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체 주의
언젠가 충동적으로 비운 맥주 한 캔의 취기를 빌려 입을 연 밤이었음. 써늘한 초가을 날. 항상 속으로만 삭이던 오래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자 윤의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음.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화평은 잠시 신부님이 그런 걸 물어봐도 되냐며 너스레를 떤 다음 입을 다물었음. 숨조차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던 긴 순간이 지나고 결국 화평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밤이 왜 지금 와서야 굳이 생각이 나는 건지.
윤은 달리고 있었음. 딱딱한 구둣발에 울퉁불퉁한 시골길은 영 걸리는 것이 많아서 자잘한 요철이나 잡풀을 만날 때마다 윤의 다리는 정신없이 휘청거렸음.
신은 어디에 있는가. 독실했던 집안에 악마가 찾아온 이후 한참 동안 윤은 그 질문에 집착했음. 말할 것도 없이 윤의 부모는 독실한 신자였음. 부모만큼 신앙이 깊지 않던 큰아들을 기어코 사제의 길로 밀어넣을 정도니 오죽했을까. 그런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린 윤도 종종 부모에게서 신의 존재나 은총에 대해 듣곤 했지만 썩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음. 그리고 그 날 밤 윤은 제 형의 안에 들어 인간을 해치는 악마의 존재를 눈으로 똑똑히 봤음.
악마는 존재한다. 그러니 신도 존재하는 거겠지. 해서 윤에게 있어 악마의 존재는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고 오히려 신의 존재는 훨씬 부수적이었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되고 구마사제직을 받아 구마의식을 하러 다니면서 이런 의문은 점점 더 커졌음. 의식은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고 다치고 괴로워했음.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인가. 지금 이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끝조차 알 수 없이 이어지는 악몽에서 소스라치듯 깨어나 베개 밑에 넣어둔 십자가를 쥐어잡으며 윤은 매일 밤 자신의 안에서 메아리치는 질문을 들었음. 신은 있나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들판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함. 주변이 어두워지자 안그래도 익숙치 않은 시골 풍경이 더욱 더 낯설게 보였음. 흰 옷을 입었으니 눈에 띌 법도 한데,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먼저 달려나간 화평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음. 초조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이 가쁜 숨을 몰아내쉬면서 윤은 지쳐서 자꾸 늘어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재촉했음.
계속 혼자서 가족을 죽이고 형을 자살로 몬 악마를 뒤쫓던 윤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음. 윤화평과 강길영. 맨 처음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비극에 깊게 얽힌 피해자이자 생존자들이었음. 해묵은 인과관계와 각자의 사정을 나누고 난 세 사람은 자신들의 목적이 같다는 것을 알았음. 20년 전 비극을 일으키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는 악마를 잡는 것. 처음엔 방법이 달라 부딪치는 일도 많았지만 결국 목적은 단 하나였음.
그랬기 때문에, 그 목적에 너무나도 절실하고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윤은 지금 이곳에서 화평의 뒤를 쫓고 있음. 부마자의 예언을 들을 때부터, 아니 악마의 뒤를 쫓아 구마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윤은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으나 그건 윤뿐만이 아니었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윤은 눈을 깜빡였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들어올렸을 때 자신의 손을 잡아내리며 자신에게 방법이 있다고, 내게 맡기라고 말하던 사람.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앞을 몸으로 막아서며 다른 이들을 지켜내던 사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진실을 위해 몸을 던지고,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 그리고 심지어 죽을 것이 분명한 것을 알면서도 구마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 안에도. 이 모든 것 안에 신이 계심을 나는 어째서 몰랐던 걸까요.
그리고 한 사람. 자신의 몸에 악마를 가두어 함께 죽기로 결심한 사람. 사람들을 위해 악마의 형상을 받아들인 신. 인간. 윤화평. 흠뻑 젖은 채로 검은 물에 잠겨 그를 마주한 이 순간에, 윤은 그 어느때보다 신의 존재를 실감함. 그러니 하느님. 윤은 목이 터져라 외쳤음. 난생 처음으로. 분명하게 존재하는 신에게. 이제와 같이 영원히 함께 해주실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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