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나의 구속은 재능이다. 물론 노력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노력한 것보다 성과가 훨씬 잘 나왔음. 야구를 잘하기보단 투수를 잘했다. 어쨌든 잘했기 때문에 야구는 재미있었고 중학교 가서도 야구부에 들어간다.
당시 중학 야구부 감독은 자질이 있다기보단 오랜 세월 감독을 맡아왔기 때문에 나름의 경험이 쌓인 케이스로 그 경험이라는 것을 다소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뭐든 자신이 생각하는 게 옳았고 자기 뜻과 다르면 무지하게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랄만큼 낡은 사고방식이지만 그 아집을 일종의 통솔력이라고 착각하는 선수마저 있었다. 감독은 선수들의 시합이나 연습 뿐 아니라 일상 생활태도까지도 간섭했다. 잔소리는 귀찮았지만 하루나는 공을 던질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감독이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향한 잔소리 외에도 자기 배터리에게나 트레이닝을 봐주는 선배들에게 자신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하루나는 당시에도 중 1치곤 상당히 잘 던졌기 때문에 감독도 지나칠 정도로 터치하지는 않았다. 당시 하루나의 배터리는 기가 약했다.
하루나는 계속 투수를 하고 있었다. 야구가 아니라.
부상당했다. 자기 말을 거스르고 멋대로 검사를 받으러간 하루나를 감독은 용서하지 않았다. 버림받았다. 야구를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시니어에 들어갔다.
아베는 야구가 재미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했고 어렸을 때부터 포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포수가 가장 멋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내내 모아 월간 야구 같은 잡지를 사 모으기도 했다. 간간히 실리는 이번 시즌 우승 팀의 배터리 인터뷰 같은 걸 꼼꼼하게 읽었다. 처음으로 용돈을 모아 산 잡지의, 올해에 비해 부진했던 작년 성적과 야구 선수가 되기까지 겪었던 고난, 팀메이트 사이의 소소한 에피소드 등으로 이어지는 인터뷰의 마지막에는 서로가 없었다면 우승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라는 식의 대화 아래로 친밀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배터리의 모습이 있었다. 뻔하고 상투적인 얘기였지만 어린 야구소년에게는 눈부셨다. 딱히 인터뷰가 아니라도 아베는 투수와 포수 사이에는 다른 선수들이 공유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그가 투수와 포수의 신뢰관계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딱 그 또래의 소년다운 환상이었다.
계속 야구를 하면서 많은 투수를 만났다. 다들 비슷비슷한 실력이었다. 아베가 한 것은 딱 그 나이대 수준의 야구였기 때문에 딱히 꿈에 그리던 투수를 만났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 배터리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항상 좋은 투수를 만나 그를 훌륭히 보필해 승리를 이끌어 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중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다. 시니어에 들어갔다. 하루나를 만났다.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 하루나의 공은 프로와 비교하기에는 여러 모로 수준이 떨어졌지만 좋은 투수며 배터리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아베에게 그 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하루나의 공은 빨랐고 빠른 공은 그 모든 사소한 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공을 던지는 투수도, 그런 공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었다. 하루나와 배터리를 짜면서 아베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릴 적부터 상상했었던 미래 배터리의, 이상적인 투수의 모습을 그에게 덮어씌운다. 실제로도 그렇게 대했다. 하루나도 하루나대로 공을 던지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아베가 자기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 사실 아베에게 별 신경도 안썼다. 다른 누구와 배터리였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하루나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제 '벽'이 될 아베의 덩치가 작은 건 확실히 불만이었다. 마음 편하게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하루나는 자기 것이든 남의 것이든 부상이라는 상황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남을 걱정한다기보단 그냥 누군가 다친다는 그 자체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치만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과 제구력은 또 별개의 문제라. 게다가 첫 만남에서 하루나는 아베가 자기를 도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담 한 번 받아봐라, 하는 심정도 있었다. 가감없이 던졌다. 솔직히 화풀이였다.
한 놈은 제가 생각한 이상적인 모습을 상대에게 멋대로 투영하고 또 다른 놈은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관심 한톨도 없이 공만 던지면 된다는 태도니 배터리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무진장 싸웠다. 애초에 성격 자체가 달랐고 그 중에서도 특히 투구나 볼배합에 대한 화제는 지뢰밭이었다. 하루나는 (저가 생각하기로)시덥지 않은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시끄럽게 구는 꼬맹이가 귀찮았고 거기에 더해 아베가 제구니 구종이니 하루나 자신이 투수인 제 영역이라고 금 그어놓은 영역까지 치고 들어올라치면 짜증이 치밀었다. 방어본능과 투수로서의 자존심이 합쳐져 감정적으로 확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아베로 말하자면 처음에 자기가 꿈꿔왔던 이상적인 배터리의 모습이 몇 번이고 와장창 깨졌다가 다시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비실비실 살아났다가 다시 깨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나에게 실망할 때마다 제가 그리던 야구가 한 귀퉁이씩 무너져내렸다. 그 때마다 끊임없이 일정하게 상처입었다.
시니어 시절은 둘 다에게 썩 좋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통해 하루나가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하루나가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상처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토해내면 회복할 수 있었다. 가족이든 친구에게든 말하면 좋았겠지만 가족이나 아키마루를 포함한 당시 하루나 주위의 사람들은 하루나가 상처입었다는 것을 동정하고 가엾게 여겼다. 하루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눈치를 보며 연민의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하루나 자신이 상처입었다는 것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 하루나는 그게 굉장히 싫었다. 그러나 아베는 하루나가 부상을 입었었건 어쨌건 바락바락 대들며 성질을 긁어줬기 떄문에 하루나도 마음껏 화내고 윽박지르고 고집을 부릴 수 있었다.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아베는 완전히 다른 타입으로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아버지와 붙임성은 있지만 지나치게 살갑게 굴진 않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베는 제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보다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성격이다.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런 면에선 인도어적 성향에 가깝다. 고민이 있어도 남에게 털어놓는 것보다 제 스스로 되짚고 반추해보면서 해소할 수 있는 타입인데 하루나와 부딪치면서 자기 내면을 마구 드러내보이며 부딪쳐오는 하루나에게 이끌려 자기 속마음도 억지로 꺼내지게 되는 상황이 아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같이 싸워도 소리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하루나와 달리 아베는 집에 가서 그 날의 대화를 몇번이고 곱씹으며 잠자리를 뒤척였다. 도저히 해소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베에게 하루나는 던지는 공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고 못마땅했지만 잔소리는 볼과 시합에 대한 내용으로 한정되었는데 이유는 하루나가 그보다 선배였고 연장자였기 때문이다. 아구바보였고 제가 생각하는 것에 양보가 없는 고집쟁이었지만 그 정도의 예의는 있었다. (지금 미하시에게 이것저것 잔소리하는 건 미하시가 미덥지 못한 것도 있고 미하시를 좀 낮게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나 또한 폭력적인 것은 그가 던지는 공에 한정되었다. 아무리 화가 났을 때라도 그는 폭력적인 의도로는 아베에게 손 한 번 댄 적 없었다. 상처입는 것도 남을 상처입히는 것도 당시 하루나에겐 버거웠다. 단 감정적인 쪽은 예외. 상처주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사실 아베가 유년기에 갖고 있던 막연한 환상은 어렸을 적부터 일정한 활동을 계속 해온 그 또래들이 흔히 갖는 것으로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식의 폭이 확장되고 자기 주변의 현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사라져 장차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다만 아베의 경우는 자질이 너무 뛰어났던 하루나를 만나 환상이 완전히 잘못된 거였다는 깨달음 없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보충되어 어정쩡하게 현실성을 띄게 되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후반부에 가서는 감정적으로 힘에 부쳐 제대로 된 사춘기를 겪을 여유도 없었다. 유년기가 완전히 끝난 고등학교 1학년 현재에도 눈 앞의 팀메이트 모습 자체를 받아들이기보다 자기가 정한 잣대와 틀대로만 생각하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중학교 2학년 가을의 그 사건으로 인해 하루나에 대한 배신감과 반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가 쌓아왔던(그리고 하루나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던) 이상적 투수상을 완전히 바꿔 하루나를 최악의 투수로 분류하고 무조건 그와 반대되는 모습이 좋은 투수에 가까운 조건이라고 정해버렸다.(노력 vs 재능, 마운드를 내려가는 투수 vs 마운드를 양보하지 않는 투수 등등) 투수의 역할 중 하나인 고개젓기에 대해 미하시에게 강압적으로 군 것도 이 때문이다. 적어도 그 가을 이전에 아베는 고개젓는 것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나는 남에게 관심이 없다. 원래부터도 제 실력만 믿는 안하무인 성격이기도 했고 자기중심적 태도를 벗어나 점차 자기 주변으로 관심을 확장해나갈 시기에 부상을 당했다. 지속됐던 통증이 실은 반월판 손상이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도 알게 된 후에도 팀에는 많은 동료들이 있었지만 하루나가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도 감독의 무시 때문에 잊혀져 갈 때도 남들은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당시 가장 친했던 아키마루조차 소극적인 태도로 머물렀다. 자연스럽게 하루나는 팀메이트를 비롯한 타인들은 자기 인생에 별 상관없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불신에 가까웠다. 팀의 승리도 패배도 관심없었다. 팀이 이기든 지든 간에 하루나는 하루에 80구만 던졌고 구수가 다 차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공이 맞거나 맞지 않거나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였고 실제로도 무관심했다. 그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선배들이 몇 번이고 불러내 충고 비슷한 협박을 준 적도 있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그들은 타인. 아무 것도 책임져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팀의 승리라는 것도 하루나에겐 인상이 희미했다. 투수제한 때문에 주로 후반만을 던졌기 때문에 자기 공이 맞지 않아도 이미 잃은 점수로 시합에 지는 경우가 많았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배터리가 공을 놓치거나 사구 때문에 진 적도 있다. 제구는 애써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까지 포함해서 하루나에겐 자기와는 상관없는 영역이었다. 자기와 상관없는 영역에서 상관없는 일들로 결정되는 팀의 승패 따위. 소용닿지 않는 것에 신경을 기울이는 취미는 없었다. 이미 자신의 고통만으로도 양 손이 한가득이었던 것이다. 야구가 던져서 수비하는 운동이 아니라 던져서 점수를 넣는 경기였다면 하루나의 이같은 양상도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터리가 있었지만 여전히 하루나는 혼자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프로를 고집했다. 야구로 인해 버려졌던 경험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야구로 인정받고 싶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감정과 그 심리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시간이 지나서 서로를 어느 정도 겪고 아베가 하루나의 공을 곧잘 잡게 되면서 둘의 인식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루나는 점차 아베를 자기 공 받는 벽/표적에서 공 받는 포수로 인식하게 된다. 따지자면 (자기에게 주는 소용 면에서) 무생물에서 생물로 정도의 변화였다. 변화는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명백했다. (공으로) 상처주고 울려도 기를 쓰고 따라온다는 점이 하루나가 아베를 나름 특별히 인식한 이유였다. 처음 몇 번 공을 몸에 맞췄을 때는 아베가 금세 포기해버리거나 다른 배터리로 바꿔달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베는 그러지 않았다. 사실이야 어떻든 하루나 눈에는 아베가 다치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상처주는 걸 염두에 두지 않고 던질 수 있었다. 아베의 회상에서 하루나가 말한 '마음놓고 던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싸우다 싸우다 아베가 못이기는 척 굽혀주고 그러면서 따라오는 것이 당연해졌다. 줄곧 그랬으니까.
아베도 변했다. 아베는 점차 자신이 하루나에게 덮어씌운 이상적인 투수상이 하루나와 무척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베가 생각한 투수는 좀 더 포용력 있고,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여튼 좀 달랐다. 눈 앞의 현실과 환상을 도저히 동일시할 수가 없었다. ´_`... 그렇지만 제 생각을 몽땅 폐기하는 대신 아베는 그 이상과 하루나를 비교하며 구상을 좀 더 현실성 있는 형태로 다듬어나간다. 모토키상은 이랬지만 좋은 투수는 이런 면이 필요할 것 같아.. 모토키상의 이런 면은 그래도 꽤 괜찮아.. 이런 식으로. 제 생각과 다른 면을 발견하면 ㅇㅇㅇ.. 뭐 그럴수도 있겠네요 하면서 조금씩 양보하며 생각을 수정했다. 가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게 나오면 벌컥 화를 내긴 했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자기의 '현실'은 이거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눈 앞에 보이는 건 이상이 아니라 하루나였기 때문에 둘의 다툼은 항상 하루나가 무작정 우기면 아베가 좀 화내다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중학교 2학년 가을 전까지 아베가 새로 만들어나간 이상의 투수상은 하루나와 매우 닮아 있었다.
어쨌든 둘은 함께 배터리하면서 변화해나갔고 변화는 얼음의 겉면부터 녹는 것처럼 느렸지만 그대로 놔두면 꽤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갈 조짐을 보이긴 했다. 점차 서로를 이해해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보다 온건하고 자잘하게 부딪치면서 서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능성이 좀 더 가시화되기 전에 둘의 관계를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하루나 쪽에서는 별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아베였다. 아베는 이제 하루나가 자기가 생각한 이상의 투수도 아니고 그렇기는 커녕 자기와 제대로 된 야구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몰랐을까. 하루나는 계속 혼자였다. 혼자서 투수를 하고 있었다. 그럼 자신은 이제껏 뭘 하고 있었던 것인가. 자괴감이 솟구쳤다.
팀에 대한 하루나의 인식이 변한 것은 무사시노에 입학하고 나서다. 처음 무사시노를 고를 때만 해도 그의 고려사항에는 설비, 운동장, 감독의 성향 같은 것은 있어도 팀 동료에 대한 사항은 없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기보단 아예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 같다. 그런 것까지? 싶은 느낌. 다만 자기 공은 받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아키마루를 꼬셨다. 본편에 나왔던 것처럼 무사시노는 축구가 강세고 시설도 꽤 괜찮은 편이긴 하지만 역시 수험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학교였다. 대학도 시험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높고 그나마 있는 스포츠 추천입학도 축구 쪽에 몰려있다. 아예 운동부 학교가 아니라서 야구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던 아키마루도 별 이의없이 승락했다. 중학 시절 하루나가 힘들어하던 시기에 변변한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무사시노는 하루나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전반적으로 흘러가는 팀 분위기도 그랬지만 팀메이트들의 정신상태나 수준 같은 게 시니어 시절과 일일이 차이가 났다. 따지고 보면 시니어는 학교 부활동보다 더 야구를 하고 싶은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하루나는 별 생각없었지만 그가 속한 팀은 꽤 강했기 때문에 배터리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의 실력도 보통 이상은 됐던 것이다. 근데 무사시노는 뭐.. 가구야마가 말했던 것도 있고. 좋게 따져서 하루나도 팀의 실력 차는 무사시노 선택할 때부터 어느 정도 생각하긴 했겠지만 정신상태나 각오 수준까지는 전혀 짐작도 못했을 것 같다.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도 운동을 쉬진 않았다. 시니어 때와 똑같이 공을 던져도 이 곳에서는 도루를 잡힌다던지 잡을 수 있는 공이 뒤 쪽으로 빠진다던지 하는 자질구레한 실수들이 많았다. 실력만이 아니라 갖고 있는 패기가 부족한 느낌. 하루나도 그걸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그래봤자 뭐가 어쨌다는 깊은 고려는 미처 못하고 왠지 잘 되지 않는다.. 정도의 느낌이었으리라. 이전에는 신경 써본 적도 없는 일이다. 자기만 잘하면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했다. 팀이 좀처럼 제 뜻처럼 따라오지 않는 상황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하루나는 어렴풋이 야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뭐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지만 그게 뭐 때문인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나는 계속 자기 몸 단련에만 매진한다. 운동은 열심히, 열심히. 그 상태가 좀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되기 전에 팀메이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기본 중의 기본). 훈련이 강화되었다. 포수 덕분에(??) 자제하느라 제구력도 늘었다. 동료를 지지하고 북돋았다. 좌절도 아픔도 겪어본 사람이 안다고 하루나에겐 대단한 발전이었다. 팀이 점점 나아졌다.
이제 하루나는 야구를 한다. 하루나 자신이 참여해 만들어나간 팀에서.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을 지나 마운드에 올라간 하루나는 제 앞만을 바라보던 위치에서 새삼 뒤를 돌아 그라운드 전체를 둘러보고 거기 있는 팀메이트들의 열굴 면면을 돌아보며 어느새 자신에게 이 정도로 여유가 생겼구나 한다. 그 동안은 미처 보지 못했던, 보려는 생각조차 않았던 것들이다. 하루나는 지금의 무사시노 팀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키마루 녀석이 좀 더 의욕적이 되어줬으면 좋겠지만.
아베에 대해서는.. 전엔 자기를 따라 무사시노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오면 좋고 안 와도 뭐. 사실 하루나는 아베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루나 자신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일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화를 내다가도 금방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갑자기 건방진 말이나 해대고(물론 그 때마다 아베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하루나는 모른다). 여러가지 일들로 자주 싸우기도 했고 반응이 재미있어서 몇 번 놀리기도 했지만 여튼 아베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해본 적도 별로 없다. 중학교 졸업 후 만난 건 봄 우라와종합과의 경기(단행본 2권)에서가 처음. 타카야 주제에 늘상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따라오지도 않고 영 뜬금없는 학교에 들어간게 건방지다고 생각해서 심술을 부렸다.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 별 의미를 두진 않았다. 다만 그 시절 여러가지로 위태로웠던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준 건 알고 있고 그에 대해서는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
아베 쪽은 훨씬 어두웠다. 하루나가 은퇴하고 나서도 1년 더 다른 투수와 배터리를 맞췄지만 그 쪽엔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했다. 배신감, 상실감, 무력감과 그럼에도 자기가 좀 더 잘했더라면 혹시, 하는 자책감. 머릿 속에서 몇 번이고 그 2년의 일들과 대화들, 가을의 마지막 경기를 재생했다. 그래봤자 이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나가 혼자였던 만큼 아베도 혼자였다. 줄곧.
중학교 2학년 겨울부터 졸업할 때까지 1년은 아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의기소침하고 침체됐던 시기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어두운 생각이 끝간 데를 모르고 달려나갔다. 잊어버리려고 고개를 저어도 금방 다시 밑으로 가라앉는 침전물처럼 감정이 깊은 곳으로 고여들었다. 엉망으로 엉켰다. 심지어는 야구를 그만둘까까지도 생각했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를 해온 아베에게 그건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아베 자신부터가 야구 없는 자기 인생을 상상할 수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 그만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건 그가 오랫동안 야구를 해왔기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하루나가 해온 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야구에서 늘상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구 자체를 미워하지 않고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 야구가 나쁜게 아니었다. 나쁜건 하루나 모토키지. 그런 식으로 남을 미워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무 힘들었다.
뛰어난 투수가 싫었다. 자기 혼자서도 얼마든지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그 오만이 싫었다. 뽑아놓은 근처 고등학교 목록에서도 무사시노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면서도 이제껏 아베 자신이 쌓아올린 야구에 대한 불안도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모든 걸 새로 시작해보고 싶었다. 제로 베이스에서 보란듯이 해내서 자기가 해온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완전히 무명인데다 아예 경식으론 올해가 신생인 니시우라를 선택한 건 이 때문이다. 평소엔 잘 하지도 않는 도박이었다. 사실 좋은 투수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순순히 포기할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이상은 하늘에 맡긴다, 고 하면 좀 웃기는 말이지만. 그만큼 확신이 필요했다. 자기가 계속 야구를 해나가게 되어있으리라는 확신. 그렇다면 이런 곳에서 끝날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봄 내내 텅 빈 그라운드에 마운드를 쌓아올렸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투수는 아베가 쌓아올린 이상의 투수상과도, 그동안 만난 어떤 투수와도 달랐다. 미하시는 놀라울 정도로 남들과 다르고, 다루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베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가 말했던 것처럼 미하시가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면받고 경시되면서도 미하시는 야구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혼자서. 그 부분은 하루나와 엄연히 달랐고 오히려 중학교 때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거여서 아베는 미하시의 감정을 깊이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배터리로서 최초의 소통.
사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처럼(그리고 아베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하시와 아베의 관계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다. 의사소통에 지장이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자란 집안분위기나 성격 같은 게 너무 다르고 둘 다 중학 시절의 기억 때문에 현재 원래 성격보다 좀 꼬여있...달까 여튼 그렇기 때문. 성격이 꼭 비슷해야 잘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부분을 제하면 의외로 둘은 꽤 친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미하시 쪽에서 생각보다 아베를 싫어하지 않는 게 둘 다 원하던 야구로부터 배제당한 기억이 있고 그런 종류의 감정은 공감을 통해 서로를 깊게 연결한다. 그리고 미하시는 자기 일을 아베로부터 이해받은 걸 알고 있다. 지금도 완전 친한 친구 이런 건 아니지만 둘 다 서로를 특별하게 느끼긴 할 듯. 하루나 때완 달리 둘이 친해져야겠다는 자각도 있고 또 미하시는 그렇게 보여도 은근히 고집이 있고 아베도 완전히 밀어붙이기만 하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둘은 함께 변해가면서 꽤 괜찮은 배터리가 된다.
미하시와 배터리하면서 아베는 점차 좋은 투수, 완벽한 배터리에 집착하는 걸 그만 둔다. 물론 투수는 이래야 한다, 배터리는 저래야 한다 하는 식의 지향까지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더 이상 하루나 때 같이 좋은 투수의 틀에 상대를 우겨넣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입장에서 계속 틀을 고집하는 것도 마땅찮았을 뿐더러 처음 미하시를 만났을 때는 여전히 그 틀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보통의 경우 무리없이 통용되던 틀이 미하시에게는 전혀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기운을 차리겠지? 해서 말한다 -> 별로 효과가 없어보인다 -> 다른 방법을 써볼까? -> 으악 역효과! -> 어떡하면 미하시에게 기운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아베는 점점 어떤 '투수'라는 모호한 틀 대신 눈 앞의 미하시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가기에만도 벅찼고 보이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 편의대로 덮어씌워야 했던 하루나와 달리 미하시는 아베에게 잠깐 멈춰서서 배터리에 대해, 또 거기 서 있는 하나의 개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제 틀에는 맞지 않지만 미하시 또한 좋은 투수였다. 그렇게 이상과 맞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는 걸 아베는 천천히 깨달아나간다.
(정발본 기준으로 지금은 과도기다. 아직까지는 완벽함이나 꼭 이겨야한다는 것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생각은 점차 변하게 된다.)
하루나와 아베가 기억하는 과거를 물리적으로 꺼내서 볼 수 있다면 하루나의 기억은 전체적으로 드문드문한 흑백무성영화다. 그 때 누구랑 다퉜었지, 무슨 일이 있었었지... 하는 기억은 나지만 화면도 희미하고 소리가 나지 않으니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을 못한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은 아예 까맣게 비워져 있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노력했고 진짜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도 잊혀지는 중이다. 그 때 영상을 하루나 눈 앞에 띄워줘도 하루나는 자기 기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베의 기억은 전반적으로는 평범한데 다만 특정 부분이 총천연색+음성 풀탑재 영상이 되있다. 집에 돌아가서도 그날 있었던 일을 곧잘 떠올리기 때문에 기억이 분명하고 좀 특별했던(싸웠거나, 칭찬받았거나, 엄청 화났다던가..) 일은 그 때 들었던 말의 음정이나 억양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만 당시 느낀 감정 상태에 따라 왜곡이 좀 있는 편. 예를 들어 가을 그 경기에서 실제 하루나는 그렇게까지 인상이 못되진 않았다. 그리고 그 때 그러지 않았어? 하고 물어보면 하루나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던 일이라도 그러고보니 그랬던 것 같네- 하는 대답이 돌아오는 반면 아베는 자기가 신경쓰지 않은 일은 진짜 까맣게 모른다. 설명해줘도 전혀 기억 못함.
하루나의 구속은 재능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속은 재능 이외에도 체격이나 파워, 자세 등 여러 요인이 더 작용한다. 그리고 후자들은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길러질 수 있다. 따라서 1권에서 아베가 한 '구속은 재능이지만 노력은~' 이 말은 완전히 맞는 건 아님. 결국 구속도 여타 다른 운동능력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타고나기도 하고 노력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 뿐인데 거기서 아베가 구속은 재능이라고 단언한 것은 중학교 시절 하루나를 봐왔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투구 수를 제한해도 빠른 공을 뻥뻥 던질 수 있는 하루나를 아베는 포수로서 투수를 보는 시선 외에도 평범한 사람이 타고난 천재를 보는 식으로 질투하고 존경했다. 그와 반대로 자기는 포수로써 어깨가 특출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체격이 유리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더욱 더 기를 쓰고 연습했다. 정작 하루나는 보기완 다르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하는 타입이었지만. 여튼 아베 스스로는 자기가 포수로 재능이 특출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충분히 신경을 쓰고 있고 더 노력하자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베가 가진 분석력과 경기를 이끌어가는 판단력이야말로 포수로써 타고난 재능에 가깝다.
미하시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아베는 이따금씩 자신들이 지금처럼 고등학교 때가 아니라 다른 때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베가 투수에게 실망하고 미하시는 자신감을 박탈당하기 전, 중학교 때라든지. 이 경우도 물론 나쁘지 않았겠지만 의외로 중학교 때 만났어도 둘의 관계가 딱히 지금보다 훨씬 더 좋지는 않다. 실제로 지금 아베가 미하시가 보이는 감사에 일일히 감동하고 울컥하는 건 중학교 때 하루나에게 받은 상처 때문으로 같은 말을 중학교 때 들었다면 듣기야 좋지만 동시에 뭐야 얘는 이런 말을 잘도 부끄럼도 없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더 컸을 것. 같은 모습이라도 '타카야'는 미하시를 좀 더 가볍게 받아들인다. 결국 아베가 미하시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비중을 두고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에게 중학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또 다른 시간 대에 만났어도 둘은 항상 미묘하게 엇갈리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마음을 나누어 간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들은 결과적으로 지금 이루어나갈 수 있는 관계와 비교해 딱히 더 낫지도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시니어 시절의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다시 둘이 배터리를 짠다면 아베와 하루나는 진짜 괜찮은 배터리가 된다. 이제 하루나는 더 이상 자기 혼자만의 야구가 아니라 팀의 승리에 욕심을 내고 있으며 구속 뿐 아니라 제구도 꽤 좋아졌고 아베 또한 자기 틀이 아니라 투수와 교감하는 법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볼캐치 능력도 늘었다.) 그러나 시니어 이후로 이 둘이 함께 배터리할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아베는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조금 웃는다.
인명은 그대로 두지만 지명은 한자 음독 ex) 니시우라 -> 서포(국)왜냐면 둘 다 일본식이면 왠지 안패러렐같아서 + 이름까지 바꿔봤더니 내가 못외우겠어서... 중용은 좋은 거시여따
1.
간밤에 폭설이 내렸음. 아닌게 아니라 이 겨울에 어렵사리 구해다 엮어놓은 수숫대 울타리가 반이 넘게 흠뻑 젖어버릴 정도의 눈이었다. 이 나라는 이렇게까지 눈이 오는구나, 하고 어머니의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들으며 아베는 아침 일찍 싸리비를 들고 눈을 치우러 나갔음. 밤새 수북히 쌓여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눈들은 북쪽의 물기가 많고 묵직한 함박눈이 아니라 약간의 바람에도 하얗게 눈가루가 되어 날리는 포슬한 가루눈임. 눈에선 아무 맛도, 냄새도 나지 않는다. 낯설다. 아베는 숨을 길게 내쉼. 입김이 금방 하얗게 바스라짐. 새삼 환경의 변화를 몸소 느끼면서 아베는 잘 바스러지는 눈을 척척 쓸어내며 제 마당을 청소해냈음.
아베는 평소에도 청소를 잘(그리고 자주)한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일을 계획적으로 해내는 방법을 잘 알았음. 그닥 넓다고 할 것도 없는 동그란 마당의 반을 갈라 눈을 쓸어내고 나머지 반의 반을 또 갈라 눈을 쓸어내려는데 마당 한 구석에 눈도 아니고 마당흙도 아닌 묘한 게 보였음. 노란 지푸라기 같은 것. 집중하던 눈을 들어 주변을 둘려보니 과연 그 주변에만 쌓인 눈이 불룩 튀어나온 게 보였음. 뭔가 묻혀있다는 거지. 벌써 창고에 들어가있을 겨우내 양식자루는 아닐테고. 아베는 대충 '그것'의 형태를 어림해서 위의 눈을 비로 쓸어내본다. 사람임. 지푸라기같이 노랗고, 까칠한 머리카락을 한 사람이 자기 앞마당에 쓰러져있었음. 게다가 잔뜩 언. 나막신을 신은 발로 툭툭 건드려보다가 손을 대본 아베는 그 사람이 추위에 언 제 손으로도 알만큼 싸늘하게 식어있다는 걸 알아차렸음. 죽었나? 얼핏봐도 겨울용은 아닌 얇은 비단옷 안쪽에 손을 넣어보니 아직 따뜻함. 미약하게나마 맥도 있음. 아베는 큰 소리로 집 안으로 사람을 부름. "아버지, 슌!"
뭔가 싶어 반쯤 신이 나서, 혹은 귀찮은 일이 생겼나 싶어 느긋하게 걸어나온 남동생과 아버지의 놀라는 얼굴을 보면서 아베는 아직도 쌓인 눈 때문에 눈 부신 눈가를 찌푸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마당에 사람이 쓰러져있어요."넹 요거 미하시ㅇㅇㅇㅇㅋㅋㅋㅋ 아베가 그 이름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뒤의 이야기지만 여튼. 남동생의 부축을 받아 업은 몸이 몸서리가 일 정도로 차가웠지만 또 그만큼 가벼워서 아베는 조금 묘한 느낌을 받는다. 후에 이 때를 떠올릴 때마다 아베는 이것이 어떤 예감과도 비슷했다고 생각하게 되지. 마당 쓸러 나갔던 아들이 반쯤 동사한 시체 모양새를 하고 있는 사람을 업고 들어오자 밥 짓고 있던 어머니가 에그머니나 소리를 질러. "아직 안죽었어요!" 이내 진정한 어머니와 따라 들어온 동생의 도움을 받아 소년의 언 옷을 벗기고 뜨끈한 아랫목에 누여 놓고 나서야 아베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어.
소리가 들렸어. 어둠속에서. 까칠한 싸리비가 눈 덮인 흙마당을 삭삭거리며 쓰는 소리와 또박또박한 나막신 소리. 아득한 곳에서 점차 이곳으로 다가왔어. 여기는 멀고, 깜깜하고 추웠는데. 이제 따뜻해. "....?" 미하시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땐 아베 가족이 조금 이른 점심식사까지 마치고 다시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아늑한 집안 공기에 섞여서 구수한 밥 냄새가 나. 목수일을 하는 가장은 밥 먹고 일찌감찌 새로 구한 일 마저 하러 집을 나섰고 장남은 제 나름대로 주변을 둘러보겠다고 나가서 집엔 어린 슌과 어머니 밖에 없었지. "와, 일어났어요?" 언 몸은 가끔 따슨 물로 닦아줘야 한다는 부모님의 지시에 따라 막 물든 대야와 마른 수건을 들고 들어오던 슌이 미하시가 눈 뜬 걸 보고 신이 나서 밖에 대고 어머니, 하고 불렀다.
여긴 어딜,까. 낯선 천장과 낯선 벽, 낯선 물건들이야. 내가 있던 곳은, 달랐어. 그 곳은 달랐는데, 나는 그 곳에서 나오려고... 미하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천천히 가로저었어. 다시 돌아온 슌이 들고 온 대야를 밀어내고 침상 쪽으로 바싹 다가 앉아 이것저것 물어본다. "저기, 어디서 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이름은 뭐라고 해요?/ 왜 우리 마당에 쓰러져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머리가 울려서 잘 알아듣기 힘들지만 소년의 깎아논 밤처럼 동그란 머리통이나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비슷한 또래의 사촌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거라서 미하시는 천천히 진정했어. "나...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미하시가 말을 멈추자 슌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어. "말 못해요?" 마침 따라 들어온 젊은 부인이 아이를 타일러 보냈어 - "슌, 가서 따뜻한 물이랑 쑤어둔 죽 좀 들고 오렴." -. 미하시는 아이의 이름이 슌이였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지.
"나는 미사에란다." 아베 부인은 침착한 태도로 목소리가 안나오는 건 일시적일 수도 있다고, 일단은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해. 그녀의 친정은 의사 집안이었고 으레 한 집의 안주인이 그렇듯 아베부인은 남편이나 아이들이 당하기 쉬운 여러가지 사고(찰과상이나 동상 등의)의 대처법 + 민간요법을 잘 알고 있었어. 더해서 한창 나이의 아들 둘을 키우면서 절로 길러진 담력도 있고. 온후함과 침착성이 두드러지는 부인의 태도에 안심한 미하시는 다시 천천히 잠들어. "어머, 이건 나중에 필요하겠구나." 문을 닫고 나간 방문 밖에서 부인이 밥상을 들고 온 터인 아이에게 건네는 말소리를 들으면서.
오후 내내 눈을 맞으며 돌아다닌 수고가 무색하게 탐문은 별 수확없이 끝났어. '서쪽'은 시골이라 아베가 있던 북쪽보다는 사람들이 훨씬 순박하고 숨기는 것 없었지만 그만큼 워낙 아무 것도 없는 동네라 아예 캘래야 캘 건덕지가 없었던 거지. 그래도 영주나, 하다못해 자경단 정도의 세력이라도 좋았는데. 오후 내내 내린 눈 때문에 무거워진 판초를 탁탁 털면서 타카야는 생각해. 그나마 촌장에 대해선 얻은 정보가 있긴 했지. 하나같이 대단한 여걸이네, 어쩌네 하던데 이런 온후한 시골에서 용맹이라야 보통보다 조금 더 대가 센 여자라는 이야기겠지. 오늘 탐문의 수확은 이정도일까.
"다녀왔어요!" 외치자 집 안에서 어머니와 슌이 반갑게 답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방 가운데에 지금 아베가(家)의 형편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비단옷이 활짝 펼쳐져 널려있어. 이건 '그녀석' 거구나. 아베는 거의 반쯤 잊고 있던, 아침에 그가 구해냈던 소년을 생각해내. 당시야 당장 사람 숨이 끊어질랑 말랑 하는 판국이니 신경쓰지 못했지만 이런 비단이라니 의외로 좋은 집의 자제일지도 몰라. 무늬는...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걸린 옷을 눈으로 쓱 훑자 가는 솔로 비단을 쓸고 있던 어머니가 한숨을 폭 내쉬어."이렇게 좋은 비단인데, 망가져버렸단다. 아까워라." 그 말 그대로, 온전한 것은 등판 부분 뿐 옷의 자락이며 소매 부분은 이미 끌리고 쓸리고 반쯤 그슬러서 흉하게 얼룩져있어. 부분을 잘라서 쓴다면 모를까 이건 더 이상 이 상태로 입을 수 없을 거야. 원래 이런 종류의 옷은 옷 자체나 옷을 입은 사람이나 가만히 두고 보기 위한 것이라 조금만 밖에 나가 돌아다녀도 금세 닳거나 헤지기 쉬워. 그렇다 해도 옷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이 녀석은 뭘 한걸까.. 아니 애초에 뭐하는 녀석이길래 이 계절에 이런 옷을 입고 남의 마당에 쓰러져있던 걸까? 타카야는 문득 아까도 느꼈던, 어떤 예감이 슬몃 고개를 드는 것을 느껴.
"타카, 그러고 보니 네가 데려온 그 아이..."어머니의 말을 대충 흘리며 방으로 들어오던 타카야는 저도 모르게 "으헉!" 하고 비명을 질렀어. "히익!" 식탁에 앉아 볼이 미어 터져라 밥을 밀어넣고 있던 미하시가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간 건 말할 것도 없고. 갑자기 자기 집에서 맞닥뜨린 낯선(+거기다가 괴상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던 타카야는 겨우 진정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깨어났다고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집 안에서 소리를 지르지 말렴, 하고 어머니가 마저 말을 이어. 타카야가 들어오기 직전까지 슌과 대화 - 거의 슌이 이야기하고 미하시는 밥 먹기 바빴지만 - 하고 있던 미하시는 타카야가 진정하고 나서도 식탁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보다 못한 슌이 "??" 하면서 반대편에서 식탁 밑으로 고개를 집어 넣자 ")@#()!" 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이상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들다가 식탁에 머리를 박고 웅크려. 대단한 쿵 소리가 나던데 과연 머리가 아픈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대체 이 녀석 뭐하는 녀석이야? 타카야는 좀 짜게 식은 표정으로 미하시를 보고, 미하시는 그런 타카야를 눈치채자 웅크린 몸을 더 둥글게 말아.
이건, 뭔지 모르겠지만.. 타카야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껴. 답답해! 이 녀석 행동은 왠지 뭔가 화 나! 점점 못마땅해지는 장남의 표정을 본 슌이 "형..?" 하고 고개를 갸웃해. "형, 이 사람 미하시 씨야." 간신히 이름(만)을 들었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동생을 보니 타카야가 느낀 저 녀석에 대한 느낌은 거의 사실인 것 같아. '미하시' 쪽을 한참 봤다가 기다려도 그 쪽이 직접 자신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할 낌새가 아닌 걸 눈치채자 타카야는 아예 그 쪽에서 고개를 돌리고 동생과 대화하기 시작해. "나이는?" "말 안했어." "어디서 왔대?" "음... 모르겠어." "뭐하러 왔는데?" "그것도 몰라.." 타카야가 질문할 때마다 움찔대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던 미하시는 타카야가 자기 쪽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어깨를 축 늘어뜨려. "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네." 동생에게 핀잔을 주자 어머니가 "타카, 얘는. 손님을 앞에 두고 무슨 말 버릇이니?" 하고 지적을 줘. 슌과 함께 풀죽었던 미하시는 푹 숙였던 얼굴을 슬쩍 들어 타카야의 얼굴을 올려다 봐. 그 과정에서 타카야와 눈이 마주치자 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지. 아- 이녀석 진짜 왠지 열받네.. 타카야는 미묘한 얼굴로 미하시를 쳐다봐. 따지자면 자기가 구해준 녀석이긴 한데.. 이런 녀석이었나.. 그나저나 '미하시'라는 이름은 어딘가 귀에 익어.
미하시와 타카야가 대화 비스무리한 걸 해본 건 미하시가 깨어나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야. 그동안은 미하시가 웃고 있지 않은 얼굴 + 큰 목소리에 벌벌 떠는 통에 아직 온전히 낫지 않은 미하시의 건강을 염려한 모친이 부친과 타카야는 거의 격리시키다시피 했어. 미하시가 묵고 있는 건넌방에 출입을 금지당한 타카야는 제가 구해준 놈 때문에 제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게 못마땅하긴 했지만 뭐.. 아베 가에서 어머니의 위력은 무시무시했으니 아무 말 못하고 따랐지. 그나마 건넌방 출입이 잦을 정도로 집에 붙어있지도 않았던 게, 이사온 지 얼마 안된 서쪽 지방을 알아보는 일도 바빴고. 몇 번 마을의 촌장을 보러 간 적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번번히 외출 중이라는 얘기였어. 이런 시기에 여자가 이렇게 자주 나다니지 않을 테니 필시 외부에서 온 아베를 경계하는 게 분명해. 역시 일이 잘 안풀리려나. 각오했지만.
집 근처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타카야는 간신히 이쪽 지방 끝, 즉 옆 나라에 미하시라는 이름의 가문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내. 이웃나라라 해도 이런 시골과 그리 가깝진 않지만. 삼성三星국의 미하시라면 강력한 무력은 없지만 그 내력이 건국 직전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고,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부유한 가문이야. 그 부족한 무력이라는 것도, 이번에 대를 잇게 될 장남이 상당한 무예가라는 소문으로 보아 곧 뚜렷한 약점이 되지 못할 확률이 높지. 이런 시골에 어울리지 않던 그 녀석의 화려한 차림새도, 그 미하시 가家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 타카야가 '미하시'를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건 애초에 미하시는 무장 가문이 아니어서 조금은 타카야의 관심 밖이었던 데다가 미하시의 화려하고 중후한 인상과 제 집에서 검소하다 못해 소박한 음식들을 정신없이 입 속으로 밀어넣고 있던 그 녀석의 얼굴을 도저히 연결지어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하시'라 해도 말단이려나. 실제로 그런 가문의 혈통은 귀하기 때문에 밖으로 함부로 내돌려지지 않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 녀석은 간신히 미하시라는 이름만을 받고 있거나, 혹은 그조차도 아니어서 어디서 흘려들었던 이름을 사칭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뭐, 이런 시기이고. 당장은 그 체격이며 얼굴을 봐서 힘으로 남을 해치지 못하리라 여겨 별 경계없이 어머니와 어린 동생만을 둔 집에 머무르게 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가 목숨을 구한 사람이고, 이 계절에 어디가서 얼어죽게 내둘 수도 없지. 타카야의, 미하시에 대한 생각은 그 정도였어.
타카야의, 미하시에 대한 이런 생각이 바뀐 건 그 '대화 비스무리'의 후야. 타카야로 치자면 그건 혼잣말도 아니었고 어찌됬든 두 사람이 말의 교환을 했으니까 어느 쪽이냐면 대화에 가깝다고 생각했어. 물론 평소(그리고 보통)라면 아무리 사교성 없다는 소리를 듣는 타카야라도 이런 걸 대화로 치지 않지만.오늘도 마을 주변을 탐색하고, 내친 김에 촌장 집에도 들러 '주인님은 오늘 농지 증축에 나가셨답니다~'하는 여느 때와 같은 여종의 말을 대충 전해듣고 난 뒤 좀 빨리 귀가한 타카야는 꽁꽁 닫혀있던 건넌방 커다란 창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눈치채. 창이 작았던 북쪽 집과는 다르게 서쪽은 문도 창문도 큼지막하지. 지금의 집은 빨리 서쪽의 건축 방식과 익숙해지려고 목수인 아버지가 일부러 서쪽식으로 지은 거야. 처음에 창이 열려져 있어서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지만 집에 가까워져 옴에 따라 그 창 안에 누가 들어있는 게 보여. 미하시야. 타카야가 며칠 전 구해 온 녀석. "뭐야, 너구나." 오늘은 겨울치곤 바람도 불지 않고 날도 포근하니 창을 열어본 것이겠지만 아무리 따스하다 해도 이런 계절에 창문을 열어두면 애써 지펴 둔 불이 열기가 창을 통해 나가버려 저녁 때는 꽤 싸늘해질 걸. 타카야는 성큼성큼 다가가 "창문, 닫아." 하고 말해. 처음 이 쪽으로 걸어오는 타카야를 발견했을 때부터 안절부절한 기색이었던 미하시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문을 쾅 닫아. 방 안에서 제가 낸 문소리에 놀라 히익, 하는 소리도 들리고. 나쁜 녀석은 아닌 거 같은데 왠지 이 녀석과는 잘 통하지 않는 느낌. 타카야는 궁시렁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그러고보면 오늘 어머니는 바느질거리 같은 걸 얻는다며 외출한 상태고, 동생 슌도 어디로 놀러나갔는지 집 안에선 보이지 않아. 아무리 병자라도 낯선 사람 혼자 집에 두다니. 대체 어떻게 된 집안인 거야. 타카야는 못마땅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문득 이게 미하시와 대화하기 좋은 상황이라고 생각해. 어머니와 슌이 있으면 미하시는 형을 무서워하네 어쩌네 해서 자기를 밀어댈 뿐이고. 마침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어. 너는 누구인지, 어째서 이 곳에 오게 된 건지, 그 '미하시'가家 와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
"미하시, 실례할게." 자기 집을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웃기지만 일단 작은 기색에도 벌벌 떨던 미하시가 생각나 들어간다는 기별을 했어. 안에서 답이 없길래(반쯤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미하시가 보여. "...? 무슨 일이야? 뭐가 있어?" 영 상태가 안좋아보여서 묻자 온 몸을 힘껏 껴안은 두 팔에 고개를 묻은 불편한 자세인데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어. 그러곤 미하시는 눈치를 보는 것처럼 힐끗거리는 기색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타카야와 눈이 마주치고 다시 뭔가에 놀란 것처럼 고개를 팔에 묻어.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려고 애쓰기를 반복. 타카야는 이 녀석이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했어. 눈이 마주친 순간 울고 있었는지 벌건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엉망인 얼굴. 자신과 비슷한 연배라고 생각했는데. 아베가에선 훨씬 어린 슌도 남들 앞에서 이렇게 울지 않아. 이 녀석, 사실은 계집애라던가.. 잘먹고 자란 사내애치곤 골격도 작고 잔뜩 야위었고. 어머니나 슌이 아무 말도 안한 걸로 봐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타카야는 지금 상태의 미하시와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만 방을 나가려고 했어. 마악 방문을 열려던 참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어. "...나.. 괜,찮...! 아, 무일...도." 울먹임 탓인지 중간중간 끊기는 말이었지만 확실히 '말'이었지. 타카야는 나가려던 몸을 돌려서 미하시와 조금 떨어진 방 가운데에 앉아. 이제 고개를 든 미하시는 목을 조금 움츠린 자세에서 타카야를 올려다 보고 있어. 타카야는 먼저 간단하게 말을 던져보기로 해."나, 알아?" "...우, 응. 나... 해, 줬... 처, 여기, 지ㅂ...!" 미안한데, 무슨 소리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꽤 오래 묵었으면서 어머니와 동생이 녀석의 이름밖에 알 수 없었던 게 이해가 가. 여튼 타카야는 자기 물음 - 나 알아? - 에 대한 대답이 긍정이라는 것만을 알아차렸어. 그래, 일단 긍정/부정으로 답할 수 있는 걸 물어보자. "네 이름이 미하시야?"/"..잘, 해줘!" 아까의 대답 외에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 듯 타카야와 말이 엇갈린 미하시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재빨리 제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아. 잘해줘? 뭘? ...그보다 뭐하는 거야? 두 손으로 입을 꽁꽁 싸맨 채인 미하시를 이상하단 눈으로 바라보자 미하시가 재빨리 고개를 붕붕 소리날 정도로 끄덕여. 뭐지? 이건. 한참을 고민하던 타카야는 이게 종전의 물음 - 너 이름 미하시? - 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닫고 아, 했어. 으아.. 타카야는 제 인내의 끈이 갈작갈작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미간 사이에 주름을 모아. 당장 이런 답답한 대화 따위 그만두고 싶지만 아직 물을 게 남았어. 이 녀석이 그 '미하시'라면 왜 이런 시골에 그런 차림으로 쓰러져있었는지 하는 의문이 남아. 이걸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깝깝해진 타카야는 일단 직구로 승부를 보자고 해. 그러니까 직구, 오른쪽으로 낮게.
"이 곳엔 무슨 일이야?" "...ㅂ 있을, 수... 문, 려었.. 추워, 배... 카ㄴ...." ??...?!?.... ..... 역시 긍정/부정으로 답할 수 없는 물음은 무리였나... 타카야는 저 말 중 하나도 제대로 건지지 못했어. 더군다나 미하시는 이 화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끄트머리에 가선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가고, 그나마 침착해졌던 표정을 다시 울상으로 하고 고개를 푹 숙여. 이래서 안되겠다. 일단 저 녀석의 신분을 알아내고,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기가 알아서 조사하는 게 더 빠를 거 같애."글은 쓸 줄 알아?" 서랍을 뒤져 간단한 지필묵을 꺼낸 타카야가 묻자 미하시는 다시 고개를 들어 희미하게 끄덕였어. "아버지와 어머니 이름, 써줄래?" 신분을 명확히 아는 수단은 선조를 아는 것. 집안에서의 위치도 짐작할 수 있지. 타카야의 물음에 미하시는 조금 망설이는 듯 하다가 붓을 들어 종이에 획을 그었어.
처음 타카야가 놀랬던 건 미하시의 더듬거리는 말투나 불안해뵈는 인상과 다르게 글씨가 굉장히 반듯하다는 거였어. 획의 강약이며 점의 위치 하나하나까지가 마치 방안지에라도 적고 있는 듯한 완벽함. 지금은 자세도 웅크린데다 긴장한 탓인지 손목이 조금 흔들리고 있지만. 당시 타카야는 미처 몰랐지만 이건 태어나 걷기도 전부터 시서예악을 익히는 명문가의 자제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교양이야. 실제로 미하시는 이 글씨를 천 번, 만 번도 넘게 써봤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필치를 거의 넋을 놓고 보고 있던 타카야는 글이 다 완성되자 간신히 입을 열었어. "이건... 너의?" 타카야의 반응이 무슨 일인가 싶어 뜨끔한 미하시가 쓰던 붓을 두 손으로 쥐고 제 눈치를 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타카야는 미하시가 쓴 글씨를 다시 한 번 읽어 봐. '미하시 나오에, 미하시 레이이치.' 三橋 ?江, 三橋 玲一. 다시 한번 읽어봐도 똑같아.사실 타카야는 미하시의 신분을 대충 짐작해보긴 했어. 명문이란 으레 행적이 잘 알려져 있고 더군다나 미하시는 유독 손이 귀한 집안이야. 남자아이에 대략적인 연배까지 알고 있으면 자세한 건 몰라도 대충 누군지 짐작할 수 있어. 지금 미하시 가에 적을 둔 또래의 아이는 3명. 현 가주의 장녀와 데릴사위에게서 둔 장손 한 명에, 시집 갔던 차녀가 남편과 사별하자 본가로 데리고 들어온 아들 하나. 그리고 먼 분가 쪽이지만 가주가 아낀다는 손녀가 하나 있어. 타카야는 미하시가 잘해 봐야 차녀의 아들 쯤이 아닐까 생각했어. 그도 아니라면 아예 세간에 알려지지조차 않은 분가 쪽의 사생아든가. 그러나 미하시가 종이에 적은 이름은 장녀와 그 데릴사위 남편의 이름이야.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건 그 대단한 미하시 가의 후계자 장손인 셈이야. 장녀 부부는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직계적통으로는 유일무이하다고 봐야겠지. 그런 후계자가 이런 곳에서 최소한의 삶의 보장도 받지 못한 채로 버려져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야. 타카야는 그러리라는 짐작도 해보지 못했어. 하나 뿐인 후계자가 없어졌다면 가문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이제껏 그 비스무리한 소문 하나 들은 적 없는 건 물론이야.타카야는 얼마 전 들은 장손에 대한 풍문을 떠올려. 활달하고, 어리지만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에 상당한 무예가. 눈 앞에 있는 녀석과는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없다. 그렇다면 사칭인가? 그렇다면 고관대작에게나 가서 할 일이지, 타카야 자신이 봐도 지금 이 집안에서 미하시를 사칭해봤자 얻는 건 좀 나은 인사치레 정도 밖엔 없어보여. 그야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도망치듯 나왔으니까... 게다가 단순한 사칭이라고 하기엔 여기에 적은 필체나 글자가 너무 정확해. 타카야의 경우는 조금 특출난 경우지만 일반적으로 서민들은 제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의 이름 자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 밑의 식솔들의 이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지? 타카야는 종이를 쥔 채로 생각에 빠져들어.
사실 욕망에 휘둘려 설정같은 것을 잘 짜지 않았던 것이다 설정구멍이 있을 수 있음 매우 많이
아 뭐라 그래야되지.. 일단 시점은 지금임 롸잇나우 지금 이순간 마법처럼 여튼 다이무스는 칼같이 은행에 출근하여 월급을 잘 받고 따슨 밥 먹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음 가끔 임무도 감 임무는 당연히 성공한다 왜냐하면 다이무스는 짱쎄니까.. 원래는 직장 근처 자기네 작은 저택 하나 잡아서 집사랑 이그리랑 셋이서 알콩달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글이가 연합간다고 가출함 그래서 다이무스는 집사랑 둘이서 살고 있음 히카르도는 카뮤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친구가 무서웠으며 행방을 감춰서 묘연함. 조용히 카뮤 스토킹 중이지만 여튼 눈에는 잘 띄지 않음. 회사도 연합도 히카르도에게 관심 없어 왜냐하면 얘가 능력은 좀 쩔어주긴 하지만 oh oh 복수의☆히카르도 oh oh 여서 갖기도 모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모하고 상대가 가지면 아쉬워서 쩝 입맛은 한번 다셔보겠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스카웃할 생각은 음씀 가끔 어디서 출몰했다더라 하는 정보는 모으지만 찾아나서진 않음 뭐 그런 상태 히카르도는 매우 자유로움 자유의 영혼임
여튼 요러저러하게 잘 살고 있는 회사 앞에 어느날 히카르도가 나타남. 그 어디냐 포트레너드? 여튼 회사 본사로 찾아오면 좀 좋은데 히카르도가 찾아간 건 회사의 여러 계열사 중에서도 어째 사이퍼랑은 영 관련이 없는 그런 지부였음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본사의 수장 앤지 헌트를 보고 싶다고 큰 소리 쳐대는 히카르도 일을 잘 처리하느라 지부에서 엄청 혼란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었음 그리고 히카르도는 제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는 것도.
여튼 어떠케 어떠케 해서 히카르도는 무사히 회사 본사로 인도됨. 물론 히카르도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으니 사장은 일이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둘러대고 이사랑 대면함. 얘가 대체 뭐라나 들어봤더니 대뜸 테이블 위에 다리를 턱 올리더니 한다는 소리가 회사에 들어가고 싶으니 입사시켜달라는 거임. 아 테이블 비싼건데 이게 뭐지? 윌라드는 존나 혼란스럽지만 연합이라는 적도 있고 공격력이 검증된 사이퍼 하나가 아쉬운 시점이라 얘 꿍꿍이가 뭔지 몰라도 걍 훠이 쫓아버릴 순 없음 거기다 상대가 나 회사 들어갈꺼임ㅋ 하면서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으니까 더더욱 그러함 그래서 앤지랑 이사랑 부뤼노랑 대충 회사의 높으신 분들끼리 의논했는데 일단 히카르도는 회사에서 받아들인다는 걸로 했음. 단, 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결정에 딸린 또 이러저러한 회의 끝에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은행에 배속됨. 물론 은행원으론 아닌 거시다 히카르도는 머리가 ㅃㅏ... 아니 정식 은행원으로 고용하려면 이러저러한 교육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니까 은행원 그것은 인텔리.. 그래서 경비원으로 배속함 물론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신성한 은행에 대체 경비원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수가 없지만 그런 있으나 마나한 직책이었다는 거고 실제적인 목적인 히카르도 바레타가 무슨 쓸데없는 일을 꾸미지 않나 회사의 믿음직한 에이스인 다이무스에게 감시감독의 임무를 맡긴 것임. 히카르도한텐 다이무스가 니 사수라고 말해둠 대체 은행에 어떤 개족.. 어떠한 위계가 있으면 은행원 다이무스가 경비원 히카르도의 사수가 될 수 있는지 알수가 없지만 회사는 은행 뿐 아니라 '회사'의 사수인 거라고 어거지를 씀 히카르도는 의외로 이렇다할 불만을 보이지 않음 얘가 회사를 안다녀봐서 눈치를 못챈건지 어쩐건지 모르겠음 사실 다이무스는 자기네 은행에 히카르도 주는 거까지는 걍 쏘쏘했는데 경비원인게 조금 못마땅함 가뜩이나 수상한 애한테 조금이나마 업무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있는 자격을 주다니 그치만 은행에 꽂을라면 별 수 없었음 그렇다고 자동입출금기 이런걸 시킬 순 없잖아
물론 히카르도에겐 뻔하게도 뭔가 카뮤라던가 카미유라던가 데샹에 연관된,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선 일단 접어둠. 여느 때처럼 은행 오픈시간 한참 전에 출근해서 간밤에 정리하고 퇴근했던 서류를 세밀하게 살피던 다이무스는 회사에서 제시한 출근시간보다 훨씬 느즈막히 출근한 히카르도를 처음으로 대면함. 경비원이라고 경비원 복장에 인상 사나운 걸 감추기 위한 것일게 분명한 모자에 썬글라스까지 끼운 히카르도는 은행 경비원보다는 은행 털러온 마피아로 보임 실제로도 마피아가 맞지 않나.. 다이무스는 들어와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히카르도한테 흘끗 시선을 던지고 다시 서류업무를 봄 히카르도는 처음엔 자기가 배정된 자리에 잘 서있나 싶더니 여기서 할일이 별로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챘는지 은행 소파에 대충 걸터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째려보기 시작함. 썬팅 수준의 썬글라스를 뚫고 쏟아지는 폭발적인 히카르도의 시선에 은행을 찾은 손님들은 좀 불편함을 느낌.
서류를 들여다보는 듯 하면서 다이무스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음. 히카르도 생각ㅇㅇㅇ 사실 처음에 윌라드한테서 히카르도 좀 맡으라고 얘기 들었을 때 아니다 히카르도가 일부러(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회사 본사가 아니라 지부로 찾아왔다고 입사를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다이무스는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음 회사 본사가 어디 꽁꽁 감춰져있는 것도 아니고 사이퍼 관련 얘기를 하기엔 본사가 훨씬 더 편하고 일이 빨랐을 텐데 그 먼 지부까지 찾아간건.. 사람들을 당황시키거나 압력을 가하거나 뭐 그런거에 능하고 좋아한다는 거임. 실제로 당황하는 지부 사람들을 보고 흐뭇한 기색을 보였다고 했지. 마피아가 되기 전 그의 본래 성격이야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면에서 드러나는 그의 성격은 가학성이 짙고 잔인하며 폭력적임. 이런 인물에 말려들지 않고 다룰 수 있는 건 헬리오스에선 아마 다이무스가 유일할 거임. 물론 제일 좋은 건 실력자들이 주둔하는 본사에 넣어놓는 거지만 그건 아마 본진에 적의 폭탄을 박아두는 거랑 비슷함. 다이무스는 제 임무를 완전히 이해했음. 이해하지 못했어도 따랐을 테지만 역시 이해하는 게 더 좋음
사실 '처음으로'라는 건 은행에서 얘기고 다이무스랑 히카르도는 헬리오스에서 한번 미리 만났긴 함. 히카르도 직장 배정해주면서 윌라드가 앞으로 모르는 건 니 사수한테 물어보게 하면서 둘을 인사시킨 적이 있음. 다이무스는 간단하게 목례하고 히카르도는 대충 고개숙여서 잘부탁한다고 악수 한번 했음. 고개를 숙이면서도 히카르도가 별 숨길 생각도 없이 이쪽의 성격이며 실력 같은 걸 대충 가늠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다이무스는 그냥 넘겼음. 애초부터 얘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 회사에 들어온 건 당연한 일이고 중요한 건 그 딴 생각이 뭐냐는 거임. 윌라드는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히카르도가 숨기고 있는 꿍꿍이가 회사의 존속에 크게 위배되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줘도 된다는 인상을 뿌렸음. 이제 회사의 같은 동료니 어쩌니 하는 겉치례를 들으면서도 다이무스는 제 연한 안쪽 살 안으로 따끔한 바늘 같은 것을 심어놓은 것 같은 불쾌감을 느낌. 날카로운 것은 분명하되 언제 찔러서 피가 배어나올 지 알 수 없는 그런 바늘. 크게 찔리기 전에 골라내야 함. 그런 임무를 맡았음. 히카르도는 은행에 출근하자마자 제 선임인 다이무스한테 고개를 끄덕거려 인사함. 히카르도는 의외로 조직에 익숙함. 그가 자란 곳이 그런 식의 질서가 철저한 마피아 조직이기도 했고 그도 막 들어온 회사나 은행에서 눈에 띄는 분탕질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보임. 다만 어깨를 한껏 부풀리고 고개를 옆으로 틀어 까딱하고 간지인사하는 건 마피아식 인사법이지 직장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시다.. 은행에 전직 조폭 경비원이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서 은행 근처는 왠지 치안이 전에 없이 좋아짐 문제는 너무 치안이 좋아져서 시민들도 음씀 은행에 손님이 음씀
히카르도를 은행에 꽂은 거까진 좋은데 여기엔 엄청난 맹점이 있음 그것은 바로 은행은 일찍 문닫는다는 거다 1920년대에 요즘처럼 4시 정각에 퇴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늦은밤까지 얘를 붙들어놓을 수가 없음 그 말이 무슨 말이냐 업무시간에야 다이무스가 본다고 쳐도 퇴근시간인 오후 약 6시부터 다음날 출근시간까지 얘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수가 없다는 거임 이 중대한 사실에 대해 회사는 좀 고민하더니 은행 근처(=홀든 저택 근처)에 하숙집을 하나 잡아줌 말로는 직원에 대한 배려 어쩌구 주알거리면서. 평소엔 감시원을 세우거나 여유있을 땐 다이무스가 감시하고 있거나 함애 하나 영입한 거 가지고 손이 무지하게 가는 느낌이라 회사에선 쫌 후회했지만 이미 취직한거 뭐 어쩌겠음 회사의 이런 우려와는 달리 히카르도는 은행에서 나름 조용하게 잘 지냄 물론 다이무스네 은행에서는 같은 사이퍼라 해도 이제껏 다이무스와 단란한 은행을 꾸려왔다면 히카르도는 마치 라스ㅂ.. 아니 인상도 날카롭고 행동거지에 마피아 티가 풀풀 묻어나는 히카르도가 부담스러움 경비원복 입고 입구에 서있으면 아무도 히카르도에게 말을 걸지 않음.. ㄴ..날 혼자 두지마...ㅠㅠㅠㅠ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히카르도는 할일도 없고 무지하게 심심함 그러니까 히카르도가 어느 평온한 오후에 따슨 햇살을 마시며 서류철을 들여다보고 있는 다이무스의 집무실에 양손 가득 서류를 잔뜩 들고 난입한 건 그밖에 너무나도 할일이 없었기 때문임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슬쩍 든다음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리려 했던 다이무스는 기대했던 은행 동료가 아니라 덩치 커다란 경비원이 서류를 한아름 들고 오자 (티는 안났지만) 아연해졌음. 그 시선을 뭐라고 착각했는지 히카르도는 일단 야릴라다가 -> 상사=윗사람 -> 쭈그러듬. "...뭐지?" 니 서류요... 다이무스는 곰곰히 생각해봄. 아님. 아무리 생각해도 자긴 이런 일을 얘한테 시킨 적이 없음 히카르도는 좀 뻘쭘해하면서 저기 은행원한테 부탁받았다고 함 그날이 주말 앞둔 월말이라 진짜 바빴거든 은행 전체가 발 동동 구르면서 뛰어다니는데 하릴없이 멀뚱히 서있는 히카르도는 좋은 심부름꾼감이었을 거임 그렇다고 해도 서류셔틀을 진짜 시킬 줄이야.. 직원들은 히카르도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는데 한 일주일 보는 사이에 좀 익숙해졌나봄 아님 너무 정신이 없었거나.. 다이무스는 둘 다 일거라고 생각함 계속 히카르도가 서류나 들고 서있자 일단 다이무스는 일어나서 책상 한쪽을 가리키면서 여기다 놓으라고 함 히카르도는 쌓아올린 서류 안넘어지게 천천히 다가와서 책상에 쌓음 쏟지 않으려고 꼭 쥐고 온건지 서류 귀퉁이에 꾸깃꾸깃 되어있음 그래도 사이퍼라 그런지 일반인보다 한꺼번에 많이 가져왔음 실력자 사이퍼가 서류셔틀이나 하고 있다니.. 사정이야 어쨌든 순수한 히카르도의 효율만 보면 이 평화로운 은행의 경비원직은 너무 작은 일임
서류를 다 전해주고 난 다음에도 히카르도는 금방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잠깐 그대로 서 있었음. 문 너머로 월말 은행의 소란스러움과 정신없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반면 다이무스의 집무실은 햇볕도 짱짱하게 들고 차분하고 조용함. 다이무스는 방금 받은 서류의 맨 윗장을 들어 읽어보고 잉크를 찍어 서명한 후 펜을 잉크병에 꽂아 담가둠. 일의 전개야 어떻게 됐든 히카르도는 이제 제 아랫사람이고 회사 동료인데 대화가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임. 살갑게 챙겨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는 귀족 가문의 장남인 다이무스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 도량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음. 헬리오스 생활은 어떠냐는 질문에 히카르도는 별 일은 없지만 뭘 시켜줘야 할 거 아니냐는 뉘앙스로 약간 투덜거림. 순간 다이무스는 자주 투덜거리며 치근대던 막내동생을 생각해내고 조금 입꼬리가 누그러짐. 그날 오후 퇴근한 후 저택에서 보낸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다이무스는 이제 슬슬 회사에 히카르도가 맡을 임무를 건의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함. 여기 둬봤자 눈에 띄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회사 관련 업무를 조금 주면 히카르도의 행동목표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날 수도 있음 이제껏 제 배속이나 처지에 별 불만을 품고 있지 않은 눈치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름 물론 임무 때에는 다이무스도 동행해야겠지만.
다이무스의 건의가 먹혔던지 아니면 애초부터 이 때가 적기라고 생각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히카르도에게 사이퍼 관련 임무가 내려옴. 다이무스가 은행원이면서 회사의 에이스인것처럼 히카르도도 은행 경비원이랑 헬리오스 병행임. 맡은 임무는 글림듀 근처에서 사이퍼의 힘으로 일반인을 착취하는 깡패 무리를 소탕하는 거임. 히카르도의 능력이나 다이무스의 경력을 고려하면 다소 어이없을 정도로 시시한 임무이지만 아직 히카르도의 의중을 확신할 수 없으니 좀 더 회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임무는 맡기기 어려웠을 거임. 히카르도 감시를 맡기면서 다이무스에게 맡길 수 있는 임무의 폭도 굉장히 좁아졌으니 오히려 회사로서는 그나마 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임무를 줬다고 봐도 좋음.
경비원 복장을 벗고 제 사복을 걸친 히카르도는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음. 실제로 의욕도 넘쳐나서 안그래도 간단한 임무에 히카르도가 앞장서서 처리해버리자 다이무스는 별로 할 일이 없었음. 깡패 세력을 소탕하는 한편으로 다이무스는 그런 히카르도의 태도를 주의깊게 살폈음. 벌레를 조종하는 능력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잘한 공격은 아예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적을 붙잡는다던가, 제 피와 살을 깎아 공격력을 올린다던가 하는 그런 것. 능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모적인 감이 없잖아 있음. 지금도 히카르도가 공간이동능력자가 뒤쪽으로 날린 총알을 피하는 대신 그대로 손을 뻗어서 능력자를 제 쪽으로 끌어오려고 하는 걸 본 다이무스는 칼로 가볍게 총알을 쳐내고 능력자를 날려보내버림. 내민 손끝이 표적을 놓치고 허공을 스치자 히카르도는 다이무스 쪽을 뒤돌아봄. 그 표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아마 놀람에 가까웠음. 따라서 히카르도 쪽을 돌아본 다이무스가 별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다른 능력자들을 처리하러 가지만 히카르도는 잠시동안 그대로 멈춰 다이무스 쪽을 바라봤음.
임무는 예상대로 간단하게 끝났음. 히카르도와 다이무스의 실력에 질려 항복한 무리들은 체포하고 개중 심하게 다친 애들은 회사와 연이 닿아있는 병원으로 보내고 나니 깔끔해졌음. 연락을 받은 경관이 깡패들을 줄줄이 인수해가면서 그 향후 처리나 피해 보상 등에 대한 얘기를 다이무스와 나누는 사이 히카르도는 널찍히 떨어져 그쪽을 바라봄 대화를 마친 후 히카르도 쪽으로 다가온 다이무스는 아까 전과 다르게 그의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챔. 오히려 기분이 확 가라앉은 것처럼도 보임 다이무스 생각으론 간단하긴 하지만 임무도 잘 마쳤겠다 별 불만이 있을까 싶지만 능력자들이야 워낙 개성있는 존재들이고 임무 시에는 방방 날아다니다가 평소엔 소극적인 그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 흠.. 하고 맘. 때 맞춰 회사에서 마중보낸 차가 도착하자 히카르도랑 다이무스는 나란히 뒷자석에 타는데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히카르도가 옆에서 뭔가 할말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눈치를 자꾸 보여서 다이무스의 신경을 건드림. 좀 두고보다 못한 다이무스가 눈썹 한쪽을 올리며 "?" 눈치를 주는데 히카르도는 뜸 좀 들이다가 아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버림. 그러는 걸 보고 말해라 어쩌라 설득할 정도로 다이무스 말재간이 좋지가 않음 그래서 둘은 걍 침묵을 지키며 회사까지 감 어우 덩치있으신 두놈이 타서 그런가 차 안 공기가 좀 무겁네 운전기사는 희생된 것이다 거기다 둘다 팔짱을 끼고 있어서 더 좁음가는 길에 히카르도 집 앞에서 내려주고 다이무스는 남은 업무며 보고차 회사로 향함 물론 보고서 형식 딱딱 맞춰 작성해서 제출할 거지만 대충의 경과보고는 올려야 할 거 같아서 서류 결재맡는 김에 겸사겸사 들름 임무보고라고는 하지만 사실 임무에 대한 얘기는 지나가듯 언급한 게 다였고 히카르도의 평소 태도, 능력이랑 전투 스타일에 대한 것이 주된 화제였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제가 보고 느낀대로 보고하는 다이무스의 대답을 듣고 윌라드는 가타부타 첨언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도 죽 부탁한다고 말함 다이무스는 짧게 목례하고 나옴
다이무스는 회사에 들렀으니까 그동안 히카르도의 감시는 회사의 감시원에게 맡겨둬서 다이무스에게 틈틈히 보고함. 그날 저녁 히카르도가 집을 나와 술집으로 가더라 하는 보고를 받아서 누구랑 만나나 했지만 혼자 테이블 하나 잡고 술병하나 술잔하나 놓고 자작질이나 한다고 들었음 그래도 혹시나 무슨 변동이 있나 싶어 누굴 만나는 낌새나 이상한 기색을 보이면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그날 저녁은 연락을 받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게 칼을 가까운데 뒀지만 그날 밤이 깊도록 감시원에게서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음 아마 별일이 없었던 모양임.
첫 임무를 마친 이후 다이무스는 서류를 처리하거나 은행업무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면 왠지 자꾸만 히카르도랑 눈이 마주친다는 사실을 알게됨. 히카르도는 (이쪽이 보기엔) 존나 침통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가 다이무스가 고개를 들면 다른데로 시선을 돌려버림. 다이무스는 이게 대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첫임무 끝내고 돌아오던 길처럼 뭔가 할말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른 용건인거 같기도 함. 검사의 감인지 어떤지 상대의 시선에 담긴 뜻을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한 다이무스가 보기에 이건 증오도 아니고 분노도 아님 그렇다고 호의라고 하기도 좀 그럼 어떤 때는 그냥 시선만 이쪽으로 둘 뿐이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임 사실 귀족가문 장남이자 대를 이을 적장자인 다이무스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냥 쳐다보는 것 뿐이니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음 그치만 제가 맡은 손아랫사람이자 감시대상이라는 위치가 다이무스로 하여금 히카르도에게 완전히 무심할 수 없게 만듦. 그래서 히카르도가 다이무스를 보고 있지 않은 때에는 다이무스가 히카르도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기도 하고 뭐 그러게 됨.
그렇게 히카르도를 지켜보는 동안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의외로 요령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 말이 부족하다지 사실상 없다에 가까움 언제는 히카르도가 지나가다가 깨진 컵을 발견한 적이 있었음 어지럽혀져 흩어진 유리조각을 뭔가 싶어서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 같음 지나가다가 컵의 주인인 은행원이 그걸 보고 "헉 내 컵이... 아니 괘.. 괜찮아요..." 하면서 도망가버림 히카르도는 그 모든 과정을 그냥 멀뚱하니 보고 있다가 컵을 발로 슥슥거리더니 걍 지 갈길 감 분명히 오해가 발생한 상황인데 히카르도는 그걸 해명할 생각도 안하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거 같음. 이런 비슷한 일이 종종 일어남 음.. 다이무스는 생각함. 자기가 저거랑 완전히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컵을 깼다는 오해를 받진 않을꺼임 그의 두 동생들은.. 벨져는 저가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것에 빡쳐서 불같이 승질을 떨것이고 누명을 벗을 거임 그리고 이글은 야 이거 내가 안했다? 원래 깨져있었어~ 같은 밉지 않은 태도로 상대의 화를 풀어버리겠지 딱히 홀든 형제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해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부정을 덮어쓰는 건 피하고 싶어함 그게 당연한 거임 그런면에서 보면 히카르도는 어찌보면 대범한 것 같기도 함 다만 이런게 쌓이면 일상 생활이 힘들어짐 마피아 조직 생활도 마찬가지였을 듯 하고. 다이무스는 문득 히카르도가 겉보기와는 다르게 완전히 성자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쩌면 제가 저지른 일보다 훨씬 나쁜 쪽으로 과대평가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
히카르도의 입사와 첫 임무 사이의 텀이 꽤 길었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임무는 첫 번째를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내려옴. 첫 임무를 무사히 마친 것이 헬리오스에 긍정적인 느낌을 준 것 같음 고작 임무 하나 성공시킨 것 가지고 아무 일 없으리라고 생각했을리도 없으니까 지금 회사가 그만큼 일손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됨 그렇게 대단한 임무도 아니었지만 히카르도는 은행에서 일하(기보단 방치당하)는 것보다 훨씬 맘에 들어함 첫 임무처럼 앞서가는 건 똑같지만 가끔 히카르도는 잘 가다말고 한번씩 뒤를 돌아봄 마치 저를 지켜보느라 한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다이무스를 확인하는 것처럼. 감시당하는 것을 눈치챈 거겠지. 지금도 적에게 힐킥을 먹인다음 버릇처럼 뒤쪽으로 더듬듯 시선을 던지는 히카르도를 보며 다이무스는 그를 곁눈질함.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적을 보름달베기로 썰어버림.
그 후로 둘은 실력에 비해 낮은 수준의 임무를 몇 가지 더 함께 함. 임무를 달성하는 동안 회사도 어느 정도 안심했는지 이제는 좀 덜 간단한 임무도 가끔 내줌 그래 봤자 엄청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다이무스가 보기에 회사는 이제 히카르도에 대해서 걱정을 한시름 놓은 거 같음 정작 다이무스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음. 임무 시 둘의 대화라고 하면 결착을 지을 때라던가(=공격) 트루퍼를 피로 물들인다던가(=트루퍼 공격) 그런게 다임 가끔 f3나 f4도 누름 물론 집에 가는 차 안은 침묵의 시간!! 사일런트 나잇!!!
이번에 받은 임무는 성격이 좀 달랐음 얘기를 듣자마자 다이무스는 '이제 이런 것까지 주나.'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주요 지역이 아니라지만 연합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역에 둘을 배치한 거임 심지어 내용도 신경쓰임 이번 임무는 최근 도는 이상한 소문에 대한 진상 규명임 최근 글림듀 동쪽에서 안개가 피어난다는데 이게 그 '안개'인지 조사하는 거임 뜬금없긴 하지만 애초에 글림듀는 숲과 호수가 많아 그냥 단순한 자연현상으로서의 안개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음 말은 글림듀라곤 하지만 디시카랑 가까워서 연합애들이랑 마주칠지도 모름소문 규명은 걍 쉬웠음 가지고 온 채집장치에 안개 담아서 본사로 갖다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물론 적이 있다면 보이느냐 안보이느냐로 '안개'인지 판단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적이 음씀 작업을 끝낸 다이무스가 차로 돌아가려다 이상한 낌새를 챔 연합의 능력자들이 둘이 여기 온다는 얘기를 듣고 온거임 우리 영역에 대한 침범이니 어쩌니 하면서. 눈에 띄는 거물들은 오지 않았지만 몰려온 숫자가 워낙 많음. 아마 쟤들도 둘을 죽일 생각은 없을 거임 연합과 회사는 사실상 휴전상태나 다름 없으니까 그치만 영역을 침범당한 이상 경고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고 그러니 등장한 능력자들도 연합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는 영웅이나 눈에 띄는 거물 대신 중하급들임 여기선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껀데 하필 돌아갈 차와 반대방향임 다이무스와 히카르도는 잠깐동안 안개 속에 모습을 숨긴채 인기척을 죽이고 있었음
그나마 이 상황에서 좀 낫다 싶은 건 지금 저들의 기척이 그대로 느껴지는 걸로 봐서 이 안개는 그냥 평범한 자연현상이라는 걸 알게 된 거임 회사가 이미 디미스트를 점유하고 있는 이상 다른 데서 안개가 나왔다고 해도 관리가 성가실 뿐임 그래도 보고할 때 필요하니까 채집장치는 잘 챙겨둠 이 쪽이 숨어있으니 적당히 포기하고 가주면 좋으련만 연합은 전혀 그럴 낌새가 없음 "상황이 좋지 않군.." 길을 뚫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죽일 순 없으니 어느 정도 손속을 둬야 함 안그래도 다이무스는 한번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음 두 번은 당할꺼같냐 어쩌면 이러다가 3차 능력자전쟁 일어나게 생김 이러한 상황을 짧게 설명한 다이무스가 어떤 형태로 이 난관을 해칠 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가만히 보고 있던 히카르도가 움직임.
미쳐 말릴 틈도 없이 안개를 빠져나간 히카르도는 부당거래랑 불멸자를 차례로 발동함 갑작스러운 히카르도의 등장에 능력자들이 여기다 싶어 공격을 퍼붓는데 히카르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력자들을 공격함 마침내 화력에 부쳐 히카르도가 쓰러지자 능력자들은 환호성을 울리지만 곧바로 그 소리는 경악으로 바뀜 트와일나잇도 아닌데 대기 시간도 없이 부활한 히카르도는 지옥에서 돌아온 것 같은 형상으로 벌레들을 휘몰아침 "이, 괴물...!" 몇 번이고 죽여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그에게 질린 능력자들이 몇 명씩 뒷걸음쳐 달아나기 시작함 뒤따라 나온 다이무스도 베여도 죽지 않을 발치나 팔다리를 겨냥해서 기술을 발동하자 능력자들이 점차 밀리게 됨 결국 둘에게 밀려 후퇴하는 연합의 능력자 하나를 도망가는 동료들 쪽으로 날린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돌아봄 어느새 숲은 조용해져 있음히카르도의 형상을 보면 과연 끔찍한 모습임 누구 것인지 모를 피를 잔뜩 뒤집어써서 옷이 아예 검붉은데다 얼굴에까지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음 온 몸으로 벌레가 피어나다가 점차 사그라짐 그렇지만 남아있는 장소엔 시체는 한 개도 없음 그냥 뛰쳐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나가기 전 다이무스의 설명을 듣긴 했나 봄 지친 듯한 모양으로 숨을 몰아쉬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다가오자 조용히 그를 눈으로 쫓다가 고개를 돌려 숙임 히카르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왠지 그 순간 이게 무엇인지 알 거 같다고 느낌
홀든 가는 걸음마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제 몫의 칼을 받게 됨 처음에는 목검이지만 그 후 받는 것은 날이 세워진 진검임 연습 상대도 처음에는 밧줄을 감은 목각인형이었다가 점차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로 옮겨가게 됨. 강함은 옳음. 홀든에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저가 이제껏 잘 가꿔왔던 꽃이나 나무나 사랑스러운 개 등을 베어야 함. 여느 때처럼 먹이나 쓰다듬을 기대하며 달라붙는 까만 눈동자. 강해지고 싶다는 소망만으로 베어내기엔 너무나도 벅찼을.
동생은 개를 한번에 죽이지 못했음. 그건 치명상인게 분명했지만 그 죽어가는 꼴을 찬찬히 보고만 있을 정도로 동생의 자존심은 낮지 않았음 아직도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그 상한 몸에 칼자국을 두세번 더 내고 나서야 겨우 숨이 멎은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동생에게 다이무스는 그날 처음으로 동생의 실력에 대해 칭찬했음 잘 했노라고, 너도 이제 어엿한 홀든의 검사라고. 그제서야 아이는 기쁜 듯이 웃으며 제가 저지른 일에서 시선을 떼어냈음.
왜 그때 생각이 지금 나는 것일까. 이 사내는 자기 동생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 다가가 "방해는 되지 않았다"고 말함. "...뭐야?" 히카르도는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임. 다이무스도 그 외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음. 등이며 어깨에서 흙먼지나 죽은 벌레 시체를 털어내며 잠깐 대기하다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중나온 차를 타고 돌아갔음.
자전거 벨소리가 들림.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나서 목을 두어번 꺾은 다음 계단을 내려가서 배달된 이클립스 최신호를 주워옴.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잡지를 테이블에 놓고 펼쳐보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 잠깐 멈칫했지만 히카르도는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염. 하숙집 주인인 늙은 부인이 아침식사라며 트레이를 건네줌. 사실 계약조건엔 아침식사 제공은 없었지만 혼자 살면서 출근하는 히카르도를 보고 아들이나 뭐 그런 게 생각났는지 부인은 거의 매일마다 방으로 식사를 날라줌. 베이컨에 양상추를 넣은 샌드위치에 홍차 한잔, 작은 사과 한 알. 전후 영국 사정을 생각하면 퍽 사치스러운 식사임. 테이블 한 쪽에 놓고 손도 대지 않은채로 히카르도는 다시 앉아서 잡지를 넘기기 시작함. 요 근래에는 별 다른 일이 없어 잡지에는 어느 유명 모델이 F/W 화보를 찍는다는 시덥잖은 가십이 특종기사로 나와있을 뿐임. 히카르도는 계속 페이지를 넘김. 커다랗고 화려한 꽃이 달린 모자를 쓴 아름다운 모델사진 옆에 하얀 종이가 끼워져있음. 오전 10시 - 시내병원에 위문차 방문, 오후 1시 -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 오후 6시 - 후원자와 면담 .... 히카르도는 조그만 종이조각을 읽고 또 읽음. 그다음 잡지에 끼워넣은 후 라이터 꺼내서 잡지 채로 불살라버림. 아름다운 사진들이 금세 타고 그을려 이그러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히카르도는 샌드위치를 두 입에 털어넣고 홍차까지 원샷한다음 가는 길에 먹을 생각으로 사과 한 알을 옷에 문지르며 집을 나섬. 남은 트레이는 아래층 문앞에 아무렇게나 갖다놓음.'직장'에 가는 길도 익숙해졌음 히카르도는 사과를 크게 베어먹으면서 느긋하게 걸음 사람들은 이제 경비원옷 입은 자기를 봐도 피하거나 빤히 쳐다보지 않음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분. 히카르도에겐 아직 생소함. 애초에 근처로 집을 잡은 것이니 그리 오래 걷지 않아도 됨. 먹다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버리고 손을 탁탁 턴 히카르도는 은행 안으로 걸어 들어감.
히카르도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다이무스가 고개를 끄덕하고 목례함 히카르도도 따라서 고개를 숙임 인사 끝내자 다이무스는 곧바로 들여다보던 서류로 돌아감 오늘은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아 바빠보임 히카르도도 제 위치로 감 최근들어 아무런 할 일도 없이 은행에 서 있자면 자기도 모르게 다이무스를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음.
첫 임무 때 사실 다이무스가 총알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도 히카르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 체력도 충분했고 그깟 잔챙이 데미지 입어봤자 간지럽지도 않음. 여차하면 불멸자 켜서 상처를 아예 없던 일로 해버려도 됨. 오히려 제 평소 성격을 보면 한참 흥 올라있을 때 먹잇감을 채가는 다이무스에게 불만을 느껴야 마땅한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히카르도가 느낀 건 향수와 비슷했음. 카모라에서 행동대장을 맡고 있을 때 막무가내로 진입하는 자신을 조금 힘겹게 따라오면서도 든든히 받쳐주던 동료. 친구. 그는 공격을 막아주기보단 맞은 공격을 치료해주는 쪽이었지만.
히카르도는 이런 자기 상태가 당황스러움. 아무리 회사에서 쉬쉬한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이무스의 역할이 단순히 자기 사수가 아니라는 건 히카르도도 암. 회사의 실력자를 질낮은 임무로 돌리는 것도 그 임무에 자신에 대한 대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암. 모르긴 몰라도 회사가 얻어준 하숙집도 감시받고 있을 거라는 것도, 임무 때마다 끈질기게 뒤에 따라오는 시선도. 그치만 어리석게도, 정말 어리석게도 히카르도는 그날 감사를 말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음 마치 다이무스와 진짜 동료나 뭐라도 된 것처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히카르도는 실은 정말 많이 외로웠고 유대에 굶주려 있었음. 틀에 박힌 은행 생활도 마피아 때와 방향은 좀 다르지만 지나치게 심심하다는거 빼면 의외로 그렇게 나쁘진 않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제 목적이 끝나면 회사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음.
모처럼 둘 다 회사 임무 없이 은행 정시퇴근해서 날 밝을 때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음 히카르도가 하숙집에 갔는데 하숙집이 없어짐 "...??!..?" 집은 없고 왠 잿더미만 있어 히카르도는 존나 당황함 이..이게 뭐지... 이미 불 꺼진지 한참 됐는지 바람에 날리는 까만 재만 보고 멍때리고 있는데 집(이었던 곳) 앞에 차가 한대 섬 뭔가 해서 다가가니 뒷자석에 다이무스가 타 있음 "타라." 히카르도 타니까 바로 차 출발함.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감시원을 통해 이미 하숙집이 불탄 걸 알고 있었음 주전자 올려놓은 난로를 계속 켜놓은 것이 원인이었고 주인 마담은 무사히 친척집으로 피신해 며칠 신세를 진다는 모양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히카르도는 "..그런가" 함. 사실 귀중한 물건도 잃어버려선 안되는 것도 그 집엔 없었으니 괜찮음. 얘기를 다 듣고 나니 히카르도는 문득 지금 이 차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가 신경쓰이기 시작함. 다이무스는 지 할말만 다 전달하고 또 입을 다뭄. 좀 기다리다가 히카르도가 지금 어디 가고 있는건지 물어봄. 마침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모양인지 차가 속도를 천천히 줄이기 시작함. 정면을 보고 있던 다이무스가 히카르도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대꾸함. "홀든 저택이다."?! 하 ♡♡ 난 어따 내려줄라고 너만 집에 가냐? 히카르도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멀뚱멀뚱 쳐다봐도 다이무스는 별다른 설명 이딴거 없이 '오늘부터 하숙집이 구해지는 때까지 묵으라'고까지밖에 말 안함. 사실 여기에는 은행 근처에 감시에 적절한 위치의 하숙집이 없고 홀든 저택은 가뜩이나 넓은 데다 같이 살던 이글마저 나가 빈 방이 널널하게 놀고 있으며 홀든가의 모든 재산은 아직 다이무스의 부친이자 현 가주인 홀든 경의 소유이나 헬리오스와 상의한 다이무스가 차기 가주의 권한으로 영예롭고 유서깊은 홀든 저택이 감히 길거리 하숙집 신세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지만 다이무스는 말 안함 걍 말 안함. 다이무스가 말 안하니까 히카르도도 별 도리없이 걍 따라서 홀든 가 들어감. 그렇게 당분간 둘은 같은 저택에 기거하게 됨.
히카르도에게 주어진 방은 이층 동쪽 방임. 원래는 이글 방이었으나 주인이 없어도 집사가 잘 관리해서 깨끗함 이글이 쓰던 때보다 훨씬 깨끗함. 딴 방도 많은데 이 방 준 이유는 다이무스 바로 옆방이기 때문임. 이 방에서 뭔 짓을 꾸미면 옆방에 있는 다이무스가 모를 리 없음 저택 주변에 높은 건물(이라기보단 아예 건물이 없음 홀든가 부지임)이 없어서 감시가 어렵기 때문에 아예 방을 이렇게 잡음 참고로 이글 방이 다이무스 바로 옆방이었던 이유도 이거랑 비슷함 이글이 맨날 도망가고 이상한 짓해서
저택이니 당연히 원래 히카르도가 묵던 하숙집보다 훨씬 방이 좋음 히카르도는 좀 돌아다니며 방이며 창 밖 풍경이며 좀 보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임. 아 일이 뭐 이렇게 되지.. 히카르도가 다이무스를 처음보다 가깝게 느끼는 건 맞는데 솔직히 이렇게 가깝진 않음 아직 뭘 한건 아니지만 일 꾸밀라면 하다 못해 잡지라도 배달시킬려면 이런 저택에 살면 안됨 하숙집에 살던 때도 알게 모르게 감시원은 붙였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가까이있는거 진짜 불편하고 이 저택 차 없으면 빠져나가지도 못하니 외출할래도 존나 눈치보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회사 입장에서 진짜 좋은 감시환경임 너네 일부러 불 질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치만 적어도 다이무스가 곁에 있으니 다른 감시원이 붙는 건 없어질 거 같음 그나마 나음 정보원한테 주소 옮겼다고 메일이나 칠까.
방에서 좀 대기하고 있을려니까 집사가 오더니 저녁식사 하시라고 함. 아무리 차기 가주 명령이라도 역사깊은 귀족 저택에 왠 이상한 놈 들이기 못마땅했을 텐데 집사는 그런 태 없이 공손한 태도임. 식당 가니까 다이무스가 상석에 있고 그 옆자리에 식사 준비 되어 있어서 먹는데 히카르도는 자기 온다고 식탁이 화려한가 했지만 안그럼 홀든 가는 원래 맨날 잘차려먹음
가뜩이나 같은 은행 + 같은 사이퍼 임무였는데 거기에 같은 집까지 더해지니 둘은 거의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셈이 됨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자기 직전까지 보는게 서로의 얼굴임 그러나 둘이 주고 받는 말은 임무 관련된거 빼면 같이 살기 전이나 후나 하루에 열 마디 이상은 되지 않음 지금도 나란히 앉아 식사하는 식탁은 식기 소리나 옷깃 스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외엔 별 다른 소리가 나지 않음 다이무스야 워낙 귀한집 자제라 식사태도 좋은 거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외로 히카르도의 태도도 그렇게 나쁘지 않음 뭐 포크와 나이프를 마치 달고 태어난 제 수족인양 유연하게 놀렸다건가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귀족인 다이무스가 보기에도 히카르도의 식사예절은 썩 괜찮은 수준임. 다이무스야 몰랐지만 히카르도는 이런 '귀족적인 식사'에 어느 정도 익숙함 왜냐하면 마피아 시절 성과가 잘 나오면 가끔 보스가 상이랍시고 이런저런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곤 했거든 사실 히카르도는 고아시절부터 거리에서 막 구르며 자라서 배만 부를 수 있으면 거의 뭐든 상관없이 잘 먹고 그런 식당은 옷차림부터 구두에 머리까지 넘겨야해서 불편해했지만 보스는 사내녀석이 크게 될려면 이런데도 드나들고 그래야하는 거라고 어거지로 식사예절 가르치고 했으니까 그거치곤 먹는 속도가 빠른게 좀 흠이다만 걍 봐줄만함 히카르도는 홀든 가에서 밥 먹을 때마다 보스가 상 주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묘함 상 받는 거도 아닌데 칼질 하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남 근데 보스는 말 하는데 다이무스는 안말함
9시 딱 되서 은행 여니까 아침부터 손님이 옴 르 블랑 가의 영애 마를렌 양과 그 일행임 둘은 은행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마들렌만) 다이무스를 발견하자 반색을 하고 다가옴 그러나 사뿐사뿐하게 걷지 뛰지는 않음 마들렌은 매달 헬리오스에서 나오는 약간의 용돈을 저축하고 있음 르 블랑의 재산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푼돈이긴 하지만 자기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다이무스는 그럴꺼면 아예 회사에다 일정 금액을 계좌로 넣어달라고 하면 좋지 않나 싶음 그러나 마들렌은 자기가 번 돈은 자기 손으로 저금하고 싶다고 고집함 의외로 다이무스는 이게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고 있음 좀만 생각해봐도 마들렌의 거처와 다이무스가 근무하는 은행은 거리가 꽤 있고 그 사이에 더 가까운 은행도 있음 아무리 다이무스 앞에 늘어선 줄이 길어도 마를렌은 다른 창구로 가지 않고 꼭 그 줄에 섬 혹시나 일이 바빠서 다이무스가 자기 일을 맡아주지 못할 때면 시무룩해짐 이렇게 티를 팍팍 내는데 다이무스가 모를꺼라고 생각하는게 더 이상함 그러나 다이무스는 마를렌의 감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음 어렸을 적 성숙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거처럼 보이는 어른을 동경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함 게다가 마를렌은 아직 어릴 적에 아빠를 잃었음 물론 다이무스가 아빠 대신이 되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있지만 마를렌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자기를 따르는 것도 그런 영향이 있을거라고 여김 유명한 가문의 장녀(이자 외동딸)이라는 위치에서 오는 부담과 책임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님
마를렌이 가지고 온 돈을 계좌에 넣어준 후 다이무스는 잠시 마를렌과 새로운 계좌 개설에 대해 얘기를 나눔 마를렌은 샬럿에게도 계좌를 하나 만들어주고 싶다고 함 다이무스 앞에서도 수줍음을 타는 샬럿을 위해 마를렌이 대신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는 동안 얘기가 길어지자 샬럿은 언니와 다이무스의 눈치를 조금 보며 은행을 둘러보다가 히카르도를 발견함. 아마 히카르도가 새롭게 회사에 합류했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를 하고 싶어졌던 거 같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겉모습이 매우 싸나움 되게 마피아같음 샬럿은 용기를 내서 히카르도 앞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까지 다가감 그러나 쉽게 입을 떼지 못함 히카르도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인상이 나쁜 걸 고려하는 건지 샬럿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다른 데만 봄 샬럿은 히카르도가 자기 쳐다보면 인사하려고 했는데(그치만 진짜 보면 도망감) 히카르도가 자기를 안보니 마음이 조급해짐 그래봤자 모기만한 소리로 "저... 저...저기.." 이렇게밖에 못냄 더군다나 자기 가림막이 되줄 언니도 아무도 옆에 없음 샬럿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간신히 "안녕하세요!"라고 새된 소리를 지름 히카르도는 얼떨떨해하면서 내려다보더니 어 그래 안녕 이렇게 함 돌아보니 은행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둘을 보고 있음 샬럿은 얼굴이 발개짐 다이무스는 그 쪽을 좀 본다음 다시 마를렌과 얘기함 마를렌은 왠지 다이무스가 자기 보기전에 웃은 거 같애서 가슴이 설렘얘기 끝내고 회사로 가려니까 어느새 히카르도랑 샬럿이 서로 익숙해져서 히카르도는 쭈그리고 앉아서 샬럿은 서서 조금씩 얘기하고 있음 샬럿이 놀랄때마다 비구름 그리는데 히카르도는 이상하게 계속 자기 소매 한쪽 끝이 젖는 거 같다고 생각함 마를렌이 숙녀답게 다이무스랑 히카르도한테도 치맛단 기울여서 인사하고 나가는데 샬럿은 자꾸 뒤를 돌아봄 히카르도는 가만히 보고있다가 다시 자기 업무로 돌아감 그러고보니 카모라 조직에도 애들이 참 많았음 능력자는 물론이고 비능력자 아이들도 여러가지로 쓸 수 있었으니까 히카르도를 따르는 아이는 잘 없었지만
애들 가고 난다음 히카르도는 다이무스한테 넌지시 가서 물어봄 회사에서도 어린애들을 키우나보지?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질문에서 회사'에서도'라는 말에 충분히 신경쓰며 저 둘은 명왕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이며 너무 치열한 전장에는 투입하지 않는다고 알려줌 "하긴 능력 발현하려면 아직 이른 나이겠군." 그 말에 다이무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앉은 자리에서 히카르도를 올려다봄 "사이퍼의 능력발현은 나이와 상관없다. 알고 있지 않나?" 실제로 능력자들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강한 능력을 갖는 경우도 많음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이 어떤 계기를 통해 씨앗이 발아하듯 드러나거나 훈련을 통해 점차 증진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튼 능력이 발현되는 나이는 정해진 게 아니니 이를 것도 늦을 것도 없음 히카르도는 잠시 인상을 팍 쓰더니 뭐 그랬지 이런 식으로 대꾸함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감 다이무스는 방금 대화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서류업무함
이제 헬리오스에서 히카르도에게 주는 임무 수준도 많이 올라갔음 처음 받았던 불량배 퇴치에 비하면 거의 골드와 브론즈의 차이라고 봐도 좋음 회사에서 조만간 다이무스 없이 히카르도에게 단독으로 임무를 주는 것도 고려해보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음 그렇게 되면 적어도 다이무스는 지금보다 훨씬 운신이 자유롭게 되니 헬리오스에서는 더 이상 회사의 에이스를 하릴없이 놀리지 않아도 됨 히카르도랑 임무하면 얘가 앞서 가면서 왠 쓸데없는 철거반이랑 립까지 다 쓸어가니 다이무스는 거의 할 일이 없어서 진짜 심심함 처음에는 히카르도가 안따라오게 다른 라인으로 가서 쓸어보곤 했는데 그럼 감시의 의미도 없고 히카르도가 어느새 자기 라인 쓸다말고 이쪽으로 와서 걍 그만뒀음 애초에 시간에 그렇게 구애받는 임무도 아닌데 작은 일에 신중하고 싶은 다이무스는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다이무스가 붙어있으면 그 진중함에 눌리는 건지 정신없이 구는건 좀 덜함 지금도 저쪽의 적 탑을 위에서 굽어보며 "저기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부수러 가지"하는 걸 다이무스는 안개지역이라 안보이는 거고 매복 가능성이 있다고 사무적으로 대꾸해줌 그래도 불멸자 키고 뛰쳐나가지 않을까 했는데 히카르도는 거 드럽게 신중하다며 투덜거려도 일단 얌전히 옆에 붙어있음 다이무스 이놈이 불필요한 말은 물론이고 필요한 말조차도 안하는 대신 한 마디 하면 그게 다 쓸데가 있거든 대신 안개 속으로 거미지옥 넣어서 적 한마리 끌고 와서 패대기쳐 팬다음 의기양양하게 웃음
결국 타워 끝까지 밀고 다 이긴 판에 이곳저곳 누비며 적들을 써는 히카르도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다이무스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일을 처리함 사실 다이무스는 누가 말걸어도 필요하지 않은 이상 대꾸 잘 안해주긴 하지만 히카르도는 그거에 별로 신경 안쓰는 거 같음 그리고 처음 회사 찾아왔을 때 눈구멍에서 안광이나 불태우며 나.. 복수의 히까르도... 반.드.시.복.수.한.다 이딴 분위기 두르고 있어서 과묵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농담도 던지고 가끔이면 실없는 말도 함 근데 입을 꾹 다무는 시점이 있음 옛날 마피아질하던 얘기할 때 곧잘 말하다가 급 말이 없어짐 다이무스가 보기에 히카르도는 아직 심리적으로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임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시뇨리아 사건 이후 자기 스스로 조직을 나왔다는데 마피아에서 탈퇴 의례도 없이 제 발로 걸어나왔다는 건 실상 거의 내쫓긴거나 다름없음 직접적으로 말은 안해도 히카르도 자신도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은 없는게 확실함 그러면서 마음은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는 거 같음 다이무스는 이게 왠지 거슬린다고 생각함 물론 얘가 평생 은행 경비원 해먹고 살진 않겠지 자기 목적 끝나면 회사 말고 다른 데로 갈거고 이건 확실함 다 상관없는데 그 주변은 아님 다이무스 자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여튼 그러함
여느 때처럼 임무 끝내고 다이무스는 히카르도한테 저택 차 타고 먼저 집에 가있으라고 함 방금 임무에 대한 건 아니고 헬리오스에서 급하게 호출이 들어왔기 때문임 처음엔 히카르도 감시해야 되니까 같이 데려가려고 했는데(아예 히카르도도 "나도 가야 하나?"고 물어봤음) 그런거 아니고 오히려 회사 내에서도 비밀스러운 얘기인 거 같은 눈치라 일단 혼자 회사로 감 히카르도는 순순히 집에 돌아간다함 물론 돌아가는 차 지붕 위에는 감시원이 딸려감
혼자 저택으로 돌아간 히카르도는 할일이 없음 오늘치 회사 일은 다 끝냈고 고용한 첩자한테 연락 오려면 멀었으며 여가시간 보낼 별다른 취미생활이 있는 거도 아님 옛날엔 일 끝나고 펍에서 술먹으면서 친구랑 시덥지 않은 농담따먹기 하는게 취미 비스무리한 거였는데 그나마도 없어짐 사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혼자 술집가서 자작할만큼 술을 좋아한 것도 아님 다만 조금 알딸딸한 기분으로 마음에 있는 말 없는 말 정신없이 꺼내며 웃는 그 분위기가 좋았던 것 뿐임. 히카르도는 회사에 뭔 일이 있길래 자기 떼어놓고 다이무스만 가나 궁금해하면서 방 안에 놓인 푹신한 카우치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림 방안에 들여놓은 값비싸보이는 책장에는 마찬가지로 비쌀 거 같은 책들이 가득 들어있음 히카르도는 책을 꺼내서 조금 넘겨보다가 다시 집어넣음 이걸 읽으라고 놓은거야 보고 자라고 놓은거야.. 이 방 전주인도 책엔 손도 안댔는지 책은 죄다 표지가 빳빳한 새것임 저녁시간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고 다이무스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음 = 심심함. 주먹을 까딱까딱하면서 벌레나 가지고 놀던 히카르도는 문득 집 안에 이상한 기척을 느낌 하인이나 다이무스는 아님 이건 히카르도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기척임 아무래도 침입자인 거 같음 "홀든 저택에도 도둑이 드는군?"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던 히카르도는 가지고 놀던 벌레를 꾸깃하며 일어남
집안 사람들 모두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저택 안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 히카르도는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침입자를 쫓음 집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인지 침입자는 제 기척을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저택 주변을 서성임 입구에서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집을 빙 돌아서 저택 동쪽으로 옴 마침 히카르도가 쓰고 있는 방 쪽임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건지 벽을 타고 올라오는 듯함 히카르도는 창문 바로 옆에 숨 죽이고 서 있다가 침입자가 막 창틀을 밟고 올라오려는 순간 거미지옥으로 끌어당김 "우왁?!?" "뭣?!" 순간 던진 거미줄이 다시 튕겨나와 히카르도 쪽으로 돌아옴 무슨 기술을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제 공격을 튕겨낸 듯함 튕겨낸 본인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히카르도를 보고 놀란 눈치임 '이 녀석.. 검사다.' 침입자가 등 뒤에 지고 있는 커다란 칼을 보며 히카르도는 손 안에 벌레를 짓이기며 부당거래 발동할 준비를 함 "집안에 왠 쥐새끼가 있어?" 아직 상황 파악은 덜 된 듯 하지만 침입자는 적어도 히카르도가 자기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듯함 그리고 그 사실에 불쾌해하는 것처럼 보임 침입자가 팔을 길게 뻗어서 칼을 뽑는 것을 보고 히카르도는 가볍게 뒤로 물러나 최대한 거리를 벌림 저 길어보이는 칼의 범위는 얼마나 될까 눈여겨 보면서 그러고보면 저 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임 히카르도가 거리를 재는 걸 보고 상대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을 염 "사영-"
상대가 칼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히카르도는 힐킥을 날렸지만 빨랐던 것은 히카르도도 침입자도 아닌 다이무스였음 침입자가 휘두른 칼은 칼집으로 내려찍으려던 히카르도의 발은 팔등으로 막은 다이무스는 칼집을 잡은 손에 가볍게 반동을 줘서 밀어냄 침입자는 갑작스러운 다이무스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그대로 밀려가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나더니 새된 소리를 지름 "형!" 뭐야 형..? 마찬가지로 난입한 다이무스에 놀랐던 히카르도는 침입자의 외침에 다시 다이무스를 쳐다봄 다이무스는 한숨 비슷한 걸 쉬며 히카르도의 다리도 밀어냄 집에 오자마자 보이는 게 지 동생이랑 회사 동료랑 한타 뜨고 있는 꼴임 "..뭣들 하는거냐." 이글 넌 여긴 어쩐 일인 거고. 무뚝뚝한 형의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넘긴 이글은 가볍게 말을 던짐. "나야 형이랑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으려고 들렀지. 근데 저건 뭐야?" "저거?!" 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호칭에 히카르도가 눈을 부라리거나 말거나 이글은 그 쪽을 힐끗 훑더니 다시 쳐다보지도 않고 제 형에게만 계속 말을 걸음 "저게 그 MERCILESS인가 본데 집에까지 데리고 오는 ㄱ ...잠만 쟤한테 내 방 줬어?!" "다이무스 저건 니 동생이냐? 잰 왜 멀쩡히 있는 문 놔두고 창문으로 들어와?" "아 형 진짜 내가 아무리 집 나갔다 그래도 어떻게 남의 방을 막 줘!" ")@(%(_@))!!!" 둘이 닥달하는 양을 가만히 보던 다이무스는 다시 한숨을 쉬며 칼 손잡이에 손을 얹음 그리고 기술을 발동함 "이제야 조용해졌군..." 뭐래 ♡♡ 그거 니 기술 아니잖아
이글은 안 부어오른 뺨으로 조용히 음식을 씹음 한쪽으로 씹는거 불편하고 안씹고 가만히 있어도 아픔 아 형새1끼 공탔나 딜 ♡♡ 아퍼.. 히카르도는 나이프로 고기 찢으려다 삐끗함 솔까 진짜 거짓말 안보태고 어깨 나간거 같음 사수고 나발이고 적당히 봐가면서 개겨야지 안되겠음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이무스는 우아한 태도로 칼질이나 함 둘이 밥 먹으면서 계속 궁시렁거리니까 천천히 식사를 마친 다이무스는 냅킨으로 닦고 식기까지 한 군데에 치워놓은다음 입을 염 다이무스는 귀족이라 밥 먹을 땐 진짜 말 안함 일단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와 이글에게 서로를 소개함 쟤 내 동생ㅇㅇㅇ 쟤 내 회사 동료ㅇㅇㅇ 이렇게. 그러고 보니 히카르도는 홀든네 막내가 연합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음 업무상(?) 매달 사는 이클립스에 특집이 되어 다뤄지던 걸 대충 읽은 기억이 남 천천히 보면 둘이 얼굴 생김은 좀 다르지만 머리색 만큼은 형제 아니랄까봐 꼭 닮았음 성격도 지 형과는 많이 다른 거 같음 시끄럽기도 함 이글은 계속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임 그게 히카르도가 자기 들어올 때 다짜고짜 공격했기 때문인지 아님 지금 자기 방을 쓰고 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음
물론 히카르도도 할말 많음 애초에 멀쩡하게 문 두드리고 내가 이 집 막내임 하고 걸어 들어왔으면 히카르도도 그렇게 다짜고짜 거미줄 날리진 않았을꺼임 진짜 도둑이었으면 다이무스한테 빚 하나 지우는 건데 도둑도 아닌 주제에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게 아주 짜증남 거기다 오해 풀렸음 됐지 계속 지 형한테 궁시렁거리면서 쟤가 어쨌네 저쨌네 하는 것도 신경 거슬림 지만 형있나 물론 히카르도는 형이 없지만 여튼 이 세상에 형 있는 놈이 쟤 하나는 아니잖음 히카르도는 밥을 팍팍 먹은 다음 잘먹었다고 하고 홀든 둘 남겨놓고 그냥 일어남 히카르도가 등 돌려 자리 뜨는 걸 가만히 보던 이글은 고개를 돌려서 제 형을 빤히 쳐다봄 "? 뭐냐 이글" "형 쟤 안따라가?" 사수라는 건 눈가림이고 실은 감시 대상이라며. 연합에도 소문 다 났어. "괜찮다." 다이무스가 태연히 대꾸하자 이글의 표정이 미묘해짐. 그러나 이글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최근에 자기 지낸 얘기를 대충 함 물론 연합에 해가 될만한 내용은 빼고 그 정도 분별력은 있음 다이무스도 이글이 감추려는 얘기는 캐내지 않음 세력이 다른 형제가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때문임
자기 방으로 돌아온 히카르도는 어쩐지 울적해짐 오늘 잠깐 봤지만 이글이랑 다이무스 사이는 상당히 가까워보였음 물론 그렇다고 다이무스가 말을 더 많이 하고 살갑게 하고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둘 사이에 있는 분위기가 그럼 특히 다이무스는 한숨이다 어쩌다 해도 평소보다 상당히 무르게 굴고 있는 거 같아 보임 형제니까 어렸을 때부터 계속 같이 지냈을테니 서로 가까울 만도 함 히카르도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었음 지금은 틀어져버렸지만. 이글과 다이무스를 보면 히카르도는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자꾸 생각남 그게 히카르도 기분을 가라앉게 함
밥 다 먹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자니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림 누군가 했더니 하인임 작은 주인님이 히카르도를 찾는다고 서재로 와주십사 하는 얘기임 히카르도는 알았다고 함 서재로 가니 다이무스가 책상에 앉아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여다보고 있음 그리 오랜시간 봐온 건 아니지만 히카르도가 보기에 다이무스는 맨날 두 가지 중 하나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임 하나는 서류 다른 하나는 칼. 듣자하니 저 동생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거라던데 이런 날도 서류 업무는 예외가 없나 봄 히카르도가 들어온 걸 본 다이무스는 천천히 용건을 말함 요 며칠 뒤 임무가 하나 주어질껀데 그건 자기랑 가는게 아니고 히카르도 단독임무라고 함 "단독임무라고?" 놀란 히카르도가 눈을 치켜뜸 그동안 주어진 임무는 그 내용이야 어땠든 간에 불만없이 성공적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이렇게 빠르게 단독임무가 내려올 줄은 몰랐음 다이무스는 다시 임무 내용을 간결하게 설명함
들어보니 흔한 공성전이고 단독임무라고 해도 아예 혼자하는 건 아니고 헬리오스의 사이퍼들이 같이 따라감 다만 다이무스가 없을 뿐임 그 말은 헬리오스의 직접적인 감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예 다이무스와 사수-후배 관계를 벗어나는 건 아니고 그 날 임무만 특별히라는 것 같음 음 이 얘기는.. 히카르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어봄 "그럼 다이무스 넌 그날 뭘 하지?" ".. 내게도 맡겨진 임무가 있다." 다이무스가 말하기 전 티나지 않을 정도로 약간 뜸을 들였다는 것을 히카르도는 눈치채지 못했음 여튼 다이무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번 단독임무는 히카르도를 인정했다기보단 다이무스를 잠시 쓸데가 있어서 떨어뜨려놨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함 "뭐야, 날 위한 단독임무는 아닌거군?" 히카르도가 생각하기에 헬리오스는 아직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음 그동안 해결한 임무가 얼만데 매번 맡기는 임무도 시시한 것들 뿐이고 물론 그럴 만도 하다만.. 이번 임무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눈치의 히카르도를 가만히 보던 다이무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혼잣말처럼 입을 염 "너만한 능력자를 이렇게 돌리는 건 회사로써는 손실이다만." 히카르도는 잠시 벙벙함 지금 이거 뭐지? 이건 마치 다이무스가 자기를 인정하고 위로라도 해주고 있는 거 같은 말투라 별 기대 안했던 히카르도로써는 상당히 의외였음 "뭐... 그, 그렇긴 하지."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가만히 올려다봄
히카르도는 다소 격앙된 태도로 서재 문을 닫고 나옴 가는 길에 놓여진 소파 위에 다이무스 동생 이글이 뒹굴거리며 누워있음 어디 앉을 때나 허리를 쭉 펴고 정좌하는 형과는 대조적인 모습임 히카르도는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다가 누워있던 이글과 눈이 마주침 히카르도는 이제 이글을 봐도 별로 화가 치밀지 않음 이쪽은 무려 '너만한 능력자'임ㅋ 저를 보고 흥, 하고 웃으며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히카르도의 뒷모습을 본 이글의 표정이 또 미묘해짐 누워있던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이글은 다리를 훅 내려 반동으로 일어나 앉은 다음 다이무스의 서재로 들어감
다이무스는 이글이 어렸을 적부터 늘상 봐온 모습 그대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음 지하연합으로 소속을 옮겨 집 나와 생활한 것도 꽤 오래 지난 것 같은데 홀든 저택은 놀라울 정도로 변함이 없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오히려 그렇기에 제 형이 오늘 보인 태도에서 이글은 더욱 강하게 위화감을 느꼈음 제가 알기로 제 큰형은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음 일부러 숨기고 있다기보단 원체 표현이 서툰 거라고 생각하는데 여튼 그 표현이라는 게 엄청 극단적이어서 이글은 다이무스의 입에서 좋다, 싫다는 표현조차 들어본 적이 없음 그런 티를 내는 것도 본 적 없고. 이글이 다이무스를 답답해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데 여튼 그래도 다이무스도 인간인 이상 호불호는 있음 이글도 원래는 몰랐는데 오랜 시간 함께 자라고 봐오면서 겨우 깨달을 수 있었음 다이무스는 홀든을 좋아함 가문 자체는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물론 그런 티는 안낸다) 가만히 보면 가족들 특히 자기랑 둘째 형 벨져를 엄청 아끼는 게 보임 실상 가문의 여러가지 일을 책임지고 도맡고 있는 것도 동생들한테 짐 안가게 하려고 그러는 감도 좀 있음 말은 안그렇게 하지만 이글도 눈치가 있으니 이건 암 근데 오늘 본 히카르도는 다름 얘는 홀든이 아닌데 다이무스는 마치 얘가 홀든 가 숨겨진 막내동생이라도 되는 양 대하고 있음 처음에 제 형이 헬리오스에서 왠 신입 사수를 맡았다는 얘기 특히 그 신입이 언제 일칠지 모르는 속셈 검은 녀석이라는 걸 들었을 때만 해도 이글은 형이 또 골치아픈 임무를 맡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들었음 그도 그럴 것이 회사는 다이무스를 신뢰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까다로운 임무는 제 형에게 죄다 몰아주곤 했으니까 그거까진 괜찮음 솔까 집에서도 그러거든 형이 워낙 능력있는 남자라ㅇㅇ 근데 오늘 집에 오니까 그 골치아픈 신입이 여기 저택에 같이 살고 있음 아무리 형이 워커홀릭이라도 공과 사는 구분함 사정이 어쨌든 저택에까지 회사 일을 끌어들이는 게 조금 이상함 이 때부터 살짝 미심쩍었는데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이건 확실함 확실하게 이상함 얘기 들은 바로 형은 히카르도한테서 하루종일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해야하는데 이건 뭐 능력자 아무도 없는 저택에 혼자 두질 않나 밥 먹고 방으로 가는 걸 그냥 내버려두질 않나 마치 신뢰라도 하는 사이인 양 굴고 있음 지금도 형과 얘기하고 나온 히카르도 태도를 보면 얘기 내용이 어쨌던 간에 완전히 공적이지 않았다는 게 확실함 물론 같이 지내다보면 어느 정도 마음 맞고 친해지는 거야 당연함 그러나 상대는 저 다이무스 홀든임 공과 사가 분명한 자기 형 이글은 옛날엔 그 단호한 구분이 참 싫었는데 지금 형이 보이는 모호한 태도도 마냥 반갑지 않고 이상함
이글이 서재에 들어와서도 영 우물쭈물대며 말을 하지 않자 다이무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여 이글을 돌아봄 "왜 그러느냐 이글?" 내 형이 이렇게 잘났고 쩔어주는데 왠 이상한 놈팽이가 끼어들어서 일이 꼬이고 있음 이글은 퍼뜩 생각함 설마.. 이거 그런건가? 이글은 언제나 다이무스가 앨리셔같은 이쁘고 참하고 사랑스럽고 강한 여자랑 결혼해서 토깽이같은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 꺼라고 생각했음 미래예상도 : 형이랑 이쁜 형수 벨져 그리고 나랑 앨리셔 by 이글 물론 저 목석같은 형이 결혼하려면 연애는 힘들고 선 봐야겠지만 그래도 홀든가의 장남 정도면 들어오는 선자리도 빠방할꺼임 이쁘고 강하고 참하고 거기다 가문까지 좋겠지 그치만 사실 이글은 다이무스가 가문에서 정해주는 이쁘고 착하고 가문까지 좋은 여자가 아니라 왠 시골 말괄량이랑 결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함 아니 그랬으면 좋겠음 그동안 가문이 정해주는 일 직업 세력에 착실하게 따라온 형이니 사랑만큼은 자유롭게 했으면 싶었던 거임 이왕이면 파격선언을 뙇! 해서 가문의 나이든 꼰대들을 기함하게 했으면 좋겠음 그거 진짜 재밌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히카르도는 굉장히 이상적인... 형숫감임 지금은 회사 소속이지만 뭔가 숨은 정체가 있어 수상한데다 좋은 가문 출신도 아니고 고아에 마피아 출신이니 따지자면 연합에 가까움 게다가 남자 이거슨 The 파격 of 파격.. 아까 좀 울컥하긴 했지만 사실 이글은 형이 남자를 좋아하던 말던 상관은 없음 걍 형이 잘 살면 됨 다이무스가 좋아한다면 시라노나 피가로 역할이라도 기꺼이 해줄 수 있음 글은 형이 더 잘쓰겠지만 근데.. 형이 저러고 있는 저게 진짜 연애감정 같은 거 맞나 이글은 신경쓰임 본 적이 없어서 다이무스가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전혀 모르겠음 여자들 대하는 태도는 신사적이긴 한데 사무적임 저 미묘하게 살가운 태도는 연애대상이라고 하기엔 또 조금 미심쩍인 면이 있음 아 대체 이게 뭔데 형님아 답답해 말 좀 해봐... 쉽사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이글을 보고 다이무스는 "할 말 없으면 나가라." 딱 한마디만 함
저러는 걸 보면 막상 다이무스는 자기 태도에 대해 별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음 이글은 잠시 생각해봄 사실 연애감정이면 어떻고 다른 감정이면 또 어때 다 큰 형제한테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봄 궁금이야 하다만 벨져만 같았으면 애저녁에 그냥 넘겼을거임 그러니까 이건 맨날 큰 형이 저를 더러 가볍다느니 제발 생각 좀 하고 살라느니 지겹게 충고해댔던 보답이라고 해두자 "형, 설마 모르고 있는 건 아니지?" 형이 쟤 대하는 태도가 좀 이상한 거. 그 말을 듣고 다이무스는 조금 놀란 듯하다가 눈동자가 짙은 색을 띄며 가라앉음 본인도 어느 정도 자각이 있었다는 얘기임 그렇다면 이글이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음 이글은 어깨를 으쓱함 "....." "뭐,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겠지." 이글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손을 팔랑대며 나감 아참 나 그리고 오늘 회식 있어서 자고 갈꺼 아니야 내 방 없어진 건 속 좀 쓰리긴 하지만 짐 안빼도 돼~ 무슨 일이든 길게 고민하지 않는 그답게 서재 바깥으로 나가는 이글의 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함
덜컥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힘 동생이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다이무스는 혼자 방 안에 남게 되자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임 이글 말대로임 자신은 히카르도를 단지 회사 동료 혹은 감시해야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 그리고 그 자신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음 다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임 다이무스가 보기에 히카르도는 겉모습은 멀쩡할지 몰라도 속은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잃어버린 것을 끊임없이 그리워하며 그것을 놓치 못하는 것으로 보임 가엾고 또 안쓰러움 그 모습은 다이무스로 하여금 누군가를 자꾸만 생각나게 함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지켜봐왔던, 등 뒤를 따라오며 형님에게 도움이 되겠노라고 자랑스럽게 웃던
벨져. 사랑하는 내 동생.
다이무스는 다시 목울대를 낮게 울리며 차마 눈을 감음 그러면 아직도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남
처음 히카르도에게 "방해 되지 않았다"고 격려한 날 그 불안해보이는 모습을 보고 어린 동생을 떠올린 날부터 다이무스는 줄곧 히카르도에게서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었음 동생은 훌륭한 검사였음 그날 건냈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에는 일말의 꾸밈도 과장도 없었음 저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하나 시간과 경험이 도와준다면 충분히 홀든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음 세간에는 그를 오만하고 자존심만 드높은 얼치기로 취급하나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연합의 영웅 루이스와의 대결 이후임 애초에 검사란 제 검 끝과 드높은 긍지로 먹고 사는 직업인 만큼 자존심이 높은 건 당연함 그조차도 제 실력에 걸맞게 당당하고 호기롭다고 일컬어졌을 터였음 루이스와의 대결 이전에는.
동생이 당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연합의 신입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이무스가 느낀 것은 가벼운 낭패감이었음 늘 방자한 막내동생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아직 젋은 나이이니 치기를 부렸던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음 그 대결로 인해 헬리오스는 지하연합을 완전히 흡수합병하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명왕이 나섬으로 인해 2차 능력자 전쟁은 연합이나 회사나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로 마무리지어졌으니 벨져는 사실 그리 대단한 오점을 남긴 것은 아님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던가, 저 먼 동양쪽에서는 그런 말도 있는 모양임 그 말 그대로 전장에서 한 순간 이기고 지는 것은 그닥 의미가 없음 오늘은 이겨도 내일은 질 수 있음 크게는 연합과 회사의 관계가 그러하고 검사의 삶이 그러함 이글이나 벨져는 물론이고 다이무스도 질 때가 있고 임무를 실패할 때도 있음 애초에 홀든의 이름은 불패로 유명한 것은 아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지느냐. 졌다해도 최대한 피해가 없는 방향으로 혹은 그 패배에서 뭔가 배워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함 그러나 벨져의 의견은 제 형과는 달랐던 모양임
다이무스가 벨져의 병실을 찾은 것은 2차 능력자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전쟁의 뒤처리가 끝난 시점임 그보다 더 일찍 찾아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회사의 실력자인 다이무스는 그 동안 눈코 뜰새 없이 바빠서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었음 생각보다 상처도 그리 깊지 않고 회복도 순조롭다 했음 동생은 오랜만에 보는 형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음 다이무스는 동생의 실책을 가볍게 질책했음 아무리 네가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나 아직 제대로 능력 발현조차 하지 않은 능력자를 상대로 방심했다는 것은 아직 수련이 부족한 증거라고, 부러 냉정하게 말하는 자신을 보는 벨져의 눈밑이 처음부터 까맣게 죽어있어서 다이무스는 순간 옅은 동정심을 느꼈지만 가열차게 잘라냈음 이 충고가 지금은 쓸지언정 나중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제 동생으로 하여금 좀 더 높은 수준의 마음가짐과 검실력을 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음 오산이었음
지금도 다이무스는 가끔씩 떠올림 만약 이때 자신이 벨져를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아님.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음 결국 패배한 것도 그 패배의 쓴 댓가를 치러야하는 것도 벨져 자신임 절망과 비참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느냐 혹은 그대로 주저앉느냐는 본인에게 달린 문제임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받아서 일으켜지는 것은 결국 얄팍한 응급처지에 지나지 않을 터 결국 싸우는 이의 강함이란 절대로 지지 않는 실력이 아니라 패배 후에도 여전히 전장에 남아 서 있을 수 있는 마음의 강함을 포함하고 있음 그런 의미에서 벨져는 완벽히 강하지 못했음 상처가 다 나은 후에도 루이스와 같은 하늘 아래에선 살 수 없다며 미치광이처럼 소리지르며 날뛰는 벨져를 보고 다이무스를 포함한 홀든 가는 적잖이 실망했음 그 말대로 루이스와 다시 대결을 시킬 수도 없었음 회사와 연합은 이제 막 동맹을 결성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런 벨져와 루이스가 붙게 된다면 이제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결판이 날 것이었기 때문에. "잠시 지방에 다녀와주었으면 한다." 말이 지방파견이지 실상은 유배나 다름없는 통지를 받은 동생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다이무스는 다시 눈길조차 주지 않았음 그러면서도 생각했음 극복해라, 극복해내라. 그리고 다시 돌아오너라. 네가 홀든의 아들 벨져라면 이 정도는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
결국 벨져는 임무에서 도망치고 홀든에서도 도망쳐버렸음 지금은 그 행방조차 묘연함. 어째서. 왜. 견뎌내지 못한게냐. 다이무스는 서류를 꾸깃 움켜쥠 서류 밑 책상이 그극하는 소리를 내며 밀림 작은 형이 그렇게 된 거 큰 형에게도 책임은 있어, 라고 이글은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다이무스에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음 그러나 다이무스는 충분히 괴로웠음 패배를 견뎌내는 마음이 강한 것은 맞고 그런 의미에서 벨져가 강하지 못했던 것도 맞음 그러나 꼭 자신이 그렇게 대해야 했을까 그렇게도 증오하던 가문의 방식으로 동생을 질책한 것이 옳았던 걸까. 강하지 않으면 어떻단 말인가. 위로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면 다만 그 마음이라도 편하도록 말할 순 없었던 건가. 그래서 결국 이꼴임. 상처입은 동생은 떠나서 행방도 알 수 없음. 자신은 여기 남아서 그저 벨져가 스스로 극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나 하는 입장임. 돌아온다면 또 어쩔 것인가. 동생을 위해 회사를 배신하고 루이스를 동생 앞에 갖다바칠 수도 회사를 위해서 동생을 처단할 수도 없음. 동생도 아닌, 단지 처지가 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로 맡은 제 감시대상에게 동생에게 주지 못했던 갖은 위로니 격려니 하는 것을 쏟아붓고 있을 뿐임. 너도 그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제 목적을 위해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따로 된 곳에서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하고 다만 목적을 위해, 치욕감을 씻기 위해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내가 이 이를 미더워하면 너도 그리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다지도 얄팍한 생각이란 말인가.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도 옅은 죄책감을 느낌.
다이무스가 히카르도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또 있음 헬리오스가 단지 히카르도의 단독임무에 대해 상의하려고 다이무스를 급히 부른 건 아님 히카르도가 간단한 공성전을 치를동안 다이무스는 어떤 인물의 호위 임무를 맡았음 코드네임 HYPOCRISY 통칭 닥터. 카미유 데샹. 카미유 데샹은 능력을 가진 사이퍼로써는 이례적일 정도로 일반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음 치유 능력을 가진 그는 능력자 일반인 구분하지 않고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무료로 의술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함 닥터 카미유는 능력자에 대한 인식을 공포와 차별의 대상에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어울릴 수 있는 이웃으로 바꾸어 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음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 뿐 아니라 그와 하등 접점이 없는 능력자들까지도 그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임 데샹은 공식적으로 회사와 연합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그런 그가 막 외국으로 장기적인 의료봉사를 떠난다고 함 닥터의 외국파견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으니 헬리오스로써는 늦기 전에 일반 민중들에게 회사와 닥터의 연결고리를 강조해두는 편이 여러가지 의미로 편리할 거임 데샹은 바쁜 스케줄 중에도 회사 수뇌부와의 회담 제안에 대해 기꺼이 승낙함 다만 한가지 '부탁'을 함 자신이 요즘 감시를 당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회사에 있을 동안 호위를 붙여달라고 또 호위를 맡을 인물은 이 쪽에서 지명하겠다고. 닥터는 다이무스를 지명했음.
회사의 입장은 퍽 난감했을 꺼임 히카르도가 하고 있는 감시에 대해서 회사에서는 이미 파악이 끝났음 그동안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았던 히카르도가 거처 바뀌자마자 바뀐 거주지로 잡지 배달을 신청한다고? 매달 비싼 구독료를 물어가면서? 회사는 히카르도에게 잡지를 배달하는 배달원의 뒤를 밟았고 히카르도가 매달 배달받는 것이 단순한 가십잡지만이 아님을 알았음 아마 카미유가 말한 '신변의 위협'은 히카르도였을 거임 둘은 과거에 접점도 있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히카르도는 몰라도 데샹은 시종일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이나 의외로 본인들만 알고 있는 원한관계가 있었을 수 있음 히카르도는 카미유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가 행동한다면 마찬가지로 카미유가 회사로 찾아오는 회담날일 확률이 상당함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증명할 방법이 없음 지금 히카르도 잡아봤자 혐의는 닥터한테 미행 붙인게 다임 그정도면 좀 쎈 극성팬 수준임 선무당 짚고 히카르도를 갖다바쳤다가 자칫하면 회사는 닥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 일원도 갖다바친다는 오해를 사게 됨 그러나 그 위협이 진짜 히카르도였을 경우에는 아예 회사가 닥터의 암살을 꾀했다는 끔찍한 혐의를 쓰게 됨 그것만은 무조건 피해야 함 결국 회사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처럼 다이무스가 회담날까지 히카르도 잘 감시하고 다른 능력자들은 혹시나 있을 위협에 대비해 닥터를 지키는 거임 만약 히카르도가 진짜 암살자였더도 다이무스가 잘 끊어줄 것이며 다른 암살자가 있는 경우엔 회사에서 대비하면 됨 근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 카미유가 제 호위로 다이무스를 지명한거임 그가 히카르도 감시를 맡고 있다는 걸 닥터는 알지 못했을 거임 나중에 히카르도가 진짜 사고 쳤을 때를 대비해 회사에서는 히카르도와 카미유의 관계도 히카르도의 정체도 몰랐다고 할 예정이거든 당연히 우리가 니 옛친구 데리고 있다고 얘기 안하지 다만 닥터는 회사의 실력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이무스를 선택했던 거 같음 여기서 안된다고 애매하게 뺐다간 암살 공모 의심도 받을 수 있음 회사는 거의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카미유의 '부탁'을 수락함
회사에서 이 모든 얘기를 들은 다이무스는 그치고는 드물게도 뭐라 말을 덧붙이려고 했었음 보통때의 그는 어떤 임무를 주든지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터라 월라드는 흥미로운 눈치로 다이무스를 바라봤음 "....." 다이무스는 회사의 염려가 지나치다고 생각함 히카르도의 본성은 분명 착하다고 말하기 어렵고 거칠고 잔혹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이무스도 동의함 같이 지내거나 전투하면서 다 자기 눈으로 확인한 사실임 그러나 요근래 한동안 같이 지내면서 다이무스는 알려진 히카르도의 모습이 그가 가지고 있는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됨 히카르도는 분명 카미유 데샹을 쫓고 있음 그러나 그 건 회사에서 생각한 것처럼 그를 살해하기 위해서는 아닐 거라는 게 다이무스의 솔직한 생각임 히카르도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진 않음 그러나... 지금의 자신도 히카르도의 목적을 정확히는 모름 마피아 시절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히카르도는 분명 뭔가를 감추고 있음 회사에 마땅히 내놓을 '히카르도 바레타의 목적'이 제 손에 없는 이상 임무에 대해 뭐라 토 달기도 애매함 "뭡니까, BLADE?" 이사가 재촉함 다이무스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뜨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임무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함 회사를 돌아나오며 다이무스는 생각에 잠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능력자와 비능력자 사이에서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 설령 저울질 당하고 있는 것이 히카르도가 아닌 진짜 제 동생이었어도 다이무스는 그 결백을 확언하지는 않았을꺼임 그는 신중한 성격이니까 약간의 의혹도 그냥 넘겨버릴 수 없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내내 다이무스는 마치 제 동생이나 가솔을 배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짐 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는가. 올려다본 하늘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음.
가을로 접어들어 날씨가 제법 쌀쌀함 가만히 있으면 춥다고 느낄 정도지만 임무를 마치고 땀흘린 몸에 맞는 차가운 바람은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해줌 "이봐." 다이무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봄 히카르도가 삐딱하게 서서 자기를 보고 있음 "뭐냐." 히카르도는 잠시 분통이 터진다는 듯한 표정을 짓지만 금방 말하지 않음 다이무스가 말없이 그쪽을 쳐다보고 있자 히카르도는 이런 말을 하기 무안하다는 듯 뒷목을 벅벅 긁으면서 말을 검 "너 요새 날 피하고 있지 않나?" 그 말 그대로 다이무스는 저택에서 히카르도에게 단독임무에 대해 말한 그 때부터 즉 자신이 히카르도를 벨져와 겹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히카르도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있음 거리를 둔대봤자 둘은 은행이니 임무니 해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고 이전에도 살가운 말이나 대화는 일절 주고 받은 적이 없으니 태도에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님 다만 심적으로 한발짝 뒤로 물러나 생각할 뿐임 내가 이 남자와 동생을 겹쳐보고 있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온전히 이 남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다이무스는 대답함 "피한 적 없다." "헛소리!" 히카르도는 참았던 분통을 터트림 히카르도로써는 다이무스의 태도 변화가 의아할 수밖에 없음 회사에서 단독임무도 내려왔겠다 그날 다이무스는 흡사 자신을 인정한다는 듯 살갑게 굴었으니까 히카르도가 생각하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다이무스가 180도 태도를 바꿔 멀어지는 것이 이상함 원래 히카르도는 자기가 워낙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것에 서툴러서 이것도 무슨 착각이겠거니 했지만 아님 오히려 눈치없는 자신이 느낄 정도로 다이무스의 태도 변화가 극명하다고 봐야 함 다이무스와 유대 관계를 어느정도 바라고 있던 히카르도 입장에선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빡치는 일임 어차피 진짜 동료도 아닌 마당에 걍 넘어갈까 했지만 위로나 칭찬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유라도 알아야지 안되겠음 제가 이렇게 열을 내든 말든 저 칼잡이놈은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만들어 닫을 뿐임 저러면 말 안함 진짜 안함 으극... "돌아간다." 그 말을 남기고 다이무스는 고개를 휙 돌려 걷기 시작함 이러면 말 다시 붙이기도 어려움 상대가 감추는 거 없다고 말하는 데 구차하게 우기는 형국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히카르도는 널찍히 거리를 벌려 따라가면서 다시 눈을 부라림 여기서 그냥 넘어갈 줄 알고.
그날 저녁 살 것이 있다며 잠시 상점에 들른 히카르도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안고 저택에 돌아왔음 물론 히카르도가 가게 들를 때 그 앞에서 차에 탄 채로 수상한 놈이랑 접선하지 않나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 든 게 식료품이라는 건 암 그래도 뭐가 있는지는 관찰해둬야 해서 제 쪽으로 다가오는 다이무스를 슬쩍 피한 히카르도는 봉투 대신 영수증을 안겨주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함 영수증에 적힌 품목은 다이무스가 생각하기에 영 뜬금없는 것들 뿐임 첼시콜라 보드카 맥주 소세지 땅콩 오징어 초콜릿 기타 등등.. ".....?" 다이무스는 눈쌀을 찌푸림 다이무스가 금방은 제 행동을 제지하려 하지 않자 히카르도는 어쩐지 들뜬 듯한 움직임으로 봉투 안에 있는 내용물을 모두 끄집어 내어 거실 테이블 위로 올려놓음 "잠깐. 식료품이라면 식당에 둬라." 히카르도는 어깨를 으쓱함 그 의자도 불편하고 밥 먹는 상대방이 저 멀리에서 보이는 식탁에서 술까자고? 그러면 재미없음 술은 낮은 테이블에서 뒹굴면서 먹어야 제 맛임 다이무스가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조금 당황하고 있는 사이 히카르도는 주방을 뒤져서 그럴싸한 커다란 잔 두개를 가지고 옴 이걸 크리스탈.. 뭐라고 하더라 어쨌든 엄청 비싼거겠지 그치만 오늘은 그냥 술잔일 뿐임 세팅이 다 되자 히카르도는 소파에 걸터앉아 무릎 위에 손을 두곤 "앉아라." 함 "...." 다이무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일단 두고 보기로 생각한 건지 별 이야기 하지 않고 맞은 편에 앉음 다이무스가 앉는 것을 본 히카르도는 곧바로 제조를 시작함
제조.. 다이무스는 이걸 다른 어떤 단어로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함 일단 콜라캔을 칙 소리나게 딴 히카르도는 그걸 그대로 잔에 부어 1/5정도 채움 그리고 이번에는 맥주를 깜 방금 딴 시원한 맥주가 꼴꼴꼴 소리를 내며 섞여들어감 보드카와 다른 술 종류로 보이는 음료도 뒤이어 잔에 투하되어 이제 잔 속은 갈색도 아니고 보라색도 아닌 이상한 색깔을 띄고 있음 제가 만들어낸 것을 보며 히카르도는 잠시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주방으로 가서 뭔가를 찾아옴 장식장에 둔 와인임 홀든 가에 있는 것치고 별로 비싼 건 아님 "이거 써도 되냐?" 다이무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와인을 딴 히카르도는 병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와인도 잔에 부음 여기까지 하니 잔은 거의 넘칠 거 같이 넘실댐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든 히카르도는 두 개 잔을 제 쪽에 하나 다이무스 앞에 하나를 둠 안줏거리도 잘 뜯어서 둠 다이무스가 계속 멀뚱하니 앉아있자 히카르도는 눈짓으로 다시 잔을 가리킴 그러고도 다이무스가 움직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한 히카르도는 더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먼저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셔보임
눈대중으로 대충 만든 거치곤 그렇게 나쁘지 않은 거 같음 사실 이거보다 좀 더 맛있게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됐음 이제야 생각하는 건데 카미유가 술을 참 잘 말았음 약만드는 직업이라 그런지(※주:의사) 비율이 아주 기가 막혔음 그 까다로운 부보스도 카미유가 만든 술 몇 잔 마시면 둘 어렸을 때 주워온 얘기를 하며 눈시울이나 붉히곤 했으니까 카미유 이놈은 저는 일정량 넘으면 잘 먹지도 않는 주제에 한번 술병 잡으면 끝간데를 모르고 테이블 이쪽부터 끝까지 잔이나 돌림 계속 돌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쭉쭉쭉쭉 히카르도는 아직도 기억남 마치 난투극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테이블 위에 소파에 바닥에 옷걸이에 정신없이 널려있던 조직의 가족들과 그 가운데에서 홀로 고고하게 술을 말던 카미유의 희미하게 빛나던 얼굴이..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카미유는 술은 마셔도 꼭지까지 취한 모습은 절대 보여준 적 없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부터 그는 내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건가. 히카르도는 잠시 들고 있던 잔을 꾹 쥠
기분이 우중충해지자 히카르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밀어냄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일임 처음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향해 이쪽을 보고 있는 다이무스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음 아마 히카르도의 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함 그 얼굴을 보자 히카르도는 왠지 기분이 좋아짐 인간관계에 서툰 히카르도는 사람이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름 아까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치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있음 다만 조직에서는 조직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일부러 독한 술로 자주 술자리를 가지곤 했으니까 이러는게 어떨까 생각해본 거임 그나마도 다이무스의 심중을 캐기 위해선 그에게 술을 먹여야 하건만 옛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누가 술 주는대로 다 받아먹던 생각만 한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는 거기 두면 알아서 마시겠거니 하고 잔이나 앞에 갖다뒀을 뿐임 물론 다이무스는 그 잔에 전혀 손도 대지 않음 적어도 제 의지로는 그걸 마시지 않을꺼임 임무나 그 비스무리한 거면 또 모를까 그 제조과정이.. 음... 게다가 원래 다이무스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 와인 많이 마셔봐서 자기가 술에 약하지 않다는 건 아는 정도고 실은 와인도 그렇게 즐기지 않음 다이무스가 생각하기에 술은 검사의 몸과 마음을 깎아내려 닳게 할 뿐임 몇 잔 마시는 걸로 정신이 흐릿해지고 중독되면 제 검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게 됨 예전에 이글이 저택에 살면서 밖으로 쏘다닐 때 줄창 잔소리한 것도 이거였음 여튼 다이무스는 아직 히카르도가 왜 갑자기 술 사와서 판을 벌이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음 그래서 일단 히카르도가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기로 함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히카르도는 금방 기분이 좋아짐 원래부터도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랑 술먹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더 좋아짐 잠시 테이블에 있는 파인 자국을 들여다보던 히카르도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함 히카르도가 평소에 그렇게 감춰왔던 카모라에 대한 이야기임 그리고 카미유 데샹에 대한. 술기운을 빌어 꺼내긴 했지만 히카르도는 언젠가 이런 얘기를 다이무스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사실 다이무스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좋음 이야기하고 싶었음 이제는 거진 확정되어버리다시피 해서 지금와서 말해봤자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를 줄곧 꺼내놓고 싶었음 이녀석이라면 사실과 다르다며 저를 다그치지도 제 말을 무시하지도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음.
"..그와 처음 만난 건 아주 어렸을 적이다." "그.. 카미유 데샹을 말하나?" 히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임 이야기를 시작하자 제 앞에 놓인 잔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다이무스가 다시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짐 그에 충분히 만족하면서 히카르도는 계속 말을 이음 카미유 데샹과 히카르도 바레타. 둘은 길거리를 떠돌던 고아였음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에 와선 잘 기억이 나지 않음 부모는 아마 그를 버렸거나 전쟁 중에 살해당했거나 했을 터임 그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히카르도는 이미 거리를 떠돌고 있었음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온통 황폐했고 도시 곳곳에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음 갈 데 없는 고아들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좁은 골목으로 모여들었고 히카르도와 카미유가 만난 것은 그 때였음 겁먹고 주눅들어있는 어린 아이들 속에서 홀로 외따로 된 양 무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미유를 발견한 것이 히카르도의 최초의 기억임.
카미유는 남달랐음. 먹을 음식을 어떻게 구할까 어딜 가면 두둑하게 동냥을 챙길 수 있을까가 그날 하루의 고민이었던 고아들과는 달리 카미유는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음 머리가 좋았고 비록 더럽고 찌들어있긴 했으나 외모도 괜찮았음 그런 카미유가 왜 자기를 선택했는지 히카르도는 아직도 알지 못함 카미유와 어울려 히카르도는 어느덧 고아들 사이에서 대장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카모라 마피아 눈에 띄어 조직에 들어가게 됨 힘밖에 쓸 줄 모르던 자신과 달리 카미유는 능력이 있었고 특히 의술에 상당한 소질이 있었음 조직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카미유의 연구를 도왔음 그 또한 조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마침내 연구는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둠 카미유는 히카르도에게 '힘'을 나누어 주었고 그 힘으로 인해 히카르도는 단숨에 카모라의 행동대장으로 급부상함 히카르도의 기억 속 카미유는 언제나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음 가끔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 싸늘해지기도 하고 조금 놀리면 곤란하다는 듯 찡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카미유는 항상 다정했음 모든 것이 달라져버린 그 사건 전에도, 카미유는 언제나와 같이 다정한 얼굴로 말을 걸었음 '히카르도, 부탁한다. 저들을 막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 그래서 히카르도는 처음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큰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음 카미유는 항상 다정했고 그가 하는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비능력자들이 죽어나가고 자신의 이름을 건 수배령이 내려져 마침내 굳은 얼굴을 한 경관들이 조직에 찾아왔을 때까지도 히카르도는 마치 긴 악몽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음 혐의를 부인할 생각은 없음 그건 확실히 자신이 한 짓이니까 그러나 다만 히카르도는 물어보고 싶었음. 네가 나에게 부탁한 일은 이와 다른 것이었지? 그 모든 일은 내가 너의 말을 오해해서 벌어진 일이 분명하다.. 그렇지? 더 이상 조직에 피해를 줄 수 없기에 나왔고 그 직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국제의료봉사단체에서는 완곡하게 면회를 거부당했음 연락도 닿지 않고 직접 찾아가기엔 카미유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음 "난 다만.. 내 친구를 만날 기회가 필요한 것 뿐이다." 그를 만나 확인하지 않으면 안돼. 히카르도는 씁쓸하게 중얼거림
그 말을 끝으로 히카르도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임 취해서 그대로 잠든 것 같음 아닌게 아니라 아까까지의 말도 끊길듯 간신히 이어지다가 끝에 가선 거의 말이 아니라 웅얼거림에 가까웠음 테이블 위를 보니 제가 사온 술과 음료 안주는 물론이고 다이무스 먹으라고 앞에 둔 술잔까지 어느새 집어서 자기가 다 마셔버린 후임 다이무스는 거기에 손댈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먹어버린 듯함 다이무스는 한숨을 내쉼 판을 벌린 장본인이 취해 넘어졌으니 뒤처리는 온전히 다이무스의 몫임 어째 회사 회식 때도 이런 일이 잦았던 것 같은데.. 다이무스는 어쩐지 기시감을 느낌 넘어져 돌아다니고 있는 술병들은 차곡차곡 테이블에 쌓아놓고 나온 쓰레기는 마찬가지로 잘 접어 한쪽으로 정리함 어차피 내일 하인들이 출근하면 알아서 치울거임 다이무스는 그냥 걸리적거리지 않도록만 정돈해둠 히카르도를 보면 소파에 앉아 머리 끝이 팔걸이에 닿을 정도로 꾸벅꾸벅 졸고 있음 자고 있는 얼굴은 평소와 달리 사나운 인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예 앳되어보이기까지 함 다이무스는 문득 제 감시대상이 자기 막내동생보다도 어린 나이였다는 것을 떠올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위태로운 태도도 이해가 감 다이무스는 잠시 히카르도의 얼굴을 들여다 봄 자신은 그를 닮은 동생을 안되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무스는 아직 혼란스러움 제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복잡하게 만듬 "....." 쓸데없는 생각이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판단력이 흔들리는 기분임. 다이무스는 잡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돌린 후 한쪽 어깨에 히카르도를 걸머 메고 이글 방으로 가서 침대에 던져놓고 나와 문을 닫음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남 자기 전 술을 마신 탓인지 드물게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잤음 아는 술 다 섞은 폭탄주를 저 혼자 물 마시듯 마셨으니 당연히 찾아온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니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림 히카르도는 눈을 찌르는 듯한 햇살을 피해 눈가를 찌푸리며 밖으로 나와 봄 거실로 가자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의 다이무스가 무뚝뚝하게 말을 검 "일어났나? 출근 시간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자기와 달리 옷차림도 몸단장도 모두 끝난 상태임 그러고 보니 술자리라 해도 다이무스는 술에 손도 안대고 자기만 마신 거 같은 기억이 남 뭔가 저 놈한테 술을 이케이케해서 뭘 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거 같은데 계획이 주겄습니다.. 잠시 멍때리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고갯짓으로 눈치를 주자 허둥지둥 옷 차려 입고 대충 아침 챙겨먹고 차에 올라탐
술이 아직 덜 깬 건가 히카르도는 그날 하루종일 뿌연 빛 속을 살짝 떠서 돌아다니는 거 같다고 느낌 온 세상이 뿌옇게 눈부셔서 어째 현실감이 없음 은행 이곳저곳에 무르익은 가을 햇빛이 빼곡히 들어차 히카르도의 눈을 공격함 히카르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눈을 가늘게 뜸 다이무스는 자기 방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고 가끔 은행으로 상황을 살피러 오기도 함 그 모습은 어제나 다른 날들과 별다를 바가 없음비록 어제 다이무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은 실패했지만 히카르도는 자기 얘기를 한 것으로 절반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긴 함 그러나 히카르도는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음 그저 자기가 카미유를 만나야하는 이유 목적 같은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을 뿐임 헬리오스가 안그런척 자기 목적을 궁금해하고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다이무스 또한 그렇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보다 그냥 이야기하고 싶었음 이제껏 아무도 그에게 목적을 물어보지도 공유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정말 아무라도 좋았던 걸까? 술기운에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아닌 거 같음 다이무스 뿐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저녀석이라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음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점점 술에 취해 자기가 뭐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떠들어대는 상태가 되기까지 다이무스는 대꾸는 없어도 표정 태도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앞에 줄곳 앉아있었음 그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책망도 추궁도 아닌 다른 것을 담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그건 무심도 아니었음. 히카르도는 왠지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럽다고 느낌.
전후관계 따지는 데에 소질도 관심도 없는 히카르도라도 어제 자기가 제멋대로 꺼냈던 이야기가 그에게 썩 듣기 편하지 않았다는 걸 암 회사 내에서 그의 위치나 맡은 임무를 보건데 더욱 그러함 이야기는 세간에 알려진 여론과도 대외적인 이미지와도 전혀 다름 오히려 그것들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임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 진심이 어쩌고 목적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에게나 나눌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임 그 외의 사람에게는 들어봤자 불편하고 의아할 뿐임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듣는 쪽은 어거지로 저쪽으로 끌어당겨진 같은 느낌을 받음 그러나 히카르도의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다이무스가 저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함 변함이 없음 들은 이야기로 인해 저를 더 살가워한다거나 멀어지고 싶어한다거나 하는 눈치를 전혀 보이지 않음 그런 모습을 보면 히카르도는 어쩌면 어제 술을 먹으면서 이야기한 그 모든 일이 어젯밤 꿈이 아닐까 함 식탁 위에 놓여져있던 영수증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믿었을 수도 있음
딱히 어떤 반응을 바라고 꺼낸 것은 아니지만 제 깊은 속내를 듣고도 변함 없는 다이무스의 태도가 히카르도는 조금 섭섭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녀석답다고 느낌 다이무스는 제 말을 단지 그 때만 듣고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지어낸 말이라며 아예 믿지 않았을 수도 있음 아니면 이러저러한 사실들을 잘 조합해서 회사에 일러다바칠 계획일 수도 있으나 히카르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근거는.. 없음 그냥 자기가 다이무스를 믿고 싶은 것 같기도 함 당최 자신은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우니까. 그러나 그걸로 됐음 이것저것 계산하고 재는 것은 히카르도 성미에 안맞음 다이무스가 새삼 자기에게 거리를 둔 이유에 대해서도 일단 접어두기로 함 중요한 건 자질구레한 샛길이 아니라 커다란 줄기니까. 다만 지금 이 상태 시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조용하게 흘러가는 이 나날들이 히카르도는 상당히 마음에 듬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오는 눈빛이나 가만히 주위를 감싸는 자연스러운 침묵.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나니 히카르도는 더 이상 그게 불편하지 않음. 편안함. 눈부시다. 히카르도는 눈을 몇번 깜빡임.
그러는 동안 히카르도의 안에서 좀 다른 생각이 틔여남 저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함. 제가 가지고 있는 목적같이, 다이무스에게도 바라고 있는 것이 있을까? 마음을 터놓고 깊은 속내를 이야기할 상대는 있을까. 그걸 알아서 뭘 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보고 싶음. 그냥 그럼.
나가기 전 히카르도는 은행 한 쪽을 채운 유리벽에 제 모습을 지나가듯 비춰보며 매무새를 정돈함 늦은 오후 아직 바깥이 환하기 때문에 유리에는 희미한 남자의 실루엣만 비칠 뿐임 마침 회사에서 보낸 차가 도착하자 히카르도는 뒤를 돌아봄 마찬가지로 임무 복장으로 갈아입은 다이무스가 막 제 방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은행 앞에 세워진 차를 발견하고 히카르도에게 눈짓함 히카르도는 고개를 끄덕임 "나 먼저 간다." 드디어 단독임무임 일단은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다이무스와 히카르도의 임무지는 정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둘은 은행에서 헤어져 따로 차를 탐 히카르도는 떠나기 전 가볍게 목례함 다이무스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임
히카르도를 태우러 온 차는 썬팅을 진하게 한 중형 세단임 어찌나 유리를 까맣게 칠했는지 안에선 바깥이 잘 보이지 않음 히카르도가 뒷자석에 몸을 싣자 금방 출발함 혼자만의 공성임무라...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지만. 들은 내용을 생각하면 별 다를 것 없는 공성이다만 늘 있던 옆자리가 비어있으니 가는 길이 영 허전함 다이무스는 무슨 호위임무라고 했는데 자세한 건 듣지도 묻지도 않았음 히카르도에게 그건 자기랑 별 상관없는 이야기임 필요한 이야기라면 다이무스가 했을꺼임. 그쪽도 짐덩어리인 자기를 떼 놓은 단독임무이니 쉽지야 않겠지만 그 '태도'에게 어려운 임무란 게 있을런지 모르겠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히카르도를 태운 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서행함
다이무스는 천천히 차에서 내림 곧 있을 회담으로 헬리오스는 전에 없이 어수선함 여러가지 사정으로 회담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음 닥터가 영국을 떠나면 밝힐 예정임 그렇게 비밀스러운 일정이니 회사 내는 평소와 눈에 띌 정도로 다른 점은 없음 보이는 인원도 많지 않고 오히려 한산함 그러나 겉보기일 뿐이고 기척에 밝은 다이무스에게는 숨어서 대기하고 있는 능력자들이나 감춰진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짐 헬리오스의 앞날과도 관계 있는 일이라 전체적으로 경계가 삼엄함 회담으로 정해진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음 근처에 나와 있던 이사 월라드와 인사한 다이무스는 호위 책임자로써 어딘가 빈틈이 있지 않나 수상한 점은 없나 회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점검함 다행히 아직까지 눈에 띄는 점은 없음 마음에 걸리는 것 한가지만 빼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함
정문을 호위하고 있는 능력자들과 보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다이무스는 저 멀리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음 시간을 확인하니 정확히 회담시간 5분 전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위병들 때문에 잠시 정차한 차창 너머로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옴. 허가를 얻었는지 다시 출발한 후 더 이상 차가 들어올 수 없는 회사 건물 앞까지 들어와 천천히 멈춘 고급스러운 차량의 문이 열리며 훤칠한 청년이 이쪽으로 걸어나옴
히카르도는 임무지에서 샬럿과 마를렌을 만났음 마를렌은 발랄하게 인사했고 샬럿은 수줍음을 타지만 반갑게 다가옴 임무는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끝났음 히카르도가 일선에 나와 어그로를 끄는 사이 물꼬맹이들이 건물을 부수니 금방이었음 예정보다 훨씬 이른 종료시간에 샬럿과 마를렌은 서로 얼굴을 마주봤음 임무는 끝났건만 둘은 뭔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임 히카르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홀든 저택으로 돌아갈지 회사로 가서 다이무스나 보러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를렌이 다가오더니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함 진짜 이른 저녁이군.. 히카르도는 조금 생각해보고 그러마고 함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에 도착한 식당은 사람이 별로 없었음 자리에 앉자마자 마를렌은 메뉴판을 들고 이것저것 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면 샬럿은 쭈뼛대며 제 옆에 언니에게나 먹고 싶은 것을 작은 소리로 말할 뿐임 히카르도는 간단히 파스타랑 리조또 이런 거나 시킬 생각이었는데 마를렌이 직원에게 불러주는 리스트는 한참 김 이건 아예 정찬 코스요리 느낌임 히카르도가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를렌은 씩 웃으면서 자라나는 아이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함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그보다 이거 내가 사는 건가 다 먹을 수는 있나? 아예 저녁 늦은 시간까지 밥만 먹겠군 홀든 저택에 가면 이거 같은 맛있는 밥 그냥 먹을 수 있는데.. 이러저러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조금 투덜거리면 소녀는 우아한 귀부인처럼 미소를 지음
셋은 전채요리로 나온 스프랑 생선을 금방 먹어치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임무 때문에 배가 많이 고팠었음 두 번째 요리가 살짝 지체되는 동안 히카르도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옴 제 한달 월급을 고스란히 한끼 식사에 붓게 된 것은 아까우나 저런 어린 꼬맹이들이 자기한테 밥을 사달라고 조른 것은 처음이라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음 어린아이들은 귀여움 아이들은 자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비싼 곳이라 그런가 밥도 맛있음 맛있는 밥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럭저럭 괜찮음.
천천히 식당 쪽으로 나가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림. "언니, 괜찮을까..?" "응? 괜찮아. 돈 모자르면 내가 살짝 보태면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느긋하게 걸으며 대화를 듣고 있던 히카르도의 걸음이 빨라짐. "그게 무슨 소리야." 뚜벅뚜벅 날카로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히카르도를 보고 두 아이 모두 하얗게 질림. "방금 그 얘기..." '의사선생님이 회사에 오니까 아저씨를 붙잡아둬야 한다'는 얘기를 막 꺼냈던 마를렌은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숙임 "날 잡아둬? 누가 온다고?" 이제 두 아이는 확연히 겁에 질린 눈치지만 히카르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침 테이블의 소란을 알아챈 매니저가 sir.. 하면서 다가옴 히카르도의 날카로운 인상과 감정이 격해져 저도 모르게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벌레들을 본 매니저가 경비에게 눈짓함 그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고 히카르도는 차가워진 머리로 생각함 닥터.. 카미유로군. 그래서 홀든과 날 떼어놓은 건가. 깨닫자 히카르도는 금방 식당을 뛰쳐나감 "아저씨 안돼요! 다이무스 아저씨가...!" 마를렌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때림
그와 자신은 초면이건만 카미유 데샹은 마치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똑바로 다이무스에게 다가왔음 "카미유 데샹이라고 합니다." 키가 큰 편이고 호리호리한 체형 탓인지 원래 키보다도 훨씬 커 보임 온화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의사의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음 "다이무스 홀든이다." 가볍게 나누는 인사였지만 맞잡은 손은 장갑 너머로 느끼기에도 섬세하고 적당히 미지근했음 카미유가 살짝 힘을 더하자 부드러운 손가락의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일반적인 인사치곤 악수가 조금 길었음 다이무스가 제 말에 별 대꾸를 하지 않자 카미유는 살짝 당황한 듯 했지만 곧바로 다정하게 웃었음 보는 이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단정한 각도로 끌어올려진 입매에 반해 이쪽을 들여다보듯 고개를 숙인 눈동자는 진한 선글라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음 다이무스는 순간적으로 눈 앞에 선 의사에게 약한 거부감을 느낌 다이무스의 마음에 드는 인종은 아님 "....." 그러나 다이무스는 티를 내는 대신 무뚝뚝하게 몸을 돌려 데샹을 회사로 안내함 마침 시간 맞춰서 마중나온 명왕과 브뤼노와도 악수한 의사는 그들과 함께 건물 내로 들어감
아직까지는 헬리오스의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음 막 건물로 들어가는 수장과 의사의 뒷모습을 보며 다이무스는 생각을 정리함 예정된 회담은 약 1시간임 딱히 결정해야 할 의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 주제는 이미 계획되어 있는 국제의료봉사단체에 대한 원조의 범위를 재확인하는 정도임 실제론 1시간의 대화도 상당히 느긋한 템포로 진행될 것임 이 시간 즈음이면 히카르도의 임무도 거의 막바지겠군. 아이들에게는 임무 때 히카르도가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끌라고 (브뤼노가) 말해둔 상태임 임무가 회사의 예상보다 일찍 끝난 경우에도 마를렌이 잘 알아서 할 것임 그녀는 어리지만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만큼 조숙한 편이기도 함
'단지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지. 다이무스는 일단 그 얘기는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음 이야기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임 한마디 한마디를 말할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말하던 히카르도는 술에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고 진실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다고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대화만 한다고? 구랭ㅋ하면서 카미유와 히카르도의 만남을 주선해줄 수야 없는 노릇임 카미유를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꾸며낸 말일 수도 있고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의 얼굴을 보면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노릇임 또 회사의 이런 입장을 카미유가 이해해줄지도 의문임 위험한 변수가 너무 많음 그 외에 히카르도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다이무스는 좀 더 정리하고 난 다음 보고할 생각임 살아가고 배신당하고 좌절한 이야기. 지금은 그 이야기를 전달할 때 제 감정에 전혀 관계없이 냉정하고 중립적일 자신이 없음.
회담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음 다이무스는 문득 귀에 거슬리는 실랑이 같은 것을 들음 벌써 회담이 끝났나 했는데 그 소란은 회사 입구에서 나고 있음 '설마..' 아직 굳게 닫혀있는 건물의 문을 한번 응시한 다이무스는 검 손잡이를 쥔 채로 입구로 달려나감막 다이무스가 내딛은 발치에 헬리오스의 능력자가 날아와 나동그라짐 "무슨 일인가." 만신창이가 된 능력자는 떨리는 손 끝으로 제 앞쪽을 가리킴. '히카르도..' "홀든..!" 사나운 기세로 온 몸에서 벌레를 방출하던 히카르도가 이쪽을 돌아보며 씹어뱉듯 중얼거림 돌아보는 시선이 일순 시퍼런 안광마저 비쳐질 정도로 거칠게 날뜀 왔군. 오지 않길 바랬는데. 다이무스는 침착하게 물어봄. "아이들은 어떻게 했지?" "...아이들?" 히카르도가 피식 웃음. "그런 어린 아이들까지도 이런 일에 동원하나? 참 대단하군."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아이들을 다치게 한 것 같진 않음 다이무스는 일단 티나지 않게 안도한다음 곧바로 검손잡이를 쥐고 발도할 준비를 함 히카르도는 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물어봄 "날 막을꺼냐?" 내가 한 그 모든 말을 듣고도? 다이무스의 모습은 검을 쥔 모습 그대로 미동도 없음 히카르도의 얼굴에 천천히 자조섞인 웃음이 번져감 "그래.. 그러시겠지."
다이무스는 낮춘 자세에서 벌레를 구기며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는 히카르도의 앞 공간을 크게 베어냄 아무 것도 베지 않은 사실상 경고에 가까움 히카르도는 다시 입꼬리를 올림 "날 죽여야 할꺼다." 날 멈추려면. 네가 보여주는 이 태도랑 뭐가 다르지? 히카르도는 혀를 가볍게 차며 앞으로 뛰어듬 그와 동시에 다이무스의 검에 거미줄이 엉김 다이무스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거미줄을 잘라내고 다시 한발짝 내딛어 검을 흩뿌림 그를 피하기 위해 히카르도도 한발짝 뒤로 물러남
"무슨 소란입니까?" 등 뒤에서 낯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다이무스는 당혹감을 느꼈음. 카미유 데샹. 여길 왜 오지? 다이무스가 상대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히카르도의 목적은 카미유임 위험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든 어쨌든 간에 괴한이 쳐들어온 이상 그 목적이 여기 이렇게 어슬렁거리면 안됨 그건 다이무스에게도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임 다이무스는 드물게 신경질적이 되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뒤를 흘끗 돌아봄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의사의 뒤로 명왕과 회사의 능력자들이 부랴부랴 따라오고 있음 저 인원이 카미유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고 문제는... 다이무스는 다시 히카르도 쪽으로 시선을 돌림 히카르도는 경직된 얼굴로 카미유를 쳐다보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소리를 지름 "....카미유!"
뭐라 말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려는 카미유를 명왕이 가볍게 제지해 물러서게 함 다행히 의사는 명왕의 말을 이해한 듯 순순히 물러나 다시 건물 쪽으로 돌아감 저쪽은 맡겨두면 되겠지. 다이무스는 고개를 돌림 카미유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히카르도는 그가 회사의 능력자들과 함께 모습을 감추려 하자 조바심을 느낀 듯 달려듬 "카미유!" 이미 막는 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사방에 벌레를 거칠게 흩뿌린 히카르도는 능력자들을 밀어내고 카미유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을 옮김 다이무스는 일부러 소리를 카랑거리며 검을 크게 뽑음 막 달려가려고 하던 히카르도가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몸을 날림
"너...!" 핏발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던 히카르도는 이를 뿌득 소리내며 갈더니 노성을 지르며 몸을 꺾음 다이무스는 이 모션을 임무 때 몇 번 본 적이 있음 "큭..!" 히카르도의 몸을 뚫고 나와 사방으로 빗발치는 벌레들를 피하려 다이무스는 한 팔로 제 얼굴을 막음 소용돌이의 가운데에서 피와 벌레의 체액을 잔뜩 뒤집어쓴 지옥같은 인상의 히카르도가 주먹을 꺼떡임. 불멸자 발동.
다이무스는 날아오는 힐킥을 가까스로 피함 불멸자를 발동하고 난 히카르도의 공격은 이전보다 훨씬 매섭고 날카로움 이쪽을 후벼파려는 듯 덤벼드는 주먹을 막은 칼날에서 캉, 하는 맑은 소리가 남 저쪽은 분명 맨손일텐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듯 히카르도는 정신없이 다이무스에게 달려들기 바쁨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을 막아내며 다이무스는 재빠르게 뒤쪽을 살핌 전투에 참여했던 능력자들은 거의 다 근처에 널부러져 있고 수장을 포함한 헬리오스의 중역들은 건물로 몸을 피한 뒤임 적당한 시기임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다시 다가오길 기다려 검 대신 한 손으로 히카르도의 어깨를 잡음 순간 잡은 손바닥 전체로 퍼져가는 비정상적인 열기에 다이무스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손을 떼지는 않음 "...뭐하는 거냐" 히카르도는 성가시다는 듯 다른 손으로 잡힌 어깨에서 손을 떼어내려 함 다이무스는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함 "물러나라." "하.. 너 무슨...!" "어차피 이런다고 지금 그를 만날 수 있는게 아님을 알고 있지 않나." "......"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는 다이무스 상대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음 다이무스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둘이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멀쩡하게 합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거임 거기다 다이무스만 해치워서 되는 것도 아님 회사에는 명왕을 비롯한 실력자들이 카미유를 지키기 위해 모여있음 운이 좋으면 카미유에게 가서 죽을 거고 운이 나쁘다면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음 그러나.. 히카르도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음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옛 친구가 바로 저기에 있음 거기다가 자기가 이제껏 가까워졌다 믿었던 상대에게서도 배신당한 직후임 히카르도는 지금 자기 몸이든 목숨이든 마구 집어던져서 아무거나 부수고 싶은 심정임 다이무스는 다시 히카르도를 다그침 "가라." "웃기는 군. 네가 지금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 "가라."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천천히 쳐다봄 언제나 표정이 없던 얼굴에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음 젠장. 그의 말대로임. 자신에게 승산은 없음. 이미 카미유의 모습은 한참 전에 사라졌음. 히카르도는 뿌득 소리를 내며 다이무스의 손을 쳐냄 다이무스는 순순히 물러남 몸을 휙 돌린 히카르도는 떠나기 전 뒤를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벗어남
건물로 돌아간 닥터는 회사의 중역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당연하게도 회담은 중지되었음 그 후 헬리오스는 부상입은 능력자들과 피해상황을 정리함 급작스러웠다 뿐이지 피해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음 히카르도가 암만 날고 기어봤자 제 몸뚱이 하나임 그리고 헬리오스는(아마 연합도) 그 간의 전쟁으로 대사이퍼 전투에 익숙함 다만 이 소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카르도가 표면적이나마 회사 소속이었다는 점임 거기다.. 히카르도와 마지막에 대치하다가 놓친 인물이 다름아닌 그 다이무스 홀든이라는 점도 논란거리가 됨 회사의 실력자. 그를 실질적인 헬리오스의 에이스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있는 실정임 심지어 다이무스는 겉으로는 히카르도의 담당 사수이며 실질적인 감시역이기까지 함. 헬리오스에서도 이 점을 꺼림칙하게 봤음 물론 이번 일은 그동안 임무로 또 은행일로 회사에 보탬이 된 홀든 가를 내쳐버릴 정도의 사건은 아님 다이무스의 원래 성정을 봐도 그랬을 거 같진 않음
그러나 다이무스가 히카르도와 대치했을 때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이가 한 명도 없는 점 그리고 히카르도의 능력이 출중하다하나 다이무스 정도의 실력자를 큰 상처없이 따돌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몇 가지 의문점이 대두됨 그게 뜻하는 것은 한가지임.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일부러 놓아준 것이 아닌가.' 물론 감히 다이무스 면전에서 그 말을 똑바로 읊을 수 있을만큼 경우없는 인물은 회사에는 없음 그러나 의혹이 있는 것도 사실임 사소하다곤 하나 자칫하면 회사의 안위와 관계있었을 소동이었음 헬리오스는 사정청취라는 이름으로 다이무스를 밤늦게까지 붙들어둠 회사는 같은 질문을 반복함 무슨 일이 있었나. 다이무스도 같은 보고를 반복했을 뿐임 히카르도가 쳐들어왔고 그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도망쳤다. 쫓아가 포획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고. 회사 입장에선 그게 일부러 놓아준 거랑 뭐가 다르나 싶었을 테지만 다이무스는 그 외에 변명이나 자기를 변호하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 아니 뭐 이런.. 그래서 뭐라는 건데 지금 이쯤 되니 회사는 다이무스가 놓아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봄 집요했지만 결국 질문의 수위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의 수위를 넘지 못함 다이무스는 계속 똑같이 대답함 결국 의혹이 있다하나 실체도 확실치 않고 소동에 대한 증언도 증인도 없는 시점에서 이 이상 에이스를 추궁하는 것도 득될 것 없다고 생각했는지 상층부는 히카르도를 놓친 것에 대해 가볍게 질책하고 그날 밤 다이무스를 저택으로 돌려보냄
조용한 건물 바깥은 공기가 싸늘함 다이무스는 길게 숨을 내쉼 하얗게 퍼진 입김이 찬바람에 산란히 부서짐 팔목 끝에 다리에 차가운 코트자락이 감겨듬 회사엔 담담하게 보고했으나 사실 다이무스의 마음은 그만큼 담담하지 못했음 오히려 혼란에 가까움 어쩌자고 히카르도를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음 당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에서 히카르도를 생포해 카미유를 습격한 의도에 대해 알아내는 거였음 밝혀진 이유가 회사에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라면 더할 나위 없음 그게 안됐더라면 차선책은 히카르도를 죽여서 그 시체를 회사에 제출하는 거임 이 경우 습격한 이유는 듣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번 소동은 만회하고 닥터에게 체면은 차릴 수 있음 이도 저도 안되서 히카르도도 놓치고 그 이유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 <----- 지금 여기 다이무스는 어떤 방법이 회사에 가장 좋은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암 근데 잘 안됐음
다이무스가 히카르도를 그냥 보낸 것은 단지 다이무스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은 아님 다이무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음 자신이 히카르도의 감시를 맡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저를 떼어서 히카르도의 목적일 것이 분명한 닥터 데샹의 호위로 붙인다고? 카미유가 회사의 사정을 몰랐다고는 하나 우연이 지나친 느낌임 거기다 다이무스 자존심이 상한 것과 별개로 헬리오스가 습격당하자마자 그 습격의 표적인 카미유가 뛰쳐나오는 것도 영 이상함 마치 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슨 일 있습니까, 라니. 카미유는 사전에 습격이 있을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을 터임 그래서 다이무스 자신을 보안 책임자로 청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애초에 히카르도가 회사에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적인 카미유와 헬리오스의 회담이 잡힌 것도 너무 타이밍이 좋음 여러가지로 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이 전개되고 있는 느낌이라 다이무스는 영 기분이 편치 않음 단순한 습격이 아닌 장차 회사의 앞날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무언가가 물 밑에서 수면을 살살 긁으며 다이무스의 신경을 자극함 히카르도를 섣불리 처리해버릴 순 없다, 고 검사로써 갈고 닦아왔던 감이 제게 속삭임
그러나. 다이무스는 가만히 고개를 흔듬. 회사의 사정과 별개로 다이무스 개인적으로 히카르도를 없애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임. 그때 회사에 남아있으면 히카르도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생포해 그 목적을 실토할 때까지 고문을 받거나 아예 시체가 되어 카미유에게 건네질 수도 있었겠지. 다이무스는 정말 그걸 원치 않았음. 그 순간 느낀 싫다, 는 감정이 정말로 강렬해서 다이무스는 어쩔 줄 몰랐음. 거의 막무가내로 히카르도를 그 자리에서 밀어냈음. 아마 그렇진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예 히카르도에 대한 제 감정 때문에 회사나 일어나는 일에 대해 과장하고 왜곡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름. 혼란스러움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있을 수 없음 다이무스는 주먹을 꼭 쥠 한순간 정신이 훅 들 정도로 강한 통증이 느껴짐 아까 무리하게 히카르도의 어깨를 쥐었을 때 열과 벌레들에게 입은 상처임 다이무스는 저를 망연히 쳐다보던 히카르도의 얼굴을 떠올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다이무스는 잠깐 멈춰선 후 다시 똑바로 걸음을 옮김.
히카르도는 현재 행방불명 상태임 헬리오스를 도망치듯 벗어난 이후 그는 은행에도 홀든 저택으로도 돌아오지 않았음 당연함 그런 습격 사건을 벌여놓고 다시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음 그럼 그는 어디로 갔을까
술집이 있었음 다이무스가 퇴근 후 히카르도를 감시했을 적에 들르던 시내의 큰 펍이 아니라, 좀더 작은 곳. 히카르도가 저와 술자리를 가지려고 식료품을 바리바리 사왔던 그 날 밤 식료품 가게 옆 작은 술집에서 장보러 나온 여종업원과 옛날부터 잘 아는 눈치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던 것을 다이무스는 기억하고 있었음 뭐든 확실치 않음 친하게 보였다 뿐이지 히카르도가 그 술집에 자주 들렀다는 혹은 지금도 거기 있다는 확증도 없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자 아예 포트레너드 밖으로 몸을 피했을지도 모름 다만 그 곳은 히카르도의 과거와 가늘게나마 이어져 있었음 이것저것 고민하는 대신 다이무스는 직접 술집으로 향하는 방법을 택함
술집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시간이 늦었기 때문인지 빈자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음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낄낄댈 뿐 정신없는 분위기는 아님 다이무스는 펍 안을 한번 슥 둘러봄 입구에 앉아 마시고 있던 몇몇 치들이 딱 봐도 이곳과 분위기가 다른 다이무스가 들어오자 힐끗거리며 곁눈질했지만 다이무스가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가만히 잡자 조용히 고개를 돌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함 안을 훑던 다이무스는 카운터 저쪽 끝에서 허리를 잔뜩 구부정하게 하고 술을 마시고 있는 뒷모습을 발견함 얼마나 봤다고 벌써 저 뒷모습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다이무스는 성큼성큼 걸어가 몇 걸음만에 히카르도 뒤에 섬.
얼마나 취했는지 히카르도는 자기 뒤에 누가 서있는지도 모름 다이무스는 기척을 막 뿌리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살금살금 감추는 타입도 아님 마침 히카르도 앞에서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던 여주인이 다이무스가 찾아온 걸 보자 반색을 함 "이이는 못보던 인데, 새로 사귄 친구야?" 그 말에 꾸벅꾸벅 졸던 히카르도가 멈칫 고개로만 뒤를 돌아보더니 다이무스를 확인하고 웅얼거리며 다시 탁자 위에 얼굴을 묻음 "....친구는 무슨..."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 히카르도가 도로 잠들려고 하는 걸 여주인이 다시 흔들어 깨움. "어여 친구따라 집에 가. 여기서 자면 안되지." 히카르도는 진짜 잠들었는지 아무 반응도 없음 대화를 하러 온 건데 이렇게 되면 여기다 버리고 갈 수도 없음. 다이무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히카르도 한팔을 어깨에 걸친다음 그를 거의 들다시피 부축해서 술집을 나옴
늦은 밤거리는 지나는 사람이 없어 서늘하고 조용했음 이 상황에서 자기가 히카르도랑 같이 있는 것을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서 받을 수 있는 오해를 생각해보면 인적이 드문게 차라리 다행임 아까 잠깐 비가 왔는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싸하니 축축함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도저히 들지 못할 만큼 무겁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길거리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가볍지도 않았음 팔다리가 쓰잘데없이 길쭉한데다가 술 취해서 축 늘어져 걸을 때마다 무진장 걸리적거렸음 다이무스는 그냥 자기가 회사에 꼭 필요한 짐짝을 나르는 업무라도 수행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함 생각해보면 영 틀린 생각도 아니지 않은가. 복보단 화가 될 확률이 높긴 하지만. 뚜벅뚜벅 걷던 다이무스는 골목 바로 앞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벽으로 붙어 섬 여기 올때까지 자기한테 미행 붙은 것 없나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별 다른 느낌은 없음 아마 자기한테 붙일 만한 미행특화 능력자가 회사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함.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음 다이무스는 기척을 죽이고 앞에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림 별 수상한 움직임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게 아무래도 착각이었나 봄 다이무스는 길게 입김을 내쉼 홀든가 장남이 어쩌다 이렇게 스파이 쥐새끼 같은 짓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음 고개를 빙글 돌린 다이무스는 벽에 기대 세워뒀던 히카르도를 다시 이려고 손을 뻗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저 쪽에서 손이 뻗어져왔음
마치 물 속을 허우적거리듯 비틀거리는 손길을 다이무스는 처음엔 단단히 받쳐주려했음 아마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제대로 서있을 수 없는가 싶었음 그러나 다이무스 앞 허공을 더듬던 손은 그 가슴께에 닿자 강한 악력으로 옷깃을 잡아챘음 술주정이라고 하기엔 꽤 격하고 분명함 "....뭐...." 벽으로 밀어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멱살을 쥐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김 "...윽," 잡아당겨진 목깃에 숨이 턱턱 걸림 술에 취해 거리감이 무뎌진 것인지 어떤지 히카르도는 평소에 그가 다른 사람과 두는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다이무스를 끌어당기고 있음 거의 제 뺨을 스치는 상대의 숨결까지 느껴질 정도임 히카르도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독한 술냄새가 허공에 퍼짐 평소에 끼고 다니던 장갑은 어쨌는지 옷깃위로 느껴지는 히카르도의 손은 매우 차갑고 까칠했음 마치 그 자체로 냉기라도 발산하는 것처럼. 다이무스는 문득 제 손을 잡던 의사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떠올림. 타는 듯 뜨겁던 히카르도의 벌레들도. 그냥 그 대조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음.
생각은 한 순간이고 다이무스는 일단 이 마음에 들지도 좋아보이지도 않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함. 맨 처음 다이무스는 저를 붙든 히카르도의 손을 쳐 내고 뒤로 물러나려고 함. 그러나 히카르도는 꿈쩍도 하지 않음 다이무스가 저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걸 알자 오히려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함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주먹에 분명하게 핏줄이 섬 잡아당겨진 셔츠 깃이 한층 더 숨을 죄임 다이무스는 그제야 히카르도의 태도가 제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느낌 '칼을 써야겠군..'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허리춤에 맨 제 검 손잡이로 손을 미끄러트림 뒷목이라도 쳐서 기절시킬 생각임 막 검집 채로 검을 뽑아내려는 순간 손에서 느껴진 통증에 다이무스는 한순간 멈칫함 그 순간 다이무스의 움직임을 눈치챈 히카르도가 잇새로 낮은 노성을 흘리며 잡고 있던 그를 그대로 벽에 내동댕이치듯 내던짐 "큭...!" 검집을 잡던 손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러감 아까까지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희미했던 살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분명해져 제 몸 위를 짓쳐누르는 것이 느껴짐 "날 죽이러 왔나, BLADE?" 질식이라도 시킬 작정인지 단단한 팔뚝이 목울대를 부러트릴 듯 압박해 들어옴 히카르도가 입을 열 때마다 휘발성 강한 알콜향이 훅 끼침 카미유에게 사주라도 받았나? 나를 죽이라고? 밤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엔 더이상 취기도 느껴지지 않음 대신 서슬퍼런 분노만 느껴질 뿐임 그간 느끼던 친밀감이 증오로 변한 걸지도 모름 목께를 파고드는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능력을 발동했는지 다른 손에 움켜쥐어진 어깨는 타는 듯 뜨거움 무엇보다 숨이 막힘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침 버릇처럼 허리춤을 더듬어도 제 검은 아까 떨어트려 저 만치로 굴러간 참임 다이무스는 거리를 벌리는 전투에 익숙하지 붙어서 싸우는 레슬링이나 체술에 익숙한 편은 아님 지금 저를 누르고 있는 히카르도의 힘은 전에 없이 강력함 아예 자기를 여기서 죽이려는 생각인지도 모름 게다가 다이무스는 자세도 너무 불리함 목을 졸리고 있는 상태에선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음 산소부족으로 다이무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니 하얗게 질림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음 벽에 틀어막힌 상태라 잘 되진 않았지만. "....ㅇ...아니...다...."
다이무스는 제 목과 히카르도의 팔 사이로 한 팔을 밀어넣어 간신히 숨쉴만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천천히 숨을 내쉬려고 노력함 자기가 입을 열자 기분 탓인지 좀 느슨해진 것 같이 느껴지는 팔뚝에 비해 어깨를 파고드는 손길은 한층 더 강해짐 뜨겁고,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러움 뭐가 아니라는 건지, 히카르도의 질문에 대한 이렇다할 설명도 덧붙이지 않고 다이무스는 그대로 입을 다뭄 그대로 잠시 뭔가 기다리고 있던 듯한 모양새로 숨을 죽였던 히카르도가 한순간 짧게 숨을 내쉼 "하..."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짧은 어절을 다이무스는 판단할 수 없었음 히카르도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숨을 삼킴 "죽이려는 것도, 도우려는 것도 아니라고..? 날 어쩌려는 거냐, 말해봐!" 다그치는 목소리는 거칠게 끝이 갈라져 좁은 골목을 울렸음 그에 따르는 것처럼 다이무스의 목과 어깨를 틀어쥔 힘도 강해짐 "...." 다이무스는 계속 침묵을 지킴 해줄 말이 없었음 히카르도가 요구하고 있는 대답은 다이무스 자신도 모르고,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이니까. 다만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는 자신을 히카르도라고 달갑게 여길리 없음 당장 다이무스 자신만 해도 다른 사람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을 거임 이대로 갈라지게 되는 건가. 또 자신은 정해진대로, 회사의 뜻대로 이 녀석을 잡아 회사에 바치는 그런 수 밖에 없나. 이제 거의 감각도 둔해져 둔탁한 통증만이 느껴지는 어깨를 돌아보며 좀채 잡히지 않는 생각을 더듬고 있자면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음."차라리..." 이제껏 극명하게 드러냈던 살기나 아직까지 취하고 있는 위협적인 자세에 걸맞지 않게도 이어지는 음성은 가라앉고 바람에 떨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기까지 했음. "차라리 날 확실히 밀쳐내란 말이다.."
아직 틀어쥐곤 있지만 다이무스의 셔츠깃과 어깨를 잡은 히카르도의 손은 이제 확연히 힘이 실려있지 않음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서 저를 방어하듯 세우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림 그 움직임에 히카르도는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함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고개를 든 히카르도 얼굴에 드리운 것 중에 눈물은 없었음 히카르도는 마치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다이무스의 얼굴을 들여다 봄 순간 골목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이 거의 깜빡이지 않는 눈동자 위로 가늘게 그늘을 만들어냄 다시 고개를 숙인 히카르도는 입을 염 "...난 모른다." 다른 이들이 제게 주는, 제게서 느낄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들. 이해하려고 했으나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 과거엔 카미유가 그러했고 이제는 다이무스가 그러함. "나만.. 모르는 것 같더군." 어째서 사랑스럽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저를 버리고 등을 돌아서는지, 히카르도는 알 수가 없었음. 분명 저가 모르고 지나가는 어떤 복잡한 흐름이 있어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을 놓아버릴 수 없는 것일까. 그 흐름을 알게 되면 자신도 그들을 버리고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래서 모두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는 걸까. "너도 그러하냐, 홀든..?" 다른 사람들이 제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얻으면 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얻지 못해서 버리는지. 알지 못하면서 다만 유대만을 바랬음. 끌면 끄는 대로, 또 밀면 미는 대로 허겁지겁 따라가기 바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했음. 끊임없이 내가 있을 장소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르는 관계를 더듬고, 혼란에 괴로워하고..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했음 자신은 언제까지 혼자인 것인가. 다만 홀로, 이대로 영원히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인가.
유대를 원함. 목적이 달라도,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하는 무언가를 줄곳 바래왔음. 옛 친구 때문이 아니라 실은 아마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신은 그것에 굶주려 있었다고 생각함. 다만 카미유에게서 그걸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차가운 손 끝으로도 더듬어지는 눈부시도록 뜨거운 것. 남에게만 받을 수 있는 것. 아무도.. 자신에게 주지 않은 것. 주지 않을 것이라면, 끝내 등 돌릴 거라면 처음부터 다가오지 말길. 종국에는 이해하지도 따라가지도 못하고 지쳐 주저앉은 채로 자신은 계속 제게 보이지 않는 그 언저리를 더듬고 있었음. 혹시 남아있을까 싶어서. 그러니 밀어내라. 내게 칼을 똑바로 겨누고 목숨을 노려서, 자신이 다신 헛된 기대 따위는 품지도 않게. 눈 앞에 있는 것은 적이라고 확실히 알게끔. 그게, 그게 아니라면.
발작같던 분노는 고통으로 변해서 벌레조각들과 함께 히카르도의 어깨로 내려앉음 대답을 바라면서도 고개를 떨구고 이쪽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는 넓지만 가늘게 흔들리고 있는 어깨만큼이나 불안하게 보였음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함 처음 히카르도를 은행으로 배정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히카르도는 태도는 방자했지만 단 한번도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음 오히려 지나치게 성실하다면 성실했을까. 언제나 주어진 임무에 집중했고 동료에 소홀히 하지도 않았음. 조직에서는 좋아라 할 조건은 죄다 갖춘 이 사내가 이토록 동료들의 인정과 유대에 굶주려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임. 누군가가 응당 그가 받아야 할 인정과 신뢰를 거절하고 가로막았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듯함.
사실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와 카미유 사이에 일어난 일 중 세간에 알려진 것들은 거의 모름 가십을 쫓아다니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말들에 가로막혀 명백한 진실을 못 보게 될까 해서 회사 정보원을 통해 알려진 사실밖엔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음 그러나 히카르도의 태도를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함 특히 히카르도에게 많은 타격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이건 명백함. 다이무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음. 열심히 노력하고 애쓴 사람이 많은 보상을 얻게 되는 그런 일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그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임 남부러울 것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들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을 갖지 못하는 히카르도가 가여움. 벨저가 아님. 다이무스는 눈을 가늘게 뜸. 인정받기 위해, 가문의 도움이 되기 위해 애썼던 모습은 동생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자신을 닮아있음. 그러나 또 다름. 결국 자신은 회사와 가문 모두에게서 인정받았지만 히카르도는 그렇지 못했음. 안타까운 심정을 알고 있음. 조국도 가문의 미래도 알 수 없었던 시절 간신히 회사에 투신해 아무 것 하나 뚜렷히 보이는 것 없이 눈과 귀를 막고 다만 임무에 매진하던 나날 자신도 느꼈던 익숙한 것이니까. 지금 히카르도가 갈구하고 있는 것은 그 시절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과 같음. 그리고 지금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에게 그걸 줄 수 있음. 모른 척할 이유가 있을까? 없음. 모른 척하고 싶지도 않음. 다이무스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어깨를 쥐고 있는 히카르도의 손으로 가져감.
다이무스보다 살짝 높은 위치지만 히카르도는 마치 그에게 매달려 있는 것같은 모양새로 서 있었음 그러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이쪽은 보지 않은 구부정한 자세임 처음 차가운 손등에 다이무스의 손끝이 닿자 히카르도는 멈칫하며 다이무스를 붙잡은 손을 강하게 함 뭔가를 거부하는 것처럼. 강한 악력에 다시 숨통이 죄이는 것을 느꼈지만 다이무스는 이제 그를 밀어내거나 강하게 손을 쳐내는 대신 조용히 히카르도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침 이제 괜찮다. 겹친 손 아래로 싸늘한 밤바람보다도 찬 커다란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짐. "..내가 주겠다." 다이무스는 목소리를 분명히 내며 다시 입을 염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면 기꺼이 주마." 눈마저 질끈 감고 있던 히카르도는 들려온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듬. 겨우 뜬 눈 앞에 흔들림 없는 다이무스의 얼굴이 보이자 동요한 히카르도는 반사적으로 쥐고 있던 손을 다시 꾹 조임 그런 다음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깨닫고 의식적으로 손의 힘을 천천히 풀려고 노력함 추위에 굳은 것인지 어쩐 것인지 손이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음 붙잡힌 상태가 불편하고 괴로울 텐데도 다이무스는 아무런 내색이나 저를 거부하려는 뜻을 내비치지 않음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혹시 이건 날이 밝으면 사라져버리는 환상이 아닐까. 히카르도는 더듬더듬 반문함 "진.. 진심이냐?" 다이무스는 대답대신 히카르도 손에 얹은 손에 강하게 힘을 줌 따뜻함. 따뜻하다 못해 차가운 제 손에는 뜨겁게까지 느껴짐.
그렇다, 는 대답보다도 훨씬 단단한 반응에 히카르도는 왠지 엄청 초조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잡고 있는 손을 놓아야 하는데 놓을 수가 없음 술기운 때문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모름 어떡.. 어떡하면 좋은 거지. 손에 힘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눈만 껌뻑이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나무라거나 채근하지 않고 참을 성 있게 기다림 히카르도는 간신히 입을 염 "그...렇군." 이라니. 이렇게 한심한 대답이 또 따로 없음 결국 제가 가장 바라던 것을 기꺼이 주겠다는 사람한테 하는 대답이 이런 거임. 추위에 술기운에 알 수 없는 이러저러한 붕 뜬 감정이 빙글빙글 섞여서 히카르도를 혼란스럽게 만듬. 제 뜻을 전달했음에도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망설이는 히카르도를 다이무스는 걸음마라도 시작하는 아이를 보듯 바라봤음 얼떨떨할테지. 이렇게 익숙치않아 보이는 태도까지도 오히려 그가 지금껏 받아왔던 대접을 반증하는 것이라 오히려 다이무스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듬 거절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받아들이길 잘했군. 다이무스는 그렇게 생각했음. 그래서 히카르도가 제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다가올 때도 아무런 제재도 거부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음
찬바람에 얼어붙은 코 끝으로 따뜻한 입김이 스쳤음 다이무스는 눈을 느리게 꿈뻑임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그림자 옆으로 골목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빈 깡통과 과자 쓰레기 등이 눈에 들어옴 히카르도는 잠시 그 근처에서 머물더니 좀 더 고개룰 숙여 입술을 맞대왔음 얇은 피부 위로 내려앉은 입술은 자잘한 상처에 거스러미가 일어 까칠했음 와닿는 숨결은 차디찼으나 입술 위로 느껴진 감각은 의외로 제법 따뜻했음 '.......?' 다이무스가 예상 외의 상황에 당황해 이렇다 할 반응을 돌려주지 않는 사이 히카르도는 제 입을 열어 꾹 닫힌 다이무스의 입술을 조금 핥음 건조한 입술 위로 아직 알콜향이 느껴지는 뜨겁고 말캉한 혀가 스치는 감각은 낯설고 생경했음 물론 다이무스도 이 나이 먹도록 키스 한 번 못해본 건 아님 그보다 더한 것도 해보긴 했음 그러나.. 지금 상황이 왜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지 다이무스는 이해할 수 없음
히카르도가 바란 것이나 다이무스가 주겠다는 것 어디에도 이런 건 없었을 터임 어쩌면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도 모름 그래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아예 이탈리아 마피아의 감사 인사법이라는 걸지도 모름.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가 지금 하고 있는 키스는 욕정이라기보단 제게 의지하거나 기대는 것에 가깝게 느껴짐. 다이무스는 뭔가 말하려고 반사적으로 입술을 쫑긋함 그에 반응한 히카르도가 이번에는 다이무스의 아랫쪽 입술을 살짝 깨뭄 어두운 골목길에 촉,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림 으음.. 다이무스가 하려던 말도 잊고 입을 다시 다물자 히카르도는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움직임을 멈춤 그러고.. 조금 더 있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짐쓰러지면서도 아직 다이무스의 옷깃을 쥐고 있어 하마터면 같이 넘어질 뻔했지만 다이무스는 간신히 히카르도가 넘어지기 전에 그 등을 잡아챘음 이제 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주먹에서 침착하게 옷을 풀어내고 어깨를 빼내는 다이무스의 머릿속은 물음표와 말줄임표가 한데 섞여 더스트 토네이도(E)를 이루고 있었음 "....." "......." ".........." 고민해봐야 결론나지 않는 일은 일단 행동하는 것이 최선임. 다이무스는 일단 히카르도를 골목길에 기대놓고 저 쪽으로 굴러간 제 검을 집으러 다녀옴 흙과 먼지로 더러워진 검을 탁탁 털고 히카르도를 다시 등에 인 그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나감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렸음 윌라드는 푹신한 소파에서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가다듬었음 그가 움직이자 옆에 서 있던 가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짐 곁에 있던 수하가 그 시선에 움찔해서 살피는 걸 윌라드는 손짓으로 제지함.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음 수하, 라곤 하나 최소한의 무장만 갖추고 경계 만연한 남의 아지트에 초대받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음 평소같으면 이런 불리한 조건따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련만 윌라드, 그러니까 헬리오스는 저쪽에 빚이 있음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닥터 데샹이 여상스러운 걸음으로 걸어들어옴 윌라드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나는 대신 가볍게 몸을 일으켜 목례함 그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여자가 불편한 하이힐을 신은 듯한 걸음으로 테이블에 차며 윌라드의 주문인 진한 커피 다과 등을 놓고 나감 카미유는 나가기 전 그녀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냈고 여자는 인상을 팍 구기며 손 대지 않고 찻숟가락을 빙글 돌렸음 '능력자...' 한갓 차 나르는 비서까지도 능력자임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걸로 카미유는 말 한마디 않고 지금 이 곳은 단단히 무장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름아닌 회사가 습격의 범인을 잡지 못하고 놓쳤기 때문이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음. 제법임. 의사라곤 하지만 윌라드에게 이런 카미유의 모습은 오히려 외교관이나 정치인과 비슷하게 비침. 껄끄러운 상대임.
카미유는 자리에 앉아 잠시 얼마 뒤에 있을 해외봉사활동과 그가 향할 제 3세계가 의약품과 일손의 부족으로 지금 이순간에도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등을 이야기함. 제 3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윌라드에게도 관심있는 분야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목적을 따로 두고 핵심만 요리조리 피하는 것 같은 대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음. 카미유 말에 대강 맞장구친 윌라드는 이미 마시기 알맞게 식어있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 마치 뜨겁다는 듯 뜸을 들이며 천천히 들이킴. 이쪽을 보고 있는 카미유의 웃음이 짙어짐. 평소 빙빙 꼬는 듯한 대화나 품위있는 언어 유희를 기꺼이 즐기는 그지만 이렇게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말리는 상황은 윌라드의 프라이드에 거스르는 것임. 마침내 카미유가 졌다는 듯이 눈꼬리를 내리며 웃음. 마치 눈웃음을 치는 듯함. "회담은 재개되어야 합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중단되었으니까요. 덧붙이는 의사의 목소리엔 어떠한 사심도 음모도 없는 듯했음 윌라드는 티나지 않게 고소함 애초에 그 회담을 중단시킨 것은 누구던가. 침입자 하나를 막고자 헬리오스의 거의 모든 능력자들과 대표적인 실력자까지 동원했음 다소 소동이 일긴 했지만 카미유가 얌전히 건물에 머물러 있었다면 회담이 끝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터임. 실제로 회담 내내 태연히 대화를 주고 받던 그가 무슨 소리가 들린다며 뛰쳐나가기 전까지 명왕과 브뤼노는 아무런 위협요소도 느끼지 못했다 했음. 히카르도에게 뭔가 말하려 했었다는 주변의 진술과 달리 명왕의 말 한두마디에 금방 물러난 것도 마음에 걸림. 이건 쇼임. 제 세력과 헬리오스까지 총동원한 거대한 쇼. 마찬가지로 이런 보여주기에 능숙한 윌라드 눈엔 의사가 끄는 꼭두각시의 실 끝이 분명하게 보임.
그것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윌라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던짐. "침입자의 정체에 대해 알고 계시는 듯 합니다."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만들어보임. "히카르도 바레타. 옛... 친구입니다. 지금은 틀어져버렸지만.." 그가 제 목숨을 노릴 줄이야. 데샹은 자못 침통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음. "본사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면목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가 저를 해칠 리 없다는 생각에 그만 경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흐르는 듯 이어지는 인형연극. 윌라드는 비죽 웃음이 새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감춤. 윌라드의 생각이 맞다면 데샹에게 지금 이 상황은 상당히 유감일 거임. 히카르도가 이쪽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을 압축하기 위해 의사의 대외적인 활동을 거진 줄이고 해외파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음 당연히 데샹이 외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회담날 히카르도도 움직일 것이 뻔함 이 일을 위해 히카르도의 감시자인 다이무스도 빼놓았고 헬리오스에는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떡밥을 미리 뿌려두었음 저와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회사가 암살자를 잡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의사는 손 하나 대지 않고 히카르도를 처리할 수 있었음.그러나 일이 틀어져 헬리오스는 히카르도를 죽이지 못하고 풀어줬음 다이무스를 책망하긴 했으나 오히려 이 편이 헬리오스에게 도움이 되는 수가 아니었을까 함 의사의 지금 태도를 보면 히카르도의 시체를 가져다 주었다 한들 데샹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큼 오히려 제 친구를 죽였다며 비난의 화살을 이쪽으로 돌리고 자신은 고결한 피해자로 남겠지.
과거 데샹과 바레타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었음 그것은 지금 데샹의 위치를 송두리채 흔들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라 그는 바레타를 처리하고 싶어함. 그러나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바레타의 옛 친구라는 위치 때문에 제 손으로 그를 없애긴 힘들고 남의 손을 빌린다 마침내 눈에 거슬리던 옛 친구는 사라지고 그를 살해한 비정한 조직과 친구를 잃은 가여운 의사만 남음 완벽한 시나리오임. 흠 잡을 데없이 완벽함. 윌라드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느긋하게 웃음. 기왕 손을 잡을 상대라면 벽창호보단 야망가 타입이 좋음. 그 가소로운 욕망마저 손아귀에 쥐고 삼켜버릴 수 있을 테니. 의사는 이 시나리오를 포기할 수 없음. 그와 친분 관계를 놓을 수 없는 헬리오스와 마찬가지로. 회담은 다시 시작될 필요가 있음. 둘의 이해가 일치하니 이 후의 대화는 그저 구색 맞추기와 시간 끌기의 다른 말이었음. "회담 날짜는 차후에 다시 잡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마침내. 목적에 도달했음. 의사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음. 배웅하려는 데샹을 정중하게 거절한 윌라드는 건물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며 생각함. 일단은 히카르도 바레타의 확보가 우선임. 그를 잡는다면 데샹의 약점을 틀어쥘 수 있을 거임. 이왕이면 저 의사가 바라마지 않는, 살아있는 그대로의 친구를.
히카르도는 잠에서 깨어났음 머리가 깨질 거 같음 여긴 어디고 난 또 누구야..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자기가 누워있는 곳이 차가운 길바닥이나 술집의 딱딱한 탁자가 아니라 푹신한 이불 위라는 것을 깨달음 그러고보니 지난밤 이런저러한 것들이 다 빡쳐서 술을 진탕 마신 기억이 남 그러다가 그녀석이 찾아왔고.. 히카르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더듬음. 자신은 화를 냈음 대체 저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알 수 없는 행동들을 계속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소리를 질렀음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놓아두든지. 어떻게든 하라고 악을 내질렀음 입으로는 밀어내라고 하면서도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던 건 술기운 탓이었을까. 히카르도는 괴고 있던 손에 얼굴을 더 깊게 묻음 그렇게 되는대로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는 자신을 보고 그 녀석은 어떻게 했던가. 히카르도는 잠시 행동을 뚝 멈춤. 그래, 그 녀석은
준다고 했음
아. 아아. 머리꼭지까지 퍼붓듯 들이부은 술 때문에 그 날 기억은 전체적으로 흐릿하나 딱 하나 또렷히 기억남. 차가운 밤바람에 얼어있던 귓전을 때리던 단호한 목소리. 준다고 했음. 나에게. 내가 원하던 단 하나. 춥지도 않은데 얼굴을 묻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려옴. 이거 뭐지?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거의 동년배나 다름없는 그 녀석에게 달라고 조르고 마치 어린애가 떼를 쓰는 것 마냥-, 그렇지만 준다고 했어. 분명히. 술기운에 잊혀지지도 않고 그렇게. 분명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음. 히카르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가 누워있던 방을 두리번거림 홀든 가 저택. 자신이 요 근래 계속 지내왔던 이글의 방. 가구 배치도 놓여진 물건도 변한 데 없이 그대로임. 아직 이른 시간인지 새벽이 파랗게 창을 물들이는 것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던 히카르도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몸을 일으킴. 술집에서 쓰러졌던 자신이 이 방에 들어와있다는 것 자체가 어젯밤 일이 환상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부족함. 이 것보다 더 현실적인, 손에 잡히는 증거가 필요함. 그걸 보고 싶음. 히카르도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바로 옆 방 문 앞에 섬.
이미 히카르도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다이무스는 천천히 고개를 듬 자기 방문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짐 '일찍 일어났군.' 히카르도가 지난 밤 마신 술의 양이나 평소 기상시간에 비해서도 이른 시간임. 익숙한 손길로 한 손만으로 붕대에 단단히 매듭을 지으면서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노크를 하거나 방 안으로 걸어들어오길 기다림 그러나 히카르도는 둘 중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방 밖에 있을 뿐임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은 걸로 보아 다른데 가지 않고 거기 계속 서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있는 내색을 하지 않는 히카르도를 잠시 그대로 뒀던 다이무스는 한숨 비슷한 것을 쉬며 몸을 일으켜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염 바로 그 앞에 서 있던 히카르도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임
어떻게 말붙여야 하나 고민하던 상대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자 히카르도는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함 다이무스는 한마디함. "비켜라. 걸리적거린다." 그 말 그대로 히카르도가 방 앞을 꽉 막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음. 그렇다쳐도 평소같으면 발끈해서 한 마디 했을 히카르도가 왠일로 군말 하나없이 순순히 뒷걸음쳐 물러남. 아직 술이 덜 깼나보군. 그러니 그런 짓도 했지. 다이무스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림 히카르도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끙 소리를 내며 그대로 서 있음 "너 그... 아니다." 그러고선 입을 꾹 다물고 다이무스 검 손잡이 끝만 노려보는게 오늘 내로 말 못할 거 같음 뭐라 채근하는 대신 다이무스는 그대로 히카르도를 가만히 쳐다봄 "...젠장..." 히카르도는 작게 욕지꺼리함. 에라 모르겠다. 거의 내던지듯 할말을 내지름.
"너 어젯밤 일..." 다이무스는 히카르도를 계속 보고 있음 히카르도는 마른침을 삼킴 "그거 진심이냐..?" 다이무스의 기억이 맞다면 히카르도는 어젯밤에도 저 얘길 물어봤음 그때 자신은 분명히 대답했음 다른 이는 어떨지 몰라도 저 다이무스 홀든은 그런 얘기 하나 허투루 뱉는 인물이 아님 대체 무슨 다른 뜻이 있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다이무스는 딱 한번만 더 말해주겠다고 생각함 다음에도 물어본다면 답할 가치 없는 질문이라 일축하고 무시해버려야겠군. 그 점을 분명히 하면서 다이무스는 담담하게 말함 "너를 돕겠다고 했다."
히카르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잘게 흔들림. 입술을 단단히 문 그는 바람처럼 희미한 목소리를 냈음 "...어째서지?" "너는 그걸 원하고 있고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 도울 수 있다,라.. 히카르도는 조금 침착해진 태도로 다이무스의 말을 반복함. "도울 수 있어 도울 뿐이다, 그럼 이 행동에 너의 의지는 없나?" 이놈은 지금 지가 뭔 말 하는지는 알고 말하나? 어처구니가 없어진 다이무스는 반쯤 짜증을 내며 대답함 "당연한 소릴 하는군." 아니 그럼 하기 싫은데 할 수 있으니까 걍 돕겠냐 싶음 더군다나 이런 일을. "내 행동은 모두 내 의지다. 너는 감히 홀든에게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뭐?" 첫마디에 차갑게 표정을 굳혔던 히카르도는 이어지는 다이무스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지음. "그..러시겠지." 히카르도는 다시 말을 반복함. "네 의지다 이거지?" 이 모든 행동, 나에게 주는 모든 것들이? 계속 반복되는 멍청해보이는 대화에 다이무스가 대놓고 인상을 구기든 말든 히카르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보임. "너 아직 술이 덜 깼나?" "아니다." ".... 흠..." 다이무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히카르도의 위 아래를 쭉 훑음
멀뚱하니 서 있는 히카르도는 오늘따라 어딘가 한쪽이 풀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이무스는 아직 남은 취기 탓이려니 대충 넘김 혹은 진짜 믿기지 않아서 어린아이들처럼 치대는지도 모름 어느 쪽이든 다이무스에겐 상관없음 그보다 둘이 신경써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음 다이무스는 가던 길을 마저 가며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히카르도를 재촉함 "나갈 준비해라." "...어디를?" "헬리오스다." "?!" 그 말을 들은 히카르도는 마치 다짜고짜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음 "너 분명 날 돕겠다고...!" 물론 다이무스에겐 아까 대화의 연장선상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음 다만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하긴 함 그리 생각한 다이무스는 화를 내거나 무시해버리는 대신 무덤덤하게 설명함 "일단 회사로 가서 보고해야 한다." 뒷맛이 안좋았던 히카르도와 달리 데샹은 전 소속인 카모라와 관계가 좋음 거기다 이번 회담에서도 보였듯 헬리오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지금은 어둠의 능력자 소속이고. 그 말은 데샹은 자기가 원한다면 저 세 조직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거임 다이무스나 히카르도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가장 큰 능력자 조직 셋을 적으로 돌리고 도망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움 장남인 제가 달아나면 남은 가문사람들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고.여기서는 일단 회사의 일원이라는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 중요함 거기다 닥터 데샹에게는 분명 수상한 점도 있음 그 부분을 잘 파고들면 회사를 배신하지 않고도 히카르도를 돕는 것이 가능함 이런 일은 빨리 행동하는게 좋음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큭..." 정황을 파악하고도 히카르도는 다이무스를 계속 쳐다봄 다이무스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자신을 회사로 끌고가기 위한 사탕발림인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 같음 할 말은 충분히 했음 그렇게 생각한 다이무스는 다른 말 덧붙이지 않고 히카르도가 결정하길 기다림 고민하던 히카르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임
자동차는 금방 준비되었음 차 뒷자석에 나란히 앉아있던 히카르도는 그제서야 붕대를 발견한 것인지 제 옆에 놓인 다이무스의 손을 얼른 잡아챔 "다쳤나? ...그때?" 정신없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기도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나 봄 다이무스는 제 손을 잡은 히카르도를 가볍게 떨쳐냄 그다지 힘이 실려있지 않았던 손길은 금세 떨어짐 "별 것 아니다." 말 그대로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검 손잡이에 쓸려 회복이 더뎌지는 것이 거슬려 붕대로 감아뒀을 뿐 이제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음 애초에 신체강화 능력자인 다이무스는 이 정도 상처가 엄청 대수롭고 그러지 않음 이보다 더 한 경우도 많이 겪어봤음 당사자인 다이무스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지만 사실상 저 때문에 입은 상처라 못내 신경쓰이는 듯 히카르도가 드문드문 제 옆에 도로 놓인 손을 흘끗거림 아까는 배신이냐고 화냈다가 지금은 걱정이나 하고 있고 감정 변화가 엄청 다양한 놈임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기보단 성격인 거 같음 흔히 지껄이던 "피가 뜨거워지는군"은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임 묘하게 신체접촉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했고. 어제 일의 연장선상인가... 문득 생각났던 다이무스는 창 밖을 보고 있는 히카르도에게 "어제 일 기억나느냐"고 물어봄 히카르도는 고개를 기웃함 어제 일? 뭐냐 너가 나 돕겠다고 말한 거? 기억 못하는군. 다이무스는 고개를 저음 "아니다. 기억 안난다면 되었다."
이른 아침이라 헬리오스는 한산했음 차에서 내리자 근처에 서있던 사이퍼 몇명이 헛숨을 들이킴 히카르도를 알아본 것이겠지. 당장 회사로 쳐들어와 의사를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린 인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회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는 것에 경악한 그들은 히카르도 바로 옆을 걷고 있는 인물에 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뜸 "BLADE, 그는..!" 건물 문 앞을 지키고 있다가 둘이 들어오는 것을 본 사이퍼 한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다이무스는 덤덤하게 자기가 모두 책임질테니 길이나 열라고 명령함 문 열기를 주저하면서도 막상 다이무스나 히카르도 앞을 막아서는 사람은 없음 다이무스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고 오히려 옆을 걸으면서도 공격받는 것이 아닌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히카르도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음 회사 입장에서 자기는 다짜고짜 헬리오스에 공격을 퍼부운 테러리스트일텐데 이렇게 길이 쉽게 뚫리는 것을 보니 다이무스가 회사에서 얻고 있는 신뢰가 대단한 것처럼 보임 하기사 애초에 배신할 것이 분명한 자신의 감시 역할을 맡을 정도니 어지간하겠어. 둘은 빠르게 걸어서 마침내 명왕의 집무실 앞에 도착함 막 노크를 하려는 찰라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림. "명왕은 출타중이십니다, BLADE." 윌라드의 냉정한 눈동자가 다이무스와 히카르도를 차례로 훑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제 집무실로 가지요."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이사는 제 뒤를 흘끗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말을 더함.
윌라드의 책상 앞에 서서 다이무스는 그간의 자기가 겪었던 일이나 생각했던 것을 보고함. 윌라드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의문나는 것들에 대해 추가로 질문을 던졌음 다이무스는 침착하게 대꾸함 상사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의 다이무스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낮고 억양이 없어 단조로웠음 가끔 말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침묵을 지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말투는 그닥 빠르지 않아 차분하고 망설임이 없었음 바로 곁에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자연스럽게 대화에서 열외된 히카르도는 침묵을 지키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음 대화 중간중간에 윌라드가 감추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짐 마치 뭔가를 재는 것처럼.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선 그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할 수도 없음.
"그렇습니까." 마침내 윌라드가 말함. "어떻습니까, MERCILESS?" 히카르도는 굳은 얼굴로 대꾸함. "모든 것은 BLADE 말 대로다. 카미유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그를 제지하기 위해 기꺼이 협력할 것이다." 협력, 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는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음 윌라드는 깍지를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띄움. "좋습니다."
그 후 대화할 것이 좀 더 남았다며 히카르도를 집무실 밖으로 내보낸 둘은 대화를 계속함 히카르도는 밖으로 나와 방 옆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음. 협력이라. 윌라드 앞에서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히카르도는 카미유를 제지하는 일에 협력하고 싶은 마음은 없음. 협력이 아님. 이건 줄곧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임.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카미유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전부터 자신은 이미 제 친구가 예전에 생각하던 자랑스럽고 미쁘던 친구가 아님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름.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얽혀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다시 한번 카미유를 만나고 싶음. 새삼 그가 주던 유대가 그러워서가 아님. 막을 내린다면 그에 단단히 개입되어 있는 자신이어야 할 거라고 생각함. 그리 생각하면서 히카르도는 자기 마음 속이 생각보다 훨씬 담담하고 고요해서 놀람.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발판을 얻었기 때문일까.
"알겠습니다. 그럼." 다이무스는 짧게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옴 나름대로 쓸만한 패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윌라드의 태도는 의외로 순순했음 사실 다이무스는 최악의 경우 패가 먹히지 않아 히카르도는 붙잡히고 자신의 지위가 강등될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음 실현가능성은 낮았지만. 히카르도와 그의 옛 친구가 각각 어떤 소문에 휩싸여 있는지를 고려하면 영 가능성 낮은 이야기는 아님. 그러나 윌라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서 히카르도의 안전과 카미유를 지원할 원조금에 대해 다시 검토해볼 것까지 약속했음. 일이 지나치게 잘 되어감. 실상 다이무스가 바랐던 것보다 훨씬 좋게 돌아가고 있음. 윌라드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거나 그와 의사 사이에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임 어쩌면.. 회사 내에 수상한 인물은 윌라드를 말하는지도 모름. 늘 괄목할만한 활약을 보여주면서도 회사의 2인자에 머무르는 인물. 가지고 있는 야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텐데도. 평소 같은 회사의 일원으로서 윌라드를 존경하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로 다이무스는 마음을 놓지 말자고 생각함. 그렇다 해도 지금은 윌라드의 뜻모를 호의에 기대어 일을 진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임
문 밖으로 걸어나오자 소파에 앉아있던 히카르도가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옴 "대화는... 잘 끝났나?" "그래." 히카르도가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함 그 얼굴을 보고 다이무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음
얼마 지나서 히카르도와 다이무스는 비밀리에 명왕과 브뤼노를 포함한 회사의 중역들을 만나게 됨 물론 윌라드의 주선이었음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와 짧막하게 둘을 소개한 이후로 윌라드는 철저히 방관자의 자세를 취함 마치 둘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시험하기라도 하는 양으로. 그가 명왕에게 이 사태에 대해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번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윌라드는 책임질 생각이 없어보임 애초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지. 히카르도는 조금 긴장한 걸음걸이로 걸어가 저를 살피듯 주목하고 있는 군상들 앞에 섬. 등 뒤에서 익숙한 묵직한 발소리가 멈추는 것이 들림. 그것만이, 다만 그것만이 자신을 이 자리에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게 하는 누름돌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 말문이 막힌 건 이번이 세번째였음. 질문을 던진 이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빙글 흔드는 걸 보면서 히카르도는 제 입술을 깨뭄. 그래서 닥터 카미유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뭐고 이 일을 통해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행보는? 여름날 장대비 쏟아지듯 제게 떨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을 히카르도는 거의 제대로 답하지 못했음. 사람들이 작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림. 아직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사내를 둘러싼 온갖 소문들을 모두 근거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아니라고 히카르도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음. 차라리 속셈이 있어 감추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음. 정말 한심하게도 자신은 정말... 카미유 데샹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음. 그가 가진 목적, 속셈, 음모... 누구보다도 서로 잘 안다고 자부했던 친구인데도,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가 저에게 보여준 모든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았음. 이 손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 그 모든 목적과 음모는 기실 히카르도 자신의 인생을 쥐고 흔들고 있었음에도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자신만 홀로 어리석었음. 눈 앞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납득시키고 믿게 할만한 머리터럭만큼의 진실도 쥐고 있지 않는 자신.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를 잘 알고 있으며 자기가 돌아갈 곳은 거기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음. 모래로 지은 성. 분명 그것을 만든건 친구지만 그 위를 그럴싸하게 장식한 것은 자신의 무신경함과 어리석음이었음. 이제 미루고 못본 체 해두었던 밀물이 그 세월만큼이나 거세게 돌아와 제가 지은 모래성을 후려치는 것을 히카르도는 망연한 얼굴로 응시했음 더없이 안전한 건물 안에 들어와 있지만 히카르도는 마치 발 밑이 금방 꺼져버리는 늪과 같다는 생각을 함. 히카르도는 버릇처럼 주먹을 꾹 쥐었다 폄. 그의 표정을 쓱 살핀 명왕은 잠시 휴식시간을 갖자고 말함. 히카르도는 도망치듯 회의장을 뛰쳐나와 화장실로 향함.
사방이 막힌 공간으로 들어오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음. 털썩 소리를 내며 뚜껑 위에 걸터앉은 히카르도는 차가운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함. 뭐가 그를 제지하는데 협력이고 뭐가 내 손으로 막을 내린다였나. 결국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무런 소용도 없이 시간만 버리고 있을 뿐임. 저를 바라보는 불신과 의혹의 눈길들. 그들 탓이 아님. 윌라드나 명왕은 자신에게 이미 충분한 기회를 주었음. 아무도 없이 혼자서 카미유의 행적을 쫓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임. 그리고 자신은 그걸 끔찍하게 망치고 있음.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결국 난 이런 인간이고, 영원히 카미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히카르도는 주먹으로 옆의 벽을 후려침. 조용한 화장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감.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림. 누군가 들어왔음. 날카로운 구둣발소리가 매끈한 타일바닥을 부지런히 밟는 소리가 들림. 다이무스의 것보다 산만하고 둔함. 귀에 조금 거슬릴 지경이였지만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히카르도는 금세 발소리에 신경을 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저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생각하던 히카르도는 갑자기 세면대 물소리에 섞여 대화가 분명하게 들려오자 숙였던 고개를 듬. 익숙한 목소리. 아까 저에게 질문했던 인물들 중 하나인것 같음. 그들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
그 치는 영 수상하던걸.. 나 같으면 그런 제안은 거절하겠어. 아예 닥터 데샹에게 그를 데려가는 것도 좋겠지... 저들에게 화는 나지 않았음. 다만 저런 인식밖에 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답답했을 뿐. 계속해서 그들은 세계 정세와 헬리오스의 입지에 대해 이야기했음. 하지만 그 BLADE의 제안이라.. '...뭐?' 히카르도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뻔한 것을 간신히 다스림.
맨처음 저를 이곳까지 데려와 소개한 것은 윌라드임. 주로 질문을 던지고 상황을 정리한 건 브뤼노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것은 명왕과 다른 중역들. 다이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 회의장 안에 들어온 이후로 히카르도는 한번도 다이무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음. 들었던 것은 그저 뒤를 따르는 발소리 뿐. 등 뒤를 지키던, 묵직한 구두소리. 아. 그는 계속 뒤에 서 있었음. 윌라드나 다른 사람처럼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제 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거기 서 있었음.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뒤에서 변명도 첨언도 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 있었음. 그 모습을 모두들 다 보고 있었는데. 제 이름도 가문도 회사에서의 위치도 뭐 하나 감추거나 꾸미지 않은 채로 이번 일이 잘못 되었을 때 제가 받을 리스크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이 깊은 그이니 제 행동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닐텐데도 그는 거기 서 있었음. 여기 제 뒤에.
회의는 끝났음. 어딘지 모르게 미덥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잠깐 휴식시간을 가지고 난 다음 방 안으로 들어온 히카르도의 태도는 전에 없이 분명하고 단단했으나 그조차도 세력간 정치와 계산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을 완전히 납득시키기는 어려웠음 거기다 히카르도가 카미유의 계획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건 사실임 히카르도가 쥐고 있는 실낱같은 정보로 그들을 완벽하게 우방으로 만드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했음 결국 회의 결과 윌라드가 사전에 약속했던 히카르도의 안전은 보장하기로 했지만 지원금 보류나 계획 저지 등은 앞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애매한 말만 들었을 뿐임. 이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발을 탕탕 구르고 저를 믿어달라 소리를 지르고 제 감정을 못이겨 씩씩거리기까지 했던 히카르도는 완전히 지친 걸음걸이로 회의장을 빠져나왔음 가뜩이나 하루종일 질문에 시달리고 답지 않은 열변까지 토해내 힘들어 죽겠는데 앞에 가는 놈은 매정하게도 저의 그런 사정은 살피지 않고 원래 걸음 속도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림. 거기다 대고 기다리라느니 힘들어죽겠다느니 하는 말은 자존심에 죽어도 꺼내지 못할 말이고 거기다 오늘의 성과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히카르도는 투덜거리는 대신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다이무스의 뒤를 따라감.
앞서 걷던 다이무스는 조용히 멈춰서서 뒤를 돌아봄. 입다물고 따라오던 히카르도는 뭔가 싶어서 같이 멈춰섬. 저를 빤히 보는 어두운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아보이기도 하고 그저 평소처럼 침묵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 눈빛이 저를 책망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 자신의 심정 때문이겠지. 결국 이것밖에 안되나. 히카르도는 조용히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되뇌임.
"날 책망해도 달게 받겠다. 이건.. 나의 실수다." 결국 아무것도 몰랐던 것. 제 생각에만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한 것. 다시금 이를 꾹 악문 히카르도를 보는 다이무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음. 차라리 뭐라도 한소리 거하게 얻어맞고 싶었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침묵만 지키자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임. 근데 자기가 잘못한거라 뭐라 말도 못하겠음. 자기가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한심함. 또 다시 제 속으로 꺼멓게 가라앉던 히카르도는 다이무스가 불쑥 한마디 던지자 멍청한 표정이 됨.
"그날 밤 일 정말 생각이 안나나?"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래 너가 나한테 내편 되겠다고 얘기한 일? 그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혹시 그 얘기 무르기라도 할 생각이면... 아연한 얼굴로 머릿속에 빙빙 떠다니는 말 중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히카르도를 가만히 쳐다보던 다이무스는 히카르도의 멱살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김 어...어? 정신 못차린 히카르도는 질질 끌려옴 다이무스는 그대로 히카르도에게 키스함 "....?...!!" 놀라서 벌어진 입안을 혀로 쓴다음 떨어지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도 잊지 않음. 당한 날의 당황이며 행동의 뜻이야 어찌됐든 다이무스는 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 남자니까ㅇㅇ 아마 그날 밤부터 벼르고 있었을 거임 그날... 밤? 히카르도는 갑자기 입맞추는 다이무스에 당황하고 순간적으로 제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또 당황함 "오늘 일은 이 정도라고 해두지." 아 그날 밤의 나는 뭘 한 것인가 그걸 저녀석은 또 갚은 거고 저 말은 또 무슨 뜻...????...??!!!! 완전히 혼란에 빠진 히카르도가 멍때리는 사이 다이무스는 방금 도착한 자동차에 몸을 싣고 잠시 후에 허둥지둥 저를 따라오는 히카르도를 보며 피식 웃음.
히카는 카미유 죽이고 싶어서 이를 가는데 카미유는 ㅎㅎㅎ 하는 느낌일 거 같고 별 신경 안 쓸 거 같은 그런 삼각관계가 보고 싶쟝
여튼 바레다무가 풋풋하게 썸타다가 둘이 같이 전투 나갔는데 다무 엄청 다쳐서 다 죽어가는 거 보고 싶쟝.. 히카는 자기가 옆에 있었는데 다무 그렇게 된 거 보고 완전 패닉 그 근처에 있던 몹 다 쓸어버리고 늘어진 다무 끌어안고 벌벌 떨고 있는데 카미유가 나타남.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카미유는 대충 히카 소식 알고 있었을 거 같음 걔 요새 헬리오스랑 같이 다닌담서? 대충 들은 걸로 미쉘 찔러봤는데 미쉘이 눈에 띄게 억지로 무관심한 척 해서 실실 웃었음 뒤로 꾸미고 다니는 일이 너무 뻔해서.. 여튼 히카가 덜덜 떨고 있는데 귀에 낯익은 구두소리 들려서 고개 들어보니까 카미유가 딱 있음. 카미유는 처음에 다 알면서도 리키 안녕? 거기 들고 있는거 뭐야? 하고 물어봄 히카는 어떻게든 다무 뒤로 감추는데 카미유는 어차피 죽은거 감춰봤자 뭔 소용이냐고 속으로 비웃음잼
히카는 막 카미유 꺼지라하고 너랑 지금 얘기할 기분 아니라고 나중에 박살내준다고 존나 협박하는데 카미유한테는 그게 허세로밖에 안보임. 까말 허세지 뭐임ㅋ 지가 뭐 어쩔꺼야
카미유가 아 다쳤어? 치유해줄까? 해서 히카 존나 솔깃하는데 카미유가 그 다음에 아니다. 이미 죽었네. 히카 절규하고 막 악쓰는데 카미유가 딱 한마디함 살려줄까? 히카는 이게 개소린거 아는데 존나 솔깃하는 생각 들어서 자괴감듬. 됐다고 꺼지라고 막 소리지르는데 목소리에 이미 악이 줄어들었음 카미유는 그거 보고 또 웃긴다고 생각하고 히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어깨 잡으면서 속삭임 내가 알아서 해줄게 내 능력 알잖아..?
악마에 홀렸는지 어쨌는지 제정신이라면 절대 다시는 카미유가 말하는대로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히카는 다시 카미유 말에 넘어가서 다무 시체 내줌. 솔까 카미유는 존나 싫지만 그 좆같은 실험 이미 한번 해봤고 나름 성공했잖아? 히카로썬 겨우 얻은 안식처를 이렇게 놓치고 싶지 않았음. 그 결과가 어떨지 반쯤은 알았지만.. 다무가 아직 죽은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카미유가 광충을 잘 써주면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음. 필사적으로. 실은 이미 죽은 거 알았는데. 카미유는 히카 머릿속을 들여다보듯 알 수 있음. 너는 왜 이렇게도 유약한지 사랑스러운 괴물이야.
다무를 되살리는 일주일동안 히카는 한번도 카미유 연구실에 오지 않았지만 7일째 되는 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다무 넣어놓은 유리관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음. 잠자는 것 같이 감긴 두 눈에 공기방울이 지나갈 때면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 달려와 부둥켜 안은 저를 보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주변을 더듬던 게 생각이 남. 히카르도는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계속 관을 들여다봄.
그리고 히카가 찾아온 그 시간에 관이 열리고 다이무스가 깨어난 건 카미유의 연출이었음 딱 그정도 시간으로 세팅해뒀지. 사랑하는 너를 위한 선물이야 카포.
식염수 안에서 깨어난 다이무스는 컥컥대면서 숨을 몰아쉼. 히카는 깜짝 놀라서 달려들어 다이무스를 물에서 건져냄. 다무는 쿨럭대면서 히카르도 너냐고 물어봄. 그 모습이 생전이랑 별로 변한 게 없어서 히카르도는 끅끅대면서 움. 카미유는 그 시간엔 윌라드를 만나고 있었지만 관 열리도록 세팅해둔 시간이 되면 후후하고 웃음. 제 친구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했으면 해서요ㅎㅎ 하면서 웃어서 윌라드는 거래만 잘 되면 상대는 별 상관없지만 이새끼 재수없네.. 함.
그렇게 깨어난 다무는.. 군데군데 기억이 비어있는 상태였지만 그거 빼면 평상시 다무랑 별 차이없었음. 적어도 히카르도는 그렇게 느낌. 자기 죽었을 때 기억은 못하는데 그 전에 안타리우스 잔당 몇을 베었고 뒤를 돌았는데.. 정도까지는 기억함. 히카는 그래도 감사함. 이제 다시는 못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 움직여주는게 너무 고마움. 눈 앞에 보이는 다무는 너무 완벽해서 이게 인간인지 저처럼 살아움직이는 시체인지 구분이 안감. 히카는 생각하고 싶지 않음. 일이 왜 이렇게 되었고 여기는 어디냐고 묻는 다무한테 히카는 너가 심하게 다쳐서 치료받으러 데리고 왔다고 함. 다무는 일단 생각중인지 말이 없음. 히카가 그거 갖고 불안해하니까 머리 쓱쓱 쓸어주면서 알았다 함.
그날 밤 늦게 돌아온 카미유는 새삼스럽게 관이 열렸냐고 물어봄. 다무한테 예의 차려서 자기 소개한 다음에 다무 진찰함. 맥박도 정상이고 딱히 이상은 없네요. 치료가 잘됐군요 함. 히카는 옆에서 카미유가 이상한 말 하지 않나 눈에 불을 켜고 있다가 카미유가 말하는데 끼어들어서 그래도 네가 다 나을 때까지 얘가 경과 지켜볼 거라고 말함. 카미유는 그 말 듣고 대충 눈치까서 그러면 요양 잘하시라고 다정하게 말하고 나옴. 나오는 길에 따라나온 히카한테 언제 말할꺼냐고 갈궈두는 것도 잊지 않음.
그 후 바레다무는 꿀같은 시간을 보냄. 다무 몸 상태 다 나을 때까지 회사고 은행이고 얘기하지 않기로 하고 둘이서 지내니까 뭐 딴거 있겠음? 스킨십 진도도 은근 나감. 떡은 아니고.. 다무는 히카가 옛날엔 까칠하고 시비걸고 안달복달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덜 까칠하고 더 시비거는 거 같고 더 안달복달해서 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그냥 말 안함. 몸 상태 좋아지면 회사에 보고하고 은행으로 근무하고.. 하는 생각을 좀 함. 그리고 카미유랑 히카랑 사이 안좋았던 거 같은데 또 뭔 약점 잡혔나 생각해보기도 함.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은데 카미유는 히카 나름 꽤 좋아함. 이렇게까지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장난감 친구가 잘 없기도 하고 자기 방해하고 복수하려고 돌아다니는 것도 꽤 귀여움. 마치 귀여워하던 강아지가 커서 깡깡거리고 달려드는 걸 보는 느낌일까.. 쨌든 카미유는 공감능력?? 같은게 좀 부족할 거 같은데 그 어릴 적에 히카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연기하고 공들인 거 생각해보면 히카가 꽤 애틋하기도 하고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럼. 특히 이번엔 약점 하나 거하게 잡아서 더 마음에 듬.
다무한테는 신기할 정도로 별 감정없음. 내꺼 뺏어갔다는 생각도 잘 안들고 그냥 음.. 기르던 개가 쥐같은 걸 물어와서 자기꺼라고 으르릉대는 걸 보는 느낌일까.. 뺏어서 버리려고 들면 언제든 그럴 수 있는데.. 근데 그 쥐가 홀든 장남.. 이거 땡잡은 건가? 하는 아리송한 느낌. 물론 책 안잡히게 경계는 해야할 상대지만 그것도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음.
히카르도는 카미유가 존나싫음 개싫음 좆같이 싫음. 저 얼굴이랑 연변에 넘어가서 몸도 마음도 다 바치고 누명 쓰고 잘 살던 조직에서 내쫓긴 거 생각하면 밤에 자다가도 피가 마르쟝 ㅇㅅ"ㅇ
죽이겠다고 이갈고 덤벼들어도 중요한 순간에 약해지는 건 히카르도가 그 사람 파악하는 게 좀 모자라서 아직도 얘 얼굴 보면 나한테 그렇게 나쁜짓한 새끼가 맞나?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감쪽같이 구라를 치지? 하는 생각이 들어가서 그럼. 그리고 카미유의 존재 자체가 주관적으로 나름 만족스러웠던 어린시절이랑 결부되어 있어서 씨발.. 씨..씨발..ㅠㅠㅠ 하는 느낌이라서 그럼. 히카르도한테 카미유는 존나 이해할 수 없는 인종임. 개새끼긴 개새낀데 히카르도 상식 안에서는 이새끼가 이렇게까지 개새끼일리가 없어 or 이런 개섀끼가 존재할리가 없어 하는 느낌이 공존함. 뭐 글타구.
다무는 좋아함. 굉장히 좋아함.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걍 거기 놔둬도 안죽는데 뭔 개같은 오지랖이야? 했다가 참철 쳐맞고 아닥함.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몸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에 존나 찡했음. 보통사람이라면 방금 궁 써놓고 뭔 개소리냐는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당시 히카는 따뜻함에 굶주려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관심을 감사하게 받아들임. 은혜갚음 됐고 재대로나 살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따라다니고 잡일이랑 자잘한 전투 처리해주다가 눈이 맞았음. 출신성분이 성분이라 섹스 쪽은 궁하지도 각별하지도 않았는데 다무 상대론 16살 처녀애 대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나가서 다무는 사실 좀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튼 둘이 잘 살고 있었음. 히카는 처음으로 맺어본 정상적인 인간관계고 연인관계고 해서 이걸 놓치고 싶지 않았음. 그래서 그랬음.
다이무스는.. 히카르도가 좀 불쌍함. 처음엔 분명히 동정이었음. 가치관이라고 해야하나?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도와주는 뭐 그런거 있잖아. 귀찮은 일을 싫어하진 않지만 차기 가주니까 자기가 얽히지 말아야 할 일은 알고 있었음. 그래서 나중에 히카 정체 알고 히카가 은혜 갚자고 따라오는 게 좀 곤란했는데.. 보다보니까 귀엽고 그보다는 좀 더 가여워서 받아주는 관계가 됐음. 그러다가 히카 안에 있는 결핍이 되게 익숙한 거라는 걸 알게 되서 그렇게 차차 사랑에 빠지..려고 했을 때 이 일이 일어나서. 음.. 나중에 알고 다이무스는 엄청 화내고 그보다는 더 절망하지만 으음.. 여튼 이 정도.
카미유는 일단은 경계하고 있음. 자기 치료해준 건 고맙지만 다무는 호의가 반드시 순수하리라는 법도 없고 이건 사실상 빚에 가깝다는 걸 아는 어른이라서ㅇㅅㅇ 언제든 카미유에게 성의표시를 해야 할 날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아무리 봐도 자기랑 카미유는 접점이 히카 뿐인데 히카르도 말로는(아직 자세히 듣진 않았지만) 카미유랑 사이가 엄청 안좋단 말이지. 아무 일도 없이 자기를 구해줬을 리가 없쟝. 게다가 히카는 카미유랑 자기 눈치 슬슬 보면서 뭘 감추고 있고. 되도록 헬리오스 기밀이나 이런거 빠져나가지 않게 살피고 있지만 이놈의 연구실은 그 흔한 전화도 없고 자기 가솔들한테 연락도 안해주고... 그리고 히카 일이 없었어도 다무는 카미유 별로 안좋아했을 거 같음 평민 주제에 귀족처럼 눈웃음 실실치면서 물 밑으로 하이힐질 느낌이나 내고 말이야ㅡ"ㅡ
검서와 마서의 나라는 국경을 사이에 둔 이웃나라야. 말이 이웃나라라고 하지만 워낙 나라가 서로 떨어져있고 그 사이에 비경도 몇 있는 터라 별로 가깝진 않아. 애초에 세 아서가 대화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아발론과 모드레드 건 이후니까. 여튼 오늘도 마서는 그거 단절의 시대랑 관련있음? 아님ㄴㄴ해 하는 갤러헤드와 같이 갈꺼라고 생각했지 푸헹ㅋ 다녀와 하는 엘을 성에 두고 대충 마법 세력 기사 몇을 데리고 비경을 탐색하고 있었어. 가끔 요정들이 덤벼들긴 했지만 렙 1~2짜리들이니 데리고 온 기사들로도 충분했지. 그렇게 한 요정을 쓰러트렸는데 그 요정이 그만 각성을 해버려. 간단히 비경 걸으며 경험치를 얻을 생각이었던 마서나 마서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나 4성 이상이 없었던 터라 마서 일행은 금방 위기에 직면해. 틈을 봐서 간간히 얼마 안되는 힐을 밀어넣던 힐러기사가 쓰러지자 공격에 주력하던 기사들도 여지없이 흔들려. "크윽..!" 마서는 이를 악물어. 그래도 왕이라고 기사들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보호받던 아서는 얼마 다치지 않았지만 방금 전 각성 요정의 공격에 휘하 기사들은 다 나가떨어졌어. 저 상태에서 한 번만 더 공격을 받으면 저들은 정말 죽을꺼야. '기사는 인간이 아니다.' 멀린의 말이 떠오르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진 않아. 아니 사실은 도망치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만.. 마서는 쓰러진 기사들과 요정의 사이를 막으며 엑스칼리버를 발동해. 아직 슈퍼게이지가 다 차지 않아 제대로 발동이 되지 않아. 이러다가 원탁이 부서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서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선별검=전역재정"
아득한 굉음 속에서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렸어. 검을 끌어안듯 쥔 채로 마서는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네 요거 검서ㅇㅇㅇㅇ 그렇게 마서네를 애먹이던 것에 비해 각성 요정은 비교적 쉽게 사라져. 아마 이게 막타였나봐. 요정의 몸에서 아론다이트를 쑥 빼낸 란슬롯이 검을 털면서 저쪽을 향해 "왕이어, 괜찮소?" 하고 물어. '왕...?' 요정의 공격에 힘껏 부딪친 탓에 정신이 거의 반쯤 나가 있던 마서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쓰러진 요정의 잔해 뒤에서 빛을 등진 검서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어. "? 이상하게 싱거운데." 꼭 누가 치다 만 요정 막타를 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던 검서는 자기 검을 꼭 쥔 채로 검에 매달리다시피 기대있는 마서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어. "...마법의 파?"
검서와 마서는 모드레드 건이라던지, 여러가지로 안면이 있어. 서로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아예 모르는 사이보단 낫겠지. 아니 모르는 사이가 나았을지도. 검서는 쓰러진 각성 요정과 만신창이가 된 마서와 그 부하들을 돌아보더니 상황을 파악했는지 눈썹을 찡그려. "이 녀석은 그대의 상대였나? 미안하게 됐군." 미안이라니 마음같아선 생명의 은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쪽이 착각하고 있는데 일부러 이쪽이 그 사실을 알려줘 빚을 지는 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지. 엘 엄청 화낼껄. 상황에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란슬롯이 자기네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 아니냐고 빈정대는 것을 검서는 이미 거의 다 잡힌 요정이었다고 조용한 말투로 타일러. 이 상황 별로 안좋아뵈네... 마서는 비실 웃고 일어서려고 하다가 휘청해.
"어..?" 아무래도 기운이 빠진 모양이다, 고 생각한 마서는 다시 검을 고쳐잡고 그걸 지팡이 삼아 일어서려고 했어. 그러자 이번엔 손끝이 차갑게 식어 덜덜 떨려서 검자루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어. 어어..? 마서는 다시 한번 힘을 줘서 일어서려고 해. 순간적으로 발목 부분에 굉장한 통증이 느껴져 마서는 저도 모르게 윽 소리를 냈어. "마법의 파?" "이거 발목이 부러진 것 같구려." 검서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성큼성큼 다가온 란슬롯이 흠 소리를 내며 주저 앉아있는 마서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손이 떨리는 건 근육이 놀라거나 뭐 그런 이유겠지. 깨닫게 되니 벌써 발목이 욱씬거리고 아파와서 마서는 당황한 얼굴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는 제 발목과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다시 뒤돌아 나가기에도 까마득한 비경을 번갈아 봤어. 이 상황 진짜 안좋아.. 그런 마서를 눈치챘는지 검술의 성 제1기사의 눈매가 살풋 가늘어졌어. "어떻소, 왕이여. 이 참에 무력해진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내가 앞장서지. 란슬롯 경은 뒤에서 따라와." "알겠소." 란슬롯의 거대한 등 뒤에 업혀 이동하면서 마서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어. 란슬롯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제 끝장이다 싶었지만 검서는 그런 란슬롯의 제안을 비겁한 수라며 짧게 응축했어. 마서가 의외라고 느낀 것은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 것에 란슬롯이 별로 개의치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야. 아니 란슬롯은 오히려 기뻐보였어. 마치 처음부터 검서가 자기 제안을 듣지 않을 것을 알고 그 거절의 말을 듣기 위해 제안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그럼 마서 자신이라먼 어땠을까. 마서는 잠깐 생각했어. 비겁이고 뭐고 제 손으로 누구를 죽인다는 걸 마서는 생각도 해본 적 없어. 같은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지지만 자신과 검서는 분명 달라. 나는 뒤쳐지고 있는 건가.. 지금도 이런 꼴이고. 열 때문에 나른한 머리로 란슬롯의 어깨 갑옷이 움직일 때마다 덜컹덜컹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어.
피차 엉망이었던 첫 인상과 다르게 검서는 친절했으며 배려가 깊었어. 걸을 수 없는 마서를 제 기사의 등에 업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앞으로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도 설명해줬지. 지금 있는 곳은 긴 비경의 중간쯤 되는 지점으로, 마서는 자신들의 성에서 얼마 걷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AP 2에서부터 시작되는 제대로 된 비경길이 아니라 중간 AP 4 지점 정도에 그냥 쑥 끼어들었던 느낌이었나봐. 여튼 마서네가 온 길은 정식 길이 아니니 찾을 수 없고, 지금 와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오래 걸릴 테니 검서네는 아예 이 비경을 빠져나와서 마서의 성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빠를 것이라고 판단했고 마서에게도 그렇게 설명했어. 마서로서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잘부탁한다는 말이나 덧붙였지.
통신을 켜자 엘이 화면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물어봤어. <아서, 괜찮으냐? 요정은...> "네에.. 어떻게든." 엘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마서 옆에 앉아있는 검서와 란슬롯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어. <아서 너 (%)@))@_!!!!> 으악, 마서는 바로 귀를 틀어막았어. 그렇게 요정이 진정할 때까지 대충 네, 네 하면서 기다리자 이번엔 엘이 반쯤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몸 상태나 같이 갔던 기사들에 대해 물어봤어. 기사들이라.. 어느 정도 자신이 취할 입장-마서를 돕는다-이 확실해지자 검서는 쓰러져있는 마서네 기사들을 정리해줬어. 기사는 원래 카드 형식이니 덱에 잘 정리해넣으면 좋았지. 원탁은 아까 좀 부서져버려서 고치기 전엔 다시 기사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지금 몸상태로는 BC도 차지 않을 테니 오히려 잘됐나. 그치만 기네비어가 화낼꺼야. 처음 만나자마자 뺨을 주먹으로 치던 그녀의 기백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이빨 한 두개 정도는 각오해야하는 건가.. 마서는 새삼 집에 가기 싫어져.
이러저러한 사정을 설명하니 더 화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엘도 아예 지쳤는지 입을 다물었어. 이쪽을 빤히 보더니 <그래도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을 덧붙였지. 왕인 너를 잃는 것이 큰 손실이니라. 그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떤 굴욕도 괜찮겠지. 말을 잇는 엘에게 마서는 고개를 끄덕해보였어.
엘과 통신을 마친 마서는 문득 이쪽을 빤히 보고 있는 검서와 눈이 마주쳤어. 남과 시선을 곧바로 마주치는 것이 어색했던 마서는 상대가 불쾌하지 않게 느낄 정도의 선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검서는 그 사회적 합의에 동의할 생각이 없어보여. '무엇을 보고 있는걸까?' 줄곧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의 검서는 이쪽을 보고 있지만 마서의 눈이나 얼굴을 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검서의 눈은 그보다 아래, 마서의 팔과 손 끝을 보고 있어. 엑스칼리버를 든 쪽을. 갑자기 무기라도 휘둘러 업고 있는 란슬롯의 등을 베지는 않을지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쓸데없는 걱정이야. 마서의 엑스칼리버는 아까 무리하게 발동하려고 한 영향으로 부서져있는 걸. 지금으론 렙 1짜리 일반 요정에게도 별 신통한 데미지를 입히진 못할꺼야.
"부서진 건가?" "...네?" 순간 마서의 등이 움찔한 것은 다리를 다쳐 적에게 옮겨지면서 수중의 무기가 박살난 것까지 알려진 이 상황이 진짜 썩 좋지 않다고 생각됐기 때문이야. 좋기는 커녕 점점 나빠지고 있지. 아까 란슬롯의 제안도 떠올라. 물음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검서의 얼굴을 들여다봤지만 그 얼굴에 드러난 것은 공격적인 의도라기보단 방금 던진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쪽에 가까워보여. 이것도 검서가 표정을 잘 감추는 중이라면 별 소용없긴 한데. 여기서 거짓말하거나 숨겨서 달라질 것도 없어보이고 오히려 검서가 자신에게 호의-적어도 지켜주고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는 지금 고분고분한 태도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마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어. "네. 아까 요정과 싸우던 와중에." 대답을 들으면 금방 다시 갈길을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고개를 한번 끄덕인 검서는 이쪽으로 좀 더 다가오면서 다시 물었어. "그대의 검을 조금 더 가까이서 봐도 되겠나?"
그 말을 할 때 검서의 말투는 평소 성품이 곧고 정중하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조심스러웠지만 검서에 대해 잘 몰랐던 마서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 아까 전부터 이쪽을 모른 척 하고 있던 란슬롯만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뿐이었지. 발목에 응급처치를 했지만 아직 움직일 수 없는 마서가 잠시 고민하다가 앉은 자리에서 제 검을 풀어내 검서에게 건네자 다가온 검서는 그 검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았어.
마서의 검, 원탁을 찬찬히 살펴본 검서가 낮게 신음했어. "이렇게 부서지다니, 원탁이.." 보통 물리적인 공격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텐데. 그 멀린의 기술이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지만 심각한 검서 태도를 보자 왠지 대답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마서가 순순히 얘기해. 억지로 엑스칼리버를 발동하려고 했고, 그 영향으로 원탁이 부서진 것 같다고. "..엑스칼리버를? 어째서지?" 마서가 이어지는 말에도 순순히 대답한 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말려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다음 이어질 검서의 반응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해. '기사들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검서는 처음에는 당황한 듯 했어.
검서 입장에서 보자면 마서의 행동은 완전히 무모했어. 기사는 인간이 아니야. 물론 인간처럼 다치고 아파하긴 하지만 호수에서 조정을 거치면 거의 완벽하게 복구할 수 있어. 아니, 복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가능성을 떠나서 기사를 위해 왕의 증거인 원탁을 훼손시키는 것은 완전히 주객전도인 셈이야. 이대로 엑스칼리버가 고쳐지지 않으면 더 이상 기사를 사용할 수 없는 마서는 왕의 자격을 잃게 되.
물론 검서 또한 자신의 부하를 더없이 아끼고 이들을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주고 보좌해왔던 이들을 이런 일로 놓아버릴 수는 없어. 그건 그들도 바라지 않을 것을 알아. 그건 자신의 노력에도 부하 기사들의 충성에도 보답하지 못하는 행동이야. 이제껏 외적에게서 지키지 못했던 백성들, 스러져간 아서들을 보며 항상 결심했어. 언젠가 자기 손으로 이 나라를 통일해 누구도 억울하게 죽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까지 쭉 달려온 셈이야. 어릴 적부터 계속.
검서의 반응이 이상했는지 마서가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어. "기사는 인간이 아니다. 알고 있나?" 말을 건네자 마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알고 있으면서 엑스칼리버를 부쉈다는 거지..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제왕학을 배운 자신과 군인이었던 기서와 다르게 마서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고 들었어.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까지는 왕과 그 의미에 대해 한번도 깊이 생각해본 적 없었을 소년. 실제로 그 기세가 귀찮을 정도인 기교의 장에 비해 마법의 파는 이제껏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지. 검서는 뭐라 더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엑스칼리버를 마서에게 돌려줘. 검서라고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왕이 되고 싶을만큼 왕좌가 탐이 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고 그저 왕이라는 호칭에 휘둘리는 후보에게 브리튼을 맡기는 건 논외야. 그리고 검서는 이제껏 그런 아서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
검을 돌려준 검서가 뭔가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자 마서는 고개를 갸웃해. 내 엑스칼리버 그렇게 많이 부서진 건가? 그렇지만 기네비어 씨가 고쳐줄 거고.. 오히려 경쟁자의 검이 부서진 것이 유리한 게 아닌가? 가끔 이런 식으로 결판나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저기, 검술ㅇ..." "이 근처는 요정이 별로 없는 듯 하오." 어느 새 근처를 둘러보고 온 란슬롯이 불쑥 검서에게 보고했어. 검서는 고개를 끄덕였지.
란슬롯은 생각났다는 듯이 이쪽으로 다가왔어. "다리 좀 보겠소." 아까 마서와 검서가 처음 만난 곳은 요정이 드나드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부러진 발목에는 근처 나뭇가지를 동여매 부목의 모양새만 간신히 갖추고 자리를 뜬 거야. 란슬롯이 저런 말을 하는 자체가 이 곳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안심한 마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펴 란슬롯에게 보여줘. 부목을 푼 발목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어. "으아 이거 위험한데요 나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우는 소리를 하는 마서를 힐끗 본 란슬롯은 뭐라 말도 없이 마서의 발목을 움켜쥐더니 뚜뚝 소리나게 뼈를 맞춰. "!???!!!?" 간신히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는 것만은 면한-이라기보단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마서는 순간 느껴진 엄청난 아픔에 눈물까지 글썽거려가며 다리를 접어 제 발목을 쥐었어. "뼈를 맞췄소. 이제 부목만 잘 대면 걷는 걱정은 안해도 되오." 그런 엄청난 일을 하면서 당사자에게 말 한마디 할 수는 없었답니까? 그렁거리는 시야로 서포트 기사를 올려다보면 란슬롯은 왠지 즐거운 듯한 얼굴로 훌훌 자리를 뜨고 있어. 나 왠지 미움받는 거 아닌가? 워낙 많이 까여서 이걸 까임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보통 취급이라고 해야하는 지 알 수 없어진 마서는 왠지 슬픔을 느꼈어.
그 방법이야 어쨌든 란슬롯 말대로 마서의 발목은 아까보다 조금 편해졌어. 그렇다고 해도 걸어다닐 정도는 아니어서 업혀가는 신세는 여전했지만. 제 부하와 마서가 그러는 꼴을 말없이 보던 검서가 다시 출발하자고 말하자 마서는 검서가 아까 이상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을 떠올려. 검술의 성은 아까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걸까? 기사보다는 더 할말이 있는 눈치던데. 나이로 볼 땐 분명히 제 또래지만 앞서 가는 검서의 가끔 보이는 옆얼굴은 이제껏 실없는 소리 우는 소리 한번 안해봤으리라 생각될 정도야. 분명 마서 자신을 구해주고 도와주는 것도 그런 제 신념에 따른 결과겠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익을 고려한다면 다친 경쟁자는 두고가는 것이 맞는 거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만큼 왕좌에 관심도 많아 보이던데. 마서 자신이라면 왕좌니 뭐니 하는 건 아직도 좀 귀찮아서 하고 싶은 대로 구하겠지만.. 제 이익도 솔직하게 잡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신념이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검서 일행은 비경 걷기를 계속해. 가끔 갈래길이나 특이한 수풀 등이 나올 때마다 검서와 란슬롯이 주고 받는 말 소리를 빼곤 비경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어. 요정이 나오지 않으면 딱히 지형이 험한 것도 아니어서 별달리 위험한 것도 없어. 평탄한 걸음이 계속 되자 마서는 란슬롯의 등에 업힌 채로 깜빡깜빡 졸기 시작해. 태평하다기보단 오늘 하루 많은 일을 당해 몸이 지쳐있었던 데다 줄곧 아팠던 발목이 좀 편해지자 긴장이 풀리는 것도 있어서 반쯤은 기절한 것에 가까워. 그리고 란슬롯의 갑옷 딱딱하지만 햇볕 받아서 따뜻해..*´_` 아무리 그래도 라이벌 부하의 등에 업혀 골아떨어지는 것은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지만 그런 마서의 노력도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서는 한쪽 어깨 갑옷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졸아. 그런 마서를 눈치챈 검술의 성 두 사람은 아무리 도와주기로 했기로 거참 태평한 왕일세 생각하고 계속 제 갈길 가. 검서는 마서가 조는 와중에도 제 엑스칼리버는 떨어뜨리지 않고 꼭 잡고 있는 모양새를 주의깊게 보긴 했지만.
".....?" 어떤 소리에 깨어난 마서는 자기가 잠들었던 란슬롯의 등 위가 아니라 길 옆 큰 바위 옆에 기대어져 자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어. 이런, 너무 마음을 놓았나? 잠든 사이에 버려진 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려고 했던 마서는 엉겁결에 딛은 발목을 잡고 다시 웅크렸어. "윽..." 아직 걷는 건 무리야. 땅으로 팔을 짚자 제 옆에 얌전히 놓여진 엑스칼리버가 잡혀. 이게 대체... 뭐라고 말하려 했던 마서는 아까부터 저 앞쪽에서 나는 것이 자신을 깨운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려.
"란슬롯씨.. 검술의 성...?" "키에에에엑!!!" 공기를 찢는 각성요정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저쪽과 마서와는 거리가 꽤 있음에도 마치 귓전에서 울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려왔어. 그에 아랑곳 않는 듯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인 검서는 손에 든 검으로 요정의 어깨를 후려쳤어. "칫..!"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검서는 검을 거두어 뒤로 물러났어. 검서의 공격에 별 타격을 입지 않은 요정이 물러나는 검서에게 곧바로 손톱을 들이대자 검서는 간신히 검을 이용해 공격을 막아. "왕이여!" 요정의 뒤쪽에서 란슬롯이 다급하게 외쳐. 검서 쪽으로 다가오려고 하는 것 같지만 요정의 방해에 저지당해.
막 깨어난 마서도 지금 검서 일행이 밀리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어. 처음에는 마서네 각성요정도 일격에 해치운 이들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비경에서 각성요정을 처음 만났던 마서네에 비해 검서 쪽은 오는 길에도 각성요정을 많이 만났던 거야. 란슬롯의 실력이니 차례차례 해치워왔지만 그러는 동안 요정의 레벨도 꽤 올랐겠지. 그리고 이제 둘이서는 힘겨울 만큼 요정이 강해졌다는 건가. "이거 야단났네요.." 아직 각성요정은 마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어차피 검서네가 전멸하면 이 곳에 혼자 남겨질 수 밖에 없어. 어딘지 위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비경에서 요정이 나타나지 않길 빌며 구호를 기다리는 게 생존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마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기 검을 꽉 집어.
혹시나 해서 원탁을 열어보면 기사는 커녕 BC도 제대로 차있지 않아. 아마 이걸로 제대로 된 전투는 불가능할꺼야. 그치만 꼭 그럴 듯한 타격이라야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마서는 검집에서 검까지 조금 뽑아본 다음-입구가 망가졌는지 제대로 뽑히지도 않았다-검 손잡이가 아닌 검집 채로 손에 들었어. 투호 같은 것은 평소에도 영 취미가 안맞았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 위치보다 좀 더 요정 쪽으로 가야할 거야. 힘을 줄 수 없는 한쪽 발목 대신 한 팔과 성한 다리를 땅으로 짚어 밀어내면서 마서는 제 검을 냅다 요정에게로 던졌어.
들어간 데미지는 수치로 따지자면 아마 500대를 넘지 못할 숟가락 뎀이었지만 란슬롯과 검서 둘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던 요정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지. "마법의 파?!" 검서의 목소리보다 빨리 이쪽을 눈치챈 요정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마서를 쳐다봐. 눈이 마주쳤어. 마서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몸을 뒤쪽으로 뺐어. 이쪽이 요정의 주목을 끌어 둘에게 공격 기회를 주기로 한 것까진 좋은데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난다면 되려 이쪽이 요정에게 퇴치당할 판이야. 정말 어쩌다가 이런 일이 되어버렸을까.. 어울리지도 않는 일인데. 마서는 요정과 눈이 마주친채로 속절없이 아무 것도 잡지 않은 맨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어. 떨어져있던 거리가 무색하게 마서 쪽으로 빠르게 접근한 요정이 서슬퍼런 노성을 지르며 마서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어.
"예단검=폭풍참격!!" 요정이 이쪽으로 사나운 손톱을 세우는 것과 란슬롯의 스킬 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어. 힘찬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쥐고 등을 보이고 있는 요정에게 돌진한 란슬롯은 요정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이어 검서의 공격까지 받은 요정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천천히 부서졌어. 쓰러지는 요정 잔해에 흙먼지가 물씬 피어나 마서는 낮게 기침해. 그렇게 한동안 비경에는 세 남자의 가쁜 숨소리만 울렸어.
길었던 전투가 끝난다음 검서일행은 재빨리 자리를 옮겼어. 요정은 동종의 기름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속성이 있거든. 비경을 걷다보면 비슷한 요정을 많이 만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다른 요정을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큰 일일꺼야. 다행히 일행 중에 아까 다리를 다친 마서를 제외하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어. 마침 좋은 동굴을 발견한 검서네는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기로 해.
말이 동굴이지 커다란 바위가 바람의 작용인지 뭔지 해서 조금 안쪽으로 파여있는 정도였지만 사방 중 세군데가 막혀있는 모양이 일행에게 안정감을 줬어. 혹여 동굴 안에 요정의 잔해가 없는지 확인하고 자리를 잡자 란슬롯은 주위를 둘러보겠다고 다시 나갔어. 자기가 곁에 있었음에도 제 주군을 다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경각심을 주었던가, 딱히 그러지 않아도 왕의 주변에 위험이 없는 것을 살피는 것은 기사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지. 동굴 안의 안전이 확인되자 다리를 뻗고 앉아 에구구 하며 숨을 내쉬는 마서를 검서는 선 채로 가만히 바라봤어.
어찌하다보니 마서가 요정에게 던진 검은 검서가 주워서 손에 들고 왔어. 어찌하다보니? 아니야. 검서는 알고 있어. 그 왕을 상징하는 검이 진흙과 기계잔해로 범벅되어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져 있는 그 광경을 자신은 견딜 수 없었음을. 그리고 저 소년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할 수 있다는 것도. 검서는 입을 떼기 앞서 자기 감정을 조금이라도 고르기 위해 노력해.
"아, 제 검이네요." 가져와주셨군요. 검서가 흠집과 흙투성이로 더러워진 자신의 검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닫자 마서는 앉은 자세에서 손을 들어 검을 돌려받으려고 해. 그러나 마서의 예상과 다르게 검서는 얼른 마서의 검을 건네지 않아. "검술의 성?" 마서는 고개를 갸웃해. 검서라면 엑스칼리버를 탐낼 필요도 이유도 없어. 이제와서 둔기로밖에 쓸수 없는 고장난 엑스칼리버를 압수하려는 것도 아닐테고. 검서의 단단히 쥔 손 안에서 엑스칼리버가 그극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왠지 화를 내고 있는건가 생각했지만 한번 눈을 꾹 감았다 뜬 검서의 눈동자는 거짓말처럼 고요했어.
"그대는 항상 엑스칼리버를 이런 식으로 대하나?" "-이런 식?" 마서는 잠시 생각해. 오늘 하루만 해도 억지로 슈퍼 발동해서 고장내거나, 요정에게 막 던지거나 땅에 굴리거나.. 그 밖에 평소에도 땅에 그림을 그리거나 손 안닿는 불키는 스위치를 누르는 데 쓴다든지 과일을 따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난 마서는 "하하 뭐;" 하며 입을 다물어. 검서의 눈이 설핏 가늘어져. 이거 왠지 나 혼나는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려나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마서의 눈동자 속엔 일말의 죄책감이나 가책이 없어서 검서는 다시 손에 든 마서의 엑스칼리버를 꾹 쥐었어.
검서에게 엑스칼리버는 왕의 상징. 물론 기사를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원탁이 달렸으니 그 왕위를 실질적으로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도 되는 셈이지만 검서는 성격상 엑스칼리버의 의미를 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었어. 엑스칼리버는 부서질 수 있어. 그 것을 위해 원탁의 조정자 기네비어가 있는 거겠지. 검서 또한 엑스칼리버가 왕의 무기의 의미를 가지는 이상 이걸 방 안의 장식용 샤벨처럼 취급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해. 그러나 무기답게 사용한다는 건 하찮게 굴린다는 의미가 아니야. 거기다 왕의 무기답게 사용한다라면 그 의미가 또 달라지지. 엑스칼리버는 자신이 이 브리튼의 조각이나마 왕답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이며 각 아서가 가지는 유일한 왕의 상징이야. 이 왕의 상징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이 부분에서 그가 왕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드러난다는 거지.
검서라면 엑스칼리버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고 생각해. 물론 왕의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 원탁은 중요하지만 설사 엑스칼리버가 원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더라도 검서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을 거야. 왕의 상징. 이 검 한자루 때문에 뽑지 못한 왕들이 안달하고 반란을 일으켰어. 롯뜨 왕이 그런 것처럼 이 검 한자루만으로 왕이 결정된다고 말하는 건 물론 아니야.
어차피 페이가 처음에 100만 몇천번째 아서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도 엑스칼리버에 '선택'받은 부분은 검서 자신 안의 아주 미미한 부분이겠지. 그 모래알같이 작은 부분을 100만명 되는 아서들이 공유하고 있는 거겠고. 그러나 그 자격을, 채로 쳐내듯 골라 어떤 미세한 요소를 이유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다름아닌 이 검 한자루기 때문에 검서는 그 의미와 중요성을 존중하기 위해 엑스칼리버를 들고 싸우고 있어. 그러나 눈 앞의 소년은 어떨까. 오늘 하루동안 보인 마서의 모습은 엑스칼리버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조차도 존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왕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어떠어떠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뜻. 그리고 그 품은 뜻이야 어쨌든 이제껏 자신을 의지하고 왕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기사들. 백성들. 그 어느것 하나도 마서는 안중에도 없어 보여. 이런, 이런 왕이라니. 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타까움을 느껴.
자기를 응시하는 검서의 눈빛이 말없이 곧아서 마서는 금방 검서의 말이 단순한 자신의 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 아서, 너는 대체 왕좌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사실 마서에게 이런 질문은 전혀 낯설지 않았어. 당장 성 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성냥개비 퍼즐이라도 쌓고 있을라 치면 서포트 요정과 기사가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퍼부어대곤 했으니까. 왕, 이라. 자신은 평범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왕좌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불러 일으키는 모양이야. 마서는 잠시 대답에 앞서 다른 나라의, 그것도 이런 성실함 그 자체인 왕에게 이런 얘기를 해도 될까 망설여. 아마 둘의 길은 확연히 달라서 이제까지와 마찬가지 앞으로도 다시는 이어지지 않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해도 좋지 않나. 아무 것도 잡지 않은 손으로 무릎께의 옷자락을 쓰다듬으며 마서는 천천히 입을 열어.
"네, 전 제 마음대로 엑스칼리버를 대하고 있어요."
마서는 제왕학을 배운 적이 없어. 딱히 제왕학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남을 다스리기 위한 학문은 아예 뜻을 두지 않았지. 왕이 되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자기 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도 뽑은 후에도 없었어. 그렇지만 엑스칼리버는 그런 자신을 선택했어. 다스린다는 건 뭘까? 왕이 된다는 것은?
제왕학에 대해서는 마서도 들어본 적은 있어.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라지. 군학은 군대를 이끄는 학문, 행정학은 나라를 꾸려가기 위한 것이고. 그렇다면 제왕학을, 군학을, 행정학을 배우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까? 책에 적혀있는 데로 완벽하게 행동하면 나라는 풍요로워지고 백성은 번성하는 걸까? 마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엑스칼리버는 이런 자신보다 롯뜨 왕 등을 선택했겠지. 이론과 실제는 달라. 그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왕의 조건과 이 브리튼이 원하는 왕의 조건도 다른 셈이야. 작전과 음모와 소망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이 브리튼에서 마서는 결심했어. 앞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고 그저 자신인 그대로 있는 것이 자신의 왕의 길이라고.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라면 말은 좋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대답보다는 훨씬 듣기 그럴싸해. 그러나 마서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 엑스칼리버를 뽑은 그 날 전까지 한번도 백성을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그러던 것을 왕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180도 바꿔서 그렇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고. 부끄러울 것도 비참할 것도 없이 이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런 마서가 왕으로 선택받았던 것도 사실. 마서 자신조차 몰랐던 왕의 조건을 엑스칼리버가 알아보고 선택한 거라면 그야말로 자신은 지금의 상태를 버릴 필요 없어. 마서는 브리튼을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마서 자신으로써 행동하고 기뻐하고 분노할 뿐이야. 군왕으로서의 자비나 위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일 수 있는 관용과 측은지심으로 브리튼을 대할 거야. 해야 할 때라는 건 왕으로서가 아니라 응당 인간으로써 해야 할 때야. 우는 소리도 하고 도망도 칠 거야. 그건 무척이나 인간인 마서답지. 태어날 때부터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 있을까? 그런 고귀한 사람에게 나라는 다스림받는 걸까? 마서는 고개를 저었어. 백만명의 '평범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 그걸로 충분히 멋지지 않을까?
"당신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요." 수많은 아서들 중에서도 당신은 '본래부터 왕으로써 준비된 것' 같거든요. 말을 마치자 마서는 더는 할 말도 없다는 듯 다리를 모으고 앉아 태연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검서는 다소 놀란 것 같은 표정-어쩌면 화난 것도 같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어.
사실 검서는 마서가 생각했던 것만큼 마서에게 경악하거나 경멸을 품지는(!) 않았어. 그보다 검서가 느낀 것은 어느 쪽이냐면 깜짝 놀랐다에 가까워. 확실히 마서의 대답은 의외야. 검서는 이제껏 역사책 속에서나 실제로나 '백성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왕들을 많이 봤어. 멀리는 100만의 아서들 중에서, 또 가깝게는 저 11인의 지배자가 내세운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그들 모두가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지금으로썬 불가능하고 먼 훗날에 역사 속에서나 가능할테지. 그리고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검서는 자기가 그것까지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자신. 다만 검서는 의문을 느꼈을 뿐이야. 그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일, 다시 말해 백성으로인해 벌어진 일이라면 왕의 책임은 대체 어디에 있지?
마서의 대답이 의외라고 했었나? 그래 의외야. 정말 완벽하게 의외였어. 눈 앞에 있는 이 책임감없어 뵈고 느긋한 왕이 자신과 똑 닮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처음엔 검서도 그렇게 생각했어. 옛 사람들이 만든 올바른 학문대로, 정해진 길대로 따라가는 바른 왕이 될 거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검서가 보고 배웠던 많은 책들은 지금 상황의 모든 경우의 수가 적혀있는 예언서가 아니야. 다만 '이런 경우에는 대략적으로 이런 조치를 취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가 한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책에 가깝지. 결국 상황에 맞춰서 이리 하겠다 결정하는 것은 왕인 검서 자신이야. ―게다가, '마음대로' 그 외에 더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검서가 어릴 적부터 제왕학이니 뭐니 왕이 될 준비를 해온 것은 부모가 거기 놓아준 레일이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의무감? 사명감? 헛소리. 다른 사람들이, 혹은 제 부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검서는 왕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있지는 않아. 검서는 바위에서 검을 뽑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해. 그 모든 공부와 훈련과 다른 차등한 것을 버리고 쉼없이 달려왔던 길은 이 순간을 위한 것임을. 다름 아니라 아주 어릴 적 왕과 영웅의 무용담을 귀로 들어왔을 때부터 자신은 이 눈부시도록 오롯하고 황홀한 왕좌를 마음 속 깊이 소원해왔음을!
결국 이러니저러니해도 검서 또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왕을 하고 있다는 거야. 검서는 마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어.
"마법의 파," 네, 나는 이런 사람이니 훈계도 경멸도 소용없는데요~ 등등의 말을 주억거리던 마서는 검서가 묘하게 고무된 태도로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를 말하자 할 말을 잃었어. "사실 백성의 민원을 받아들이는 일도, 서류 작성도, 이러저러한 사업 추진도 좋아한다. 나야말로 내 마음대로 왕을 하고 있는 셈이군." 이런 말은 쑥쓰러워서 아무에게도 하지 않네만.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네에..." 민원 수리도 서류 작성도 사업 추진도 좋아하지 않는 마서는 조용히 뭐 그렇네요, 같은 말만 덧붙였어. 그렇다 해도 그 검술의 성이 이런 사람일 줄이야. 그 복장-마치 나 왕이오 하고 주장하는 듯한 망토나 뭐..-이나 말투 태도를 볼 때 왕좌에서 경전이나 줄줄 읊으며 옛 왕이 가로되 어쩌구 저쩌구, 무릇 왕이란 미주알 고주알 이런 거나 할 사람으로 보였는데 말이야. 생각보다 이해 못할 사람은 아닌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왕의 업무에 대해서 읊다가, 마서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을 눈치채자 큼큼 하며 모습을 가다듬는 검서의 모습이 좀 다르게 보여 마서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 큭큭 웃었어.
"...? 그대 잠깐만." "네?" 뭘 발견한 건지 갑자기 다가온 검서가 옆머리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내자 마서는 다시 고개를 갸웃해. "상처가 났군. 요정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검서가 만진 뺨에 지금까지는 몰랐던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아까 요정 손톱에 긁힌 것 같아. 워낙 얕은 상처라 다쳤을 당시도 지금까지도 느끼질 못했던 거야. 여자애도 아니고 얼굴에 상처는 뭐.. 그치만 아파요 다쳤어요;ㅅ; 버릇처럼 투덜거리는 마서를 잠시 본 검서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걷어낸 머리칼을 만지작거렸어. "그대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좀 더 몸을 소중히 여겨줘." 그리고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이 저런 왕(자님) 대사. 말을 건넨 것이 예쁜 이성도 아니건만 순간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진 마서는 얼굴 표정을 감추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 네.." 대답했어. 막상 말을 건넨 상대는 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이 녀석 천연이구나.. 검술의 성에 대한 의외의 사실 또 하나 추가했어.
그리고 검술의 성 제일의 기사이자 왕의 오른팔인 란슬롯 경이 주인과 덤이 기다리는 동굴로 돌아가자마자 본 것은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얼굴을 들고 있는 마서와 그 얼굴을 빠져드는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제 주인의 모습이었어. "왕, 왕이여 이게.." 대체 무슨..? 간신히 떨리지않게 밀어넣은 목소리를 들은 검서는 아무렇지 않게 마서 얼굴의 상처를 언급했고 마서는 뭔가 찔리는 사람-사실은 그제나 이제나 란슬롯 등에 업혀갈 앞으로의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처럼 고개를 숙였어. 그 뒤로는 제 주인이 마치 어느 샌가 마서와 절친한 친우사이나 된 것처럼 손에 들었던 마서의 흙투성이 엑스칼리버를 제 망토로 꼼꼼히 닦아 내밀었는데, 서계실 적이나 걸을 적이나 근사하게 휘날려 늘상 왕의 위엄을 보여주던 망토가 진흙과 모래투성이가 된 것을 란슬롯 경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어.-저 왕이 뭐라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훗날 왕에게 "마법의 성에 대해 내가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듣기 전에도 들은 후에도 란슬롯에게 의문이 되어 남았지. 막상 당사자들은 후에 등장한 란슬롯에게는 일언반구도 끼워넣지 않고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왕의 오른팔의 직감에 따르자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란슬롯의 심기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란슬롯에게 업히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마서의 삭신에 일말의 불편함을 남겼어.
여튼 그간의 고생에 비해 비경을 모두 지나 마서의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전에 없이 평탄했어. 늦은 시간임에도 비경 앞까지 마중나와 기다리던 마법의 파를 보고 마서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곧 기쁘게 웃었어. 대체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큰일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요정과 기사에게 꾸중듣긴 했지만. 멋대로니 어쩌니 하던 것에 비해 신망이 깊지 않은가. 그간 신세 많이 졌다고 인사하면서 두 왕은 다른 듯 닮은 서로의 길을 떠올리고 잠깐 시선을 마주쳤어. 그러곤 둘 다 엑스칼리버가 뽑은 왕의 조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똑 닮았기 때문에 앞으로 절대 다시 포개지지 않을 서로의 궤적. 굽히거나 휘기엔 피차 아쉬울 곧은 길.
성으로 돌아온 두 아서는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자기 방침을 계속해가. 그들 스스로는 다시 만나 이런 식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일은 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둘은 아발론이나 마녀의 처우나 여러가지 면에서 부딪치게 돼. 그리고 어느 한쪽도 무조건적인 강요나 양보없이 맞서고 행동하면서 나름 치우침없이 브리튼을 지배하게 되지. 이 때가 브리튼의 다시 없을 황금기인지 어떤지는 먼 후에나 알 일이고 둘 사이에 또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후에도 모를 일이니 여기서는 일단 그랬다는 이야기. 끝!