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주의



창문은 잠겨있었다. 기사단장 집무실의 창틀에 올라앉아 유리는 다시 창살을 흔들어보았다. 빈틈없이 잠긴 창문은 덜걱덜걱 소리를 냈다. 따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그 전에 힐끔 들여다 본 안쪽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로써는 드물게 허탕 질이었다.

<거 희한하네. 요 계집애가 어딜 갔담.> 얼마 전 제국 기사단장으로 취임한 프레나 시포- 통칭 프렌이라고 한다―는 최연소, 그리고 최초의 여성 기사단장이라는 파격적인 수식어에 걸맞게 그 군공 또한 엄청났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업적들이 거의 다 그렇듯 가만히 앉아서 얻어진 것들은 아니었다. 소대장 시절부터 전 기사단장의 심복으로 온갖 국가의 실질적인 대소사들을 도맡았고 기사단장 자리에 오른 후부터는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은 줄었지만 대신 집무실에 앉아 행정적 업무를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제국 곳곳에서 날아온 결재 서류들은 그 끝을 몰랐고 따라서 언제 찾아가든 유리는 책상에 반듯이 앉아 서류에 날인하는 프렌의 작은 등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도시 방위 등을 이유로 출동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병영은 비어있지 않은 것을 보니 오늘은 그런 이유도 아닌 듯 했다. 슬슬 궁금해진 유리는 그 근처를 서성이다가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오, 사과머리.”

“위칠입니다!”


유리는 안경을 치켜 올린 작은 마도사가 눈을 흘기는 것을 못 본 척 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미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유리는 위칠의 이름을 기억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동안 그 얄미운 얼굴을 바라보던 위칠은 한숨을 폭 쉬었다.


“단장님 뵈러 오셨나 보네요. 얘기 못 들으셨어요?”

“엥? 무슨 얘기?”

“단장님 오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몸이 안 좋아지셔서.”

“뭐?”


<아파? 그 녀석이?> 그 얼빠진 얼굴에 위칠은 한순간 좀 꼬시다는 생각을 했고 황급히 고개를 붕붕 돌려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자세한 건 자기도 잘 모른다, 오전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긴 했다, 물어 봐도 별 일 아니라고 하시긴 했지만 따위를 주워섬기던 위칠은 유리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걱정되시면 찾아가 보시는 게 어때요?”

“....엉?”

“아마 방에 계실 텐데. 한 번 가보세요.”

“어 그래.”


아무리 좋게 들어도 건성인 게 분명한 대답을 한 후 휘적휘적 걸어가 버리는 유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위칠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만보가 점점 잰걸음이 되고, 종국에는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유리가 아는 한 프렌은 그 외모야 어떻든 한 겨울에 팔다리를 훤히 내놓고 다녀도 감기 한 번 앓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뵈도 요령이 꽤 좋기 때문에 운신이 곤란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적도 없고 설사 그렇다 해도 얌전히 침대에나 누워있을 위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랬던 프렌이 이런 대낮부터 조퇴라니. 유리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프렌, 있냐...?”


밖은 화창하니 아직 밝은데도 불도 켜지 않고 커튼까지 내려 어둑한 방 안에 문이 열리자 기다랗게 빛의 공간이 생겼다. 연 문을 다시 소리 나지 않게 닫은 유리는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동안에 심장이 마치 튀어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쿵쾅거렸다.

커다란 침대 위에 프렌이 힘없이 누워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내뱉는 숨결의 뜨거움이 침대 곁에 몸을 낮춰 앉은 유리의 뺨에 와 닿았다. 힘겹게 숨을 쉴 때마다 이불에 감싸인 얇은 몸이 약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프렌?”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며 유리가 속삭이자 프렌이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길쭉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유리의 손가락에 스쳤다.


“유...리...?”

“그래... 나야.”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유리는 프렌의 이마와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뭐라 말할 기력도 없는지 다시 눈을 감고 유리의 손길을 느끼는 프렌에게서 기사단을 당당하게 호령했던 제국 기사단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서 유리는 순간 울컥했다. 뺨을 타고 내려오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더운 숨을 내배앝는 입술을 안타깝게 어루만졌다. 얇게 거스러미가 인 입술은 작고, 매우 뜨거웠다.


“무슨 일이야.. 너 왜 이렇게 됐어?”

“....별 일 아니야….” “이게 별 일 아닌 녀석의 얼굴이냐?”


대답하는 프렌의 목소리가 꺼질 것 같이 가냘파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유리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멍한 눈으로 그런 유리를 올려다보던 프렌은 갑자기 아픔이 느껴지는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보는 프렌의 약해진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유리는 어쩔 줄을 몰라 이불 밖에 나와 있는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힘없이 손 안에 들어찼다. 그 느낌마저도 영 신통치 않아 유리는 더럭 겁이 났다.


“많이 아파? 에스텔... 에스텔을 부를까?”

“아냐, 괜찮아...”“너...!”

“이건 치유술이 듣지 않는 걸….”

“뭐?”


놀라 고개를 든 유리의 눈에 천천히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을 가리는 프렌이 보였다. 그 상태로 눈만 쏙 내놓은 채 이불을 덮어쓴 프렌이 부끄럽다는 듯 눈을 내려 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그.... 생리통이야….>

순간 유리는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생리통? ...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 거?> 프렌이 창백한 얼굴에 발갛게 홍조를 떠올리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는 제국 제일의 얼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건 훨씬 나중 일이었다. <뭐야... 죽을병이 아니었잖아..> 급하게 찾아온 안도감과 탈력에 내뱉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프렌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유리는 모르겠지만 이건 이거대로 죽을 정도로 아프단 말이야.”

“그러냐... 그래도 너 옛날엔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잖아.”

“요새 들어 심해진 것 같아... 근데 그걸 유리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니...”


자라난 환경 상 그리고 이것저것 부차적인 이유로 유리는 꽤 이른 나이에 동정 딱지를 뗐다. 그 상대는 대개 연상의 여인들이었고 그녀들은 어린 유리에게 직접적인 관계 말고도 여러 가지 성에 대한 지식을 꽤 자세하게 가르쳐주곤 했다. 그 중에는 여성의 몸에 대해 말해준 여자도 있었는데 그녀는 언젠가 사귀게 될 여자 친구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며 유리에게 한 달에 한 번 여성이 느껴야하는 아픔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아픔을 조금 덜기 위한 여러 가지 처방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후 프렌을 볼 때마다 유리는 가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때가 되어도 프렌은 별로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프렌이 아프지 않다면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유리는 그 지식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삭제해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프렌이 이렇게 다 죽어가는 병자 꼴을 하고 누워있으니 유리로써는 다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있다가 없다가 그러는 게 어딨냐.> 그 말이 우스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린 프렌이 다시 배를 잡고 얼굴을 찌푸리자 유리는 다시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려봐, 내가...”


희미한 기억을 뒤져 여자가 했던 말을 필사적으로 생각해내려 애쓰며 유리는 다시 프렌의 손을 꼭 쥐었다. 아픔을 덜어주는 게 뭐라고 했더라. 이것저것 들은 것은 많았으나 너무 오래되서 지금 생각나는 것은 생강차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물과 생강이 들어간다는 것 빼곤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일단 생강이라도 가져올까 싶어-유리도 어느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몸을 일으키면 프렌이 열이 올라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갈 거야?”


그 모습이 너무도 작고, 약해진 초식동물 같아서 애잔한 마음이 든 유리는 다시 몸을 숙여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기억도 확실치 않은 그깟 생강 하나로 뭐가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파서 절절매는 프렌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서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불 위로 프렌의 배 부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힘들어하는 이 녀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니, 안타까움이 흘러넘쳐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쓰다듬고 있으면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프렌이 아이처럼 웃었다.


“유리.. 오늘 이상하게 상냥하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언제나 상냥해.”

“응... 상냥한 유리.”


사랑스럽게 속삭이며 눈을 감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후 하루 종일 아픔에 시달려 지친 프렌이 조용히 잠에 빠져들 때까지 유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비교적 상관의 사정과 생강차 레시피를 잘 알고 있던 충실한 부관 소디아노가 자신이 끓인 생강차와 함께 사이좋게 식어가고 있었다는 것은 안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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