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점에 오르디온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동안 힘써 준 제국과 길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새 도시의 주민들 주최로 여는 축제, 라는 것이 대외적인 발표였으나 그 이면에는 제국과 길드의 새로운 협력의 가능성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장식해서 걸어놓으려는 정치적 색채가 없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축제 직전까지 이어진 제국과 길드 간의 회의에서 축제의 개최 일정이 세세한 수준까지 오갔다던가, 유니온이 예산안을 작성하고 평의회가 승인했다던가 등등의 소문이 늦은 봄의 바람을 타고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물론 주민들 입장에서는 당장 눈앞에 닥친 세계의 위기에서 눈을 돌려 잠시나마 휴식을 만끽하자고 하는 비교적 순수한 의도도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재앙의 존재는, 단지 거기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부술 수 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겹쳐 오르니온의 첫 번째 축제는 물자가 그리 넉넉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흥겨운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도시의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노점의 행렬을 따라 가족, 혹은 연인들이 나란히 거닐고 아이들은 신나서 주변을 뛰어다녔다. 5월의 포근한 바람이 보드라운 꽃잎이며 알록달록한 색종이 조각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거리 곳곳마다 한 가득씩 실어 날랐다. 음식을 내는 노점에서 풍겨 나오는 고기와 조개와 버터와 온갖 달콤하고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가 손님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잘 닦인 기사들의 중갑이 따스한 봄볕을 받아 반짝반짝하게 빛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따금씩 눈을 깜빡거리곤 했다.
“유-리, 벌써 시작해버리겠어!”
“네이, 네이.”
유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어딘가로 튀어나갈 것 같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카롤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슬그머니 눌러 죽였다. 아직 어린 ‘용맹한 금성’의 보스는 주변의 축제 분위기를 타서 오전부터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조금만 더 늦장을 부리면 아예 이쪽으로 와서 팔이라도 잡고 끌고 갈 기세다.
“그렇게 급하면 먼저 가도 좋을 텐데 말이지.”
“어머, 무정한 사람.”
그렇게 말하는 쥬디스의 얼굴에도 가득히, 미소가 떠올라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길드원들을 꼬박꼬박 챙기는 어린 보스의 마음 씀씀이가 기쁘고 바특했다. 지금의 카롤이야 아직 어린 탓에 체격도 작고 위엄도 부족하지만 좀 더 나이를 먹고 연륜을 쌓으면 유니온의 전 수장 돈 화이트호스처럼 그 이름만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 길드가 보스 하나는 잘 뽑았지, 하고 다소 팔불출 기분이 된 유리를 보고 쥬디스는 흐흥, 하고 웃었다.
“에스텔 네는 벌써 저- 앞에 있어!”
카롤이 가리키는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마을 한 가운데에 설치된 무대 주변은 이미 모여든 사람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의 발에 채이지 않도록, 실상은 카롤이 지나가기 쉽도록 길을 터주던 라피드의 꼬리가 그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찾기 힘들겠는데>, 하고 두리번거리던 유리는 인파 속에서 길드 내 최연장자의 머리꼭지 비슷한 것을 보고 손을 흔들려다 그만두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으면 인파를 헤치고 이쪽으로 오는 것도, 이쪽에서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념식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니 곧 일행과 합류하면 된다는 생각이 든 유리는 아예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기사단장 관련 사건을 포함한 잇따른 불미스러운 일들과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 재정이 꽤나 곤란해진 제국이 유니온을 상대로 100갈드 단위로 예산을 깎았다는 소문이지만 무대만큼은 그런 소문이 무색해질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로웠다. 섬세하게 조각한 후 투명하게 옻칠해 활엽수의 아름다운 무늬를 그대로 드러낸 무대 전체를 하얀 천으로 덮은 단 위에는 올해 새로 딴 염료로 염색하고 가장자리에는 금술을 댄 유니온과 제국의 커다란 깃발이 나란히 걸렸다.
곧 식이 시작되자 유니온의 수장대리, 오르니온 주민 대표, 차기 황위계승자가 식순을 따라 차례로 서로의 공적과 미래에 대한 축복의 말을 길지 않게 주고받은 후 기예 길드의 화려한 서커스 쇼며 흥겨운 음악회, 기사단의 절도 있는 행진 등이 이어졌다. 특히 행진을 얄미우리만큼 완벽하게 통제해 온 젊은 기사단장 대리가 단 위에 올라가 얼굴을 붉히며 주민이 전달한 하얀 꽃 화관을 얌전히 받는 장면은 사심 없이 봐도 꽤 훈훈한 것이었다.
식이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의 환호성과 박수소리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무대 앞을 떠날 줄을 몰랐고 축하와 격려와 존경 등등을 담아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또 일일이 답하던 기사단장 대리가 그 근처에서 한담하고 있던 유리 일행과 합류한 것은 식 후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아, 프렌!”
“에스테리제 님, 모두 여기 계셨군요.”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온 프렌은 먼저 그날의 행사에 감격해 잔뜩 흥분한 카롤과 솔직한 칭찬의 말을 건네는 에스텔에게 능숙하게 답례했다. 물론 거기에 이쪽에서도 기예 길드의 재주에는 감탄했다는 등, 유니온은 상당한 조직이라는 등 뼛속까지 길드파인 용맹한 금성의 보스를 기쁘게 하는 칭찬도 빼놓지 않는다. 리타는 <왜 카롤 네가 우쭐하는 거야.>라며 핀잔을 주었지만.
“기사단 행진은 처음 봤어요. 후후, 근사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딱딱 맞출 필요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마워, 사실 시간도 준비도 많이 부족했지만 모두가 좋게 봐주어서 다행이야.”
“프렌도 많이 애썼느니라.”
“나보다는 부하들이 많이 힘써줬지. 정말이지 난 좋은 부하들을 두었어.”
쥬디스의 요염한 치하도, 리타의 어딘가 삐딱한 감상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보다는 부하들을 슬쩍 앞으로 내세우는 태도에는 호기로움은 없지만 기사단에 대한 긍지와 자랑이 느껴졌다. 근처에서 레이븐이 <역시 기사단장 대리, 여성 대하는 게 능숙하구만~>하고 품평했지만 언제나처럼 별 다른 반향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여.”
“아, 유리.”
“행진 잘 봤다.”
“고마워.”
그 동안 축제 준비다 뭐다 해서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터다. 그런 소꿉친구의 지나치게 깔끔한 감상에도 파란 눈을 반짝이며 웃는 프렌에 어쩐지 머쓱해진 유리는 친구 손에 들린 화관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런 유리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프렌은 또 다시 웃었다.
“기사단을 대표해서 오르니온 주민들한테 받았어. 지켜준 것 감사하다고.”
“... 어째서 화관인 걸까.”
“만들기 쉬웠던 것 아닐까? 물자도 부족하다고 했으니까.”
“그대로 들고 다닐 거야?”
“이왕 받은 건데 버리기도 그렇고.. 쓰고 다닐 수도 없으니까.”
“흐응.”
버릴 수 없다는 그 화관이 사실은, 처음부터 시기에 못 이겨 만개한 하얀 꽃송이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기사단장의 단정한 머리며 어깨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을 프렌은 아직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온통 축제에 정신이 팔려있고 유리 자신은 그 사실을 별로 알려주고 싶지도, 그럴 생각도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존경받는 기사단장 대리는 오늘 하루 내내 저 꽃잎들을 햇볕처럼 쓰고 지내겠지. 깔끔한 프렌이 자기 전 기겁하며 자신의 머리를 털어낼 때까지, 저 작은 별모양의 꽃들은 프렌의 발 닿는 곳마다 떨어져 마치 포석처럼 빛날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겨볼까?”
“프렌, 우리 저 쪽으로 가 봐요!”
“과일 크레페 팔고 있대. 유리도 어서 와!”
정면의 햇빛을 피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유리는 신나서, 혹은 허둥지둥 뛰어가고 있는 일행을 바라보고 웃었다. 그리고 뒤따르며, 바람에 떨어진 하얀 꽃송이 몇 개를 가볍게 주워 삼키듯이 입을 맞추는 것이다.
***
'TOV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리프렌]선택지 (0) | 2015.09.15 |
---|---|
[유리프렌]머나먼 옛날의 용사님 (0) | 2015.09.15 |
[유리프렌ts]어떤 오후 (0) | 2015.09.15 |
[유리프렌]계기 (0) | 2015.09.15 |
[유리프렌]갱생될까요? (0) | 201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