채로 윤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문질러 닦았다. 하얀 손등에 붉게 피얼룩이 졌지만 윤은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심지어는 떨지도 않았다. 끔찍한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달려드는 악마를 친구들에게서 갈라놓는 형태로 버티고 선 윤이 다시금 기도문을 외웠다. 끈질겼던 악마가 마침내 지옥으로 사라지고, 코피를 뚝뚝 흘리며 윤은 바닥에 쓰러진 길영과 화평의 몸을 흔들었다. 깨어난 그들이 최윤 또 코피난다며 호들갑을 떨며 휴지를 찾아 헤맬 때까지.

 

엔딩 후 화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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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이후 만신창이된 화최 사랑했으면 좋겠다

 1년이 지났어도 화평이 동해 바다 뛰어들기 전 제 손으로 찌른 상처는 꽤 깊었어서 날 궂거나 심하게 움직일 때마다 뜨끔거리고 쑤셨으면 좋겠다. 오른쪽 눈이 이미 안보이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윤도 두 번째 예언은 이미 겪었고 거의 세 번째 예언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온 몸이라 몸에 상처는 없어도 잔병치레가 늘고 몸이 차서 툭 하면 오한 느끼는게 일상이었으면. 둘 다 자기나 상대 몸 상태 느낄 때마다 안타깝긴 해도 그 박일도 상대로 이만한 상처로 끝났고 셋 다 살아남았으면 그래도 괜찮은 결과지 생각할 듯함...

 이제 곧 봄인데. 수단 위에 두터운 겉옷을 몇 겹이나 겹쳐입고도 윤은 손으로 옷깃을 꽉 쥔 채 덜덜 떨면서 걸어왔음. 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화평은 재빨리 가방과 겉옷을 받아들었음. 잠깐 스친 마른 손이 아예 냉기를 발하는 것처럼 차가워서 화평은 저도 모르게 혀를 쯧 찼음. 불을 잔뜩 뗀 데다 두터운 이불까지 깔아놓은 아랫목에 윤을 밀어넣자 종잇장처럼 창백했던 얼굴에도 조금씩 홍조가 돌았음. 좀 있어 봐. 이불 속에 쏙 파묻힌 채 눈만 내놓은 윤이 눈을 꿈뻑거리는 동안 화평은 점집 손님이 주고 간 햇대추차를 따끈하게 끓여왔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쟁반에 받쳐 내가자 윤의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음.

 찬 손에 뜨거운 찻잔을 쥐기가 영 어려운지 윤은 쉽사리 잔에 손을 대지 못하고 망설였음. 그 모양이 퍽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숨을 크게 들이 마신 화평은 순간 가슴 위쪽에 느껴지는 익숙한 환통에 얼굴을 찌푸렸음. 괜찮아요? 묻는 물음에 그때의 상처가 여즉 남아 이따금씩 걸리적거린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아물어가는 흉터 위에 얹은 화평의 손을 본 윤은 무슨 말을 듣기도 전에 그걸 알아챈 듯 했음.

 우리 둘 다 참, 말이 아니다 그렇지 신부님? 부러 장난스럽게 내놓은 말에 윤은 시선을 내려 찻잔을 바라보며 헛숨을 삼키는 것처럼 픽 웃었음. 그래 이만하면 됐지. 나도 최윤도 강형사도 살아있고. 그러면서도 화평은 여즉 차가 식기를 기다려 찻잔 언저리에 머무르는 저 창백한 손가락을 잡아 데워주고 싶었고, 저를 보는 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

 

새삼스러워 간지러웠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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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원망하면 어쩌려구요. 풋내가 날만큼 솔직한 물음이었다. 저를 보는 까만 시선이 너무 곧아서 화평은 가볍게 실소했다. 그걸 또 뭐라 오해했는지 윤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다른 말로 얼버무리며 화평은 떠올렸다. 대대로 세습무가 계승되는 바닷가의 작고 좁은 마을. 어딜 가도 등 뒤로 말하지 않는 원망과 수군거림과 공포가 따라다니던 기억을. 신부님은 원망도 허락을 받고 하나. 그러면서 화평은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언젠간 저 이를 위해 목숨조차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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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최 꽉 끌어안고 있는거 보고 싶다

 후에 길영에게서 전해들었다. 자신이 없었던 1년 간 윤에 대해서. 끝끝내 잡았던 손을 놓은 화평이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나서 윤은 깊은 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덜컥 숨을 멈춰버리는 고약한 병에 걸렸다고 했다. 머리로는 화평을 삼켰던 그 바다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윤은 조금이라도 깊은 강이나 시내를 볼 때, 심지어는 장마철 고인 물 웅덩이가 다리에 엉길 때나 물컵에 담긴 물이 찰랑이는 소리를 들을 적에도 하얗게 질렸다고 했다.

 달리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아예 화평의 묘지처럼 생각했던 바다에 길영은 자주 찾아가 속에 담은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지만 그 아쉬운 성묘조차도 윤은 계양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새파랗게 질리는 통에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때 딱 한 번, 밤새도록 이어져 날이 터올때까지 들었던 그 날 밤 그 파도소리가 항시 귓전에 울리는 듯 하다고, 유리컵 가득 채운 소주잔을 노려다보며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고백하던 그 말이 길영은 어쩔 수 없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재회한 후에도 윤은 가끔 바다 꿈을 꿨다. 밤새 뒤척이면서도 꿈의 내용에 대해 도통 말하지 않는 윤이지만 이제 화평은 온갖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터다. 잠든 윤의 곁에 누우면 어디선가 파도소리가 들렸다. 바다 저 먼 곳에서 일어난 파도가 육지를 만나 자잘하게 부서지는 익숙한 소리. 오래 듣지 않고도 화평은 이 소리가 오랫동안 들어왔던 제 고향 바다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화평 자신은 이렇게 살아나 윤의 곁에 있고 더 이상 그 바다에 두고 온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데. 찾을 수 없는 뭔가를 찾아 매일 밤마다 바다 밑바닥을 헤매었을 윤이 안타깝고 가여워서 화평은 그때 스스로 놓았던 윤의 손을 가만히 쥐어잡았다.

 바닷가 마을 아이에게는 풍랑도 자장가소리라 그날도 초저녁부터 까무룩 잠든 윤의 곁에서 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화평도 잠깐 눈을 붙였을 때였다. 어느새 귀를 스치던 파도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저를 위에서 누르듯 팔로 버티어 선 검은 그림자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가만히 있어요. 방금 깬 듯 목 안쪽에서 긁히는 목소리였다. 화평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윤은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화평의 위에 포개어져 두 팔을 등 뒤로 감았다. 맞닿은 가슴팍으로 방금 물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 요란하게 뛰는 심장소리가 겹쳤다. 아. 화평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못찾았구나.

 누운 몸을 반쯤 일으켜 가슴팍을 더 대주니 늘씬한 팔이 더욱 더 힘을 주어 몸통을 끌어안았다. 큰 키가 무색하게 몸을 잔뜩 말아 화평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윤은 이제야 비로소 물 밖에 나왔다는 듯 깊이 숨을 내쉬었다. 마른 등을 쓸어주자 가볍게 기침한다. 춥기라도 한 듯 덜걱거리는 몸을 더 당겨 양팔로 그러안으면서 화평은 한참을 더디 나아가는 상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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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최 모든 순간이 좋지만 진짜 수중구마씬이랑, 윤이 화평에게 부마자의 예언 털어놓는 순간 대좋아해 진짜

 삶이 아쉬웠던 적 없다고, 가족의 원수인 악마를 잡기 위해 목숨조차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착각임을 그 순간 윤은 깨달았다. 존재조차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악의 존재와 마주하고 늘 저만치 떨어져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눈앞에 디밀어졌을 때. 윤은 그동안 제가 알았던 두려움이 다만 피상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두려웠다. 벼락처럼 닥쳐올 죽음이 두렵고 그 앞까지 힘겹게 늘어놓아야 할 삶이 두려웠다. 악이 임함이 두렵고 신의 임하심 또한 두려웠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온 몸을 헤집는 밤 자신의 존재마저 두렵고 힘겨워서 윤은 자잘한 바람이 부는 소리나 몸을 휘감는 써늘한 시트의 감촉 따위에도 소스라쳐서 깨어나 밤새 좁은 방 한 구석에서 덜덜 떨며 아침을 맞았다.

 당신도 이런 밤을 보냈습니까? 윤화평 씨

 이제 윤은 생각한다. 화평이 오랜 시간 그들을 괴롭혀왔던 악마와 함께 가라앉은 바닷가에 서서. 도망치는 악마가 지표처럼 남긴 구마자들을 쫓아 들어간 가정집에서 구마자를 마주한 순간 윤은 다시 한번 몸 안을 쑤시는 격통을 느꼈다. 괴로웠다.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듯 아팠고 그보다 먼저 이제야말로 마지막을 직감한 마음이 무너졌다. 나는 죽는다. 여기서. 혼자. 그렇게 생각하니 그 집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서 무엇에 쫓기듯 도망친 들판에서 힘없이 쓰러진 채로 그저 도움만을 간청했다. 이게 당신의 뜻이라면 제발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형편없이 떨리는 기도 소리가 듣는 사람 없는 들판에 간데 없이 사그러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자신을 따라 뛰쳐나와 예언을 털어놓으라 다그치는 그에게 이야기한 것은. 원래는 끝끝내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스스로 낸 말조차 버거워 덜덜 떠는 자신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고, 내가 돕겠다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곧고 맑아서, 윤은 그 순간 그가 오래토록 생각해왔던 일을 마침내 결심한 것을 알았다.

 그 때 그가 결심한 게 뭔지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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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6화 이후 셋이 재회한 다음부터 화평이 강아지처럼 따르는 최윤 보고 싶은걸

 길영과 윤이 화평을 찾아내고 얼마 안되서 화평이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왔겠지. 그때까지도 아직 확신이 없다 궁시렁거리던 화평의 등을 냅따 떠민 건 길영이고 마지못한 척 밀려가는 등 뒤에다 할아버지 기다리신다 덧붙인 건 윤이었던 걸로. 결국 고향집까지 가서 아직까지 매일 평상에 앉아 누가 찾아오지 않나 내다보던 할아버지 얼굴까지 보고 나니 화평은 더 이상 확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음.

 회사에서는 애진작에 짤렸고, 이제와 택시기사 일을 계속하긴 애매해서 화평은 새로이 알게 된 자신의 재능을 살려 고향집에 깃발 하나 박고 점집을 차렸음. 신당은 썩 화려하진 않았지만 워낙 주인이 진짜배기라 금세 용하다는 소문이 돌았고 화평은 대충 자신과 할아버지 배 곯지 않고 한데서 떨지 않을 정도로 벌 수 있었음. 이따금 겨울 바람에 세워둔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릴 때나 방울소리가 울릴 때 화평은 또 한명의 가족과 같았던 육광이형을 떠올렸음. 의식을 잃고 가라앉았던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육광의 가호 덕이라고 화평은 확신하고 있었음.

 그렇게 화평이 좀 중한 손님이 오면 잠깐 열었다가, 내키면 손님이 와도 모른 척 닫아버리는 들쑥날쑥한 영업을 하고 있자면 이따금씩 점집에 형사와 신부가 찾아왔음. 야간근무가 잦고 생활이 규칙적이지 못한 길영이 비교적 뜸한 것은 이해 가능했지만 형사만큼은 아니어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바쁜 구마사제 윤의 방문이 생각보다 잦은 건 앉아서 천리 앞길을 내다보게 된 화평에게도 약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음.

 오늘도 검은 봉다리를 들고 택시에서 막 내린 윤이 부지런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화평은 피식 웃었음. 어째 올 것 같더라니. 평상에 앉은 화평을 발견하자 멀리서 조막만한 얼굴이 활짝 피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음. 윤화평씨! 외친 윤이 더욱 더 걸음을 재촉하자 화평은 어쩐지 가슴이 간질해지는 느낌이 들었음.

 예상대로 검은 봉다리에 가득 든 건 화평이 좋아하는 소고기였음. 올 때마다 이런 걸 사오고 그래. 사제 봉급 얼마나 된다고. 화평은 가볍게 툴툴거렸지만 이 또한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었음. 이따 구워먹자. 들어와서 좀 앉아. 검은 봉다리를 받아든 화평이 앞장서자 윤은 금방 그를 따라왔음.

 윤이 사온 고기와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 할아버지가 담근 젓갈 등을 곁들이자 훌륭한 저녁식사가 되었음. 안그래도 요새 늘상 같이 저녁을 먹는 터라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윤의 뺨에 뽀얗게 살이 차오르기 시작한게 썩 보기 좋았음. 식사를 마치고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일찍부터 주무시러 들어가시고 윤과 화평은 건넌방으로 들어왔는데 이 방은 화평의 방이자 신당으로 쓰는 터라 언제 들어와도 영 어수선했음.

 버릇처럼 화평은 사제가 이런데 있어도 괜찮아? 구마 못하는 거 아니야? 라고 물었고 윤 또한 똑같이 괜찮아요, 하고 대꾸했음. 생각해보니 요새 들어 윤에게 뭘 물어도 괜찮아요, 그래요, 같은 대답만 돌아오던 거 같은데 좀 이상하지 않나? 생각한 화평이 다시 윤을 돌아봤지만 윤은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여상하게 신당으로 들어왔음. 하긴 여기에 윤이 입을 잠옷도 있고, 쓰는 칫솔도 있고 이부자리도 두 채인게 벌써 언제적인데 이제 와서 신경쓰는 것도 그렇긴 하지. 생각을 정리한 화평이 윤에게 먼저 씻으라 말을 걸자 윤은 또 얌전히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였음.

 점볼 때 쓰는 상이니 제기 등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이부자리를 펴서 눕자 윤은 금방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몇번 깜빡거리다 스르르 잠들었음. 거봐. 피곤하면서 굳이 이 먼 길을 와서는.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다 불을 끄기 위해 잠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잠결에 빈 제 옆자리를 더듬은 윤이 눈을 꿈뻑 떴다가 화평이 방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길게 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자 화평은 이번에야말로 약간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되었음. 자. 나 어디 안가니까. 불을 꺼 캄캄해진 방 안에서 옆자리에 누워 윤을 토닥이자 윤은 잠결처럼 뭐라 대꾸했음. 말 끝에 제 이름 석 자가 걸리는 것도 애처로워서 화평은 잠들 때까지 윤의 이불을 도닥여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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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충동적으로 비운 맥주 한 캔의 취기를 빌려 입을 연 밤이었음. 써늘한 초가을 날. 항상 속으로만 삭이던 오래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자 윤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음.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화평은 잠시 신부님이 그런 걸 물어봐도 되냐며 너스레를 떤 다음 입을 다물었음. 숨조차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던 긴 순간이 지나고 결국 화평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밤이 왜 지금 와서야 굳이 생각이 나는 건지.

 윤은 달리고 있었음. 딱딱한 구둣발에 울퉁불퉁한 시골길은 영 걸리는 것이 많아서 자잘한 요철이나 잡풀을 만날 때마다 윤의 다리는 정신없이 휘청거렸음.

 신은 어디에 있는가. 독실했던 집안에 악마가 찾아온 이후 한참 동안 윤은 그 질문에 집착했음. 말할 것도 없이 윤의 부모는 독실한 신자였음. 부모만큼 신앙이 깊지 않던 큰아들을 기어코 사제의 길로 밀어넣을 정도니 오죽했을까. 그런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린 윤도 종종 부모에게서 신의 존재나 은총에 대해 듣곤 했지만 썩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음. 그리고 그 날 밤 윤은 제 형의 안에 들어 인간을 해치는 악마의 존재를 눈으로 똑똑히 봤음.

 악마는 존재한다. 그러니 신도 존재하는 거겠지. 해서 윤에게 있어 악마의 존재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고 오히려 신의 존재는 훨씬 부수적이었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고 구마사제직을 받아 구마의식을 하러 다니면서 이런 의문은 점점 더 커졌음. 의식은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다치고 괴로워했음.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인가. 지금 이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끝조차 알 수 없이 이어지는 악몽에서 소스라치듯 깨어나 베개 밑에 넣어둔 십자가를 쥐어잡으며 윤은 매일 밤 자신의 안에서 메아리치는 질문을 들었음. 신은 있나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들판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함.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그래도 익숙치 않은 시골 풍경이 더욱 더 낯설게 보였음. 흰 옷을 입었으니 눈에 띌 법도 한데,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먼저 달려나간 화평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음. 초조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이 가쁜 숨을 몰아내쉬면서 윤은 지쳐서 자꾸 늘어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재촉했음.

 계속 혼자서 가족을 죽이고 형을 자살로 몬 악마를 뒤쫓던 윤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음. 윤화평과 강길영. 맨 처음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비극에 깊게 얽힌 피해자이자 생존자들이었음. 해묵은 인과관계와 각자의 사정을 나누고 난 세 사람은 자신들의 목적이 같다는 것을 알았음. 20년 전 비극을 일으키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악마를 잡는 것. 처음엔 방법이 달라 부딪치는 일도 많았지만 결국 목적은 단 하나였음.

 그랬기 때문에, 그 목적에 너무나도 절실하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윤은 지금 이곳에서 화평의 뒤를 쫓고 있음. 부마자의 예언을 들을 때부터, 아니 악마의 뒤를 쫓아 구마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윤은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으나 그건 윤뿐만이 아니었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윤은 눈을 깜빡였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들어올렸을 때 자신의 손을 잡아내리며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고, 내게 맡기라고 말하던 사람.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앞을 몸으로 막아서며 다른 이들을 지켜내던 사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위해 몸을 던지고,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 그리고 심지어 죽을 것이 분명한 것을 알면서도 구마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 안에도. 이 모든 것 안에 신이 계심을 나는 어째서 몰랐던 걸까요.

 그리고 한 사람. 자신의 몸에 악마를 가두어 함께 죽기로 결심한 사람. 사람들을 위해 악마의 형상을 받아들인 신. 인간. 윤화평. 흠뻑 젖은 채로 검은 물에 잠겨 그를 마주한 이 순간에, 윤은 그 어느때보다 신의 존재를 실감함. 그러니 하느님. 윤은 목이 터져라 외쳤음. 난생 처음으로. 분명하게 존재하는 신에게. 이제와 같이 영원히 함께 해주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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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 첫 번째 부마자의 예언 들었을 때 ~ 두번째 예언 듣기 전 사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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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자가 속에 들어찼던 바닷물을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쏟아내자 그와 동시에 기도문을 외우던 최윤의 몸이 휘청이며 쓰러져내렸음. 워낙에 구마란 자기 영혼을 깎아 악마를 쫓아내는 일이라 항시 의식이 끝나고 나면 눈에 띄게 지치는 윤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정도가 심해져 제 발로 걷지도 서지도 못하고 심하면 그대로 픽 쓰러지는 것도 일상이라 화평은 비교적 익숙하게 윤이 쓰러지기 전에 그를 잡아다 바닥에 앉힐 수 있었음.

 그렇게 좀 쉬게 하긴 했어도 도저히 혼자 집에 갈 만한 상태가 아니길래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손사레만 치는 윤을 반어거지로 조수석에 싣고 차를 출발시켰는데 한 십분이나 달렸을까 옆을 돌아보자 이번엔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윤이 도리질을 치며 헛구역질을 하는 통에 화평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차를 멈췄음. 최윤 괜찮아? 약 사다줘? 이시간이면 약국은 거진 문을 닫았겠지만 요새는 편의점도 몇몇 상비약 정돈 구비해두는 터라 도로 건너편에 편의점을 곁눈질하며 화평이 물었고, 윤은 다시금 도리질쳤음.

 약... 소용없어요. 그 말에 화평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음. 틀린 말은 아니지. 그토록 발전된 과학도 의학도 그들이 상대하는 이 기이한 존재를 잡아내지도 치료하지도 못했음. 아마 지금 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면 진단서에는 원인 모를 두통이니, 스트레스성 증상이니 하는 문구나 잔뜩 적혀있을 거임. 이런 말들은 결국 아무것도 나타내지 못함. 구마를 거듭할수록 영혼에 얼룩지는 지독한 악에 대해서, 현대 의학은 물론이고 화평이라고 뭐라고 할 말이 없었음.

 그래도 힘들어하는 윤을 그냥 보고 있기도 뭐해서, 화평은 얼른 편의점으로 달려가 물 한 병을 사왔음. 뚜껑을 돌려 생수병을 따주고 손에 들려줘도 윤은 한 모금이 겨우 될까 말까한 양만 겨우 삼키고는 병을 들고 덜덜 떨었음. 윤의 집이나, 화평의 집까지도 한 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데. 이대로는 도저히 차를 계속 태울 수가 없어서 고민하며 모텔로 향했음.

 택시기사와 딱 봐도 아파보이는 신부. 모텔로 들어가면서 화평은 이 기이한 조합을 카운터 직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경찰에 신고당하지 않을지를 고민했으나 무인정산기계가 그런 화평의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주었음. 시간이 너무 늦어 직원은 이미 퇴근한 모양임. 얼마쯤 지나면 괜찮아지려나. 고민하던 화평은 일단 기계에 대실 최대 시간인 8시간을 입력했음.

 방은 값싼 모텔방이 흔히 그렇듯 약간 눅눅하고 먼지냄새가 났음. 그래도 불편한 차의 좌석보다는 훨씬 나아서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부축해 눕힌 윤의 얼굴이 약간 펴지는게 화평의 눈에 보였음. 다행이네. 마음이 한결 놓인 화평은 내친김에 윤을 조금 더 편하게 해주면 어떨까 했음. 딱딱한 구두를 벗기고 로만 칼라를 벗겨낸 다음 화평이 목 끝까지 채운 셔츠의 단추에 손을 댔을 때 잠든 것처럼 보였던 윤이 화평의 손을 움켜쥐었음.

 뭐야, 안 잤어? 화평이 묻자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린 윤이 하얗게 질린 손으로 화평의 손을 잡았음. 아니, 답답할까봐 풀어주려고 그랬지. 어쩐지 머쓱해진 화평이 말을 덧붙였지만 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기어코 화평의 손을 저에게서 떼어내 멀리 놓고는 아예 단추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자기 셔츠 목깃을 손으로 꼭 잡았음. 왜 그렇게 반응을 해? 누가 보면 내가 신부님 셔츠 억지로 막 그래가지고, 어? 그런 줄 알겠다?

 아닌게 아니라 아까까진 별 생각없었으나 윤의 반응을 보고 진짜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화평은 일부러 큰 소리로 농담 비슷하게 투덜거렸으나 윤은 끝까지 셔츠를 쥔 손을 풀지 않았음. 그래 네 고집이 오죽하겠냐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딱딱한 모텔의 베개 위로 힘없이 머리를 얹은 윤의 모습에 더 뭐라 타박놓을 생각도 사라져서 화평은 저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윤 위로 서벅거리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다 덮어주고 자기도 그 옆에 누웠음. 잘자 최윤. 내일 아침이면 괜찮아질거야. 기도문처럼 내리는 그 말을 익숙하게 들으며 최윤은 눈을 감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화평도 고단했던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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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최 관계의 마싯는 점은 그 전까지 살았던 둘의 삶을 빼앗아갔고 그 앞의 인생조차 송두리째 바꿔버린 끔찍한 사건에 서로 깊게 연관되어서 이제 와서 끝내거나 떨어질 수 없도록 얽혀버렸다는 점이다.. 처음에 화평은 윤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윤은 화평에게 원망과 미움을 느꼈겠지만 함께 박일도를 쫓으며 일련의 사건을 겪은 이후로 둘이 서로에게 느끼는 것은 동질감에 가까움. 

 특히 윤의 가족이 살해당한 것이나 박일도 잡는 일에 윤을 끌어들인 것이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 처음부터 부채감이 짙었던 화평과 달리 윤은 형을 그렇게 만들고 자기 가족을 끔찍하게 죽게 만든 화평을 오랜 세월동안 미워했지만 그조차도 애초에 화평의 잘못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 사건을 후회하고 괴로워한 건 화평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로는 이전처럼 화평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음.

 가장 기억나는 것은 술에 진탕 취한 화평을 집에 데려다주던 날인데, 윤은 버려진 집도 아니고 멀쩡히 사람이 사는 집이 이다지도 황폐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음. 그래 가족 그렇게 된 이후로 밥을 잘 챙겨먹거나 잠을 잘 자거나 하는 올바른 생활과는 담 쌓은 자신의 집이라도 이 정도는 아닌데. 화평의 집은 하다못해 급하게 탈이 났을 때 챙겨먹을 약이나 생수 한 통조차도 없었음. 떨어져살지만 멀쩡히 반찬 챙겨다 보내주는 할아버지도 있으면서. 이건 단순히 자기 생활을 챙기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윤에게는 이게 화평이 자처하고 있는 어리석은 속죄임을 깨달음. 

 윤에게도 있었음. 부모님이 갑자기 미쳐버린 형에게 살해당하고 형조차 사라졌을 때. 가족들은 그렇게 끔찍한 꼴을 당했는데 자기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간다는 걸 견딜 수 없던 시절이 있었음. 나 혼자 살아남아서 미안해요.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윤은 좁은 화장실에 틀어박혀 칼로 손목을 그었음. 

 그런 윤조차도 이제는 제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가는데. 같은 시간을 보낸 화평은 아직도 그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칼로 손목을 긋는것과 같은 소모적인 삶을 계속하고 있음.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꾹 참고 버티며 밥 한 술, 약 한 알 입에 댈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을 화평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뜨끈하게 쓰렸음. 그래서 최윤은 그날 밤 취해서 잠든 화평을 두고 집 앞 편의점에서 물 한 병과, 배고플 때 두고 먹을 수 있는 햇반이나 컵라면 등을 잔뜩 사왔음. 

 잠에서 깨어난 화평이 눈을 떴을 때 곧바로 볼 수 있도록, 이부자리 옆에 늘어놓은 것은 실상 음식이나 물이 아니라 나도 그걸 이해하고, 더는 이런 속죄를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용서였음. 이날 이후 윤은 화평에게 남았던 일말의 원망과 앙금을 서서히 지워버렸음. 결국 우리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같은 비극에 휘말려 희생된 희생자들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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