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나의 구속은 재능이다. 로 시작되는 하루나+아베의 동인설정
무사시노 전 즈음
하루나의 구속은 재능이다. 물론 노력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노력한 것보다 성과가 훨씬 잘 나왔음. 야구를 잘하기보단 투수를 잘했다. 어쨌든 잘했기 때문에 야구는 재미있었고 중학교 가서도 야구부에 들어간다.
당시 중학 야구부 감독은 자질이 있다기보단 오랜 세월 감독을 맡아왔기 때문에 나름의 경험이 쌓인 케이스로 그 경험이라는 것을 다소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뭐든 자신이 생각하는 게 옳았고 자기 뜻과 다르면 무지하게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랄만큼 낡은 사고방식이지만 그 아집을 일종의 통솔력이라고 착각하는 선수마저 있었다. 감독은 선수들의 시합이나 연습 뿐 아니라 일상 생활태도까지도 간섭했다. 잔소리는 귀찮았지만 하루나는 공을 던질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감독이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향한 잔소리 외에도 자기 배터리에게나 트레이닝을 봐주는 선배들에게 자신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하루나는 당시에도 중 1치곤 상당히 잘 던졌기 때문에 감독도 지나칠 정도로 터치하지는 않았다. 당시 하루나의 배터리는 기가 약했다.
하루나는 계속 투수를 하고 있었다. 야구가 아니라.
부상당했다. 자기 말을 거스르고 멋대로 검사를 받으러간 하루나를 감독은 용서하지 않았다. 버림받았다. 야구를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시니어에 들어갔다.
아베는 야구가 재미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했고 어렸을 때부터 포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포수가 가장 멋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내내 모아 월간 야구 같은 잡지를 사 모으기도 했다. 간간히 실리는 이번 시즌 우승 팀의 배터리 인터뷰 같은 걸 꼼꼼하게 읽었다.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산 잡지의, 올해에 비해 부진했던 작년 성적과 야구 선수가 되기까지 겪었던 고난, 팀메이트 사이의 소소한 에피소드 등으로 이어지는 인터뷰의 마지막에는 서로가 없었다면 우승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라는 식의 대화 아래로 친밀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터리의 모습이 있었다. 뻔하고 상투적인 얘기였지만 어린 야구소년에게는 눈부셨다. 딱히 인터뷰가 아니라도 아베는 투수와 포수 사이에는 다른 선수들이 공유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가 투수와 포수의 신뢰관계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딱 그 또래의 소년다운 환상이었다.
계속 야구를 하면서 많은 투수를 만났다. 다들 비슷비슷한 실력이었다. 아베가 한 것은 딱 그 나이대 수준의 야구였기 때문에 딱히 꿈에 그리던 투수를 만났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배터리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항상 좋은 투수를 만나 그를 훌륭히 보필해 승리를 이끌어 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중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다. 시니어에 들어갔다. 하루나를 만났다.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 하루나의 공은 프로와 비교하기에는 여러 모로 수준이 떨어졌지만 좋은 투수며 배터리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아베에게 그 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하루나의 공은 빨랐고 빠른 공은 그 모든 사소한 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공을 던지는 투수도, 그런 공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나와 배터리를 짜면서 아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릴 적부터 상상했었던 미래 배터리의, 이상적인 투수의 모습을 그에게 덮어씌운다. 실제로도 그렇게 대했다. 하루나도 하루나대로 공을 던지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아베가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 사실 아베에게 별 신경도 안썼다. 다른 누구와 배터리였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하루나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제 '벽'이 될 아베의 덩치가 작은 건 확실히 불만이었다. 마음 편하게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하루나는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부상이라는 상황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남을 걱정한다기보단 그냥 누군가 다친다는 그 자체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치만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제구력은 또 별개의 문제라. 게다가 첫 만남에서 하루나는 아베가 자기를 도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담 한 번 받아봐라, 하는 심정도 있었다. 가감없이 던졌다. 솔직히 화풀이였다.
한 놈은 제가 생각한 이상적인 모습을 상대에게 멋대로 투영하고 또 다른 놈은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관심 한톨도 없이 공만 던지면 된다는 태도니 배터리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무진장 싸웠다. 애초에 성격 자체가 달랐고 그 중에서도 특히 투구나 볼배합에 대한 화제는 지뢰밭이었다. 하루나는 (저가 생각하기로)시덥지 않은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시끄럽게 구는 꼬맹이가 귀찮았고 거기에 더해 아베가 제구니 구종이니 하루나 자신이 투수인 제 영역이라고 금 그어놓은 영역까지 치고 들어올라치면 짜증이 치밀었다. 방어본능과 투수로서의 자존심이 합쳐져 감정적으로 확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아베로 말하자면 처음에 자기가 꿈꿔왔던 이상적인 배터리의 모습이 몇 번이고 와장창 깨졌다가 다시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비실비실 살아났다가 다시 깨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나에게 실망할 때마다 제가 그리던 야구가 한 귀퉁이씩 무너져내렸다. 그 때마다 끊임없이 일정하게 상처입었다.
시니어 시절은 둘 다에게 썩 좋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하루나가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하루나가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상처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토해내면 회복할 수 있었다. 가족이든 친구에게든 말하면 좋았겠지만 가족이나 아키마루를 포함한 당시 하루나 주위의 사람들은 하루나가 상처입었다는 것을 동정하고 가엾게 여겼다. 하루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눈치를 보며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하루나 자신이 상처입었다는 것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 하루나는 그게 굉장히 싫었다. 그러나 아베는 하루나가 부상을 입었었건 어쨌건 바락바락 대들며 성질을 긁어줬기 떄문에 하루나도 마음껏 화내고 윽박지르고 고집을 부릴 수 있었다.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아베는 완전히 다른 타입으로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와 붙임성은 있지만 지나치게 살갑게 굴진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베는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보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성격이다.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런 면에선 인도어적 성향에 가깝다. 고민이 있어도 남에게 털어놓는 것보다 제 스스로 되짚고 반추해보면서 해소할 수 있는 타입인데 하루나와 부딪치면서 자기 내면을 마구 드러내보이며 부딪쳐오는 하루나에게 이끌려 자기 속마음도 억지로 꺼내지게 되는 상황이 아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같이 싸워도 소리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하루나와 달리 아베는 집에 가서 그 날의 대화를 몇번이고 곱씹으며 잠자리를 뒤척였다. 도저히 해소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베에게 하루나는 던지는 공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고 못마땅했지만 잔소리는 볼과 시합에 대한 내용으로 한정되었는데 이유는 하루나가 그보다 선배였고 연장자였기 때문이다. 아구바보였고 제가 생각하는 것에 양보가 없는 고집쟁이었지만 그 정도의 예의는 있었다. (지금 미하시에게 이것저것 잔소리하는 건 미하시가 미덥지 못한 것도 있고 미하시를 좀 낮게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나 또한 폭력적인 것은 그가 던지는 공에 한정되었다. 아무리 화가 났을 때라도 그는 폭력적인 의도로는 아베에게 손 한 번 댄 적 없었다. 상처입는 것도 남을 상처입히는 것도 당시 하루나에겐 버거웠다. 단 감정적인 쪽은 예외. 상처주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사실 아베가 유년기에 갖고 있던 막연한 환상은 어렸을 적부터 일정한 활동을 계속 해온 그 또래들이 흔히 갖는 것으로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식의 폭이 확장되고 자기 주변의 현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사라져 장차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다만 아베의 경우는 자질이 너무 뛰어났던 하루나를 만나 환상이 완전히 잘못된 거였다는 깨달음 없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보충되어 어정쩡하게 현실성을 띄게 되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후반부에 가서는 감정적으로 힘에 부쳐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을 여유도 없었다. 유년기가 완전히 끝난 고등학교 1학년 현재에도 눈 앞의 팀메이트 모습 자체를 받아들이기보다 자기가 정한 잣대와 틀대로만 생각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중학교 2학년 가을의 그 사건으로 인해 하루나에 대한 배신감과 반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그리고 하루나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던) 이상적 투수상을 완전히 바꿔 하루나를 최악의 투수로 분류하고 무조건 그와 반대되는 모습이 좋은 투수에 가까운 조건이라고 정해버렸다.(노력 vs 재능, 마운드를 내려가는 투수 vs 마운드를 양보하지 않는 투수 등등) 투수의 역할 중 하나인 고개젓기에 대해 미하시에게 강압적으로 군 것도 이 때문이다. 적어도 그 가을 이전에 아베는 고개젓는 것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나는 남에게 관심이 없다. 원래부터도 제 실력만 믿는 안하무인 성격이기도 했고 자기중심적 태도를 벗어나 점차 자기 주변으로 관심을 확장해나갈 시기에 부상을 당했다. 지속됐던 통증이 실은 반월판 손상이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알게 된 후에도 팀에는 많은 동료들이 있었지만 하루나가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도 감독의 무시 때문에 잊혀져 갈 때도 남들은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당시 가장 친했던 아키마루조차 소극적인 태도로 머물렀다. 자연스럽게 하루나는 팀메이트를 비롯한 타인들은 자기 인생에 별 상관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불신에 가까웠다. 팀의 승리도 패배도 관심없었다. 팀이 이기든 지든 간에 하루나는 하루에 80구만 던졌고 구수가 다 차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공이 맞거나 맞지 않거나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였고 실제로도 무관심했다. 그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선배들이 몇 번이고 불러내 충고 비슷한 협박을 준 적도 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그들은 타인.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팀의 승리라는 것도 하루나에겐 인상이 희미했다. 투수제한 때문에 주로 후반만을 던졌기 때문에 자기 공이 맞지 않아도 이미 잃은 점수로 시합에 지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배터리가 공을 놓치거나 사구 때문에 진 적도 있다. 제구는 애써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까지 포함해서 하루나에겐 자기와는 상관없는 영역이었다. 자기와 상관없는 영역에서 상관없는 일들로 결정되는 팀의 승패 따위. 소용닿지 않는 것에 신경을 기울이는 취미는 없었다. 이미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양 손이 한가득이었던 것이다. 야구가 던져서 수비하는 운동이 아니라 던져서 점수를 넣는 경기였다면 하루나의 이같은 양상도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터리가 있었지만 여전히 하루나는 혼자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로를 고집했다. 야구로 인해 버려졌던 경험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야구로 인정받고 싶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감정과 그 심리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시간이 지나서 서로를 어느 정도 겪고 아베가 하루나의 공을 곧잘 잡게 되면서 둘의 인식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루나는 점차 아베를 자기 공 받는 벽/표적에서 공 받는 포수로 인식하게 된다. 따지자면 (자기에게 주는 소용 면에서) 무생물에서 생물로 정도의 변화였다. 변화는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명백했다. (공으로) 상처주고 울려도 기를 쓰고 따라온다는 점이 하루나가 아베를 나름 특별히 인식한 이유였다. 처음 몇 번 공을 몸에 맞췄을 때는 아베가 금세 포기해버리거나 다른 배터리로 바꿔달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베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이야 어떻든 하루나 눈에는 아베가 다치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상처주는 걸 염두에 두지 않고 던질 수 있었다. 아베의 회상에서 하루나가 말한 '마음놓고 던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싸우다 싸우다 아베가 못이기는 척 굽혀주고 그러면서 따라오는 것이 당연해졌다. 줄곧 그랬으니까.
아베도 변했다. 아베는 점차 자신이 하루나에게 덮어씌운 이상적인 투수상이 하루나와 무척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베가 생각한 투수는 좀 더 포용력 있고,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여튼 좀 달랐다. 눈 앞의 현실과 환상을 도저히 동일시할 수가 없었다. ´_`... 그렇지만 제 생각을 몽땅 폐기하는 대신 아베는 그 이상과 하루나를 비교하며 구상을 좀 더 현실성 있는 형태로 다듬어나간다. 모토키상은 이랬지만 좋은 투수는 이런 면이 필요할 것 같아.. 모토키상의 이런 면은 그래도 꽤 괜찮아.. 이런 식으로. 제 생각과 다른 면을 발견하면 ㅇㅇㅇ.. 뭐 그럴수도 있겠네요 하면서 조금씩 양보하며 생각을 수정했다. 가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게 나오면 벌컥 화를 내긴 했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자기의 '현실'은 이거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눈 앞에 보이는 건 이상이 아니라 하루나였기 때문에 둘의 다툼은 항상 하루나가 무작정 우기면 아베가 좀 화내다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중학교 2학년 가을 전까지 아베가 새로 만들어나간 이상의 투수상은 하루나와 매우 닮아 있었다.
어쨌든 둘은 함께 배터리하면서 변화해나갔고 변화는 얼음의 겉면부터 녹는 것처럼 느렸지만 그대로 놔두면 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갈 조짐을 보이긴 했다. 점차 서로를 이해해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보다 온건하고 자잘하게 부딪치면서 서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능성이 좀 더 가시화되기 전에 둘의 관계를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하루나 쪽에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아베였다. 아베는 이제 하루나가 자기가 생각한 이상의 투수도 아니고 그렇기는 커녕 자기와 제대로 된 야구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몰랐을까. 하루나는 계속 혼자였다. 혼자서 투수를 하고 있었다. 그럼 자신은 이제껏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자괴감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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