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쯤 배경으로 미대생 미유키/사와무라X유곽에서 자란 후루야 + 하숙집 주인 크리스
썰체 주의
미알못 주의
써놓고 보니까 시대 배경은 별 의미없는 거 같기도 하고?
미유키랑 사와무라는 도쿄 내 그럭저럭 유명한 예대에 다니고 있음 편의상 T대라고 할까. 미유키는 조소과 3학년, 사와무라는 동양화과 2학년. 둘 다 같은 학교 4학년 선배 크리스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사는데 뭔가의 인연으로 미유키, 사와무라랑 알게된 크리스가 하숙비를 싸게 줘서 나가노에서 유학온 사와무라는 물론이고 도쿄 출신이지만 집안 내에 작업 장소가 궁한 미유키도 같이 삼. 집세는 시세보다 상당히 아래지만 크리스네 집은 상당히 부자라 집세로 살림을 충당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크리스는 잘 아는 사이나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을 하숙생으로 주로 받고 있음. 집 자체는 그럭저럭이지만 창고 비슷한 별채에 작업실을 꾸밀 수 있어서 상당히 괜찮음.
사와무라랑 미유키는 동아리 선후배라고 할까.. 미유키는 동아리 회장이랑 아는 사이라 자리만 메꿔주는 그런 존재였는데 사와무라가 1학년 때 동아리에 들어오게 되면서 미유키랑 인연을 쌓음 미유키는 남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동아리 첫 OT부터 시작해서 사와무라가 미유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기는 바람에 멱살을 잡힌다던지 이름을 막 불린다던지를 당하며 차근차근 인연을 쌓았음 처음 겪는 대학 생활을 지나치게 만끽한 나머지 1학년 2학기 때 기숙사 쫓겨나게 생긴 사와무라한테 크리스네 하숙집이 비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미유키임. 막상 사와무라는 자기 사정을 우연히 알게된 *크리스 선배*가 자기한테 제안한 걸로만 알고 있지만.
이야기는 사와무라가 그럭저럭 대학생활 1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접어드는 겨울에 시작됨. 가끔 악우 쿠라모치가 하숙집에 들러서 시비를 털고가는 것을 제외하면 연말이고 연초고 따뜻한 하숙집에 앉아서 미술서적 따위를 들여다보는 것이 일인 미유키랑 다르게 성격도 활발하고 인맥도 쩔어줘서 연말연초면 각종 술자리에 불려가는 것이 일인 사와무라..지만 묵을 곳을 잃은 자신을 구제해준 대선배 크리스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고려해서 자체 통금시간인 오전 0시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날도 거실에 걸어둔 고풍스러운 괘종시계에서 막 12시를 알리는 참에 현관이 부산스러운 것을 듣고 코타츠에 들어가 있던 크리스와 미유키는 사와무라가 돌아왔구나 하고 생각했음. 근데 늘 동작이 빠릿해서 바로 현관 열고 -> 복도 걸어온 다음 -> 문 활짝 열면서 미유키, 크리스 선배 다녀왔슴다! 를 외치는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한참을 기다려도 들리지 않는 거임. 뭐 짐같은 거라도 들었나? 싶어서 미유키가 꾸물꾸물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미닫이 문을 열었는데 복도랑 곧게 연결되어 바로 보이는 현관 앞에 사와무라 말고 뭔가 하얀 형체가 같이 서 있음. 응? 미유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림.
괜찮아, 들어오라니까? 추우니까 빨리! 같은 말을 하며 재촉하고 있던 사와무라가 이쪽으로 고개를 팍 돌리자 곁에 서 있던 하얀 형체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미유키는 왠지 그 순간 등줄기로 오싹하게 뭔가가 달려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아직 현관 앞에서 망설이느라 반쯤 열린 문 뒤에서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모를 가는 눈발이 바람에 정처없이 휘날리는 것을 등지고 서 있는 형태는 사람이었음. 눈으로라도 만들어진 건가 착각하게 만든 하얀 색은 입고 있는 기모노였고. 사와무라는 이제 말로 설득은 포기한건지 그 형체를 끌어당겨서 집 안에 들여넣고 문을 닫았는데 마루에 올라선 형상이 상당히 가늘고 길었음. 겨울인데도 바닥에 디딘 발이 하얀 맨발이어서 사와무라의 재촉에 못이겨 내딛는 발자국에서 사락사락하고 눈 내리는 소리가 났음. 창백하고 하얀 얼굴. 미유키는 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장면에 잠시 넋을 빼고 있다가 방 안에 같이 있던 크리스가 무슨 일이야? 사와무라? 하면서 말을 걸자 정신을 차렸음.
날씨를 고려하지 않아도 지금 계절과 전혀 맞지 않은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를 어정쩡하게 방 밖에 세워두고 나서 사와무라를 방으로 끌고 들어온 미유키는 대화라고 쓰고 놀림과 넘어감이라고 읽는- 그들 사이에선 익숙한 의사소통을 시작했음. 저건 누구고 어디서 데려왔냐는 말에 사와무라는 누군지 모르겠고 집에 오는 길에 저런 차림에 신발도 없이 눈 위를 걷고 있었노라고 대답함. 길이라도 잃은 걸까 싶어서 말을 걸었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고 그대로 뒀다간 얼어죽을 거 같아서 데리고 왔다는 것 같음. 그래 어디서 뭐하던 건지 모르는 녀석을 집에 데리고 왔다는 거냐, 고 미유키가 기가 막혀하자 사와무라는 사람 그렇게 사는 거 아니라며 무정한 놈 미유키 카즈야라고 되려 호통을 침. 단순히 미아라면 어떨까 싶지만 이런 날씨에 저런 차림 하고 다니는 게 정상적인 사연을 가진 녀석 같냐.. 이 녀석 어디까지 바보인 거야 하고 미유키가 말을 잃었을 때 가만히 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리스가 일단 방으로 들이자고 추워보인다고 말함. 사와무라가 문을 열고 방 밖에 조용히 서 있던 그를 데리고 들어옴. 가까이서 보니까 상당히 장신인 것은 둘째치고 옷 밖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가 붉게 얼어있어서 미유키도 이번에는 끙 소리를 내며 따뜻한 이불 속 자리를 양보했음.
이후 미유키는 몸이 좀 녹거들랑 이름이라던지 이것저것 사정에 대해 물어둘 생각이었지만 이 녀석이 따끈한 이불 속에 들어가자마자 노곤노곤하게 녹아버려서 실패함. 거기에 옆에서 오 잔다, 잔다! 를 외치던, 원래부터도 술자리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좀 취해있던 사와무라까지 그대로 잠들어버리자 이 뒤처리를 하느라고 뭘 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짐. 결국 다음 날 날이 밝을 때까지 미유키 사와무라 크리스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녀석은 한 지붕 아래서 따뜻하게 그날 밤을 보냄.
다음날 나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밥 잘먹고 다녀오겠슴다! 외치는 건 사와무라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경찰 부르라고 귀뜸하고 나가는 건 미유키임. 안그래도 크리스 선배는 몸 안좋아서 휴학하는 중이라 더 신경이 쓰임. 거기다 마치 눈으로 빚은 것처럼 하얗게 빛나는 저 낯선 형태가 신경쓰이는 건 미유키뿐만 아니라 사와무라도 마찬가지라. 집을 나서기 전 간밤에 그를 들어다 재웠다는 방문 앞을 사와무라는 괜히 한번 쓱 보고 학교로 나섬.
집에 남은 크리스가 셋이 같이 먹은 아침 밥상을 치우고 어질러진 방안을 치우고 나서 점심 전에 따끈한 차를 마실 때 쯤 그가 깨어남. 잠에서 막 깨어나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무표정한 얼굴 가득 의아한 빛을 띄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 크리스는 미유키의 걱정과는 달리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함. 어느 쪽이냐면 야생동물 같은 느낌인가. 자기도 모르게 예전에 본가에서 길렀던 커다란 개를 떠올렸던 크리스는 미유키도 아니고 이런 실례인 생각을 하다니, 하면서 생각을 지움. 밤에 재울 때 불편할까 싶어서 벗겨둔 기모노 겉옷은 난로 옆에 걸어 말려두었는데 이게 그냥 하얀 천이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빛의 반사에 따라 화려하게 빛나도록 수가 놓아져 있는 옷감임. 딱 봐도 고급품이고 손이 많이 가는 옷임. 저런 옷을 입고 눈 내리는 한밤 중에 맨발로 길을 걷고 있을 사연은 과연 어떤 것일까. 크리스는 뭐라 말하는 대신 식탁을 가리키며 밥 먹겠냐고 물어봄. 늦은 아침밥을 차려주고 그가 밥 먹는 것을 유심히 본 크리스는 기모노가 그렇게 편해보이지 않은 데다 군데군데 더러워져서 젖어있는 걸 깨닫고 자기 옷을 내줌. 흰 셔츠에 검은 바지. 길이는 그럭저럭 맞았지만 품이 꽤 남았음. 그는 이런 양장이 어색한 듯 자꾸 옷깃을 만지작거렸음.
그날 사와무라는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음. 평소 같으면 과 동기 하루이치나 카네마루, 혹은 동아리 선배들이랑 밥을 먹고 오거나 어딜 들렀다 오기 마련인데 이 날은 용건 끝나자마자 바로 집에 들어와서 크리스 선배한테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서 그 녀석 어딨슴까? 를 외쳤음. 크리스는 거실을 가리킴. 물이 가득 담긴 대야 안에 감자가 들어있고 그 옆에 후루야가 숟가락과 거의 까지지 않은 감자를 들고 있음. 돕고 싶어하던데 칼을 주면 다칠 거 같아서. 오늘 저녁은 카레다/우오 카레임까! 신명나게 외치며 다가간 사와무라는 칼을 집어들고 감자를 깎기 시작함. 가끔 감자 들고 멍해있는 후루야한테 숟가락 뺏어서 일케일케일케! 시범을 보이는 것도 잊지 않음. 후루야는 그거 따라함. 썩 잘한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크리스는 그걸 보면서 사와무라 형 노릇하느라 신났구나 라고 생각함.
미유키는 저녁이 다 지나서야 돌아왔음. 현관 앞에서 집안 가득 퍼진 고소한 카레 냄새를 맡으면서 오 카레네 하고 들어온 미유키는 식탁에 크리스 사와무라 + 후루야가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걸 자연스럽게 지나쳐서 식탁 빈 자리에 앉음. 사와무라가 매정한 미유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면서 고양이눈을 떠도 농담으로 넘길 뿐 후루야한테는 아무 말도 안함. 후루야는 눈만 깜빡거린다음 계속 밥 먹음. 밥 먹는 속도도 느리고 양도 적어서 사와무라가 자꾸 더 먹으라고 재촉함. 미유키는 니 밥이나 제대로 먹으라고 놀림.
이날 미유키는 얼마 되지 않는 인맥을 잘 타서 경찰서 쪽을 알아보고 왔었음. 혹시 요 며칠 새에 실종신고 들어온 거 없었냐고 묻는 미유키 말에 아는 선배는 왜 누구 산에 갖다 묻기라도 했냐? 고 농담함. 미유키는 네 만약 신고 들어오면 잘 부탁드려요 선배! 하고 넘김. 여튼 선배 말에 따르면 신고된 건 없지만 이 뒤로 조금만 더 가면 홍등가라 그 쪽에서는 사람을 잃어버려도 신고도 안하고 자기들이 알아서 자체적으로 처리한다고 지나가는 말로 덧붙임. 홍등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커다란 사내놈인데? 미유키는 고개를 저음. 가는 김에 경찰서 내 보드에 붙어있던 흉악범 리스트도 한번 쓱 훑었음. 아는 얼굴 없음.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리스나 사와무라한테는 그렇게 말해두긴 했지만 미유키는 사람 출신을 가리는 편은 아님. 남의 사정 시시콜콜하게 꿰고 있는 취미도 없고 당장 같이 있어서 재미있고 흥미로우면 그걸로 족함. 이거 관련해서 쿠라모치가 넌지시 말한 적도 있고. 다만 미유키가 후루야의 정체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크리스 때문임. 사와무라가 데려오긴 했지만 후루야를 데리고 있는 곳은 크리스네 하숙집임. 이 말은 당장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하는 쪽은 집 주인 크리스라는 얘기지. 그 바보가.. 알았다면 존경하는 선배한테 이런 부담을 주진 않았겠지. 여튼 미유키는 지금 하숙집이 상당히 마음에 들고 인간관계 협소한 자신에게 크리스-미유키-사와무라 이 관계가 상당히 괜찮은 관계라는 걸 잘 알음. 마음에 드는 건 평소에 잘 아껴둬야함. 밥을 먹으면서 미유키는 티 안나게 맞은 편의 후루야 얼굴을 쓱 봄. 어딜 봐도 범죄자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밥 먹으면서 사와무라가 근데 후루야가 입은 옷 크리스 선배 껌까? 기모노가 아님다 하고 물어봄. 미유키도 크리스도 후루야..? 하는데 사와무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밥 꿀떡 삼키면서 아까 이름 물어봤슴다 이녀석 이름 후루야라고. 후루야:(끄덕) 그거 듣고 미유키는 이름 알면 신원확인 더 쉬워지는거 생각하고 크리스는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일도 좀 도움받고 가끔 말도 걸었는데 한마디도 안하더니 감자 깎는 그 잠깐 사이에 이름 들었나 역시 사와무라구나 하고 생각함. 뭐야 제대로 말할 줄 아네 하도 말없길래 못하는 줄 알았는데. 크리스와 동일하게 후루야가 말하는 거 한마디도 못들었던 미유키가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사와무라는 미유키 꼭 말을 해도~! 하고 도끼눈을 떴고 후루야는 먹던 밥에서 시선을 올려서 미유키를 잠깐동안 빤히 쳐다봄. 이번에도 그 시선에 좀 움찔한 미유키는(물론 티는 안냈다 내면 버릇없는 사와무라가 분명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다시 시선 내리는 후루야를 보면서 그건 그렇고 분위기 묘한 녀석이네.. 도통 산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되는 생각을 함. 그리고 그 직후 후루야가 젓가락질 하다가 반찬을 흘려서 미유키는 으음.. 하고 사와무라는 이봐 후루야 젓가락을 잘 쥐어야지 잔소리하고 크리스는 하하 웃음.
후루야가 이 집에 온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요란하게 기지개를 펴고 일어난 사와무라는 오늘도 나갈꺼냐고 묻는 크리스한테 고개를 저으면서 오늘은 작업실에서 그림 그릴 검다! 하고 대답함. 학사일정 다 마무리된 겨울방학이라 알바나 약속 빼곤 별 할 일 없는 사와무라가 그동안 밥이다 술이다 해서 바깥으로 내돈 이유는 사실 약간의 슬럼프? 비슷한 거였는데 그러던 사와무라가 모처럼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에 크리스는 잘 되었다고 생각함. 나중에 간식이라도 가져다줘야겠다. 고작 별채로 가는 건데도 다녀오겠슴다를 외치는 이 활발한 후배가 크리스는 정말 싫지 않음. 미워하기 힘든 성격이라고 할까.. 사실 어깨 다친 걸로 그림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크리스의 마음을 고쳐먹게 만든 계기도 사와무라가 준 거라서. 우리집 하숙생이기도 하고 이것저것 편의를 봐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듬. 후루야를 맡은 것도 그 마음의 연장선임. 미유키가 걱정하는 게 뭔지도 알지만 그보다는 아무 것도 모르고 헤헤 웃고 다니며 오만잡군데 오지랖을 펼치는 귀여운 후배를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함. 문제 생겨도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집에 힘도 돈도 의지가 되는 아버지도 있고. 후루야가 위험해보였으면 크리스가 먼저 나서서 사와무라 빼내고 선 그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라서.. 지금은 어딘가 모자라보이는 후루야랑 그거 챙겨주면서 신나하는 사와무라가 귀여울 뿐임.
미유키는 아침 먹고 나서 방안에서 뭘 하는지 안나옴. 크리스는 이럴 때 미유키를 가만히 두는 게 좋다는 걸 알아서 그냥 놔둠. 또 잡지나 유명 포토그래퍼 사진 같은 거 잔뜩 보면서 자기 생각에 잠겨있겠지. 미유키가 한 며칠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이게 또 상당히 괜찮음. 남들은 자유분방한 표현이니 신경 쓰지 않은 정밀한 구도니 뭐니 하지만 사실 미유키는 보이는 거보다 훨씬 빡빡한 성격임. 자기가 좋아하는 걸 조용하고 꾸준하게 쌓아가는 스타일. 물론 센스는 타고난 거지만.
마지막으로 오전 늦게 일어난 후루야는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크리스를 도움. 말은 별로 없지만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식기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거나 크리스가 어깨 때문에 지지 못하는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함. 항상 멍해서 눈치가 빠른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크리스한테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식하고 있다고 할까. 시킨 일을 다하고 나서는 또 뭐가 있냐는 듯 크리스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게 또 새끼 조류같아서 좀 귀여움. 물론 덩치는 안귀엽지만. 크리스는 적당히 할 일을 하고 나서 괜찮다고 말함. 아무 말 없고 괜찮은 눈치길래 처음에 일을 좀 많이 시켜봤더니 후루야 체력에 방전이 와서.. 힘은 있지만 체력이 좀 약한 거 같음.
그렇게 느긋한 오전을 보내자 사와무라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옴. 밥 먹으면서 진척상황을 묻는 크리스한테 사와무라가 거의 다 됐다고 큰 소리치고 그런 사와무라를 후루야가 빤히 쳐다봄. 나 그림 그려. 보러 갈래? 말하자 후루야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임. 마침 오전에 할 일을 거의 다 한 크리스가 흔쾌히 허락하자 사와무라는 신나서 후루야를 붙잡고 작업실로 감.
그림 그리는 도중이라 작업실 안은 빈말로도 깔끔하다고 볼 수 없는 모양새였지만 사와무라는 신경쓰지 않는 듯 대강 밀어서 후루야가 있을 자리를 만듬. 바닥에 널린 종이며 붓 등을 보던 후루야가 사와무라가 그리던 그림을 보자 사와무라는 이거 그리는 도중이라 좀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너한테는 보여줘야지! 하면서 보여줌. 하얀 종이 위에 눈 밭에 선 하얀 발이 그려져있음. 맨발이 눈에 파묻혀있는 장면이지만 형태가 일그러지지 않고 따뜻한 느낌의 색채를 써서 그렇게 춥거나 괴로워보이지는 않음. 너 처음 봤을 때 맨발이었잖아. 어쩐지 좋은 느낌이 들어서. 아, 넌 추웠을 테니까 좋은 느낌이라고 하는 건 좀 아닌가? 멋대로 말하는 사와무라의 말을 들으면서 후루야는 한참동안 그림을 들여다 봄. 그날 밤. 차갑다 못해 끝내는 아무런 느낌조차 나지않던 어디까지나 이어져있을 것 같았던 하얀 눈길. 그리고.. 후루야는 사와무라에게 있잖아, 하고 말을 검.
뭐라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 후루야의 시선이 자기가 쥐고 있는 붓에 닿아있다는 걸 알아채서, 나 하는거 보고 신기해보여서 해보고 싶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후루야의 손에 제 붓을 쥐여줄 때만 해도 사와무라는 별 뜻이 없었음. 남는 종이도 꽤 있고 지금 그리는 그림 어디 낼 거 아니니까 급할 것도 없고. 하얗고 길고 섬세한 손가락 사이로 붓이 걸리는 게 꽤 그럴 듯한데 했던 것도 찰나, 그 뒤 붓 끝에서 펼쳐진 선에 사와무라는 숨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음. 종이 위에 붓이 몇 번 더 그어지자 화면 위는 거칠게 그려진 커다란 손 하나로 가득 채워졌는데 비례를 딱딱 맞춘 것도 아니고 검은 먹과 하얀 종이 외엔 색조차 없었지만 손은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튀어나와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거 같았음. 선 전체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생동감. 사와무라는 몇 번이고 말을 고르다가 딱 한 마디 했음. 이거 내 손이야..? 후루야는 고개를 끄덕임. 아. 사와무라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림. 내가 그날 후루야의 발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후루야는 내 손을 보고 있었구나. 후루야한테는 이렇게 보였던 거야. 후루야한테서 건네 받은 붓 끝에서 먹물이 옮겨 옆의 아직 쓰지 않은 종이에 검은 얼룩을 크게도 만들 동안 후루야의 그림을 들여다 보던 사와무라는 후루야가 저기, 종이.. 하자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침. 후루야, 더, 더 그려봐! 여기! 더!
저녁 먹을 때쯤 미유키는 겨우 틀어박혔던 방안에서 나왔음. 머리를 긁적여서 생긴 작은 까치집을 머리에 얹고 나온 미유키는 집 안이 조용하다고 생각함. 크리스 선배. 미유키는 또 뒷머리를 문지르며 물어봄. 사와무라녀석 어디 갔어요? / 아니 별채에. 오늘은 그림 그린다고 하던데. 다시 빨래 개기에 열중하는 크리스를 잠깐 본 미유키는 고개를 기울임. 그.. 후루야는요? 보통-이라고 할 정도로 오래 같이 살진 않았지만 이 시간이면 크리스 옆에서 요령없이 다 구겨진 빨래뭉치를 만들고 있을 녀석이 안보임. 크리스는 반듯하게 개어진 빨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함. 후루야도 같이 있어.
저녁 먹을 때가 다 지나서 슬슬 데리러 가야 하나, 고 고민하고 있을 즈음 사와무라랑 후루야는 집으로 돌아왔음. 사와무라는 품 안 가득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다 그림이었음. 평소랑 달리 차려둔 식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실 넓은 곳에 큰 소리로 선배들을 불러놓은 사와무라는 넓은 공간 한 가득 가지고 온 그림을 펴놓았음. 새, 등잔, 어딘지 모를 마루바닥, 손, 창으로 본 풍경, 사와무라의 벗어둔 신발, 하얀 개, 별채에 쌓아둔 짐들, 겨울날의 풍경... 소재는 다양했지만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이었고 평소 자주 보는 사와무라의 솜씨는 아니었음. 설마. 이상한 예감에 얼굴을 찌푸린 선배들 대신 사와무라가 소리쳤음. 굉장하지 않씀까? 이거 다 후루야가 그린 검다!
미유키는 얼른 가까이에 펼쳐진 그림 하나를 집어올렸음. 늘상 보는 별채 한 구석에 사와무라가 그림 그리느라 벌려놨을 종이뭉치와 그림도구들이 덧붙여진 익숙하다면 익숙한 장면. 다만 그런 것일 뿐인데. 미유키는 생각함. 여기가 이렇게 눈길을 끄는 장소였던가? 먹이 배어 버스럭거리는 종이의 감촉도 텁텁한 먹 냄새도 익숙한데 미유키는 자기가 영 모르는 공간에 놓여진 것 같다고 생각함. 이게 이렇게 마음을 끄는 것이었나?
아무 말도 없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선배들을 보고 사와무라가 씩 웃음. 저도 깜짝 놀랐슴다! 후루야녀석, 그림 배운 적 없다고! 대단하지요! 그 목소리에 담겨진 감탄은 다른 감정일랑은 요만큼도 없는 순수한 것이어서 미유키는 그림에서 눈을 떼고 사와무라를 쳐다봄. 너.. 괜찮냐? / ? 뭠까? 앗!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픔다! 밥! 바쁘게 식탁에 달려들기 시작하는 사와무라를 두고 미유키는 자기 손에 쥐었던 그림이랑 그 때까지 옆에 서 있다가 야단법석을 떠는 사와무라를 따라 막 식탁에 앉은 후루야를 쳐다봄. 그림을 배웠다 배우지 않았다의 문제가 아님. 이건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라고 미유키는 단번에 눈치챘음. 크리스는 물론이고 그림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사와무라조차 보는 순간 그걸 알았을 거라고 생각함. 미유키는 크리스를 한 번 봄. 크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음. 이게 조각이었더라면, 자신의 영역이었더라면. 나는 대단하다, 고 말할 수 있었을까? 대단한 건 어느 쪽이냐.. 미유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크리스도 따라서 미소를 지음.
후루야는 눈을 반짝이며 크리스를 쳐다봤음. 그 옆에는 나름 잘 닦였지만 정리가 되었다고 보기는 좀 어려운 그릇들이 쌓여있었음. 크리스의 시선을 느낀 후루야는 다시 맹렬하게 크리스를 쳐다봤음. 그릇을 꼼꼼하게 본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후루야는 그 무표정한 얼굴 가득 티나지 않게 희색을 띄우며 바깥으로 나갔음. 크리스는 후루야가 닦아놓은 그릇을 다시 잘 정리해서 넣어둠.
집 밖 별채에 도착한 후루야는 천천히 문을 열었음. 오래된 나무 냄새랑 물감의 냄새가 풍김. 햇빛 잘 드는 공간 한가운데 앉아있던 사람이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까닥이고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감. 빛을 받은 안경 위가 반짝반짝하니 빛났음. 그가 보지 않아도 고개를 꾸벅 숙인 후루야는 별채 한 쪽에서 조금 뻑뻑한 서랍을 열어서 사와무라에게 받은 종이랑 붓 등등을 꺼냄.
그 저녁 이후 사와무라는 크리스한테 자기가 쓰지 않을 동안 별채를 후루야도 사용해도 되는지 물어봄. 크리스는 미유키가 괜찮다면, 하고 단서를 달았고 원래부터도 별채를 사와무라랑 반분 해서 빌리고 있는 미유키는 집주인도 허락했겠다 크게 이의를 제기할 이유를 찾지 못했음. 구상 단계라면 모르지만 일단 만들기 시작하면 미유키도 집중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옆에 누가 있건 인식하지 못하니까 별 상관 없기도 하고. 해서 크리스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시간 빼고 후루야는 하루의 남은 시간을 줄곧 별채에서 쓰고 있음.
굶주렸다. 그 말 외에 후루야의 상태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았음. 후루야는 끊임없이 그렸음. 처음 사와무라가 쥐어준 종이는 한나절만에 다 써버려서 크리스가 전에 쓰다 남은 종이를 가져다줬는데 그것도 이틀 째가 되자 다 떨어졌음. 밥도 먹으러 오지 않고 이거라도 싶어 가져다둔 간식은 손도 안댄 채로 방치되었다는 걸 발견한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붙잡고 야단을 쳤음. 밥을! 먹어! 잘 먹지 않으면 못 그린다고! 알겠냐 후루야! 자기도 그림 처음 배울 때 비슷했던 주제에 이쪽을 보며 저 잘했죠? 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후배가 귀여워서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음.
여튼 그 때 사와무라의 어깃장이 효과가 있었는지 요새는 밥 때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가져다둔 간식에도 조금씩 손을 댐. 지금도 붓을 잡지 않은 손에 쥔 팥빵 소가 부스러져 종이에 뭉개지고 있는 건..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미유키가 접시 위 다른 빵에 손을 뻗어 크게 한입 베어물자 후루야도 뭔가에서 깨어난 것처럼 빵을 한 입 먹음. 그 직후 흘러내린 팥으로 손이 끈적해져 있는 것에 좀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어이 옷에 문질러 닦지 마. 미유키는 가볍게 말을 던짐.
한참 열중하고 있던 미유키는 안에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변한 것을 느끼고 허리를 쭉 폈음. 아이고 허리야. 뚜둑거리는 허리와 어깨를 푼 미유키는 아까부터 후루야가 움직임을 멈췄다는 걸 깨달음. 시야 안에 들어와있긴 했지만 그림에 집중하던 터라 인식을 못했음. 후루야는 가만히 벽에 붙은 어떤 그림을 보고 있었음. 사와무라가 사온 잡지에 실린 작품을 오려내서 벽에 붙여둔 거임. 세밀한 농담표현이 주특기라던 유명 화가의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후루야한테 미유키가 너도 저거 해보고 싶어? 하고 말을 건넴. 후루야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임. 전공은 아니지만 수묵기법 들은 적 있으니까. 미유키는 기억을 되살림.
아니 그런게 아니라. 붓을 좀 더 눕히라는 미유키의 말에 후루야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유키는 후루야한테 다가가서 붓을 든 손을 감싸 잡음. 이렇게, 접시를 닦아내듯이.. 미유키가 손을 놓자 후루야는 그대로 붓을 종이 위로 옮겨 선을 그었음. 그렇지. 어때 됐지? 원하는 것을 얻어서 기뻐진 후루야가 눈을 반짝이며 종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미유키는 중얼거림. 붓을 한번도 안 잡아본 손은 아닌데. 그 말에 후루야는 다시 미유키를 쳐다봤음. 여기 오기 전까지 어디서 뭐 했는지, 말해볼래?
후루야는 눈을 깜빡였음. 집안일을 자주 돕는 크리스나 옆에서 이것저것 말을 거는 사와무라랑 달리 후루야는 미유키와 그렇게 말을 섞어본 적이 없음. 일부러 말을 안건다기보단 마주칠 일이 별로 없고 기껏해야 식사시간에 미유키가 물 여기 있다느니 흘릴 것 같다느니 대충 건네고 후루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임. 요 며칠 작업실을 같이 쓰긴 해도 미유키는 그릴 때 집중하는 스타일이고 후루야는 처음 그려보는 그림에 정신이 팔렸었기 때문에 대화할 기회가 없었음. 후루야는 미유키를 쳐다봤음. 언제나 웃음을 띄고 있는 것 같은 느슨한 얼굴은 평소랑 다를 게 없고 방금 한 "말해볼래?"도 거기 좀 지나갈게? 나 그 옷은 여기 둬줄래? 랑 별 차이가 없는 뉘앙스였음. 그렇지만. 후루야는 가벼워보이는 이 남자가 가끔씩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음. 그건 시끄럽지만 따뜻하게 구는 사와무라나 무심과 친절함 사이의 태도를 하고 있는 크리스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으니까. 이 사람은.. 후루야가 입술을 깨물자 미유키는 잠깐 인상을 쓰더니 으으, 하면서 뒷머리를 긁음.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그냥 궁금했던 거니까. 겁줘서 미안. 시원하게 사과한 미유키는 바닥에 앉아있는 후루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작업실 밖으로 나감. 저녁 시간 다 됐네. 밥 먹으러 가자.
그날 저녁 어쩐지 밥을 잘 먹지 못하는 후루야를 보고 미유키는 안보이게 푹 한숨을 쉼. 겁주려던 건 아닌데. 남자, 신장 180cm 정도, 나이 10대에서 20대 사이, 이름 후루야... 추가로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다시 선배를 찾아갔지만 허탕이었음. 신고 들어온 거 없던데? 뭐 착각한 거 아니냐? 미유키가 실종자 신고명단에 이어 흉악범죄자 도주중인 범죄자 목록까지 훑어보자 선배의 눈이 예리해지는 통에-너 정말은 무슨 일 있는거 아니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고 나온 터임. 단순히 가출청소년일 수도 있고 밖에 나온 이유도 집안 사정이라던가 하는 단순한 것일 수도 있음. 작정하고 남을 속이거나 못된 짓을 할 정도로 요령이 좋지도 않아보이고. 크리스나 사와무라랑도 잘 지내는 거 같고 집안일도 도우려 하고. 빨래 개는거 너무 서툴어서 옷이 다 구겨져 오지만.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되나. 그보다 단순히 물어봤을 뿐인데 그렇게 쫄다니 이쪽이 나쁜 거 같잖아.. 미유키는 밥을 팍팍 먹고 일어남. 선배 잘먹었습니다. 후루야의 시선이 자기를 따라오는 걸 느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했음.
다음 날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작업실로 들어간 미유키는 바닥에 종이를 펼쳐놓고 들여다보고 있는 후루야를 발견했음. 소리가 나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를 발견하고 움찔하는 어깨를 보고 미유키는 아 그러고보니까 어제.. 하고 떠올림. 어제 일은 좀 심했고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라고 생각한 미유키는 후루야한테 자극이 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자기 작품 앞에 앉았음. 그림을 보는 척 돌린 옆얼굴에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고 느낀 미유키는 다음 순간 자기 앞에 드밀어진 종이에 당황함. 뭐? / 저기... 후루야가 가리킨 곳에 잡지 다음 장이 걸려있음. 저거 알려달라고? / (끄덕) 너 나.. 무서워하잖냐고 말하려 했던 미유키는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는 후루야의, 종이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있다는 걸 발견함. 그림 그릴 수 있으면 겁이고 뭐고 아무 상관없다는 건가, 뭐야 이 녀석도 결국 그림바보였나?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녀석이잖아? 후루야의 성향과 상황 파악을 끝낸 미유키는 하핫, 하고 크게 웃음. 후루야가 뭔가 싶어 이쪽을 봤지만 미유키는 순간 정말 즐거워졌음. 그래 남의 집에서 출신도 밝히지 않고 식객하려면 이정도 배짱은 있어야겠지! 그말에 후루야가 다시 움찔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방법을 일러준 미유키는 화면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처럼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후루야한테 말했음. 그 이상은 사와무라한테 물어봐. 아무래도 먹 쪽은 걔가 더 잘 알거든.
말하면서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후루야를 가르치게 하는 건 좀 잔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함. 물론 전에 사와무라는 순수하게 후루야의 실력을 대단하다고 감탄했지만 아무리 낙천적인 사와무라라도 이 정도의 재능을 앞에 두고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을 거임. 당장 다른 분야인 자신도 볼 때마다 할 말을 잃곤 하는데. 그림을 좋아하지만, 아니 오히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음. 겉으로 큰소리만 치는 것 같아 보이는 사와무라가 뒤에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어서 미유키는 잠시 생각에 잠김. 늘 투닥대도 아끼는 후배인데. 아니 오히려 그래서. 미유키는 이런 후루야가 사와무라에게 좋은 자극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음. 사와무라 또래에 이렇게 수묵 쪽에만 열중하는 사람은 없음. 자칫 고립되고 고착화되기 쉬운 위치에서 이렇게 자신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동등한 존재란 얼마나 중요한가.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되풀이함. 꼭 물어봐. 그 녀석도 좋아하며 알려줄걸. 거기에 이 재능이 제대로 된 선생을 만나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은 역시 아쉬우니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저녁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사와무라를 반겨준 건 방에서 종이를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 후루야였음. 후루야가 너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다.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크리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방으로 들어간 사와무라는 그림 기법을 알려달라는 후루야의 말에 신이 나서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마셔버리고 작업실로 향함. 식탁의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서 싱크대에 가져가는 미유키에게 크리스는 조용히 말함. 미유키. 네가 알려줬구나. 미유키는 네 하고 대답함. 미유키의 생각과 달리 크리스는 후루야를 가르치는 게 사와무라에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음. 사와무라는 열심히 노력하고 부쩍부쩍 성장하고 있지만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운지 얼마 안 됐고 재능이 있다기보단 꾸준히 노력하면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고 있음. 그런 사와무라에게 벌써부터 배워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음. 그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꺼내고 그려내야 하는가를 천천히 가르쳐주고 싶었음. 자신처럼 무리하지 않게 한걸음씩 꾸준히. 조용한 거실에 그릇 씻는 소리만 울려퍼짐.
사와무라는 숨을 죽이며 고개를 숙였음. 후루야의 붓 끝에서 나온 선이 하얀 종이를 천천히 물들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던 사와무라는 후루야의 손이 멈추자 드디어 참았던 숨을 토해냈음. 우오. 후루야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방금 그렸던 종이를 저쪽에 대충 던져놓고 새 종이를 고정했음. 그리고는 또 붓을 듬. 후루야가 놔둔 그림을 잘 집어든 사와무라는 그걸 햇빛에 비쳐봄. 거칠지만 유연한 선, 그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면. 후우. 사와무라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그림을 다른 그림들이 쌓여있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음.
후루야가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던 저녁부터 사와무라와 후루야는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별채에서 보내고 있음. 사와무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줄히 잡혀있던 약속도 취소했고 후루야는 할 일이 끝나면 잽싸게 별채로 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식사 때 다 되서 크리스가 부르러오거나 아니면 가져다주는 간식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많음. 계속 붓을 움직이는 후루야를 보면서 사와무라는 생각함. 저녀석도 참 질리지 않는구나. 하지만 알 것 같아. 후루야. 네가 그리는 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아. 눈을 뗄 수가 없어.
사와무라는 자기 어릴 적을 떠올림. 부모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할아버지의 방은 언제나 수묵화와 화첩들로 가득했음. 이미 옛날에 모았던 것들이고 좁은 방이었지만 꽤 비싼 진품들도 있었다고 하니까, 사와무라가 동양화를 택한 것도 할아버지와 관련이 있음. 몇십, 몇백년이나 전의 화가가 그린 부드럽고 유연하고 거칠고 강인한 선들과 평면보다 깊고 넓게 펼쳐지는 면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런 것을 보고 자란 사와무라는 항상 궁금했음. 그들은 어떻게 했던 걸까? 그린다는 것, 그리지 않고서도 그려낸다는 것, 이토록 단순하고 명쾌한 선과 흑백의 조화 속에 몇 백가지 형상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언젠가 나도 이런 걸 그릴 수 있을까? 이 아득한 화면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그 장소로 나도 갈 수 있을까?
대학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는 지금에서도 사와무라 안의 이런 의문들은 끝나지 않았음. 아니 오히려 배우면 배울수록, 그림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더 많은 것이 보이고 그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보였음. 이미 백 년도 전에 떠나간 화가들의 그림들을 보고 행적을 더듬을 때마다 사와무라는 목이 마르다고 느낌. 먹을 마시고 종이를 쌓으면 간신히 숨이 트이지만 곧이어 또 다른 더 거센 갈증이 찾아왔음. 이건 아마 끝나지 않겠지. 아직 도달할 길이 다 보이지 않는 아득한 저편.
백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음. 지금으로부터 딱 백년 전에 그렸다는 봄 산의 그림을 보고 나서였음. 그 정도 지나면 나도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같은 곳을 보고 같은 것을 그릴 수 있겠지. 백년이면 아직 까마득하지만 안될 것도 없을 거 같았음. 그래 백년동안 계속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럼 또 백년 뒤에는 후손들이 와서 보고 그러겠지. 와,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 완벽한 계획이지. 사와무라는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했음. 그래. 백년이야. 백년동안 그림을 그리자.
하지만 그날 밤 후루야의 그림을 보고 나서 사와무라는 깨달았음. 아. 백년이 걸리지 않겠구나. 백년이 아니구나. 이 녀석에게는.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바라봄. 후루야는 이제껏 종이에서 한번도 눈을 떼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음.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보는 쪽의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유려하게 움직이는 팔과 손목. 그리고 그걸 따라가는 단호한 선. 형상. 세계. 사와무라는 후루야가 옆에 놓은 그림을 보고, 자기가 모아서 벽에 붙여둔 잡지 사진들을 봄. 후루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후루야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사와무라를 봄. 사와무라는 말함. 우리 학교 올래? 후루야는 눈을 크게 뜸. 바닥에 놓은 붓에서 배어나온 먹물이 종이를 둥글게 물들이고 있었음. 사와무라는 다시 한번 말함. 나랑 같이 학교 다니자 후루야.
후루야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임. 사와무라는 웃었음. 웃으면서 자기 표정이 이상하지 않길, 제대로 웃고 있길 바랬음. 후루야, 너 그림 좋아하지? 후루야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임. 등 뒤에 희미하게 오라가 비치는 모습에 사와무라가 하하, 하고 웃음 소리를 냄. 나도 엄청 좋아해, 그림. 그러니까.
질투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림을 배운지 얼마 안된 사와무라에게도 후루야가 가진 것이 단순히 노력만으로 이뤄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보였음. 미유키나 크리스가 뭐라 할 필요도 없이 사와무라는 처음 후루야와 그림을 그렸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함. 분명 눈앞에서 봤으면서도 눈을 의심했던 순간. 후루야가 이쪽으로 내민 종이를 받지도 밀어내지도 못하고 서서 그 손 안만 들여다보고 있었음. 분명 백년이 걸릴 텐데. 눈 앞의 존재는 까마득한 세월을 순식간에 넘어가고 있었음.
기다려. 가지마. 사와무라는 손을 뻗었음. 나만 두고 그쪽으로 가지 말아줘. 사와무라는 주먹을 쥠. 앞을 보고 서서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가는 등. 나도, 나도 그림을 좋아해. 너무너무 좋아해. 그래서 더 잘그리고 싶었어. 네가 가고 있는 그 쪽으로 나도 가고 싶었어.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 계속. 계속. 그러니까 나만 두고 가지 마. 나도..
나도.
아아. 사와무라는 엎드린 채로 한참동안 바닥을 두들기던 주먹을 멈춤. 그래. 사와무라는 천천히 고개를 듬. 지금 저기까지 갈 수 있는 녀석이 있어. 그러니까 나한테도.. 백년은 안걸려.
사람은 백년 넘게 살 수 없음. 그림도 백년 동안 그릴 수 없음. 사와무라는 생각해봤음. 그렇다면 그날은 언제 내게 찾아올까?
삶은 계속 이어지고 앞으로 그림을 그릴 날은 셀 수 없으리만큼 많음.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나날동안 머나먼 언제 닿을지 알 수 없는 목표를 향해 간다는 것은 심지가 굳고 의욕 넘치는 사와무라에게조차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음. 심지어 닿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지는 날도 있었음. 그런날이면 사와무라는 작업실을 나와 밖으로, 거리로, 선술집과 가라오케로 내돌았음.
분명 후루야는 자신과 다름. 제게는 어렴풋했던 길이 후루야에게는 좀 더 또렷하게 보이는 거 같음. 줄곧 바라고 이루려 했던 목표와 자신, 그리고 후루야 사이의 거리를 잰다면 분명 후루야는 자신보다 훨씬 앞서 있을 거임. 하지만 후루야는 아직 사와무라가 원하는 곳까지 완전히 도달한 것은 아님. 어떻게 닿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던 몇 백년 전의 그들과 달리 후루야의 등은 아직 보임. 이거라면 따라갈 수 있어. 사와무라는 생각함. 후루야. 넌 내게 확신을 줘. 거기까지 갈 수 있다고. 결코 닿지 못하는 곳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랑 함께라면 분명 갈 수 있어. 그 아득한 저편으로.
한참동안 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사와무라는 후루야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음. 항상 감정표현이 부족한 자신에 비해 사와무라는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니까 신기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의 사와무라는 평소보다 더했음. 그 복잡한 감정의 물결 속에서 후루야가 간신히 읽어낸 것은 \'슬프면서도 기뻐서 견딜 수 없어하는 것 같다\'였음. 어떻게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는 걸까. 고민하는 사이 사와무라가 입을 열었음. 후루야. 너랑 동급생이라면 좋았을 텐데. 사와무라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더 진해졌음. 네가 나으니 내가 나으니 투닥이면서 다 쓴 물감 따위를 빌리고 빌려주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늦은 시간까지 경쟁하듯 교실에 남아 그림을 그리고, 교수가 한 가벼운 조언 같은 이야기를 엄청 신경써서 비교하고 나누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란히 달리는 그런 사이였다면. 네가 산을 그리면 나는 바다를 그리고 내가 선을 그리면 너는 면을 채워넣고 그렇게. 너와 그렇게 지내고 싶었어. 물론 네가 가진 것을 나는 갖지 못했지만. 따라가기에만 기를 쓰고 쫓아야겠지만. 말과 다 말하지 않는 말들을 삼키며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똑바로 쳐다봤음. 얇은 커튼 밖으로 빛이 새어들어와 방안을 밝히는 맑은 겨울의 오후. 사와무라의 눈동자는 빛을 삼킨 듯 밝게 타올랐음. 후루야. 계속 그림 그려. 환한 불꽃의 속삭임. 나랑 같이 학교에 가도, 가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림은 계속 그려. 나도 그럴 테니까. 그렇게 계속 같이 그리는 거야. 둘이서.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그 곳에 함께 가자.
말을 마친 사와무라는 자리를 잡고 자기 도구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함. 그동안 그림만을 보고 있었던 후루야는 처음으로 그런 사와무라를 오랫동안 쳐다봄.
계속 이어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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