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일어나.”

그리 높지 않은 위쪽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기억에 있는, 그러나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기억 속의 그것은 보다 더 묵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끄응 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움직여 푹신한 베개에 더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목소리에 한층 짜증이 섞였다. <일어나라니까.>

이윽고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오고, 뒤통수에 찌릿한 충격이 닥쳤다. 이번에는 유리도 짜증이 나서, 아직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주위를 살피면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녘이었다. 잠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이다.


“나가서 놀다 오라고 했잖아.”

“이미 하루를 꼬박 샜거든?”


<으….>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면 온 몸의 관절이라는 관절에서 뚜둑, 뚜둑 하고 꺾이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깨워진 탓인지 아니면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인지 뒷목이 뻣뻣하게 아파왔다. 온전히 일어나 앉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상체만 움직여 옆으로 돌아누운 후 턱을 괴고 올려다보면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진짜 25살의 나 맞아?”


얼굴 가득 한심해 죽겠어, 라는 표정을 하고서.



***



이야기는 만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다. 급한 의뢰들은 어느 정도 끝을 냈고 간만에 한가해진 오후 유리는 제도로 돌아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런 유리의 눈에도 제도는 하루가 다르게 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 곳곳에서 마핵을 대체하기 위한 많은 기술들이 개발되고 선정되어 이곳 자피어스에서 시범 운행되었고 아직까지도 불편한 점은 많았지만 사람들은 마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꽤 적응한 듯 했다. 황제의 배려인지 프렌의 출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랫마을에서도 이곳저곳 무너지고 허술한 곳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위, 아래 할 것 없이 거리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며 기분 좋은 활기가 넘쳐났다.

유리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한참 느긋한 기분으로 보수되기 시작한 아랫마을의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좁은 골목 틈에서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로 막 쌓아놓은 참인 벽돌더미에 앉아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고 있던 ‘그것’과 눈이 마주쳤을 때 유리는 한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

‘그것’은 어릴 적의 유리, 적어도 유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던 유리는 곧 자각은 없었지만 실은 지금의 자신은 헛것을 볼 정도로 매우 피곤한 상태이며 재빨리 여관으로 돌아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그 헛것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이 또한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이! 거기 너!!”


뒤따라오는 목소리도 발소리도 모두 환청이다. 유리는 발걸음을 재게 했다. 걷는 모습은 산보지만 속도는 거의 전력질주인 꼴이다. 그런 유리의 반응에 약이 올랐는지 따라오는 발소리가 좀 더 빨라졌다. 아무리 체격 차가 있다고 해도 속도를 무시한다면 어디까지나 ‘걷고 있는’ 유리와 아예 전력으로 따라붙고 있는 ‘그것’의 거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칫,> 흘끗 뒤를 돌아 차이를 확인한 유리는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힐 것이라 예상하고 가까운 골목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숨겼다. 그리고 한 숨 돌리려는 찰라,


“너 왜 도망쳐?!”

“?!”


어릴 적부터 아랫마을에서 숨바꼭질하며 자라난 몸이다. 특히 말썽을 저지르고 쏙 숨어버리기 일쑤였던 유리는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증축들로 꼬여버린 길과 골목들, 공간배분이 잘 못 되어 생긴 좁고 몸을 숨기기 쉬운 틈새들, 그 틈새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마을의 이곳저곳으로 빠르게 가로지르기 쉬운 샛길들에 대해서라면 아랫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프렌조차도 유리가 마음먹고 숨겠다고 작정하면 허탕을 치기 일 수였던 것이다. 진짜로 당황해서 말도 잇지 못하는 유리의 얼굴을 한순간 빤히 보던 ‘그것’은 곧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나.....?”




“그래서, 너‘도‘ 유리 로웰이란 말이지?”

“그래.”

“14살이고?”

“15살. ....이틀 뒤면.”

“아, 그러세요….”


<내가 지금 25살이니까, 10년 정도 전인가….> 유리는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어릴 적의 자신이며, 어떤 이유인지 갑자기 ‘이 시간’으로 와버린 것 같다. 처음에는 영 미심쩍은 눈초리로 아이를 보던 유리도 녀석이 행크스 영감의 담뱃대를 숨겨 놓았던 일이며 프렌이 고양이 때문에 질질 짠 일 등을 줄줄 읊어대자 마지못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만 알고 있던 거리의 샛길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녀석이 어릴 적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설명이 된다. 그렇다 해도, 과거의 자신이라니. 유리는 묘한 기분이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난 모험으로 이미 자신이 전보다 훨씬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어설픈 생각이었던 듯하다.

이 어린 ‘자신’의 말로는, 갑자기 눈앞에 빛이 확 하고 펼쳐지더니 여기에 와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는 것과 조금 다른 거리의 모습에 두리번거리고 있자면 거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고. 어쩔 수 없이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어른’ 유리와 마주친 것이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도망치다니, 왠지 기분이 나쁘잖아.”

“네이, 네이.”


볼이 불퉁해져서 대꾸하는 아이의 모습은 단순한 투덜거림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 말 속에 낯선 상황에 대한 불안으로, 필사적이었던 감정의 찌끄러기가 남아있는 것을 왠지 느낌으로 알았다. 어렸을 적의 자신은 이런 식으로 곧잘 감정을 감추곤 했던 것이다. 이런 걸 자각(自覺)이라고 하던가, 미묘하게 틀린 생각을 하며 대충 대답하면 아이는 그런 유리를 묘한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어른인 나, 기분 나쁜데.”




***




결국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유리가 두 명이 모여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서 일단 유리는 이런 일에 있어 제일 믿을 구석인 리타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다. 누구냐고 묻는 유리(작은 쪽)의 말에 유리는 대충 읊었다. <아스피오의 마도사야. 이름은 리타 몰디오.> 그 뒤로 뭔가 말이 더 이어질 거라 기대했던 모양인지 아이는 한참동안을 유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물론 유리(큰 쪽)는 그걸로 대화를 끝낼 참이었고 몇 걸음을 더 걸어간 후에야 아이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왜 그래?”

“…별로.”


겉보기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뚱한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유리에게는 아이의 머릿속에 온통 채워진 물음표들이 보이는 듯 했다. 모르는 척 정면을 보고 걷고 있으면 자신의 옆을 따라 걷는 어린 유리가 자신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인다. 그 행동이 너무 눈에 빤히 보여 씩 웃으면 아이는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렸다.


“…뭐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 한마디에도 발끈한 아이가 뭐라고 말하려다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목까지 올라온 불만을 입 속으로 삼킨다. 유리는 다시 픽 웃었다. 다 자란 후에는 어릴 적의 자신에 대해 떠올려본 적도 별로 없고 더군다나 자기 자신과 대화 비슷한 것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지만 실제로 눈앞에 어린 자신이 나타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어린 외양 따위를 보고 귀엽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르시스트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으면 무심결에 자꾸 놀리게 된다. 그런 유리가 영 못마땅한지 따라붙는 유리(작은 쪽)의 시선에 불만이 가득 섞여들었다.

우편국에 가서 대강의 사정을 담아 아스피오로 전서구를 띄우고 난 후 유리는 아직까지도 조금 뚱해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향후 거처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전에 묵고 있었던 하숙집에서는 이미 방을 비운다는 통보와 함께 남아있던 짐 몇 가지를 보내온 지 오래, 별의 포식 이후에는 길드 일이다 뭐다 해서 제도에 오래 머문 적도 없고 또 들른다 해도 프렌의 방이나 가까운 여관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훌쩍 떠나곤 했던 터다. 그렇다고 여관에 남겨 두자니 오늘 밤 외박 계획이 있는 유리는 그것이 영 껄끄러웠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유리를 눈치 챘는지 유리(작은 쪽)는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난 마을을 둘러보고 올게.”

“엉?”

“어차피 그 리타라는 사람한테서 연락 오려면 좀 걸리잖아? 10년 동안 아랫마을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니까 그동안 좀 보고 오겠어.”

“뭐… 그래라.”


말을 마치자마자 별 미련도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자신의 감정은 죽어라 숨기는 주제에 눈치는 빨라 남의 기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도움이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 어렸던 자신 그대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문득 유리는 막상 자신이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새삼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알게 모르게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속을 긁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착잡해졌다. 그리고 상념의 끝에 문득 언제나 그 비슷한 이유로 화를 내던, 그리고 마침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던 애인의 얼굴이 생각나 마음이 잠시 가라앉았으나 곧 그 녀석도 그 비슷한 정도로 자신의 속을 긁어댔으니 따지자면 또이또이지, 하고 남은 자존심의 마지노선을 사수한 유리는 그대로 자신도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



***



그랬던 것이 몇 시간 전, 어리긴 하나 쭉 아랫마을에서 자란 자신이니 별 문제 없고,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니 행여 해코지당할 염려도 없겠다 싶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신경을 끈 유리는 제도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함께 지낸 시간은 길다 하나 정식으로 마음 통한 기간을 생각하면 아직 깨가 쏟아지는 애인 사이여서 사랑스러운 얼굴은 봐도 봐도 늘 모자랐기 때문에 밤새 물고 빨고 엎치락뒤치락하고 나니 잠이 든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저도 모르게 까무룩 빠져들었던 단잠에서 깨워져 영 못마땅했던 유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이 녀석에게 프렌의 방을 알려줬던가, 하고 고민했다. 그것을 묻자 <왠지 네가 있는 곳은 알 수 있었어.>라는 어딘가 멍뎅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다.


“그나저나 왠 성? 귀족의 정부라도 된 거야?”


<설마 몸으로 벌어먹거나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쓱 훑고서 이어지는 말이 빈정거림치곤 묘하게 진짜로 걱정하고 있는 듯 한 말투라 유리는 그런 어린 자신을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15살 무렵부터는 유혹도 꽤 들어와서 생전 그런 쪽의 욕구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이 나이 먹고 꽃놀이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될 줄은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그랬던 일이 왜 이렇게 되었던가, 고민해봤자 온전한 제 사람과 따먹는 별은 어찌 단지 밤을 꼬박 새워 녹여먹어도 부족한 것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유리는 한숨만을 대신 내쉬었다.


“응… 유리?”

“내가 깨웠냐?”

“아니... 일어나야 할 시간인 것 같아.”


잔뜩 졸음에 취한 눈을 부비며 일어나 옷장 속의 새 옷가지를 꺼내 입는 애인의 뼈가 도드라지는 하얀 등을 잠시 만족스런 심정이 되어 응시하던 유리는 아까부터 아이가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마치 뭔가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저항이라도 하듯 벽에 딱 붙어 뒤로 벌린 양 팔로 창틀을 꽉 쥐고 있는 어린 자신을 발견하고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 왜 저래??>


“유리? 거기 뭔가 있어?”

“…아니, 별로.”

“?”


아무래도 프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아쉬움인지 안심인지 입맛을 쩝쩝 다신 유리는 자신을 따라 시선을 둔 프렌을 향해 웃어주고는 누운 자세에서 손을 흔들며 애인을 배웅했다. 뭔가 이상한 유리의 태도에 프렌은 아직도 조금 의아한 눈치였으나 저런 태도라면 물어도 별 대답을 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곧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통하는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잠시 침묵이 맴돌다가 소란하게 깨졌다.


“너 미쳤어??!”

“뭐야, 갑자기.”

“저, 저건 프렌이잖아!!”


<역시, 몇 살이 되어도 알아보는구만.> 나름 건실한 자신의 감식안에 자부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큰 쪽)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는지 유리(작은 쪽)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너 그, 저 녀석이랑….>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걸려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문장을 완성한 아이의 반응에 유리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아직 하기 전인가. 생일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하… 하다니.. 어, 어떻게 저 뭣도 모르는 녀석이랑…!”

“일일이 시끄럽네. 이쪽은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나니 그 뭣도 모르는 놈 계략으로 여장하고 무대에 올랐던 일이며, 죽은 줄 알았던 녀석 원수 갚는다고 새빠지게 고생한 일 등 여러모로 험난했던 여정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 유리(큰 쪽)는 <어차피 얼마 안가서 할 테니까 그렇게 요란 떨지 마>라는 중대한 사실을 누설해 자꾸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유리(작은 쪽)의 입을 틀어막았다. 혼란으로 질리다 못해 벌겋게 달아올라 입을 다문 어린 자신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저 때 골머리 엄청 썩었었지, 나….“


일생을 걸쳐 등 줄기처럼 자라난 감정의 싹이 가슴께를 간질이던 시기였다. 언제 묻어두었는지 알 수 없어 모른척하던 연정이 하루가 다르게 뭉텅뭉텅 자라나는 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에 몇 번이고 벼락이 쳤다. 들킬 새라 덮고, 덮어도 덮은 그 아래를 뚫고 올라오는 눈 시리도록 찬란하고 원망스러운 그 끄트머리를 어쩔 줄 몰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프렌과 몸을 섞었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단지 마음 한 구석에 감추고 묻고 살아야 하리라 여겼던 감정이, 간신히 이때까지 오는 데 오래도 걸렸다 싶어 아련한 기분이 든 유리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금 웃었다. 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프렌의 공이다. 항상 도망칠 궁리만 했던 자신에도, 날선 말들과 냉담했던 태도에도 질리지 않고 온 몸으로 부딪쳐 왔던 것이다. 새삼 그런 애인이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영 무서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아직도 망연자실해 있는 어린 자신에게 유리는 나직하게 덧 붙였다.


“...그 놈 조심해 임마. 만만한 놈 아냐….”



***



“바보라고 하지 마!”

“흥! 바보가 바보스럽게 바보바보하면서 바보짓하고 있는 바보 같은 광경을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해!! 몇 번이고 말해준다 이 바-보!”

“이이익...!”


<...뭐야, 이 바보 싸움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마물과 거기에 매달린 배에 감탄한 것도 잠시, 선실로 들어가자마자 펼쳐진 여러 가지로 굉장한 광경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껏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뒤로 유일하게 유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 챈 라피드가 이쪽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앉은 자세에서 뒷다리로 귀 뒤쪽을 탈탈 긁었다. 리타가 까탈스럽게 구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그래도 꽤 반격할 수 있게 된 카롤이 의외로 저 폭언을 받아치지 못하고 그대로 들어주고 있다. 물론 반격하지 않는 상대는 좀 봐준다, 따위는 먼 얘기인 리타는 그 성격의 괴팍함과 함께 자랑거리인 입담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이런> 피식 웃으며 거의 울상이 된 길드의 수령을 돕기 위해 걸음을 떼면 어린 자신은 또 묘한 시선을 유리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번엔 보모야? 바쁘게 사네.”

“...뭐 그렇지.”

“대체 뭘 하고 사는 거야, 미래의 나는.. 저런 어린애들이랑.”

“그렇게 어리지만도 않지만?”

“무슨 소리야,”


적당히 대답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리(큰 쪽)는 이어진 유리(작은 쪽)의 말에 덜컥 멈춰 섰다. <안제 누나가 그 때 아일 가졌다면 저 정도 나이일거라고.> 그 이름의 익숙함에 설마, 하면서 뒤를 돌아보면 아이는 어이없게도 조금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

“안젤라, 아랫마을 술집에서 서빙 하던 14살 연상! 뭐야, 너 설마 잊어버린 거야?”


<첫사랑이잖아!> 이번에야말로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 가득 의심을 채운-미래의 나고 나발이고 실은 이거 다 공갈 아냐?―아이를 보며 유리는, 잠시 자신의 첫사랑은 벌써 예전에 안젤라가 아님이 밝혀졌다는 사실과 어린 자신이 상당한 산술적 비약을 하고 있다는(혹은 리타, 카롤의 나이를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 중 어느 것을 지적해줘야 할 지 고민했다. 덧붙이자면 안젤라가 처음 잔 날 임신했다손 치더라도 지금 시점에서 아이는 끽해야 10살 정도일 것이며, 그녀가 자신의 진짜 첫사랑과 닮은 것은 파란 눈동자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 태풍이 불어치는 저 질풍노도의 시기에 자신의 첫사랑이 실은 상냥했던 D컵의 웨이트리스가 아니라 같은 남자, 그것도 현 시점 기준 20년 지기 불알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또 어떨까 싶어 유리(큰 쪽)는 잠시 망설였다. 이건 나르시시즘이나 자기방어적인 의미 이전에 남자로서의 재기 가능성이라고 할까, 여튼 좀 예민한 문제였다. 어쨌든 이런 유리(큰 쪽)의 갈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끝났다.


“유리, 그 꼬맹인 또 뭐야?”

“유리, 혼자서 뭘 그렇게 말하고 있어?”


눈앞의 광경에 싸움도 잊은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 <뭐야, 넌 저 꼬마가 안보여?> <저긴 유리밖에 없잖아!> 다시 동시에 말을 꺼낸 두 사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유리를 올려다보았고 시선을 받은 유리는 어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작은 쪽)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라.“

“뭐, 뭐야... 혹시 유령?!”


그 말에 반응이 가장 빨랐던 리타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걸음 물러섰다. 그런 리타를 보고, 다시 유리와 유리가 보고 있는, 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번갈아 본 카롤이 어리둥절해서 중얼거렸다.

“뭐지 이 상황... 잘 모르겠어.”


***



“그러니까, 지금 유리 옆에 어린 유리가 있단 말이지?”

“엉.”

“유리와 리타는 걜 볼 수 있고?”

“나한텐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데. 안 보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뭔가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네….> 둘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유리는 아직까지도 탁자 끄트머리에 간신히 붙듯이 앉아있는 리타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작은 쪽의 유리가 자신에게는 보이고 카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이쪽으로 눈을 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리타에게 설명을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일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카롤이 말을 이었다.


“그치만 어린 유리라면 유령은 아니잖아? 유리는 살아있고.”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쪽의 해석도 있단 말이야![각주:1]


그 말에 소리를 빽 지른 리타가 반사적으로 이쪽을 쳐다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까딱 대고 있던 어린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아이가, 실은 조금 상처받았다는 것을 눈치 챈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 대로라면 리타, 지금 이 상황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긴 하다는 거야?”

“…어느 정도는.. 원인 같은 건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럼 부탁해, 리타. 지금 믿을 만한 건 너 뿐이다.”

“에...”


그 에누리 없는 부탁의 말에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의 유리는 이런 식으로 남에게 의지하거나 하는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가슴을 울려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카롤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고 과연 리타도 이 말만은 외면하지 못했는지 끄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리타는 발갛게 붉어진 얼굴로 <그, 그럼 일단 저 녀석이 맨 처음 온 장소를 조사하게 해줘. 거기 가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등을 중얼중얼 말했고, 그런 리타의 시선이 이번에는 똑바로 어린 유리에게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큰 쪽의 유리가 조금 웃었다.


***



중간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러 갔던 쥬디스와 레이븐, 성을 들렀던 에스텔이 합류해서 또 한바탕 소요를 치르고 나니 결국 저녁 무렵이 다 되도록 얻은 소득이란 어린 유리의 호칭뿐이었다. 어쨌든 둘 다 유리인 셈이니 부르기 불편할 것 같다는 에스텔의 역시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제안으로 벌어진 토론은 사실 그날의 시간을 낭비한 가장 큰 범인이었고 덤으로 몇몇 인물에게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을 남겼다. 그 인물 중 하나인 유리(작은 쪽)는 돌아가는 길 내내 그 느낌을 곱씹으며 뚱해 있었다.

그런 유리(작은 쪽)를 영 이해 못할 것도 아니라서 유리(큰 쪽)는 머리 뒤로 팔짱을 껴 막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꼬맹이, 유-쨩, 고스트(유령) 유리까지는 그럭저럭 얌전히 듣고 있었던 유리(작은 쪽)도 유리 Jr.에 이르러서는 무심결에 표정을 바꿨다. 마침 쥬디스가 <어머, 시기적으로 보면 저 쪽(어린 유리)이 먼저일 텐데?> 라며 살짝 말려주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물론 큰 쪽의 유리로써도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입장에서 저렇게 큰 주니어가 생기는 것은 사양하고 싶긴 했다. 결국 어린 유리의 호칭은 유-쨩으로 대강 통일되었지만 두 유리에게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유리의 경우에는 특히 연하의 동료들에게서- 듣는 그 호칭은 유리 Jr.보다 훨씬 더 낯간지러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쥬디스가 준 것이 도움이었는지 어땠는지는 애매해져버렸다. 이러저러한 대화의 흐름에 말려 ‘유-쨩’을 막지 못했던 유리는 앞으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동료들에게 유-쨩을 데려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호칭 말고도, 동료들이 그들에게 준 것은 또 있었다. 여러 가지로 지친 몸과 마음과 또 하나의 자신을 동반해서 성 근처의 여관으로 돌아가면, 방 안에는 영광스럽게도 현 제국 기사단장이 친히 왕림해 있었다.


“소식 들었어, 유리. 어린 유리가 보이게 됐다면서?”


이 아저씨가 한창 얘기 중에 급히 올려야 할 보고가 생각났느니 어쩌니 하더니 이런 거였나, 아까 느꼈던 사소한 궁금증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프렌은 유-쨩과 구면이었다.


“아침에도 있었어. 넌 못 본 것 같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구나. 몇 살 정도야?”

“14살이라고 하더라.”


<14살의 유리라, 보고 싶네~> 따위를 말하며 방글방글 웃는 애인은 뭐든지 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사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유리의 입장에서 유-쨩이 프렌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행스러웠다. 얼핏 생각하면 어릴 적부터 다 보고 자랐으니 지금에 와서 저런 모습을 본대도 별 문제 없는 것 아닌가 싶겠지만 지금도 프렌을 앞에 두고 안절부절 못하는-그래봤자 겉은 뚱한 무표정이지만-저 어설프고 풋풋한 자신을 지금의 저 프렌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은 유리에게 하기도 버거운 상상이다. 어렸을 때야 프렌이 워낙 둔해서 쉽게 숨길 수 있었다지만 이미 볼장 못볼장 다 봐서 유리 한정으로 어느 정도 눈치가 깨이기 시작한 프렌에게 저 녀석을 보였다간 저 때부터 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를 들켜버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런 유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프렌은 여관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제 저녁에 체크인 한 이후로 들어온 적이 없는데다 유리가 갖고 있는 짐이란 것도 단출해서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 안의 모습에 약한 위화감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과 유리 외에 다른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의 일로 이미 자신에게는 어린 유리가 완전히 안 보인다는 것을 이해한 프렌이었지만 그래도 남들은 다 볼 수 있는(그렇지는 않다) 연인의 어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꽤 서운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야 어떻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유리, 지금 작은 유리 이곳에 있어?”

“엉? 그래.”

“어디쯤이야?”

“저-쪽.”


유리는 태연하게 방 안 침대 모서리를 가리켰고 사실 그 방향은 지금 유-쨩이 서있는 책상 옆과는 거의 반대방향이었다.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표정을 구겼던 유-쨩은 곧 프렌이 유리가 말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인사하기 시작하자 멍뎅한 얼굴이 되었다. <안녕, 유리. 나 프렌이야. 지금은 유리랑 동갑인 25살. 물론 나한텐 네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처음 물어올 때부터 이미 그 의도를 알았는지 큰 쪽의 유리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제국 기사단장이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말을 걸고 있었다. <으와... 진짜 미래의 나 성격 나빠….> 물론 자신도 종종 프렌에게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는-다분히 편파적인 기억을 더듬은 후 유-쨩은 지금도 ‘나는 제국과 길드의 하늘에 우러러 거짓 하나 말한 적 없어요~’라는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고 있는 미래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고약한 거짓말에 속아 한 점 의심도 없이 눈을 반짝이며 전혀 엉뚱한 곳에다 녹을 듯 미소 짓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프렌이라니. 10년의 세월에도 변함없이 순진하고, 착하고, 귀여운(것 같이 느껴지는) 친우의 모습에 왠지 모를 조바심을 느끼면서-윽, 왜 저 녀석은 변한 게 없는 거야!― 덤으로는 저 달콤한 미소가 받는 사람 없이 허공으로 녹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유-쨩은 저도 모르게 프렌이 향하고 있는 쪽, 침대 모서리로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얼굴까지 발개진 유-쨩이 프렌의 미소를 정면으로 받는 바로 앞까지 오기 전 유리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던졌다.


“아, 프렌. 그 녀석 방금 문 앞으로 옮겨갔어.”

“?!”

“그래?”


프렌이 즉시 몸의 방향을 틀어 다시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등 갑주와 마주하게 된 유-쨩의 눈에 그렁거리는 것들 중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어이없음과 분노로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 유-쨩을 흥흥 웃으며 모른 척 하는 유리의 뒤로 받는 사람 하나 없는 대화를 늘어놓는 제국 기사단장의 목소리만 방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



연구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유-쨩에 대한 몇 가지 신체검사와 아이가 발견된 장소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유리는 라피드와 함께 원래 리타의 몫인 길드의 의뢰를 처리하러 수도 근처를 돌아다녔다. 검사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을 소비했고 그날의 검사가 끝나면 아이는 유리의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검사 후에는 으레 리타가 반사 신경이 어떠네, 에알의 폭주가 어떠네 떠들어댔지만 귀에는 잘 남지 않는 말들이었다. 키가 큰 수풀 밑에서 자라는 약초를 모아야 하는 의뢰는 어렵진 않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유리는 아예 텐트와 취사도구를 챙겨 돌아다녔고 거의 매일 밤을 혼자 여관방에 남아 있을 유-쨩을 걱정한 길드원들은 아이에게 연구실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익숙하지만 낯설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어둑한 거리를 걸어 여관방으로 돌아가면 닫힌 문에서는 작게 불빛이 새어나왔다.

톡, 톡 문을 건드리면 곧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막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연 프렌이 환하게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방 안쪽에서 쏟아지는 등잔빛 같이 노랗고, 따스하게 반짝이는 웃음이 그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공간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어서 와, 유리. 검사 힘들었지?”




유-쨩에 대한 연구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자 리타는 맡고 있던 의뢰를 유리에게 부탁했고 유리는 당연히 수락했다. 의뢰품인 약초는 전문가 외에는 감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라피드의 후각은 이미 약초 찾기에 그 효능을 검증받은 바 있었다. <저 개 진짜 잘 찾던걸? 그래봤자 찾았던 약초는 어느 바보가 다 잃어버렸지만.>―처음에 둘이 싸우고 있었던 이유는 이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어쨌든 유리가 꽤 자주 방을 비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때부터 프렌은 유리의 여관방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침 순찰 가기 전에, 점심 이후 짧은 휴식시간에, 또는 업무를 모두 끝낸 늦은 저녁에. 귀족의 삶엔 별 관심이 없었던 어린 자신의 눈에도 기사단장의 업무는 그리 한가한 것 같지 않아 보였고 이곳에 와봤자 프렌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프렌은 틈날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과 이 세계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 거 혼잣말이랑 다를 거 없지 않냐구….> 한숨을 폭 내쉰 유-쨩은 빈 침대에 엎드리듯 누워 조근조근 이어지는,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여기 없더라도 프렌은 알지 못하고 이곳에 찾아와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자신을 위해.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 어느 곳에, 어느 시간에 있어도 결국 자신은 다시 저 녀석 곁으로 돌아가리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유-쨩이 나타난 지 이레 째 되는 맑은 오후에도 프렌은 어김없이 유리의 방을 찾았다. <유리, 있어?> 검사도 거의 막바지여서 일찍 방에 돌아와 있던 유-쨩이 침대 기둥을 똑똑 두드리자 프렌이 웃으며 침대 가장자리로 다가왔다. 프렌이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한번 출렁하고 움직였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기둥을 두어 번 더 두드리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던 프렌이 빙그레 웃었다.


“미안, 유리.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어떤 일??>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낸 목소리가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그 말보다 조금 늦게 반응하듯, 천천히 고개를 기울인 프렌의 이마 위로 조금 길게 자란 앞머리가 얇게 흐드러졌다. 조용한 방안에 자신과 사락거리는 옷감 스치는 소리 뿐,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싸늘함에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프렌이 침대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작은 유리….”


<귀여운 모습의 유리를 보면 기운이 날지도.> 말에 덧붙인 웃음이 외려 부서질 것 같아 깜짝 놀란 유-쨩이 몸을 기울여 프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내린 앞머리로 조금 그늘이 진 얼굴은 어쩐지 어릴 적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다. 고민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 만들어내는 듯한, 조금 쓰게 웃는 표정. 유-쨩이 알아온 프렌은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아니었다. 외려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웃고, 울고 혹은 화를 냈다. 그 솔직함이 부럽고, 때론 화가 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소중한, 그 웃음을 언제까지나 지켜주고 싶었던 친우는 어느새 훌쩍 커버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모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때에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 녀석은…> 어느 샌가 자신이 부쩍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리에 없는 또 하나의 자신을 탓하며 조금 더 다가서면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던 미간에 가늘게 주름이 잡혀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깨닫지 못한 듯 뺨으로 드리워진 채인 길쭉한 속눈썹의 그림자가 물속을 휘젓듯 어린 유리의 마음에도 선연하게 파문을 그었다. 시선을 내리면 어릴 적보다 조금 색을 잃은 것 같은 창백한 입술이 애처로웠다. 닿을 수 있다면, 축 쳐진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고, 손을 잡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네게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네가 다시 웃는다면.

천천히 잔물결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멈추고, 또 다시 흔들린다. 숨조차 잊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단지 닿기 위해서 다가가는 순간은 시간도 멎은 듯 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


“…유리?”


막 닿을 참이었던 입술이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방금 나 무슨...?!>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당황한 유-쨩이 프렌 쪽을 쳐다보았지만 프렌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서 프렌이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가면 큰 쪽의 자신이 막 문을 연 채인 자세로 멈춰서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유리. 근데 왜 그러고 있어?”

“아니... 좀 심란한 장면을 봐서.”

“심란한 장면?”


고개를 갸웃한 프렌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척척 방안으로 걸어 들어온 유리가 침대 앞에 서서 당황했는지 아까 뒤로 물러난 자세 그대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어린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리타가 검사 결과 나왔다고, 들으러 오라고 하더라.> 겨우 정신을 차린 유-쨩이 꼼지락거리며 침대에 내려올 때까지도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듯 한 애인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본 유리는 곧 프렌에게로 고개를 숙여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

“에, 유리?”

“그런 표정 하고 있으면 누가 잡아먹어도 모른다.”

“…이런 짓 하는 거 유리밖에 없다구.“


<네, 정답.> 애인의 투덜거림을 대충 넘기며 모르는 척 유-쨩의 얼굴을 내려다본 후 픽 웃는 얄미운 얼굴은 분명 확신범이었다.



***



“‘뭣도 모르는 녀석’하곤 안하는 거 아니었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던진 그 말에 그때까지도 복잡한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던 유-쨩이 고개를 들어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앞서 가고 있는 자신의 등을 향하던 시선이 다시 길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을 느낀 유리는 뒤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얕게 한숨을 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고, 그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물어본 자신이 왠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낯 뜨겁지만 자신이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뭐라고 부르는지, 유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자신에게 질투라니 뭐가 뭔지 자신도 잘 알 수 없게 되어서 그저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옮기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으면 뒤에 따라와야 할 작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미 꽤 멀어진 뒤에야 깨닫고 돌아보면 어린 자신은 길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항상 이래?”

“엉?”

“항상 이런 식이냐고. 너는 길드일인지 뭔지로 바쁘고, 프렌은 혼자 힘들어 하고 있어.”

“......”

“저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어. 미래의 나인 ‘너’라도, 지금 프렌이 떠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지.”

“.......”

“너는 무엇을 위해 프렌 곁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아니 오히려 그 앞날에 짐이 될 뿐이라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 녀석이 걸어갈 길이 빛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자신의 입장이며 아무데도 고할 수 없는 이 하잘 것 없는 마음일랑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도 좋았다. 이미 수백, 수천의 밤을 반복했던 생각들이 어린 자신의 눈 속에서 곧게 반짝이며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다. 그 생각들은, 실은 지금도 마치 어딘가에 걸린 등불이 켜지듯 떠올라 머릿속에서 깜빡거리곤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안쪽의 불꽃이 속삭인다. 실력도, 인품도, 교우관계도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할 제국의 기사단장. 세상 어디서나 바람결을 타고 들려올 그 이름을 단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귓가에 담는 것만으로, 그 아련한 울림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아니, 그렇게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이제 와서 그 녀석을, 모든 것을 놓을 순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여전히 멈춰선 채인 아이에게로 다가가며, 유리는 마치 작은 등불을 불어 끄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많은 일이, 있었다고 말했잖냐.”



***



“…그러니까, 두 시공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저 꼬맹이가 여기 와 있는 거야.”

“....어?”

“....하?”


두 유리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내자 리타의 눈초리가 더욱 치켜 올라갔다. 아까의 미묘한 잔재로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다소 멀어져있던 두 유리는 지맥과 에알의 응축, 그에 따른 급격한 중력증가 현상과 시간왜곡, 인간 정신의 분류에 대한 리타의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설명에 사이좋게 패배했다. 거의 탁자에 엎어지다시피 한 두 사람을 소리 없이 노려보던 리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작은 동작에 며칠 밤샘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유리는 새삼 선실 책상이며 바닥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들과 복잡한 술식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종이들, 실험도구들을 둘러보고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탁자로 다가간 리타는 그 위에 놓여있는 종이들을 한참동안 뒤적여 어느 한 장을 빼내고 의자 위로 굴러가있던 펜을 주워 종이 위 어떤 구절에 크게 동그라미를 몇 번 친 후 그것을 유리들에게 내밀었다. <자.> 종이 위에는 당최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긴 계산식과 방금 동그라미가 쳐진 120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통로들의 역할이 바뀌는 주기는 약 120시간. 즉, 120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골목으로 가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과연, 천재마도사소녀.> 자신의 눈에는 그저 잉크 흔적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하려고 노력하며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에 유리의 어깨 너머로 종이를 흘끗 들여다본 후 이미 이해는 포기한 듯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선실 안에 한순간 침묵이 오간 후 아까부터 책 더미 속에 반쯤 묻혀있던 카롤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120시간 뒤라면, 오늘 저녁 쯤 아니야?”



***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말도 안 돼!”

“그도 그럴 게 밤낮없이 조사했는걸, 리타.”

“에스텔이 돌아갈 때 알려달라고 했는데!”

“일단 지금은 뛰어!”


네 사람은 정신없이 좁은 골목길을 달려 내려갔다. 제도 내에는 피에르티아 호를 수용할 만한 넓은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배를 둔 곳에서 유-쨩이 처음 발견된 아랫마을의 골목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아늑한 저녁 분위기에 잠겨있던 마을에 작은 소란이 일고, 유리 일행이 지나가는 뒤마다 쌓여있던 먼지며 막 걷고 있는 빨랫감들, 마주친 사람들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아랫마을의 지리를 잘 아는 두 유리들이 선두를 달리자 카롤과 리타가 따라 붙었다. 길이 익숙하다 해도 어린 몸에 이 속도는 버거웠는지 숨을 꽤 할딱거리면서 유-쨩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왜, 그 골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데?”

“애초에 통로가, 연결된 곳이니까! 다른 장소보다, 돌아가기가...!”

“그거, 그 얘기 아냐? 이미 구멍이 나 있으니까, 으, 벌레 구멍같이….”


뭔가 싫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말하면서도 진저리를 치는 카롤을 본 리타의 표정이 구겨졌다. <벌레 구멍... 넌 꼭 말을 해도...!> 그 말에 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머리 위를 사수한 카롤이었으나 그가 기대했던 대로의 응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움찔해서 반쯤 감았던 눈을 뜨며 앞을 올려다보자 눈앞에 아직 보수를 덜 했는지 벽돌로 반쯤 막힌 벽이 펼쳐졌다. 그 벽 너머로 뭐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는 게 ‘보였’는데, 그 묘하게 단절된 것 같은 공간의 영향인지 마땅한 통로도 없는 골목에 바람이 몰아쳐 쌓여있던 벽돌이 덜걱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리타, 저거냐?> 골목에 쌓여있는 입자가 작은 부유물들이 주위를 떠도는 것을 눈에 들어가지 않게 들어 올린 팔로 가린 유리가 휘청거리며 묻자 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옆으로 시선을 향하자 다른 세 사람과는 다르게 무섭도록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유-쨩이 보였다. 거의 혼자서 태풍의 습격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쨩이 바람의 기세에 넘어지지 않도록 유리는 반사적으로 아이의 어깨를 받쳤다. 앞 쪽의 빨아들이는 힘에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선 유-쨩이 어깨를 받치는 유리의 손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머리채가 바람에 날려 정신없이 흔들렸다. <.....해...!>


“.....뭐?”

“그 녀석 잘 부탁한다고! 혼자 내버려두지 말란 말이야!”

“너 말야,”


<누구한테 그런 말 하는지 알고 있냐?> 말을 꺼내는 찰라 정면에서 몰아친 바람에 숨이 턱 막혀 반쯤 소리를 꺼내다 만 유리가 컥컥거리자 유-쨩이 상황도 잊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또 다시 바람이 불어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잔뜩 먹은 유-쨩이 퉤퉷 입맛을 다신 후 성가신 머리를 붕붕 흔들었고 그 직후 눈이 마주치자 두 유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뒤를 받치는 든든한 팔에 의지해 기운을 낸 유-쨩이 벽 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안가서, 따라 잡을 테니까!”


어린 유리가 유리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은 것과 동시에 눈앞의 빛이 증발해버리는 것처럼 그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도 잦아들었다. <뭐야? 돌아간 거야?> 바람 때문에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있던 카롤과 리타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탁탁 매무새를 정리하며 골목 안을 둘러보았다. 바람이 사라지자 공중에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저녁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가라앉는 골목 안에서 유리는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어린 유리가 했던 말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린 자신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유리는 입 꼬리를 끌어 당겼다.




톡톡, 두들기는 소리에 버릇처럼 문을 열었던 프렌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발견하자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약간 삐딱한 자세로 문 앞에 서 있었던 유리가 인사를 건네자 금세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그래... 작은 유리, 돌아갔구나.”

“방금 전에. 너도 부를 껄 그랬나?”

“아니야. 꽤 아슬아슬했었다면서.”


그렇게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아무리 봐도 조금 서운한 빛을 띠고 있는 것 같아 유리는 잠시 어린 유리가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얼마 안가서, 라고 했겠다, 그 버릇없는 녀석.> 그 작은 중얼거림에 또 다시 의문을 표시하는 프렌을 잠시 바라본 유리는 그 곁으로 다가와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후 손바닥으로 혈색 좋은 뺨을 어루만졌다.


“커다란 나로는, 불만이야?”


투정인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유혹인 것도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린 프렌은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술을 겹치며 프렌이 작게 속삭였다. <아니, 이 유리가 좋아.> 그 말의 달콤한 울림에 아찔할 정도로 만족감을 느끼며 유리는 눈을 감았다.


‘아직 백 년은 빠르다, 꼬맹아.’




***



  1. 1)평행우주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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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주의



창문은 잠겨있었다. 기사단장 집무실의 창틀에 올라앉아 유리는 다시 창살을 흔들어보았다. 빈틈없이 잠긴 창문은 덜걱덜걱 소리를 냈다. 따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전에 힐끔 들여다 본 안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로써는 드물게 허탕 질이었다.

<거 희한하네. 요 계집애가 어딜 갔담.> 얼마 전 제국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프레나 시포- 통칭 프렌이라고 한다―는 최연소, 그리고 최초의 여성 기사단장이라는 파격적인 수식어에 걸맞게 그 군공 또한 엄청났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업적들이 거의 다 그렇듯 가만히 앉아서 얻어진 것들은 아니었다. 소대장 시절부터 전 기사단장의 심복으로 온갖 국가의 실질적인 대소사들을 도맡았고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후부터는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은 줄었지만 대신 집무실에 앉아 행정적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제국 곳곳에서 날아온 결재 서류들은 그 끝을 몰랐고 따라서 언제 찾아가든 유리는 책상에 반듯이 앉아 서류에 날인하는 프렌의 작은 등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도시 방위 등을 이유로 출동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병영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보니 오늘은 그런 이유도 아닌 듯 했다. 슬슬 궁금해진 유리는 그 근처를 서성이다가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오, 사과머리.”

“위칠입니다!”


유리는 안경을 치켜 올린 작은 마도사가 눈을 흘기는 것을 못 본 척 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미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유리는 위칠의 이름을 기억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동안 그 얄미운 얼굴을 바라보던 위칠은 한숨을 폭 쉬었다.


“단장님 뵈러 오셨나 보네요.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엥? 무슨 얘기?”

“단장님 오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몸이 안 좋아지셔서.”

“뭐?”


<아파? 그 녀석이?> 그 얼빠진 얼굴에 위칠은 한순간 좀 꼬시다는 생각을 했고 황급히 고개를 붕붕 돌려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자세한 건 자기도 잘 모른다, 오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긴 했다, 물어 봐도 별 일 아니라고 하시긴 했지만 따위를 주워섬기던 위칠은 유리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걱정되시면 찾아가 보시는 게 어때요?”

“....엉?”

“아마 방에 계실 텐데. 한 번 가보세요.”

“어 그래.”


아무리 좋게 들어도 건성인 게 분명한 대답을 한 후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는 유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위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만보가 점점 잰걸음이 되고, 종국에는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유리가 아는 한 프렌은 그 외모야 어떻든 한 겨울에 팔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녀도 감기 한 번 앓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뵈도 요령이 꽤 좋기 때문에 운신이 곤란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적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얌전히 침대에나 누워있을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랬던 프렌이 이런 대낮부터 조퇴라니. 유리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프렌, 있냐...?”


밖은 화창하니 아직 밝은데도 불도 켜지 않고 커튼까지 내려 어둑한 방 안에 문이 열리자 기다랗게 빛의 공간이 생겼다. 연 문을 다시 소리 나지 않게 닫은 유리는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동안에 심장이 마치 튀어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렸다.

커다란 침대 위에 프렌이 힘없이 누워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뱉는 숨결의 뜨거움이 침대 곁에 몸을 낮춰 앉은 유리의 뺨에 와 닿았다. 힘겹게 숨을 쉴 때마다 이불에 감싸인 얇은 몸이 약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프렌?”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며 유리가 속삭이자 프렌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길쭉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유리의 손가락에 스쳤다.


“유...리...?”

“그래... 나야.”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유리는 프렌의 이마와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뭐라 말할 기력도 없는지 다시 눈을 감고 유리의 손길을 느끼는 프렌에게서 기사단을 당당하게 호령했던 제국 기사단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서 유리는 순간 울컥했다. 뺨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더운 숨을 내배앝는 입술을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얇게 거스러미가 인 입술은 작고, 매우 뜨거웠다.


“무슨 일이야.. 너 왜 이렇게 됐어?”

“....별 일 아니야….” “이게 별 일 아닌 녀석의 얼굴이냐?”


대답하는 프렌의 목소리가 꺼질 것 같이 가냘파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유리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멍한 눈으로 그런 유리를 올려다보던 프렌은 갑자기 아픔이 느껴지는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 프렌의 약해진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리는 어쩔 줄을 몰라 이불 밖에 나와 있는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없이 손 안에 들어찼다. 그 느낌마저도 영 신통치 않아 유리는 더럭 겁이 났다.


“많이 아파? 에스텔... 에스텔을 부를까?”

“아냐, 괜찮아...”“너...!”

“이건 치유술이 듣지 않는 걸….”

“뭐?”


놀라 고개를 든 유리의 눈에 천천히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가리는 프렌이 보였다. 그 상태로 눈만 쏙 내놓은 채 이불을 덮어쓴 프렌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려 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그.... 생리통이야….>

순간 유리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생리통? ...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 거?> 프렌이 창백한 얼굴에 발갛게 홍조를 떠올리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는 제국 제일의 얼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훨씬 나중 일이었다. <뭐야... 죽을병이 아니었잖아..> 급하게 찾아온 안도감과 탈력에 내뱉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프렌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유리는 모르겠지만 이건 이거대로 죽을 정도로 아프단 말이야.”

“그러냐... 그래도 너 옛날엔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잖아.”

“요새 들어 심해진 것 같아... 근데 그걸 유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


자라난 환경 상 그리고 이것저것 부차적인 이유로 유리는 꽤 이른 나이에 동정 딱지를 뗐다. 그 상대는 대개 연상의 여인들이었고 그녀들은 어린 유리에게 직접적인 관계 말고도 여러 가지 성에 대한 지식을 꽤 자세하게 가르쳐주곤 했다. 그 중에는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해준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는 언젠가 사귀게 될 여자 친구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며 유리에게 한 달에 한 번 여성이 느껴야하는 아픔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아픔을 조금 덜기 위한 여러 가지 처방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후 프렌을 볼 때마다 유리는 가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때가 되어도 프렌은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프렌이 아프지 않다면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유리는 그 지식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프렌이 이렇게 다 죽어가는 병자 꼴을 하고 누워있으니 유리로써는 다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있다가 없다가 그러는 게 어딨냐.>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 프렌이 다시 배를 잡고 얼굴을 찌푸리자 유리는 다시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려봐, 내가...”


희미한 기억을 뒤져 여자가 했던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려 애쓰며 유리는 다시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아픔을 덜어주는 게 뭐라고 했더라. 이것저것 들은 것은 많았으나 너무 오래되서 지금 생각나는 것은 생강차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물과 생강이 들어간다는 것 빼곤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일단 생강이라도 가져올까 싶어-유리도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몸을 일으키면 프렌이 열이 올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갈 거야?”


그 모습이 너무도 작고, 약해진 초식동물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든 유리는 다시 몸을 숙여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기억도 확실치 않은 그깟 생강 하나로 뭐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파서 절절매는 프렌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불 위로 프렌의 배 부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힘들어하는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니, 안타까움이 흘러넘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쓰다듬고 있으면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프렌이 아이처럼 웃었다.


“유리.. 오늘 이상하게 상냥하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언제나 상냥해.”

“응... 상냥한 유리.”


사랑스럽게 속삭이며 눈을 감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후 하루 종일 아픔에 시달려 지친 프렌이 조용히 잠에 빠져들 때까지 유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비교적 상관의 사정과 생강차 레시피를 잘 알고 있던 충실한 부관 소디아노가 자신이 끓인 생강차와 함께 사이좋게 식어가고 있었다는 것은 안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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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얘기가 나온 것은 약 두어 달 전 어느 날, 하루 종일 화창하니 밝았던 하늘에 빨갛고 노란 노을이 고운 염료처럼 풀리기 시작하던 오후였다. 마침 오랜 여행 끝에 제도에 막 돌아온 유리는 문득 기사단장님 집무실 창가에서 보는 노을도 이같이 곱겠거니 했고 내친 김에 오랜 친구이자 새로운 애인의 얼굴이나 볼까 싶어 성벽을 타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서류업무를 막 마무리 지은 터인 프렌은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반겼다.

처리할 서류가 얼마 안 남았으니 잠깐만 기다리라느니, 오랜만에 둘이서 한 잔 마시러 가자느니 하는 대화가 오간 끝에 유리는 언제나 그렇듯 기사단장 집무실의 커다란 창문에 한 다리 걸치고 그 위에 팔 한 짝을 떡하니 얹고는, 소디아가 우리 단장님 업무로 피로하실 테니 모쪼록 이거 드시고 옥체보존하소서 하고 진상한 허브 프레시 어쩌고 캔디를 까작까작 씹으며 프렌을 기다렸다. 유려한 노을빛에 젖어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애인의 모습은 오랜 만에 본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퍽 사치스럽고 아련한 것이라 나른한 기분에 젖어있던 유리는, 그래서 프렌의 질문을 알아듣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온 길드 자금, 고아원에 보내고 있다면서? 카롤한테 들었어.”

“....어? 뭐어.”

“일전의 그 곳이지? 고아원이라는 곳.”

“아아.”


유리가 자금을 보태고 있는 고아원은, 본래는 길드 해흉의 발톱의 수령이었던 예거가 후원하고 있었던 곳이다. 얼마 전 후원자를 잃게 되어 사정이 상당히 곤란해졌으나 금세 또 다른 후원자를 얻어 지금은 꽤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원자가 유리였구나, 하고 미소 짓는 프렌을 흘끗 보고 유리는 대충 말을 내뱉었다.


“뭐,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여기까지만 말해도 될 것을, 거기까지 안다면 보스에게 다 들었으려니 하는 생각에 한 마디를 더 보탠 게 화근이었다. 처음에 지나치듯 들른 이후 고아원에 다시 간 적도 없으며 자금은 사람을 시켜 익명으로 전달하게 한다는 유리의 말을 들은 프렌은 한순간 조용히 침묵했고 그 다음에는 <그렇구나> 정도로 대답했다. 이후 마시러 간 술집에서도 프렌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고아원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전까지 유리는 그에 대한 화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다시 얘기가 나온 게 일주일 전, 축일을 얼마 앞두고 불쑥 프렌이 고아원에 찾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꺼낸 것이다. 그간 질리도록 들은 말도 있고 이번에는 특히 출처도 모르는 돈을 쓰는 입장을 생각해봐라,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지 않겠느냐, 이번 축일에 일손이 필요하다하니 자연스러운 기회가 될 거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 대기에 그만 <오냐, 간다, 간다고!>하고 말을 해버렸다. 그 다음에도 연극이 어쩌고, 배역이 어쩌고 귀찮게 주워섬기는 것을 아무리 마음이 복잡해진 유리가 건성건성 넘겼다기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프렌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고아원에는 축일을 맞아 연극 준비가 한창인데다 급하게 배역이 부족하다고 해서 부탁을 받았고 그렇다면 아무리 사면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상금 벽보까지 나붙었으니 외모에 조금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끌려간 곳이 무대 옆 조그마한 탈의실이었다. 변장, 이라고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지나치게 싱글벙글해 뭔가 수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프렌 주제에, 하고 다소 방심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연극이라면 전에 한번 한 경험도 있겠다, 기껏해야 부직포로 만든 원통을 쓰고 나무1이나 맡을 줄 알았던 배역이 사실은 주연인 ‘만월의 아이’ 역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금 현상수배범 신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즉 저 얄미운 웃는 얼굴에 창파인을 먹여줬으리라.

일은 그렇게 됐다 쳐도-,


‘...세상에 180cm짜리 여자애가 있을까 보냐…….’


아차, 하는 사이에 무대로 떠밀려 올라간 유리는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 자락을 뒤적이며 엉거주춤 무대에 섰다. 반사적으로 무대 앞을 봐, 그 주위에 빙 둘러진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들과 꼼짝없이 마주친 유리는 감전된 것 마냥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고아원의 아이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몇몇도 구경하러 온 것인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유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을 느꼈다.

생각할수록 흉악하고 악랄한 계획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 비해 그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평소라면 벗은 옷 제대로 개어놓으라며 쨍알쨍알 잔소리하기 바쁠 그 손모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며 <유리 체격은 나랑 비슷하지? 응?>이라며 실실 웃을 적에도 그랬고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에스테리제 님의 동화책이 새로 나왔어, 내가 읽어줄게.>라며 자신을 무릎에 누이고 애들 동화치곤 묘하게 매번 인물의 대화 밖에 없는 책을 달달 읊을 때도 그랬다. 이건 뭐 동화책을 읽어봤어야 이상한 것을 알지, 들을 적에야 저가 어릴 적에 동화책 읽어준 사람도 없어 나이 스물이 넘어가도록 제대로 아는 동화 한 편 없는 것이 가엾고 애잔해서 그러는가 보다 싶어 얌전히 앉아 책 읽어주는 애인 무릎에 괜히 볼 한 번 더 부비고 했지만 그 책이 실상은 이 연극의 대본이었던가. 그 증거로 고아원 원장님이 혹시 애들 대사 잊어먹었을 때를 대비해서 흔들고 있는 하얀 판때기에 쓰인 대사는 지나치게 눈에 익숙했다.

게다가 이 꼴이 다 뭐냐. 배역 맡은 아이가 급하게 못 오기는 무슨, 그 아이가 키 180이 넘는 우량아일 리는 없으니 장신의 남자 몸에 맞게 수선된 보라색 모슬린 드레스에 성인의 어깨까지 덮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베일은 처음부터 자신의 몫으로 정해져있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는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게 베일을 기울여 얼굴을 가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두고 보자, 이 사기꾼 기사단장 놈아. 내가 이거 끝나고 네 놈 고 손모가지며 가증한 입술을 씹어 먹지 않으면 유리 로웰이 아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기사단장 추궁, 구타, 능욕(!)계획을 세우고 있던 유리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묘하게 프렌을 닮은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에 긴장한 모양인지 긴장과 공황으로 하얗게 질린 아이는 유리가 정해진 대사를 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반복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그 목소리가 거의 반 울음이라 유리는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주인공 이름이 유리아나냐고…….’


이 정도 되면 분노고 뭐고 허탈감이 들어 막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 유리는 자포자기 한 눈으로 자신의 상대역을 응시했다. 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그에게 말을 건네(려고 노력하)고 있는 아이는 극 중 주인공의 한 사람인 리리의 샛별이다. 그리고 유리 자신은 그 여동생인 만월의 아이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세계를 구한다는 전설이 이 연극의 줄거리였다. 방금 전까지의 전개에도 바로 앞의 두 줄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한 가득이었지만, 거의 울 듯 한 얼굴의 아이를 보며 일단 지금은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연극 중이며 이 연극을 엉망으로 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에 초점을 모은다. 유리는 기합을 넣었다.


“오... 오라버니.”

“사람들이 걱정되어 울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네에. 이대로라면 모두 죽어버리고 말 거에요.”

“울지 말거라, 유리아나. 우리가 힘을 합쳐 모두를 지키자!”

“네 오라버니. 저 힘낼게요.”


다소 심한 국어책 읽기 어투에 관객들은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유리로써는 그것이 한계였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묘하게 짧은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숭숭 들어 다리가 추웠고 잔뜩 부풀린 소매 부분은 움직이기도 버거워 서러웠다. 조금만 방심할라 치면 베일이 엉키고 대사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한데다 성대를 아무리 밀어 올려도 여자애다운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아서 유리는 만월의 아이는 아니지만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따라서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가련한 여신 만월의 아이(※주: 180cm)가 세계를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흘리는 눈물로 착각한 아이 몇이 울망울망 눈물을 글썽이든 말든 연극은 의외로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나무1로 슬쩍 출연한 기사단장님이 만월의 아이를 향해 가지를 흔들다가 나무2에게 <나무는 움직이는 거 아니야>라며 꾸중을 받았다던가, 나무를 발견한 만월의 아이가 갑자기 그것을 뽑으려고 날뛰었다던가하는 사소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세상을 구한 후 하늘로 올라가는 리리의 샛별에게 만월의 아이가 손을 흔들며 안녕과 눈물과 사랑을 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른들 몇 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암, 좋은 연극이야> 따위를 중얼거렸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따뜻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거기 기사단장 양반, 나한테 뭐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아, 유리! 연극 정말 훌륭했어. 모두들 좋아해준 것 같아, 잘 됐지?”

“그렇다면 도망치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지?”

“하하, 그러면 때릴 거잖아?”

“당연히 때릴 꺼다!!!!!”

“아, 저기 있다!”


근처에 대충 놓여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21년 째 소꿉친구이자 현재는 애인을 상대로 세계의 재앙을 막을 때 쓰였던 비오의를 막 발동하려던 유리는 갑자기 뒤 쪽에서 안겨드는 아이들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왓!> 리리의 샛별 역을 맡았던 아이는 물론이고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까지 모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유리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유리아나, 오라버니보다 훨씬 멋있어!”

“만월의 아이 완전 쎄!”

“누나 뭐 먹고 키 컸어?”

“......”


한동안 팔이며 다리에 매달려오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빗자루를 내리찍으려고 시도하던 유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팔을 내렸다. 그 바람에 매달리기 편해진 아이들이 와아, 하며 유리의 품으로 달겨들었다. 애인이란 놈은 이미 멀찍이 물러나 좋은 구경거리라도 된 양 싱글거리면서 이쪽을 보고나 있고 이미 화낼 타이밍도 놓쳐버리고 피곤해진 유리가 그래, 그래 하면서 대충 안겨오는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유리아나가 세상을 구해 준거지?”

“나쁜 재앙을 물리쳤어!”

“지켜 줘서 고마워, 유리아나!”

“고마워, 고마워!”


갑작스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감사의 말, 신뢰, 칭찬과 격려.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들 중 보이지 않는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실은 그 일말의 여지마저 사람을 죽이고 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버린 셈이다. 유리 자신은, 적어도 이 곳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저토록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렁이며 반짝이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고 있자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고 서늘해진 몸과 반대로 얼굴에는 발갛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한 숨처럼 웃었다.


“...그래도 그 이름은 그만 둬 주라…….”






기어코 배웅하겠다는 아이들을 이제 잘 시간이라며 겨우 침대에 몰아넣고 나서야 한 숨을 돌리며 고아원을 빠져나온 유리 일행은 문 앞에 고아원 원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희미하게 본 기억이 나는 그 얼굴이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을 본 유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아마 예거님은 다신 이 곳에 오지 못하시겠죠.”

“........미안.”


슬픔을 억누르는 듯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리의 가슴 속에 역시 이런 곳,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자갈처럼 차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이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이 또한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고, 마치 포기하듯 받아들이며 고개를 돌리면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또, 와주세요.”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요, 이어지는 말에 깃든 건 분노나 미움이 아니었다.





고아원을 나와 달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나비 떼처럼 나돌아 당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멍한 표정의 유리를 보고 프렌은 빙그레 웃었다.


“야, 프렌.”

“응?”

“어디까지 생각한 거냐?”

“시시한 역을 맡기면 유리는 또 금방 도망 가버릴 테니까.”


<진짜 만월의 아이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유리 정말 예뻤어―.>라며 순진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웃는 프렌의 얼굴은 전혀 사심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유리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한동안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던 유리는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렌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계획을 실행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지만.


“전에 말했던 것처럼, 벌을 면제받는다고 해서 내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유리…….”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잘 알았어.”

“.......”

“........”

“....그걸로 됐어.”


<지금은.> 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덧붙이는, 그러나 안심한 듯 사랑스럽게 웃는 프렌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잠시 잊었던, 이 눈치 없이 사랑스럽고 툭 하면 정신을 쏙 빼놓는 괘씸한 애인의 처분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지금 웃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천연에 바보인데다, 이런저런 꼴을 당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 때문에 그랬다고 하니 지금은 처음의 생각대로 요런조런 곳을 씹어 먹는 걸로 용서해줄까- 하는 나름 관대한 결론을 내리며 유리는 프렌과 나란히 하얀 달빛이 흘러넘치는 거리를 걸었다.



***


이 때의 드레스는 기사단장님 숙소에 잘 걸려있다던가 나중에 이런저런 플레이할 때 쓰인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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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점에 오르디온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동안 힘써 준 제국과 길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새 도시의 주민들 주최로 여는 축제, 라는 것이 대외적인 발표였으나 그 이면에는 제국과 길드의 새로운 협력의 가능성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장식해서 걸어놓으려는 정치적 색채가 없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축제 직전까지 이어진 제국과 길드 간의 회의에서 축제의 개최 일정이 세세한 수준까지 오갔다던가, 유니온이 예산안을 작성하고 평의회가 승인했다던가 등등의 소문이 늦은 봄의 바람을 타고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물론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장 눈앞에 닥친 세계의 위기에서 눈을 돌려 잠시나마 휴식을 만끽하자고 하는 비교적 순수한 의도도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재앙의 존재는, 단지 거기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부술 수 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겹쳐 오르니온의 첫 번째 축제는 물자가 그리 넉넉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흥겨운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노점의 행렬을 따라 가족, 혹은 연인들이 나란히 거닐고 아이들은 신나서 주변을 뛰어다녔다. 5월의 포근한 바람이 보드라운 꽃잎이며 알록달록한 색종이 조각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거리 곳곳마다 한 가득씩 실어 날랐다. 음식을 내는 노점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와 조개와 버터와 온갖 달콤하고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가 손님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잘 닦인 기사들의 중갑이 따스한 봄볕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따금씩 눈을 깜빡거리곤 했다.


“유-리, 벌써 시작해버리겠어!”

“네이, 네이.”


유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어딘가로 튀어나갈 것 같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카롤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슬그머니 눌러 죽였다. 아직 어린 ‘용맹한 금성’의 보스는 주변의 축제 분위기를 타서 오전부터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조금만 더 늦장을 부리면 아예 이쪽으로 와서 팔이라도 잡고 끌고 갈 기세다.


“그렇게 급하면 먼저 가도 좋을 텐데 말이지.”

“어머, 무정한 사람.”


그렇게 말하는 쥬디스의 얼굴에도 가득히, 미소가 떠올라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길드원들을 꼬박꼬박 챙기는 어린 보스의 마음 씀씀이가 기쁘고 바특했다. 지금의 카롤이야 아직 어린 탓에 체격도 작고 위엄도 부족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연륜을 쌓으면 유니온의 전 수장 돈 화이트호스처럼 그 이름만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 길드가 보스 하나는 잘 뽑았지, 하고 다소 팔불출 기분이 된 유리를 보고 쥬디스는 흐흥, 하고 웃었다.


“에스텔 네는 벌써 저- 앞에 있어!”


카롤이 가리키는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마을 한 가운데에 설치된 무대 주변은 이미 모여든 사람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의 발에 채이지 않도록, 실상은 카롤이 지나가기 쉽도록 길을 터주던 라피드의 꼬리가 그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찾기 힘들겠는데>, 하고 두리번거리던 유리는 인파 속에서 길드 내 최연장자의 머리꼭지 비슷한 것을 보고 손을 흔들려다 그만두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으면 인파를 헤치고 이쪽으로 오는 것도, 이쪽에서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념식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 곧 일행과 합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 유리는 아예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기사단장 관련 사건을 포함한 잇따른 불미스러운 일들과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 재정이 꽤나 곤란해진 제국이 유니온을 상대로 100갈드 단위로 예산을 깎았다는 소문이지만 무대만큼은 그런 소문이 무색해질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로웠다. 섬세하게 조각한 후 투명하게 옻칠해 활엽수의 아름다운 무늬를 그대로 드러낸 무대 전체를 하얀 천으로 덮은 단 위에는 올해 새로 딴 염료로 염색하고 가장자리에는 금술을 댄 유니온과 제국의 커다란 깃발이 나란히 걸렸다.

곧 식이 시작되자 유니온의 수장대리, 오르니온 주민 대표, 차기 황위계승자가 식순을 따라 차례로 서로의 공적과 미래에 대한 축복의 말을 길지 않게 주고받은 후 기예 길드의 화려한 서커스 쇼며 흥겨운 음악회, 기사단의 절도 있는 행진 등이 이어졌다. 특히 행진을 얄미우리만큼 완벽하게 통제해 온 젊은 기사단장 대리가 단 위에 올라가 얼굴을 붉히며 주민이 전달한 하얀 꽃 화관을 얌전히 받는 장면은 사심 없이 봐도 꽤 훈훈한 것이었다.

식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무대 앞을 떠날 줄을 몰랐고 축하와 격려와 존경 등등을 담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또 일일이 답하던 기사단장 대리가 그 근처에서 한담하고 있던 유리 일행과 합류한 것은 식 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아, 프렌!”

“에스테리제 님, 모두 여기 계셨군요.”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온 프렌은 먼저 그날의 행사에 감격해 잔뜩 흥분한 카롤과 솔직한 칭찬의 말을 건네는 에스텔에게 능숙하게 답례했다. 물론 거기에 이쪽에서도 기예 길드의 재주에는 감탄했다는 등, 유니온은 상당한 조직이라는 등 뼛속까지 길드파인 용맹한 금성의 보스를 기쁘게 하는 칭찬도 빼놓지 않는다. 리타는 <왜 카롤 네가 우쭐하는 거야.>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기사단 행진은 처음 봤어요. 후후, 근사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딱딱 맞출 필요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마워, 사실 시간도 준비도 많이 부족했지만 모두가 좋게 봐주어서 다행이야.”

“프렌도 많이 애썼느니라.”

“나보다는 부하들이 많이 힘써줬지. 정말이지 난 좋은 부하들을 두었어.”


쥬디스의 요염한 치하도, 리타의 어딘가 삐딱한 감상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보다는 부하들을 슬쩍 앞으로 내세우는 태도에는 호기로움은 없지만 기사단에 대한 긍지와 자랑이 느껴졌다. 근처에서 레이븐이 <역시 기사단장 대리, 여성 대하는 게 능숙하구만~>하고 품평했지만 언제나처럼 별 다른 반향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여.”

“아, 유리.”

“행진 잘 봤다.”

“고마워.”


그 동안 축제 준비다 뭐다 해서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터다. 그런 소꿉친구의 지나치게 깔끔한 감상에도 파란 눈을 반짝이며 웃는 프렌에 어쩐지 머쓱해진 유리는 친구 손에 들린 화관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런 유리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프렌은 또 다시 웃었다.


“기사단을 대표해서 오르니온 주민들한테 받았어. 지켜준 것 감사하다고.”

“... 어째서 화관인 걸까.”

“만들기 쉬웠던 것 아닐까? 물자도 부족하다고 했으니까.”

“그대로 들고 다닐 거야?”

“이왕 받은 건데 버리기도 그렇고.. 쓰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흐응.”


버릴 수 없다는 그 화관이 사실은, 처음부터 시기에 못 이겨 만개한 하얀 꽃송이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기사단장의 단정한 머리며 어깨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프렌은 아직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온통 축제에 정신이 팔려있고 유리 자신은 그 사실을 별로 알려주고 싶지도,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존경받는 기사단장 대리는 오늘 하루 내내 저 꽃잎들을 햇볕처럼 쓰고 지내겠지. 깔끔한 프렌이 자기 전 기겁하며 자신의 머리를 털어낼 때까지, 저 작은 별모양의 꽃들은 프렌의 발 닿는 곳마다 떨어져 마치 포석처럼 빛날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겨볼까?”

“프렌, 우리 저 쪽으로 가 봐요!”

“과일 크레페 팔고 있대. 유리도 어서 와!”


정면의 햇빛을 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는 신나서, 혹은 허둥지둥 뛰어가고 있는 일행을 바라보고 웃었다. 그리고 뒤따르며, 바람에 떨어진 하얀 꽃송이 몇 개를 가볍게 주워 삼키듯이 입을 맞추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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