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체 주의
란슬롯이 아침드라마를 찍고 있습니다
얘기는 아발론 전, 본격적으로 세 아서의 대립이 시작되기 전에서 시작할게.
검서와 마서의 나라는 국경을 사이에 둔 이웃나라야. 말이 이웃나라라고 하지만 워낙 나라가 서로 떨어져있고 그 사이에 비경도 몇 있는 터라 별로 가깝진 않아. 애초에 세 아서가 대화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아발론과 모드레드 건 이후니까. 여튼 오늘도 마서는 그거 단절의 시대랑 관련있음? 아님ㄴㄴ해 하는 갤러헤드와 같이 갈꺼라고 생각했지 푸헹ㅋ 다녀와 하는 엘을 성에 두고 대충 마법 세력 기사 몇을 데리고 비경을 탐색하고 있었어. 가끔 요정들이 덤벼들긴 했지만 렙 1~2짜리들이니 데리고 온 기사들로도 충분했지. 그렇게 한 요정을 쓰러트렸는데 그 요정이 그만 각성을 해버려. 간단히 비경 걸으며 경험치를 얻을 생각이었던 마서나 마서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나 4성 이상이 없었던 터라 마서 일행은 금방 위기에 직면해. 틈을 봐서 간간히 얼마 안되는 힐을 밀어넣던 힐러기사가 쓰러지자 공격에 주력하던 기사들도 여지없이 흔들려. "크윽..!" 마서는 이를 악물어. 그래도 왕이라고 기사들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보호받던 아서는 얼마 다치지 않았지만 방금 전 각성 요정의 공격에 휘하 기사들은 다 나가떨어졌어. 저 상태에서 한 번만 더 공격을 받으면 저들은 정말 죽을꺼야. '기사는 인간이 아니다.' 멀린의 말이 떠오르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진 않아. 아니 사실은 도망치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만.. 마서는 쓰러진 기사들과 요정의 사이를 막으며 엑스칼리버를 발동해. 아직 슈퍼게이지가 다 차지 않아 제대로 발동이 되지 않아. 이러다가 원탁이 부서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서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선별검=전역재정"
아득한 굉음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어. 검을 끌어안듯 쥔 채로 마서는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네 요거 검서ㅇㅇㅇㅇ 그렇게 마서네를 애먹이던 것에 비해 각성 요정은 비교적 쉽게 사라져. 아마 이게 막타였나봐. 요정의 몸에서 아론다이트를 쑥 빼낸 란슬롯이 검을 털면서 저쪽을 향해 "왕이어, 괜찮소?" 하고 물어. '왕...?' 요정의 공격에 힘껏 부딪친 탓에 정신이 거의 반쯤 나가 있던 마서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쓰러진 요정의 잔해 뒤에서 빛을 등진 검서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어. "? 이상하게 싱거운데." 꼭 누가 치다 만 요정 막타를 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던 검서는 자기 검을 꼭 쥔 채로 검에 매달리다시피 기대있는 마서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어. "...마법의 파?"
검서와 마서는 모드레드 건이라던지, 여러가지로 안면이 있어. 서로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아예 모르는 사이보단 낫겠지. 아니 모르는 사이가 나았을지도. 검서는 쓰러진 각성 요정과 만신창이가 된 마서와 그 부하들을 돌아보더니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썹을 찡그려. "이 녀석은 그대의 상대였나? 미안하게 됐군." 미안이라니 마음같아선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쪽이 착각하고 있는데 일부러 이쪽이 그 사실을 알려줘 빚을 지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지. 엘 엄청 화낼껄. 상황에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란슬롯이 자기네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 아니냐고 빈정대는 것을 검서는 이미 거의 다 잡힌 요정이었다고 조용한 말투로 타일러. 이 상황 별로 안좋아뵈네... 마서는 비실 웃고 일어서려고 하다가 휘청해.
피차 엉망이었던 첫 인상과 다르게 검서는 친절했으며 배려가 깊었어. 걸을 수 없는 마서를 제 기사의 등에 업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도 설명해줬지. 지금 있는 곳은 긴 비경의 중간쯤 되는 지점으로, 마서는 자신들의 성에서 얼마 걷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AP 2에서부터 시작되는 제대로 된 비경길이 아니라 중간 AP 4 지점 정도에 그냥 쑥 끼어들었던 느낌이었나봐. 여튼 마서네가 온 길은 정식 길이 아니니 찾을 수 없고, 지금 와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오래 걸릴 테니 검서네는 아예 이 비경을 빠져나와서 마서의 성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판단했고 마서에게도 그렇게 설명했어. 마서로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잘부탁한다는 말이나 덧붙였지.
통신을 켜자 엘이 화면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물어봤어. <아서, 괜찮으냐? 요정은...> "네에.. 어떻게든." 엘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마서 옆에 앉아있는 검서와 란슬롯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어. <아서 너 (%)@))@_!!!!> 으악, 마서는 바로 귀를 틀어막았어. 그렇게 요정이 진정할 때까지 대충 네, 네 하면서 기다리자 이번엔 엘이 반쯤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몸 상태나 같이 갔던 기사들에 대해 물어봤어. 기사들이라.. 어느 정도 자신이 취할 입장-마서를 돕는다-이 확실해지자 검서는 쓰러져있는 마서네 기사들을 정리해줬어. 기사는 원래 카드 형식이니 덱에 잘 정리해넣으면 좋았지. 원탁은 아까 좀 부서져버려서 고치기 전엔 다시 기사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지금 몸상태로는 BC도 차지 않을 테니 오히려 잘됐나. 그치만 기네비어가 화낼꺼야. 처음 만나자마자 뺨을 주먹으로 치던 그녀의 기백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이빨 한 두개 정도는 각오해야하는 건가.. 마서는 새삼 집에 가기 싫어져.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니 더 화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엘도 아예 지쳤는지 입을 다물었어. 이쪽을 빤히 보더니 <그래도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을 덧붙였지. 왕인 너를 잃는 것이 큰 손실이니라. 그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떤 굴욕도 괜찮겠지. 말을 잇는 엘에게 마서는 고개를 끄덕해보였어.
엘과 통신을 마친 마서는 문득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검서와 눈이 마주쳤어. 남과 시선을 곧바로 마주치는 것이 어색했던 마서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느낄 정도의 선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검서는 그 사회적 합의에 동의할 생각이 없어보여. '무엇을 보고 있는걸까?' 줄곧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의 검서는 이쪽을 보고 있지만 마서의 눈이나 얼굴을 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검서의 눈은 그보다 아래, 마서의 팔과 손 끝을 보고 있어. 엑스칼리버를 든 쪽을. 갑자기 무기라도 휘둘러 업고 있는 란슬롯의 등을 베지는 않을지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쓸데없는 걱정이야. 마서의 엑스칼리버는 아까 무리하게 발동하려고 한 영향으로 부서져있는 걸. 지금으론 렙 1짜리 일반 요정에게도 별 신통한 데미지를 입히진 못할꺼야.
"부서진 건가?" "...네?" 순간 마서의 등이 움찔한 것은 다리를 다쳐 적에게 옮겨지면서 수중의 무기가 박살난 것까지 알려진 이 상황이 진짜 썩 좋지 않다고 생각됐기 때문이야. 좋기는 커녕 점점 나빠지고 있지. 아까 란슬롯의 제안도 떠올라. 물음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검서의 얼굴을 들여다봤지만 그 얼굴에 드러난 것은 공격적인 의도라기보단 방금 던진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쪽에 가까워보여. 이것도 검서가 표정을 잘 감추는 중이라면 별 소용없긴 한데. 여기서 거짓말하거나 숨겨서 달라질 것도 없어보이고 오히려 검서가 자신에게 호의-적어도 지켜주고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는 지금 고분고분한 태도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마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 "네. 아까 요정과 싸우던 와중에." 대답을 들으면 금방 다시 갈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검서는 이쪽으로 좀 더 다가오면서 다시 물었어. "그대의 검을 조금 더 가까이서 봐도 되겠나?"
그 말을 할 때 검서의 말투는 평소 성품이 곧고 정중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조심스러웠지만 검서에 대해 잘 몰랐던 마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 아까 전부터 이쪽을 모른 척 하고 있던 란슬롯만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지. 발목에 응급처치를 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없는 마서가 잠시 고민하다가 앉은 자리에서 제 검을 풀어내 검서에게 건네자 다가온 검서는 그 검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았어.
마서의 검, 원탁을 찬찬히 살펴본 검서가 낮게 신음했어. "이렇게 부서지다니, 원탁이.." 보통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텐데. 그 멀린의 기술이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심각한 검서 태도를 보자 왠지 대답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마서가 순순히 얘기해. 억지로 엑스칼리버를 발동하려고 했고, 그 영향으로 원탁이 부서진 것 같다고. "..엑스칼리버를? 어째서지?" 마서가 이어지는 말에도 순순히 대답한 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말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다음 이어질 검서의 반응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해. '기사들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검서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했어.
검서 입장에서 보자면 마서의 행동은 완전히 무모했어. 기사는 인간이 아니야. 물론 인간처럼 다치고 아파하긴 하지만 호수에서 조정을 거치면 거의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어. 아니, 복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가능성을 떠나서 기사를 위해 왕의 증거인 원탁을 훼손시키는 것은 완전히 주객전도인 셈이야. 이대로 엑스칼리버가 고쳐지지 않으면 더 이상 기사를 사용할 수 없는 마서는 왕의 자격을 잃게 되.
물론 검서 또한 자신의 부하를 더없이 아끼고 이들을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주고 보좌해왔던 이들을 이런 일로 놓아버릴 수는 없어. 그건 그들도 바라지 않을 것을 알아. 그건 자신의 노력에도 부하 기사들의 충성에도 보답하지 못하는 행동이야. 이제껏 외적에게서 지키지 못했던 백성들, 스러져간 아서들을 보며 항상 결심했어. 언젠가 자기 손으로 이 나라를 통일해 누구도 억울하게 죽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쭉 달려온 셈이야. 어릴 적부터 계속.
검서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마서가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어. "기사는 인간이 아니다. 알고 있나?" 말을 건네자 마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알고 있으면서 엑스칼리버를 부쉈다는 거지..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배운 자신과 군인이었던 기서와 다르게 마서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고 들었어.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까지는 왕과 그 의미에 대해 한번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을 소년. 실제로 그 기세가 귀찮을 정도인 기교의 장에 비해 마법의 파는 이제껏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지. 검서는 뭐라 더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엑스칼리버를 마서에게 돌려줘. 검서라고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왕이 되고 싶을만큼 왕좌가 탐이 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그저 왕이라는 호칭에 휘둘리는 후보에게 브리튼을 맡기는 건 논외야. 그리고 검서는 이제껏 그런 아서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
검을 돌려준 검서가 뭔가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자 마서는 고개를 갸웃해. 내 엑스칼리버 그렇게 많이 부서진 건가? 그렇지만 기네비어 씨가 고쳐줄 거고.. 오히려 경쟁자의 검이 부서진 것이 유리한 게 아닌가? 가끔 이런 식으로 결판나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저기, 검술ㅇ..." "이 근처는 요정이 별로 없는 듯 하오." 어느 새 근처를 둘러보고 온 란슬롯이 불쑥 검서에게 보고했어. 검서는 고개를 끄덕였지.
란슬롯은 생각났다는 듯이 이쪽으로 다가왔어. "다리 좀 보겠소." 아까 마서와 검서가 처음 만난 곳은 요정이 드나드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부러진 발목에는 근처 나뭇가지를 동여매 부목의 모양새만 간신히 갖추고 자리를 뜬 거야. 란슬롯이 저런 말을 하는 자체가 이 곳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안심한 마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펴 란슬롯에게 보여줘. 부목을 푼 발목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으아 이거 위험한데요 나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우는 소리를 하는 마서를 힐끗 본 란슬롯은 뭐라 말도 없이 마서의 발목을 움켜쥐더니 뚜뚝 소리나게 뼈를 맞춰. "!???!!!?" 간신히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는 것만은 면한-이라기보단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마서는 순간 느껴진 엄청난 아픔에 눈물까지 글썽거려가며 다리를 접어 제 발목을 쥐었어. "뼈를 맞췄소. 이제 부목만 잘 대면 걷는 걱정은 안해도 되오." 그런 엄청난 일을 하면서 당사자에게 말 한마디 할 수는 없었답니까? 그렁거리는 시야로 서포트 기사를 올려다보면 란슬롯은 왠지 즐거운 듯한 얼굴로 훌훌 자리를 뜨고 있어. 나 왠지 미움받는 거 아닌가? 워낙 많이 까여서 이걸 까임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보통 취급이라고 해야하는 지 알 수 없어진 마서는 왠지 슬픔을 느꼈어.
그 방법이야 어쨌든 란슬롯 말대로 마서의 발목은 아까보다 조금 편해졌어. 그렇다고 해도 걸어다닐 정도는 아니어서 업혀가는 신세는 여전했지만. 제 부하와 마서가 그러는 꼴을 말없이 보던 검서가 다시 출발하자고 말하자 마서는 검서가 아까 이상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을 떠올려. 검술의 성은 아까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걸까? 기사보다는 더 할말이 있는 눈치던데. 나이로 볼 땐 분명히 제 또래지만 앞서 가는 검서의 가끔 보이는 옆얼굴은 이제껏 실없는 소리 우는 소리 한번 안해봤으리라 생각될 정도야. 분명 마서 자신을 구해주고 도와주는 것도 그런 제 신념에 따른 결과겠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익을 고려한다면 다친 경쟁자는 두고가는 것이 맞는 거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만큼 왕좌에 관심도 많아 보이던데. 마서 자신이라면 왕좌니 뭐니 하는 건 아직도 좀 귀찮아서 하고 싶은 대로 구하겠지만.. 제 이익도 솔직하게 잡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신념이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검서 일행은 비경 걷기를 계속해. 가끔 갈래길이나 특이한 수풀 등이 나올 때마다 검서와 란슬롯이 주고 받는 말 소리를 빼곤 비경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어. 요정이 나오지 않으면 딱히 지형이 험한 것도 아니어서 별달리 위험한 것도 없어. 평탄한 걸음이 계속 되자 마서는 란슬롯의 등에 업힌 채로 깜빡깜빡 졸기 시작해. 태평하다기보단 오늘 하루 많은 일을 당해 몸이 지쳐있었던 데다 줄곧 아팠던 발목이 좀 편해지자 긴장이 풀리는 것도 있어서 반쯤은 기절한 것에 가까워. 그리고 란슬롯의 갑옷 딱딱하지만 햇볕 받아서 따뜻해..*´_` 아무리 그래도 라이벌 부하의 등에 업혀 골아떨어지는 것은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지만 그런 마서의 노력도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서는 한쪽 어깨 갑옷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아. 그런 마서를 눈치챈 검술의 성 두 사람은 아무리 도와주기로 했기로 거참 태평한 왕일세 생각하고 계속 제 갈길 가. 검서는 마서가 조는 와중에도 제 엑스칼리버는 떨어뜨리지 않고 꼭 잡고 있는 모양새를 주의깊게 보긴 했지만.
".....?" 어떤 소리에 깨어난 마서는 자기가 잠들었던 란슬롯의 등 위가 아니라 길 옆 큰 바위 옆에 기대어져 자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어. 이런, 너무 마음을 놓았나? 잠든 사이에 버려진 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고 했던 마서는 엉겁결에 딛은 발목을 잡고 다시 웅크렸어. "윽..." 아직 걷는 건 무리야. 땅으로 팔을 짚자 제 옆에 얌전히 놓여진 엑스칼리버가 잡혀. 이게 대체... 뭐라고 말하려 했던 마서는 아까부터 저 앞쪽에서 나는 것이 자신을 깨운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려.
"란슬롯씨.. 검술의 성...?" "키에에에엑!!!" 공기를 찢는 각성요정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저쪽과 마서와는 거리가 꽤 있음에도 마치 귓전에서 울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어. 그에 아랑곳 않는 듯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인 검서는 손에 든 검으로 요정의 어깨를 후려쳤어. "칫..!"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검서는 검을 거두어 뒤로 물러났어. 검서의 공격에 별 타격을 입지 않은 요정이 물러나는 검서에게 곧바로 손톱을 들이대자 검서는 간신히 검을 이용해 공격을 막아. "왕이여!" 요정의 뒤쪽에서 란슬롯이 다급하게 외쳐. 검서 쪽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 같지만 요정의 방해에 저지당해.
막 깨어난 마서도 지금 검서 일행이 밀리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어. 처음에는 마서네 각성요정도 일격에 해치운 이들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비경에서 각성요정을 처음 만났던 마서네에 비해 검서 쪽은 오는 길에도 각성요정을 많이 만났던 거야. 란슬롯의 실력이니 차례차례 해치워왔지만 그러는 동안 요정의 레벨도 꽤 올랐겠지. 그리고 이제 둘이서는 힘겨울 만큼 요정이 강해졌다는 건가. "이거 야단났네요.." 아직 각성요정은 마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어차피 검서네가 전멸하면 이 곳에 혼자 남겨질 수 밖에 없어. 어딘지 위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비경에서 요정이 나타나지 않길 빌며 구호를 기다리는 게 생존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마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기 검을 꽉 집어.
혹시나 해서 원탁을 열어보면 기사는 커녕 BC도 제대로 차있지 않아. 아마 이걸로 제대로 된 전투는 불가능할꺼야. 그치만 꼭 그럴 듯한 타격이라야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마서는 검집에서 검까지 조금 뽑아본 다음-입구가 망가졌는지 제대로 뽑히지도 않았다-검 손잡이가 아닌 검집 채로 손에 들었어. 투호 같은 것은 평소에도 영 취미가 안맞았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 위치보다 좀 더 요정 쪽으로 가야할 거야. 힘을 줄 수 없는 한쪽 발목 대신 한 팔과 성한 다리를 땅으로 짚어 밀어내면서 마서는 제 검을 냅다 요정에게로 던졌어.
들어간 데미지는 수치로 따지자면 아마 500대를 넘지 못할 숟가락 뎀이었지만 란슬롯과 검서 둘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던 요정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지. "마법의 파?!" 검서의 목소리보다 빨리 이쪽을 눈치챈 요정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마서를 쳐다봐. 눈이 마주쳤어. 마서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몸을 뒤쪽으로 뺐어. 이쪽이 요정의 주목을 끌어 둘에게 공격 기회를 주기로 한 것까진 좋은데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난다면 되려 이쪽이 요정에게 퇴치당할 판이야. 정말 어쩌다가 이런 일이 되어버렸을까.. 어울리지도 않는 일인데. 마서는 요정과 눈이 마주친채로 속절없이 아무 것도 잡지 않은 맨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어. 떨어져있던 거리가 무색하게 마서 쪽으로 빠르게 접근한 요정이 서슬퍼런 노성을 지르며 마서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어.
"예단검=폭풍참격!!" 요정이 이쪽으로 사나운 손톱을 세우는 것과 란슬롯의 스킬 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어.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쥐고 등을 보이고 있는 요정에게 돌진한 란슬롯은 요정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이어 검서의 공격까지 받은 요정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천천히 부서졌어. 쓰러지는 요정 잔해에 흙먼지가 물씬 피어나 마서는 낮게 기침해. 그렇게 한동안 비경에는 세 남자의 가쁜 숨소리만 울렸어.
길었던 전투가 끝난다음 검서일행은 재빨리 자리를 옮겼어. 요정은 동종의 기름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속성이 있거든. 비경을 걷다보면 비슷한 요정을 많이 만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다른 요정을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큰 일일꺼야. 다행히 일행 중에 아까 다리를 다친 마서를 제외하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어. 마침 좋은 동굴을 발견한 검서네는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기로 해.
말이 동굴이지 커다란 바위가 바람의 작용인지 뭔지 해서 조금 안쪽으로 파여있는 정도였지만 사방 중 세군데가 막혀있는 모양이 일행에게 안정감을 줬어. 혹여 동굴 안에 요정의 잔해가 없는지 확인하고 자리를 잡자 란슬롯은 주위를 둘러보겠다고 다시 나갔어. 자기가 곁에 있었음에도 제 주군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경각심을 주었던가, 딱히 그러지 않아도 왕의 주변에 위험이 없는 것을 살피는 것은 기사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지. 동굴 안의 안전이 확인되자 다리를 뻗고 앉아 에구구 하며 숨을 내쉬는 마서를 검서는 선 채로 가만히 바라봤어.
어찌하다보니 마서가 요정에게 던진 검은 검서가 주워서 손에 들고 왔어. 어찌하다보니? 아니야. 검서는 알고 있어. 그 왕을 상징하는 검이 진흙과 기계잔해로 범벅되어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져 있는 그 광경을 자신은 견딜 수 없었음을. 그리고 저 소년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다는 것도. 검서는 입을 떼기 앞서 자기 감정을 조금이라도 고르기 위해 노력해.
"아, 제 검이네요." 가져와주셨군요. 검서가 흠집과 흙투성이로 더러워진 자신의 검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닫자 마서는 앉은 자세에서 손을 들어 검을 돌려받으려고 해. 그러나 마서의 예상과 다르게 검서는 얼른 마서의 검을 건네지 않아. "검술의 성?" 마서는 고개를 갸웃해. 검서라면 엑스칼리버를 탐낼 필요도 이유도 없어. 이제와서 둔기로밖에 쓸수 없는 고장난 엑스칼리버를 압수하려는 것도 아닐테고. 검서의 단단히 쥔 손 안에서 엑스칼리버가 그극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왠지 화를 내고 있는건가 생각했지만 한번 눈을 꾹 감았다 뜬 검서의 눈동자는 거짓말처럼 고요했어.
"그대는 항상 엑스칼리버를 이런 식으로 대하나?" "-이런 식?" 마서는 잠시 생각해. 오늘 하루만 해도 억지로 슈퍼 발동해서 고장내거나, 요정에게 막 던지거나 땅에 굴리거나.. 그 밖에 평소에도 땅에 그림을 그리거나 손 안닿는 불키는 스위치를 누르는 데 쓴다든지 과일을 따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난 마서는 "하하 뭐;" 하며 입을 다물어. 검서의 눈이 설핏 가늘어져. 이거 왠지 나 혼나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려나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마서의 눈동자 속엔 일말의 죄책감이나 가책이 없어서 검서는 다시 손에 든 마서의 엑스칼리버를 꾹 쥐었어.
검서에게 엑스칼리버는 왕의 상징. 물론 기사를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원탁이 달렸으니 그 왕위를 실질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도 되는 셈이지만 검서는 성격상 엑스칼리버의 의미를 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었어. 엑스칼리버는 부서질 수 있어. 그 것을 위해 원탁의 조정자 기네비어가 있는 거겠지. 검서 또한 엑스칼리버가 왕의 무기의 의미를 가지는 이상 이걸 방 안의 장식용 샤벨처럼 취급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 그러나 무기답게 사용한다는 건 하찮게 굴린다는 의미가 아니야. 거기다 왕의 무기답게 사용한다라면 그 의미가 또 달라지지. 엑스칼리버는 자신이 이 브리튼의 조각이나마 왕답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이며 각 아서가 가지는 유일한 왕의 상징이야. 이 왕의 상징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이 부분에서 그가 왕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드러난다는 거지.
검서라면 엑스칼리버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해. 물론 왕의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 원탁은 중요하지만 설사 엑스칼리버가 원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더라도 검서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을 거야. 왕의 상징. 이 검 한자루 때문에 뽑지 못한 왕들이 안달하고 반란을 일으켰어. 롯뜨 왕이 그런 것처럼 이 검 한자루만으로 왕이 결정된다고 말하는 건 물론 아니야.
어차피 페이가 처음에 100만 몇천번째 아서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도 엑스칼리버에 '선택'받은 부분은 검서 자신 안의 아주 미미한 부분이겠지. 그 모래알같이 작은 부분을 100만명 되는 아서들이 공유하고 있는 거겠고. 그러나 그 자격을, 채로 쳐내듯 골라 어떤 미세한 요소를 이유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이 검 한자루기 때문에 검서는 그 의미와 중요성을 존중하기 위해 엑스칼리버를 들고 싸우고 있어. 그러나 눈 앞의 소년은 어떨까. 오늘 하루동안 보인 마서의 모습은 엑스칼리버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조차도 존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왕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어떠어떠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뜻. 그리고 그 품은 뜻이야 어쨌든 이제껏 자신을 의지하고 왕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기사들. 백성들. 그 어느것 하나도 마서는 안중에도 없어 보여. 이런, 이런 왕이라니. 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을 느껴.
자기를 응시하는 검서의 눈빛이 말없이 곧아서 마서는 금방 검서의 말이 단순한 자신의 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 아서, 너는 대체 왕좌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사실 마서에게 이런 질문은 전혀 낯설지 않았어. 당장 성 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성냥개비 퍼즐이라도 쌓고 있을라 치면 서포트 요정과 기사가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퍼부어대곤 했으니까. 왕, 이라. 자신은 평범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왕좌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야. 마서는 잠시 대답에 앞서 다른 나라의, 그것도 이런 성실함 그 자체인 왕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망설여. 아마 둘의 길은 확연히 달라서 이제까지와 마찬가지 앞으로도 다시는 이어지지 않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해도 좋지 않나. 아무 것도 잡지 않은 손으로 무릎께의 옷자락을 쓰다듬으며 마서는 천천히 입을 열어.
"네, 전 제 마음대로 엑스칼리버를 대하고 있어요."
마서는 제왕학을 배운 적이 없어. 딱히 제왕학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남을 다스리기 위한 학문은 아예 뜻을 두지 않았지. 왕이 되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자기 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도 뽑은 후에도 없었어. 그렇지만 엑스칼리버는 그런 자신을 선택했어. 다스린다는 건 뭘까? 왕이 된다는 것은?
제왕학에 대해서는 마서도 들어본 적은 있어.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라지. 군학은 군대를 이끄는 학문, 행정학은 나라를 꾸려가기 위한 것이고. 그렇다면 제왕학을, 군학을, 행정학을 배우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까? 책에 적혀있는 데로 완벽하게 행동하면 나라는 풍요로워지고 백성은 번성하는 걸까? 마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엑스칼리버는 이런 자신보다 롯뜨 왕 등을 선택했겠지. 이론과 실제는 달라. 그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왕의 조건과 이 브리튼이 원하는 왕의 조건도 다른 셈이야. 작전과 음모와 소망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이 브리튼에서 마서는 결심했어. 앞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고 그저 자신인 그대로 있는 것이 자신의 왕의 길이라고.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라면 말은 좋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대답보다는 훨씬 듣기 그럴싸해. 그러나 마서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엑스칼리버를 뽑은 그 날 전까지 한번도 백성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그러던 것을 왕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180도 바꿔서 그렇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고. 부끄러울 것도 비참할 것도 없이 이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런 마서가 왕으로 선택받았던 것도 사실. 마서 자신조차 몰랐던 왕의 조건을 엑스칼리버가 알아보고 선택한 거라면 그야말로 자신은 지금의 상태를 버릴 필요 없어. 마서는 브리튼을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마서 자신으로써 행동하고 기뻐하고 분노할 뿐이야. 군왕으로서의 자비나 위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일 수 있는 관용과 측은지심으로 브리튼을 대할 거야. 해야 할 때라는 건 왕으로서가 아니라 응당 인간으로써 해야 할 때야. 우는 소리도 하고 도망도 칠 거야. 그건 무척이나 인간인 마서답지. 태어날 때부터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고귀한 사람에게 나라는 다스림받는 걸까? 마서는 고개를 저었어. 백만명의 '평범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 그걸로 충분히 멋지지 않을까?
"당신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요." 수많은 아서들 중에서도 당신은 '본래부터 왕으로써 준비된 것' 같거든요. 말을 마치자 마서는 더는 할 말도 없다는 듯 다리를 모으고 앉아 태연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검서는 다소 놀란 것 같은 표정-어쩌면 화난 것도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어.
사실 검서는 마서가 생각했던 것만큼 마서에게 경악하거나 경멸을 품지는(!) 않았어. 그보다 검서가 느낀 것은 어느 쪽이냐면 깜짝 놀랐다에 가까워. 확실히 마서의 대답은 의외야. 검서는 이제껏 역사책 속에서나 실제로나 '백성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왕들을 많이 봤어. 멀리는 100만의 아서들 중에서, 또 가깝게는 저 11인의 지배자가 내세운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그들 모두가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지금으로썬 불가능하고 먼 훗날에 역사 속에서나 가능할테지. 그리고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검서는 자기가 그것까지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자신. 다만 검서는 의문을 느꼈을 뿐이야. 그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일, 다시 말해 백성으로인해 벌어진 일이라면 왕의 책임은 대체 어디에 있지?
마서의 대답이 의외라고 했었나? 그래 의외야. 정말 완벽하게 의외였어. 눈 앞에 있는 이 책임감없어 뵈고 느긋한 왕이 자신과 똑 닮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처음엔 검서도 그렇게 생각했어. 옛 사람들이 만든 올바른 학문대로, 정해진 길대로 따라가는 바른 왕이 될 거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검서가 보고 배웠던 많은 책들은 지금 상황의 모든 경우의 수가 적혀있는 예언서가 아니야. 다만 '이런 경우에는 대략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가 한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책에 가깝지. 결국 상황에 맞춰서 이리 하겠다 결정하는 것은 왕인 검서 자신이야. ―게다가, '마음대로' 그 외에 더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검서가 어릴 적부터 제왕학이니 뭐니 왕이 될 준비를 해온 것은 부모가 거기 놓아준 레일이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의무감? 사명감? 헛소리. 다른 사람들이, 혹은 제 부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검서는 왕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있지는 않아. 검서는 바위에서 검을 뽑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 그 모든 공부와 훈련과 다른 차등한 것을 버리고 쉼없이 달려왔던 길은 이 순간을 위한 것임을. 다름 아니라 아주 어릴 적 왕과 영웅의 무용담을 귀로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은 이 눈부시도록 오롯하고 황홀한 왕좌를 마음 속 깊이 소원해왔음을!
결국 이러니저러니해도 검서 또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왕을 하고 있다는 거야. 검서는 마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
"마법의 파," 네, 나는 이런 사람이니 훈계도 경멸도 소용없는데요~ 등등의 말을 주억거리던 마서는 검서가 묘하게 고무된 태도로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를 말하자 할 말을 잃었어. "사실 백성의 민원을 받아들이는 일도, 서류 작성도, 이러저러한 사업 추진도 좋아한다. 나야말로 내 마음대로 왕을 하고 있는 셈이군." 이런 말은 쑥쓰러워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네만.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네에..." 민원 수리도 서류 작성도 사업 추진도 좋아하지 않는 마서는 조용히 뭐 그렇네요, 같은 말만 덧붙였어. 그렇다 해도 그 검술의 성이 이런 사람일 줄이야. 그 복장-마치 나 왕이오 하고 주장하는 듯한 망토나 뭐..-이나 말투 태도를 볼 때 왕좌에서 경전이나 줄줄 읊으며 옛 왕이 가로되 어쩌구 저쩌구, 무릇 왕이란 미주알 고주알 이런 거나 할 사람으로 보였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이해 못할 사람은 아닌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왕의 업무에 대해서 읊다가, 마서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을 눈치채자 큼큼 하며 모습을 가다듬는 검서의 모습이 좀 다르게 보여 마서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 큭큭 웃었어.
"...? 그대 잠깐만." "네?" 뭘 발견한 건지 갑자기 다가온 검서가 옆머리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마서는 다시 고개를 갸웃해. "상처가 났군. 요정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검서가 만진 뺨에 지금까지는 몰랐던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아까 요정 손톱에 긁힌 것 같아. 워낙 얕은 상처라 다쳤을 당시도 지금까지도 느끼질 못했던 거야. 여자애도 아니고 얼굴에 상처는 뭐.. 그치만 아파요 다쳤어요;ㅅ; 버릇처럼 투덜거리는 마서를 잠시 본 검서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걷어낸 머리칼을 만지작거렸어. "그대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좀 더 몸을 소중히 여겨줘." 그리고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이 저런 왕(자님) 대사. 말을 건넨 것이 예쁜 이성도 아니건만 순간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진 마서는 얼굴 표정을 감추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 네.." 대답했어. 막상 말을 건넨 상대는 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이 녀석 천연이구나.. 검술의 성에 대한 의외의 사실 또 하나 추가했어.
그리고 검술의 성 제일의 기사이자 왕의 오른팔인 란슬롯 경이 주인과 덤이 기다리는 동굴로 돌아가자마자 본 것은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얼굴을 들고 있는 마서와 그 얼굴을 빠져드는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주인의 모습이었어. "왕, 왕이여 이게.." 대체 무슨..? 간신히 떨리지않게 밀어넣은 목소리를 들은 검서는 아무렇지 않게 마서 얼굴의 상처를 언급했고 마서는 뭔가 찔리는 사람-사실은 그제나 이제나 란슬롯 등에 업혀갈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처럼 고개를 숙였어. 그 뒤로는 제 주인이 마치 어느 샌가 마서와 절친한 친우사이나 된 것처럼 손에 들었던 마서의 흙투성이 엑스칼리버를 제 망토로 꼼꼼히 닦아 내밀었는데, 서계실 적이나 걸을 적이나 근사하게 휘날려 늘상 왕의 위엄을 보여주던 망토가 진흙과 모래투성이가 된 것을 란슬롯 경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어.-저 왕이 뭐라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훗날 왕에게 "마법의 성에 대해 내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듣기 전에도 들은 후에도 란슬롯에게 의문이 되어 남았지. 막상 당사자들은 후에 등장한 란슬롯에게는 일언반구도 끼워넣지 않고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왕의 오른팔의 직감에 따르자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란슬롯의 심기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란슬롯에게 업히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마서의 삭신에 일말의 불편함을 남겼어.
여튼 그간의 고생에 비해 비경을 모두 지나 마서의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전에 없이 평탄했어. 늦은 시간임에도 비경 앞까지 마중나와 기다리던 마법의 파를 보고 마서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기쁘게 웃었어. 대체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큰일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요정과 기사에게 꾸중듣긴 했지만. 멋대로니 어쩌니 하던 것에 비해 신망이 깊지 않은가. 그간 신세 많이 졌다고 인사하면서 두 왕은 다른 듯 닮은 서로의 길을 떠올리고 잠깐 시선을 마주쳤어. 그러곤 둘 다 엑스칼리버가 뽑은 왕의 조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똑 닮았기 때문에 앞으로 절대 다시 포개지지 않을 서로의 궤적. 굽히거나 휘기엔 피차 아쉬울 곧은 길.
성으로 돌아온 두 아서는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자기 방침을 계속해가. 그들 스스로는 다시 만나 이런 식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일은 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둘은 아발론이나 마녀의 처우나 여러가지 면에서 부딪치게 돼. 그리고 어느 한쪽도 무조건적인 강요나 양보없이 맞서고 행동하면서 나름 치우침없이 브리튼을 지배하게 되지. 이 때가 브리튼의 다시 없을 황금기인지 어떤지는 먼 후에나 알 일이고 둘 사이에 또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후에도 모를 일이니 여기서는 일단 그랬다는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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