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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세 패러디



훤칠하니 큰 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혹은 시간적 지축을 늘여 젖먹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평생 호화니 사치니 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먼 제도의 기사단장에게도 딱 한 가지 낭비벽이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큼지막한 편지지 양 면을 잇달아 구구절절하게 써내려 간 편지를 달마다 부지런히 길드의 소굴로 부치는 것이었는데, 전보의 목적이 안부 교환과 의사전달에 있다 치면 이것은 전혀 그 목적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분명 커다란 낭비가 분명했다. 편지 내용은 때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제국 정세며 제도 분위기 등을 꼼꼼하게 적어 넣고 그 밑에다간 자신의 사소한 일상을 조금 갈작거리다가― 어찌됐든 결국은 반드시 말썽 좀 그만 피우라는 둥, 이번에는 제도로 얼굴 좀 내비치라는 둥 잔소리로 끝나는 그 편지를 유리는 답장은커녕 심드렁한 얼굴로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머리를 슬슬 긁으며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마다 버려지는 편지가 벌써 수십 통이니 다른 것들은 몰라도 제도 근처의 나무들은 분명 기사단장의 사과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성절(聖節, 황제의 생일)을 앞둔 어느 날, 이제는 아예 버릇이 돼놔서 편지를 쓰긴 했지만 실은 이번에도 얄 짤 없이 쓰레기통행인 줄만 알았던 전보를 팔랑거리며 유리가 아랫마을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프렌이 놀란 이유가 여기 있었다. 분명 이번 성절은 요델 전하께서 성인이 되시니 반드시 들르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그 뿐으로, 내키지 않는 일은 죽어라 지지고 볶아도 도통 들어먹지 않는 친우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이미 황제에게 <유리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넌지시 언질을 올린 후였다. 이건 또 무슨 바람인가 해서 궁금해지긴 했지만 행사 준비로 감히 자리를 비우지 못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에 따로 찾아가진 못한 채로 성절을 맞았다.


 




황제가 첫 성년을 맞는 생일답게 행사는 그 어떤 때보다도 성대하고 호화롭게 치러졌다. 또한 이 날의 행사는, 재앙 이후 줄곧 국정 회복에 힘써온 국민들을 위로하고 제국이 이만큼이나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축제이기도 해서 그 화려함은 더했다. 하얀 비단을 금색과 붉은색 술로 장식한 정복을 입은 황제가 마찬가지로 하얀 도료로 채색해 리본과 보석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마다 길옆으로 죽 늘어선 백성들이 환호하며 여름장미로 엮은 꽃다발과 화관 등을 마차 위로 던졌다. 미처 장미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정성스럽게 물들인 종이와 천으로 만든 꽃으로 대신했기 때문에, 퍼레이드가 아직 반이나 남았음에도 황제의 하얀 마차는 금세 빨갛고 노란 꽃들로 흠뻑 물들었다.


<모두 기뻐해주고 있네요.> 다행이에요, 하고 막 성년이 된 황제가 몸을 기울여 속삭이자 호위를 위해 곁에 서 있던 기사단장이 빙긋 웃었다. <네, 정말로.> 실은 프렌 자신도 좀 전에 가슴에 단 장미를 하나 받은 터다. 축하합니다. 제국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해요. 어딜 가든 축하와 감사의 말들이 축복처럼 터져 나와 꽃과 함께 쏟아졌다. 정말이지 모두에게 사랑받고 계시는 황제 폐하시구나. 주위를 둘러싼, 황제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들이 하나같이 밝고 환해서 프렌은 마치 눈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지나치는 인파 사이로 설핏 검은 머리칼을 본 것도 같았다. 멈칫 했던 프렌은 잠시 후 고개를 돌렸다.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애초에 행사에 참여하라고 전보까지 친 참이니 유리가 오늘 축제를 보러 나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외려 제국의 일이라면 언제나 다소 심드렁한 태도였던 친우가 제가 없는 사이에도 제대로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 프렌은 다시 자세를 다잡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랬던 것이 약 반나절 전, 정신없이 빡빡했던 그날 하루를 간신히 마무리한 기사단장이 성으로 전해온 쪽지를 받고 아랫마을의 술집에 도착했을 때 탁자 옆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던 용맹한 금성의 수령이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프렌!>


그러고 보니 카롤은 현 제국 황제와 비슷한 연배로, 황제가 성년을 맞았으니 카롤도 비슷한 시기에 성인이 되었을 터였다. 슬슬 길드 내 술자리에 끼어도 좋을 나이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키도 좀 커진 것 같고. 새삼 기특하고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다짜고짜 사과부터 받았다.


“저기, 미안!”

“응? 무슨 일… 아.”


탁자 위로도 이미 한차례 축제가 휩쓸고 간 모양새였다. 안 그래도 이미 축제 끝에 거리에 남은 종잇조각들이며 꽃 등을 잔뜩 치우고 온 뒤다. 익숙한 얼굴을 찾아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온 프렌이 텅 빈 채 그 주변을 호위하듯 늘어서 있는 술병들과, 식탁 위에서 마치 위대한 왕관인 양 위스키 잔‘들’을 거꾸로 덮어 쓰고 있는 맥주잔을 보며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탁자에 머리를 대고 반쯤 졸고 있던 레이븐이 간신히 한 팔을 쳐들며 소리를 냈다.


“여, 프~렌쨩...”

“레이븐 씨,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여성 조는 벌써 숙소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웅얼거리며 술과 과자 부스러기로 엉망인 탁자 끝에 열심히 제 얼굴을 부비고 있는 수석 대장 옆에서 흡사 마시다가 그대로 죽어 넘어진 모양새로 탁자에 얼굴을 박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한 프렌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유리……!> 어지간히도 마셨는지 어깨를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유리가 이렇게까지 마시는 일은 드문데. 카롤은 아예 고개를 떨궜다. 본인을 깨우는 건 포기하고 그나마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는 연장자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레이븐이 어울리지도 않게 배시시 웃었다.


“오늘 좋은 날이니까, 아저씨랑 청년 기분 좋아져서 말이야~.”

“그...! 슈반 대장 폐하도 찾아뵙지 않으시고…!

“그게에~ 청년이 하도 알현이니, 성이니 그런 거 답답하다 해서~ 아저씨, 지금은 길드원이니까 윗사람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걸랑~”


거기다 대고 차마 <단장인 제 말은 듣지도 않지 않습니까….>하는 말을 주억거릴 정도로 무례한 성격이 못 되어서, 혹은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것저것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프렌은 애교와 웅얼거림을 반쯤 섞어서 말하고 있는 레이븐을 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이 주정뱅이들을 어쩔 것인가. <미안해, 말릴 수가 없어서….> 카롤이 다시 쭈뼛쭈뼛 사과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쪽은 얼마 마시지도 않은 모양이다. 보나마나 이제 나이 운운하며 유리 네한테 끌려왔을 테고, 이 지경이 되도록 말리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성으로 연락을 넣은 모양이다. 어이구. 존경하는 수석 대장이 더러워진 볼로 꾸준히 탁자 청소를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일단 주변을 좀 정돈하는 것이 좋을 듯싶어 근처에 굴러다니고 있는 술병 하나를 주워들던 프렌은 카롤이 <저기!> 따위를 외치며 달려들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프렌은 유리를 신경써줘.”

“그래도 이거 다 치워야 하잖아.”

“혼자 할 수 있어. 레이븐도 내가 데려갈게.”

“지금은 여관에 남는 방도 없을 텐데…”

“괜찮아!”


<레이븐 같은 거 바닥에서 자도 되니까, 탁자에도 자니까!> 겉보기론 별로 안 마신 것 같아 보였는데 카롤도 은근히 취해있었던 걸까. 횡설수설 이어지는 말에 프렌이 고개를 갸웃하자 탁자에 기대있던 레이븐이 수령님 너무하다며 작게 우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돕겠다고 말하는 건 한 길드 수령에게의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더욱이 이런 소란이 나도록 깨지 않는 친우의 상태도 걱정되었기 때문에 프렌은 대충 제안을 수락했다. 아예 유리 뒤에 서서 어서 데려가라는 듯 그 등을 톡톡 두들기고 있던 카롤의 도움을 받아 프렌은 유리를 마치 짐짝처럼 한 어깨에 걸머멨다.


“그렇게 들면 속이 나빠지지 않으려나..”

“토할 것 같으면 던져버리면 되니까.”

“엇….”


<정말 혼자 치울 수 있겠어?> <응? 으응.> 미묘하게 이상한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렸던지 술집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재차 질문하던 프렌이 저쪽으로 멀어져가자 카롤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간다니까.





기사라는 직업 상 무거운 군장을 지고 돌아다니는 일에는 이골이 날 정도였지만 역시 같은 체격의, 거기다가 취해서 축 늘어지기까지 한 남자 몸을 한 어깨에 메고 다니는 건 힘이 부쳤다. 하루 종일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마차에 서 있었던 데다 행사 이후론 뒤처리를 위해 뛰어다닌 참이다. 성으로 돌아가면 봐야 할 남은 서류 업무도 있다. 게다가 그 멘 것이 제 친구는 행사 준비로 이리저리 고생하는 것도 모르고 제도에 들른 것이 벌써 며칠 전인데 축제 당일까지 성으론 코빼기도 안 비친 고약한 친우 놈임에야. 카롤의 걱정과는 달리 단단한 어깨에 배가 걸린 불편한 자세임에도 뒤척임도 없이 곯아떨어진 유리를 지고 성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으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프렌은 간신히 지금 자기가 메고 있는 것이 당장이라도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고 갈 수 있는 괘씸한 친우 놈이 아니라, 반드시 성까지 운반해야 하는 마수 안장이나 군수품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성에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프렌을 발견하고 <엇.> 소리를 냈다. 부하가 저희 단장이 어깨에 멘 것을 보고 잠시 넋을 놓다가, 급하게 사람을 부를까요 어쩌고 하는 것을 거기서 더 서 있기도 짜증났던 프렌은 눈빛으로 저지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많은 기사와 귀족들이 성 안에 거처를 두고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은 황제의 소유로, 사용되지 않는 빈방이 얼마나 있건 간에 배정받은 방외에 다른 시설을 사적으로 사용하려고 하면 당연히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시간에 감히 사적인 용무로 피곤할 황제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단장은 그대로 유리를 제 사실로 데려갔다.


잘 정돈해둔 침대 위로 거의 굴리다시피 내려놓자 그때까지 별 소리 없던 유리가 처음으로 뭐라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으으…> 내려놓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난 것이 어딘가 잘못 부딪친 듯 했지만 만취로 인사불성이 된 주정뱅이에게는 별 필요 없는 배려라고 생각한 프렌은 뻐근한 어깨를 몇 번 주무르고 그대로 책상에 가서 앉아 남겨놓은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잠든 친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책상 위 등잔의 밝기를 서류 위 글씨가 간신히 보일 정도로 낮추긴 했다.


잠시 프렌의 방 안은 들릴 듯 말 듯 한 유리의 고른 숨소리와, 잘 다듬어진 펜 끝이 끊임없이 종이 위를 달려 나가는 소리로 가득 찼다. 열어둔 창문으로 다사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작은 등잔만으로도 책상이 환한 것에 감사하며 막 몇 장 남지 않은 서류에 사인을 마친 프렌이 갑자기 들리던 소리가 가시고 시야가 갑자기 훅 가려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우왁?!>


반사적으로 잉크와 펜을 서류가 더럽혀지지 않게 밀어내고, 책상에 풀어놓았던 검을 쥐려던 손이 간발의 차로 닿지 않은 채로 프렌은 갑자기 위에서 덮쳐온 유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대로 제 위로 늘어져 엎어진 몸이 무거웠고, 넘어져 의자 등받이에 세게 받힌 등이 아팠다. 이 주정뱅이가 진짜! 아직도 술이 덜 깼는지 도통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을 거의 저쪽으로 집어 던지듯 밀어내도 유리는 답지 않게 계속 뭐라 말하며 제 쪽으로 매달렸다. (물론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 진짜 적당히...!”

“%*(@#)(...”

“알았으니까 일단 떨어져!”


<무겁고, 술 냄새나!> 깔린 다리를 몇 번 움직여 떨쳐내려고 했지만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한 유리를 보고 곧 포기했다. 술김에 통각도 사라졌는지 팔 다리를 퍽퍽 패도 별 반응이 없다. 잠시 후 지친 프렌이 얌전히 움직임을 멈춘 것에 만족했는지 비틀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꼴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이놈이 제법 자세를 가다듬고 앉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남의 다리 위에서.


“...그 뭐냐아~...”

“......?”

“...단장이잖아, 단장. 아니 프렌인가...”


더욱 더 알 수가 없어졌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그대로 짜증으로 바뀐다. 이래서 주정뱅이의 말은 듣는 게 아니랬다고, 다리를 옆쪽으로 미끄러트려 간신히 몸을 빼낸 프렌이 끊임없이 술 깨면 보자 되새김질하며 바닥에 대충 주저앉아 있는 유리의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일으켰다. 거의 다 됐다. 뒤 이어 들려온 말만 없었어도 기사단장은 오늘 하루 답지 않게 구는 주정꾼을 재우고 남은 업무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수고했다, 프렌.”

“...뭐?”

“대단해. 엄청.”


<축제? 응, 그랬지.> 물론 분명 성황이긴 했다. 다들 좋아했고. 그런 화려함도 때에 따라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대충 동의해주며 다시금 잡은 팔에 힘을 주자 이상하리만큼 강한 힘으로 맞잡아 당겨졌다. 그 바람에 거의 넘어질 뻔 했던 프렌이 다시 뭐라 잔소리하려고 했지만 유리는 꾹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꾸벅꾸벅 말을 이어갔다.


축제 이야기가 아니었다. 프렌은 어느새 빼내려고 잡아당기던 손에 힘을 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소 꼬이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유리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고 있었다. 세계, 마을 사람들, 평화, 기사단, 꿈, 자랑스러움... 술을 마시지 않았더면 낯 뜨겁다며 절대 입에 내지 않았을 것들.


듣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적어도 이건 진짜였다. 비록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았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또는 그 쪽에서 말 해오지 않아도 당연스레 서로의 느낌이며 감정을 알았으니까. 서로 엇갈렸을 적에도 결국은 알아주겠거니 했을 정도다. 새삼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마주쳐 웃어오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랬던 생각은 거짓말이었던 걸까 생각될 정도로, 지금 실제로 형태로 구축되어 눈앞으로 펼쳐지는 감정의 나열은 넋을 잃을 정도로 황홀하고 찬란했다. 근처를 싸돌아 마법처럼 빛나는 어절들이 달빛과 함께 바스라져 온 방안을 하얗게 물들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프렌은 간신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다 네 덕분이야, 유리.> 그렇지만 취하지 않은 채로 말해줬어도 좋았을걸. 너는 쑥스럽다며 거절했겠지만.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잠시 어릴 적처럼 환하게 미소 지은 유리가 다시 눈앞으로 쑥 다가올 때까지 넋을 놓고 있던 프렌은 제 입술에 와 닿는 느낌에 화들짝 어깨를 굳혔다


“?!?!!!”

“장한 기사님한테, 선물.”

“으...”


정말이지, 술주정뱅이의 키스 따위가 무슨 포상이 된다는 거야.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하기 힘들어 술이나 진탕 퍼마시는 주제에. 제가 준 포상에 만족했는지 술김에 휘청거리면서도 싱글거리며 웃어오는 괘씸한 친우가 또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워 프렌은 <줄 거면 제대로 줘.> 같은 투덜거림을 삼키며 다시 그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환한, 환한 밤이었다.






***


이 뒤에 술 깬 유리가 뭐야 프렌%(#_)%(_)#! 했다던가 그 다음날 바로 당그레스트로 날아가서 석달을 두문불출했다던가 하는 얘기는 생략..ㅇ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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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자라난 앞머리가 눈 안쪽을 쿡쿡 찔렀다. 촌장집의 시중을 드는 내내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가 영 거추장스러워 눈을 비벼댔더니 그러는 것을 언제 또 봤는지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온 유리가 주머니칼을 들고 손짓했다. <머리, 잘라줄게.>

자른 머리카락을 버리기 쉽게 바닥에 방안을 뒤져 찾아낸 거적을 깔고 그 위에 올린 상자에 프렌이 얌전히 앉자 본격적인 이발이 시작됐다. 분주함이 채 가시지 않은 저녁, 얼마 남지 않은 햇빛에 의지해 고개를 기울이고 눈썹을 찡그려가며 신중하게 머리를 잘라가는 유리의 뒤로 자른 머리카락과 삭삭 하는 칼날 대는 소리가 바닥으로 소복이 쌓여갔다.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시야 밖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프렌은 가리는 앞머리를 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자르는 것은 오랜만이다. 뒤쪽을 지나 옆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느끼며 프렌은 귀 가까운 곳을 챠캉챠캉 스치던 가위소리를 기억해냈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용 가위였지만 부인은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가위로 할 수 있는 일을 열두 가지나 더 알고 있었다. 남은 붕대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옷감을 재단해 옷을 만들고 색실을 잘라 두건 위에 들꽃모양으로 수를 놓기도 했다. 오늘처럼 머리가 길게 자라난 날이면, 햇볕 잘 드는 창 옆에 자신과 유리를 앉히곤 어딘지 익숙한 콧노래를 흥얼거려가며 머리도 잘라주었다. 언제까지나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나지막한 멜로디.

오래전의 일이었다.

잘그랑, 주머니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프렌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떨어트린 칼 위로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으로 다른 손 손가락을 붙잡고 있는 유리가 보인다. <유리, 다쳤어?> 아무런 대꾸가 없는 친구를 걱정해 머리칼을 걷어내고 살짜기 고개를 들게 하면 뜻밖에도 잔뜩 일그러져 있는 유리의 얼굴이 보였다.


“유리….”


유리는 울고 있었다. 손등으로 훔쳐도 미쳐 다 닦지 못한 눈물이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들과 함께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진한 얼룩을 그었다. 거칠게 비벼낸 얼굴이 눈물과, 자르다 만 머리카락 조각들과 다친 손가락에서 배어나온 피로 온통 얼룩졌다. 소리 없이 들썩이는 어깨를 가만히 끌어당긴 프렌이 깨끗한 손으로 유리의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이며 피와 눈물을 닦아냈다. 닦아내도, 닦아낸 그 자리로 다시 눈물이 떨어져 프렌의 양 손이 금세 미지근하게 젖었다.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며 프렌은 부인을 실은 관을 내릴 때까지도 주먹을 꾹 쥐고 버티던, 고집스러운 옆얼굴을 떠올렸다.


“헹크스 부인도, 아프기 전엔 이렇게 머리 잘라주셨지.”


흠뻑 젖어든 유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시울 아래로 구르듯이 뭉쳐들던 눈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하얀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눈물궤적을 따라가듯, 마치 어린 소녀 같은 모양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프렌은 다시 친구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못 고치는 병은 아니라 했다. 약만 있다면 분명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러나 결계 밖 깊은 숲에서나 구할 수 있는 약재는 너무나도 비쌌고, 시내의 의원은 제 값을 모두 치르지 않으면 약을 줄 수 없다 했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할 말을 잃은 노인을 대신해, 후에 반드시 갚겠다고 간청하는 고아아이들의 부탁을 의사는 들은 체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 가난과 무력함이 비참하고 분해서, 결국 싸늘하게 식은 침상을 앞에 두고도 유리는 끝끝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 유리가 프렌은 못내 안타까웠다. 헹크스 부인의 죽음은 분명 슬프고 분한 일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자신들에게 친어머니같이 대해주었다. 웃을 때마다 환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이제 더는 남은 눈물이 없을 텐데도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러나 누구도, 그 죽음을 두고 유리의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터였다. 터무니없던 약값도, 구할 수 없던 약초도 모두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그 모든 것이 마치 제 탓인 양 굴었다. 피나게 입술을 깨물고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꼭 쥐어 가며 눈물을 참았다. 자신은 울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듯 한 그 얼굴이 외려 더욱 애잔하고 서러워서, 옆에서 대신 엉엉 울면서도 프렌은 차라리 유리도 울어주었으면, 떼라도 써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그렇게 참았던 눈물이 간신히 터진 지금에도, 유리는 단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훔칠 뿐이다. 이따금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오열을 참으려고 잔뜩 죄어든 여린 어깨가 바르르 떨린다. 앙다문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울음 대신 뜨겁도록 떨리는 빈 숨소리. 망설이는 것처럼, 프렌의 어깨에 닿으려던 손이 멈췄다가, 뿌리치듯 거두어졌다.

다시 유리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덜어내려 손가락을 뻗으면 그것마저도 우는 얼굴을 감추는 듯 돌린 고개에 거부당했다. 저쪽을 향한 목덜미에 늘어진 머리카락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듯해서 견딜 수 없어진 프렌이 오히려 자신이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를 내밀어 유리의 고개를 꼭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놀란 듯 물러나려 하는 몸을 꼭 붙잡으면, 이미 감정적으로 한계였던 유리가 약한 저항을 그만 두고 프렌의 어깨 죽지에 고개를 묻었다. 닿은 어깨로 흘러내리는 친구의 감정들이 놀라우리만큼 뜨겁고 또 뜨거워서 서러웠다. 목 놓아 울 곳조차 없어 가슴 안을 몇 번이고 헤집던 뜨거운 감정의 결정들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터져 나와 번뜩이며 환하게 빛을 발했다가, 곧 별이 지듯 사그라진다.

그 잔재와도 같이, 떨리는 어깨를 다시금 끌어안으면서 프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했다. 누우면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창고 방, 그 안에서도 유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추위를 피하는 새들처럼 서로 옹송그려 안은 등 위로 천천히 어두운 밤이 내리는 방 안에서, 친구를 안은 손에 좀 더 힘을 주며 프렌은 기원처럼 속삭였다. 그렇다면, 네가 울 수 있도록 내가 강해지자. 



***



여관용의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털레털레 수도 마도기로 향하던 유리는 친구인 프렌이 길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침의 기억대로라면 프렌은 오늘 탁아소의 일손을 돕기로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마침 장작을 나르던 중이었는지 그가 누워있는 옆쪽에 듬직한 나무토막 몇 개가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는 프렌에게 다가갔다.


“너 여기서 뭐해? 배라도 고파?”

“쉬잇!”


길바닥이 제 집 안방인양 누워있었던 주제에, 말을 거니 재빨리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대며 기겁을 하는 꼴을 보고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별 설명도 없이 다시 바닥에 귀를 대고 누워버리는 것을 궁금해진 유리가 프렌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가서 둘은 거의 동시에 발딱 일어나 앉았다.


“…뚱보?”

“맞지? 뚱보 울음소리 들렸지?”


들은 것이 정확하다면 지금 땅 속에서 들리는 목멘 것 같은 특이한 야옹소리는 아랫마을 술집의 ‘뚱보’가 틀림없었다. 이름 그대로 상당히 뚱뚱한 고양이인 뚱보(원래 이름은 따로 있는 모양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는 영악한 놈으로, 먹을 것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는 살랑살랑 잘도 애교를 부리지만 가난뱅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고양이라도 열 살짜리 고아에게는 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아는지 보통 때에는 근처로 다가오지도 않는 뚱보를 유리는 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프렌은 항상 그 노란 털을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근데 이 녀석 왜 땅 속에 들어가 있어?”

“…뒷골목 구멍에 빠진 거 아닐까?”


<골목 구멍? 어느 거?> 고개를 갸웃하는 유리의 머릿속에 무책임한 설계와 부실한 공사로 약한 지진이나 폭우가 내리면 으레 벽돌이 몇 무더기씩 아래로 가라앉는 구멍투성이의 골목길이 떠올랐다. 유리의 말에 같이 고개를 기울인 프렌이 말없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저 태도를 보아하니 그 고약한 고양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빤해서 유리는 프렌이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못을 박았다. <안 돼. 여관 아주머니가 물 길어오라고 하셨어.>


“그치만, 수도 마도기 있는 곳 그 근처이고, 잠깐만…”

“너도 장작 나르고 있잖아.”

“이것만 나르면 오늘 일은 끝이니까, 응?”

“........”

“유-리.”


우와, 비겁한 놈. 안될 것 같으니 금방 풀이 죽어 올려다보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이 제 저런 표정엔 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것이 틀림없다. 하기야 저 녀석이 그렇게 약은 녀석일 것 같으면 저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술집 고양이가 실은 평소에 쓰다듬게 해줄 듯 말 듯 아이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가오면 쑥 도망쳐버리면서 저를 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애진작에 눈치 챘으리라. 한참 친구가 하는 양을 빤히 쳐다보던 유리는 눈꼬리를 내리며 한숨을 폭 쉬었고 프렌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샐샐 웃는 그 얼굴을 보니 왠지 심통이 터져서 유리는 괜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보고만 오기다, 보고만.>

수도 마도기에 가지고 온 양동이를 밀어 넣은 유리는 양동이 안으로 물이 퐁퐁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뒷골목 쪽을 내다보았다. 구멍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이쪽을 향한 프렌의 동그란 등이 보인다. <뭐가 보여?> 혹시나 해서 말을 걸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구멍 속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프렌의 목소리가 조금 울렸다. <으응... 안보여.> ‘아랫’마을 밑에 또 다른 ‘아래’가 있다는 건 어쩐지 시시한 농담 같은 이야기였지만 사실 그 밑은 꽤 깊었는데, 빛도 제대로 닿지 않아 당최 그 밑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구멍들은 자칫하면 빠질 위험이 있어 어른들은 늘 골목 근처를 지나다닐 때는 조심하라고 충고하곤 했다. 어느 새 다 채운 양동이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유리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뭔가 저 녀석, 몸 너무 숙이고 있지 않나?

프렌이 손을 짚고 있던 바닥이 미끄러져 내린 건 그 때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내린 비로 구멍 가장자리 벽돌의 연결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으아, 저 바보!> 허겁지겁 달려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친구를 향해 손을 뻗어 간신히 그 허리를 잡았을 때, 유리는 그와 동시에 자신의 발밑도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벨이 울린다. 기억에 있는, 손님방과 카운터를 연결해놓은 여관의 점원 호출용 종소리였다. 어떤 손님인가 식사를 방으로 올려달라거나, 베개 밑에 머리카락을 좀 치워달라거나 하는 주문일 것이다. 유리, 유리 하고 시끄럽게 우는 종소리가 짜증났다. 유리는 객실이 있는 이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언제나 오르는 계단일 터인데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이다. <가고 있다니까!> 유리, 유리, 유리! 제 몸의 흔들림을 이기지 못한 싸구려 도금 종이 온 사방을 쳐대는 통에 쾅쾅 울리는 머리가 깨질 지경이었다.


“....리, 유리!”

“으....”

“유리! 정신이 들어?”


<다행이다….> 정신을 차린 유리는 여관 계단이며 시끄럽던 종소리는 어느 새인가 사라지고 딱딱한 바닥에 자신이 내팽개쳐진 것처럼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떨어진 충격으로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올려다 본 천장에 어룽어룽 물그림자가 비쳤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누워있는 자신을 흔들며 눈물콧물을 질질 짜고 있던 프렌이 반색을 하고 달려들었다. 누가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기는 것처럼 뒤통수가 쿡쿡 쑤셨다. <아얏..> 욱신거리는 뒷머리를 문질러보고 바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자 프렌의 눈에 다시 눈물이 함박 차올랐다.


“많이, 많이 아파 유리? 미안.. 미안해, 내가 이런데, 오자고.. 나 때문에….”

“뭐어...”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제 주먹만 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또 아니라서 한숨을 쉰 유리는 대충 프렌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뭔가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유리는 문득 바닥에 대고 있는 프렌의 무릎에 뭔가가 묻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너 무릎...! 피나잖아!”

“…응?”


흐른 피가 프렌의 온 무릎이며 그 근처 바닥에 얼룩덜룩 번져있다. 보아하니 제 무릎에 상처가 난지도 모르고 컴컴한 바닥을 기어 다닌 꼴이라 기가 막힌 유리가 얼른 프렌을 일으켰다. 의외로 상처가 꽤 깊은 것에 놀라면서, 살갗이 홀랑 까져 피가 진득하니 배어나온 그 위로 바닥의 먼지며 작은 모래들이 잔뜩 붙어있는 상처를 어떻게 털어낼까 고민하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빤히 보고 있던 프렌이 발갛게 부은 눈을 깜빡였다.


“안 아프냐?”

“...? 당연히 아파.”


<아, 그래….> 오히려 그런 것을 물어보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프렌의 얼굴에서 다시 상처로 시선을 내리며 유리는 머리를 긁적이려다, 아까의 통증이 생각나 그만 두었다.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고 견문도 좁지만 그래도 제도의 아랫마을에서 이제껏 나고 자란 유리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 ‘이상한 녀석’을 꼽는다면 프렌은 꽤 상위권에 위치할 것이다. 평소에 방긋방긋 웃는 표정인 것만큼이나 우는 일도 잦은 프렌을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음약한 꼬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실은 그 우는 것에도 규칙이랄지, 특징이 있었는데 지금처럼 남이 아프거나 다쳤을 때는 세상 다 떠내려가라 할 정도로 눈물을 짜대지만 제 상처나 일엔 그치곤 다소 무심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인 것이다. 하긴 아랫마을에 무르팍 좀 까졌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는 없고 생각해보면 평소에 남의 일로 그렇게 걱정하고 울어대는 게 비정상인 것도 같지만 제가 보기에도 심하게 까진 저 무릎은 굉장히 아플 것 같아서, 멀뚱한 친구의 얼굴과 어둠 속에서 까끌하니 번들거리는 상처를 보며 유리는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을 떠올렸고 자신이 느끼기에도 좀 애매했던 그 감정은 어느 쪽이냐면 서운함과 조금 닮아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탁탁 턴 유리는 뒤로 물러 앉아 다친 다리를 내밀고 있는 프렌의 상처를 후후 불고는 손으로 큰 먼지 등을 살살 털어냈다. 이미 굳기 시작한 피에 엉겨 붙은 알갱이들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뭔가 묶을 것을 찾던 유리는 자기 머리에 쓰고 있는 머릿수건을 떠올렸고 금방 삼각형 모양의 천을 풀어 프렌의 다리에 묶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팠는지 프렌이 이마를 찌푸리며 소리를 냈다. <아..>


“아파? 좀 살살 묶을까?”

“으응.. 괜찮아. 근데 유리, 그거 여관에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빨아서 돌려주면 되지 뭐.”

“응.”


그 말에 왜 눈물콧물로 얼룩진 얼굴을 해놓고 방그레 웃는 프렌의 오목한 머리꼭지를 죽자 사자 쓰다듬었는지, 이번에는 유리도 잘 모른다.



***



물, 불, 바람까지도 마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 속에 살고 있긴 하지만 마도기가 그 뒤처리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사용 후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후자들과는 달리 물은 사용하는 도시 크기에 따라 대규모의 처리시설이 필요했다. 지상에 설치하는 수로교는 인력이 너무 많이 들었고 붕괴의 위험이 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결계의 설치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도시의 하수처리시설은 마을 밑 지하에 자리 잡았다. 둘이 떨어진 곳은 바로 그 하수통로의 옆 쪽, 기다랗게 제방이 놓인 위였다.

어둠에 시야가 익은 후, 자신들이 떨어진 바로 옆에 시커먼 물결이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비교적 언제나 태연한 생각이었던 유리도 발 딛은 곳의 땅이 흔들리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모르긴 몰라도 떨어진 위치가 조금이라도 더 오른쪽이었다면 지금의 머리나 무릎 상처쯤은 별 소용이 없어졌을 것이다. 괜찮다는 유리를 꼭 봐야한다고 귀찮을 정도로 우긴 끝에, 통증이 가라앉자 유리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프렌이 고개를 저었다. 머리 뒤쪽으로 동그랗게 혹이 만져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그 부근이 좀 얼얼한 것 빼고는 유리가 느끼기에도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유리는 프렌의 무릎이 더 신경 쓰였다. 아까 이후로 프렌 자신은 아프다는 소리 한번 한 적 없지만 제방 벽을 더듬어 가며 걷고 있는 지금도 약하게 절뚝거리고 있는 다리 위를 묶은 천이 벌써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딘가에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돌아다니고 있긴 하나 이런 곳을 상처 소독도 못한 채로 계속 걷다가는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될 가능성도 있다. 떠올리는 머릿속조차 얼어버릴 것 같은 싸늘한 상상에 어깨를 부르르 떤 유리는 저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친구를 끌어당겼고 기대와는 다르게 프렌이 별 반응이 없자 더욱 불안해졌다. <야, 프렌..?> 뒤 쪽에 시선을 둔 채로 프렌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가 들려, 유리.>

그 말 그대로, 실은 아까부터 통로 저 끝에서 뭔가에 긁히는 듯 한 소리가 나고 있다. 제 생각에 빠져 소리를 듣지 못했던 유리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런 곳에 사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에게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프렌을 뒤로 감추듯 앞으로 나서며 유리는 그 무릎을 곁눈질했다. 저 다리라면 뭐가 나오던 간에 빠르게 뛸 수 없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할 거였다. 뭐야, 뭐가 있는 거야?! 유리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깜빡이며 소리 나는 쪽만 보고 있던 프렌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어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야-옹.”

“엥...?”

“뚱보!”


귀를 긁는 듯한, 목쉰 울음소리에 긴장이 탁 풀려 반쯤 주저앉은 유리를 두고 기쁜 목소리를 울린 프렌이 절뚝거리며 고양이에게로 다가갔지만 이번에도 역시 보기 좋게 퇴짜 맞았다. 금방 풀이 죽어 이쪽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프렌의 모습이 꼬시긴 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설렁설렁 걸어오는 뚱보도 화나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유리는 프렌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양이 쪽을 향해 두어 번 발길질했다.

걱정하던 고양이도 찾았겠다, 한결 가뿐해진 프렌의 표정이 어두운 와중에도 눈에 보일 정도여서 유리는 한순간 이 녀석이 상황판단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하고 의심스러워졌다. 처음 떨어진 골목길의 위치를 가늠해서 걷고 있긴 하지만 떨어진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는데다가, 걸어도 걸어도 눈앞에 있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둡고 시커먼 통로뿐이다. 출구는 어디쯤인지, 아니 아예 출구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매달고 걷고 있자면 무거워진 다리가 절로 질질 끌렸다. 이런 곳에서 멀쩡하니 뛰어다닐 수 있는 녀석은 바보 아니면 득도한 도인뿐일 터인데, 생각해보면 저 녀석은 평소에도 툭하면 눈치 없는 말이나 해대고 이상한 타이밍에 방글거리는 등 부정적인 쪽의 증거뿐이라서 유리는 지금도 고양이를 쫓느라 여념이 없는 친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 건지 뭐라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비단 자신의 부족한 어휘력 때문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에 한참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눈치 챘는지 금세 곁으로 다가온 프렌이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역시 머리가 아파? 유리.”

“글쎄... 너는?”

“무릎? 응, 괜찮아.”

“머리는?”

“? 머리도 괜찮아.”


<그치만 내가 다친 곳은 다리인 걸-.>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프렌은 같은 또래가 보기에도 무척 귀여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유리 마음속에 피어난 아련함만 더욱 증가시키고 말았다. 다가온 프렌의 머리꼭지를 다시 문질거리면서, 유리는 반드시 이 녀석(과 괜찮다면 한 마리 더)을 데리고 밖에 나가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런 유리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쓰다듬는 손길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얌전히 머리를 맡긴 프렌의 뒤로 짜증나는 소리로 야옹거리는 뚱보의 소리가, 어두운 아치형의 통로를 타고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새로운 각오를 다진 유리 일행이 몇 걸음 더 옮기자 걷고 있는 방향 저쪽의 통로를 기점으로 천천히 수로가 넓어졌다. 걷는 사이에 어느새 하수의 처리량이 많은 번화가 쪽으로 들어선 듯하다. 실제 마을 안을 걷는 것과는 거리감이 달랐기 때문에 그간의 공간개념에 어렴풋하게 인지적 갈등이 이는 것을 느끼면서 둘은 잠시 앞쪽 구멍에서 흘러나와 거대한 벽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웅장한 하수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통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이쪽과 저쪽의 제방을 갈라놓고 있는 틈새를 뛰어넘어야 했다. 먼저 천천히 달려가 틈새를 폴짝 뛰어넘은 유리가 프렌에게 손을 내밀었고, 다치지 않은 다리로 도움닫기한 프렌이 잠깐 휘청거리다 그 즉시 유리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그 반동으로 둘 다 제방 끄트머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아찔한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아연한 얼굴을 한 자신을 본 프렌이 눈치도 없이 당싯 웃자 아까 다쳤던 뒷머리가 다시 지끈지끈해진 유리가 어깨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남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 녀석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눈앞의 온갖 문제들이 사고 저편으로 훌훌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산ㅅ새처럼 날려 보낸 문제들 중에는 실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섞여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유리를 몇 번 토닥인 프렌이 다른 일행 쪽을 돌아보았을 때 그 불쌍한 고양이는 제 밑의 바닥을 박박 긁으면서 한껏 썽을 부리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 또 왜 저래?”

“못 건너는 거 아닐까?”

“헹, 안 다친 다리가 네 개나 있으면서?”

“유리...”


그 빈정거리는 말투가 어지간히 웃겼는지 저쪽의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눌러 참은 프렌이 더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유리의 귀가 어떤 소리를 잡아냈다. 마치 아까와 비슷하게, 날카롭고 가느다란 뭔가에 바닥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가 저편에서 울렸다. 혹시나 해서 뚱보를 돌아봤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뚱보조차도 그 소리에 뭔가를 느꼈는지 벽 끄트머리에 바싹 가서 붙었다. 저 꼴을 보니 아무래도 제 발로 이쪽으로 건너오기는 힘들 것 같다.

긁는 소리가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번에는 프렌도 놀라서 숨을 헉 하고 삼켰다. 주변에 퍼진 희미한 빛을 반사해 천장에 일렁이는 물그림자 사이로 몸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쥐를 닮은 한 무리의 마수들이었다.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프렌을 붙잡으려던 유리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비틀거릴 땐 언제고, 상처 따윈 잊었다는 듯 달음박질쳐 통로의 틈새를 뛰어넘은 프렌이 잽싸게 뚱보를 안아 올렸다. 잔뜩 흥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고양이를 붙잡느라 시간이 어물어물 지체되는 사이 몸이 단 유리가 그를 따라 틈새를 건넜다. <유리!> <너 진짜!!> 급하게 달려와 마물과 이쪽을 막아서는 것처럼 몸을 돌린 유리는 일단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하여간, 이 녀석은!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단순한 바보고, 상황파악을 했으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구제불능의 대 바보가 틀림없다. 이 와중에도 이제 완전히 아이들을 눈치 챘는지,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는 마물들의 무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프렌, 빨리!”

“응!”


버둥거리는 고양이를 안심시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다짜고짜 번쩍 들어 올린 프렌이 유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거의 동시에 통로 저쪽을 향해 뛰었다. 자신과 서로의 숨소리와, 바닥을 긁는 마물의 발톱소리와 찍찍 하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 뚱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수로 벽에 반사되고 울려 퍼져 정신없이 사방을 맴돌았다. 틈새가 바로 눈앞이었다. 막 한쪽 다리에 힘을 주고 도약하려는 순간 유리의 눈에 막 다친 다리를 휘청거리며 미끄러지는 프렌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넘어지는 그 순간에 뚱보를 힘껏 앞쪽 제방으로 던진 친구의 위로 마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뻗어지는 것과 동시에 유리의 목 안쪽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



오늘만으로 벌써 보는 천장인지, 눈앞에 뿌옇게 다가오는 익숙한 공간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유리가 낮게 신음했다. 딱히 어디라고 짚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 몸이 쑤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푹신한 베개에서 간신히 고개를 움직이면 마을 촌장인 헹크스 영감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대체 지하수로엔 왜 간 게냐?”

“그거야 프렌 녀석이...”


점차 아득하게 윤곽이 드러나는 기억 속에서, 덮쳐오는 마수의 그림자 밑으로 하얗게 질리던 프렌의 얼굴이 생생했다. 그리고 미처 피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아버린 녀석을 밀쳐 낸 순간 가슴으로 확 번지던, 차갑고 뜨거웠던 통증. <유리!>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눈동자가 반들반들 빛나서, 쓰러져 넘어지는 순간에도 유리는 이 녀석이 또 울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프렌은?>

그 말에 자연스럽게 아래를 향한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면 침대 위 자신이 누운 바로 아래쪽에 엎어져 잠들어 있는 프렌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인다. 어쩐지 몸이 무겁다 했더니 이 녀석 때문이었나. 두꺼운 이불을 헤치며 꿈지럭거려 몸을 일으키면 단단하게 붕대가 감긴 가슴의 상처가 찌릿하게 아팠다. 욱신거리는 상처 부근을 찬찬히 더듬어 살피는 유리를 본 헹크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곰방대의 물부리를 깨물어 딱 소리를 냈다. <피만 났다 뿐이지, 가슴 상처는 별 거 아니라 그러더라.>

이 영감이 남 일이라고. 대뜸 고개를 쳐들어 불만을 종알거리려 했던 유리가 갑자기 느껴진 머리의 통증에 다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으으….> 이마께를 더듬어보니 이쪽에도 붕대가 감겨있어 놀란 유리가 고개를 들자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심각했던 건 뇌진탕 쪽이란다. 정말이지 유리 네 녀석은….”

“…뇌진탕?”


수로를 걷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던 것이 비단 상황파악 못하고 너갱이를 빼놓고 다녔던 친구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는 유리를 보고 다시 혀를 찬 헹크스는 아직도 떨리는 손을 얼버무리기 위해 괜히 불도 붙이지 않은 대통을 뒤적거렸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조사하기 위해 수로로 내려갔던 기사들이, 온통 피투성이로 축 늘어진 유리와 울다 울다 지쳐서 잔뜩 열이 오른 프렌을 들쳐 업고 들어왔을 때는 노쇠한 가슴이 다 어찔하도록 내려앉았다. 있는 것, 없는 것 삭삭 긁어모은 돈으로 시내의 의사를 부르고 한바탕 난리를 피운 다음에 그래도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반대로 심장이 천장에 닿도록 널을 뛰었다. 내 자식 놈들도 뭐하고 사는지 모르고 지내는 마당에, 늙은이 심장을 이토록 쥐었다 폈다 하다니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고약한 꼬마들 같으니라고. 헹크스는 다시 혀를 찼고 그 시선을 눈치 챈 유리가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내참, 구멍 가까이 가지 말라면 어른 말을 들어야지. 떨어졌을 때 바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지금쯤 예가 아니라 결계 밖 묘지에 묻혔을 게다.”


이만하면 매번 사고를 쳐대는 녀석이라도 겁을 집어먹겠지 싶어 놓은 으름장 비슷한 것이었지만(게다가 반쯤은 사실이었지만) 유리의 반응은 노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잠시 놀란 눈을 크게 뜬 유리는 곧 생각났다는 듯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리가 들렸거든.”

“소리라니?”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내린 유리가 잠든 프렌 쪽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정확한 모양인지, 잠투정인가로 이불에 볼을 부비는 옆얼굴에 감긴 눈이 하도 울어 퉁퉁 부운 것이 보였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어린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했다. 처음에 머리를 다쳐 기절했을 때에도, 그 소리 덕분에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곤하게 잠들어 침대에 얹힌 자그마한 손에 금방 딱지가 앉은 할퀸 상처가 보였다. 아마 마물을 피해 뚱보를 억지로 안아 올렸을 때 생긴 상처이리라.

이상한 녀석이었다. 뭐하나 풍족하게 받은 것도 없는 주제에 그깟 고양이를 위해서 마물에게도 달려든다. 자기 상처는 깨닫지도 못하면서, 남이 아플 때는 제가 다칠 적보다 서럽게 울어 주었다. 겁을 내는 것과도, 소심한 것과도 다르다. 남의 나쁜 마음이나 속셈에 아랑곳하지 않고 뻗어지는 손은 오히려 절대적인 강함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미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다.

너는 그 마음으로, 다치고 상처 입으면서도 나를, 우리를 구해주고 있는 거야. 유리는 조용히 손을 뻗어 프렌 손등의 상처를 살살 매만졌다. 잠결에도 그 손가락 끝을 꼭 잡아오는 따끈한 손에 천천히 볼을 가져다 대면서, 유리는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지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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