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세계에는 마물의 한 종류인 요괴가 있어. 걔들은 마물과는 다르게 지능.. 같은 게 있달까 어튼 그래. 개중에는 변신능력 가진 애도 있어서 작정하면 인간과 외견상 별 차이도 없어. 오히려 인간보다 더 예쁜 애들도 많고.. 얘들 주식은 인간. 마을에야 결계가 있지만 결계 밖으로 나가면 금세 잡혀서 아드득카드득☆ 물론 결계 밖에는 요괴 외에 다른 마물들도 많습니다...이 요괴들 사이에는 전설 비슷하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까말 요괴 입장에서 인간은 먹이니까 육질이나 맛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 인간이나 그냥저냥 먹을 수 있거든. 근데 인간 중에서는 엄청 맛없는 인간이 존재한대. 어느 정도냐하면 조금 베어물어도 목구멍이 타들어갈 거 같이 아프고 따갑고 죽을 거 같고 토할 거 같은? 그런 느낌. 그런 인간은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 근데 이 맛없는 인간이 글쎄! 요괴랑 100년 정도 같이 지내면 그렇게 맛있는 별미가 만들어진다지! oh oh oh oh 그 맛이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인간이 된대. 요괴들은 이 '일단' 맛없는 인간을 찾고 싶어해. 근데 이 맛없는 인간은 엄청 희귀해서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유리는 요괴. 근데 그냥 요괴는 아니고 존나 이쁜 요괴야. 요 얼굴로 먹이도 엄청 많이 꼬셨지ㅋ 어쨌든 유리는 언제나처럼 먹이를 찾아서 마을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어. 요새들어 수도 근처엔 결계가 강해지고 길드 근처엔 방비가 강화되서 먹이 구하는 것도 영 시원찮아. 그래도 유리는 사냥 잘하니까 한번 발견한 먹이는 절대 놓지지 않지만. 그치만 요새는 워낙 사람들이 밖으로 안나오려고 해서 귀찮아.. 결계엔 들어갈 수도 없고. 인간들 식사처럼 하루 세 끼 안먹으면 죽는 건 아니지만 이제 슬슬 뭔가를 먹어야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찰라에 대삼림 근처에서 인간 한무리를 발견했어.
인간이 많은 마을 근처도 아니고 숲 속 한참 깊은 곳에서 헤메고 있는 게 어째 영 이상하지만 유리는 그렇게 인간의 생태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야. 평소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곧잘 하는 종족이니 이번에도 그런 이유겠지.
실제로 성인남자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나름 목표하는 게 있는 듯 뭘 찾거나 가지고 온 장치를 설치하거나 하고 있어. 유리는 눈을 깜빡여. 유리가 배를 채우기엔 저렇게 많은 먹이는 필요없어. ..한 마리만. 성인남자면 덩치도 꽤 있으니 한마리만 있으면 다음번 식사 때까지 넉넉할꺼야. 인간들이 넓다란 공터에 다다랐을 때 유리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해서 집단의 주목을 끌어. "뭐냐? 여자...?" 아닌데. 유리는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면서 자기 날카로운 송곳니랑 손톱을 보여줘. "요, 요괴...!" 상황을 파악한 인간들이 허둥지둥하며 도망가는 꼴을 보며 유리는 빙긋 웃어. 자아, 도망가. 많이는 필요없으니까. 가장 빠른 걸 먹거나, 혹은 동료를 밀치고 도망가는 녀석을 고르자. 그렇게 순식간에 텅 빈 공터를 둘러보며 슬슬 달려가려고 하던 유리는 공터 한 가운데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인간 하나를 발견해.
네, 요거 레이븐. 인마전쟁 이후 심장마도기로 되살려져서 아무 의지도 없이 알렉세이의 지시대로 살고 있던 그는 방금도 임무 수행중에 있었어. 알렉세이가 배정해준 부하들을 이끌고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와서 자우데의 밑작업중이었지. 되살아난 이후로 별다른 감흥도 감정의 기복도 겪지 못하고 있던 레이븐은 눈 앞에 들이밀어진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았어. 그래 요괴라는 것이 있다고 했었지.. 수많은 전장을 떠돌아다녔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정도? 그렇다쳐도 인간을 잡아먹는 이런 생물이 인간의 눈에 이다지도 아름답게 생겼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처음본 순간 여자라고 착각한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거야 마치 마물같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보다 높은, 그런 곳에서 내려온 사자같지 않나.
레이븐이 자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자 유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해. 유리에게 이런 인간의 반응은 신선해. 저를 본 인간은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거나 이를 악다물고 덤벼들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쓰러져 덜덜 떨거나, 울거나.. 뭐 그런 식이었거든. 도망가지 않은 걸로 봐서 세번 째 반응과 그나마 제일 비슷하지만 유리 제가 보기에 이 인간이 무서워서 다리가 풀린 거 같진 않아보여. 눈물도 안나고, 땀도 안흘리고 덜덜 떨지도 않고. 오히려 저 표정은 뭐랄까, 음... 유리는 고개를 다시 갸웃하고 레이븐에게 천천히 다가와. 가만히 있는 사냥감을 두고 일부러 멀리까지 뛰어갈 이유는 없지 뭐. 어찌됐든 배만 채우면 되는 거니까. 유리는 의미없이 흥흥? 웃고는 인간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잡기 쉬운 손가락을 꼭 잡아 쥐어 올려. 인간은 두 손 벌려 환영하겠다는 의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의 의사도 없어서 유리는 그대로 손을 잡아 입속으로 넣고 콱 깨물어. 깨무는 순간 인간의 어깨가 움찔한 것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어.
입 안에 기대했던 뜨뜻하고 들척지근한 피맛이 아니라 쓴맛매운맛신맛떫은맛을 다 합친 것 같은 끔찍한 식감이 느껴지자 유리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됬다는 걸 깨달았어. 다행히 삼키는 것만은 피해서 입속에 가득 퍼진 레이븐의 피를 켁켁 뱉어낸 유리는 목을 잡고 몇번이나 헛구역질해. 이거 뭐야?! 뭐야?! 여태껏 상태가 안좋은 인간을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야. 목이 타는 거 같아. 이건 먹을 수 없어! 이녀석 혹시 이걸 알고 일부러...?!
자신에게서 널찍히 떨어져서 컥컥대는 유리를 보며 레이븐은 쓰게 웃어. "뭐야, 난 먹히지도 못하는 건가..?" 제 앞에 나타난 예쁜 청년이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라는 걸 알았지만 레이븐은 살려고 애쓰는 대신 얌전히 유리에게 먹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살려고'? 그 단어는 이상해. 자기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죽은 목숨은 제 상사의 손아귀에 붙들려있지. 죽었는데도 살아있는 그 이질감에 몇번이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어. 성공한다음 다시 실패로 되돌려지는 게 실패라고 할 수 있다면ㅇㅇㅇㅇ. 몇번이고 되살아나는 그 감각은 끔찍해. 그렇게 레이븐은 포기해버렸고 별 반항도 없이 알렉세이가 주는 임무를 수행해왔어. 근데 여기서 요괴를 만났어. 이 요괴는 인간을 먹을 생각이야. 그럼 어떻게 되지? 제 아무리 알렉세이라도 요괴 뱃속에 있는 제 시체를 이어서 되살리진 못하겠지! 유리는 레이븐이 두려움이나 긴장 같은 걸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반대야. 레이븐은 기뻤어. 으아아 근데 왜 못먹어요
근처의 나뭇잎과 풀들로 몇 번이나 입을 헹구어내는 유리를 보면서 레이븐은 어이없음 + 조금 화 + 허탈감 같은 걸 느껴. 그래 요괴는 '인간'을 먹는다고 했지. 난 인간도 아니라는 건가. 되살아난 괴물. 죽을 수도 없지. 요괴한텐 미안하게 됐어. 쉽게 먹이를 먹는다고 좋아했을 텐데. 기껏해서 모여있던 인간들 중에서 골라낸 것이 이런 괴물이라니. 대충 입맛을 떨쳐내고 고개를 드는 요괴의 안광이 파랗게 빛나. 먹이를 먹지 못한 보복을 하려는 걸까. 그것도 좋을 테지. 기대했던 것에 훨씬 못미치지만 제 상사가 겪을 이 산골짝까지 와서 저를 되살리는 수고와 낭비를 생각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레이븐의 기대와는 다르게 요괴는 레이븐을 멀뚱하니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했어. 대충 진짜 있을지 몰랐다더니,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느니 하는 중얼거림. 저도 모르게 궁금한 얼굴을 했던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요괴는 주절주절 말하기 시작해. "음.. 맛없는 인간이라는 게 있대." 그런 인간이 있다고 아는 애한테 들은 거 같기도 하고.. 사실 그 녀석 잔소리는 별 쓸데없는 게 많아가지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든.. 별로 기억나는 게 없긴 한데. 엄청 맛있어 진다고 하더라. 그 뭐냐.. 100년 이랬던가? 함께 그 정도 지내면 된대. 백년이라.. 요괴 사이의 전설인가? 인간으로 평생 접할 일 없는 얘기긴 하네. 레이븐이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요괴는 주섬주섬 몸을 추스리고 숲을 벗어날 준비를 해. "여튼 난 먹을 걸 100년이나 기다릴만큼 미식가는 아니니까, 살았다치고 사셔 아저씨." 왜 도망치지 않고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밥은 한끼 잘 먹으면 그만이고. 금세 등을 보이는 요괴를 보며 레이븐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프렌은 요괴 한 무리의 우두머리야. 개인주의 쩌는 요괴들이 무슨 무리고 우두머리고가 있을까 싶지만 프렌의 성격 탓인지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무리가 만들어져 있었어. 프렌은 요괴 중에도 좀 강한 축에 속하지만 프렌의 무리는 약한 요괴가 대부분이야. 실력이 약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먹고 살만큼 인간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요괴들을 거두어 돌봐주다보니 이렇게나 세력이 많아졌어. 근데 요즘 들어 문제가 생겼어. 요괴의 습격이 늘어 마을의 결계와 방비가 빡빡해지자 먹이를 구하기 어려워졌거든. 고민하던 프렌은 작은 마을을 습격하자고 생각해. 마침 좀 가까운 거리에 알맞은 곳이 있어. 거기라면 성인남자도 적고 이 무리로도 충분히 사냥할 수 있을 거 같애. 프렌은 그렇게 정하고 모두에게 말해. 무리 중에 프렌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어. 그맇게 프렌의 무리들은 그날 밤 마을을 공격해.
겉에선 방비가 허술하고 인원이 적은 것처럼 보였던 마을은 함정이었어. 요즘 들어 습격이 많아지자 프렌의 무리를 끌어들여 한번에 소탕하려는 제국의 계획이었지. 막 먹이 하나의 목을 그어 일행 중 하나에게 던진 프렌은 마을 곳곳에 불이 오르자 놀라서 일행에게 소리질러. "함정이야, 모두들 도망쳐!" 워낙 만만하게 본 마을이라 약한 요괴들 포함한 무리의 모두를 데리고 왔어. 이렇게 단체로 올 필요는 없었지만 무리의 요괴들은 언제나 자기들을 보호하고 먹이를 구해다주는 프렌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했거든. 그런 동족들이 기사단의 마법과 무기에 맥없이 쓰러지는 걸 보고 프렌은 이를 악물고 덤벼들어. 붙잡힌 하나를 구해내고, 창에 꿰인 시쳬를 뺏고, 화가 솟구치지만 그래도 이대로 전멸할 순 없어서 일단 남은 요괴들이라도 피하게 하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프렌은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에서 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갑주를 입은 기사와 대치해.
"각하, 피하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주변에서 인간들이 뭐라고 외치는 걸 봐서 중요한 위치인 거 같아. 이 인간만 없애면 그 혼란을 틈타 일행이 무사피 빠져나갈 수 있어. 온몸을 누구 것인지 모를 피로 뒤집어써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톱을 하고 저를 노려보는 프렌을 보고 알렉세이는 "허어.." 해. 사실, 프렌이 보기에도 저 인간은 엄청 강해보여. 근데도 물러날 순 없어.
저도 많이 지쳐있었지만 알렉세이는 프렌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 몇 번 덤벼들어 큰 상처를 입고 칼에 꿰어져 바닥에 주저앉혀진 프렌은 악에 받친 눈을 하고 알렉세이를 올려다 봐. "이 정도 소란이라면 남은 요괴들은 모두 빠져나갔겠군." 그 눈을 들여다보며 알렉세이는 짧게 혀를 차. 이 놈은 이걸 노리고 난동을 부린 거겠지. 사실 프렌이 애쓴 것에 비해 이 정도면 제국의 소탕작전은 성공적이라고 볼 수도 있어. 예상외로 피해가 크긴 했지만. 어쨌든 우두머리가 잡혔으니 저런 조무라기 요괴들은 이제 섣불리 인간을 습격하지 못할꺼야. 곧바로 찾아올 죽음을 각오하고 몸에 힘을 빼는 프렌을 기사단장은 별 감흥없다는 눈으로 훑어내린 후 부하에게 명렁해. "이 요괴를 끌어다가 철창 안에 가두도록." 사살하라는 명령이 아닌 것에 부하들이 의문을 표시했지만 알렉세이로썬 인간도 아닌 요괴가 무리를 이루고 전략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어. 잘 연구하면 요괴의 습성 같은 걸 알아볼 수도 있을 거고 그럼 요괴 소탕도 좀 더 손쉬워지겠지. 더 알아볼 가치는 있을 거 같아. 딱히 부하들한테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별 다른 첨언을 붙이진 않았어.
도망간 인원 대신 대충 숲에서의 임무를 끝낸 레이븐은 묵고 있는 은신처로 돌아왔어. 한 때는 요괴가 먹지 못하는 자신을 놓고 그냥 가버릴 꺼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잘 그의 뒤를 따라왔어. 아저씨의 넘치는 매력 때문이지, 암. 옷상 백 년만 지나면 엄청엄청엄청 맛있어질텐데 후회하지 않겠냐,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은 요괴의 표정은 그야말로 볼 만했지. 어이없음과 경악에, 어쩐지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도 같은 얼굴. 예쁜 여자에게 그런 표정 짓게 하면 좋았겠지만 예쁜 남자도 뭐.. 나쁠 건 없네. 여튼 그랬다는 얘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요괴는 원래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 레이븐이 가는 길을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어. 그러고보니 '백 년'이 어쩌고 하던데. 사실 여기서 그런 건 별 중요한 게 아닌 거라서 레이븐은 꼬치꼬치 묻진 않았지만 실은 유리도 그렇게 자세히 아는 건 아닌 것 같아. 애초에 제 입으로도 관심없는 내용이라고 얘기했었고.
레이븐의 은신처는 당그레스트 근처 숲 초입에 있어. 초입이라고 해도 숲이 우거진데다 마물이 사는 곳이라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여길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지금 맡고 있는 임무가 길드에 관련된 임무라 임시로 지은 숙소야. 사실 레이븐은 당그레스트 내의 여관 같은 데에 묵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레이븐의 상관은 그런 그의 생각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 켕기는 게 많은 거겠지. 그가 자신에게 준 임무는 길드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모르는 척하고 지내면 밤에 칼침 몇 대 맞는 걸로 쉽게 끝나는데 말이야. 그 대신 식사도 준비해주겠다 시트도 갈아주겠다 이런 곳에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메리트가 아닌가 레이븐은 생각해. 물론 그의 상관은 그를 걱정한다기보단 길드까지 와서 자길 되살리는 수고와 시간을 낭비하는 걸 원치 않는 거겠지만.
눈에 띄지 않게 지어진 은신처에는 흔한 결계도 없어. 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가 등잔을 켜고 오늘 임무의 결과를 정리하는 레이븐을 졸졸 따라들어온 유리는 인간의 방 안을 처음 본 듯 주변을 두리번거려. "집 처음 봐 청년?" "아니." 다만 밖에 살던 요괴에겐 벽이랑 천장이 편안하지 않은 거 같아. 부하들 도망친거 뭐라고 변명하지... ´_`레이븐이 벽에 걸린 지도를 대충 들여다보며 멍때리는 동안 집 안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가재도구 등을 뒤적거리던 유리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흐응, 하며 목울대를 울려. 먹을만한 것을 찾는 건가? 배고픈 요괴에겐 안된 일이지만 당연히, 여긴 보통의 가정집처럼 살려고 만든 곳이 아니라 임시로 만든 숙소니까 식료품 같은게 잔뜩 늘어져 있을 리는 없어. 게다가 레이븐이 '죽은' 이후로 식욕 같은 걸 느끼지 못했던 탓도 있고. 그에 대해 불평이라도 하려나 싶어 올려다봤지만 요괴는 눈을 가늘게 뜰 뿐 별 말을 덧붙이진 않았어.
소재가 궁했던, 그리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침묵을 견딜 수 없는 인종인 레이븐은 대충 아까 들었던 '백 년'에 대해 물어봐. "백 년?"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이 쪽을 보는 요괴의 눈이 살짝 가늘어져. "흐응..." 잠시 뭔가 생각하던 요괴는 요괴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맛없는 인간'과 '백 년'에 대해 알려줘. 알려준다고 할까, 유리도 잘은 몰라서 결국 설명을 요약하면 '맛없는 인간과 요괴가 백년을 같이 살면 맛있어진다' 정도였지만. "백 년이라..." 인간은 100년이나 살진 못하지만 말이야. 이 요괴는 알고 있을까? 더군다나 저번 전쟁으로 인해 인간 평균수명은 훨씬 내려갔을 터야. 레이븐은 그에 대해 슬쩍 언급하려다가 그만둬. 사실 중요한 건 맛있어지는 게 아닌 걸. 정말 중요한 건 그 다음 단계인 거야. 백 년도 못산다고 해봤자 이 요괴쨩 돌아가버릴지도 모르고.. 레이븐은 어른답게 굴자고 생각해. 그리고 100년이나 걸리지 않을지 또 누가 알겠어.
"그 밖에 해야 할 일은 없는 거야? 같이 사는 거 외에?" 음... 없...진 않을 수도. 이럴 때-요괴가 요괴의 전설에 대해 말할 때-조차 딱부러지게 조목조목 알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 소꿉친구녀석은 엄청 타박하겠지. 하긴 이럴 줄 알았음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라도 자세히 들어둘 걸 그랬어. 이렇게 맛없는 인간을 딱 발견할 줄 알았나. 유리는 나중에 자세히 아는 녀석을 만나면 물어봐야겠다고 결론을 지어. 저번에 백년 성공한 녀석이 있다는 얘기 분명히 들었었고 말이야. 100년이나 있으니 물어볼 수 있는 기간은 충분할 거야.
그때부터 요괴와 인간의 동거가 시작돼. 인간도 요괴를 쫓지 않았고 요괴도 인간을 떠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동거라고 불러도 좋겠지. 어쨌든 그대로 요괴, 인간 이렇게 부르긴 불편했으니까 둘은 대충 통성명을 했어. 먹이와 포식자 사이의 평화로운 이름 교환이라니 어쩐지 싸구려 동화같은 이야기지. "난 유리. 유리 로웰이야." 눈을 깜빡이며 말한 요괴에게 레이븐과 슈반 중 어느 쪽을 알려줄까 잠깐 고민했던 그는 대충 전자를 골랐어. 별 이유는 없고, 이 근처가 당그레스트이기 때문에 거기서 쓰는 이름을 알려준 거지. 쓰고는 있지만 사실 어느 쪽도 이게 내 이름이다, 하고 와닿진 않아. 아직 '인간'일 적에, 그러니까 이름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 적에 가졌던 것은 빼앗겨서 이제는 없어.
동거라고는 하지만 유리는 은신처에 붙어있지 않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았어. 다만 묘했던 것은 같이 있는 동안 요괴인 유리가 레이븐의 건강을 신경쓰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야. 잠을 자다가 가끔 눈을 뜨면 조용히 옆에 앉아 제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도 있고. 제가 먹기도 전에 죽어버리는게 아닌가 생각하는 걸까. 레이븐은 짧게 실소해. 아저씨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 데. 그래도 백년이나 살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지만. 뭐 중요한 건 기간이 아니니까. 그보다 레이븐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단 한 명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사람(혹은 요괴)이 자신을 먹으려고 하는 요괴라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야.
며칠 함께 지내면서 유리는 자연스럽게 레이븐이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잔다는 걸 알게 됐어. 밥 때 되도 모른 척하고 잘 때 되도 딴청 피우는 레이븐을 내려다보는 어두운 색 눈동자에 어른거리는 건 어쩐지 책망처럼 보여. 단지 이쪽이 켕기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유리는 레이븐에게 직접적으로 뭐라 하진 않아.
그 때부터 유리는 은신처로 쌀이나 고기 과일 같은 걸 부지런히 날라오기 시작해.여 옷상 나 왔어, 레이븐 문 좀 열어봐 이런 식의 인사에 문을 열면 어김없이 뭔가 식재료 같은 걸 든 유리가 있어. 왠 거냐고 물어도 유리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야. 잠시 그대로 두면 유리는 제가 가져온 식재료로 꽤 제대로 된 인간의 음식을 만들어와. 쌀밥에, 된장국에 돼지고기 장조림 같은 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감시하는 것처럼 옆에서 빤히 쳐다보다가 레이븐이 식사를 마치면 크레페나 아이스크림같은 꽤 그럴싸한 디저트도 만들어 내놔. 이런 걸 만들 줄 아는 얼굴 잘난 남자란 뭔가의 번데기가 아닐까? 디저트를 삼키던 레이븐은 지나가는 말로 물어봐. "청년은 안먹어?" "나? 먹고 왔는데."
뭘... 말하던 레이븐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포크을 꽉 쥐어. 다치지 않게 가공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식기가 손 안에서 부들부들 떨려. 유리가 가져온 건 인간의 식재료, 인간의 음식. 어디서 가져온걸까. 유리는 눈가를 흐리며 웃어. 더없이 사랑스럽게. 등 뒤에 소름이 달려. 죽음이 두렵고 아니고 이전에 '먹이'로써, 포식자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자에 앉은 채 레이븐은 뒤로 주춤 물러났어."옷상, 거기 바닥에 아이스크림 떨어지잖아." 천천히 다가온 섬세한 손가락이 포크를 꾹 쥐고 있던 손등을 가볍게 덧그려. 아무리 뭉툭하다해도 철인데, 다쳤어? 발개진 손가락을 자못 걱정스러운 듯 들여다보기도 해. 아아. 죽기 위해 죽이는 삶이라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꾹 감았다 뜬 레이븐은 실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 그러곤 밥 잘 먹었다고 말해. 유리는 조금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려.
비슷한 내용의 보고를 받은지 벌써 여섯 번째야. 부하의 말을 들으면서 알렉세이는 잠깐 멈칫했던 손을 계속 움직여 서명란에 r을 마저 써넣었어. "이번엔 어디인가?" "그게.. 오른쪽 다리라고 합니다. 의사 말로는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꺼라고..." "그래.." 급격히 심기가 나빠진 듯한 기사단장의 태도에 부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어.
요괴를 생포한 건 며칠 전이야. 그 정도 크기의 마수를 위한 크고 단단한 우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알렉세이는 잡아온 프렌을 성 최하층 죄수들이 머무는 감옥으로 보냈어. 임시로 감옥 문에 실드 블라스티아에 쓰는 술식을 박아넣자 그럭저럭 탈출 방지용은 됐지. 그 팔다리를 쇠사슬로 구속해놓았을 뿐 더 엄격한 술식을 채워놓지 않은 건 요괴의 순수한 회복력이나 근력 같은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실제로 하루나 이틀에 한 번 기사단장은 최하층 감옥으로 내려가 부하들이 그에게 불에 달군 검이나 속성 마법 같은 걸 시험하는 걸 보고 오곤 했지. 그 놀라운 회복력은 물론이고 제 몸에 어떤 짓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비명을 참는 정신력은 경이로울 정도야.
이 모든 행위에 딱히 알렉세이 개인적인 흥미는 없어. 피와 날붙이가 섞인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기사단장은 어떡하면 저 요괴들의 약점을 찾을 수 있을까 같은 걸 생각해왔어.여기까지 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을, 사실 지금의 사태는 전적으로 기사단의 잘못이야.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렌 탓이냐 / 기사단의 탓이냐 를 따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솔직히 말한다면 알렉세이는 기사들이 프렌에게 품은 불만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감옥의 방비를 맡긴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그 자신의 형체를 잃은 악마처럼 보였던 전과는 달리 감옥에 가두기 위해 대충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요괴는 마치 '인간'같았어. 그것도 꽤 순정하고 사랑스러운. 부드러워뵈는 어린아이같은 뺨에 고개를 숙일 때면 가느다랗게 속눈썹 그림자가 물들었지. 그 일견 유약해뵈는 모습에 착각을 한 것도 있을 거야. 제 동료를 죽이고 저를 상처입힌 괴물이 연약한 모습으로 사지를 결박당해 얌전히 갇혀있는 것을 보고 잔인한 복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보초병들은 대부분 직급도 낮고 혈기가 들끓는 젊은 기사들이야. 분노에 겁도 임무도 이성도 잊은 그들은 보복을 위해 제 스스로 문을 열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어. 그리고 물론, 그 안에 든 요괴는 이성도 잃지 않은 말짱한 제정신이었지만 본래 제 먹이일 터인 인간이 사정거리 안에서 무기를 들고 알짱거리는 걸 봐줄 정도로 너그럽진 못했지.
처음에 들어간 기사는 검을 든 손목채 잘렸고 그런 동료를 끌어내려 황급히 뛰어든 기사는 옆구리 살점을 반 근이나 뜯겼어. 기사단 복귀가 아니라 목숨부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지. 실제로 두번째 기사는 오늘내일 한다는 보고를 들었어. 사실을 알게된 알렉세이는 기사단장 직권으로 명령을 내려 그런 행위를 엄격히 금했지만 이미 죽은 동료들과 감옥에서 습격받은 기사들의 보복을 위해 기사들은 끊임없이 감옥으로 잠입했고 그 때마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어. 어리석은 자들. 겉모습이 어떻던 간에 그건 요괴야. 단순히 묶어 가둬놓았다 해서 인간 한 둘이 검 한자루로 어찌 해볼 만한 게 아니야. 바로 며칠 전에 그 요괴와 검 한자루 들고 일 대 일로 대작한 경험이 있는 기사단장은 손을 깍지껴 턱 부근에 가볍게 가져다대. 어차피 자기 명령을 어기고 잠입한 것이니 그냥 둘까 생각도 했지만 계속 이런 일이 있다면 손실은 더욱 더 커질꺼야. 기껏해야 요괴밥으로 하려고 나랏돈으로 먹이고 입히고 무예 가르쳐놓은 건 아니지. 게다가 프렌을 잡아온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말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들의 불만이 높아져있어. 이대로라면 사기도 떨어져가겠지. 알렉세이는 결단을 내려..
기사단장 집무실 안에 들여놓을 만한 커다란 우리를 주문하라고 이르자 부하의 눈이 휘둥그래져. "각하...!" "그렇게 들어가지 말래도 명령을 듣지 않으니 이곳에 놓는 수밖에 없질 않나." "..심기가 언짢으시군요." "단장 명령도 들어먹지 않는 머저리들을 키운 기억은 없네만." 부관 말대로 지금의 처사는 반쯤은 경고와 화풀이 비슷한 것이지만 남은 반은 이성적 판단에 근거해. 성에 따로 놓을 데도 없고, 설령 놓을 데가 있다해도 기사들에게 방비를 맡기는 한 악순환은 그대로일꺼야. 차라리 탈출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는 제 곁에 두는 게 낫지. 부관의 경악을 무감동하게 받은 알렉세이는 기사단장이 일하다 요괴에게 암살당하지 않게 튼튼한 소재로 지으라고 덧붙여. 그런다고 쉽게 당하기나 할 분입니까... 저번에는 검 한자루로 그 요괴와 다이다이 뜨셨습니다만... 몇 번 더 상관을 설득해보려다 포기하고 거의 푸념에 가까운 불만을 중얼거린 부관이 분부대로 합죠 하고 집무실을 나가자 알렉세이는 생각에 잠겨. 이 집무실에 지하감옥만한 방음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육체의 실험은 이 쪽으로 옮겨오기 전에 마쳐야겠군. 그렇다쳐도 별로 비명도 지르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그 날도 유리는 제 먹을 것 먹고 남은 인간의 음식과 재료를 대충 챙겨 레이븐의 숙소로 돌아왔어.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문은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열리지만 안에 인기척은 없어. 또 임무갔나봐. 임시숙소라는 말 그대로 레이븐은 이 곳에 자주 묵지 않아. 일정한 한 도시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말 그대로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최근엔 특별히 따라다니는 일행이 생겼다는 것 같던데 잘은 몰라. 레이븐은 이것저것 말하긴 해도 제가 말하고 싶지 않은 화제는 이리저리 잘 피해가는 성격이고 또 유리는 그런 걸 캐묻지 않으니까.
그대로 집 안까지 들어와 식료품들을 적당한 위치에 늘어놓은 유리는 찬장이며 선반을 살펴 봐. 떠나기 전 그릇으로 잘 덮어두었던 음식은 처음 만들었던 양이 거의 줄지 않아 그대로야. 이 아저씨 또 식사 걸렀네. 한 번 먹으면 포만감이 오래가는 요괴와 달리 인간은 하루에 세 끼는 먹어야 한다고 하던데. 하루에 세 번이라고 하면 몇 끼를 거른 셈이 되는 거지.. 유리는 머리를 갸웃해 봐. 혹시나 해서 조리도구를 흘끗 봤지만 뭘 따로 해먹은 흔적도 없어. 도시락이라도 싸야 하나. 그리고 들어오면 맨 먼저 도시락통이 비었는지 확인하는 거야. 먹지 않았으면 조금 괴롭히고.. 유리는 생각하고 조금 웃다가 머리를 벅벅 긁어. 할 리가 없지, 그런 짓.
자신과 레이븐. 둘의 관계는 뭘까? 유리는 잠깐 생각해. 레이븐이 '맛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 흥미없다고 했던 건 진심이야. 밥은 맛있는 걸 먹으나 맛없는 걸 먹으나 배가 차고 좀 있으면 또 배고파지는 건 똑같아. 먹을 수 있는 한 조금 맛없는 걸 골라낼 필요도, 맛있는 걸 먹기 위해 100년이나 기다릴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유리가 레이븐을 따라 온 건 조금 있으면 맛있어진다는 레이븐의 말에 혹해서가 아니야. 유리는 처음 봤던 거야. 먹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 먹히기를.... 바라는 인간.
'이, 괴물...!'
아. 유리는 고개를 붕붕 돌리면서 뒤따라온 환청을 지워버려. 가만히 있으면 왠지 쓸데없는 것까지 떠오를 거 같아. 식료품 정리를 끝낸 유리는 서쪽으로 가자고 생각해. 거기에 백년을 성공한 요괴와 인간이 있어. 그들을 보러 가자.
유리는 근처 요괴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백년을 성공한 요괴의 행방을 알아내. 요괴들은 별 관심없는 듯하다가 갑자기 백년 요괴의 행방을 묻는 유리의 태도에 궁금증을 표하긴 했지만 순순히 얘기해줘. 조언에 따라 데즈웰 대륙으로 건너가 사막을 지난 유리는 템자 산의 버려진 마을에 도착해. 마을은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아서 무너진 벽과 자라났다가 도로 말라죽은 잡초 등으로 가득해. 여기에 뭐가 살긴 할까? 유리는 군데군데 부서지고 무너진 길 위에 굴러다니고 있던 돌을 대충 걷어차. 돌은 데굴데굴 구르다가 마을 가운데 꽤 넓직한 공터에서 멈춰.
"...어머."
요염한 목소리. 돌이 굴러가는 소리에 뒤돌아본 그것은 유리를 발견하자 마치 반갑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어. 찰랑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귀가 뾰족해. "그치만 더는 필요 없는데." 발 밑에 굴러다니는 시체의 수를 세고 있었던 모양인지 들고 있는 창 끝이 바닥을 향해 있어. 동족이구나. 이 곳에 있다던 백년을 성공했다는 녀석이겠지. 두 손을 들어 공격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한 유리는 네가 다 먹을 수 없을 거 같으니 좀 도와도 되겠냐고 물어봐. 그 말에 유리의 정체를 파악한 그것이 요염하게 눈꼬리를 휘어.
오랜만에 숙소로 돌아왔지만 유리는 숙소에 없었어. 떠돌아다니는 인상에 비해 숙소에 은근 잘 붙어있었는데. 어딜 간걸까? 레이븐은 잘 쑤셔넣어져있는 식료품과 재료들로 가득한 찬장, 그리고 만든지 얼마 안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음식을 발견해. "이야, 크림스튜네." 한눈에 봐도 조리가 잘 된 것 같아. 떠난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 유리는 숙소에 올 때마다 잔뜩 만들어두곤 하거든. 유리가 먹는 것이 아니니 이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겠지만 레이븐이 다 먹기도 전에 상해 버리는 것이 태반이야. 아저씨도 이제 늙었는 걸. 아무리 그래도 20대 장정처럼은 못 먹지 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남은 음식도 몽땅 쓰레기통으로 직행. 무언가 먹고 싶다는 식욕을 느낀 건 언제 일이더라.. 사실 잊어버렸어.
유리는 식사를 하러 간 걸지도 몰라. 청년은 배고픔을 느끼겠지? 여타 살아있는 것들처럼. 잔뜩 먹고 활기차게 뛰고 달리고 웃고 하겠지.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이 몸도 움직이기 위해서 연료를 필요로 해. 몸을 흐르는 전류는 멈춘지 오래인데도. 이미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허기에도 정당성이라는게 있다면.. 깨끗이 빈 그릇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레이븐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어. 유리.. 는 아니야 요괴는 문을 두드리지 않거든. 들어오기 전에 문을 두드려 표시하는 건 인간의 매너겠지.
문을 열자 가끔 이 곳까지 찾아오는 떠돌이 상인이 서 있어. 깊은 산 속에 살아 물건 구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배려지. 레이븐은 음식이 가득찬 찬장을 떠올리고 괜찮다고 말해. 상인은 기쁜 듯이 댁에 음식이 있다니 별일이네요, 하고 말해. 그 말 그대로 레이븐의 숙소는 항상 식료품이 텅텅 비어있어 상인이 어거지로 팔거나 했던 적도 많거든. 하나도 팔지 못한 상인이 웃으며 돌아가자 레이븐은 에구, 하면서 웃어. 끝을 바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유리 성장과정에 대해 좀 읊자면 일단 인마전쟁 이후에 당그레스트로 들어온 고아임. 10년 전 전쟁에서 고아가 되어 떠돌다가 그 근처를 지나던 하늘을 쏘아 맞추는 화살 수령인 돈이 발견해서 주워왔음. 가끔 돈은 술 취하면 왠 비쩍 꼴은 더러운 꼬맹이가 폐허와 시체 더미 옆에서 다 썩은 나무 막대기 하나 움켜쥐고 자기한테 덤벼들 태세인게 기가 막히고 어이없었다고 말하면서 온 술집 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웃음. 유리는 그떄마다 아나 저 영감탱이가ㅡㅡ; 함.
유리로 말하자면 전쟁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음. 전쟁 쇼크탓인가.. 자기가 실은 전쟁 전부터 부모가 없는 고아였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정도. 갓난애 때 부모를 여의고 대충 거리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살아옴. 길드 거친 종자들이랑 투닥투닥하면서 살아온 거라 본편과 마찬가지로 넉살도 좋고 배포가 있음. 예쁜 외모에 비해 입담도 걸함. 원래 길드 자체의 기원이 기사단과 얽혀있기 때문에 익힌 기술도 비슷함. 이 설정은 나중에 풀 일이 있으려나... 주워준 돈과는 딱딱한 상관-부하 관계도, 그렇다고 막 살가운 부모-자식 관계도 아닌, 본편에서 묘하게 틱틱거리면서 존경하던 그런 상태. 처음에는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점차 돈의 인성에 감화받았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있어서 새삼 정식 입단 절차는 안 밟았지만 어느 정도 그냥 이대로 하늘을 쏘아 맞추는 화살에 들까..? 하는 생각도 있었음.
왜 있음이 아니라 있었음이냐면 최근 (=이야기가 처음 풀리는 19~20살 무렵) 부터 그 생각이 조금씩 변했기 때문. 돈의 손자 해리에 대한 이야기인데, 10년 전 주워온 유리와 해리는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함께 키워짐. 사실 돈이 유리를 주워온 이유도 얼마 전 해리가 부모를 잃었다는게 영향을 주긴 했음. 뭐 안그랬어도 유리 품성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주워오긴 했겠지만 :Q 어쨌든 둘은 함께 자라는데 어릴 적엔 형아 형아 하고 잘 따르던 해리가 머리가 크면서 점차 유리를 멀리 하기 시작함. 돈의 손자지만 눈에 확 띄게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해리에 비해 유리는 검술 실력도 뛰어나고 배짱도 두둑함. 너스레도 잘 떨고 성격도 사나이라 길드 사람들한테 인덕도 있음. 유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당연히 돈의 후계는 해리가 이을 거라고 생각했던 길드 사람들도 유리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자 어쩌면...? 하고 은연중에 떠들기 시작함. 술집에서 주당 셋 이상이 모이면 저절로 화제가 그리로 튐. 할아버지의 후광에 비교당하느라 지친 해리에게 그런 사람들 웅성거림도 거슬리지만 자기 스스로도 돈의 손자이지만 '비교적' 평범한 자신과 여러 면에서 그런 자신보다 뛰어난 유리를 머릿속에서 요모조모 비교하고 있음. 자연스럽게 유리한테 예전같이 살갑게 대할 수 없음. 눈치가 귀신인 유리는 당연히 그걸 암.
유리는 돈이 은인이기도 하고 길드 사람들이 다들 입은 걸어도 좋은 사람들이니까 지금 자기 상태가 상당히 마음에 듬. 그러나 아예 갓난쟁이 어린애 때가 아니라 어느 정도 머리가 커서 당그레스트로 들어온 거라 여기가 완전히 자기가 기대도 되고 모든 걸 다 내맡겨도 된다는 어리광은 부리지 않음. 어릴적부터 거리에 굴러먹던 고아라 남한테 의지 안하고 혼자 살아온 것도 좀 있고. 길드사람들이 겉으로는 거칠고 괄괄하지만 알고보면 그 속은 어리숙하고 순박한 구석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름 옛날부터 영악했던 유리 눈에는 저 놈들 저대로 놔둘수 없지 'ㅅ'-33 하는 생각도 갖고 있음. 말하자면 본편에서 아랫마을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음. 설정 끼워맞추기 에라ㅋㅋㅋㅋ.... ... .. 그래서 길드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말 안듣는 거친 놈들 발로 걷어차고 ㅋㅋㅋㅋㅋ하면서 다니긴 하지만 어느정도 길드에 빚을 지고 있는 마음인데 해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이런 열등감이 유리는 불편하고 거북함. 그래서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돈이 맡기는 중요한 일 뚝딱뚝딱 처리하고 남들 인식 신경 안썼다면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돈이 중요한 일 맡기면 ㅋ영감님 이거 나한테 무리~ 이러면서 도망가거나 지붕 위 방 구석에서 하릴없이 낮잠자거나 하면서 눈에 안띄게 빈둥빈둥거리며 지냄. 돈도 그런 해리와 유리를 암. 아직까진 으이그 야로도모... 하면서 봐주고 있는 상태.
물론 일 조금 쉰다고 사람들 웅성거림이 쥐죽은듯 사그러다는 거 아니니까 유리는 내색은 안해도 조금 답답한 심정임. 예전에는 당연히 하늘을 쏘아맞추는 화살 길드원1 같은 걸로 들어가려고 했던 미래가 좀 흔들리는 걸 느낌. 자기가 해리의 자리를 뺏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돈의 밑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명확히 보이는 미래도 없어서 막상 자기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 상태. 창가에 앉아서 멍 때리면서 잉여대고 있는 나날임.. ´_`
기사단이나 제국에 대해서는... 딱 길드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큼 그 둘을 싫어함. 여기서 유리는 19세 이전까지 당그레스트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설정이지만 가끔씩 그 근처를 지나는 거들먹거리는 기사들이랑 길드가 충돌을 빚는 걸 보기도 하고 여행하던 길드들이 본 소굴로 돌아와 술집에서 기사랑 싸운 얘기 못되처먹은 기사단 얘기 하는 걸 들으면서 자랐음. 저가 직접 본 것도 좀 있고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사에 대한 반감이 형성됨. 말하자면 둘 어느 한쪽이 서로를 골탕먹이면 그 무리에서 ㅋㅋㅋ새끼 좀 하는데? 하면서 평범한 영웅 취급하는 기사단-길드 관계의 생리와 감정을 그대로 갖고 있음.
기사단에 대한 감정이 세력이 비등한 못된 라이벌을 보는 느낌이라면 귀족이나 높으신 나리들에 대해서는 보다 경멸이나 혐오에 가까움. 이 경우는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도 있지만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유리 어릴 적 기억과 관계가 있음. 전쟁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는 유리지만 약자에게 느끼는 안타까움이랑 강자에 대한 혐오만은 비교적 분명해서 유리 자신도 어릴 적에 무슨 일이 있긴 했구나ㅇㅇㅇ 하고 어렴풋이 짐작하는 정도. 가끔 제국의 높은 귀족이 행패부린 일을 들으면 ㅋ역시 높으신 나리들은 생각하는게 다르군ㅇㅇㅇ 하면서 빈정빈정댐.+ 라피드는 그 근처에서 다 죽게 생긴 강아지 새끼를 데려왔음. 구해준 유리와도 은인이 아닌 동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긍지가 높아서 길드 사람들한테도 인기가 좋음.
프렌은 제도 아랫마을에서 자랐음. 평범하게 헹크스 할아범과 마을 사람들한테 신세지면서 아랫마을에 애착을 갖고 자랐고 귀족들이 부리는 행패 등을 보면서 높은 신분이 되어 제국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함. 그래서 택한게 기사단장.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깨 너머로 무예도 익혀서 16, 7세 무렵에 기사단 채용 시험에 합격함. 본편과 비슷하게 어지간한 일은 아츠쿠 스루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꽉 막혔음. 그리고 눈새. 매우 눈새. 옆에서 눈에 띄게 난동 부릴 유리도 없고 평민 출신이다보니 기사단 내에서 알게 모르게 귀족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본인은 그거 잘 모름. 어딜봐도 명백하게 이쪽을 향해 노리고 날아오는 칼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 내고서 ? 칼 잃어버린 사람? 하면서 돌려줄 퀼리티임. 어느 정도는 아랫마을 고아로써 생존의 필수 스킬. 생계형 눈새...? ㅇㅇㅇㅇ 물론 그 이하 수준의 괴롭힘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볍게 넘어가 버릴 정도로 운도 실력도 좋음.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렇게 따뜻하게 아름답지만은 않은데 그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함. 천천히 제국을 바꿔나가겠다는 마음 근간에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베이스로 깔고 있음.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뽀샤시해보이는 기저에 어릴 적부터 고아로써 자라오면서 줄곧 느낀 상실감? 같은 걸 갖고 있음. 본인은 잘 모름. 사람들을 믿고 사랑하긴 하지만 어딘가 차단하는 벽이 있는 것도 그 때문임. 본편에서도 약간 이런 느낌이 있긴 한데 여기선 곁에서 같이 자란 유리가 없으니까 그보다 더함. 다른 사람한테 모두 따뜻한 세상이고 그래야만 하지만 나한테도 따뜻한 세상? 글쎄...? 싶은 느낌. 이런 생각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자각도 없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사람들한테는 특유의 눈새끼와 함께 이녀석 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ㅡㅡ; 어떤 놈인거야... 하는 느낌을 선사함. 두루두루 인기는 좋지만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엔 심하게 이상한 방향으로 꼬였기 때문에 딱히 마음맞는 친구가 없음..´_`
요런 프렌을 될 성 부를 나무 싹ㅋ 하면서 홀랑 주워간게 알렉세이. 기사단장 되자마자 제일 먼저 제 발밑부터 다지기 시작한 알렉세이에게 프렌은 실력도 있겠다 귀족 출신도 아니니 제 세력 만들기도 좋겠다 여차해서 나중에 끊어버릴 때 후환도 없겠다 싶은 좋은 인재였음. 괜히 용건없이 기사단장실에도 자꾸 부르고 개별임무도 주고 하다가 왠만큼 명분이 될 정도로 공 쌓자 19살에 소대장 직위 부여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줌. 프렌도 오롯이 혼자였기 때문에 알렉세이에게 좀 더 의지??하고 믿고 따름. 물론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있지는 않음. 프렌은 일단 알렉세이를 존경하고 동경하고 있음. 알렉세이도 그런 프렌을 알고 저 사고방식은 잘 모르겠지만ㅇㅇㅇ함.
그래서 썰이 시작되는 건 게임 본편보다 3년 전, 두 사람이 19살 때임. 프렌은 막 소대장 되어서 제 소대 생기고 부관으로 소디아 배정받았고 유리는 점점 돈이 시키는 의뢰 요리 빠지고 저리 빠져서 마을에서 빈둥빈둥거리기 시작했을 무렵.
소대장이 된지 얼마 안된 프렌은 기사단장으로부터 원정 임무를 부여받음. 임무 내용은 제국의 극비 정보를 가지고 도망친 죄인을 추적해 잡아오는 것임. 죄인이 가진 서한은 봉해진 그대로 소대장 본인이 지참해서 직접 기사단장에게 상달할 것. 죄인은 제국에 '협력'하기 전에 길드를 전전한 경력이 있으므로 추적이 늦어질 경우 대륙을 넘는 긴 원정이 될지도 모른다며, 그러나 이번 임무는 제국을 위해 꼭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을 전하며 알렉세이는 프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림. 그 눈동자에 담긴 따뜻한 신뢰를 보고 프렌은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임.
사실 비공식적으로 제도 밖에 나가 자잘한 마물을 몇번 소탕한 일을 제외하면 이번 임무는 프렌 소대에게 거의 첫 공식적인 임무나 마찬가지임. 침착하려고 애쓰지만 벌써 들떠서 군기가 바싹 들어간 게 알렉세이 눈에는 보임. 절도있게 격례를 붙이고 나가는 곧은 등을 보며 알렉세이는 조용히 눈매를 좁힘.
빠르게 도망치는 개인을 다소 뒤쳐져 출발한 소대가 쫓고 있으니 며칠 밤을 쪽잠을 자 가며 추적했지만 이리키아 대륙에서 죄인을 잡는 건 실패함. 자기들 수장이 내린 첫 임무에 들떠서 체력분배고 뭐고 무리하려는 소대를 잘 다독여 놓고 제 심정 누르느라 밤에 잠 못이루는 프렌 옆모습에 요기서 소디아가 무네큥☆했다는 건 사족ㅇㅇㅇㅇ. 어쨌든 나름 페이스 분배하면서 죄인 족적 따라가던 중 소대 반 갈라 먼저 보낸 정찰대로부터 연락이 들어옴. 아무래도 죄인이 당그레스트로 들어간 것 같다는 이야기임.
그 당시 유니온과 제국은 사이가 매우 안좋았던 무렵이니까 죄인을 잡는데 협조는 고사하고 아예 당그레스트 진입부터 막힐 게 뻔함. 큰일났다고, 저 길드 쥐새끼같은 놈들이 부러 죄인을 숨겨두고 이쪽과 적대할지도 모른다고, 당장 저들을 급습해 뒤집어 엎어야한다고 쫑알거리는 부하들을 다독이며 프렌은 고개를 저음. "정식으로 유니온에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한다." 뭐, 협조 안해준다면 우리 소대만으로도 충분하니 장소를 빌려주는 것으로 족함ㅇㅇㅇ 시민을 지키는 기사단으로써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을에 강제로 진입할 수 없다며 눈매를 단단히 굳히는 프렌을 보고 부하들은 걔들이 이해해줄 거같애여? 어이구 우리 소대장님 꽉 막혔어...ㅠㅠㅠ + 그치만 역시 멋있긴 좀 멋있는 듯 하응...! 정도로 따름. 이새끼들 소대장성애자라서 안될꺼야...´_`
유니온 측에 정식으로 통보하고 하루가 지났으나 유니온은 묵묵부답. 마침 돈이 출타중이라 연락받은 지부에서 님 기사단이 협조 좀 해달라는데여? /부길마 : 헐 이건 또모야ㅗㅗㅗㅗ수장님 없어서 바빠죽겟는데 꺼져! 해서 스루당함.
아무리 기다려도 유니온에서 별 얘기가 없으니까 답답해진 프렌이 소대원 몇을 데리고 직접 당그레스트로 들어감. 차림새? 당연히 기사단 소대장 차림으로ㅇㅇㅇㅇ 레알 당연하게 마을 입구에서 저지당함. 점심 먹고 따끈하니 햇볕 비치는 성벽 위에서 잉여대던 길드 형님들은 처음에 프렌이 너무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려하니까 ㅇㅇㅇㅇ..ㅇㅇ....헐 이새끼 기사 복장?!??!?!? 하면서 저지함. 거기다 대고 요 눈샌지 미친놈인지가 유니온 수장을 보고 싶다고, 서한을 받지 못했느냐고 묻네? 우리 수장님 바쁘시거든여??ㅡㅡ 거 심심하면 형아들이랑 놀자 기사따응ㅇㅇㅇ 식으로 둘러싸였는데 프렌은 완전 진지하게 설득하려고 하는데 길드는 아 그러세여? 크닐이네여ㅇㅇㅇ 하면서 빈정빈정대는 식으로 몇 마디 주고 받은 끝에 프렌이 진짜 급한 일이라고, 말이 영 안통하니 슬슬 마음이 급해져서 "길을 비켜주시오." 하고 대충 손으로 밀었는데 그 밀쳐진 놈이 일부러 리엑션 크게해서 엎어지면서 아이고 제국 기사놈이 멀쩡한 사람치네 아이고아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댐. 그 놈때문에 프렌 소대를 둘러싼 길드 사람들의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고, "그게 아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게 공갈이라는 걸 알아차린 프렌 + 기사단은 기사단대로 짜증이 나서 둘이 아슬아슬하게 대치하는 상태가 됨.
유리는 그 즈음에 일어남. 점심도 먹었겠다 통풍 잘되고 그늘이 시원한 나무 기둥 밑에서 낮잠 한잠 늘어지게 자려고 했었는데 어째 마을 분위기가 요상함. 눈은 감았으되 잠은 들지 않은 상태에서 대충 분위기 살펴보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길드에서 좀 떠들기 좋아하는 놈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당그레스트로 기사단이 쳐들어왔다고, 지금 용병 길드와 대치 중이라고 호들갑을 떰. 기사단? 쳐들어와? 이새끼들이 어딜...ㅡㅡㅗㅗㅗ 마침 식후 운동도 아직이겠다 한번 가볼까~ 안그래도 계속 임무 땡땡이 치고 도망다니느라 싸움이 부족했음. 유리는 티 안나게 신나서 마을 입구로 달려감.
상대적으로 인원이 작은 프렌 소대를 길드와 마을 사람들이 몇 겹씩 둘러쳐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니까 기사단이 긴장해서 손 대고 있던 칼 손잡이를 움켜 쥠. 아예 검을 뽑으려는 부하들을 팔을 뻗어 제지하며 프렌은 좀 더 앞으로 나섬. "어딜." 그래도 길드 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음. 살아나가는 건 그렇다치고-여기서 프렌은 죽음을 각오했다기보단 당연히 살아나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 근자감만은 아니고ㅇㅇㅇ- 이러다가 진짜 큰일이 나서 제국과 유니온의 관계가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고 프렌은 생각함. 첫 임무인데 똑바로 성사는 커녕 일을 아예 그르치게 생겼음. 아니 첫 임무 아니라도 제대로 할 일이지. 스스로를 다잡으며 프렌이 이마를 찌푸림. 뭐야, 대체 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그때 저 쪽에서 인파가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다가옴. "내참, 무슨 일이 났나 했더니." 아 쫌 비켜봐 자식아, 엉덩이 만진 놈 이따 %*#)*)%를 !@~!)$(해준다! 따위의 수상한 사족이 덧붙여 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긴장 때문에 프렌은 잘 못들었음. 마침내 이쪽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모습이 생각 외로 제 나이 또래의 앳되고 호승심 강한 청년의 얼굴임.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픽 웃은 유리가 말을 이음. "뭐야, 진짜 기사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지만 프렌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는 걸 느낌. 아까는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해 무력충돌이나 유혈도 불사할 것 같은 날선 분위기였다면 지금 유리가 등장하자 그 거칠던 공기가 변해서 과연 유리가 뭘 어떻게 할까 하는 기대감과 즐거운 호기심으로 바뀐 느낌임. 당그레스트에서 어지간히 기대와 인망을 받고 있을 터임. 아까까지도 앞에 나서서 프렌에게 깐죽대던 놈도 유리가 등장하자 너무도 당연하게 주도권을 유리에게 넘겨줬음. '만만찮은 인물이다.' 본능적으로 분위기 파악을 끝낸 프렌은 생각함. 게다가 가벼운 몸놀림을 보아하니 검이나, 그 비슷한 무예를 익혔을 수도 있음. 그것도 꽤 수준급의.
유리는 유리대로 프렌에게 감탄함. 물론 순전히 전투원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진에서, 자기들의 2~3배는 될 것 같은 인원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포위하고 있는데도 경계를 늦추지 않음. 보통 이런 식으로 포위당하면 눈 앞의 적 뿐 아니라 등 뒤, 옆의 적에게도 신경이 분산되서 패닉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놈은 시선도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초조해하는 부하들을 추스려 먼저 공격을 시작하지 않게 했음. 그렇다고 길드 녀석들이 상냥하게 굴어줬을 것 같지도 않은데 잘도 여태까지 버텼다 싶음. 마을 입구지만 이 근처에서 싸웠다면 주위의 집들이 피해를 보았을 테지. 앳된 얼굴을 보니 제 또래 같은데 저런 나이에 이런 통솔력이라니. '만만찮은 녀석인데.' 그래도 그 통솔력도 슬슬 한계가 있음. 이 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에 서서히 일말의 불안이 얼룩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착한 유리가 빈정빈정 말을 던짐. "기사 나리들이 길드의 소굴엔 왠 일이지?"
마을 사람들에게 저 정도로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라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프렌이 침착하게 그러나 재빨리 사정을 설명함. 제국에 큰 죄를 범한 중죄인이 당그레스트로 들어간 것 같다, 그 포획에 협조를 얻고 싶다, 마을에 해가 가게 하지는 않겠다 등등. "중죄인?" 나른해서 무심한 것처럼 보이는 표정으로 프렌의 이야기를 듣던 유리가 흐응, 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마을 사람들은 물론 잔뜩 경계하고 있던 기사단도 순간적으로 '무슨 사내놈이 멀개가지고..' 하며 넋을 놨다는 건 뭐... 비밀이랄 것도 없고. 우리 유리가 좀 이쁘긴 하져ㅇㅇㅇㅇ 그 와중에 눈을 몇 번 깜빡인 프렌이 "그 이상은 극비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요런 딱딱한 대답을 내놓자 유리가 어깨를 으쓱함. "용건도 제대로 밝히지 않는 기사 놈들을 마을에 들여놓을 순 없지." 그 말에 발끈한 기사단이 역시 길드놈들이 그렇지ㅗㅗㅗ하며 다시 칼 자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고, 그에 따라 길드 사람들도 다시 제 무기를 쥐고 앞으로 한발짝 나서는 걸 저지한 유리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을 이음. "어이." 프렌을 가리키면서, "네가 일대 일로 나를 쓰러트린다면 뭐,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웅성거리던 소리가 일순간 뚝 졸아들었다가, 다시 확 퍼짐. 뭐야, 뭐야? 방금 뭐라고 그랬어?/ 저 무뢰배 놈이 감히 우리 대장님한테!/ 유리가? 저 기사놈이랑?/ 저 싸움광이 또 시작이야!-여기서 유리는 헤헹~하고 웃었다- 주변이 어수선하게 소란스러워지는 와중에 갑작스런 상대의 제안에 어벙벙해진 프렌이 이마를 찌푸리며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면서 유리를 잠시 건너다보고, 유리도 그런 프렌의 시선을 피하지 않음.
"....하," 일대일 대결이라.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 때를 제외하고 기사단에서의 제대로 된 대결에서 일대일로 자신을 꺾은 상대는 없었음. 틈만 나면 갖은 방법으로 시비를 걸어오던 귀족 무리들도 감히 이쪽에다 일대일 대결만은 신청하지 못했었음.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주변의 웅성거림에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금방 입을 다물고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한 유리를 보며 프렌도 마음 속으로 잔잔하게 투지가 차 오르는 걸 느낌. 대장님, 하고 만류하는 부하를 점잖게 저지하며 프렌이 대꾸함. "좋다." 유리는 흥, 하고 웃음. 단정하니 각잡힌 몸놀림이며 얼굴 표정으로 감추고 있지만 지금 걸로 흥이 오르기 시작한 건 네 놈 눈동자를 보면 다 알지.
일이 진행되서 길드와 기사단 애들이 뒤로 조금씩 물러나 동그랗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 유리와 프렌이 단 둘이 섬. 처음엔 무슨 왜 갑자기 일대일 대결? 유리 쟤가 뭐라는거?ㅡㅡ 했던 길드 사람들도 어느새 분위기를 타서 그 희멀건한 녀석 눌러버리라고 유리를 응원하기 바쁨. 기사단도 아직까지 긴장을 늦추진 않았지만 금새 눈 앞의 자기들 대장님과 길드 잡놈의 대결에 정신이 팔림. 혹시 자기가 자리비운 사이에 수적으로 열세인 부하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프렌이 잠시 걱정되서 그 쪽을 내다봤지만 길드도 기사단도 눈 앞의 대결 때문에 서로에게 신경쓸 여력이 없는 듯 자리 확보하느라 서로 어깨로 툭툭 밀쳤을 뿐 거친 소요는 없었음. 아까까지만 해도 금방 충돌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혹시 이것까지 염두에 두고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나 싶어 물어보려다가 프렌은 입을 다뭄. 전투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이 쓸모가 있어.
그걸 눈치챘는지 이 쪽을 바라본 유리가 부러 말을 꺼냄. "이거, 내 본거지에서 싸우는 것 같아 영 미안한데."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어느 새 사방에 울려퍼지기 시작한 제 이름 연호하는-"유리! 유리!"- 소리에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유리에게 프렌이 태연하게 대꾸함. "별로. 그런 거에 신경 쓸 만큼 섬세한 성격은 아니라서." 그말에 유리가 다시 피식 웃음. 거 안 그래보이면서 한마디도 지기 싫어하는 녀석일세.
대결 장면은.. 멋들어지게 써보고도 싶지만 그럴 능력도 안되고 귀찮으니 생략하도록 할까ㅇㅇㅇㅇ. 대충 서로의 빈틈이나 버릇 같은 걸 보느라 대결이 시작되고도 한참을 서로 견제하며 툭툭 건드리기만 했고 그러다가 몇 번 달려들어 부딪쳐 본 결과 유리는 내리치는 검을 맞받은 손목이 욱씬거리며 아리는 걸 느꼈고 프렌은 찔러 들어오는 검이 워낙 빠르고 변칙적이라 당황했다는 정도만 써둠. 서로 실력이 비등하기 때문에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고 그렇게 검을 몇번 더 맞부딪치는 사이에 둘 다 이 싸움을 간단하게 끝내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음. 프렌 뿐 아니라 유리도 돈을 제외하곤 길드 내에 맞설 실력자가 거의 없음. 이렇게까지 밀고 밀려본 상대가 얼마나 됐었나 싶음. 게다가 그런 대결에 자신이 진 채로 끝내는 건 더 싫어서 싸움은 꽤 본격적이 됨. 당연히 우리 싸나이 유리^ㅇ^가 저 새파라니 애송이같은 기사놈을 쳐바를 꺼라고 생각했던 길드 사람들도 당황하고 너 이제 죽엇다ㅋ 우리 소대장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쎄거등여! 했던 기사단들도 헐..ㅋ... 하면서 숨도 못쉬고 눈 앞의 싸움 양상을 관람함.
싸움이 쉽사리 결판이 나질 않아 저녁 시간도 훌쩍 지나고 슬슬 구경에 지쳐 흥미를 잃은 사람들도 몇명씩 쏙쏙 빠져서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아예 체력을 몽땅 써버려서 지친 둘이 널찍이 떨어져서 서로를 노려보며 말도 못 꺼내고 숨만 씩씩 댐. '기사놈/길드치곤 제법인데...' 인정하면 왠지 지는 것 같아서/임무인데 이런 생각하는게 송구해서 둘 다 모른 척하고 있긴 한데 이 싸움 재밌긴 존나 재밌음. 저 새끼랑 치고박고 노는 거 무진장 즐거움. 한순간 서로를 보며 피식 웃던 둘 중 프렌이 먼저 자세를 가다듬고 무기를 거둠. 시간이 너무 지체됬음.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이대로면 시야 확보도 어렵고 체력도 많이 떨어져서 오늘은 더 이상 대결 못함. "오늘은 이쯤 하지." "헹, 그 군홧발 한 발짜국도 이 쪽에 들여놓을 생각 말라구." 싸움의 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휙 등을 돌려 부하들과 함께 물러나는 프렌을 보고 유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한숨 돌림. 저게 사람이냐...
그날 당그레스트의 자기 방으로 돌아간 유리는 달빛 비치는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면서 프렌을 생각함. 참 재밌는 놈이었지 실력도 제법이었고. 기사라고 해서 죄다 쓰레기만 있는 줄 알았더니 그 놈은 좀 다른 거 같기도 하고ㅇㅇㅇㅇ 뭐 그래봤자 제국에서 기르는 개들일 뿐이지만.
마을 근처에 임시로 설치해논 막사로 돌아간 프렌도 낮의 일을 생각함. 그렇게 이것저것 가감을 두지 않고 솔직하게 덤벼본 상대가 얼마만이더라. 만만찮은 상대였어. 역시 세상은 넓구나. 제가 느끼는 감정이 지체된 임무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단 간만에 호적수를 만난 기쁨과 반가움에 가깝다는 걸 깨달은 프렌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듬. 유니온은 돈 화이트호스만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던 것 같음. 계속 이런 방법으로는 임무 수행이 너무 지체될 것 같은데.
다음날, 거리를 돌아다니던 유리는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머리꼭지를 봄. 저 햇빛 내릴 때마다 정수리 근처에 반짝반짝 윤기가 도는 금발은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색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음. "아!" 깨닫자마자 다짜고짜 걷고 있던 상대의 팔을 낚아채서-옆에서 걷고 있던 여자가 "앗, 대... 아니 프렌님!" 하는 소리를 울렸다- 길 옆 골목으로 끌어들인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프렌를 응시함. "너 뭐하고 있는 거냐?" 솔직히 적진에서 갑자기 팔 덥썩 잡혀도 순순히 따라오는 것도 뭐랄까, 이 녀석 실력에 눈치 못챘다던가 저항할 수 없었다던가 하는 건 말도 안되고, 단순히 경계심이 부족한 건지 누구한테 잡혀도 저가 내키지 않으면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인 건지 모르겠어서 이것도 기가 막혔음(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높다).
뭐냐니? 잠시 상황을 가늠하던 프렌이 저를 잡은게 어제 그 호적수라는 걸 깨닫고, 그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함. "어제는 내가 생각이 짧았다. 기사 복장은 여기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지 못했어. 네가 얘기해준 덕분에 깨달았다." 얘기? 내가? 무슨 얘기?.. 하고 미심쩍은 눈으로 대충 기억을 더듬던 유리가 아, 함. 그러고보니 헤어지기 전에 군홧발로 마을을 어쩌니 말했...었긴 했는데. 아니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단 말이야? 여기서 당연히 어제 유리가 말한 '군홧발 한 발짝도 마을에 들여놓을 수~'하는 발언은 기사놈 꺼져ㅗㅗㅗ 하는 뜻이었지만 프렌은 군홧발로는 마을로 들어올 수 없다 -> 기사복장으로 마을에 들어올 수 없다 -> 올려면 복장을 갈아입고 들어와라 이런 뜻으로 받아들였나 봄ㅋㅋㅋㅋ 새삼 살펴보니 이놈이 평범하게 물색 튜닉에 흰 바지를 입고 있네요...Aㅏ... 아니 보통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나? 그 타이밍엔 으름장 놓는 거잖아? 아니 기사단 새끼들은 좀 다른가 이해를 못하겠네... 그 전에 적이 한 얘기를 이렇게 곧이 곧대로 듣는단 말이야? 왜, 건들렛이 어쩌고 했으면 손목을 자르고 왔게? 그 말에 프렌이 고개를 빙빙 저음. "아니, 그건 곤란해." 검을 들 수 없으니까ㅇㅇㅇㅇ
그 천연돋는 반응에 이건 대체 어디서 날아온 눈새 사차원이야.. 했던 유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제서야 뒤늦게 따라온 기사단 애들(역시 사복)에게 꽁기한 시선을 던짐. 눈 마주치자 걔들도 모르는 척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꼴이 참.. 지들도 지들 대장 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다 이거지. 그걸 알면서도 이놈 말리질 않고 따라온 니네는 뭐냐....
다시 프렌을 보면 이 어딘가 모자른 거 같은 기사놈은 경계 그런거 없고 그럼 뭐 할 말 더 있어?? 하는 얼굴로 이 쪽을 쳐다봐서 유리는 쩝하고 입맛을 다심. 길드랑 기사단은 아예 원수같은 관계라(고 듣고 자라서) 만나면 으레 서로 으르릉캉캉 대려니만 했지 상대가 이렇게까지 무경계 + 무방비하면 이쪽에서만 경계하고 나서는게 오히려 더 이상해서 새삼 싸움걸 생각도 사라짐. 원래 적이 변장하고 당그레스트로 잠입했으면 다시는 허튼 생각 못하게 작신작신 패준다음 마을 밖으로 쫓아내야 하지만 뭐.. 이런 녀석 상대로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보니까 별로 해도 끼칠 거같지 않은데...´_` 해 부분은 과연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인정에 약한 유리는 이게 나쁜놈도 아닌 거 같겠다, 어딘가 모자라 보이겠다 길드에서 안나쁜 쎈 놈, 재미있어 보이는 놈은 좋은 놈이니까ㅇㅇㅇ 만난지 하루만에 본편처럼 프렌에게 대충 무르게 굴고 있음. 안소꿉친구 꼬인 설정에서도 프렌의 스윗 페이스와 보는 사람의 경계심을 자연스럽게 누그러트리는 태도는 효력을 발휘합니다... + 나름 어제 경험에서 보면 마을에 피해를 끼칠 것 같진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이 녀석이 대체 뭘 어떻게 할지 흥미도 당기고 재밌을 거같기도 하고ㅇㅇㅇㅇ 요새 심심도 했겠다 유리는 이 녀석을 좀 더 두고 봐야겠다고 생각함. 여차하면 싸워서 쫓아버리면 그만이니까ㅇㅇㅇㅇ
프렌은 프렌대로 유리한테 적의라던지, 경계심같은 거 별로 안 가짐. 원체 저가 강하기 때문에 남에 대한 경계심이 없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어제 대결하면서 본능적으로 유리 파악을 마쳐서 그럼. 겉으로는 보면 영 껄렁하고 불량한 태도긴 하지만 수적으로 저쪽이 훨씬 우세한대도 다짜고짜 전투에 들어간 게 아니라 기사단의 용건을 들어준 것도 그렇고, 기사단 대 길드의 단체전으로 싸워 큰 희생을 내는 대신 대장끼리의 일대일 대결을 택했음. 평범하게 괜찮은 놈이네요... 그것도 단순히 쫓아버리는 게 아니라 나를 이기면 들여보내준다고, 그럴듯한 대안도 제시했음. 그게 기사단과 길드 양자에게 그럴듯한 대안이 되는 이유는 일대 일로 떠서 순순히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본인의 실력이 강하다는데 있는데, 어제 길드 태도만 봐도 이 녀석이 그 실력이나 인품 면에서 그럴 자격이 있고 조직 내에서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음. 결론 = 나쁜 놈은 아닌 거 같다(+ 쎔). 나쁜놈도 아닌데 프렌이 눈에 띄게 경계할 이유는 없음. 그리고 나랑 싸워주는 쎈놈은 좋은 놈ㅇㅇㅇㅇ.. 사실 대륙 전체적으로 보면 기사단이 길드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기 때문에 길드→기사단보다 기사단→길드는 별 악감정이 별로 없음. 특히 프렌같이 거의 제도 근처에서만 일하는 기사 같은 경우엔 더더욱 길드에 대해선 별 생각이 없음.
아, 그래도 이 녀석이랑 싸우는게 즐거우니까 한번 더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둘 다 갖고 있음. 그래도 여기서 싸울 거 아니니까 둘의 태도는 으르렁 왕왕 보다는 훨씬 누그러져 있음. 마음 속으로 인정도 했겠다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꽤 호감임. 되늦게 소디아가 저쪽에서 달려와서 프렌님%*)@*%) 이 길드놈이 우리 대장%ㅕ#)%*)#!!!! 알 수 없는 말을 쫑알대는 와중에 유리가 프렌을 툭 치며 말을 검. "근데 너 그 머리는 감추는게 낫지 않겠냐?" "ㅇ? 진짜. 여긴 금발이 별로 없나봐." "ㅇㅇㅇ 눈에 확 띈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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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 싶었는데 머리색 때문이었구나ㅇㅇㅇ 프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유리가 다시 붙잡음. 뭘 들었냐 눈에 띈다잖아ㅡㅡ; 유리니까 그냥 넘어갔지 이러다 어제 용병 길드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단순히 ㅎㅎㅎ기사님들 오셨네여ㅎㅎ로는 안 끝날게 뻔함. 둘이 하는 꼴을 보며 차마 저희 대장님한테까지 뭐라 할 수 없어서-유리에게는 이미 많이 했지만 자연스럽게 스루당했다...- 옷깃만 잘근잘근 구기던 소디아는 갑자기 둘의 시선이 자기한테 와닿자 눈에 띄게 당황함. "뭐...뭐야?" 느이 대장님 두건 필요하대. 누가 가야 될까? 하며 얄밉게 눈초리를 가늘게 하는 길드 놈이랑, 미안하네 소디아 부탁 좀 하지 하며 곤란한 미소를 짓는 우리 소대장님의 얼굴을 번갈아 본 소디아가 윽.. 하면서 다시 등을 휙 돌려 시장통으로 들어감. 저 둘을 남겨두고 가는 게 영 내키지 않지만 대장님이 저렇게 부탁하시는데 어쩌겠음. 저 시커먼 놈이 얄밉긴 하지만 적진에 와서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인건 맞으니까ㅇㅇㅇ 물론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가기 전에 유리를 한번 야려주는 것도 잊지 않음.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는 소디아가 저만치 멀어지자 우스워 죽겠다는 듯 벽을 데굴데굴 구름. 저 반응 재밌음. 재밌어도 너무 재밌음. 저런 새침하고 요령 부족한 아가씨 길드엔 드물지ㅋㅋㅋㅋㅋㅋㅋㅋ 낄낄거리는 유리를 보고 프렌은 잠시 이마를 찌푸림. "너무 그녀를 놀리지는 마." 그 말에 유리가 다시 내가 뭘? 하는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였기 때문에 프렌은 얕게 한숨을 쉼.
얄미운 길드 놈과 제 상사를 남겨두고 자리를 비우는게 죽어라 싫었는지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소디아가 머리에 덮을 천을 구해오자 프렌이 짧게 인사하며 그걸 받아듬. 그 짧은 감사에도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리는 소디아와 그런 소디아를 전혀ㅋㅋㅋ 눈치채지 못한 채 두건을 쓰는 데 집중하는 프렌을 보고 순식간에 사정을 파악한 유리가 올ㅋ함.
그렇게 어느 정도 변장(???)이 끝나자 기사단은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그런 기사단의 뒤를 유리가 어슬렁 어슬렁 따라감. 처음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기다가 계속 유리가 따라오니까 열받은 소디아가 "왜 자꾸 따라오는 거냐!!"하고 소리를 빽 지르자 유리가 어깨를 으쓱함. "수상한 녀석들을 마을에 그냥 돌아다니게 둘 순 없지." 소디아는 다시 발끈하지만 프렌은 고개를 끄덕임. 맞는 말임. 프렌 자신이라도 제도에 적대 관계의 인물이 들어왔다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을거임. 이건 그 인물의 됨됨이가 어떻던 간에 당연히 해야할 일임. 그만큼 마을이며 시민들이 중요하다는 거니까ㅇㅇㅇ. 자기 본거지를 지키고자 낯선 이방인의 동태를 살피는 유리의 행동은 아주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음. 그리고 그런 유리의 행동이 프렌 자신의 인격이나, 유리가 자신에게 가지는 감정이며 판단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도 프렌은 잘 암.
오히려 유리가 저렇게 티나게 따라와주는게 제 성정이나 실력을 인정해주는 거 같아서 프렌은 훨씬 낫다고 여김. 눈치챈 상태에서 어설프게 미행당하는 건 피차 기분이 영 별로거든ㅇㅇㅇㅇ 서로 켕기는 입장도 아닌데 뭐. 소디아는 아직도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걸음걸이가 딱딱하고 부하들도 영 어색하고 불편한 눈치였지만 저희 대장님이 신경 안쓰니 별 수 없어서 걍 감. 물론 무진장 신경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자꾸 뒤를 돌아보는 멍청이는 프렌대엔 없음.
유리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걸음걸이로, 절대 남을 쫓고 있다는 인상 안 주게 자연스럽게 걷고 간격도 적당히 벌려서 따라감. 일이 어떻게 되든 일단 지금은 두고 봐주겠다는 심산임. 겸사겸사 프렌대 애들 걸음걸이 버릇 같은 거 좀 눈에 익혀두고. 뭐 대비해서 나쁠 껀 없잖아? 뭐 여기서 포인트는 자연스럽게 유리 심산 파악해서 신경 안쓰는 프렌과 자연스럽게 프렌이 자기 심산 짐작할꺼라고 생각하는 유리임ㅇㅇㅇㅇ 서로 자각은 없음. 야 너네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됐어...´_` 안 그래보여도 은근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러는 거 같음. 나중에 생각해보면 저녀석 저래 뵈도 파악이 꽤 쉬웠네..x2 따위의 남들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함.
그렇게 티 안나는 동행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와중에 자꾸 아는 사람을 마주치는지 유리 쪽이 자꾸 시끄러움. 별 중요한 용건은 없고 주로 밥은 먹었냐, 어디 가냐, 또 사고치는 거 아니냐, 돈이 너 농땡이 작작 피지 않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준다더라, 어제 기사놈과 싸운 거 봤다, 볼 만 하더라 등의 내용임. 아는 사람 진짜 많음. 당그레스트의 거의 모든 사람을 아는 거 같음. 유리도 ㅇㅇ밥 먹음, 걍 감, 내가 언제 사고침?ㅋㅋㅋ 뭐 이런 식으로 대충 대응해줌. 특히 어제 싸움에 대한 대화는 각별히 신경썼기 때문에 화를 이기지 못한 소디아+부하들이 아오 저걸%*(@))*( 적진에서 덤벼들 수도 없고 으극극하면서 이만 갈아댔다는 건 비밀. 프렌은 유리 행동이 명확히 파악되자마자 신경 끄고 임무에 집중했기 때문에 + 그런 싱거운 시비는 익숙해서ㅋㅋㅋㅋ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지만 길드 내 유리의 인망을 대충 알겠다고 생각함.
당초 프렌대 목적은 마을 내에서 쫓고 있는 죄인을 찾아내는 거임. 잡아내면 더 좋고. 유니온의 협력을 얻는 건 이제 글렀다는 걸 알았고 그렇다면 기사단이 근처를 방문한 직후 갑자기 많은 전투가능 인원이 마을로 들어와서 함께 행동하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하고 주민들에게 불안함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는 인원을 최대로 줄이고 남은 소대는 근처에 대기함. 물론 적진 투입조에 대장이 포함되는 건 흠좀...했지만 프렌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음. 대충 10여명 정도가 따로따로 들어왔는데 이 인원으로 당그레스트 정도의 마을을 빠르게 수색하려면 최대한 흩어지는 수 밖에 없음. 갈림길을 만나면 두 세명씩 흩어지는 식으로 분산됨. 적은 인원이니 억지로 잡다가 싸움이 나거나 들켜서 몰릴 위험이 있으니 죄인 발견해도 잡지 말고 대충 행적 파악해놓는 식으로 암묵적으로 합의가 됨. 열 명이던 애들이 다섯이 되고 둘이 되도 유리는 계속 프렌 따라감. 어차피 다 따라다닐 수야 없으니 기왕이면 대장 파악하는게 낫지. 딱히 쟤가 더 재미있어 보여서 그러는 건 아냐ㅋ
그렇게 부하들 다 떨어보내고 마지막으로 자기는 죽어도 대장님 옆을 비우지 않겠다고 말할 거 같은 소디아와 프렌 + 유리 해서 셋이 남았음. 대충 한 조가 됨. 프렌이 앞장서고 소디아가 옆을 경계하듯 서고 뒤에 유리가 멀찌기 따라가는데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프렌이 자연스럽게 마을에서 가장 큰 술집을 찾아들어가서 유리는 좀 신기해함.
사실 어딜 가나 시설 입지는 경제적인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대개 상점이며 술집 위치 같은 건 마을마다 비슷함. 대충 구조만 몸에 익으면 어디서든 잘 찾아갈 수 있긴 한데 그래도 의외였던 건 이래저래 꽉 막혀보이는 저놈이 의외로 수련만 한 범생이는 아니었다 이거지. 이런 건 이론만으론 찾아내기 힘든 건데 그렇다고 술집을 제 집마냥 들락날락했을 거 같아 보이지도 않고.
유리는 모르지만 프렌은 나름 아랫마을에서 굴러먹던 평민 출신이니 외려 제도 성 구조보단 뒷골목과 비슷한 당그레스트 구조가 더 몸에 익음.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어서 되도록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을 죄인이 떠들썩한 소음과 인파 속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심리도 잘 알고.
첫 번째로 찾아간, 당그레스트 제일의 술집에서는 허탕. 거긴 웨이트리스 언니들이 너무 상냥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음. 본인도 별다르게 행동하는 거 같지 않고 별 자각도 없는 눈친데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몸을 숨기며 술집을 둘러보고 허탕 치자마자 바로 다음 술집을 찾아내는 솜씨에 유리는 프렌에게 점점 흥미가 당김. 반듯한 얼굴 하고 있는 주제에 저런 게 익숙하다는 거거든. 그렇다고 암행 같은 걸 했을 거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흐응, 하는 유리를 프렌이 슬쩍 곁눈질함. 뭐야 너 혹시 뭐 숨기는 거 있냐? ㅇㅇㅇ 없음 요런 대화를 눈짓만으로 주고 받은 다음 프렌은 다시 임무에 집중함. 그 부관이라는 여기사는 홀 우리 대장님 못 하는게 없으셔^////^ 하는 상태로 감탄하느라 정신 없음. 본인은 모르지만 이런 데 처음 와보는 티 팍팍 내서 일부 사람들 눈길도 끔. 프렌이 대충 분위기 봐서 적당한 시기에 데리고 나옴. 물론 이 모든 행동은 거의 본능같이 이루어짐.
그렇게 마을 돌다가 한 세네번째 쯤? 술집에서 찾고 있던 범인 찾아냄. 그림 들고 일일히 얼굴 대조해보면서 나 사람 찾고 있소 티 팍팍 낼 수 없으니까 얼굴은 알렉세이가 준 초상화 보고 사전에 외웠음. 잘 때도 꼬박꼬박 보고 자던 것이라 그림보다 얼굴이 좀 초췌해지고 말랐지만 단박에 알아 봄. 프렌이 갑자기 인상을 쓰자 소디아가 반사적으로 치마 아래 숨겨둔 검을 쥐었다가 다시 화들짝 놓음. 으이그... 그 영 어설퍼 보이는 모습에 혀를 쯧쯧 차면서 유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물어봄. "저 녀석이냐?" "응." 유리는 기억을 더듬어봄. 확실히... 무슨 땅 파러 다니는 길드 말단이었던 거 같은데 마을에서 본 지 꽤 되었음. 실력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허구헌날 술집에서 만사가 귀찮은 얼굴로 술 퍼먹고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 지금은 얼굴이 좀 더 우중충해졌지만. 술을 거의 목구멍에 들이붓듯 하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주위 살피는 꼴이 잔뜩 경계하고 있는 눈치임. 더 다가갈 순 없겠어. 일단은 행적만 파악 해놓도록 하지. 요렇게 생각한 프렌이 잠시 유리 쪽을 봐서 유리는 "?" 함. 같은 길드인 유리 입장에서 자기가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눈치임. 거 새끼 별걸 다 신경써주네.. 하면서도 유리는 조금 고민해봄.
그날 저녁까지 술집 구석에 자리 잡고 범인 감시하면서 대기탐. 자리 잡기 전에 유리는 일이 있다며 슬그머니 빠짐. "그럼 난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유리는 쿨하게 제 갈 길 가려는데 외려 프렌이 감시 안해? 하는 식으로 눈을 동그랗게 떠서 소디아는 속 터져 죽을 뻔함. 그 꼴이 또 웃겼지만 유리는 별 지체하지 않고 휘휘 사라짐. 프렌은 역시 서로 면식이 없더라도 둘 다 같은 유니온 소속인데 감시하러 온 기사단에 끼어서 앉아있기 좀 그랬을 꺼라고 알아서 납득함.
그렇게 남은 둘이 앉아서 시간 때우다가 부하들과 사전에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서 부관은 감시역으로 남겨두고 프렌은 약속장소로 감. 범인 발견했다는거 알리고 술집 위치, 구조 설명하고 번갈아가며 감시할 감시 조도 대충 짰음. 말하다보니 시간이 좀 지체되서 부하들 근처에 배치하고 나름 서둘러서 술집으로 돌아왔는데 술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음. 사람들도 꽤 다쳐서 바닥에 앉아있고... 맙소사. 범인 자리에 없음.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술집을 살피던 프렌은 부서지고 흩어진 잔해 옆 뒷문 근처에 쓰러져있는 소디아를 발견함."소디아!" 의식이 없는 부관을 몇 번 흔들자 소디아가 눈을 뜸. 한 대 얻어맞고 기절했을 뿐이었나 봄. 이마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게 보임. "...죄송합니다 대장님.." 눈 뜨자마자 지껄인다는 소리가 저거임. 프렌은 침착하려고 애씀. "어떻게 된건가?" 머리를 맞은 탓인지 기억이 희미한 듯한 소디아 말에 따르면 술집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고 함. 소란이라 봤자 흔히 술집에서 일어나는 일로 주정뱅이 둘이 술 김에 시비가 붙었고 이랬느니 저랬느니 하는 말싸움 끝에 몸싸움으로 번져서 술집이 진짜 야단법석이었음. 위치도 꽤 떨어져 있었겠다 기사단이 쫓는 범인과는 별 관계없는 소란이었지만 그래서 이 난리통에 범인을 놓쳐버릴까봐 걱정됬던 소디아는 저도 모르게 흘끗흘끗 범인 쪽을 살폈고 그런 소디아를 눈치챘는지 드잡이질하던 주정뱅이 중 덩치 큰 쪽이 이쪽의 시야를 잠깐 가린 순간을 타 범인이 순식간에 사라졌음. 눈치챘다...! 그래도 기사단 훈련 헛되지 않아서 범인 사라진 거 깨닫자마자 프렌이 미리 일러뒀던 뒷문 중 하나로 뛰어드는 순간 술병 같은 걸로 머리를 맞았음. 자기 미행하는 게 한 명이라는 거 알고 아예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한 모양임.
제가 부족한 탓이라고 입술을 짓깨물며 사과하는 부하를 보며 프렌은 잠시 침묵함. "설 수 있나?" 소디아는 고개를 끄덕임. 그래도 아직 현기증이 남았는지 잠시 비틀거리는 걸 어깨를 붙들어주자 소디아가 다시 뭐라뭐라 사과함. 그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하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 프렌은 일부러 엄하게 다잡음. 이 일에 대한 추궁은 나중에 하겠다, 지금은 일단 눈 앞의 임무에 집중할 것. "...예!" 소디아가 조금 편해진 얼굴로 절도있게 격례함.
여자긴 해도 기사니까 소디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추스려서 훌훌 털고 일어남. 그 사이에 프렌은 뒷 문 근처에서 흩어져있던 부하들한테 순서대로 주변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림. 차례로 들어오는 보고를 받는 프렌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짐. 아무래도 범인이 마을을 빠져나간 것 같음. 기사단이 야영하고 있는 임시 막사와도 정 반대 방향임. 마을 근처에 있는 숲으로 간 것 같다는데.. 이쪽은 제국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지급된 지도고 뭐고 없음. 자칫하면 맨 몸으로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숲에 뛰어들어야 할 판임. 더군다나 지금 이 시간에도 범인은 시시각각 달아나고 있을 터임. 슬슬 식량 배급 문제도 있고 기한도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 근처에서 잡아내야 함. 자칫하면 마을 밖의 부하들에게 지시 내리러 갈 시간도 없을 거 같음. 이미 늦은 저녁시간임. 숲 속에서 추격전을 벌일 걸 고려하면 주위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해야 함.
아무리 괜찮아졌다 해도 빠른 행군을 하기엔 상태가 어떤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소디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본대에 연락책으로 보냄. 그 처사를 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부관이 잠시 풀이 죽었다가, 다시 주먹을 꼭 쥐고 달려나갔지만 이것저것 지시하느라 바빴던 프렌은 눈치 못챘음. 급한 대로 지금 가지고 있는 배급품 파악하고 아직까지 장사하고 있는 상점 뒤져서 부족한 거 보충하고 하는데 위 쪽에서 비죽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
"너 여기서 또 뭐하냐?" 항상 이상한 데서 마주친단 말이야.. 이층에서 훅 가볍게 뛰어내린 유리가 손을 탈탈 텀. "그 녀석 놓쳤어. 추격하러 가야 해서." "그 사이에?" 프렌이 쓴웃음을 짓자 그를 대충 파악한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뜸. '부하 탓이구만.' 뭐, 마침 잘 됐네. 상점 주인한테 이 근처 숲 지도 있냐 물어보는 프렌에게 유리가 툭 던짐. "동행 좀 하자." 그 말을 듣고 프렌이 다시 놀란 눈을 함. "왜?" "너 감시." 덤으로 같은 길드놈이 잘못을 저질렀다니까 (그 놈이 도망치든 기사단에 잡히든 여러 가지로)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입장이라. 유리가 어깨를 으쓱함.
아까 볼 일이 생각났느니 했던 유리는 유니온 본부로 갔음. 프렌 말마따나 기사단이 길드의 일원을 쫓고 있으니 같은 길드 소속으로써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음. 이를 저지하든 아예 길드 내에서 자체 정화를 위해 처벌을 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거임. 이런 일은 별로 눈에 확 띄는 일이 아니니까 자기가 해결해도 될 거 같음. 모처럼 만난 기사놈도 나쁜 놈은 아니니 일단 저 녀석 + 가능하다면 범인한테 얘기 더 듣고 둘 중 어떡할지 결정하고 싶음. 아직 돈이 돌아오려면 기한이 꽤 남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찾아가봤고 당연하게 허탕침. 그래도 이런 일을 혼자 덜컥 정해버...릴 지언정 통보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ㅇㅇㅇㅇ 해리 만나서 대충 사정 설명했음. \해리를 의지하고 있다기보단 자기는 어디까지나 길드원1로써 돈의 자리를 이어받을 해리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뜻이 강함. \
\유리 말을 듣고 해리는 영 껄끄러워 하는 눈치였음. 해리가 느끼는 그게 자신에 대한 껄끄러움인지,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한 껄끄러움인지 유리는 잘 모름. 그렇지만 그 태도는 역시 좀 씁쓸해서 유리는 대답을 망설이는 해리에게 그럼 내 맘대로 한다~ 이러고 나와버렸고 그 길에 프렌 마주친거임. 아까 유리가 나왔던 문이 다시 삐걱 열리고 해리가 몸을 내밈. "유...!" 유리와 함께 있는 프렌을 보고 잠시 멈칫한 해리가 다시 말을 이음. "너무 엉뚱한 짓은, 곤란해 유리." "....." 유리는 그 말에 별 대꾸없이 몸을 돌림. 앞서 걷던 프렌이 그런 둘을 잠시 보다가 다시 걸음을 서두름.
본대엔 나중에 합류할테니 뒤따르라고 소디아를 통해 전해뒀고 사전에 프렌과 함께 마을로 들어온 기사들 + 유리 해서 10여명의 인원은 먼저 출발하기로 했음. 애초에 들여온 인원이 정예긴 하지만(+ 소대장) 하루종일 사람 찾아 마을 곳곳을 쏘다니고 난 뒤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한 터라 기동력이 영 불안함. 그래도 본대랑 합류해서 다 이끌고 다니는 것보단 차라리 이 편이 나음. 이제 이것저것 재면서 무를 수 있는 시간도 아니기도 하고. 언제나 옅은 주홍색을 띄는 당그레스트의 하늘과는 또 다른 발갛게 타는 듯한 노을이 하늘 저쪽부터 내리는 걸 보면서 프렌은 자세를 바로잡고 행군하는 부하들을 다독임.
행군은 프렌 - 기사단 애들 - 유리 이 순서대로. 유리는 어릴 적 희미한 기억 빼고는 당그레스트 밖으로 나오는 건 거의 처음이라 주변이 다 신기함. 하늘을 쏘아 맞추는 화살은 마을 방위를 목적으로 하는 길드니까 맡는 임무도 거의 마을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음. 그나마도 가끔 생기는, 마을 밖으로 나와 근처 마물 근거지 습격하는 따위의 '눈에 띄는' 임무는 부러 피했기도 하고. 평소 같으면 새로운 곳! 새로운 전!투! 해서 기분이 막 들떴을텐데 - 그래봤자 남들 보기엔 어딘가 뚱한 무표정일 테지만 - 아까 해리가 제게 했던 태도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기분이 좀 다운됨. 앞에서 행군을 이끌던 프렌이 아까와는 별 다를 바 없는 얼굴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수가 확 줄어든 유리를 흘끗 살핌. 어찌 되었건 행군에서 뒤처지고 있진 않으니까ㅇㅇㅇㅇ. 사실 자기가 유리더러 뭐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님. 그렇다고 살갑게 다가가서 무슨 일 있냐 물어볼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래도 유리가 당그레스트 출신이니 아까 상점에서 숲 지도 못 구한 대신 혹시 유리에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보니까 쟤도 별로 이 근처에 빠삭한 눈치는 아님. 그리고 아깐 몰라도 이번에는 확실한 입장으로 끼어든 것 같던데 길 알면 벌써 귀뜸이라도 해줬겠지ㅇㅇㅇ. 설마했지만 진짜 맨 몸으로 뛰어드는구나.. 프렌은 답지 않게 한숨을 좀 쉬어 봄.
여기서 죄인이 향했다는 숲은 케이브 모크 대삼림 방향임. 그 근처는 따로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얻으러 갈 만한 곳도 아니라서 인적도 드물고 길드 내에서도 잘 아는 사람이 드뭄. 그러고 보면 아까 유리 말로 죄인은 전에 땅 파는 길드 소속이니 어쩌니 했지. 땅을 판다면 재료 모아서 무기 만들거나 유적 발굴 길드거나 했을 테니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의 지리도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음. 어째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불리한 상황이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아서 프렌은 기운빠지는 생각일랑은 일단 접어두고 눈 앞의 임무에 집중함.
뒤쳐지는 부하들 다독이고 닥달해서 완전 강행군으로 아직 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숲으로 들어오기는 했는데... 맙소사. 숲이 보통 숲이 아님. 대체 뭐가 원인인지 기이할 정도로 크고, 굵고,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들과 그 큼지막한 잎들이 빽빽하게 하늘을 가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인데 숲은 완전 암흑 속임. 더군다나 인적 뿐 아니라 짐승들 출입 자체도 드문 듯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커녕 얼마 안되는 들짐승들의 거친 길도 마찬가지 마구잡이로 자라난 잡풀 - 길이가 거의 사람 키만한 풀을 보고 이걸 과연 풀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긴 했지만 - 들로 엉망이라 지금 같은 시간은 무슨, 날 훤하게 밝을 때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음. 대충 죽어 쓰러진 채로 근처 나무들에게 기대어져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나무등걸 등을 타넘으면서 지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음. 물론 이것도 지금 당장은 너무 어두워서 불가능함. 게다가 다른 곳은 다 빽빽한 가지가 들어차 있는데 유독 사람 머리 위치 쯤의 나뭇가지들이 죄다 부러져 있다는 건... 여기 뭔가 있다는 거임. 들짐승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사는 숲은 아니란 말씀. 아무리 급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더 행군이 불가능함. 부하들에게 행군중지 + 야영 준비 명령을 내리려던 프렌이 유리 쪽을 보자 아까부터 이쪽을 보고 있던 유리가 얕게 고개를 끄덕함. 프렌은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림.
그리고 그날 밤, 일단 전군 휴식 명령이 떨어지자 일행은 그 근처 적당히 넓은 구석으로 위치 정해서 대충 풀 베고 잔돌 정리하고 나뭇가지 대충 공수해와서 모닥불 피우고 그 주위로 침낭 늘어놔서 야영 준비 마쳤음. 원래 미행할 때는 불 피우는거 아니지만 나무들이 워낙 빽빽해서 숲 사이로 불 새어나갈 걱정은 별 필요도 없어 보였고 또 다들 강행군에 지쳐서 체력, 체온 떨어지고 + 어떤 마물이 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마저 없는게 외려 큰 일이라 소대장 판단 아래 허락해준거임. 서로 지친 건 마찬가지일텐데 첫 불침번은 자기가 서겠다고 자청하는 프렌보고 기사단 애들은 우우 단장님ㅠㅠㅠㅠ 하고 유리는 어깨를 으쓱함. 상관은 부하 아끼고, 부하는 그런 상관을 존경한다는 건가.. 이 소대 분위기를 대충 알 거도 같은데.
대장님도 피곤하실텐데 그럴 수 없다고 쨍쨍대는 부하들을 프렌이 썬샤인 미소 + 명령으로 대충 달래서 불침번 순서는 프렌이 처음이고 그 다음은 기사단+유리 섞어서 대충 늘어놓음. 이게 왜 별로 중요하지 않냐면 프렌 - 부하1 - 부하2 정도 밖에는 그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임. 그 이후의 기사단+길드놈1은 대삼림의 부러진 나뭇가지의 정체에 대해 알아야 했거든. 그것도 꽤 강제적이고 질리도록ㅇㅇㅇㅇ.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면에서 약 2m 가량 위의 나뭇가지들이 꺾이고 부러져있었던 건 대삼림에 사는 마물들 때문임. 무슨 마물? 곤충형 마물ㅇㅇㅇㅇ. 본편에서 카롤이 기겁을 했던 그거 맞음. 썰 시점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때보다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에알 클레이네 폭주 때문에 거대화, 흉폭화도 되어 있음. 에알 영향으로 숲이 거대화되고 첩첩산중 오지화 되자 따라서 거대해진 나무뿌리며 줄기 같은 것들 떄문에 운신이 곤란해진 발 달린 동물형 마물들 대신 날아다닐 수 있어 비교적 훨씬 기동력있는 곤충형들이 약해진 동물형 몰아내고 자리를 잡았음. 곤충이라니까 왠지 좀 약체라는 느낌이 있는데 그 크기며 위력이 어느정도냐면, 마찬가지 이상 성장으로 큼직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을 부러트리면서 날아다닐 수 있을 정도임.
짐승한테 방어할 요량으로 피워놓은 모닥불도 화근 중의 하나가 됐음. 보통 불 보면 접근 안하는 들짐승과는 달리 곤충은 빛을 보면 달겨드는 본성이 있음. 불침번이라고 세워놓은게 모닥불 꺼지지 말라고 잘 뒤집으면서도 주위도 살펴야하는데 그날 행군이 어지간히도 피곤했는지 부하2가 불쏘시개 잡고 잠깐 졸았나 봄. 귓가를 울리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에 그제서야 화들짝 깨어나자 그 근처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음. 자다 깨어나서 정신도 없고 마물들이 달려들어서 피워놓은 모닥불이 다 뒤집어져서 주위는 완전히 암전인데 고개를 들면 놀라고 흥분한 마물들이 그 가느다랗고 딱딱하고 날카로운 다리로 얼굴이며 몸을 마구 할퀴어오고, 귓가에는 그.. 갑각 특유의 소름끼치는 긁히는 소리, 귀를 멍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단단한 날개가 공기를 찢는 소리, 가끔 눈 앞을 번득이며 스쳐지나가는 단단한 몸체의 느낌, 또 이게 비행 물체다 보니까 거리감도 안 먹혀서 공격도 못하겠고.. 상대가 뭔지 제대로 파악도 안된 상태인데 확실한 건 이 어둠 속에 상대는 익숙해져있고, 이쪽은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이쪽은 막 자고 일어난 터라 정신도 없음. 일행은 레알 난리가 남. 또 이게 단순히 공격력 문제 뿐만 아니라 곤충이라는게 사람에 따라서는 심한 공포까지도 줄 수 있는 거라 음.. 바퀴벌레나 물방개같은 것들이 이쪽으로 잔뜩 날아드는 상황을 생각하면 됨. 게다가 얘들은 크기도 크고... 으으..´_`부하 중 몇 명은 아예 패닉에 빠졌는지 명령도 부대도 잊고 숲 저쪽으로 정신없이 도망치는 비명 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게 들림. 제대로 정신차리고 있는 애들도 아무것도 안보이고 위에서 자꾸 습격하고 하니까 대열 지킬 생각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짐.
막 잠들었다 깬 참이라 정신이 없던 프렌이 그래도 부대 수습하려고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날갯짓 소리에 묻히고 마물과 대항하느라 도망하느라 완전 아수라장인 현 상황엔 씨알도 안먹힘. 이쪽으로 달겨드는 마물을 쳐내면서 어느새 다가온 유리가 팔을 잡아끔. "...무리야! 일단 여기서 피해!" 모닥불 때문에 마물들이 잔뜩 모여든 참이라 상대에게 한없이 유리한 지금 상황에서 여기 그대로 있다간 진짜 큰일 날지도 모름. 몇번 더 부하들을 불러본 프렌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유리를 따라 자리를 피함.
날아다니는 마물들이 정신없이 달려드는 터라 유리+프렌은 빠져나가는 데만도 꽤 애를 먹음. 여차하면 익숙하지 않은 방향(=공중)으로 내빼기 때문에 베어지는 것도 시원찮고 흉폭화인지 아예 통각이 없는 건지 다리 몇 개 잘려도 계속 달려드는 마물들을 완전히 해치우는 건 거의 포기하고 검 휘둘러 방어에 치중하면서 유리는 당그레스트 밖 첫 외출이 참 지랄같다고 생각함. 처음 만난 길드원, 직접 만난 첫 기사놈은 괜찮은거 같았는데 첫 곤충마물 아오ㅡㅡ; 그렇게 몸 낮추고 전진하다가 주변을 더듬거려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 걸 발견하자 둘은 그곳으로 뛰어듬.
곤충들이 계속 따라왔지만 좁은 입구 앞에서 번갈아 방어하면서 남은 쪽은 쪽잠도 자 가면서 그날 새벽을 보냄. 남들이 본다면 이 상황에서 잠이 옴?;;; 싶겠지만 그 땐 거의 생존을 위한 거였음. 이걸 안자면 이따가 싸움을 못해서 뒤지겠는데. 억지로 꾹꾹 눈 붙이고 몇 시간 뒤 제 순번 되면 깨워져서 육안으론 아무것도 안보이고 날개 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공중을 향해 검 휘두르고ㅇㅇㅇㅇ. 당시엔 서로 반쯤 정신이 나가있어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 때 바로 눈 앞에 마물들이 잔뜩 우글거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잠을 잘 수 있었던 건 서로 실력을 인정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거임. 뭐, 그보다는 피곤해 죽겠었고 눈 앞이 완전 암흑이어서 마물 무리가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더 있긴 했지만.숲이 워낙 빽빽한지라 날이 밝고도 한참을 어둠 속에 잠겨있던 사위가 점차 밝아지자 마물들이 하나 둘씩 숲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함. 그리고 그보다 좀 더 전부터 마물들은 두 사람의 실력이 꽤 대단하다는 것과, 다가가면 별 수확없이 베이기만 한다는 걸 깨닫고 널찍이서 날갯짓 치며 지켜보기만 함. 고백하건데 그 대치 상태에서 둘은 거의 서서 조는 상태였음. 그 강행군을 하고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밤을 샜음. 무슨 놈의 숲이 밤이 이렇게 긴지 날 밝을 기미도 안보임. 시간 감각도 안먹히는 상태의 기한없는 긴장이라 심신에 받는 부담이 더했음. 마침내 희미하게 밝아오는 안개 낀 숲 저편으로 마지막 마물이 녹아들듯 사라지자마자 유리는 기대고 있던 나무뿌리 위로 스르르 미끄러지고 프렌은 잡고 있던 칼 받침대 삼아서 반쯤 선 자세 그대로 잠에 빠짐. 참 길고, 지랄같고, 정신없이 힘겨운 밤이었음.
다음날, 이라고 해야하나 몇 시간 뒤라고 해야하나 여튼 뾰롱뾰롱 지저귀는 새 소리에 깨어난 둘은 자기들이 완전 무슨 내팽개진 빨래 같은 모양새로 쓰러져 자고 있던 것을 발견함. 도대체 그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또 언제 잠들었는지 정신이 없어서 단편적인 기억만 드문드문 나는데 어쨌든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서ㅇㅇㅇ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지절대는 새소리며 숲 사이로 비치는 하얀 햇빛이 어줍잖아서 유리는 머리를 벅벅 긁음. 아직 덜자서 멍함. 어릴 적부터 곱게 자란 몸은 아니라 왠만큼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건 뭐 말 그대로 쓰러져 잔 거라 + 어제 전투의 흔적 = 온 몸이 결리고 찌뿌둥해 죽겠음. 옆을 보면 프렌이 검 손잡이 단단히 쥐고 그대로 잠든 손이 펴지지 않는지 제 팔을 천천히 주무르는게 보임. 눈이 마주치자 새삼 자기들 꼴이 제가 봐도 우스워 둘은 마주 보고 피식 웃음. 어이구 죽겠다.. / 그래도 죽진 않았잖냐. / ㅇㅇㅇㅇ....
몸 대강 추스르고 나서 둘은 구덩이 밖으로 나가 봄. 느끼기론 한낮이 맞긴 한데 거대한 나무들에 가려서 햇빛도 제대로 닿지 않는지 주위가 썩 환하게 밝진 않음. 그래도 어제 그 암흑 속보다 훨씬 나음. 어젠 안보여서 몰랐는데 밖으로 나가니 입구 쪽에 베이고 잘린 곤충마물들의 거대한 다리며 날개며 시체들이 잔뜩 쌓여 있어서 새삼 어젯밤을 떠올린 유리는 진짜 살아난 게 용하다 싶음. 게다가 이왕 죽인거 신경 안쓰고 쿨하게 지나가고 싶었는데 내딛은 한 발 밑으로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키틴질 빠개지는 생생한 느낌이며 빠가각 하는 소리가 나서.. ´_`둘은 대충 다리로 잔해들 툭툭 밀어내가며 구덩이를 빠져나옴.
주변을 둘러보니 여긴 완전 모르는 곳임. 처음 왔던 숲 입구는 온데간데 없음. 정신없이 헤매다가 어느 새 숲 속으로 들어와버렸나 봄. 유리가 검으로 마물 잔해를 헤집으며 이 곳이 어디쯤인지 고민하는 사이 프렌은 같이 왔던 부하들의 이름을 외쳐 봄.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새들만 푸드득 댈 뿐 부하들의 응답은 없음. 아예 뿔뿔히 흩어져버렸나 봄. 그렇게 별 수확 없이 메아리만 돌아오는 외침을 반복하자 땅 뒤집는 것에도 싫증났는지 몸을 일으킨 유리가 프렌 쪽을 쳐다 봄. 저 미묘하게 찡그린 표정은 필시 별 소용없는 것 같으니 그만하는게 어떻겠냐는 뜻일 터인데 어젯밤 지휘관도 없이 정신없이 쫓겨간 부하들이 걱정되었던 프렌은 기어코 이름 몇 번을 더 불러 봄. 거 새끼 고집보게.. 그래 니 입 아프지 내 입 아프냐ㅇㅇㅇㅇ 머리를 긁적대며 신경을 꺼버린 유리는 잠시 후 이곳저곳 찾다 못찾아서 지친 프렌이 다시 제 쪽으로 돌아올 때까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기다림.
그렇게 또 잠시 짧은 휴식이 이어지고. 프렌 부하들도 이 근처에 없는 거 같고 한 곳에만 계속 있는 것도 별 소용 없어 보여서 둘 다 슬슬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다는 걸로 의견을 모음. 그래봤자 어느 방향이 숲 속으로 들어가는건지 밖으로 나가는건지 당최 방향감이 잡히질 않는 요상한 숲이라 대충 발 딛을 수 있는 곳으로 걸어나가는 거 뿐임. 부하들 찾는 건 이제 포기했는지 더 이상 이름을 외치거나 하지 않지만 걸음을 옮기는 내내 주변을 살피며 신경을 놓지 못하는 프렌을 보고 유리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듬. 이제껏 하는 걸로 봐서 기사단은 저 녀석을 존경하고, 저 녀석은 부하들을 믿고 뭐 그런 관계로 보였는데. 아무리 어제 사태가 사태였다지만 자기들도 별 일 없었...나? 여튼 안 죽었고 걔들도 훈련받은 기사들일텐데 지금 저렇게 걱정하는 꼴이 부하들을 믿는다기보단 그 반대에 가까워서, 그렇다고 프렌 소대 분위기가 나빴다거나 했던 것도 전혀 아님. 외려 부하들은 저 놈을 완전 믿고 따르는 눈치였음.
넵 이거 벽ㅇㅇㅇㅇ 그 부하들은 앞으로도 지금도 아마 평생 지나도 모를 그 벽의 존재를 만난지 이틀만에 유리는 대충 느끼고 있음. 사실 그 비슷한거 자기도 가지고 있거든´_`.. 설마 반짝반짝 해(보이는) 천연 기사놈한테도 그런게 탑재되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 안했던 터라 아직까지는 그게 뭐다 확실히 감은 못잡았는데 그냥 좀 미묘하게 아귀가 안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라 뭔가 짐짐하다고 생각함.
생각날듯 생각날듯 안나는 이 느낌이 은근 사람 신경을 긁는 것이라 괜히 무의식적으로 말을 건네려던 유리는 "야,..." 퍼뜩 아직까지도 속으로 프렌을 저 녀석, 저 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음. 눈치챈 사람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둘 아직 통성명도 안했음. 물론 프렌은 첫날 당그레스트 진입하려고 할때 고지식정직돋게 제국 모부대 소속 소대장 아무개라고 정식소개 했지만 유리는 늦게 와서 못들었고 프렌도 얼핏 유리 이름을 들은 것 같긴 했지만 정식 소개는 안했음. 속으로 이놈 저놈 부르고 있었던 건 유리 뿐만은 아니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한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프렌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부드럽게 눈꼬리를 휨. "..그러게." 그렇게 검 섞고 하루종일 같이 온 도시를 쏘다니고 지난 밤에는 같이 사경도 넘었는데 정작 서로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이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둘은 한참동안 헐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함. 그래 검 쓸 적 버릇은 눈에 불을 키고 찾았으면서 이름 물을 생각은 못했던 거냐고ㅋㅋㅋㅋㅋ 그 생각 못한 나도 병신이지만 너도 똑같은 병신ㅋㅋㅋㅋ전투덕후새끼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잠시 걷던 길 멈춰서서 실없이 피식피식대던 둘은 만난 지 이틀 만에 겨우 서로 이름 주고 받음. "유리 로웰." "프렌 시포다."
"... 그나저나 여긴 어디 쯤일까." 통성명 이후에도 한참을 걷다가 프렌이 불쑥 말을 꺼냄. 어딜가도 똑같은 나무 똑같은 숲 똑같은 길 같아 뵈고 익숙한 장소가 나오긴 커녕 방향감각에도 혼란이 와서 여기가 숲의 중앙인지 끄트머리인지도 감이 잘 안잡힘. 저 쪽은 첫 외출이지만 이 쪽은 첫 공식임무임. 마물 근거지 소탕도 아니고 기껏해 도망친 죄인 하나 체포해오면 끝이었을 일이 어째 이지경까지 되었는지 왠만하면 남탓 상황탓 안하는 프렌도 알 수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유리가 대충 어깨를 두들겨 줌. 그래봤자 같은 신세거든? / 포기하면 편해...´_`그런 프렌 반응에 반쯤 재미있어하며 무심하게 말 끝을 늘이던 유리가 순간적으로 어제 해리 만났던 일이 생각나서 씁쓸한 표정을 지음. 진짜 자기도 이렇게 낄낄댈 입장이 아님.
침묵했던 건 한순간이고 다음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긁어대긴 했지만 프렌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음.차마 이쪽 때문에 니 입장 난처한 거냐고 바로 물어올 만큼 프렌이 눈치가 없...지ㅇㅇㅇㅇ 그 말에 유리는 표정 관리 그런거 없고 보는 사람이 더 어색할 정도로 뜨끔한 표정을 지어서 프렌을 거슬리게 함. "...뭐야." "아니, 알꺼라곤 생각 안해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함. 거기다 대놓고 니 눈치 없어 뵈든데, 하고 말해버릴 정도로 유리는 무심하지 않음. 아니 저 말이 직접 그렇게 말한 거랑 뭐가 다른 거냐 싶지만ㅇㅇㅇ... 그 말에 묻어나는 미묘한 어조를 잡아내려 하는지 눈매를 좁히는 프렌을 보면서 유리는 속으로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고 완전히 의표를 찔린 느낌이었지만 프렌은 사실 어제 저녁 해리랑 유리 대화 - 거의 해리의 일방적인 전달이었지만 - 를 본 후부터 계속 둘을 신경 쓰고 있었음.
유리 처음 만났을 때 그 복잡했던 상황 매끄럽게 풀어가는 것이며 검 섞었을 때 실력 좋은 거랑 함께 시내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한테 인망도 높다는 걸 점점 알게 되면서 프렌은 자연스럽게 유리가 보통 인물이 아닐 꺼라고 생각했음. 적어도 한 길드의 수령을 맡고 있거나 하늘을 쏘아 맞추는 화살이라면 간부 혹은 돈 뒤의 차기 수령 후보쯤? 의무 교육이 있었던 시대도 아닌데 거의 다 자란 시점에서 나이는 별 상관이 없고, 이 정도로 실력 있고 대단한 놈이 아무리 길드라도 흔할 것 같지 않으니 당연히 요직에 제 길드(가 있다면) 그 안에서의 신망도 쩔어줄꺼라고 생각한 거임. 자기도 이 나이에 귀족 뿐인 빡빡한 기사단에서 소대장 해먹고 있는데(물론 빽이 좀 있긴 하지만) 더군다나 유니온은 자유와 기☆회의 장소 아닌가여?ㅇㅇㅇㅇ 근데 그런 프렌이 보기에 어제 그 소년과의 대화는 좀 이상했음. 분위기를 봐서 완전히 상사/부하의 관계는 아닌데 상대가 지위가 높다고 해도 그걸 깍듯이 지킬 거 같아 보이지 않는 유리가 묘하게 신경쓰고 삼가는 듯한 자세고 해리는 해리대로 유리를 제대로 믿고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었으니까. 프렌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뻔히 신경쓰고 있던 일을 눈 앞에서 놓쳐버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고, 잘 모르는 남 일에 껴드는 거 아니라지만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한 두 세력 중 하나로써 잘 알려지지 않은 상대방의 동향이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음. 게다가 프렌은 볼수록 유리가 인간적으로 괜찮고 마음에 듬. 그런 상대가 돈 화이트호스도 아니고 연배차도 별로 나지 않는 어린 소년한테, 좋은 관계도 아니고 절절 매고 있는 것 같은 꼴이 신경도 쓰이고 또 의아함.
프렌 생각엔 그래도 유리 사교성이 워낙 좋아 보이니까 설마 둘이 원래부터 껄끄러운 사이일꺼라고는 생각 안해서 -> 단순히 동행하는 걸로 저렇게 냉랭해질 정도로 기사단-길드 사이가 안좋은가? 해서 물어봤던 거임. "별로 니들 탓 아냐." 그 뒤로 또 뭐라고 말이 이어질 줄 알고 유리를 빤히 내다봤지만 유리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더 별 말 않고 척척 숲 속을 걸어감. 유리 입장에서는 썩 좋은 일도 아닌 자기 일을 누구한테도 시시콜콜 말해 본 적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또 프렌이 물어본 것도 어쩌다보니까 걍 그런 말이 나온거려니, 제가 그냥 훌훌 넘기면 프렌도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려니 했음. 물론 안 그럼. 그 꽉막힌 기사놈이 안 그래뵈도 엄청 집요하고 끈질긴 구석이 있는데 당시 유리는 그걸 몰랐음. 뭐 그 얘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말 돌린답시고, 또 어제 오늘 제대로 된 보급도 못받고 행군 + 습격 + 철야 했으니 진짜 그런 감도 있어서 유리는 "아. 배고프다." 말을 꺼냄. 프렌도 22222함. 다행히 유리가 어제 습격 받은 그 와중에도 제 가방을 챙겼음. 뭐 자다가 갑자기 쫓겨나는 거 한 두번 한 것도 아니고(물론 그 상대는 마물이 아니었지만). 유리가 가방을 딸랑딸랑 흔들어보이자 프렌 표정이 좀 밝아짐. 급하게 싸서 구미 몇 개랑 간단한 캠핑용 조리기와 기본 향신료 외엔 별 들어있는 게 없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훨씬 나음. 식재료야 뭐 현장 조달하면 되는거고ㅇㅇㅇㅇ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숲에는 곤충형 마물 말고 새나 토끼같은 날랜 동물들은 아직 남아있음요...´_`아무리 그래도 볶은 곤충 뒷다리나 몸통 소금구이같은 걸 애들한테 먹게 할 순 없다... 아니 막 음식 가리고 그런 거 잘 없는 애들이니까 - 오징어는 예외임ㅇㅇㅇ..- 배 채워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뭐라도 먹을 거 같긴 하지만ㅇㅇㅇㅇ...
수풀 속을 걷다가 굴 발견해서 토끼 몇 마리, 또 나무로 돌 던져서 잡은 새 몇 마리로 간단히 그날 아침 겸 점심꺼리가 마련됨. 프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준비는 내가 할게." 이래서 유리는 "ㅇㅇㅇㅇ" 했고.... 그 뒤에 마물 없이도 또 한번 지옥을 맛 봤다는 얘기를 대충 해둠ㅋㅋㅋㅋㅋ 아니 칼 다루는 거며 식재료 다듬는 솜씨가 꽤 그럴싸하길래 안심했더니 존나 평범하게 요리가 반ㅋ전ㅋㅋㅋㅋㅋㅋㅋㅋ 으아니 사냥->손질->????!?!??!?!?!??->?!??!??!?!??!? 대체 저 과정 사이에 뭐가 있었던 거야... 이 결과물은 또 뭐야 배낭에 들어있는 건 평범한 냄비 후라이팬 소금 후추였을 텐데ㅠㅠㅠㅠㅠ 고기 한 점 뜯은 후 의심에 찬 눈으로 프렌을 봐도 프렌은 'ㅅ'? 왜? 할 뿐임ㅋㅋㅋㅋㅋ에라ㅋㅋㅋㅋ 식재료 아까워서 입에 넣고 있긴 하지만 이게 내가 뭘 먹고 있는건지 못먹고 자란 고아 시절 이딴 건 다 사치였던 거야 그렇지? 유리는 반쯤 넋을 놓고 요리를 다 먹어치움. 나중에 생각해보니 옆에서 식사를 마친 프렌이 "잘 먹었습니다." 라고 인사할 때까지의 기억이 없어져 있음.. 너무 끔찍한 기억은 지워진다고 했던가..ㅇㅇㅇㅇ... 그 다음부터 모든 식사시간의 조리는 당연히 유리 몫이 됨. 식사 때가 되면 필사적으로 조리기를 점거하는 유리를 보며 프렌은 그렇게까지 신경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했지만. 제발 이쪽을 신경쓰게 해줘´_`
밥먹고 나니 'ㅅ' '_'...?..?!?!?!(※주: 기억을 잃음..) 요 상태가 된 둘이 다시 길을 떠남. 그 맛이야 어떻든 어쨌든 밥 먹으니 배부르고 나른해서 걸음이 축축 처짐. 자꾸 뒤쳐지는 유리를 자꾸 돌아보던 프렌이 참다 못해서 뭐라 말하려는데 이놈이 이젠 아예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서기까지 함. "...너 적당히," 이어지는 말을 무심히 넘긴 유리가 고갯짓해 프렌의 앞을 가리킴.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프렌도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뛰어감. 발자국임. 지나다니던 나무등걸 위로 선명하게 진흙 발자국이 나 있음. 조금 건드리자 이미 하얗게 변해있던 흙 무더기가 툭툭 부서져 내리는게 지난지 좀 된 발자국임. 모양을 살펴보던 둘은 서로 마주 봄. "군화 자국은 아냐." "내 것도 아니고." 유리는 발을 조금 들어보이는 시늉을 함. 이런 숲에 들어올 사람이 더 있을 만큼 인적이 흔한 곳도 아님. "걸렸군." 유리가 씩 웃자 프렌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임. 둘의 걸음이 빨라짐. 느긋하니 늦장 부리고 있던 유리는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주위 살피며 걷던 프렌도 일단 이 상황에서는 죄인을 잡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자세를 바로 하고 잰 걸음을 놀리기 시작함. 몇 걸음 옮긴 후 또다른 흔적 있나 살피고 또 좀 더 간 다음 살펴보고.. 지나간지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 흔적들이긴 하지만 다행이 아직 놓친 거 같진 않음. 둘은 숨 죽이고 흔적들을 따라감. 그렇게 수풀이 잔뜩 우거진 곳을 빠르게 지나가려는데 시야 한구석에서 덤불 한 구석이 작게 들썩이는게 얼핏 보였음. "쉿." 그대로 지나가려는 프렌을 붙잡고 유리가 검을 세운 채로 덤불 쪽으로 다가감. 프렌도 자세를 낮추며 뒤따라감.
"왕!왕왕!왕!!!" "우왓!" 막 헤집으려던 덤불 속에서 검은 형체가 쑥 튀어나와 유리에게 달겨듬. 습격할 준비는 했지만 설마 저 쪽에서 먼저 튀어나올 줄은 몰라서 + 또 상대가 워낙 날래서 유리는 덤벼든 그 형체와 함께 나동그라짐. "유리!" 프렌이 놀라서 칼을 집어넣고 쓰러진 유리한테 다가옴. 순간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 정면 공격만은 피한 유리가 프렌의 도움을 받아서 형체를 물리치고 몸을 일으킴. 프렌이 자꾸 날뛰는 짐승을 잡아서 들여다보니 이건 개임. 검은색 개. 한 두살 먹었을까? 아직 작은 새끼임. 게다가 다쳤음. 뒷다리가 온통 피범벅에 살점이 덜렁덜렁한데도 잔뜩 예민해져서 잡은 손을 물고 할퀴는 걸 둘은 간신히 붙들어 일단 진정시키려고 애씀. 뒷다리 상처가 결코 얕지 않은데다 잘 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임. 아까의 습격은 오히려 필사적인 것이었는지 개는 금새 지쳐서 얌전해짐. 상처를 쓸어보자 아직 마르지도 않은 피가 울컥울컥 묻어남. 이대로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개가 얌전해진 사이 프렌이 가방을 뒤져 구미를 꺼내옴. 처음엔 고개를 붕붕 돌리며 거부하는 걸 억지로 입가에 갖다대자 코를 몇번 킁킁한 개가 킁, 소리를 내며 구미를 삼킴. 꾹꾹 씹어 삼키자 상처가 금새 아물어짐.
"이런 곳에 왠 개지." 아직 경계하는 눈치지만 이제 다시 덤벼들 거 같진 않아서 유리가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개가 고개를 흔들어서 우아하게 그 손을 쳐냄. 허ㅡㅡ.. 기막혀 하는 유리를 놔두고 프렌은 개를 이리저리 살펴봄. 진 바닥을 다니느라 털에 진흙이랑 피가 좀 엉겨 붙어있는거 빼면 사슬도 있고 개 주제에 무장도 했고 어딜봐도 야생은 아님. 그렇다면 이 근처에 주인이 있을텐데.. 혹시 범인의 개인가? 생각해봐도 술집 그 근처에서 이런 개를 본 기억은 없음. "주인은 어디 있을까?" 그 말에 개가 크응, 하면서 고개를 붕 흔듬. 뭐야, 이 녀석 말 알아듣는 거 같은데? 아까 거절당한게 꽤 기분이 나빴는지 영 삐딱한 태도로 유리가 고개를 기울이자 개가 다시 컹 콧방귀를 뀌고 고개를 저쪽으로 돌림. 얼씨구, 이놈이? 좀 짱났지만 변함없이 뚱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한 유리가 강아지 머리 위로 손을 이리저리 돌려 만지려는 시늉을 하며 개를 놀림. "유리, 상대는 개야." 프렌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듬.
그 와중에 아깐 미처 발견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개의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큼지막한 상처가 눈에 띔. 아까 다쳤는데 낫지 않았나? 프렌이 고개를 갸웃함. 아침에 먹다 남은 고기조각도 좀 내밀었지만 개는 쿨하게 고개를 돌릴 뿐 관심도 보이지 않음. 별 희한한 개 다 보겠네.. 그렇게 잠시 개가 회복될 때까지 그 근처에 머무르던 유리+프렌은 개 상태가 어느 정도 나아진 것 같자 몸을 일으킴. 프렌이 개더러 "따라올래?" 하지만 개는 고개를 저음. 그래 안 온다면 할 수 없지ㅇㅇㅇ 머리 위로 팔짱을 끼고 다시 가던 길 가기 시작하는 유리 뒤를 따르며 프렌이 흘끗 돌아보면 개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있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감. "괜찮을까?" "괜찮아. 저래뵈도 꽤 날랜 것 같던데." "어쩌다 다친걸까. 이런 곳에서."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지 않겠냐?" 영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유리를 프렌이 빤히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한 유리가 머리를 쓸어올림. "근데 너 죄인 안잡음?" "ㄴㄴ 잡음." 유리가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고 다시 추적에 집중하면서 프렌도 자연스럽게 개의 일을 머릿속에서 잊어버림.
중간에 개 때문에 놀라 미행하던 것도 잊고 소란 피운게 마음에 걸려서 재빨리 달려가 길을 확인했는데 다행히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음. 참고로 말하자면 유리 일행이 걷고 있는 길은 숲 바닥에 늘어져있는 커다란 통나무들 뒤임. 풀 잔뜩 자라난 땅 위를 걷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걷기도 수월함. 신발창에 어지간히 진흙이 묻었는지 그 위를 끊이질 않는 흙발자국과 가끔 발을 헛딛는지 길이 되는 나무의 가지들이 밟아 뭉갠 모양으로 부러져있는 것들을 따라 유리도 프렌도 발소리를 죽이며 이동함. 한동안 흔적이 끊겼다가, 다시 발견한 발자국에 묻은 진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걸 손가락으로 문대본 프렌이 유리를 보며 눈가를 좁히고, 유리도 따라 고개를 끄덕임. 몸을 낮추고 검 손잡이를 잡아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한 상태로 두 사람은 앉은 걸음으로 시야를 가린 나뭇잎들을 헤치고 걸어나감.
유리+프렌이 딛고 있는 나무줄기가 끝나는 그 앞에 기사단이 쫓는 죄인이 서 있는게 보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한 발짝 더 옮겼는데, 마치 원래부터 둘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죄인이 이쪽을 똑바로 쳐다본 다음 앞 쪽의 나무줄기로 냅다 뛰어 올라가는 게 보임. "거기 섯!" 눈 마주친 즉시 몸 일으켜서 프렌따라 죄인 쪽으로 달려가면서 유리는 뭔가 석연찮음을 느낌. 기척 감추는건 나름 익숙하게 잘 됐는데 감이 좋은건가.. 아니 그전에 아무 소리도 안냈는데 이쪽을 딱 쳐다보는 건 이상하지 않나? "야, 프렌..." 검을 뽑아들고 범인을 쫓아가면서 프렌에게 뭐라 말하려 했던 유리는, 저쪽 나무줄기로 건너기 위해 그 아래 땅으로 한발짝 내딛는 순간 덜컥 멈춰버린 동행을 보고 순간 정신적으로 주춤했다가 마찬가지로 그런 프렌과 거의 동시에 땅에 내려놓은 발이 아래로 쑥 당겨지는 걸 느끼면서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를 스쳐보냄. 아 망했다..........
점점 바닥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는 유리를 보고 놀란 프렌이 소리를 지름. "유리, 너 가라앉고 있어!" "너도다 멍청아!" 무슨 조치 취할 새도 없이 남은 한 발도 딸려들어와 옴싹달싹 못하게 된 걸 확인하면서 유리는 고개를 홱 쳐들어 죄인이 도망친 곳을 노려봄. 아 저새끼가 일부러 그랬어! 여기 늪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보란 듯한 자취 남겨놓은 것도 자기들 끌어들이려 했던 함정이 분명함. 안그래도 이상하게 이 부분만 풀이 낮게 자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늪이니까 당연한 거였음. 뿌리가 더 깊으면 진창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테니까. 이대로 익사라도 시키겠다는 거냐? 이를 부득부득 갈던 유리는 일단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침. 프렌을 돌아보니 이미 상황판단을 마쳤는지 버둥거리는 걸 멈추고 몸의 움직임을 최대한 줄여서 늪에 더 빨리 빠지지 않게 하고 있음. 그래봤자 시간문제라 고민하던 유리가 들고 있던 검으로 시선을 옮김. "유리." 그런 제 쪽을 눈치챘는지 프렌도 자기 검을 들어올려 꼭 쥠.
그 후 한참동안 뻘과 진창과 진흙과 씨름한 끝에 둘은 간신히 늪을 빠져나옴. 양 발보다 훨씬 표면적이 길고 넒은 검과 엉덩이, 그리고 그 근처에 자라난 갈대와 덩쿨을 이용했음. 사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했다고 봐도 좋음. 둘 다 이런데서 이렇게 죽을 정도로 무른 애들은 아님. + 분노버프!!!111111 물론 그 과정은 상당히 순탄치 않았음. 피 같고 살 같은 제 검을 깔고 포복한 상태에서 손바닥이 다 까지도록 근처에 자라난 갈대를 잡아당기던 둘은 암묵적으로 야 범인 체포하기 전에 한대만 때리면 안되냐? / ㄴㄴ 두대도 됨ㅡㅡ 하는 약속을 체결함. 그렇게 간신히 늪에서 빠져나와 나무 등걸 위에 기대앉아서 겨우 막히던 숨을 몰아쉬면서 둘은 서로 진흙투성이가 된 옷도 옷이지만 진흙과 물풀??과 기타 더러운 오물이 잔뜩 낀 제 무기를 살펴보며 다시 한번 단단히 벼름. 옷은 그렇다 치고 내 검 ㅠㅠㅠㅠ 내검따응이 ㅠㅠㅠㅠ... 전투광검사들에게 무기는 소중합니다...
일단 늪을 빠져나오는데 온 신경을 기울인 터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숲이 거의 어둑어둑해져 있음. 지금 당장이라도 범인 잡아서 울분을 갚고 싶지만 곤충형 마물은 야행성일테니 더 이상 진행은 커녕 하룻밤 지낼 곳을 찾아봐야 함. 그래도 지금은 완전히 녹초가 된 터라 유리는 물론이고 프렌도 조금만.. 하고 그대로 나무줄기 위에 누워있었음. 더워서 그런가 아까부터 숨이 턱턱 막힘. 그렇게 빽뺵한 나뭇잎으로 가려져 하늘 한조각도 보이지 않는 천장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림. 처음엔 곤충 날개짓 소리인 줄 알고 누운 채로 벌떡 일어나 옆에 둔 검을 쥐었다가, 손잡이에 더덕더덕 감겨있는 퍼석한 진흙의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검을 흔들어봄. 옆에서 유리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음. 틀렸음. 이건 더이상 베는, 검의 용도로 쓸 수 없을 거 같음. 둔기삼아 퍽퍽 두들긴다면 또 모를까. 어쨌든 무기 주워들고 주위 살펴봤는데 마물은 안보임. 어둡긴 하지만 아직 앞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님. 어리둥절한 둘이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물이 떨어짐.
빗방울..이 맞긴 하지만 그거치곤 양이 너무 많음. 아마 처음 비가 올 때부터 두터운 나뭇잎에 고여들던 빗방울들이 양이 점점 많아지자 나뭇잎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한꺼번에 쏟아진 거 같음. 별안간 쏟아진 물폭탄에 습격당해 완전히 물에 젖은 생쥐ㅋㅋㅋ... 꼴이 된 프렌이 푸우 하면서 자꾸 달라붙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떨어냄. 아까까지 더웠던 터라 시원은 하지만 옷이며 머리에 말라붙었던 진흙이 같이 녹아내려 상당히 찝찝함. 보송하던 머리가 물에 젖어 늘어붙은 꼴을 보고 유리는 기운없는 와중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킥킥댐. ㅡㅡ.... 좀 짱난 프렌이 아무 말 없이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팔뚝으로 걷어내는데 계속해서 낄낄대던 유리가 등을 뒤로 젖혀 나무줄기를 툭 건드리자 그 위에서도 물 한바가지가 떨어짐. "...우왓!" 이번에는 고여있던 물이 꽤 많았는지 물을 맞고 놀란 유리가 간신히 고개를 젖힐 때까지 계속해서 머리 위로 몇방울씩 똑똑 흘러내림. 미묘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정수리에 내리는 물방울을 받고 있는 유리는 그 자체로도 상당히.. 완성되어 있는 느낌이라 프렌은 딱히 거기다가 별 말 덧붙이지 않는 배려를 보여줌.
"......." "......." "........" 그렇게 서로 꼬라지를 보며 둘은 잠깐동안 침묵함.비가 그칠 거 같지 않고 빗줄기도 상당히 굵으니까 적당히 쉬고 둘은 비를 피할 곳을 찾음. 이 숲은 나무가 이상성장을 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무뿌리로 얽어진 구덩이 같은 데가 많음. 말이 구덩이지 나무 자체가 크다보니 왠만한 작은 동굴 정도의 크기임. 대충 비 들이치지 않는 구덩이 찾아서 큰 돌맹이 몇 개 바깥으로 던져버리고 짐이랑 무기랑 갖다놨는데 유리가 들어오질 않음. 뭐하나 내다봤더니 비 맞고 있음. "어차피 진흙투성이인거 잘됐잖아." 이쪽의 시선을 눈치챈 유리가 어깨를 으쓱함. 프렌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같이 바깥으로 나와 내리는 비로 진흙을 씻어냄. 아까까지 후덥지근했던 터라 몸에 닿는 비가 시원함. 그렇게 한동안 말 없이 비 맞다가 또 추워져서 프렌은 어깨를 바르르 떨고 유리는 크게 재채기함.
동굴로 들어가서 몸에 처덕처덕 감기는 젖은 옷 대충 나무가지 얽은 위로 널어놓고 불 피움. 다행이 비가 거세지기 전에 동굴에 갖다놓은지라 가방 안쪽까지는 안젖어서 부싯돌도 무사했음. 대신 장작으로 주워온 나뭇가지는 젖어있어서 불 붙이는데 조금 오래걸림. 유리가 다시 재채기함. "감기걸렸냐?" "ㄴㄴ나무 젖어서 연기남." 프렌이 다시 나무 뒤적거려 불씨 살림. 순간 둘 다 어젯밤 생각이 조금 났지만 비가 이렇게 오는데 곤충이 나다니진 않겠지ㅇㅇㅇ... 장작불을 사이에 두고 유리가 입구, 프렌이 안쪽에 앉은 터라 연기가 빠져나가는 동안 유리가 몇번 코를 킁킁거리긴 했지만 금세 불에 기세가 붙자 연기는 점차 사라짐. 그 와중에 흠뻑 젖은 옷 집어와 쭉 짜던 유리는 경사 때문에 동굴 안쪽으로 물이 흘러들자 프렌한테 잔소리를 들음. "물 들어오잖아." "네, 네." 아예 옷가지들을 몽땅 들고 비 안들이치는 앞쪽으로 나가 물을 짜내오면서 유리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저녀석이 점점 잔소리가 심해놨다고 투덜댐.
유리가 옷 짜오는 동안 프렌은 가방을 열어봄. 아까 아침에 먹다가 연기에 절여놓은 토끼고기가 조금 남아있을 뿐임. 저녁도 못 먹었는데 이거갖곤 당연히 양도 안참. 몸도 춥고 뭐라도 뱃속에 넣는게 좋을 거 같다고 생각한 프렌은 대신 냄비에 빗물을 받아 물을 끓이기로 함. 끓인 물을 마시면 속이 좀 따뜻해질 거같음. 옷 짜갖고 오던 유리가 프렌이 조리도구 만지작거리고 있자 흠칫해서 쑥 다가왔다가 프렌이 왜? / 뭐하게? / 물끓이게. / ㅇ..ㅇㅇㅇㅇ... 하면서 수긍함. 대충 가져온 옷 받아서 탁탁 펴서 나뭇가지에 널고서 둘은 한동안 말없이 장작이 발갛게 타들어가는 걸 구경함.
불이라고 해도 좁은 동굴 안에서는 크게 피울 수 없으니 몸이 완전히 따뜻해지진 않음. 바깥에서 드둑거리며 비 오는 소리가 들림. 불 붙은 나뭇가지가 탁탁 타들어가면서 튀는 소리가 섞여듬. 바깥은 완전히 어둑해졌을 터임. 작은 불이지만 좁은 동굴에 빛이 가득차 안쪽은 어둡지만은 않음. 둘은 조용히 빗소리를 들음. 바깥쪽에 앉은 유리는 가끔 고개를 돌리면 뭔가에 비치는 것처럼 번득거리며 어둠 속을 떨어져 긋는 빗방울들을 볼 수 있음. 비가 오는 데도 잔망스러운 산새가 이따금씩 우짖는 소리가 들림. 프렌은 옆에 풀어 둔 제 검 손잡이를 조금씩 만지작거림.
물이 끓자 둘은 남은 고기를 나누고 늦은 저녁식사를 시작함. 말린 고기를 씹고 따슨 물을 넘기면 제법 몸이 녹는 기분이 듬. 괜히 나뭇가지를 집어 모닥불을 뒤적거리던 유리는 후우 불어가며 끓인 물을 마시는 프렌을 가만히 쳐다봄. 비 오는 통에 젖은 옷 그대로 입고 있다간 감기 걸릴테니 경향이 없어서 + 어차피 남자끼리니까 별 부끄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지만 기분만은 묘함. 어렸을 적 사내애들이야 친구들끼리는 발가벗고 멱이나 감으러 다니고 나무 타러다니고 한다지만 먹고 살아남기 바빴던 유리 + 프렌은 그런 경험이 거의 없음. 만난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몇시간 전에야 이름자 겨우 나눈 사이에 이렇게, 마치 친한 친구나 뭐가 된 것 마냥 가리는 거 없이 옷 다 벗고 둘이서 앉아있는 이 상황이 낯설고 신기함. 그러나 썩 나쁜 기분은 아님. 비록 자발적인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불쾌하거나 하진 않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또 당연한 거 같음. 그걸 잠시 생각해보던 유리는 물 마시던 프렌이 올려다보자 괜히 "기사단 힘드냐?" 하고 물어봄. 프렌은 지금 이 상황보단 쉽다고 함. 그리고 대충 길드는 어렵냐고 물어봄. 유리도 이거보단 훨씬 낫다고 대꾸함. 뭘 해도 지금보단 안 낫겟냐...´_`
그날 밤은 별 탈없이 지나감. 아침에 일어나니 비도 그쳐있고 안개가 좀 끼긴 했지만 공기도 훨씬 산뜻해서 기분이 좀 나아짐. 사방에서 비 온 뒤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남. 간밤에 손질해 놔서 무기따응도 반짝반짝 깨끗해짐. 기분이 좀 더 좋아짐. 사냥해서 아침 먹고 둘은 다시 범인 잡으러 출발함.
전체적으로 경황이 없었던 첫날과는 다르게 어제는 길도 좀 보고 방향도 봐 놓아 가면서 이동한 터라 금방 어제 범인이랑 헤어진 늪까지 도달함. 늪을 보니 어제 고생하던 것이 생각나서 살짝 빡침. 대충 빨리 범인 잡아 넣어버리고 하늘을 쏘아 맞추는 이중성에서 밥이나 먹고 싶음. 프렌도 임무 얼른 마치고 제도로 돌아가고 싶음. 발 안빠지게 조심조심 가장자리로 이동해서 늪을 건넘.이전에 앞길에 보란듯이 남겨져있던 범인 발자국이며 흔적들은 짐작했던 대로 둘을 늪으로 유인하고자 했던 유인책이었는지, 혹은 간밤 흠뻑 내린 비에 씻겨 내려가버린 건지 얄미울 정도로 눈에 보이는 범인의 흔적은 없음. 그래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근처 땅은 거의가 늪지이고 그 위로 가로놓인 나무줄기는 쭉 한 길이라 그냥 따라가도 될 거 같음.
한 걸음 나갈 때마다 숲이 울창해지고 새 소리며 벌레 우는 청명한 소리가 깊어지는 걸로 봐서 숲의 중앙부로 향하는 거 같음. 아직까지 마물들은 별로 보이지 않음. 비 온 뒤라 공기가 축축해서 곤충들은 날아다니기 힘들 터임. 그리고 애초에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곤 곤충형은 무리짓는 애들이 아님. 첫날 그렇게 잔뜩 모여든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지도 모름.물론 그렇다고 해서 돌아다니는 동안 마물들을 아예 못 만난건 아니어서 가끔 출몰해 길목을 막는 곤충들을 둘은 절대 피하지 않고 받아 전투함ㅇㅇㅇㅇ. 어둡지도 않겠다 습도 때문에 다소 둔해져있는 곤충들 치는 건 덜도 더도 않고 식후 운동으로 딱 좋음. 맘 같아선 좀 더 스릴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전투가 목적이 아닌 입장에선 이 정도가 딱 좋다고 생각함. 길이 좁고 나무줄기가 미끄러워서 발 디디느라 전투할 때 둘은 딱 붙어서 등이나 팔 같은데를 맞대고 하는 경우가 많았음. 전체적으로 움직임도 잘 맞고 전투 호흡도 비슷한데다 서로 쓰는 기술도 익숙한 게 많음. 기본적인 호흡은 잘 맞는데 둘의 전투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가끔 서로 팔이나 다리 같은 곳을 스치는 일이 왕왕 있음. 프렌 쪽이 단체가 동작 딱딱 맞춰서 하는 전투에 좀 더 익숙함.
대충 숲 헤매고 전투 치르면서 또 하루가 지나감. 하루종일 걸었지만 확실히 숲의 안쪽인지 앞으로 나아갈때마다 마물들이 덤벼서 실질적인 이동거리는 얼마 되지 않음. 늪과 나무줄기의 길을 지나니 어느 정도 발을 디딜 수 있는 좁은 숲길이 나타남. 역시 근처에서 잡은 동물들로 저녁 해결하고 불을 피울 수 없어 풀밭 맨 바닥에 모포도 없이 유리는 제 검집을 머리 밑에 두고 덜렁 팔짱 껴서 눕고 프렌은 그 앞에 앉아 검을 닦음. 풀숲에서 찌르륵거리는 곤충 소리가 꽤 요란해서 그냥은 잠이 안올 거 같음.
그렇게 한참을 검날을 들여다보며 어디 빠진 곳 없나 검사하던 프렌이 말을 꺼냄. "그러고보니 유리 너 검 휘두를 때 동작 크더라." 처음 대결할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버릇이야? 그 말에 유리는 누웠던 몸을 옆으로 일으키면서 "엥?" 함. 버릇? 동작? 그런게 있었나? 잠시 생각해본 유리가 어깨를 으쓱함. 프렌이 천천히 설명함. 아까 낮에 좁은 나무줄기 위에서 곤충마물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로 등 맞대고 전투하는 중에 유리가 팔을 휘두르는 것이 자꾸 등에 닿더라, 뭐 이런 얘기임. "검 휘두르는 반경도 상당히 컸어." 그건 고치는게 좋아. 덧붙이는 프렌을 보고 유리가 아, 함. "그러고보니 아까 너가 뒤에서 걸리적거리긴 했지." ".....?" 어째 얘기가 좀 이상한 거 같아서 프렌은 이마를 살짝 찌푸림.
"걸리적거리다니?" "내 팔에 자꾸 닿았잖아." "그건 유리 네가-," 유리가 다시 어깨를 으쓱하자 발끈한 프렌이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함. 원래 검은 한번 휘두르고 손목 스냅과 운지법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휘두르는거다, 그 동작이 빠르고 절도있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음 번 정교한 발검이 힘들다 뭐 이런 얘기들. 기술 발동 전의 프렌 자세를 생각해보면 될 듯. 요걸 자주 해서 검을 휘두르면서 + 검날의 방향 전환 등이 어느 정도 몸에 익으면 동작을 크지않게 하면서도 조룡연아참 같은 연속기가 가능해짐. 요건 원래 제국 기사단 정통의 자세임.
그런 프렌이랑 다르게 유리는 평소에도 자세 안 취하고 검을 어깨에 걸머메고 있지ㅇㅇㅇㅇ. 휘두를 때 동작도 크고. 그 자세들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프렌이 그런 동작은 같이 싸우는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다느니, 원래 그 동작은 그런 게 아니라느니 지적하자 유리는 조금씩 기분이 나빠짐. 아니 이건 뭔데 내 자세에 이래라 저래라야? 길드선 제 목숨만 부지할 것 같으면 크게 이상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은 한 무술이나 동작에 대해선 별 말 없는 편임. 너무 심한 선에선 너 그렇게 하면 다친다~ 하고 넌지시 알려주는 수준. 따라서 유리로선 이런 자세한 지적이 처음임. 거기다가 그 지적하는 놈이 예,예 하고 얌전히 가르침 받을만한 스승 뻘도 아니고 - 물론 스승 뻘이라도 유리가 얌전히 네네나 하고 있을 리는 없음 - 제 또래, 실력도 비슷한 라이벌뻘의 기사놈이라 이건 더 빡침. 얼씨구, 돈도 별 지적 안한 내 검술을 너가 지적해? 싶은 심정임.
반대로 프렌은 기사단. 소대, 크게는 대대 단위의 큰 동작이 많아 상황에 따라 올바른 동작이 딱딱 정해져 있고 교본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대열 자체가 흐트러질 수 있는 터라 동작에 대한 지적이 엄격함. 한 사람의 실수로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으므로 무술사범들, 선후배 사이 뿐 아니라 같은 기수 동료들끼리도 서로 잘못된 동작 지적해주는게 자연스럽고 또 고마운 조언임. 본편에서 유리에게 늘상 하는 잔소리.. 라기보단 그냥 흔하게 동료에게도 할 수 있는 충고 수준의 느낌이었음. 프렌에겐. 게다가 프렌한테는 추가로, 정해진 규칙을 꼭 지켜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이 있었음.
기사단 생활이 길었지만 애초에 프렌은 평민, 그것도 아랫마을 고아 출신임. 어린 시절에 시간 딱딱 맞춰가며 밥 먹어라 씻어라 뭐해라 지적하는 부모 같은 것도 없었음. 물론 그런 거 없이도 나름대로 잘 해내긴 했지만 어디까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침. 일할 때 허기지기 전의 시간 - 아침, 점심, 저녁 - 에 맞춰 밥 먹는 것, 병에 걸리지 않게 옷과 주변을 청결하게 관리하는 것, 다음날 행동에 지장에 가지 않게 적당한 시간에 잠드는 것 정도. 10년 이상 이런 최소한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오다가 일어나는 시간부터 시작해서 세면 시간, 훈련시간 공부시간 휴식시간이 답답할 정도로 딱딱 정해져 있는 기사단에 들어가니 아무리 프렌이라도 당연히 적응이 잘 안됨.
더욱이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는 건 레알 처음이다보니 기본적인 검술 동작 몇개는 몸에 잘 익지 않아 초반에는 상당히 실수가 많았음. 특히 프렌이 계속 틀렸던 동작은 아까 말한 운검(運劍) 동작. 이게 왜 군대 무술 보면 검 휘둘렀다가 - 가슴 앞에 모으거나/뿌리치면서 고쳐잡고 - 다시 휘두르고 이렇게 이어지는 동작인데 귀족들이야 어렸을 때부터 "어구 잘한다 우리 아들~" 요런 소리 들어가면서 조기교육 수준으로 기사단에서 쓰는 몇몇 장식적인 검술들을 익혀왔으니 프렌이 자꾸 틀리는 게 꽤 우숩고 천해보이고 또 프렌은 그 검술동작 몇개 외에는 흠잡을 데 없이 머리도 좋고 실력도 쑥쑥 늘어갔으니까 귀족들이 트집잡을 게 또 그거 밖에 없었음. 사실 그 동작도 아주 틀린다기보단 잠깐 머뭇거려서 한 박자 정도 늦는 거지만ㅇㅇㅇㅇ. 평민이 자기 대에 들어왔다는 게 못마땅했던 당시 대장의 묵인 속에 귀족들은 훈련 시간만 되면 프렌이 틀리는 거 보고 킥킥대고 욕하고 흠잡고 그랬음. 그 유치한 괴롭힘은 정도가 심해져서 당시 기사단장이었던 알렉세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됨.
사실 당시부터 알렉세이는 프렌을 좀 눈여겨보고 있긴 했음. 입단시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성이 지나친 검술이 아니라 다소 그 유서가 부족해도 그 동작이 놀랄만큼 간결하고 효율적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입시검술과 실용검술의 차이일까ㅋㅋㅋㅋㅋ 실제로 프렌은 입단 시험에 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어쨌든 프렌은 프렌대로 기본적인 동작을 자꾸 틀리는 자기 자신이 한심함. 그리고 그런 생각 이면에, 몸에 이런 기본기가 붙지 않는 건 어느 정도 자기가 이 동작을 취하는 것에 크게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음. 단체규모로 이루어지는 전투이니 적과 대치했을 때 4열 종대라 치면 적과 마주하는 1열이 치고 빠지면 뒤의 2열이 그 자리를 메꿔서 다시 치고 3열, 4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니까 검이던 창이던 휘두르고 → 다시 재빨리 고쳐잡는 동작이 별 필요는 없거든. 동작이 어느정도 익지 않으면 오히려 단체전에서는 옆 사람 때문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각개격파면 모를까. 그치만 요런 대규모 전투에서 각개격파까지 오면 이미 제대로 된 전투는 끝났다고 봐야지 ´_`= 그 자세 별 쓸모 없다는 이야깁니다ㅇㅇㅇㅇ 그리고 이 동작은 쓸데없이 좀 멋있음. 딱 절도! 원위치! 이래 되서 우왕 기사ㅋ 라는 느낌이라 귀족들도 괜히 거들먹거릴 때 한번 짠 써주는 동작임. 그런 선배기사들이 아니꼬와서 프렌 마음속의 반발은 더함.
그러던 어느날, 낮 훈련 끝나고 조용히 불려간 기사단장실에서 프렌은 입단시험 이후 처음으로 기사단장을 다시 만남. "시포 군, 검술 훈련에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네만." 무슨 말들을 어떻게 들었는지, 부드럽게 물어오는 알렉세이에게 처음에는 프렌도 저가 부족한 탓이라고, 열심히 훈련을 거듭해서 꼭 바로잡겠노라고 송구하다고 사죄함. 그래도 알렉세이가 거듭 묻자 잠시 망설이던 프렌은 자기가 느끼던 사실대로 눈새솔직돋게 말함. 제국 기사단의 정점인 기사단장 앞에서, 막 입단해 훈련을 받고 있는 어린 기사가 동작의 당위성이니 어쩌니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알렉세이가 순간 말문이 막힌듯 침묵하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림. 그러곤 당황하는 프렌을 두고 종자에게 연병장을 비워놓고 목검 두 개를 준비해놓으라고 말함. "각하?!" 사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프렌에게 따라 나오라 명령한 알렉세이는 기사단장 갑주 그대로 밖으로 나섬.
연병장 가운데서 종자가 건네온 목검을 집어든 알렉세이가 프렌에게도 검을 집으라고 말함. "예? 제가 어찌..." "허, 이 날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젊군 그래." "그게 아니라...!" "검을 집게, 시포 군." 마지막 말은 거의 명령조라서, 또 알렉세이의 말을 들으면 자기가 검을 집지 않는 것이 더 무례한 일인 것 같아 프렌은 마지못해 목검을 쥐고 뒤로 물러남. 먼저 덤벼오라고 말하는 기사단장에 다시 조금 머뭇거리긴 했지만.. 사실 기사단장과 싸우는 건 크나큰 광영이자 기회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제국의 정점과 싸워보겠어?ㅇㅇㅇ 천천히 각오를 다진 프렌이 검을 어깨와 수직으로 눕히고 알렉세이에게 돌격함.
동작도, 위력도 나무랄 데 없는 깨끗한 찌르기임. 속으로 칭찬하며 가볍게 프렌의 공격을 흘린 알렉세이가 다시금 휘둘러오는 프렌의 검을 막고, 자세 가다듬을 틈 주지 않고 그대로 검날을 얽어매 프렌의 목검을 떨어트림. "줍게." 별 감흥없이 알렉세이가 말을 던짐. 프렌이 재빨리 검을 주워듬. 다시 프렌이 공격해오자 알렉세이가 다시 막은 다음 그대로 검에 반동을 줘서 안쪽으로 검을 찔러넣음. 옆구리를 찔린 프렌이 이를 악물고 좀 더 버티다가 알렉세이가 목검을 쥔 손에 좀 더 깊이 힘을 주자 "윽," 소리를 내며 목검을 떨어뜨림. 간신히 주저앉아 한순간 막힌 숨을 콜록대는 프렌에게 알렉세이가 말함. "자네 패인이 뭐라고 생각하나?""동작이... 늦었습니다." "어떤 동작이지?" "검을 휘두른 다음, 다음 공격으로 연결하는 동작입니다." 프렌이 말하면서 입술을 깨뭄. 자기가 주제넘게, 기사단장 앞에서 실용성 운운했던 기본동작이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그 효용을 드러내고 있음.
물론 솔직히 말하면 이건 알렉세이가 존나 사기캐라서 그런 거임. 보통은 아무리 그래도 장검 길이나 이런저런 요소 때문에 내리치는 공격 막고 바로 파고들어 역공으로 연결하는 동작이 연속 공격하는 사람 동작보다 빠를 순 없음ㅇㅇㅇ... 알렉세이도 순순히 그걸 인정함. "물론 기사단 내에서의 대결에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무네." 자네가 말했던, 동작의 당위성에 대한 의견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러나 기사단은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전투가 아니라, 시민을 지키고 제도를 방위하기 위해 마물 격퇴를 그 목적으로 하는 무력집단임. 마물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고, 개중에는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사속도를 가진 마물도 많음. 그 동작은 그런 마물에 대비하기 위한 것. 천천히, 한순간 격렬한 대결 후에도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평온한 어조로 알렉세이는 계속 말을 이음. 그 때 새삼스럽게 프렌은 기사단장이 딱히 튀는 강세나 언성을 높이진 않지만 가슴 통에서 우러나온 차분한 목소리가 어렵잖게 빈 연병장의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느낌.
"자네와 몇몇 단원들의 반목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네." 반목, 이라기보단 평민이 기사단에 든 것을 아니꼽게 느끼는 귀족들의 일방적인 시비에 가깝지만. 프렌 쪽은 그런 쪽으로는 눈치를 잘 못챈달까 별로 상대를 하지 않지만 어쨌든 귀족들이 자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음. 기사단장에까지 그런 이야기가 들어간 것에 송구해 프렌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기사단장은 조용히 미소지으며 내려다 봄. "앞으로 공을 세우던, 벌을 받던 자네는 항상 남들의 주목을 받게 되겠지. 특히 자네의 작은 흠 같은 걸 그들은 결코 놓치지 않을 걸세. 사소한 언행 하나, 동작 하나라도 어긋나면 순식간에 물어뜯으려 달려들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허니 사소한 원칙이라도 어기지 않도록 조심하게. 또, 지금처럼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동작들, 규칙들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 굳은 얼굴로 대답하는 프렌을 보고 알렉세이는 다시 미소지음.
"그래도 그 의견은 제법 흥미로웠어." "예?" 감히 기사단장 앞에서 동작이 쓸데없느니 어쩌느니 말하는 기사가 있다니 말일세. 그 말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프렌이 그, 송구%*@)*%) 어쩌구 조알거리며 당황하자 다시 기사단장은 껄껄 웃음. 이렇게 아부나 여타 쓸데없는 변명 같은 거 없이 말하라면 말하라는 대로 곧이곧대로 솔직돋게 제 의견 얘기하는 부하가 이제껏 제 주변에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하면서 알렉세이는 앞으로도 자네 의견을 들으러 종종 부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 사라짐. 남겨진 프렌은 ?!??!? ?!??!? 함. 그래도 알렉세이와의 대결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죽어라 기본동작 연습해서 다음 훈련 때 귀족놈들이 찍 소리도 못할 만큼 완벽한 동작을 선보임. 그리고 그 이후 진짜로 알렉세이가 틈만 나면 프렌 호출해서 제국에 대해, 기사에 대해, 정책에 대해 종종 의견을 물어봄. 프렌도 성심성의껏 답변함. 좋은 공부가 됨과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프렌이 기사단장에게 총애받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줌. 그 이후로 점차 프렌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나 괴롭힘은 어느정도 사라짐.
본격적인 가르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저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원래 기사단장의 임무는 워낙 바빠서 사적인 대련은 물론 프렌에게 조금씩 시간 내주는 것도 알렉세이 본인이 상당히 신경써서 가능한 일임. 그 후로는 사적으로 단장실로 부르더라도 프렌의 견해를 가만히 듣다가 가끔 그 의견은 사실과 다르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라 하는 식으로 넌지시 조언을 해주는 데에 그침. 프렌 마음 속엔 이후의 많은 문답들보다도 그 한 때의 가르침이 깊이 남았음.
강하고 자애로운 기사단장. 거기다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서 트집잡기 좋아하는 귀족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이상적인 기사의 교본과도 같은 알렉세이에게서 프렌은 난생 처음으로 이상적인 성인의 모습을 발견함. 걷잡을 수 없이 거기에 단단히 매료됨. 기사단장과, 또 다른 평민 출신인 수석대장을 롤 모델로 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잘 지키고 부여받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사로 자라남. 알렉세이의 카리스마 자체가 남을 확 끌어당기고 거기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발휘되는 데다 + 롤 모델 + 존경 버프까지 더해져서 이 떄 프렌은 원칙이나 알렉세이의 명령이라면 별 의문도 없이 따르는 지경에 이름. 본편까지도 쭉 그 상태. 길드에 가 있던 슈반이 돌아와 그런 프렌을 보고 "새로 얻은 개가 마음에 드십니까, 각하." 하고 빈정거린 건 사족.
어쨌든 그런 원칙주의자에 꽉 막힌 프렌이 하나하나 지적을 시작하자 처음에는 가벼운 충고로 시작했....던 거 같지만 이건 뭐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잔소리 폭격이 되버림. 처음 한 마디 꺼냈을 때부터 유리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 "흐응?" - 한껏 자기의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지만 프렌은 눈치 못채고 계속 읊어댐(사실 눈치챘다 해도 별 차이는 없었을 테지만.) 거기다가 유리가 그냥 적당히 알아듣는 체 했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유리도 슬슬 빡쳐서 유리 특유의, 사람 속을 긁는 노골적으로 적당히 대답하는 척, 딴청부리는 척을 했기 때문에 프렌도 짜증이 나기 시작함. 알아들을 만한 녀석이 왜 그래? 너 도움되라고 말하는 건데!! 유리도 맞받아침. 무슨 도움!! 네깟 놈의 젠 체 하는 충고같은 거 필요 없거든? 이런 식으로 전투해도 네녀석 정도는 작신작신 패줄 수 있었다! / 뭐가 어째?!"어디, 시험해보자구." 내 기술이 효과 있는지 없는지. ㅇㅋ? 마침내 완전히 열이 오른 유리가 몸을 일으키자 프렌은 짜증난 와중에도 잠시 머뭇거림. 퍼뜩 내일의 추격에 대비해서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거임. 거기다 대고 유리가 역시 말 뿐이라느니, 제국 기사들 수준을 알만하다는 둥 빈정거리자 모욕을 참지 못한 프렌이 잔뜩 등을 긴장시키면서 따라 일어남. 기사단 얘기가 나오자 눈빛이 변한 프렌이 천천히 바닥에 놓아둔 제 검을 주워들고 일어서는 것을 본 유리가 입꼬리를 길게 말아올림.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벌써 진작에 해가 진 터라 주위가 온통 새까맘. 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주변을 둘러싼 두툼한 어둠에 눈이 익으라고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면서 둘은 마주 본 자세에서 잠시 대기함. 그래봤자 달빛도 없는 밤이니 간신히 어른어른 비치는 그림자랑 비반사 처리 하지 않은 날붙이가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가끔씩 어둠 속에서 번득거리는 것으로 대충 서로와의 거리를 가늠할 수 밖에 없음. 어느 샌가 벌레 우는 소리가 사라져있음. 새까만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건 시간감각마저 먹혀버리는 거 같음. 비온 뒤의 화사한 숲 공기 속에서 검을 쥔 손끝부터 등줄기, 목덜미 바로 위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느껴져 몇차례 가벼운 소름이 돔. 어두워서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녀석이 있음. 저기, 바로 저 앞에.
눈 앞을 가득 채운 거대한 어둠 앞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며 프렌이 한발짝 더 앞으로 나아감. 잔뜩 예민해진 피부로 혹시 유리가 움직이면서 밀어낸 공기가 와닿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듬.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웠다 해도 그런 것까지 느낄 순 없겠지만. 순간 잡힐 듯 거리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가 다시 사라짐. 어둠 속에 도사린 것. 그 어둠이 마치 뒤집어 쓴 갑옷 같은 것이 되어 눈 앞 어딘가에 있을 유리의 존재감을 몇 겹씩 덧칠하는 것을 느끼면서 프렌은 마치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그 속에서 미세한 상대의 기척을 잡아내려고 애씀. 그리고 유리도, 자신과 같이 집요하리만큼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혹시라도 포착될 자신의 기척을 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 그 순간은 시간도 멈춘 듯 해서 싸움의 원인도 목적도 잊었음. 그런게 있었던가? 눈 앞에 길다란 검날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분명히 보여서 겨우 아슬아슬하게 받아쳤더니 저 쪽에서 칫, 하는 소리를 내며 물러남. 그 쯤에 있으려니 생각하고 휘두르긴 했지만 진짜 맞으리라곤 생각치 못했고, 그걸 프렌이 받아치리라곤 더더욱 생각치 못한 것 같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같은 것을 잠시 듣다가 그 것이 제가 내뱉는 숨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프렌이 흠칫 놀래서 다시 숨소리를 죽임. 청각과 촉각에만 의존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들이마시는 제 모습이 마치 사람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된 것 같다고, 거의 숨을 멈추다시피 소리를 죽인 프렌이 검을 고쳐쥠. 멀리서 밤새 우는 소리. 순간 한껏 낮췄던 자세에서 재빠르게 도약해서 유리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위치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음. 챙, 하고 검 끝에 감각이 걸림.
저가 보이지도 않는 주제에, 막기 힘든 어려운 각도로만 매섭게 파고들어오는 검을 반자동적으로 막으면서 유리는 이녀석을 어느 정도 알겠다고 생각함. 단정한 얼굴에 잘 차린 각잡힌 차림이며 자세를 하고 남들 앞에 서서 바름과 원칙을 말하는 그 이면에, 깜짝 놀랄 정도로 날뛰는 뭔가가 숨어 있음. 그렇다고 표면의 모습이 거짓이나 가장은 아님. 그저 그 두 모습이 함께 존재하고 있을 뿐임. 한쪽에 비해 다른쪽은 잘 감춰져있지만. 그건 뭐지. 묻듯이 중얼거렸지만 유리는 이미 어느 정도 그 대답을 알고 있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고아 시절,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마을을 떠도는 동안 그 비슷한 것을 유리도 제 안에서 마주한 적 있음. 슬픔과도 닮은 상실감, 분노, 안타까움 같은 것. 비애. 그것은 때에 따라 가슴 속이 갑갑하리만큼 속에서 날뛰었다가, 이내 숨을 죽이고 몸을 웅크려 가슴 속을 묵직하니 답답하게 했음. 그리고, 지금도. 잠깐 몇년동안 형제 비슷한 것이었다가 점점 멀어져버린 은인의 손자를 떠올리지만 다시 부딪쳐오는 검이 상념 끝을 잘라내감. 명백하리만큼 날카로운 적의. 어둠 속을 내달리는 감정. 이미 유리는 프렌이 제국에서 마냥 곱게 자란 기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챔. 얌전한 도련님 속에선 이런 걸 찾을 순 없음. 서로의 검끝만이 보이는 것의 전부인 어둠 속에서 오히려 그 것은 명백하게 느껴짐. 그동안 눈치채이지 않은게 용할 정도로 얇은 거죽 아래서 사나운 짐승이 그르릉거리는 것을 들으며 유리는 씩 웃음. 이 순간이 조바심날 정도로 마음에 듬. 그건 그거고 빡치는 건 또 빡치는 거지만.
이건 뭐지. 유리의 형체.. 라기보단 스스로 머릿속에서 그린 잔상 같은 것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프렌은 자신에게 물어봄. 이상한 느낌이 듬. 유리와 함께 있으면 이제껏 생각했던 자신과는 좀 다른 게 되버리는 거 같음. 평소에도 동료들끼리의 대련이나 기술 훈련같은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스스로 놀랄만큼 흉폭하고 자극적임. 어디서 이런게 숨어있었을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임. 잔소리? 다른 사람한테는 해본 적도 없음. 동기들끼리 주고 받는 건 단순한 기술이나 자세에 대한 품평과 조언에 가까움. 남들에게 솔직하게 화내고 분노한 적도 없음.
남들이 부딪쳐오는 복잡하고 미묘한 적의는 프렌에게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그 정체도 불분명한 흐릿한 형체로 보임. 그나마 프렌이 낌새를 챌라치면 잽싸게 도망가고 물러나버림. 어쩌자는 거지. 싸우고 싶은 건 아닌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끊임없이 웅성대는 그들을 보며 프렌은 항상 궁금했었음. 그러나 유리가 전해오는 의사는 비교적 분명함. 싸우자. 검 들어. 발끈해 검을 들긴 했지만 사실 유리가 끌어다 쓴 기사단이 어쩌구 하는 것도 결국 저를 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한 도발에 불과하다고 생각함. 눈치가 부족한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저녀석은 감정 숨기는 데 능숙하고, 익숙하다는 생각이 듬. 당그레스트를 떠나기 전의 밤에도 느낀 것처럼. 진짜 유리의 적의는 좀 더 차갑고 차분할 거임.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음. 봐, 지금 휘둘러 오는 검에도 분노보다는 장난기나 가벼운 즐거움 같은 게 느껴지지. 그렇다고 영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곤 말하기 어렵지만. 기술에 대해 이야기해준 게 그렇게 마음에 안들었나? 그치만 고치면 훨씬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올 텐데.
한동안 검을 부딪치다가 잠시 거리가 벌어진 틈을 타서 유리가 검을 바닥에 던져 저글링함. 유연한 금속이 마른 나무에 가볍게 튀어 오르는 소리. 프렌은 휘두르던 검을 쥐고 뒤로 한 발 물러남. 일반적인 검술이라면 모르겠는데 유리의 기술은 워낙에 변칙적이라 눈으로 빤히 봐도 그 궤도를 따라가기 어려움. 검을 튀거나 하다니 완전 첨 보는 기술 아님? 거기다가 지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암흑 속임. 외려 익숙한 기술에 이것저것 변형을 넣었기 때문에 몸에 익힌 버릇처럼 정석대로 대응하다간 크게 말려들 우려도 있음. 프렌은 거의 야성의 감각??으로 막아내고 있는 거ㅇㅇㅇ. 변형 원리도 상당히 복잡한 거 같음. 썩 실용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동작 하나하나가 변칙적이고 거칠어서 호쾌한 맛이 있음. 이쯤이면 찌르기가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발차기가 날아와 당황하기도 하고 공중에서 방향을 바꿀 때도 있는 것 같고..
처음에는 제국 것과 유사한 길드 검술의 하나인가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닌거 같은게, 무술은 기본적으로 전투,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니만큼 적은 힘으로 큰 효과를 노리게 됨. 애초에 만들어져 전수될 때부터 동작은 간결하게 하고 위력은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이 짜여지기도 하고, 또 다소 효율이 좋지 않은 기술은 잘 안쓰이게 되거나 사람들 사이에 전해내려오면서 쓸데없는 동작은 없애고 좀 더 매끄럽게 수정하는 식으로 진행됨. 그런데 유리가 쓰고 있는 검술은 집단적인 규모에서 가르쳐지기엔 효율성이 없음. 동작도 너무 크고 다양한데다 그 변형에는 일정한 원리도 없는 거 같음. 의미없는 동작도 꽤 있음. 어떻게 보면 거의 되는 대로 휘두르고 있는 거 같기도 함(=정답).
그런데도 기술이 먹혀드는 건 순전히 유리 개인의 전투 센스가 뛰어나서임. 여러가지 장식기나 페이크를 너무 많지도, 또 적지도 않게 적절히 섞어 상대에게 혼란을 주고 빈틈을 유도함. 이런 식으로 개인의 역량에 크게 좌우되는 기술을 집단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 리 없음. 이런 기술을 단체로 쓴다면 당연히 그 부대는 제대로 된 전투는 커녕 쓰러트리는 적보다 아군의 검에 잘못 맞아 쓰러지는 병사가 많을 거임. 그런데 일대 일에서는 유리 자신의 역량과 합쳐져 놀랄만큼 효과를 드러내고 있음. 특히 이런 식으로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익숙한 전투감각에만 의지해 검을 휘둘러야 하는 상황에서는. 지금도 제 경험으로는 말도 안되는 방향으로 찔러들어오는 검을 쳐내며 프렌은 생각함. 이런 걸 해내는 놈은 기술에 무진장 소질이 있는 전투광이거나, 아니면 지독히도 규칙이나 얽매이는 걸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 같음. 물론 유리는 둘 다임ㅇㅇㅇㅇ
유리도 좀 감탄함. 분명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찔러넣었는데 다 받아치네?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실은 이녀석 앞 보이는 거 아냐?
거기에 더해 말하자면 유리는 프렌이 기술의_정석.jyp 같은 걸 읊어댔기 때문에 오기가 더 생겨서 일부러 평소보다 페이크도 더 넣고 변형도 복잡하게 해서 화려하게(...?!) 해치우고 있음. 특히 좀 전에 프렌이 지적한 검날 방향 재빠르게 고쳐쥐기를 유리는 여태껏 저글링으로 대신하고 있었는데 프렌이 뭘 지적하고 있는지 알아채자 그깟 거 네놈한테 안 배워도 난 잘하고 있거든?'ㅅ'-33 요 상태가 되어 더욱 더 파박박거리며 검을 튀김.
안 그래도 평소 시각과 전투감각에 의존하던 것을 청각과 촉각으로 대신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전투하는 건데 복잡한 기술 휘두르는 쪽이나 그거 파악하고 막는 쪽이나 지치긴 마찬가지임. 게다가 이 상대놈은 저와 실력도 비슷해 절대 지기 싫은 라이벌이기까지 함ㅡㅡ; 그런데도 또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숲이 계속 어두우니까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싸웠으니 둘 다 완전 진이 쫙 빠졌는데 첫날처럼 옆에 다른 사람도 없이 둘 뿐이고 다음날 임무 핑계 대고 도망칠 수도 없어서 - 할 수 있었다 해도 당시엔 생각도 안나고 둘 다 그러고 싶지 않았겠지 - 아예 이를 악물고 오기와 정신력으로만 검을 휘두름. 이쯤 되니 아예 싸운 이유도 모르고 싸움. 그러다가 더 이상은 둘 다 검을 제대로 쥘 수도 없는 지경까지 와서야 겨우 전투를 그만두는데 그때가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간. 서로 숨만 학학 대며 노려보다가 서로 상태 파악한 다음에야 대충 자리 정돈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져 잠듬. 물론 그때까지도 너가 먼저 눕네 내가 먼저 눕네 서로 눈치 살피고 쭈뼛쭈뼛대다가 아예 서로 등을 돌려 누워 잠드는 순간까지 더 싸울 힘이 없다는 거에 이를 박박 갈다가 거의 반쯤 기절한 거임..ㅇㅇㅇㅇ...
다음날 아침, 아니 점심 때쯤. 뭔가가 계속 성가시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간신히 눈을 떴는데 저 끝에서 토끼가 풀과 함께 유리 머리카락을 질겅질겅 뜯고 있음. "?!" 유리가 놀라서 몸을 일으킴. 토끼가 먹어서 머리칼 끝이 조금 뜯겼음. ㅡㅡ... 저 쪽에선 프렌이 잠결에 자꾸 제 얼굴 위를 종종거리고 뛰어다니는 새를 쫓으려 헛손질을 하고 있음. "우응..." 제대로 손이 닿지 않아 새가 도망가지 않으니 몇번 고개를 흔들어보기도 함. 아, 다람쥐 추가. 유리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봄. 숲의 틈새로 들어온 환한 햇볕이 나뭇잎새 모양으로 잔 풀이 자라난 바닥에 어룽어룽 모양이 짐. 여기 어디더라.. 유리가 깨어나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데도 근처에 모인 작은 동물들은 달아나지 않음. 애초에 동물들이 모여드는 널직한 공터인데다가 이 부근은 인적이 아예 드물어서 동물들도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는 거 같음. 유리도 뭔가 이상한 광경이라는 걸 느끼는데 잠에 취해서 파악이 늦음. 그때 "삐삣!!" 하는 소리와 함께 계속 헛손질치다가 엉겁결에 제 위에서 성가시게 굴고 있는 새를 잡아챈 프렌이 그 소리에 저가 되려 놀래서 일어남. 일어나자마자 자기가 손에 쥔 게 뭔지 확인하고 ......?! 한 얼굴로 제 쪽을 보는 프렌에게 유리는 대충 물어봐줌. "너 그거 뭐냐." "....아침밥..?" 손 안에서 퍼득대는 새를 멍하니 본 프렌이 얼빠진 목소리로 한 템포 늦게 대꾸함.
그 후 진짜 프렌이 잡은ㅋㅋㅋ 새와 근처의 토끼 등으로 늦은 아점을 먹는 둘의 분위기는 조금 미묘... ´_`어제 싸우면서 서로 검 뿐만 아니라 간간히 네 검술은 너무 틀에 박혔네, 넌 잔기술이 많네 하는 식으로 말다툼도 주고받은 터라 아무래도 그 전처럼 가볍게 훌훌 털어버리긴 힘들었음. 이래저래 기사단/길드에서 어느 정도 해먹던 녀석들이고 또 서로 실력도 엇비슷하다 보니... 사실 생각해보면 상대의 의견도 영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무래도 수용 정도의 문제인 것 같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예 다른거ㅇㅇㅇㅇ 뭐 이 놈한테 지적받는게 짜증나! 요것도 있고. 며칠동안 같이 다니면서 대충 템포며 성격 등이 나름 꽤 비슷한 것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데서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구나 싶음.
거기다 어제 전투 + 그대로 맨바닥 크리로 근육통이 뙇!!!!!111 삭신이 떫!!!!!!!!11 결과적으로 동작이 상당히 굼떠짐. 유리가 했으니 요리 맛은 꽤 괜찮은데 서로 할 말도 없고 대화도 없이 팔 한짝 들어올리기도 버거워 그냥 대충 기계적으로 음식을 들어올려 입에 넣고 씹는 식으로 식사를 마침.밥 먹고 나서는 다시 심플하게 추격전. 가기 전에 간단하게 기지개 펴가며 몸 풀었음.
좀 더 가다가 드디어 범인이 남긴 것 같은 흔적??을 발견함. 왜 흔적?? 이냐면 어째 조금 어중간해서ㅇㅇㅇ 대충 보면 산짐승이 돌아다닌 거 같은 흔적같기도 하고, 또 그전에 일부러 흔적 남겨서 유리+프렌 꼬여낸거 보면 이거 또 함정인가 싶기도 하고... 지나간 자취긴 자췬데 완전히 인위적이라고 하기 좀 미묘한?? 정도라고 생각됨. 잘 모르겠지만 일단 대비는 하자, 싶었던 프렌이 유리를 보고 유리도 고개를 끄덕임. 걷는 속도와 발소리를 죽이고, 얼마 더 걸어가자 저 쪽의 나무 귀퉁이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짐. 이번에는 꽤 신중한 태도로 주위를 살핀 둘이 발 밑도 잘 봐가며 걸음을 옮기자 거기엔 범인이 있었음. 어떤 꼴이었냐면.. 양 발과 양 손을 늪에 처박은 모양새로ㅇㅇㅇㅇ.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서 당황한 유리+프렌은 일단 잠시 멈춰섬. 와중에 범인이 그런 둘을 발견하고 허우적거리는 통에 점점 더 진창에 빠져듬. 뭐야 저거 뭐하는 거야? 마침내 가슴 바로 아래까지 늪에 삼켜진 범인이 더는 안되겠는지 급박하게 소리침. "사, 살려줘!" "......." "......" 한순간 셋 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감돔.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살려야하니까ㅇㅇㅇㅇ 둘은 일단 늪 가까이로 접근함. 함정이라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지만 일단 다가가면서 꼼꼼하게 주위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음. 별 거 없음. 아무래도 진짜 빠진 거 같음. "진짠거 같은데?" "ㅇㅇㅇㅇ..." 거참.. 상황이 급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유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함. 프렌이 주위를 둘러봐서 기다란 나무줄기 같은 걸 구해옴. 이제 거의 목 아래까지 빠져든 범인이 뭐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름. "%()@)%(_!!" 대충 빨리 와달라는 얘기인 거 같음. 프렌을 도와 늪으로 나무줄기를 가라앉지 않게 길다랗게 밀어넣으면서 유리가 피식 웃음. 대충 상황보니까 이번에도 늪을 이용해서 추격자 따돌리려고 했던 거 같은데 되려 자기가 빠져버렸나 봄. 거 그러니까 착하게 좀 살지 꼭 이딴 방법을 써서..ㅇㅇㅇㅇ... 바로 그 수법에 당할 뻔 했던 둘은 영 찜찜하고 미묘한 기분이지만 그래도 나무줄기를 밀어넣어서 범인이 가라앉지 않도록 해줌.
간신히 나무줄기를 붙잡은 범인이 줄기를 끌어당기자 그대로 끌려옴. 우왕 좋은 낚ㅋ시ㅋ 온 몸에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데다 뒤는 늪이니 도망칠 염려는 없을 거 같음. 나무를 끌어안고 겨우 살았다는 듯 축 늘어져 숨을 돌리는 범인을 보고 프렌은 음^^; 하고 유리는 ㅡㅡㅋ...함.이제 더는 도망칠 생각도 기운도 없는 거 같지만 일단 확실히 해두자는 차원에서 둘은 범인을 포박함. 힘이 다 빠졌는지 별 저항도 안함. "괜찮습니까? 서류는 어딨습니까?" 대충 마른 땅에 꿇어앉힌 범인에게 눈높이를 맞춘 프렌이 묻자 기운없는 와중에도 범인이 "너이기사놈%(@)%_!!!" 하고 소리지름. 한숨을 쉰 프렌이 덤덤히 범인 품을 뒤지기 시작함. 범인은 저항하려 하지만 묶여있는 상황에서 별 시원찮은 발버둥이 안나옴. 유리는 뒤에 서서 그런 둘을 팔짱끼고 지켜봄. 마침내 품 속에서 뭔가 찾아낸 프렌이 바스락거리는 문서 몇 장을 꺼내듬. 단단히 봉해져있음. 끄트머리가 진흙인지 뭔지로 조금 얼룩진거 빼곤 상태도 양호한 거 같음.
그때까지도 저항이 시원찮던 범인이 프렌이 제 품속에서 문서를 골라내자마자 거세게 발버둥치기 시작함.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란 듯 서류에서 눈을 떼 범인을 바라보는 프렌과 팔짱낀 채로 눈을 가늘게 뜨는 유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묶어놓은 밧줄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범인이 버둥거리며 소리 지름. 원래 발음이 좀 새는 것 같은데다 횡설수설 빠르게 내지르는 말이라 세세한 거까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충 그게 어떤 건인지는 아는 거냐, 니들은 다 놀아나고 있다, 알렉세이는 제정신이 아니라 미친 놈이다, 제국 놈들은 싸그리 다 죽여버려야 한다, 그딴 개수작 빌어처먹을 새끼들 뭐 이런 얘기임. 간간히 유적이 어쩌고, 고대글자가 어쩌고 읊어댔지만 일반인이 듣기에 영 신통치 않은 것들이었음. 그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프렌이 다시 고개를 돌려 범인을 바라보자 그 기세에 주춤한 범인이 마치 목을 졸린 것처럼 입을 다뭄.
진짜 저녀석이 한 대 치는 거 아닌가 싶었던 유리가 슬쩍 프렌 눈치를 살피지만 프렌은 조용히 문서를 갈무리해 제 품 안에 넣었을 뿐임. 제 말이 전혀 먹히지 않고, 유리가 뭐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어 잠시 기대에 찬 눈으로 유리를 보던 범인도 유리가 완전히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힘없이 고개를 떨굼.
"괜찮냐?" 범인을 두고 돌아선 유리가 프렌에게 대충 말을 던짐. 프렌은 별 표정없는 얼굴로 ㅇㅇㅇㅇ함. 부외자인 자기가 들어도 범인의 언사는 상당히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내용이었음. 처음에는 뭔가 말하려는 게 있는 거 같았지만 끝으로 갈 수록 제 감정에 치우쳤는지 제국과 기사단 관련해서 차마 글로 늘어놓을 수 없는 욕까지 서슴치 않았던 거임. 특히 알렉세이에 대해 악의에 찬 욕설들이 많았음. 그 알렉세이라는 녀석, 높은 사람인가? 유리는 고개를 갸웃함. 그런 유리를 보고 프렌은 다시 입을 염. "알렉세이님은 기사단장이셔." "아." 궁금해하던거 티 났냐? 유리는 입맛을 쩝 다심. "상관없어. 별 근거도 없는 말들이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그 태도에 여태껏 프렌이 살아온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거랑, 그 와중에 기사단과 알렉세이에 대한 신뢰가 진하게 묻어나서 유리는 음..함.
잠시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던 유리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 가슴께로 흐르자 프렌이 고개를 저음. "문서내용은 극비야. 알려줄 순 없어." "아니, 내 얘기가 아니라." 물론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넌 어떻냐고. 너도 문서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던데. 나야 부외자지만 넌 기사단원인데 상관없지 않나? 신경쓰이는 말까지 들은 처지고. 뒷 내용은 그렇다쳐도 범인이 처음에 말한 문서내용이니, 유적이니 했던 건 꽤 뭔가 있는 것도 같아서 호기심을 가져볼 법도 함. 그 말에 프렌이 천천히 고개를 저음. "아니, 각하가 그러지 않으실 분이라는 거 알아." "그래..." 유리는 낮게 대꾸함.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 눈에 납득과 또 다른 뭔가가 가라앉는 찰라를 눈치챘지만 프렌은 별 말하지 않았음. 얼핏보면 유리는 안하무인격으로, 저 좋은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임.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는 다름. 옹졸한 것과도 다르게, 단지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다고 프렌은 생각함. 이를테면 배려같은 것. 눈치가 빠르고, 그러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남이 눈치채지 않게 배려하는 것에 능숙함. 그러면서도 제 감정은 쉬이 드러내지 않고 한쪽으로 치워두는 것도. 함께 지낸 며칠 동안 번번히 그런 걸 느꼈지만 어쩌면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간 적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듬.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런 배려나 섬세하게 신경쓰는 건 쥐약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의 사고방식은 따라가기가 어려웠음. 눈치가 부족하다는 것. 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던 것 같음. 아예 자신은 사고회로 자체가 남들과는 영 딴판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음.
유리라면 그런 제 마음씀씀이를 부러 거친 태도로 위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듬. 쑥쓰러워하고 있는 걸까. 찬찬히 살피면서 필요할 때엔 모르는 척 손을 내미는 그 상냥함은 싫지 않음. 다만 프렌은 조금 안타깝다고 느낌. 어젯밤의 유리는 거칠고, 자유분방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도발적이었음. 그런 유리에게 말려들어 프렌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본성을 끌어내어진 기분이 들 정도임. 어느 쪽이냐고 하면 그게 유리의 본 모습일 터. 당장 쓰는 기술에서도 그런 면이 드러나는데 생각해보면 유리는 길드 내에선 외려 그런 제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는 생각이 듬. 시덥잖은 무뢰배 한량같은 모양이나 하고 있고. 쓸데없는 짓 운운하던 소년의 말에 별 반 대꾸도 없이 고개를 돌렸던 유리의 얼굴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굳게 다물렸던 입매만은 생생하게 기억남. 숲의 어둠 속에서 날카롭고, 변화무쌍하게 찔러들어오던 칼날들. 그런 것을 어딘지 안쓰러울 정도로 단지 속으로만 억누르고 있는 것. 그건 무엇 때문일까.
유리는 바로 여기가 프렌과 자신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느낌. 피차 서로 속에 묻어둔 감정이 많은데도 그런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프렌은 남을 믿고 자신이 바라보는 곳으로 똑바로 나아감. 믿는 것에 한치 의심도 하지 않는 것. 그것에 망설임없이 몸을 던지는 것. 그 마음 속에 그늘이라곤 한 점 없다는 듯이. 마치 더러움이나 역경을 모르는 것처럼. 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저와 꼭 닮은 꼴인 프렌의 태도는 유리에게 다소 질릴 정도로 눈부시게 느껴짐. 언제라도 가슴속에 남아 발목을 늘어 붙드는 비애. 그런 것을 두고도 너는 나아가는구나. 저만치, 빛 내리는 먼 곳으로.
짧은 의논을 거쳐서 문서를 포함해서 범인의 신병까지 기사단이 맡기로 함.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범인은 제국에 협력하기 훨씬 전부터 길드를 나간 상태였고 또 기사단 입장에서는 기밀인 문서내용을 알고 있는 범인을 섣불리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일 거임. 여태까지의 프렌 태도를 보니 아무리 죄인이라도 부당한 대우는 하지 않겠다 싶어 범인을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프렌에게 유리는 고개를 끄덕여줌. 해리에겐 숲에서 놓쳤다는 정도로 말해둘까. 기사단이 얽힌 문제 자체를 달갑지 않아하는 눈치였으니 그 말을 들으면 외려 더 좋아할 것도 같음. 돈에게야 솔직하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범인을 데리고 또 며칠을 걸어나와 숲을 빠져나오자 숲 입구에서 기사단 애들이 대기타고 있다가 일행을 반김. 남은 본대와 소디아도 와 있음. 함께 숲에 들어갔던 애들은 이곳저곳 까지고 다치긴 했지만 비교적 멀쩡한 모양새로 대장님어허더허ㅓ어허유ㅠㅠㅠㅠ하고 + 본대애들은 부대장님이 행군 빨리하라고 때렸슴다 ㅠㅠㅠㅠ우우ㅠㅠㅠㅠ해서 환영에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는 걸 따뜻하게 미소지은 프렌이 유리를 돌아보며 입을 염. "여기서 작별이네, 유리." "당그레스트엔 안들를거냐?" 범인도 잡았겠다 당그레스트에 더는 남은 용건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리는 그렇게 물어봄. 예상대로 프렌은 고개를 저음. "우리가 가면 다들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유리는 어깨를 으쓱함. 더는 말하지 않은 프렌이 몸을 돌려 기사단쪽을 향함. 잘 정렬한 부대와 함께 소디아가 단정하게 서서 경례를 보내고 있음. 몇 발짝 걸어가다가 프렌이 다시 뒤를 돌아봄.
"유리." "?" 잠시 생각을 고르듯 뜸을 들인 프렌이 곧 정했다는 듯 입을 뗌. "세상은 넓어, 유리." 여기 당그레스트나 혹은 토르바키아보다도. 세상으로 나와라. 저를 보는 프렌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유리는 알아차림. "....." 별 대꾸없이 묵묵히 제 눈을 마주보는 유리를 잠시 응시한 프렌이 이번에야말로 진짜 작별이라는 듯 미련없이 절도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기사단으로 돌아감. "세상이라...." 떠나는 기사단의 뒷모습을 보며 유리는 나지막히 중얼거림. 프렌은 더는 아무 말 덧붙이지 않았지만 그 말이 꼭 이대로 알트스크에 머무를지, 혹은 다른 길이 있을지 고민하며 단지 방황하고 있었던 자신을 짚는 것 같아서. 하여간 끝까지. 지기 싫은 녀석이야.
기사단의 모습이 점차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유리가 "그럼 나도 돌아갈까.." 함.
숲에서 빠져나와 당그레스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유리가 서 있는 숲 입구와 별로 멀지 않은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림. 거대한 곤충 날개짓소리와 숲의 두터운 나뭇가지가 한꺼번에 후두둑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낮은 그르렁거림같은 소리가 섞여남. 또 누가 위험에라도 처한 게 아닌가 싶어 잠시 머리를 긁적인 유리가 재빠르게 소리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겨봄. 큰일이 아니라면 잠시 도와주고 돌아가도 될 것 같음. 소리나는 방향으로 한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소리는 좀 더 거세짐. 두터운 키틴질 껍질에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치는 특유의 볶은 콩 튀는 것 같은 소리. 낮고 격렬한 짖는 소리. "....개?" 순간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름. 혹시. 마침내 소리의 근원지로 가까워진 유리가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제침.
있음. 며칠 전 프렌과 함께 발견했던 까만 개임.전투는 이미 끝난 뒤인지 유리가 서 있는 바로 옆 쪽에 다 부러진 나뭇가지 밑에 지금도 경련하듯 간간히 날개를 꿈틀거리는 커다란 곤충마물이 보임. 다리 관절은 거진 다 부러져 끊어져있고 딱딱한 등껍질에는 온통 자상으로 그득함. 마물이 너덜너덜한 얇은 속날개 피막을 몇번 휘저어봄. 이미 바람을 움킬 수 없는 날개가 단말마처럼 경련하다가 이윽고 축 늘어짐. 개의 상태는 그보다는 좀 양호함. 어디까지나 마물에 비해서라는 소리지 저와 프렌이 치료해줬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제 피와 곤충 체액을 뒤집어 써서 빳빳하던 털이 엉망이 되었음. 그렇다 해도 당장 죽을 것 같진 않음.
잠시 숨을 고르는 것처럼 앉아있던 개가 몸을 일으킴. 다리를 다쳤는지 걸음걸이가 불안정함. 저 몸을 하고 어딜 가려는거지. 유리는 잠시 개를 지켜봄. 부러져 쓰러진 나무가지에 거대한 곤충의 고치같은 것이 엮여있음. 그리고 그 안에 삐죽 튀어나온.. 신발. 가죽을 무두질하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유리는 반사적으로 개 쪽으로 달려감.온 몸을 단단히 동여맨 하얀 체실을 대충 끊어내고 나니 사람의 형상이 드러남. 이미 죽었음. 죽은지 3, 4일 되었을까. 차림새로 보건데 무인은 아니었을 것 같음. 죽는 순간까지도 숲의 지도인지 뭔지를 손에 꼭 쥐고 있음. 개는 유리가 하는 모양을 가만히 보더니 이윽고 드러난 시체의, 지도를 움켜쥔 손에 다가가 가만히 머리를 부빔. 유리는 순간 숨이 죈다고 느낌. "...네 주인이었나." 개는 아무 대꾸 없이 계속해서 제 머리를 죽은 손에 가져다 댐. 그래. 쓰다듬을 받고 싶었구나. 내가 아니라 네 주인의 손에.
유리는 개를 도와 시체를 수습해줌. 당그레스트로 데려갈까 했지만 유리 혼자선 무리임. 개도 딱히 그걸 원하는 거 같진 않음. 단지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싸웠다는 느낌임. 개가 코를 킁킁하더니 주인의 주머니에서 작은 브로치 같은 걸 골라냄. 개목걸이에 달렸던 것 같음. '라피드'. 네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컹, 하고 짖음. 이건 긍정의 뜻. 상대는 개인데도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 듬. 유리가 브로치를 들여다보는 걸 잠시 보다가 라피드는 다시 주인의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냄. 기다란 곰방대임. 새것은 아니어보이지만 신경써 관리했는지 담배통이 반질반질함. 코 끝으로 가만히 곰방대를 밀어내던 라피드가 곰방대를 입에 뭄. 그 모습이 썩 잘어울린다는 생각도 듬.
근처에 구덩이를 파 주인을 묻고 나서 둘은 잠시 침묵함.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죽은지 3, 4일이라면 실종된지는 그보다 더 됐을 텐데 이 근처로 사람 찾는 의뢰를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음. 인적이 드문 숲이라 그런 의뢰라면 화젯거리 정도는 되었을 법도 한데. 게다가 유적길드같이 줄곧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가족을 갖지 않고 평생을 제 일에만 천착하는 부류가 많음. 일단 유족을 만나면 전해둘 유품 몇 개 정도는 챙겨놨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이 물건들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음. 그리고 저 라피드도. 제 몸 길이와 비슷한 곰방대를 물고 주인이 묻힌 흙더미를 바라보고 있는 라피드에게 유리는 조용히 말을 검. "따라올래?"
그렇게 묻긴 했지만 유리도 별 확신은 없었음. 주인의 원수를 갚겠다고 큰 상처를 입고도 숲을 떠돌았을 정도이니만큼 이대로 주인 무덤 곁에서 생을 마칠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름. 유리는 어느새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라피드를 대하고 있었음. 그 말에 라피드가 고개를 들어 유리를 올려다보더니 컹, 하고 낮게 짖음. 또, 긍정. 저를 올려다보는 그 태도에는 전과 같은 까칠함이 없어서, 유리는 제가 상처를 치료해준 것보다 주인을 매장하는 것을 도와준 것이 라피드의 호의를 샀다는 것을 깨달음. "그래." 손을 뻗어 라피드를 쓰다듬으려 하다가 유리는 멈칫함. 분명 개이지만, 이녀석은 제 종족을 초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듬. 그런 라피드를 보통의 개 대하듯이 쓰다듬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쓰다듬는 대신 유리는 라피드의 어깨를 툭툭 쳐줌. 크응, 그런 유리를 안다는 듯 낮은 소리를 낸 라피드가 입에 문 곰방대의 무게에 가끔 휘청휘청하면서도 야무지게 앞서 걸어 가기 시작한 유리 옆으로 따라붙음.그리고 당그레스트로 돌아간지 수년 후, 라피드님은 당그레스트 거리의 모든 개들을 평정하고 개들의 일찐이 됨.
제국으로 돌아간 프렌 소대는 곧바로 기사단장을 알현함. 당초 지시대로 프렌에게 직접 서류를 양도받으며, 넘겨받은 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프렌과 똑바로 눈을 마주본 알렉세이는 변함없이 다정하게 미소지음. "수고했네. 내 자네 소대의 공은 잊지 않지." 제 할일을 했을 뿐이라고, 당치 않다고 거절하는 프렌을 타일러 소대장과 부하들에게 약간의 금전적 포상과 휴가도 내렸음. 지금의 보상은 앞으로 제국을 위해 더욱 더 큰 일을 할 자네들에게 돌리는 격려라는 알렉세이의 말에 프렌은 더 이상 아무말 하지 못하고 감격한 태도로 절도있게 절하고 물러남.
문이 닫히자 알렉세이는 책상 한쪽에 내려놓은 서류 위로 시선을 던짐. 범인에게 넘겨받은 후 한치 망설임없이 소중히 품 안에 간직한 채로 대륙을 횡단한 그 서류들은 처음 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단히 봉해져있음. 알렉세이는 가만히 그 인장을 쓸어봄. 그 때, 커튼 뒤에서 '밤새 우는 소리'가 들림. 알렉세이는 낮게 중얼거림. "슈반." 커튼 기둥 속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던 슈반이 모습을 드러냄."그는 서류엔 눈길도 주지 않더군요." 뭐라더라, '우리 각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하던가. 슈반 특유의 무심한듯한 말투가 어딘지 빈정거림을 담고 있다고 알렉세이는 확신함. 그 말 그대로.
범인이 도망쳤을 때 슈반, 아니 레이븐은 당그레스트에 있었음. 도망친 범인이 제 고향인 당그레스트를 향할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단순히 죄인을 잡고 서류를 회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프렌 소대를 보내는 것보다 레이븐을 시키는 편이 좀 더 빠르고 은밀하고 확실했을 거임. 게다가 길드엔 예거 일당도 있음. 그 임무를 프렌에게 맡기겠다고 말했을 때 슈반은 다소 어귀가 안맞는다고 생각했음. 알렉세이같은 완벽주의자가 확실한 방법을 놔두고 이렇게 돌아가는 식의 일처리를 할 리가 없음. 게다가 소대를 보낸 것과 별개로 프렌 일행에게 레이븐으로써 미행 임무까지 지시해놓았음. 이렇게 되면 이중삼중으로 번거로운 일을 했다는 인상이지만 슈반은 이게 뭔지 알고 있음.
알렉세이는 프렌을 시험해본 거임. 앞으로 더 쓸 수 있는 말인가, 혹은 이쯤에서 버리고 가야할 것인가. 말해두자면 범인이 제국에서 가지고 도망쳤고 프렌이 당그레스트까지 범인을 쫓아가 되찾아온 '제국의 기밀'은 자우데의, 최후의 기동방법에 대한 내용이었음. 만약 프렌이 조금이라도 알렉세이를 의심하고 서류를 뜯어봤더라면 일의 전말은 복잡하게 뒤틀렸을 테고 알렉세이의 계획은 크게 차질을 빚었을거임. 그리고 그 전에, 프렌은 레이븐에게 암살당했을 거임.
알렉세이로서는 이쯤에서 프렌에 대해 분명히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꺼임. 여태까지는 그 재능과 성품을 아껴 여러가지 후원을 해왔고 키우긴 했지만 이대로 프렌의 세력이 커지면 훗날 알렉세이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반기를 들 우려가 있음. 지금이야 일개 소대장이지만 대대장쯤 되면 프렌 자신의 재량으로 몇백명 정도는 운용할 수 있게 됨. 그 때의 프렌이 자신을 막는다면 일이 상당히 번거로워질거임. 그러므로 프렌을 좀 더 키우기 전에 그 의향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음. 자우데도 이제 막 궤도에 올랐을 뿐임. 앞으로는 자연스럽게 제국법이나 순리에 맞지 않는 명령을 내리게 될 텐데 이에 대해 프렌이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믿고 따라와줄 것이라는 확신도 필요함. 마침 범인이 정보를 가지고 도망치자 알렉세이는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임. 혹은 일부러 범인이 도망치는 것을 묵과했을 가능성도 있음. 그치곤 조금 지나친 도박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알렉세이는 이번 일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고 여긴 건지도 모름.
그 일이 제국에 도움이 되리라 기사단장 자신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 엄밀한 의미에선 알렉세이가 프렌을 속인 건 아님. 다만 어리석은 자들의 방해는 거추장스럽다고 느꼈을 뿐. 결과적으로 프렌은 알렉세이를 의심하지 않았고, 순진하게도 제 임무가 온전히 제국을 위한 일이라 굳게 믿고 뜯지도 않은 서류를 얌전히 알렉세이에게 전달했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프렌은 그를 의심하지 않을 터. 사실 프렌의 성정으로 봤을 때 알렉세이의 속셈을 눈치챘다해도 그에 대해 제국으로 따지러 올 지언정 부하들과 함께 그대로 도망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걸 알고도 만의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굳이 레이븐 자신을 프렌에게 붙여둔 것임. 소름끼칠 정도로 치밀하고, 남을 믿지 않는 인간임. 레이븐은 사실 알렉세이가 도구인 자신이나 예거조차 완전히 믿고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함. 다만 일이 잘못되면 언제든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에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이리라.
당그레스트에서 케이트 모크까지의 일의 전말에 대해서, 슈반은 알렉세이가 묻는 바에 짧게 보고했을 뿐임. 유리에 대해서는 그 이름과 '하늘을 쏘아맞추는 활의 길드원'정도로 언급해놓은 상태. 그 이상은 알렉세이가 묻지 않았으니 딱히 감춘 것도 아니지만 슈반은 그 청년이 조금 신경쓰인다고 생각함. 서로 활동하는 영역이 달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당그레스트 내에서 스쳐가듯 몇번 본 적 있긴 함. 생각이라기보던 어떤 예감과도 비슷한 느낌.
연행되어 감옥에 갇힌 범인은 1개월이 채 못되어 감옥에서 돌연사함. 잦은 음주와 스트레스로 인해 쇠약해진 몸이 거친 옥살이를 견디지 못한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지만 전문적인 의사의 부검은 기사단장 지시 하에 생략되었음. 이후 기사단 내에서 약소한 장이 치뤄짐.여기까지가 일단락. 다음편부터는 게임 본편.
유리는 라피드와 함께 길드로 돌아감. 시간이 꽤 흐른 뒤라 이미 돌아와 있는 돈에게 대강의 사정 설명했음. 돈은 더 별 말없이 ㅇㅇㅇ함. 짐작했던 대로 라피드 주인의 유족은 못찾았음. 유리가 맡는 식으로 지내게 되지만 둘은 주종보다는 좋은 파트너 관계. 전투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함.이후 3년 동안 유리는 변함없이 잉여잉여하게 지냄. 가끔 마을에 마물 쳐들어오면 그거 방위하러 쫓아가고 평화로운 날엔 밥 먹고 낮잠 자고 놀러다니고. 점심 즈음에 당그레스트 본부 앞을 지나가면 임무 맡기는 돈 피해서 줄행랑치는 유리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음. 사람들은 다들 저거 뺀질뺀질해서 ㅉㅉㅉ.. 이런 반응이고 돈은 이전까지는 그래도 싫다하면 밥값은 해라 요녀석아ㅗㅗㅗ 하면서도 금세 다른 사람 찾고 그랬는데 본편을 기준으로 한 반년 전? 을 기해서 다소 추궁이 심해짐. 입혀주고 재워놨더니 영 쓸모없는 놈이 됐다며 탄식도 함. 그떄마다 유리는 나 하나 논다고 유니온 안돌아가지 않는다고 으쓱댐. 그러다 맞으면 이렇게 정정하니 한 20년 정도는 걱정없을 꺼라고 너스레도 떰. 그러다 한대 더 맞기도 하고 엉덩이를 걷어채여서 쫓겨나기도 하는 그런 일상이 반복됨.그리곤 시간은 잘만 흘러가서 게임 본편 시점으로 나아감.
그 무렵 길드에서는 때아닌 마도기 도둑이 성행함.
원래 길드 내의 마도기 보급은 유구의 문 같은 유적탐험하는 길드가 마핵 발굴 해오면 제국과 모종의 길을 트고 있는 길드 내 마도사들이 마도기를 대충 개발, 수리해서 마핵에 박아넣고 -> 유니온 특별☆할인 따위로 헐값에 유니온에 보급하는 구조로 되어 있음. 말이 헐값이라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에 비해서지 그렇게 싼 편은 아님. 그래도 길드에선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하니까 용병길드 같은 경우는 들어온지 안되는 초짜 말단이라도 그럴듯한 무성마도기 하나씩은 끼고 있는 실정. 따라서 다른 마도기보다는 전투용 무성 마도기의 수요가 높고 복원이 우선시 되고 있음. 그런 마핵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임.
처음에는 왠 어설픈 길드 떠중이들끼리 싸움이 났다고 했음. 정신없이 치고 박고 싸우던 와중에 봤더니 팔뚝에 끼고 있던 마도기 마핵이 없어졌더라, 하는 다소 우스운 도시괴담 같은 얘기였음. 혹자는 술 취해 집에 들어가던 중에 마도기를 퍽치기 당했다고도 하고. 처음에는 그런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하는 거다'ㅅ'-33 하고 시큰둥하던 유니온도 신고 건수가 10건, 거진 20건이 넘어가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함. 이건 단순한 보복이나 무기 약탈의 문제가 아닌 거 같음. 뒤에서 움직이는 뭔가가 있음. 그러던 중에 돈이 유니온 본부로 유리를 불러들임.
아무리 잉여하게 지냈어도 길드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유리는 단박에 돈이 자기를 호출한 이유를 알아차림. 그동안 유니온에 들어온 신고 내역이며 일부 사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책상에 턱 늘어놓으면서 돈은 유리에게 이번 일에 대해 조사하라고 말함. 다른 말은 없었음. 해라. 평소처럼 뺀질거리고 넘어가려던 유리가 끄응, 함. 딱 봐도 이번 일은 보통이 아니어보임. 단순히 당그레스트 차원이 아니라 대륙 전체며 필요하면 제국 근처의, 다른 대륙까지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아보임. 인상을 찌푸리는 유리에게 돈이 사람 뒤를 캐고 다니는 일이니 별로 요란한 일은 아닐테지, 라고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던짐. 전부터 유리가 신경쓰고 있던 일에 대해 다 안다는 식의 말투임. 능청스런 영감탱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유리는 돈이 자신을 많이 봐주고 있었다는 걸 암. 길드는 일 안하는 놈 밥 안먹이는 주의니까. 예전부터 신경쓰던 일도 있고. 유리는 못이기는 척 의뢰를 수락함.
간단한 짐 챙겨서 다음날이라도 당장 출발하라는 말을 듣고 본부를 나오며 유리는 머리를 긁적임. 그러고보면 그때 그 녀석, 세상으로 나오라고 했던가... 벌써 오래 전 이야기구나.
사실 프렌과 그렇게 헤어지고 3년 동안 줄곧 유리는 헤어질 때 프렌이 남긴 말이 신경쓰였음. 어쩌면 제 속을 다 들여다본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별 생각없이 그냥 지나가는 말로 던졌을 것 같기도 함. 그러면서도 그 한 마디가 계속 유리의 자존심을 긁었음. '세상으로 나오라'고? 마치 저 앞에 서서, 어서 저와 동등한 쪽으로 나아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은 말투로.
같이 지냈던 기간 내내 프렌이 보여줬던 모습도 기억에 남음. 인정하기는 짜증나지만 분명 그 녀석은 강했음.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런 녀석이 던진 말이 또 그 모양이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마치 떠맡기듯 받은 의뢰지만 유리는 은연중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함. 어쩌면 자신은 이 당그레스트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아갈 핑계꺼리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돈에게서 자료를 받아오긴 했지만 분명치 않은 구석도 있어서 유리는 일단 마을의 술집을 전전하면서 사정을 들음. 모르는 새에 마도기를 벗겨갈 정도면 꽤 손속이 빠른 녀석들인 거 같고 마도기에 대한 조예도 있는 거 같음. 길드 근처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들음. 이동 방향을 봐서 아마 제국과 관련있는 무리들같다고도 함. 그러고 보면 그때 날 친 놈이 몰디오니 어쩌고 했던 것도 같지...? 그 직후에 아차, 했던 놈의 반응을 봐서 꽤 중요한 단어인 거 같았는데./ 어, 그거 왜 제국의 천재 마도사 얘기 아닌가? / 그랬나? 뭐 이런 얘기들ㅇㅇㅇㅇ. 이후 좀 더 수소문해서 유리는 '몰디오'가 제국 출신의 상당히 우수한 마도사라는 것까지 알아냄. 일단 그 근처로 가서 탐문하도록 할까.. 유리는 일단 첫 목적지를 이리키아 대륙으로 정함. 제도 근처로 가면 되겠지...ㅇㅇㅇㅇ 어딘지 일처리가 설렁설렁한 건 기분 탓만은 아님. 원래 계획 빡시게 짜서 만반의 준비를 갖춰 일에 임하는 건 유리 취향이 아님.
이튿날 대충 해 뜨자마자 간단한 짐이랑 여비 챙겨서 유리+라피드는 바로 당그레스트 떠남. 마을 사람들한텐 별 말 안했음. 어차피 유니온에선 다들 의뢰 맡으면 훌쩍 떠났다가 다시 또 돌아오곤 하는 걸. 짐이래도 구미 약간에 식재료, 조리기구 약간. 검 한자루라 어슬렁어슬렁 마을 밖을 나서는 유리 보고도 당그레스트 사람들은 그냥 이 근처 간단한 의뢰라도 맡았나보다 하고 생각했을 꺼임. 뒤에서 누군가가 이제 밥값은 하기로 결심한거냐고 묻는 소리가 들림. 유리는 피식 웃음.
3년 전 그때 이후 오랜만에 나가보는 세상임. 임무는 잊지 않지만 너무 서두르지 않는 선에서 유리는 적당히 여행을 즐김. 서두른다고 그 녀석이 갈 도망을 안갈까. 뭐 그런 생각임. 시야 저 편까지 퍼져있는 들판도 보고 그 위를 드리운 항상 붉지 않은 하늘도 봄.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자라나는 풀과 나무들도 보고 마을에 쳐들어오지 않는 종류의 마물들도 봤음. 계속되는 전투, 전투. 잠은 그때그때 머무르고 있는 마을에서 잘 때도 있지만 밖에서 자는 경우도 많았음. 어두워지면 대충 큰 길 옆에 침낭 깔고 누움. 잘 때 불을 피워도 곤충마물이 달려들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 좀 오래 걸렸음.
여행에서 본 모든 것이 새롭고 인상깊었지만 제일 유리를 놀라게 했던 건 바다임. 물론 길드에 있을 때 바다에 대해 많이 듣긴 했음. 물이 많이 있다더라. 어느 정도냐 하면, 고개를 들어 저 끝을 보아도 육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물이라더라. 그런 식이었지만 사실 물이래봐야 수도 마도기에서 나와서 졸졸 소리를 내며 수로도를 흐르는 시내 정도밖에 보지 못했던 유리에게 처음 본 바다의 모습은 아예 충격적이었음. 그 라피드조차도 처음 바다를 봤을 때 한순간 컹 소리도 내지 못했을 정도임. 흔히 보는 물빛과는 그 빛깔부터가 다름. 보는 사람의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푸른색. 마치 물이 아닌 완전히 다른 것 같아 보임. 대자연이 주는 외경에 흠뻑 빠져있던 유리는 곧 프렌이 했던 말을 떠올림. 그래, 이게 네가 말한 '세상'이란 거냐. 벌써 예전에 그 녀석은 이 곳을 지났겠지. 자신이 여행하기 한참 전부터 그 녀석이 보아오던 세상. 새삼 자신은 한참 뒤쳐졌었다는 생각이 듬. 제가 생각했던 것과 바깥 세상은 완연히 다름. 그동안 좁은 곳에서만 살아 왔다는 생각도 듬.
지금도 별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니고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이고. 의뢰를 마치면 다시 당그레스트로 돌아가게 될까. 그리고 그 다음은. 다음은 어떻게 될까. 바닥에 주저앉아 유리는 마치 웅크리는 것처럼 천천히 한쪽 무릎을 세워 끌어안음. 생각이 별처럼 쏟아지는 밤. 그렇듯 잠 못드는 밤이면 라피드는 좋은 대화상대가 되어줌.
솔직히 말해서 유리의 여행방식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썩 효율적이진 못함. 적당히 페이스 배분해서 걷고 마물 만나면 싸우고 근처에서 얻은 식재료로 밥 만들어 먹고. 날 저물 무렵에 근처에 마을이 있으면 거기서 묵지만 없으면 밖에서 취침. 지도를 갖고 있긴 하지만 잘 보진 않음. 대충 방향만 맞추는 식임. 그러고서도 길은 그럭저럭 제대로 찾아가는 걸 보면 용할 정도지. 여행 쌩초짜인데다 첫 당그레스트 외출이 지랄같았던 유리는 자기가 여행하면서 고생을 좀 사고 있다는 것도 잘 모름. 유리 너이자식 힘내라..ㅇㅇㅇ
어쨌든 트림 항에 도착해 처음으로 배를 타서 이리키아 대륙에 도착했음. 숲에 들어가는 건 어쩐지 경험상 꺼림찍해서 쿠오이 숲 우회해서 데이돈 요새 방향으로 크게 돌아 자피어스 부근에 왔을 때임. "제발 절 보내주세요!" 애원과도 같은 외침에 고개를 돌렸더니 왠 여자애 하나가 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음. 맞음. 에스텔임.
말해두자면 현 시점은 게임 내 유리가 처음 여행 시작했을 때보다 이 삼일 정도 늦은 시점임. 원 게임대로 하면 에스텔이 유리와 합류해서 성을 빠져나왔어야 할 때에 유리가 성에 없었으니까 프렌의 위험에 대해 알게 되어 성을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에스텔은 기사들에게 잡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음. 그 이후 며칠간 얌전하게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다고 안심했던 왕녀님이 실은 제국 내 장서관을 뒤져 성의 구조에 대해 조사했다는 사실을 기사단은 몰랐음. 먼지 쌓인 장서관 한 구석에서 성을 지을 당시의 설계도를 찾아낸 에스텔은 여신상 아래의, 유사시를 대비한 피난용 비상통로가 있다는 걸 알게 됨. 이번엔 나름 단단하게 준비했음. 옷차림도 드레스 정장차림이었던 것을 반성해 거동이 편한 경장 차림으로 고쳤음. 무기도 큼지막한 걸로 들었음. 아 이건 원래 그랬나.. 여튼.어쨌든 미묘하게 날짜의 뒤틀림이 있는 상태임. 그 상태에서 프렌을 암살하러 왔던 우리의 자기따응은...
(방문 박살)
자기 : 내 검의 먹이가 되라.. 내 이름은 자기, 너를 죽이는 남자의 이름이다. 죽어라 프렌 시포..!
자기 : .....
자기 : 아무도 없나...
참고로 프렌 방의 방문도 그대로. 프렌도 힘내라´_`...
어쨌든 에스텔은 그러고 어찌어찌해서 지하수로 통과, 성 통과, 마을까지 쭉 빠져나갔는데 그만 마을 입구에서 기사단한테 걸렸음. 마을 방위하는 슈반대임. 슈반은 출타중이지만ㅇㅇㅇ.. 얌전히 성 안에 있어야 할 왕녀가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하니 데코&보코는 에스텔을 저지하고 다시 성으로 데려가려고 함. 어떻게 빠져나온 건데 당연히 에스텔은 프렌한테 전할 것이 있다며 안가겠다고 버팀. 사정 모르는 유리가 보면 왠 인상 고약한 기사놈들이 어린 여자애를 끌고 가려고 하는 꼴인 것도 마뜩찮은데 그 입에서 프렌의 이름이 나오자 호기심도 확 당김. 프렌 덕에 제국 기사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나아졌다 싶었지만 여행하면서 만난 기사놈들이 또 하나같이 별 볼일 없는 종자들이라 좋은 생각도 싹 사라진 터임. 대충 기사들 쳐내고 에스텔 빼옴. 흠씬 두들겨 맞아 바닥에 널부러진 데코보코가 너 이 무례한 자식 두고보자~를 외치는 것도 간단하게 무시함.
이후 유리는 에스텔에게서 대강의 설명을 들음. 프렌과 그녀는 평기사 시절부터 아는 사이이고, 프렌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걸 알고 뛰쳐나온 참이며 지금 프렌은 기사의 순례여행 중이라는 것 등등.
사실 유리는 3년 전에 프렌과 그렇게 헤어진 뒤로 그에 대해 생각은 많이 했지만 다시 만날꺼라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 없음. 아예 프렌은 다른 대륙의, 제국 기사인데다가 또 우연히 마주칠 정도로 세상이 좁지 않고 또 그때만 해도 당장 당그레스트를 떠날지 말지부터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제도 근처로 가자마자 프렌과 아는 사이인 에스텔을 만난 것도 상당히 별난 일이고. 어쨌든 에스텔과 계속 이야기하면서 유리는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램. 당연히 프렌에게 들었음. 3년 전에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만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라면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그 '유리'라는 걸 알게 되자 얘기 많이 들었다며 다짜고짜 손을 덥썩 잡는 에스텔을 보며 유리는 좀 묘한 기분이 됨. 친구였나? 나랑 그 녀석이?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좀 더 이야기를 해보니 에스텔은 기사 순례여행에서 첫번째로 들르는 마을 하루루로 향한다고 함. 유리는 자기는 어떤 마도사를 찾고 있다고 말함. "마도사요?" "엉. 몰디오라고 하던데." "몰디오.. 몰디오... 아, 생각났습니다!" 어리둥절한 유리에게 에스텔은 '리타 몰디오'의 아스피오의 집 주소며 연구 실적 같은걸 읊어줌. 뭐야? 눈을 꿈뻑이는 유리에게 그녀는 학술도시는 제국에 의해 제어되고 있으며, 마도사의 신상이나 정보 또한 제국에서 보관한다고 알려줌. '몰디오'의 정보도 거기 있었음. 학술도시인 아스피오에 대해서도 설명해줌. 그들은 제국으로부터 연구비용 등을 제공받는 제국 소속의 마도사니까요. 설명하는 에스텔의 어조는 밝고 천진하지만 유리는 그 속에서 마도기에 대한 제국의 독점욕을 읽어냄. 요즘으로 말하면 산업기밀 같은 거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제국의 입장에선 다른 쪽으로 넘어가서는 안되는 귀중한 기술이니 마도사는 어딜 가든 사전에 그 행선지를 보고해야 하기도 하고 일정한 기간이 되면 연구 실적도 갱신해야 함. 연구나 재료 조달의 일도 있으니 마도사의 통행 자체를 막진 않음. 대신 외부인의 출입은 통행증을 발행해서 엄중히 제한하고 있음. 애초에 작은 연구소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이제까지도 통제하기 쉬운 지하도시에 마도사들을 넣어둔 것도 그렇고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처사임. 막상 그들은 별 불만없다지만. 유리는 흐응, 하고 말음.
말하고 보니 둘이 가는 방향도 비슷하기도 하고 또 이런 맹한 여자애를 혼자 보내는 것도 유리 오지랖성격상 거북했기 때문에 일단 둘은 하루루까지 동행하기로 함. 주욱 길 따라 데이돈 요새 도착했는데 평원의 두목 때문에 못지나간다고 함.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 지날떄는 괜찮았는데, 했지만 그 때는 재수가 좋았는지 어땠는지 활동 정체기였다고 함. 카우프만으로부터 스카웃 제의도 받음. 거절. 하는 수 없이 쿠오이 숲을 지나기로 마음 먹음.이렇게 흐름은 대강 본편 설정 따라감. 군데군데 에스텔 이름 이벤트며 라피드 이벤트, 스킬과 무기에 대한 설명 같은게 들어감. 본편과 같은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 않겠음.
얘기를 쭉쭉 나가서.. 쿠오이 숲 지나면서 카롤도 만나고 요리 이벤트도 생기고 했음.
카롤에게는 그냥 당그레스트 출신 작은 길드의 말단이라고 둘러댐. 알트스크 소속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괜히 돈의 후광을 입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기 때문. 이상하게 본 얼굴 같은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롤도 같은 도시 출신이니 당그레스트에서 몇 번 보지 않았겠냐는 유리의 말에 간신히 납득함. 요 몇 년간은 눈에 띄지 않게 지내기도 했고. 애초에 초반의 카롤은 남이 아니라고 하는데 제 의견 밀고 나갈 정도로 강한 아이는 아니었음. 유리가 하도 천연덕스럽게 우겨대는 통에 그럭저럭 넘어감.
본편대로ㅋㅋㅋㅋ 여행하면서 일행은 계속해서 프렌에 대해 이야기함. 처음엔 에스텔과의 공통 화제가 그 뿐이라 그랬기도 하지만 솔직히 자기가 못본 3년 동안 그 녀석이 어떻게 뭐하고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했음. 짧은 동행 중에 미처 듣지 못했던 성장배경 같은 것도 궁금하기도 했고. 아랫마을 출신의 고아였다는 에스텔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함. 역시. 곱게 자란 도련님 타입은 아니다 싶었지. 일행에게 3년 전에 겪었던 일에 대해서도 대충 이야기해줌. 꽉 막힌 성격에 대해서도. 능력이 좋아 제국에서도 상당히 총애받고 있다는 거랑 여전히 꼬장꼬장하다는 얘기 뭐 그런 것들. 하루루에 도착하니 역시나 허탕...! 프렌은 없었음. 대신 나무가 다 죽어감. 파나시아 보틀 만들어서 + 에스텔 능력으로 나무 고치고 일행은 프렌이 향했다는 아스피오로 감.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하루루의 나무 결계까지 고쳐놨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녀석 표정이 어떨라나. 유리는 조금 낄낄댐.
그러나 여기서도 프렌은 만날 수 없었음ㅇㅇㅇㅇ. 이쯤되면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이 든다... 어쨌든 리타 만나서 한바탕 소동 벌이고 샤이코스 유적 탐사해서 마도기 도둑 한패 잡아 리타 누명도 벗고 트림 항이라는 단서도 얻었음. 리타도 파티에 합류.
이쯤에서 유리는 어째 단순한 길드 의뢰로 시작한 여행이 어째 점점 동행이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 그래뵈도 요령 좋은 카롤 등이 합류해서 이전보다 여행은 한결 편해졌지만. 일이 좀 꼬이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 당시엔 별로 신경쓰지 않았음.
다시 훅훅 나아가서 노올 항으로. 여기서 유리와 프렌은 3년 만에 조우함. 유적 탐험할 때 맞닥드린 이후로 계속해서 유리 일행에게 보내지는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있는데 프렌이 나타나서 도와줌. 그리고 다짜고짜 검을 휘두름. (전에 했던 말 대로) 유리가 세상으로 나와준 건 좋은 일인데..(이하생략) 프렌이 가리키는 걸 보니 현상금 포스터. 하루루에서도 보긴 했지만ㅇㅇㅇㅇ. 아마 제도 근처에서 기사 패고 에스텔 데려간 게 현상수배의 계기인 듯함. 그렇다고 대놓고 왕녀 납치범 이렇게 써놓으면 나라 꼴도 흉흉해지고 기사단 아닌 다른 이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2차 인질극 같은게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 내용을 그대로 쓰진 않았고 뭐 공무집행방해죄 기사능멸죄 괘씸죄 이런게 써 있음. 이름도 안 밝혔으니 호칭도 어딘가의 무뢰배 이딴 식이고. 천천히 수배전단을 들여다보던 유리가 고개를 갸웃함. 탈옥? 그런거 한 적 없는데. 더 이상 마땅히 갖다 붙일 죄질도 없었나 봄. 어쨌든 그 때보다 현상금이 조금 올랐음. 아싸☆ 하는 유리를 보고 프렌은 한숨을 쉼. 유리 넌 여전하구나../너도 꽉 막힌 건 여전하네. / ㅡㅡ...
이후 둘 쪽으로 달려온 에스텔을 비롯해서 일행과 합류해 대강의 이야기를 나눔. 사정을 듣고 난 프렌은 그래도 폭행은 죄야ㅇㅇㅇ 해서 유리의 신경을 긁음. 유리를 알아본 소디아가 저 길드놈이%(@)%_하면서 이를 감.
대충 얘기 끝내고 프렌네와 헤어져서 유리 일행은 라고우네 저택 들렀다가 리브가로 잡으러 감. 어딜가냐고 묻는 말에 귀찮다는 듯 대충 대꾸하며 마을을 나서면서 둘은 각자 저 녀석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함. 프렌 녀석은 변함없이 꽉막혔고/ 유리는 변함없이 설렁설렁함. 이야기래봤자 느긋하게 회포를 풀 만한 분위기도 아니어서 단순히 일의 정세만을 나누었을 뿐임.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면 달라진 걸 알 수 있으려나... 안 그럴 거 같음. 저 녀석은 그냥 저 녀석임.
여차저차 리브가로의 뿔은 얻었지만 유리는 간단하게 남 줘버림. 별 대책없이 방으로 돌아오자 프렌 소대가 잉여대고 있음. 일해 새끼야ㅗㅗㅗ 했더니 일이 잘 안된다고 뭐라 함. 이때다 싶어 불만을 중얼거리는 부하들을 가만히 보던 프렌이 유리 눈치를 봄. 아니나 다를까 눈빛이 달라져있음. 저거 또 사고칠 눈임. 프렌은 한숨을 쉼. 이제와서 둘러댄다고 아 네 그러세여?ㅇㅇㅇㅇ 하고 물러날 유리가 아님. 하여간 여전히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구나... 하긴 처음 만났을 때도 기사인 자기 편을 들어줬을 정도이니(물론 유리에게 말하면 단순히 싸움이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겠지만) 저가 말려도 들을 거 같지도 않음. 저놈의 오지랖.. 프렌은 대충 비교적 온건하고 기사단의 목적과도 합치하는 방법으로 넌지시 일러줌. 얼씨구, 날 이용해먹으시겠다 기사님? 눈빛으로 묻는 유리에게도 대충 고개 끄덕여줌. 어차피 일도 안풀리고 있었으니 기왕에 도움이나 좀 받지 뭐..ㅇㅇㅇ유리 네는 다시 라고우 저택으로 향함. 생각보다 경비가 삼엄해서 저택 앞에서 죽치고 있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림. 무진장 수상한 아저씨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일행의 대화에 끼어들어있음. 가까이 오는 걸 눈치도 못챘는데... 유리가 버릇처럼 검자루를 쥐는데 아저씨가 이쪽을 보더니 한쪽 눈을 징긋함.
카롤이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지만 유리 기억으로는 한번도 말 섞은 적 없는 모르는 사람임. 근데 저쪽은 미묘하게 이쪽을 아는 것 같은 태도임. 친한 척 수작을 부리는게 영 수상함. 길드 사람인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머리를 긁적인 유리가 어차피 여기 서 있으나 방법이 없으니 옷상 의견을 받아들임. 물론 완전히 믿은 건 아니지만 애들이 그러자, 그러자 하니까 뭐ㅇㅇㅇ 하면서 한번 넘어가줘봤음.
결과는 옷상의 개☆수작ㅋ ㅡㅡ... 유리는 자기가 영 어중이떠중이가 된 거같다고 생각함. 어쨌든 속은 거 치곤 일 깨나 잘 풀려서 기사단이 출동할 정도로 소동도 이쁘게 잘 부림. 중간에 예상치 못한게 끼긴 했지만..ㅇㅇㅇ 이후 도주하는 라고우를 배까지 따라가서 발보스랑 안면 트고 드디어 자기도 만남. 기억하겠다 유리 로웨ㅔㅔㅔㅔㅔㅔㄹㄹㄹㄹㄹㄹㄹ!!!!11 하면서 바다로 떨어지는 꼴을 보는 유리 기분은 상당히 미묘. 세상은... 참 넓네여...
여차저차 프렌에게 건져져서 트림 항으로 왔는데 라고우가 떡하니 테이블에 앉아있음.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저 무뢰배와 평의회 중신 중에 누굴 더 믿겠냐는 라고우의 말에 고개를 숙이는 프렌 태도도 어이가 없음. 라고우가 거들먹거리면서 사라진 후 유리는 일부러 입술을 끌어올려 빈정거림. "그런 권력다툼 따위 흥미없어서ㅇㅇㅇㅇ."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니 어쩌니 하는 말은 다 발린 말이었나보지. 그 말에 발끈한 프렌이 "그래도 제국엔 법률이 있고 이를 어길 순 없다,"며 고개를 듬. 어금니로 끝을 눌러죽이는 낮은 목소리. 저도 일이 이렇게 되는 게 분하기는 한 모양. 그러면서도 결국엔 제가 좋아하는 그 법이라는 것 떄문에 저런 불의에도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꼴이 답답하고 화나서 유리는 몇 마디 더 함. 법이 무슨 소용이지? 네 녀석이 그렇게 모셔두는 법 떄문에 악당을 놓치게 생겼는데?! / 그래도 법은 필요해! 한 두사람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법을 어긴다면 질서가 붕괴되어 버림. 조직이 무너짐. 제국이 성립할 수 없음. 프렌 눈에는 그런 고려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질서를 무너트리려 하는 유리가 답답함. 그렇게 법을 어기고 무턱대고 행동해서 이제까지 얻은게 현상수배지 밖에 더 있음? 죄 뒤집어써서 남들에게 오해나 사고! / 그래서 가만히 두고보고 있으라는 거냐고, 모른척하는 거냐고 말하는 유리에 감정을 못이긴 프렌이 간신히 말을 뱉음. "그래서, 넌 뭘 할 수 있는데?" "뭐?" "네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냐고." 유리 표정이 형편없이 굳어지는 걸 보면서 프렌은 입술을 깨뭄.
이 말만은 하면 안됐음. 항상 제 생각은 뒷전일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끔찍히 아끼는 유리에게, '빚'을 지고 있는 그에게, 너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만큼은. 실은 프렌 자신이 들어야할 말이기도 함. 라고우 일 뿐 아니라, 지금도 제국 곳곳에 얼마든지 있는 부패한 귀족들의 행패를 보면서도 그 불의 하나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는 자신을 느낄 때마다 항상 마음 속으로 되뇌였었음. 좀 더 높이 올라가자. 지금의 법은 그 이후에도 고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불의는-... 의심과 경악에 찬 시선으로 프렌을 내다보던 유리가 말없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갔을 때 그보다 더 비참한 심정으로 남겨진 프렌은 조용히 눈을 감음.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는 것이 느껴짐.
밖으로 뛰쳐나온 유리는 화를 이기지 못해 건물 벽에 주먹을 갈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그 말이 이제까지도 명확한 목적 없이 그저 눈 앞의 일에 달려들기 급급한 자신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막상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더 분통이 터짐. "그런 것쯤, 나도 알고 있다고..." 그 말을 지껄인게 프렌이라는 것도 화가 남. 손등에 파고 드는 벽돌이 따가움. 그보다는 가슴에 매어 달린 감정이 묵직함.사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리, 프렌이 서로 명백하게 서로의 의견을 부딪친 건 이번이 처음임. 그 때는 사상적인 문제보다는 범인을 잡느냐 못잡느냐 하는 실제적인 문제였고 어쨌든 피차 (범인을 잡는다는) 목적도 일치했으니까. 서로가 서 있는, 완전히 반대되는 위치를 자각한 것도 이번이 처음. 단순히 길드니, 제국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상대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의 문제임. 또 막상 생각해보면 상대 편의 입장도 영 모를 것이 아니라는게 더 신경쓰임. 그렇다고 얌전히 인정해버리기엔 또 둘의 신념은 너무 다름. 약한 배신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이번 일로 심적인 거리감이 훅 는 느낌이지만 외려 단순히 온건한 대화나 행동으로는 알 수 없는 서로의 근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남겼다는 건 꽤 아이러니함.
그 후 각자 복잡한 기분이 된 둘은 작별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헤어지게 됨. 실은 말다툼한 이후로 인사는 커녕 서로에 대한 언급이나 일상적으로 얼굴 맞대고 하는 대화도 껄끄러웠기 때문에 프렌은 유리를 따라가겠다는 황녀의 말에도 별 거센 반발없이 대충 그러시라고 함. 유리도 유리대로 프렌과 만나겠다는 본래의 목적이 달성된 후에도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따라붙는 에스텔을 봐도 별 말 하지 않음. 여전히 생각만 하면 화가 불같이 치밀고 그러는 건 아니지만 아마 당시에는 프렌 관련 화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됨. 이후 파티 내 다른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프렌의 이름은 잠깐동안 자취를 감춤.
트림 항을 떠나기 전에 유리는 레이븐과 마주침. 속이고 속은 관계에 좋은 소리가 나가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옷상의 대놓고 수상한 태도에 속은 자기 탓도 있다고 생각한 유리는 대충 빈정거리고 말음. 보통 사람 같으면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시늉 정도는 했거나, 혹은 자기 얼굴 보자마자 부리나케 달아나야 정상인데도 도망칠 생각은 안하고 게 앉아서 노닥노닥하는 레이븐을 보고 유리는 허 거참ㅡㅡ; 함. "아저씨 그렇게 살다 칼맞아도 모른다." "미녀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도 좋을지도~" 그러면서 진짜 뭘 상상하는지 헤벌쭉 웃는 레이븐을 보고 유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듬. 완전히 놀아나는 기분이 썩 좋진 않음. 그보단 뭔가 좀 깨름찍함. 눈을 가늘게 뜨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질게 끊쳐낼 수 없는 건 유리 성격임. 어이구..
트림항을 떠나 카르보크람 -> 마를 수렵하는 검 + 용술사 이벤트가 쭉쭉 이어짐. 카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지만 파티 내 태도는 별로 변하지 않음. 리타야 워낙 안하무인에 에스텔은 착한데다 눈새라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고 유리는 알면서도 걍 넘겼음. 겁많고 약한 성격으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필사적으로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다니는 카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스스로 그에게 뭐라 훈계를 할 정도로 대단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함. 유리 자신은 무작정 남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의식 강한 타임은 아니라고 생각함. 지금 생각하면 근본이 닮았다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의미에서 서로 정 반대편에 서 있었음.
유적을 나오자마자 기사단에게 체포되는데 그 때 유리는 알렉세이를 처음으로 보게 됨.
처음 감상은 꽤 젊다.. 정도. 기사단장쯤 되면 백발 성성한 노인은 아니어도 적어도 돈 정도의 연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젊음. 하긴 제 또래에 소대 하나 맡고 있는 녀석도 있고. 나름 제국 기사단도 융통성있게 돌아가네ㅇㅇㅇㅇ. 무례하고 시끄러웠던ㅋㅋㅋ 삥끄게 부하와는 달리 이쪽은 포용력도 있고 어느 정도 대화도 통함. 물론 윗사람 특유의 은연 중에 행동거지에 묻어나는 거만함??같은 걸 지울 수야 없었지만 그 지위를 생각해보면 외려 자연스러운 정도임. 기사단장이라면 일선에 나서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으련만 그 몸놀림이며 자세도 남다른게 척 봐도 일평생 손에서 검을 놓아본 적 없을 것 같음. 느껴진 감정이 홈모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리는 프렌 녀석이 그렇게까지 기사단장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만 하다고 생각함.
근데 여기서 또 웃기는 점 하나는, 알렉세이는 체포하기 전부터 이미 유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거임. 좀 더 자세히 하자면 대충 3년 전부터ㅇㅇㅇㅇ.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똑바로 로웰 군이라고 이름을 불려서 근처에 열병해있던 기사들도 놀라고 유리도 놀람. 놀람 반 의심 반의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유리를 보고 알렉세이는 가볍게 웃음. "시포 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 3년 전 임무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지." 헐... 말 끝에 희미하게 웃음이 비치는 말투의 기사단장을 보면서 유리는 이놈이 어디까지 내 얘기를 하고 다니는거야.. ㅡㅡ... 하고 생각함. 그것도 황녀부터 시작해서 차기 황제후보라던지 기사단장.. 제국의 순 거물들만 골라서. 무슨 얘기였는지도 무진장 신경쓰이지만 제국 기사단장님한테 물어볼 수 있을리가 있나. 그보다 막말로 이게 수배전단 뿌리는 거랑 뭐가 다르냐 이거지.
(물론 슈반의 보고를 들었으니 프렌이 유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도 알렉세이는 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긴 함. 다만 아는 척 하느냐와 안하느냐의 차이랄까.. 뭐 그런거ㅇㅇㅇㅇ)
분명 황제후보와 기사단장을 수행하러 헬리오드에 함께 와있을 텐데도 유리네와 프렌은 거의 마주치질 않음. (에스텔 제외) 딱히 그 때 일로 유리를 피한다기보단 웃사람 대신 이리저리 뛰어당겨야 하는 말단의 비애 같음. Aㅏ...ㅠㅠㅠㅠ... 시간이 꽤 지난 터라 당시 서로에 대해 빡쳤던 감정은 어느 정도 사라졌음. 뭐 다시 만나서 진득히 얘기하면 같은 주제로 또 싸우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겠지만. 물론 프렌이 바빠서 그럴 기회가 없었으므로 둘은 가끔 길에서 만나면 눈인사를 나누고 지나가거나 혹은 상황에 대해 짧게 대화하기도 함. 에스텔이 봤으면 유리랑 프렌, 화해한 거지요? 하면서 눈새돋게 즐거워했을 텐데 쪼끔 아쉬움.
이후 마도기 폭주 -> 에스텔 다시 파티에 합류+케이브 모크 ㄱㄱ 루트를 탐. 헬리오드 떠날 때도 프렌은 임무하러 먼저 떠난 뒤라 볼 수 없었음. 굉장히 수족인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 아무리 공주마마의 부탁+프렌에게 들어서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해도 기사단 입장에서 근본도 없고 생판 모르는 양아치ㅋㅋㅋ인 자신에게 황녀와 소중한 소속 마도사까지 딸려보내는 기사단장의 태도에는 좀 질림. 당최 제국놈들 경계가 왜 이래? 거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너 믿음ㅇㅇㅇ 하면서 부하 전언까지 전해주는 것도 참... 어차피 처음부터 저 불안한 둘(에스텔+리타...ㅇㅇㅇ..)끼리만 그런 숲ㅋㅋㅋㅋ으로 보내는 게 맘에 걸리긴 했지만 기사단장으로부터 저런 부탁(?!?!...??)까지 들은 후니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하고 호위나 하게 생겼음. 실은 경계가 희박한 게 아니라 의외로 수완이 좋은건..가? 하면서 뒷머리를 박박 긁는 유리는 덤터기 1+1 당☆첨ㅋ. 유리는 그러고서 잠시 자기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봄...
이때 즈음해서 유리는 카롤에게서 처음으로 길드 만들자는 권유를 받음.
당그레스트에서 잉여댈 때부터 차라리 알트스크 외에 다른 길드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님. 자라면서 줄곧 돈을 봐온 터라 다른 길드의 수장은 눈에 차지도 않고 아무리 알트스크 정식 가입 안했다지만 별 계기도 없이 다른 길드로 훅 날아가는 건 타이밍도 모양새도 이상했을 뿐더러 그렇다고 자기가 신생길드의 수장으로 나서기엔 성격적으로 안맞아서 금방 생각을 그만두긴 했지만. = 발상 자체는 별 새로울 것이 없었다는 거임. 뭐 하나 확 내키는 방법이 없었을 뿐. 그러나 싫었다면 은근히 돌려서 거절했을 텐데 거기서 대답을 딱 자르지 않은 건 어느 정도 결심이 섰기 때문임. 그간 여행하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도 있지만 거진 대부분이 프렌에게 도발당한 탓임.
이것저것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유리는 그냥 알트스크 나가기 싫음. 돈도 좋고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거기 사람들도 좋음. 근데 해리를 생각하면 자기는 여기 남으면 안될 거 같음. 나가기 싫은데 + 나가야 하는 걸 알고 있는 상충된 상황에서 유리는 귀찮음으로 표출되는 무력감을 느낌. 길드 임무를 맡지 않으면서도 거길 나가지 않고 붙어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임. 뭘 어쩔 방법이 없었거든. 근데 저 제국 기사놈이 거기에 불을 당겼음. 지금 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냐고, 너는 대체 앞으로 뭘 어떡할 꺼냐고 어떻게 살아갈꺼냐고 다그쳤음. 그 때 유리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음. 자기도 몰랐으니까. 아니, 찾으려는 시도도 노력도 미뤄뒀었음. 돈의 둥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원래 제 것도 아닌 것을 감히 버리느냐, 버리지 않느냐를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 꼽으며 헤아리기만 했음. 모양새니 타이밍이니 하지만 막상 나가겠다고 말하면 못마땅해할 돈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 오히려 이제 저놈이 드디어 제 밥값이나 하고 살게 됬다고 좋아라 할 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던 그 얄팍하게 약한 한 가운데를 강제로 찔려서 까뒤집어진 꼴임. 그것도 저는 제 갈길 훌륭하게 잘 가고 있는, 곧 죽어도 지기 싫은 라이벌놈한테.
결국 카롤한테는 머 괜찮을 거 같긴 하네ㅎㅎㅎ 식으로 대답했지만 실은 유리는 그 때 이미 마음 속으로 길드 만들기로 확정해놨음. 생각해보면 카롤이 성격은 좀 약해도 나쁜 애는 아니고 더 자라서 소심한 것만 좀 나아지면 수령으로써도 꽤 괜찮은 인물이 될 거 같음. 낑낑대면서 애쓰는게 귀엽고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유리는 길드 만드는 거 이외에도 서서히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마주하기 시작함.
대삼림 가는 길에 유리네는 오랜만에 당그레스트로 돌아옴. 여전히 말걸어오는 사람이 많지만 유리는 대충 알트스크 인증 안되는 선에서ㅋㅋㅋㅋㅋ 적당히 스루하거나 잘못 들은 척함. 어차피 마물 쳐들어와서 다들 정신이 없던 터라 당그레스트 사람들도 걍 그러려니 함. 평소에도 워낙 이상한 장난 잘 치기도 하고. 돈도 모르는 척 능청떠는 유리를 보고 저 놈이..ㅡㅡ 하면서도 걍 장단 맞춰줌.
그렇게 마을 일은 유니온+기사단에게 맡기고 케이브 모크 가서 어찌어찌 에알 클레이네 처리- 듀크가..ㅇㅇㅇ... - 하고 돌아오니 제국에서 서신이 와 있음. 물론 라고우에 의해 바꿔치기 당한 거였고 ?!?!? ?!??? 하는 동안에 프렌이 감옥에 갇힘. 분명 오해가 있다고 말을 들어 달라고 외치며 끌려가는 프렌을 보고 유리는 어이구...함. 그러게 또 황제후보의 친서니 뭐니 해서 습격받은 후에도 감히 열어볼 수 없다고 내용 확인도 안해본 게 분명함. 그 놈의 규칙 지키다 저 꼴이 나는 걸 꼬시다고 해야하나 불쌍타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단순히 꼬시다고 끝나기엔 바꿔치는 술수가 너무 고약함. 적지로 저런 서신을 전달하게 하다니 서신 받은게 돈만 아니었어도 벌써 화가 난 길드원들에게 목을 베였을 꺼임. 게다가 제가 전달한 서한이 유니온 대 제국이라는, 사상 최악의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음. 그렇게 되면 제 아무리 프렌이라도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어질 게 당연함.
일행 따돌리고 지하로 내려가면 프렌이 뒤돌아 앉아있음. 지키는 사람도 없음. 당연함. 돈도 이렇게 빤히 보이는 술수에 넘어가 진짜로 화낼 정도로 어리석진 않음. 까말 쟤가 끽해야 일개 소대장인데 뭐가 된다고 인질씩이나 되서 붙들고 있음? 빡쳐서 전쟁할 정도면 진즉 그딴 서신 전한 책임 물어 끌어다 베는게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전 유니온에게 소리쳐 명령하는 목소리도 계산일 뿐 노한 기색은 전혀 없었음. 어느 쪽이냐고 하면 오히려 이렇게 버리는 말로 쓰여진 녀석은 안됬다고 생각할 껄. "이번에도 부하냐?" 물어보는 유리에게 이번에도?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프렌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자기 불찰이라고 함. 이런 식일 줄은 알았지만 직접 들으니 더 답답해서 유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듬. "그러고 규칙 지키고 살면 좋냐? 감옥 좋음?" "ㅇㅇㅇㅇ가끔이라면..." ".....아 그래."
대충 자물쇠 부숴주니 차분히 걸어나온 프렌이 고개를 들어 유리를 올려다봄. "유리." 여기 남아줘. 나대신. 조용히 마주한 시선이 곧고도 고요해서 유리는 프렌이 설령 일이 잘 안되더라도 반드시 돌아와서 제 죄값을 치르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림. 자신이 한 실수가 어떤 것인지, 어떤 끔찍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는지 프렌은 잘 알고 있음. 감히 제 목숨 하나로는 다 갚을 수 없을지도 모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까지 대신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음. 다만 실수를 저지른 만큼 어떻게해서든 그걸 수습하러 가고 싶은 거임. 유리에게 남아달라 부탁하는 것도 그 기회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 인질이 없더라도, 필요하다면 대가를 치르러 얼마든지 순순히 이곳에 다시 돌아와 얌전히 목숨을 내놓을 생각임. 다만 그런 생각을 남들이 알아주진 않으니까. "...유리는 길드 사람이라 별 소용없을 지도 모르지만." 프렌이 조금 웃음.
살짝 굳은 얼굴로 잠시 침묵하던 유리는 알았다고 하고 감옥으로 들어감. 그래. 유리 자신은 유니온 소속이고 목숨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도, 저녀석은 다시 돌아오겠지. 죽지 않을 내 대신 제 목숨을 내놓으러.다만 프렌 성격으론 결코 남들에겐 하지 않을 저런 부탁을 자신에게 하는건 저녀석 나름의 신뢰의 표시일까.
그런 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돈이 너새끼 길드 한식구놈이 내가 선점한 인질 상회입찰하지 마라고ㅗㅗㅗㅗ함. 뭘 이럴 줄 알고 보초도 치워놓고 대기탔으면서 거 영감탱이 너구리 같다며 투덜대는 유리에게 돈은 너가 유니온 소속이고 말마따나 한식구긴 하지만 멋대로 인질을 놓아준 이상 일이 잘못되어 프렌이 돌아오지 않을 시엔 확실히 네놈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못박음. 돈의 말이 에누리 없는 진실임을 알고있으면서도 유리는 순순히 그러마고 함. 그녀석은 이미 각오를 굳혔다는 걸 암. 자기라고 무르게 굴 순 없음. 그러나 그 직후에 바로 다른 임무 떠맡기는 돈을 보면 조금 무르게 굴고 싶기도 함..´_`
졸지에 이중 임무(..라고 해도 어차피 둘 다 흑막은 같으니 상관 없...나?ㅋ..)를 맡게 된 유리가 당그레스트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쥬디스따응도 만나고 가스파로스트도 가는 사이 프렌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 길로 제국으로 달려감. 역시나 제국도 라고우의 술책으로 난리가 났음. 대충 유니온은 붉은 유대 용병단이 제국의 마핵을 훔쳤다는 건 모르는 일이고 니들말 안믿으니까 자꾸 길드 애들 건드리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돈 화이트호스가 전해왔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음. 당연히 제국도 빡쳐서 당하기 전에 선수쳐야 한다해서 이미 나라 전체가 전면적으로 전쟁준비에 들어가서 성 안도 온통 정신이 없음. 설상가상으로 용병길드 등 길드 내 전투세력들이 당그레스트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도 퍼져서 분위기가 장난아니게 흉흉함.
요델을 찾아가자 방 안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요델이 프렌을 보자마자 급히 이쪽으로 뛰어옴.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분명 화친의 뜻을 전했을 텐데, 하는 요델에게 프렌은 급히 서신이 뒤바뀐거 같다고 자기 불찰이라고 사죄함. 벌은 나중에 받겠으니 지금은 일을 수습하게 해달라고 고개를 숙이는 신하를 보고 요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임.알현실을 나와 프렌은 곧바로 기사단장 집무실로 향함. 전쟁준비가 한창인지 알렉세이도 엄청 바빠보이는 모습임. 책상에 서류도 엄청 쌓였음. 그야 유니온과의 전면전이라면 기사단도 전군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니까ㅇㅇㅇ. 대군을 움직이는 일이니 하나부터 열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쌓였을 꺼임. 급히 사정을 설명하는 프렌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알렉세이가 낮게 중얼거림. "그런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니온과의 전쟁 건에 대한 수습을 위임함. 이때 이미 프렌에게 주어진 권한은 일개 소대장의 그것을 훨씬 벗어났음. 전쟁을 강행하려는 귀족들 말로 설득하고, 영 말이 안통한다 싶으면 기사단 동원해서 강제로 뜯어말리고 저택에 감시붙이는 식으로 겨우 강경파를 잠재움. 그 후 요델이 새로 쓴 친서를 들고 곧장 당그레스트로 달려가 전투 중지 명령을 전달해 간신히 인마전쟁 이후 최악의 사태가 될뻔한 전투를 막아냄.
워낙 사태가 급박했으니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 후 프렌은 이번 전쟁을 대하는 알렉세이의 태도가 묘하게 차분했다는 걸 떠올림. 물론 유니온과 전면전을 벌이냐마냐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프렌 말만 믿고 바로 전투 중지명령을 내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지만. 자칫 일이 잘못됬다면 제국 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 큰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었던 일인데 이정도 일이라면 기사단장 본인이 나서서 수습하는 게 여러모로 위신도 서고 당연한 일일텐데 그에 대한 권한도 프렌에게 전부 위임하고 오히려 알렉세이 본인은 뒤로 물러난 것 같은 모양새임. 마치 전쟁 벌여도 제국은 하나도 손해날 것이 없었거나 아예 그 자체에 관심 없다는 식으로. 물론 이때까지도 프렌은 알렉세이에 대한 의심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 다만 서신을 잘못 전달해 이런 사태를 초래한 자신에게 일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다는 식으로 받아들임.
어쨌든 유리네가 발보스 처리하는 동안 당그레스트로 돌아온 프렌은 대충 전선 수습하고 이번엔 진짜 요델 서신 전달해서 유니온과 길드 사이에 다리 놓고 라고우 체포하고 함. 엄청 바빴음.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평의회 입김을 빌려 라고우가 너무나 어이없이 쉽게 풀려나버림.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도에서 프렌에게 대대장의 지위를 내린다는 임명장이 내려옴. 때가 때이니만큼 따로 형식적인 식은 올리진 않지만 제대로 대대장의 갑옷과 망토, 검(의장용) 등이 전달되었음.
당연히 큰 참사가 될 수도 있었던 제국과 유니온의 전쟁을 막아낸 것에 대한 공을 치하한다는 명목이었지만 프렌에겐 왠지 이 모든 과정이 허례나 아첨같이 느껴짐. 아무리 전시라 해도 그 까다로운 귀족들이 이번 인사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고 마치 과분한 포상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거임. 물론 프렌이 이번에 세운 공은 결코 보잘 것 없는 게 아님. 승진이 다소 빠른 감이 있긴 했지만 현 상황을 고려해보면 영 받지 못할 지위도 아님. 이미 그 전부터 기사단장인 알렉세이를 대신해 대대장급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니 이번 임명은 되려 뒤늦은 감이 있음. 그러나 이만큼의 권한을 얻고도 라고우를 단죄하지 못하는 프렌의 입장에선 오히려 제게 주어진 지위가 어딘가 허무하고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함. 온전히 자신이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저 어두운 물 밑 어딘가에서 저와는 상관없는 다른 주사위놀음이 있어 그 부산물로 주어진 것 같은 지위. 따지고보면 서신을 잘못 전달한 것도 자신의 책임이었을 터임. 실수를 바로잡았을 뿐 아닌가. 프렌은 화려한 상자 안에 대대장 갑옷과 함께 고급 도료에 감싸인 채로 들어있던, 결코 베는 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화려한 장식용 검의 무딘 날을 손으로 쓸어봄.
지위가 오른 것은 프렌에겐 좋은 일임. 분명 목적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셈이다. 아니, 나는 진짜로 '목적'에 가까워지고 있나? 뻔히 법을 어기고 잔혹하게 시민을 핍박한 악당을 알면서도 놓치고 있는 자신이, 그 목적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잘 닦여 한치 티도 없이 번쩍이며 빛나고 있는 갑옷을 하나하나 천천히 걸치면서 프렌은 어깨를 짓누르는 갑주의 무게가 더없이 무겁다고 느낌.
라고우의 소식을 들었는지 막사 앞까지 찾아온 유리와 마주해서도 할 말이 없었음. 당장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다그친 게 얼마 전인데, 그보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대대장의 갑옷을 걸친 허수아비 같다는 기분임. 차라리 지위가 낮았더면 이 상황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듬. 줄곧 그랬던 것처럼 더 높이 올라가자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면 되니까. 그러나 지위가 높아져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들과 같은 진창에 침식되어 구르는 것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프렌은 생각도 해본 적 없었음. 이제껏 뭘 목표로 하고 있었나. 그래서 더 화가 남. 자기와 별 관계없는 일인데도 이제껏 이것저것 힘써주고 가스파로스트 건도 잘 처리해준 유리 보기도 미안하고 죄책감이 듬.
분통이 터지고 안타까워서 더욱 더 울분을 토하는 프렌을 보고도 유리는 별 말을 하지 않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지도 않고 화내거나 빈정거리지도 않음. 검도 안뽑음. 다만 "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조용히 말을 건넸을 뿐임.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간 유리에 대해서 느낀 거나 트림 항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심하게 말다툼을 하거나 심지어 유리가 한대 때려도 얌전히 맞아줄 생각이었던 프렌은 그런 유리의 반응에 조금 의아해함. 이미 이때부터 유리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지만 프렌은 그걸 몰랐음. 그날의 유리가 어딘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걸 차근차근 생각해보기엔 프렌도 마음 상태가 너무 안좋았음. 만약 그때 유리의 결심을 알았다면 말릴 수 있었을까. 이 후 프렌은 오랫동안 이 물음의 답을 고민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