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얘기가 나온 것은 약 두어 달 전 어느 날, 하루 종일 화창하니 밝았던 하늘에 빨갛고 노란 노을이 고운 염료처럼 풀리기 시작하던 오후였다. 마침 오랜 여행 끝에 제도에 막 돌아온 유리는 문득 기사단장님 집무실 창가에서 보는 노을도 이같이 곱겠거니 했고 내친 김에 오랜 친구이자 새로운 애인의 얼굴이나 볼까 싶어 성벽을 타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하루 종일 붙들고 있던 서류업무를 막 마무리 지은 터인 프렌은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반겼다.

처리할 서류가 얼마 안 남았으니 잠깐만 기다리라느니, 오랜만에 둘이서 한 잔 마시러 가자느니 하는 대화가 오간 끝에 유리는 언제나 그렇듯 기사단장 집무실의 커다란 창문에 한 다리 걸치고 그 위에 팔 한 짝을 떡하니 얹고는, 소디아가 우리 단장님 업무로 피로하실 테니 모쪼록 이거 드시고 옥체보존하소서 하고 진상한 허브 프레시 어쩌고 캔디를 까작까작 씹으며 프렌을 기다렸다. 유려한 노을빛에 젖어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애인의 모습은 오랜 만에 본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퍽 사치스럽고 아련한 것이라 나른한 기분에 젖어있던 유리는, 그래서 프렌의 질문을 알아듣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온 길드 자금, 고아원에 보내고 있다면서? 카롤한테 들었어.”

“....어? 뭐어.”

“일전의 그 곳이지? 고아원이라는 곳.”

“아아.”


유리가 자금을 보태고 있는 고아원은, 본래는 길드 해흉의 발톱의 수령이었던 예거가 후원하고 있었던 곳이다. 얼마 전 후원자를 잃게 되어 사정이 상당히 곤란해졌으나 금세 또 다른 후원자를 얻어 지금은 꽤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 후원자가 유리였구나, 하고 미소 짓는 프렌을 흘끗 보고 유리는 대충 말을 내뱉었다.


“뭐,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여기까지만 말해도 될 것을, 거기까지 안다면 보스에게 다 들었으려니 하는 생각에 한 마디를 더 보탠 게 화근이었다. 처음에 지나치듯 들른 이후 고아원에 다시 간 적도 없으며 자금은 사람을 시켜 익명으로 전달하게 한다는 유리의 말을 들은 프렌은 한순간 조용히 침묵했고 그 다음에는 <그렇구나> 정도로 대답했다. 이후 마시러 간 술집에서도 프렌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고아원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 전까지 유리는 그에 대한 화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다시 얘기가 나온 게 일주일 전, 축일을 얼마 앞두고 불쑥 프렌이 고아원에 찾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꺼낸 것이다. 그간 질리도록 들은 말도 있고 이번에는 특히 출처도 모르는 돈을 쓰는 입장을 생각해봐라,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없지 않겠느냐, 이번 축일에 일손이 필요하다하니 자연스러운 기회가 될 거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 대기에 그만 <오냐, 간다, 간다고!>하고 말을 해버렸다. 그 다음에도 연극이 어쩌고, 배역이 어쩌고 귀찮게 주워섬기는 것을 아무리 마음이 복잡해진 유리가 건성건성 넘겼다기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프렌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한 고아원에는 축일을 맞아 연극 준비가 한창인데다 급하게 배역이 부족하다고 해서 부탁을 받았고 그렇다면 아무리 사면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상금 벽보까지 나붙었으니 외모에 조금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끌려간 곳이 무대 옆 조그마한 탈의실이었다. 변장, 이라고 말하는 프렌의 얼굴이 지나치게 싱글벙글해 뭔가 수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프렌 주제에, 하고 다소 방심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연극이라면 전에 한번 한 경험도 있겠다, 기껏해야 부직포로 만든 원통을 쓰고 나무1이나 맡을 줄 알았던 배역이 사실은 주연인 ‘만월의 아이’ 역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시금 현상수배범 신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즉 저 얄미운 웃는 얼굴에 창파인을 먹여줬으리라.

일은 그렇게 됐다 쳐도-,


‘...세상에 180cm짜리 여자애가 있을까 보냐…….’


아차, 하는 사이에 무대로 떠밀려 올라간 유리는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 자락을 뒤적이며 엉거주춤 무대에 섰다. 반사적으로 무대 앞을 봐, 그 주위에 빙 둘러진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들과 꼼짝없이 마주친 유리는 감전된 것 마냥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고아원의 아이들 뿐 아니라 마을 사람 몇몇도 구경하러 온 것인지 팔짱을 끼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유리는 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을 느꼈다.

생각할수록 흉악하고 악랄한 계획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에 비해 그간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평소라면 벗은 옷 제대로 개어놓으라며 쨍알쨍알 잔소리하기 바쁠 그 손모가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며 <유리 체격은 나랑 비슷하지? 응?>이라며 실실 웃을 적에도 그랬고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에스테리제 님의 동화책이 새로 나왔어, 내가 읽어줄게.>라며 자신을 무릎에 누이고 애들 동화치곤 묘하게 매번 인물의 대화 밖에 없는 책을 달달 읊을 때도 그랬다. 이건 뭐 동화책을 읽어봤어야 이상한 것을 알지, 들을 적에야 저가 어릴 적에 동화책 읽어준 사람도 없어 나이 스물이 넘어가도록 제대로 아는 동화 한 편 없는 것이 가엾고 애잔해서 그러는가 보다 싶어 얌전히 앉아 책 읽어주는 애인 무릎에 괜히 볼 한 번 더 부비고 했지만 그 책이 실상은 이 연극의 대본이었던가. 그 증거로 고아원 원장님이 혹시 애들 대사 잊어먹었을 때를 대비해서 흔들고 있는 하얀 판때기에 쓰인 대사는 지나치게 눈에 익숙했다.

게다가 이 꼴이 다 뭐냐. 배역 맡은 아이가 급하게 못 오기는 무슨, 그 아이가 키 180이 넘는 우량아일 리는 없으니 장신의 남자 몸에 맞게 수선된 보라색 모슬린 드레스에 성인의 어깨까지 덮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베일은 처음부터 자신의 몫으로 정해져있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는 무대에서는 보이지 않게 베일을 기울여 얼굴을 가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두고 보자, 이 사기꾼 기사단장 놈아. 내가 이거 끝나고 네 놈 고 손모가지며 가증한 입술을 씹어 먹지 않으면 유리 로웰이 아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한참동안 머릿속으로 기사단장 추궁, 구타, 능욕(!)계획을 세우고 있던 유리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묘하게 프렌을 닮은 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관객에 긴장한 모양인지 긴장과 공황으로 하얗게 질린 아이는 유리가 정해진 대사를 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반복했다. <왜 그러느냐, 유리아나?> 그 목소리가 거의 반 울음이라 유리는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주인공 이름이 유리아나냐고…….’


이 정도 되면 분노고 뭐고 허탈감이 들어 막 인생의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 유리는 자포자기 한 눈으로 자신의 상대역을 응시했다. 유리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그에게 말을 건네(려고 노력하)고 있는 아이는 극 중 주인공의 한 사람인 리리의 샛별이다. 그리고 유리 자신은 그 여동생인 만월의 아이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세계를 구한다는 전설이 이 연극의 줄거리였다. 방금 전까지의 전개에도 바로 앞의 두 줄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한 가득이었지만, 거의 울 듯 한 얼굴의 아이를 보며 일단 지금은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의 연극 중이며 이 연극을 엉망으로 할 권리가 자신에게 없다는 생각에 초점을 모은다. 유리는 기합을 넣었다.


“오... 오라버니.”

“사람들이 걱정되어 울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네에. 이대로라면 모두 죽어버리고 말 거에요.”

“울지 말거라, 유리아나. 우리가 힘을 합쳐 모두를 지키자!”

“네 오라버니. 저 힘낼게요.”


다소 심한 국어책 읽기 어투에 관객들은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유리로써는 그것이 한계였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묘하게 짧은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숭숭 들어 다리가 추웠고 잔뜩 부풀린 소매 부분은 움직이기도 버거워 서러웠다. 조금만 방심할라 치면 베일이 엉키고 대사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유치한데다 성대를 아무리 밀어 올려도 여자애다운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아서 유리는 만월의 아이는 아니지만 진짜로 울고 싶어졌다. 따라서 달달 떨리는 목소리를 가련한 여신 만월의 아이(※주: 180cm)가 세계를 너무나도 걱정한 나머지 흘리는 눈물로 착각한 아이 몇이 울망울망 눈물을 글썽이든 말든 연극은 의외로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중간에 나무1로 슬쩍 출연한 기사단장님이 만월의 아이를 향해 가지를 흔들다가 나무2에게 <나무는 움직이는 거 아니야>라며 꾸중을 받았다던가, 나무를 발견한 만월의 아이가 갑자기 그것을 뽑으려고 날뛰었다던가하는 사소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세상을 구한 후 하늘로 올라가는 리리의 샛별에게 만월의 아이가 손을 흔들며 안녕과 눈물과 사랑을 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른들 몇 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암, 좋은 연극이야> 따위를 중얼거렸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따뜻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거기 기사단장 양반, 나한테 뭐 할 말이 있을 거 같은데...?”

“아, 유리! 연극 정말 훌륭했어. 모두들 좋아해준 것 같아, 잘 됐지?”

“그렇다면 도망치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지?”

“하하, 그러면 때릴 거잖아?”

“당연히 때릴 꺼다!!!!!”

“아, 저기 있다!”


근처에 대충 놓여 있는 빗자루를 집어 들고 21년 째 소꿉친구이자 현재는 애인을 상대로 세계의 재앙을 막을 때 쓰였던 비오의를 막 발동하려던 유리는 갑자기 뒤 쪽에서 안겨드는 아이들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왓!> 리리의 샛별 역을 맡았던 아이는 물론이고 관객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까지 모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유리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유리아나, 오라버니보다 훨씬 멋있어!”

“만월의 아이 완전 쎄!”

“누나 뭐 먹고 키 컸어?”

“......”


한동안 팔이며 다리에 매달려오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빗자루를 내리찍으려고 시도하던 유리는 한숨을 쉬며 다시 팔을 내렸다. 그 바람에 매달리기 편해진 아이들이 와아, 하며 유리의 품으로 달겨들었다. 애인이란 놈은 이미 멀찍이 물러나 좋은 구경거리라도 된 양 싱글거리면서 이쪽을 보고나 있고 이미 화낼 타이밍도 놓쳐버리고 피곤해진 유리가 그래, 그래 하면서 대충 안겨오는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유리아나가 세상을 구해 준거지?”

“나쁜 재앙을 물리쳤어!”

“지켜 줘서 고마워, 유리아나!”

“고마워, 고마워!”


갑작스레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감사의 말, 신뢰, 칭찬과 격려.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구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들 중 보이지 않는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실은 그 일말의 여지마저 사람을 죽이고 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버린 셈이다. 유리 자신은, 적어도 이 곳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저토록 한 점 의심도 없이 그렁이며 반짝이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고 있자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고 서늘해진 몸과 반대로 얼굴에는 발갛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한 숨처럼 웃었다.


“...그래도 그 이름은 그만 둬 주라…….”






기어코 배웅하겠다는 아이들을 이제 잘 시간이라며 겨우 침대에 몰아넣고 나서야 한 숨을 돌리며 고아원을 빠져나온 유리 일행은 문 앞에 고아원 원장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희미하게 본 기억이 나는 그 얼굴이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을 본 유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리려 했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아마 예거님은 다신 이 곳에 오지 못하시겠죠.”

“........미안.”


슬픔을 억누르는 듯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리의 가슴 속에 역시 이런 곳, 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가 자갈처럼 차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이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이 또한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고, 마치 포기하듯 받아들이며 고개를 돌리면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도 또, 와주세요.”


아이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요, 이어지는 말에 깃든 건 분노나 미움이 아니었다.





고아원을 나와 달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나비 떼처럼 나돌아 당최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멍한 표정의 유리를 보고 프렌은 빙그레 웃었다.


“야, 프렌.”

“응?”

“어디까지 생각한 거냐?”

“시시한 역을 맡기면 유리는 또 금방 도망 가버릴 테니까.”


<진짜 만월의 아이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유리 정말 예뻤어―.>라며 순진한 감상을 늘어놓으며 웃는 프렌의 얼굴은 전혀 사심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유리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한동안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던 유리는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렌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계획을 실행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지만.


“전에 말했던 것처럼, 벌을 면제받는다고 해서 내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유리…….”

“하지만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잘 알았어.”

“.......”

“........”

“....그걸로 됐어.”


<지금은.> 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덧붙이는, 그러나 안심한 듯 사랑스럽게 웃는 프렌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잠시 잊었던, 이 눈치 없이 사랑스럽고 툭 하면 정신을 쏙 빼놓는 괘씸한 애인의 처분에 대해 잠시 고민한다. 지금 웃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천연에 바보인데다, 이런저런 꼴을 당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 때문에 그랬다고 하니 지금은 처음의 생각대로 요런조런 곳을 씹어 먹는 걸로 용서해줄까- 하는 나름 관대한 결론을 내리며 유리는 프렌과 나란히 하얀 달빛이 흘러넘치는 거리를 걸었다.



***


이 때의 드레스는 기사단장님 숙소에 잘 걸려있다던가 나중에 이런저런 플레이할 때 쓰인다던가.. 뭐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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